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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료구소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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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치료구소쿠는 센고쿠 시대 도사(土佐)의 다이묘였던 조소카베 구니치카가 고안한 것으로 알려진 조소카베 가문의 가신단을 의미한다.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이들을 활용하여 시코쿠 통일을 달성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과 세키가하라 전투 패배로 조소카베 가문이 몰락하면서 이치료구소쿠는 야마우치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된다. 야마우치 가문은 이치료구소쿠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들을 향사(郷士) 신분으로 격하시켰으며, 이후 이치료구소쿠는 《도사 이야기》에 등장하며, 조소카베 군의 군장으로서 고두형 투구, 갑옷, 와키자시 등을 착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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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료구소쿠
개요
명칭일령구족 (一領具足)
로마자 표기Ichiryō gusoku
구분센고쿠 시대의 농민 병사 계층
시대센고쿠 시대
상세 정보
기원도사국의 센고쿠 다이묘인 조소카베 모토치카가 농민에게 무기를 갖도록 허용하면서 시작됨.
역할평소에는 농업에 종사하다가 전쟁 시에는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여.
특징반농반사의 성격, 전투력은 정규 병사에 비해 떨어졌으나, 수가 많아 전력에 큰 보탬이 됨.
어원"한 벌의 갑옷(一領具足)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의미에서 유래.
계층농민 출신이지만, 일반 농민보다는 지위가 높았으며, 전리품 분배 등에서 우대받음.
해체조소카베 가 멸망 후,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해체됨.
역사적 배경
센고쿠 시대하극상이 만연하고, 다이묘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
병력 부족다이묘들은 전쟁에 필요한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
농민 동원농민들을 징병하거나, 무기를 갖도록 허용하여 병력으로 활용.
조소카베 모토치카도사국을 통일하고, 시코쿠 지방을 제패하기 위해 일령구족을 적극 활용.
영향
조소카베 가의 전력 강화일령구족은 조소카베 가가 시코쿠 지방을 제패하는 데 큰 역할을 함.
농민의 지위 상승일령구족은 농민들에게 무기를 소지하고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사회적 지위 상승에 기여.
센고쿠 시대의 사회상 반영일령구족은 센고쿠 시대의 혼란스러운 사회상과 다이묘들의 병력 확보 노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2. 역사

이치료구소쿠를 처음 고안한 것은 도사의 센고쿠 다이묘였던 조소카베 구니치카(長宗我部国親)[3]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아들 조소카베 모토치카(元親)가 이를 적극적으로 운용하여 시코쿠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모토치카는 강력한 이치료구소쿠 병력을 바탕으로 시코쿠를 제패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로 인해 영지가 크게 축소되어 도사 1국만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모토치카의 뒤를 이은 넷째 아들 조소카베 모리치카(盛親)가 서군(西軍)에 가담했다가 패배하면서, 조소카베 가문은 영지를 모두 몰수당하고 개역되었다.

조소카베 가문의 몰락 후 도사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야마우치 가즈토요(山内一豊)에 대해, 조소카베 가문의 옛 가신들, 특히 이치료구소쿠 세력은 강하게 반발했다. 다케우치 소에몬(竹内惣右衛門)[4]을 중심으로 한 이치료구소쿠는 우라도 성(浦戸城) 인도를 거부하고 옛 주군 모리치카에게 영지 반환을 요구하며 봉기했다(우라도 잇큐). 야마우치 가문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으며[5], 이 과정에서 273명의 이치료구소쿠가 처형되고 그 목은 소금에 절여져 오사카이이 나오마사에게 보내졌다고 전해진다. 이후에도 다카이시 사마노스케(高石左馬助)를 중심으로 한 다키야마 잇큐 등 이치료구소쿠의 저항이 이어졌으나 모두 진압되었다.[6] 야마우치 가문은 조소카베 옛 가신단을 번의 무사 계급인 상사(上士)보다 낮은 신분인 향사(郷士, 또는 하사(下士))로 편입시켜 차별적인 지배 체제를 구축했으며, 이는 이후 도사 번 내 갈등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다만 야마우치 가문은 회유책의 일환으로 옛 명문가 출신 일부를 상사로 등용하거나, 향사 중에서 일부를 상사 대우를 받는 시로후다(白札)로 삼는 등 일부 탄력적인 제도를 운용하기도 했다.

2. 1. 기원과 발전

이치료구소쿠(一領具足)는 평시에는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으로 생활하다가, 영주의 동원령이 내려지면 한 벌(一領)의 구소쿠(具足, 무기와 갑옷)를 갖추고 즉시 소집에 응하는 병사를 의미한다. 이들은 갑작스러운 소집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농사일을 할 때도 항상 창과 갑옷을 논밭 옆에 두었기 때문에 '이치료구소쿠'라고 불리게 되었다. 또한, 정규 무사가 예비용까지 포함해 두 벌의 구소쿠를 갖춘 것과 달리, 이들은 예비 없이 단 한 벌의 구소쿠만 소유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이러한 반농반병(半農半兵)의 성격 때문에 이치료구소쿠는 통상적인 무사가 수행해야 할 의무에서 일부 면제되었다.

농업에 종사하여 신체가 건장하고 집단 행동에 익숙한 이들이 많아 병사로서의 자질은 높은 수준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반농반병이라는 특성상 농사일이 바쁜 농번기에는 동원이 어려웠고, 장기간 이어지는 전쟁에는 참여하기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병농분리를 통해 농번기에도 대규모 군사 동원이 가능했던 오다 노부나가 세력의 군사 제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2. 2. 조소카베 가문의 몰락

이치료구소쿠를 처음 고안한 인물은 도사(土佐)의 센고쿠 다이묘였던 조소카베 구니치카(長宗我部国親)로 알려져 있다.[3] 하지만 이치료구소쿠를 가장 적극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용한 것은 구니치카의 아들이자 시코쿠(四国) 통일을 달성한 조소카베 모토치카(元親)였다. 그는 강력한 이치료구소쿠를 기반으로 시코쿠 통일을 이루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시코쿠 정벌로 인해 영지가 크게 줄어들어 도사 1국만을 간신히 유지하게 되었다.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모토치카의 뒤를 이은 넷째 아들 조소카베 모리치카(盛親)가 서군(西軍)에 가담하면서, 전투 후 조소카베 가문은 영지를 모두 몰수당하고 개역되었다.

조소카베 가문이 몰락한 후, 도사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야마우치 가즈토요(山内一豊)의 등장을 조소카베 가문의 옛 가신들은 환영하지 않았다. 다케우치 소에몬(竹内惣右衛門)[4]을 중심으로 한 이치료구소쿠 세력은 야마우치 가문에게 우라도 성(浦戸城) 인도를 거부하며, 옛 주군인 모리치카에게 영지의 일부(도사 절반이라는 설도 있음)를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봉기(우라도 잇큐, 浦戸一揆)를 일으켰다. 가즈토요는 동생 야마우치 야스토요(山内康豊)를 보내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이치료구소쿠는 우라도 성에서 농성하며 저항했지만, 성 내부의 배신으로 인해 성문을 열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5] 이 과정에서 273명의 이치료구소쿠가 처형되었으며, 그들의 목은 소금에 절여져 오사카(大阪)에 있던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에게 보내졌다고 전해진다.

그 후에도 다카이시 사마노스케(高石左馬助)를 중심으로 한 다키야마 잇큐(滝山一揆) 등 이치료구소쿠의 저항이 이어졌으나, 야마우치 가문은 이를 모두 진압하였다.[6] 야마우치 가문은 이치료구소쿠를 중심으로 한 조소카베 옛 가신단을 번의 무사(조시, 上士)보다 낮은 신분인 고시(郷士, 下士)로 편입시켜 차별적인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 다만, 야마우치 가문은 회유책의 일환으로 옛 명문가 출신 일부를 상사로 등용하거나, 훗날 향사 중에서 일부를 상사 대우를 받는 시로후다(白札)로 삼는 등 일부 탄력적인 제도를 운용하기도 했다.

2. 3. 야마우치 가문의 통치와 저항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조소카베 모리치카가 서군에 가담했다가 패배하면서 조소카베 가문은 영지를 몰수당하고 개역되었다. 이후 도사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야마우치 가즈토요를 조소카베 가문의 옛 가신들은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3][4]

다케우치 소에몬을 중심으로 한 이치료구소쿠 세력은 우라도 성을 야마우치 가즈토요에게 넘겨주기를 거부하고, 옛 주군 모리치카에게 영지의 일부(도사의 절반이었다는 설도 있다)를 돌려줄 것을 요구하며 봉기했다(우라도 잇큐). 가즈토요는 동생 야마우치 야스토요를 보내 이를 진압하게 했다. 이치료구소쿠는 우라도 성에서 농성하며 저항했으나, 성 안에서 배신자가 나와 성문을 열고 항복하고 말았다.[5] 이 과정에서 273명의 이치료구소쿠가 처형되었으며, 그들의 목은 소금에 절여져 오사카에 있던 이이 나오마사에게 보내졌다고 전해진다.

그 뒤에도 다카이시 사마노스케를 중심으로 한 다키야마 잇큐 등 이치료구소쿠의 저항이 계속되었으나, 야마우치 가문은 이를 모두 진압했다.[6] 이후 야마우치 가문은 이치료구소쿠를 중심으로 한 조소카베 옛 가신단을 번의 무사 계급인 상사(上士)보다 낮은 신분인 향사(郷士, 또는 하사(下士))로 편제하여 차별적인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 다만, 야마우치 가문은 회유책도 병행하여, 옛 명문가 출신 일부를 상사로 등용하거나 향사 중에서 일부를 선발하여 상사와 동등한 대우를 받는 시로후다(白札)로 삼기도 하였다.

2. 4. 향사(鄕士) 신분과 차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했던 조소카베 모리치카가 패배하면서 조소카베 가문은 영지를 몰수당하고 개역되었다. 이후 도사의 새로운 지배자로 야마우치 가즈토요가 들어왔으나, 조소카베 가문의 옛 신하들, 특히 이치료구소쿠는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케우치 소에몬(竹内惣右衛門)[4]을 중심으로 한 이치료구소쿠 세력은 야마우치 가문에 우라도 성(浦戸城) 인도를 거부하고, 옛 주군 모리치카에게 영지의 일부를 돌려줄 것을 요구하며 봉기했다(우라도 잇큐, 浦戸一揆). 이에 가즈토요는 동생 야마우치 야스토요를 보내 진압에 나섰다. 이치료구소쿠는 우라도 성에서 농성하며 저항했지만, 성 내부의 배신으로 결국 항복하였다.[5] 이 과정에서 이치료구소쿠 273명이 처형되었고, 그들의 목은 소금에 절여져 오사카이이 나오마사에게 보내졌다고 전해진다.

우라도 잇큐 이후에도 다카이시 사마노스케(高石左馬助)가 이끄는 다키야마 잇큐(滝山一揆) 등 이치료구소쿠의 저항이 계속되었으나, 야마우치 가문은 이를 모두 진압하였다.[6] 반란을 진압한 야마우치 가문은 이치료구소쿠를 중심으로 한 조소카베 옛 가신단의 지위를 번의 상급 무사인 상사(上士) 아래인 향사(郷士) 또는 하사(下士)로 격하시켰다. 이는 이후 도사 번 내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신분 차별의 배경이 되었다. 다만 야마우치 가문은 회유책의 일환으로 조소카베 가신단 중 명망 있는 가문의 일부를 상사로 등용하거나, 향사 중 일부를 상사 수준의 대우를 받는 '시로후다'(白札)로 삼기도 하였다.

3. 《도사 이야기》에 보이는 이치료구소쿠

에도 시대의 기록인 《도사 이야기》(土佐物語)에서 이치료구소쿠라는 단어 자체는 권제6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치료구소쿠의 활약상이 처음 보이는 것은 권제16 「도사 국의 검지와 다키 소젠」(土佐国検知 籠宗全の事)으로, 게이초 4년(1599년) 12월 30일 밤에 다키 소젠(籠宗全)의 집에 이치료구소쿠가 불을 질러 소젠을 불태워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치료구소쿠를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는 부분은 권제20의 「야마우치 가즈토요 도사 국에 배령되고 우라도 잇큐가 일어나다」(山内一豊土佐国拝領 浦戸一揆の事)이다.

4. 이치료구소쿠의 장비 (조소카베 군 군장)


  • 고두형 투구
  • 갓지 고로
  • 갑옷 속옷
  • 와키자시
  • 허리끈
  • 모모히키

5. 평가

농민으로서 농업에 종사했기에 신체가 건장한 자들이 많았고, 집단 행동에도 능숙하여 병사로서 높은 수준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반농반병(半農半兵)이라는 성격상 농번기에는 동원이 곤란했고, 장기간에 걸친 전쟁 수행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병농분리를 통해 농번기에도 대규모 군사 동원이 가능했던 오다 세력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는 군사 제도였다.

6. 참고 문헌


  • 야마모토 다이, 〈ちょうそかべ 정권의 변질과 이치료구소쿠〉, 《일본 역사》 117호, 1958년.
  • 야마모토 다이, 〈이치료구소쿠와 달리미〉, 《역사 수첩》 11권 7호, 1983년.
  • 히라이 카즈사, 〈이치료구소쿠 고찰〉, 《화원사학》 36호, 2015년.

참조

[1] 서적 Samurai Armies 1467–1649 Bloomsbury Publishing
[2] 문서 일본 무로마치 중기에서 아즈치 모모야마 시기에 걸쳐 보이는 사무라이 신분의 일종으로 원래는 농업에 종사하던 묘슈(名主) 등의 유력 백성이었는데, [[슈고 다이묘]](守護大名)나 재지 [[고쿠진]] 영주(国人領主) 등과 주종관계를 맺고 사무라이 신분을 얻었다. 지자무라이들은 사무라이 신분을 얻어 중앙의 [[슈고]](守護)나 재지 고쿠진과 같은 령국 지배자 아래서 소영주가 되는 것을 지향하고 있었지만 지배자의 입장에서 보면 힘 있는 재지 백성에 지나지 않았고, 쓰지 잇큐(土一揆)의 시대에는 잇큐의 중핵으로써 활약하며 촌락에서 이탈해 자신의 지위를 무사로 특화시키는 지자무라이들도 생겨났고, 센고쿠 시기에는 센고쿠 다이묘나 그 막하 대신(大身)급 고쿠진 영주의 가신으로 계열화되기도 하였다. 지자무라이층은 이들 센고쿠 다이묘나 고쿠진 영주로부터 가지시(加地子)의 징수권을 보증받는 대신 가신이 되어 전시에는 군역의 의무를 졌다. 에도 시대의 다이묘(大名) ・ 하타모토(旗本) 가운데는 이러한 지자무라이 출신에서 비롯되어 하나의 가문을 이룬 자도 적지 않았으나, 대다수의 지자무라이들은 사무라이 신분이면서도 촌락에 거주하면서 촌락 지도자로써 이어나갔고, 이러한 지자무라이들은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의 병농분리(칼 수거령 등)에 의해 향사(郷士)를 거쳐 백성 신분으로 돌아가거나 직책의 이름만 바꾸어 촌락의 지도자 정도의 지위로 변모하는 경우도 많았다.
[3] 문서 가신인 깃타 다카요리(吉田孝頼)였다는 설도 있다
[4] 문서 에도 시대의 《도사 이야기》(土佐物語) 권제20 「야마우치 가즈토요 도사 국에 배령되고 우라도 잇큐가 일어나다」(山内一豊土佐国拝領 浦戸一揆の事) 편에서는 「다케노우치 소'''자'''에몬」(竹ノ内惣'''左'''衛門)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5] 문서 《도사 이야기》에 따르면 다케우치 소에몬은 이치료구소쿠 대장 8인이 전사한 뒤에 "무엇이 아까운 목숨인가"(何の為に惜しむ命ぞ)라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출격해 전사하였다고 되어 있다.
[6] 문서 다카이시 사마노스케는 패색이 짙어지자 잇큐에 가담했던 농민들을 버리고 [[사누키국|사누키]](讃岐)로 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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