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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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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사는 일본 역사에서 군사적 역할을 담당했던 계층으로, 시대에 따라 그 기원과 역할, 신분 등이 변화해 왔다. 무사의 기원에 대해서는 재지영주설, 직업관인설, 국아군제설 등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며, 무사의 신분은 사무라이와 종사로 나뉘었다. 무사들은 군사적 역할뿐 아니라 정치, 행정, 경제 분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무사도는 그들의 가치관과 행동 양식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발전했다. 무사는 일본 문화 전반에 걸쳐 다양한 영향을 미쳤으며, 한일 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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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
개요
갑옷을 입은 사무라이
갑옷의 한 형태인 당세구족을 입은 사무라이.원래 사진은 펠리체 베아토가 1860년대에 촬영한 것으로, 손 채색 사진이다.
정의
부시 (무사)ja
관련 문서
관련 문서무사 (동음이의)

2. 역사적 배경

나라 시대에 이미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운 무사가 존재했다. 이들은 헤이시 정권가마쿠라 시대 이후 실질적으로 정권을 주도했고, 막말까지 일본의 역사를 이끄는 중심적인 존재였다. 근대에 들어 무사라는 존재 자체는 폐지되었지만, 초기 메이지 정부 구성원 대부분이 전직 무사였다.

고대・나라 시대에는 무예, 특히 도술과 궁술에 뛰어난 자를 '무사' 또는 '무예지인'이라 불렀다. 이들은 전사로서 군사적으로 활약하여 왕권으로부터 중요시되었고, 특히 뛰어난 전사는 '무예지사'라고도 불렸다. 사카가미 씨나 오노 씨와 같이 진수 장군을 배출하는 특정 군사 귀족은 '장종'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장종은 겐케이천황의 난을 진압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10세기에는 군사 귀족이 소멸하게 되었다.

무사라는 호칭은 왕권 편에서 반란을 진압하는 자에게 사용되었고, 지방에 거점을 두고 국가·왕권에 반란을 일으키는 자는 '병'(つわもの), '무부'라고 불렀다. 즉, 왕권과의 관계에 따라 명칭이 명확히 구분되었다. 그러나 10세기경, 텐케이의 난을 계기로 그 잔혹성 때문에 반란자와 함께 난을 진압한 왕권 측의 무사도 혐오 대상이 되었고, 무사와 병(つわもの)의 혼동이 일어나 무사도 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2. 1. 무사 기원론

일본 역사에서 무사가 어떻게 탄생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 재지영주설: 메이지 시대의 역사학자 미우라 히데유키(三浦周行)가 주장한 설이다.
  • 직업관인설: 사토 신이치(佐藤進一), 우와요코테 마사타카(上横手雅敬), 도다 요시미(戸田芳実), 다카하시 마사아키(高橋昌明) 등이 주장한 설이다.
  • 국아군제설: 일본 고대 말기에서 중세 초기(10세기 - 12세기)에 성립된 국가군사제도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각 학설은 저마다 약점을 가지고 있다. 재지영주설은 겐지, 헤이시, 후지와라 씨처럼 조정이나 권문과 밀접하게 연결된 상급 무사들의 기원을 설명하기 어렵다. 직업관인설은 군사 귀족이나 무예라는 기술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지만, 경제적 기반인 '영지'나 주종관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2. 1. 1. 재지영주설

메이지 시대의 역사학자 미우라 히데유키(三浦周行)가 제창한 설로, 일본 무사가 지방의 무장 영주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설에 따르면 지방에서 일어난 신흥 영주층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장하였고, 이들이 무사단으로 조직화되었다. 이들은 수도에서 지방관 등으로 파견된 하급 귀족 · 하급 관인층을 우두머리로 추대하여 더 큰 조직을 이루었고, 더 나아가 황족 출신의 명문 귀족이 상위 무사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본다.[17]

하지만 이 학설에는 무사단(武士団)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겐지(源氏), 헤이시(平氏), 후지와라 씨(藤原氏)의 존재와 고대 지배 계급으로서 조정이나 인(院), 셋칸케 등 권문(権門)과 밀접하게 연줄이 있던 상급 무사들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다는 난점이 있다.

20세기 말에는 무사가 재지영주로부터 발생했다는 고전 학설은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여겨졌고, 21세기 초의 고등학교 일본사 교과서에서도 무사의 발생을 재지영주와 관련짓는 서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2. 1. 2. 직업관인설

사토 신이치(佐藤進一), 우와요코테 마사타카(上横手雅敬), 도다 요시미(戸田芳実), 다카하시 마사아키(高橋昌明) 등이 제창한 설로, 수도에 머무르던 무사, 즉 "(전투) 기술직 관인"에서 무사의 기원을 찾는다. 여기서 "기술직 관인"은 군사 업무를 전담하고 이를 가업으로 삼아 전수한 귀족들, 즉 세이와 겐지나 간무 헤이시와 같은 군사 귀족 및 하급 관인층을 말한다.[18]

헤이안 시대 후기, 장원공령제 아래에서 장원 영주(유력 귀족이나 사찰, 혹은 인세이 시기의 상황)나 지방 관청과 유착하여 영지 경영자로서 발전했다고 본다. 즉, 무사단 조직은 아래에서 위가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헤이안 시대 후기, 조정의 지방 지배가 지방관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체제로 바뀌면서 수령의 수탈에 대한 부농층의 무장 습격이 잦아졌다. 지방관들은 과거 에미시 등 북방 종족과 전투 경험이 있는 수령 역임자나 그 자녀들로, 중앙에서 밀려난 귀족 및 지방관 자격을 갖춘 여러 다이후들을 지역 분쟁 진압에 동원했다. 이들은 훈공의 대가로 조정으로부터 공전(公田) 경영을 위임받았지만, 훈공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반란(대표적으로 다이라노 마사카도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을 일으켰다. 이를 진압한 다이라노 사다모리 · 후지와라노 히데사토 · 미나모토노 쓰네모토 등의 집안은 무예를 가업으로 하는 집안, 즉 무문(武門)으로써 조정으로부터 공인받고 훗날 무사라고 불리는 집단의 시조격인 존재가 되었다.[19]

초기 무사들의 경제 기반은 조정으로부터 위탁받은 공전에 있었지, 그들 자신이 영지를 경영하는 영주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1세기 중반부터 장원 개발이 가속화되면서 국가 소유의 공령과 장원 간에 무력 분쟁이 잦아졌고, 현지의 경찰이자 재판 책임자로서 장원 책임자나 공령의 지배자인 지방관으로써 군사 분쟁에 대응할 수 있는 무사가 임명되는 경우가 잦아지면서 무사들은 자연스럽게 영지 경영자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직업관인설은 군사 귀족들을 기원으로 하는 무사나 관료 직업적 기술로서의 무예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지만, 그들의 직업적 기술을 뒷받침할 경제적 기반으로써의 '영지'나 인적 기반이 필요한 주종관계에 대한 설명이 아주 약하다는 약점이 있다.

왕조 국가 체제에서는 사위, 오위 정도의 수령에 임명되는 실무 관인인 하급 귀족을 주대부(しょだいぶ)라 하고, 상급 귀족이나 주대부를 섬기는 육위 정도의 기술 관인이나 가인(歌人)을 사무라이(さむらい)라고 불렀으며, 그들이 행정 실무를 담당했다. 무예의 실무, 기술 관인인 무사도 이 두 신분에 걸쳐 있었고, 교토세이와 겐지나 간무 헤이시 등의 군사 귀족이 주대부 신분이었고, 대다수의 지방 무사가 사무라이 신분이었다. 지역 사회에서는 국가에 군림하는 수령이 주대부 신분이었고, 그것을 섬기며 지배 계층을 형성한 것이 사무라이 신분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무사의 발생 시기로부터 수세기 후인 17세기 초의 일포사전에, “사무라이”는 귀인을 의미하고, “부시”는 군인을 의미한다고 구별하여 기록되어 있는 것에도 그 일단이 나타나 있다.

2. 1. 3. 국아군제설

일본의 고대 말기에서 중세 초기(10세기 - 12세기)에 성립된 국가군사제도를 가리키는 개념으로써 율령국가가 왕조국가로 변질되고 조정에서 지방의 행정권을 지방관인 수령에게 위임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것이 국가군제이다.[20] 율령지배체제가 무너지고 조정이 조세 징수를 비롯한 지방의 행정권을 수령에게 집중시키는 과정에서, 수령은 고쿠가(国衙) 기구 내부의 소(所)를 중심으로 지방 권력을 재편성하고 그 아래의 하급 토착수령인 군지(郡司)나 부호층은 토지 경작 및 경영을 다시 수령으로부터 조세 의무와 함께 위임받은 다토부묘(田堵負名)로써 고쿠가 지배 조직에 편입되었다. 한편으로 「소」에 배속된 재청관인(在庁官人)으로써 고쿠가 행정의 한 축을 맡게 되었다. 간표(寛平)에서 엔기(延喜) 시대에 이르는 동안, 도고쿠에서 조세 문제에 반발해 일어난 반란에 대해 조정은 지방관이 군사를 동원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추포관부(追捕官符)를 고쿠가에 발급해 병사 징발 등의 재량권을 지방관에게 주었고, 이를 근거로 자신이 맡은 구니 안의 다토부묘들을 병사로써 징발할 수 있게 하였다. 지방관은 다시 이들 병사의 지휘권을 고쿠오레이시(国押領使)· 스이호시(追捕使)에게 위임하여, 오레이시가 이들 병사를 조직하여 추포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이러한 반란을 진압한 훈공자(자신들이 가진 전지 경영에 경제 기반을 두었고, 수령에 속하여 치안 유지활동에 종사하였던 다토부묘들 포함)야말로 초창기 무사라는 것이다. 도고쿠에서 시작한 국가군제는 쇼헤이(承平) 연간(930년대)에 세토 내해에서 발호하게 된 해적에 대한 진압 과정에서 조정은 세토 내해 여러 지방에 도고쿠의 오레이시와 같은 게고시(警固使)를 두어 추포관부를 받고 병력 동원 권한을 가진 수령 아래서 유사시 병력 지휘를 맡게 함으로써, 도고쿠와 같은 국아군제가 사이고쿠에도 세워졌다.

2. 2. 무사의 발전

나라 시대에 이미 존재했던 무사는 그 군사력을 바탕으로 급속히 세력을 키워 헤이시 정권·가마쿠라 시대 이후에는 실질적으로 정권을 주도하는 사회를 구축했다. 더 나아가 막말까지 일본의 역사를 이끄는 중심적인 존재였다. 근대에 들어 무사라는 존재 자체를 폐지했지만, 초기 메이지 정부 구성원 대부분이 전직 무사였다.

고대・나라 시대에는 무예에 뛰어난 자, 특히 도술과 궁술에 뛰어난 자를 '''무사''', 또는 '''무예지인'''이라고 불렀다. 고대의 무사는 무예의 사람이자, 전사로서 군사적으로 활약하여 왕권으로부터도 중요시되었다. 그리고 특히 뛰어난 전사에 대해서는 '''무예지사'''라고도 불렀다. 또 사카가미 씨나 오노 씨와 같이 진수 장군을 배출하는 특정한 군사 귀족을 '''장종'''이라고 했다. 그러나 장종은 겐케이천황의 난을 진압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10세기에는 군사 귀족이 소멸하게 되었다.

무사라는 호칭은 왕권의 편에 서서 반란을 진압하는 자에 대해 부르는 것이었고, 지방에 거점을 두고 국가·왕권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자는 '''병'''(つわもの), '''무부'''라고 불렀고, 무사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무사라고 불리는지 아닌지는 왕권과의 관계에 따라 명확히 구분되었다. 그러나 10세기경, 텐케이의 난을 계기로 그 잔혹성 때문에 반란자와 함께, 난을 진압한 왕권 측의 무사도 마찬가지로 혐오되었고, 무사와 병(つわもの)의 혼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무사도 병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무사는 사회적 신분일 뿐만 아니라, 무예라는 예능을 가업으로 하는 직업적 신분이라고도 규정할 수 있다. 즉, 위의 궁술이나 전투의 예법을 계승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그것을 이어받은 인물이 무사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중세가 되어 무가(武家)가 확립된 후에도, 그것과는 별도로 조정의 무관에 상당하는 직종이 어느 정도 존재했다. 「겐지(源氏)」와 「헤이케(平氏)」의 여러 갈래와 후지와라 히데사토(藤原秀郷)의 자손인 「히데사토류(秀郷流)」가 특히 유명하다. 이들 외에는 후지와라 토시히토(藤原利仁)를 시조로 하는 「토시히토류(利仁流)」나, 후지와라 미치카네(藤原道兼)의 후예로 여기는 우쓰노미야씨(宇都宮氏)가 많고, 다른 것으로는 사가 겐지(嵯峨源氏)의 와타나베씨(渡辺氏)나 오에 히로모토(大江広元)가 유명한 오에씨(大江氏) 등이 있으며, 유력한 무사단은 이러한 가계의 어느 하나를 기원으로 하고 있었다. 조상의 무공으로 자신의 집안이 무사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가계나 고명한 조상을 자랑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논리는 주고쿠(周防国)의 유력 무사인 오우치씨(大内氏)에는 적용되지 않으며, 오우치씨는 백제왕의 자손이라고 자칭하고 있다.

무가의 으뜸인 무가의 동량(武家の棟梁)이 무사들의 최고 정점에 위치하여 무가 정권(武家政權)을 수립하였다.

3. 무사의 신분

나라 시대에는 이미 무사가 존재했으며, 이들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급속히 세력을 키워 헤이시 정권·가마쿠라 시대 이후에는 실질적으로 정권을 주도하는 사회를 구축했다. 막말까지 일본의 역사를 이끄는 중심적인 존재였으며, 근대에 들어 무사라는 존재 자체가 폐지되었지만 초기 메이지 정부 구성원 대부분이 전직 무사였다.

고대・나라 시대에는 무예에 뛰어난 자, 특히 도술과 궁술에 뛰어난 자를 '''무사''' 또는 '''무예지인'''이라고 불렀다. 고대의 무사는 무예를 하는 사람이자 전사로서 군사적으로 활약하여 왕권으로부터도 중요시되었다. 그리고 특히 뛰어난 전사에 대해서는 '''무예지사'''라고도 불렀다. 또 사카가미 씨나 오노 씨와 같이 진수 장군을 배출하는 특정한 군사 귀족을 '''장종'''이라고 했다. 그러나 장종은 겐케이 천황의 난을 진압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10세기에는 군사 귀족이 소멸하게 되었다.

무사라는 호칭은 왕권의 편에 서서 반란을 진압하는 자에 대해 부르는 것이었고, 지방에 거점을 두고 국가·왕권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자는 '''병'''(つわもの), '''무부'''라고 불렀고, 무사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무사라고 불리는지 아닌지는 왕권과의 관계에 따라 명확히 구분되었다. 그러나 10세기경, 텐케이의 난을 계기로 그 잔혹성 때문에 반란자와 함께, 난을 진압한 왕권 측의 무사도 마찬가지로 혐오되었고, 무사와 병(つわもの)의 혼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무사도 병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3. 1. 신분 계층

겐지, 헤이시 등 무가 가문이 발생할 초창기에는 무예를 가업으로 삼는 여러 다이부, 사무라이 신분의 엘리트 기마 전사만이 무사로 여겨졌다. 그러나 무로마치 시대 이후, 「협의의 무사」와의 주종 관계를 통해 「광의의 무사」로 불리는 계층이 확대되었다. 무로마치 및 전국시대에는 무사 신분의 확산이 가속화되어, 협의의 무사가 지배하는 영지의 명주 층에서 군역을 통해 주종 관계를 맺은 지사무라이가 등장했다.[1]

무로마치 시대 이후 무사 내부에는 복잡한 신분 계층이 성립되었고, 이는 에도 시대의 무사 신분 제도에 그 흔적이 남았다. 에도 시대의 무사 신분은 다이묘 가문 등에 따라 나누는 방법이나 명칭이 다 달랐지만,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1]

무사의 신분은 사분이라 불렸으며, 크게 사무라이와 종사로 나뉘었다. 이는 난보쿠초 시대 이후 보병 집단전이 주류가 되면서 기마전이 제한되었음에도, 기마전을 가업으로 하는지를 기준으로 무사를 구분했기 때문이다.[1]

구분설명
사무라이협의의 무사, 즉 본래의 무사. 영지를 소유하고 전투 시 말을 타며, 정이대장군을 직접 배알할 수 있는 오메미에 자격을 가짐. 에도 시대 기록에는 기사(騎士) 또는 상사(上士)라고도 불림.
종사부지라는 쌀을 녹봉으로 받으며 보병으로 싸우고, 오메미에 자격이 없음. 하사(下士), 경배(軽輩), 무족(無足) 등으로도 불림.



사무라이 중 석고 1천 석 이상인 자는 타이신이라 하여 전쟁 때 1개 비의 사무라이대장이 되고, 평시에는 봉행 등의 직무를 역임했다. 발탁되어 소바요닌이나 가로로 승진할 수도 있었다. 그 이하의 사무라이는 히라자무라이, 평사(平士), 마승(馬乗) 등으로 불렸다.[1]

다음은 몇 가지 예시이다.

구분사무라이/종사 여부
막부하타모토사무라이
막부의 어가인종사
막부 역소 근무 구실아치 중 요리키사무라이 (기기(寄騎)에서 유래)
막부 역소 근무 구실아치 중 도우신종사
대관소 구실아치 중 수촌(手付)사무라이
대관소 구실아치 중 수대(手代)종사
향사대부분 종사, 일부 사무라이
족경사분에 들지 않으며 무사가 아님. 졸병(卒)이라고도 불림.
무가봉공인 중 약당종사


3. 2. 무가 봉공인

겐지, 헤이시 등 무가 가문이 발생할 당시 무사는 무예를 가업으로 하는 여러 대부, 사무라이 신분의 엘리트 기마전사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로마치 시대 이후 이들(협의의 무사)과의 주종관계를 통해 「광의의 무사」로 여겨지는 계층이 확대되었다. 발생기의 무사 집안 조직 내부 봉공인 중에는 무사와 마찬가지로 전장에서 기마전사로 활동한 낭당(로우토우)이나 도보전사로 활동한 종졸(従卒)이 있었다. 무로마치 및 전국시대에는 무사 신분의 확산이 가속화되어, 협의의 무사가 지배하는 영지의 (본래 백성 신분인) 명주(묘우쥬)층에서 군역을 통해 주종관계를 맺어 광의의 무사가 되는 지사무라이가 등장한다.[1]

무로마치 시대 이후 무사 내부에서 복잡한 신분 계층이 성립되었고, 이들은 확장된 무사 신분의 범위가 확정된 뒤에도 에도 시대의 무사 내부 신분 제도에 그 흔적이 남았다. 에도 시대의 무사 신분은 다이묘 가문 등에 따라 나누는 방법이나 명칭이 다 다르기 때문에 대략적인 기준만 제시할 수 있다.[1]

무사의 신분을 사분(시분)이라 하며, 사분은 크게 사무라이(侍)와 종사(카치)로 나뉜다. 이는 난보쿠초 시대 이후 전장에 동원되는 인원이 급증하고 보병집단전이 주가 되면서 기마전이 비교적 제한된 이후에도, 본래 무사인지 여부를 기준으로 하는 기마전을 가업으로 하는지 여부를 통해 선을 긋는 관행이 후세까지 유지되었기 때문이다.[1]

사무라이는 협의의 무사, 즉 본래의 무사이며, 영지(지행)를 소유하고 전투 때는 말을 타는 사람으로서 정이대장군을 직접 배알할 수 있는 오메미에라는 자격을 가진다. 에도 시대 기록에는 기사(騎士)라고 표시되거나 상사(上士)라고도 불렸으며, 이는 종사와의 비교어이다. 종사는 부지(후치마이)라는 쌀을 녹봉으로 받으며 보병으로 싸우고, 오메미에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하사(下士), 경배(軽輩), 무족(無足) 등으로도 불린다.[1]

사무라이 중 석고 1천 석 이상인 자는 타이신(大身)이라 하여 전쟁 때 1개 비의 사무라이대장이 되고, 평시에는 봉행 등의 직무를 역임한다. 발탁되어 소바요닌이나 가로로 승진할 수도 있다. 그 이하의 사무라이는 히라자무라이(평사), 마승(馬乗) 등으로 불린다.[1]

다음은 예시이다.[1]

  • 막부하타모토는 사무라이, 어가인은 종사이다.
  • 막부의 역소에 근무하는 구실아치 중 요리키(与力)는 기기(寄騎, 때때로 주종관계를 맺는 무사에서 유래) 신분의 사무라이이고, 도우신(同心)은 종사이다.
  • 대관소의 구실아치 중 수촌(手付)은 사무라이, 수대(手代)는 종사이다.
  • 향사는 시골에 사는 무사로서, 대부분 종사이지만 사무라이 신분인 향사도 있었다.
  • 족경은 사분에 들지 않으며 무사가 아니다. 졸병(卒)이라고도 부른다. 발생기에는 사무라이의 전투를 보조하는 종졸과 동일한 계층으로 간주되다가, 시대가 지나면서 종사와 같은 하급무사로 대우되어 갔다.
  • 무가봉공인 중 약당(와카토오)은 사분에 들며, 종사 신분이다.

4. 무사의 역할

무사는 당초 천황·황족 및 귀족경호나 분쟁 진압을 임무로 하는 군사 귀족이었다. 평씨 정권을 거쳐 가마쿠라 막부 성립 이후, 조정, 국사, 쇼엔(荘園), 승강 등의 지배 권력에 맞서 전국적인 정치 권력을 맡는 공권력으로 발전했다. 또한, 개개인의 무사가 국사·쇼엔 영주로서 지방의 정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나라 시대부터 존재했던 무사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워 헤이시 정권·가마쿠라 시대 이후에는 실질적으로 정권을 주도했다. 막말까지 일본의 역사를 이끄는 중심적인 존재였으며, 근대에 들어 무사 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초기 메이지 정부 구성원 대부분이 전직 무사였다.

고대·나라 시대에는 무예에 뛰어난 자, 특히 도술과 궁술에 뛰어난 자를 '''무사''' 또는 '''무예지인'''이라 불렀다. 고대 무사는 전사로서 군사적으로 활약하여 왕권으로부터 중요시되었다. 특히 뛰어난 전사는 '''무예지사'''라고도 불렀다. 사카가미 씨나 오노 씨와 같이 진수 장군을 배출하는 특정 군사 귀족은 '''장종'''이라고 했다. 그러나 장종은 겐케이천황의 난을 진압하지 못했고, 10세기에는 군사 귀족이 소멸했다.

무사는 왕권 편에서 반란을 진압하는 자를 칭하는 말이었고, 지방에 거점을 두고 국가·왕권에 반란을 일으키는 자는 '''병'''(つわもの), '''무부'''라고 불렀다. 즉, 왕권과의 관계에 따라 명칭이 명확히 구분되었다. 그러나 10세기경, 텐케이의 난을 계기로 반란자와 왕권 측 무사 모두 잔혹성으로 인해 혐오되었고, 무사와 병(つわもの)의 혼동이 일어나 무사도 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근세 무사가 참기 어려운 '무례'를 당했을 때는 벤다고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었다. 이는 에도 막부의 법률인 「공사방어정서」71조 추가조에 명기된 내용이다.[2] 무례는 상대방에게 실례되는 태도를 의미하며, 발언의 경우 말투가 서투르다고도 표현되었다.[3] 무사는 경칭을 붙여 '오부케사마'[4]라고 불렸다.

4. 1. 정치적 역할

가마쿠라 막부에서는 오에노 히로모토를 비롯한 하급 귀족을 문관으로 초빙했다. 그러나 무로마치 시대, 센고쿠 시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무사가 공권력을 담당하는 영역이 확대되었다. 무가 정권이 귀족을 초빙하는 일은 계속되었지만, 실무 담당자에서 고문 역할로 권한이 축소되었다. 본래 군인, 즉 무관에 해당하는 직무를 맡았던 무사가 문관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아졌다.[5]

에도 시대에는 문관 역할까지 모두 무사가 담당하게 되어, 무사는 군사에서 정치, 행정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갔다. 문학이나 학문 등 무예와 관계없는 재능을 인정받아 새로이 막부나 번에 등용된 사람에게도 무사 신분이 주어졌다. 에도 막부에서는 문관 및 행정직에 해당하는 무사를 "역방(役方)", 무관에 해당하는 무사를 "번방(番方)"이라고 불렀다.

5. 무사도

전국 시대 무사의 기풍을 이어받아 순사 등을 행하는 경기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에도 시대를 거쳐 메이지 시대에 이르기까지 '무사도'라는 개념이 어떻게 변화하고 계승되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5. 1. 무사도의 개념

도쿠가와 이에쓰나 시대에는 순사 등을 행하는 경기자를 공공 질서 유지를 위해 금지했다. 그 후 에도 시대에는 의를 중시하는 무사로서의 사상이 생겨나게 된다. 이 때문에 후세에 무사도라는 개념으로 이어지는, 무사로서의 이상이나 지배자로서의 가치관으로서의 「시도(士道)」가 탄생했다.

그러나 안정기였던 에도 시대를 통해 형성된 유교적인 「시도」에 반발하여 무사로서의 본래 모습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한 무사 중 한 사람인 사가번 무사 야마모토 츠네토모가 이야기한 내용이 『하가쿠레』에 「무사도」라는 기록으로 정리되어 있지만, 무사 사회에 널리 퍼지지는 않았다.

막말 만엔 원년(1860년) 야마오카 테쓰주가 『무사도』를 저술했다. 그에 따르면 「''신도가 아니고 유도가 아니고 불도가 아니고, 신유불 삼도 융화의 도념으로서, 중세 이후 전라 무문에 있어서 그 뚜렷함을 본다. 철타로 이것을 이름하여 무사도라 한다''」라고 있으며, 적어도 야마오카 테쓰주의 인식에서는 중세부터 존재했지만, 자신이 명명할 때까지는 「무사도」라고 불리지 않았다고 하고 있다.

5. 2. 무사도의 현대적 의의

메이지 시대에 많은 무사들은 사족이 되었고, 옛 무사의 신분은 소멸했다. 하지만 무사도라는 개념은 후대에 계승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미학으로서 문학이나 예능의 세계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6. 무사의 문화

나라 시대에 이미 무사가 존재했으며, 이들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급속히 세력을 키워 헤이시 정권·가마쿠라 시대 이후에는 실질적으로 정권을 주도했다. 막말까지 일본의 역사를 이끄는 중심적인 존재였으며, 근대에 무사라는 존재 자체가 폐지되었지만, 초기 메이지 정부 구성원 대부분이 전직 무사였다.

고대・나라 시대에는 무예에 뛰어난 자, 특히 도술과 궁술에 뛰어난 자를 '''무사''' 또는 '''무예지인'''(武芸之人)이라고 불렀다. 고대의 무사는 무예를 갖춘 전사로서 군사적으로 활약하여 왕권으로부터 중요시되었다. 특히 뛰어난 전사는 '''무예지사'''(武芸之士)라고도 불렀다. 사카가미 씨나 오노 씨와 같이 진수 장군을 배출하는 특정한 군사 귀족을 '''장종'''(將宗)이라고 했다. 그러나 장종은 겐케이천황의 난을 진압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10세기에는 군사 귀족이 소멸하게 되었다.

무사라는 호칭은 왕권 편에서 반란을 진압하는 자에게 사용되었고, 지방에 거점을 두고 국가·왕권에 반란을 일으키는 자는 '''병'''(つわもの), '''무부'''(武夫)라고 불렀으며, 무사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무사라는 호칭은 왕권과의 관계에 따라 명확히 구분되었다. 그러나 10세기경, 텐케이의 난을 계기로 그 잔혹성 때문에 반란자와 함께 난을 진압한 왕권 측의 무사도 혐오 대상이 되었고, 무사와 병(つわもの)의 혼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무사도 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무사는 사회적 신분일 뿐만 아니라, 무예라는 예능을 가업으로 하는 직업적 신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위의 궁술이나 전투 예법을 계승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그것을 이어받은 인물이 무사였다.

중세 무가(武家)가 확립된 후에도 조정의 무관에 상당하는 직종이 어느 정도 존재했다. 「겐지(源氏)」와 「헤이케(平氏)」의 여러 갈래와 후지와라 히데사토(藤原秀郷)의 자손인 「히데사토류(秀郷流)」가 특히 유명하다. 이들 외에는 후지와라 토시히토(藤原利仁)를 시조로 하는 「토시히토류(利仁流)」, 후지와라 미치카네(藤原道兼)의 후예로 여겨지는 우쓰노미야씨(宇都宮氏), 사가 겐지(嵯峨源氏)의 와타나베씨(渡辺氏), 오에 히로모토(大江広元)가 유명한 오에씨(大江氏) 등이 있으며, 유력한 무사단은 이러한 가계 중 하나를 기원으로 하고 있었다. 조상의 무공으로 자신의 집안이 무사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의 가계나 고명한 조상을 자랑했다. 주고쿠(周防国)의 유력 무사인 오우치씨(大内氏)는 백제왕의 자손이라고 자칭했다.

고대 및 중세 무가 사회는 현대와 달리 살인이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당시 무사들은 전투나 항쟁 장소뿐만 아니라, 사소한 일에도 무기를 들고 친구나 가신을 포함한 사람을 살해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6]

6. 1. 무사의 복식과 무구

원래 무사는 '궁마의 도(弓馬の道)'라는 말처럼 기마궁병이었다. 주요 무기는 활과 화살이었고, 칼이 무사의 영혼이라는 주장은 근대에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도검은 처음에는 기승 시 사용하는 무기가 아니었고, 어떤 사정으로 하마했을 때 사용하는 것이 권장되었으며,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무기라는 인식이 강했다.[7] 지쇼·주에이 전란 이후 전투가 확대되면서 비무사 신분의 자들도 참전하게 되었고, 이전에는 사도(邪道)로 여겨지던 전법이 행해지게 되었다.[8] 말 위에서 타도를 사용한 백병전이 증가했다.[9] 가마쿠라 시대 말기 이후에는 타도나 나기나타와 같은 타물(打物)을 주병장으로 하는 기병도 등장했고, 남북조 시대에는 타물 기병이 주체가 되었다.[10][11]

전국 시대에는 기병의 주병장이 창으로 바뀌고, 동시에 보병 중심이 되었다.[12] 그 과정에서 기마궁병은 쇠퇴했지만, 활과 화살은 전국 시대 말기의 도가리 이후 무사의 상징이 도검으로 변화할 때까지 이상적인 무사의 상징으로 남아 있었다.

무구를 착용한 무사
채색 사진. 원본 사진은 메이지 13년(1880년) 경 촬영.

6. 2. 무사와 관련된 용어


  • 무사 그림: 무사의 모습이나 전투를 그린 우키요에를 말한다. 넓은 의미로는 이와 유사한 전통적인 양식에 따른 일본화 전반을 가리킨다.
  • 무사 밀어내기: 무사들이 대열을 지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 무사 되돌리기: 무가 저택에서, 표장원의 외측 도랑 가장자리에 한 걸음 간격으로 세운 돌을 말한다.
  • 무사는 서로 돕는다: 무사들은 같은 입장에 있으므로 서로를 배려하며 도와야 한다는 뜻이다.
  • 무사에게 두말은 없다: 무사는 신의를 중시하고 약속을 지키며, 한번 한 말을 취소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 무사는 먹지 않아도 이쑤시개: 무사는 비록 가난하여 제대로 먹지 못하더라도, 마치 배부른 척 이쑤시개를 사용하여 허기를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 이는 무사의 청빈함과 기품을 높게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7. 한일 관계와 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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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문서 사진
[2] 문서 慣習法
[3] 웹사이트 goo国語辞書
[4] 문서 切捨御免
[5] 문서 織田政権, 豊臣政権
[6] 서적 頼朝の武士団―将軍・御家人たちと本拠地・鎌倉― 洋泉社 2012
[7] 서적 弓矢と刀剣 吉川弘文館 1997
[8] 서적 源平合戦の虚像を剥ぐ―治承・寿永の内乱史研究― 講談社 2010
[9] 서적 弓矢と刀剣 吉川弘文館 1997
[10] 서적 武具の日本史 平凡社 2010
[11] 문서 군중상, 주문, 전투보고서, 弓矢と刀剣, 真実の戦国時代, 図説 日本戦陣作法辞典
[12] 문서 전공서상, 진실의 전국시대
[13] 웹사이트 Ann and Gabriel Barbier-Mueller Museum http://www.samuraico[...]
[14] 문서 Newsmagazine
[15] 문서 루몽
[16] 웹사이트 勝山物語(畑時能物語) http://www.oidenense[...]
[17] 문서 게르만족, 무사
[18] 문서 무사
[19] 문서 무사
[20] 문서 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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