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카베 모토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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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1539년 조소카베 가문의 19대 당주 조소카베 구니치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연약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나가하마 전투에서 용맹함을 보여 '오니와코'로 칭송받았고, 1560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독을 상속했다. 그는 도사 통일을 위해 세력을 확장, 1575년 도사 국을 완전히 통일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고 시코쿠 통일을 추진했으나, 노부나가의 죽음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로 인해 도사 1국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잃었다. 말년에는 규슈 정벌, 임진왜란에 참전했으며, 159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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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카베 모토치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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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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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조소카베 모토치카 |
로마자 표기 | Chōsokabe Motochika |
일본어 표기 | 長宗我部 元親 |
출생명 | 야사부로 |
별명 | "어린 공주" (히메와코), "어린 도깨비" (오니와코), 도사의 출중한 인물, 새 없는 섬의 박쥐 |
출생 | 1539년 |
출생지 | 오코 성, 도사 국 |
사망 | 1599년 7월 11일 |
사망지 | 후시미 |
계명 | 설계여삼대거사, 설혜서삼대선정문 |
묘소 | 덴보지산 (고치현 고치시) |
관직 및 지위 | |
가문 | 조소카베 가문 |
가문 수장 | 1560년 - 1599년 |
선임 | 조소카베 구니치카 |
후임 | 조소카베 모리치카 |
관위 | 종5위, 궁내소보, 도사노카미, 시종, 증 정5위, 증 정3위 |
소속 | 조소카베 가문, 이치조 가문, 도요토미 가문 |
군사 계급 | 다이묘, 구나이쇼 |
지휘 부대 | 오코 성 |
혼인 및 가족 | |
아버지 | 조소카베 구니치카 |
어머니 | 본야마씨 (쇼호겐요) |
형제 | 고소카베 지카야스, 기라 지카사다, 고소카베 지카야스, 시마 지카마스, 본야마 부인 (모토야마 시게토키의 아내), 딸 (이케 요리카즈의 아내), 요호니 (하카와 기요무네의 아내) |
정실 | 모토치카 부인 (이시타니 요리타쓰, 사이토 도시미쓰의 이복 여동생) |
측실 | 소쇼쇼, 소자이쇼 |
자녀 | 조소카베 노부치카, 가가와 지카카즈, 쓰노 지카타다, 조소카베 모리치카, 조소카베 우콘다이부, 분친 (분요 뎃규), 조소카베 민부?, 딸 (이치조 우치마사의 아내), 딸 (기라 지카자네의 아내), 아코히메 (사타케 지카나오의 아내), 딸 (요시마쓰 주자에몬의 아내) |
주요 전투 | |
전투 | 도사 전투 (1562-1575) 시만토 강 전투 (1575) 이요 전투 (1579) 나카토미 강 전투 (1582) 히케타 전투 (1583) 시코쿠 정벌 (1585) 규슈 정벌 (1586-1587) 시모다 공성전 (1590) 임진왜란 (1592) 산 펠리페 호 사건 (1596) |
기타 | |
주군 | 호소카와 하루모토 → 이치조 가네사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요토미 히데요리 |
2. 가독 승계
1560년 아버지 조소카베 구니치카가 급사하면서 조소카베 가문의 가독을 상속받았다.[2] 1562년 나카무라 고쇼(中村御所)의 이치조씨(一条氏)와 함께 아사쿠라성(朝倉城)을 공격했다. 1563년 이시타니 미쓰마사(石谷光政)의 딸을 정실로 맞이하여 사이토 도시미쓰의 매제가 되었다. 같은 해, 큰 동생 지카사다(親貞)로 하여금 기라씨(吉良氏)의 뒤를 잇게 하여 세력을 넓혔다. 한편, 고소카베씨(香宗我部氏)에 양자로 들어가 있던 둘째 동생 지카야스(親泰)의 영지에 인접한 도사 동부의 아키 구니토라(安芸国虎)와도 충돌했다.
2. 1. 출생과 초기 성장
1539년(덴분 8년), 조소카베 가문의 제19대 당주 조소카베 구니치카(長宗我部國親)와 그의 정실 미노(美濃) 사이토씨(斎藤氏)의 장남으로 오코성(岡豊城)에서 태어났다. 휘의 원(元)은 간레이(管領) 호소카와 하루모토에게서 받은 것이다.[2]어린 시절 이름은 야사부로(弥三郎)였다.[2] 그는 조용한 청년이었고, 아버지 구니치카는 그의 온화한 성격에 대해 걱정했다고 한다. '히메와코(姫若)' 또는 '작은 공주'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였으나, 훗날 뛰어난 무예와 용기를 가진 무장임을 증명하자 구니치카의 걱정은 사라졌다.
1560년 5월, 아버지를 따라 모토야마씨와의 전쟁에 종군, 나가하마 전투(長浜の戦)에서 첫 출전임에도 불구하고 분전하여 나약하다는 인상을 단번에 떨쳐버렸다. 그 해 6월에 구니치카가 급사하자 가독을 승계하였다. 1562년에는 나카무라 고쇼(中村御所)의 이치조씨(一条氏)와 함께 아사쿠라성(朝倉城)을 공격했다. 1563년에는 이시타니 미쓰마사(石谷光政)의 딸을 정실로 맞이했고 이로 인해 사이토 도시미쓰의 매제가 되었다. 같은 해에는 자신의 큰 동생 지카사다(親貞)로 하여금 기라씨(吉良氏)의 뒤를 잇게 하여 세력을 넓혔다. 한편으로는 고소카베씨(香宗我部氏)에 양자로 들어가 있던 둘째 동생 지카야스(親泰)의 영지에 인접한 도사 동부의 아키 구니토라(安芸国虎)와도 충돌했다.
모토치카가 성년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이미 이치조씨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고, 모토치카는 그의 사업을 계속 이어나갔다.
1569년, 그는 표면적으로는 이치조씨에 충성하는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7,000명의 병력으로 도사 동부의 라이벌 아키씨(安芸氏)를 공격할 만큼 강력해졌다. 그는 야나가우라 전투(柳ヶ浦の戦い)에서 아키 구니토라를 패배시킨 후 아키성(安芸城)을 함락시켰다.
2. 2. 첫 출진과 가독 상속
1539년(덴분 8년), 조소카베 가문의 제19대 당주 조소카베 구니치카와 그의 정실 미노 사이토씨의 장남으로 오코성에서 태어났다. 휘의 원(元)은 간레이 호소카와 하루모토에게서 받은 것이다. 어릴 적 이름은 야사부로(弥三郎)였다.[2]1560년 5월, 아버지를 따라 모토야마씨와의 전쟁에 종군, 나가하마 전투에서 첫 출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분전하여 그때까지의 나약하다는 인상을 단번에 떨쳐버렸다. 이 전투에서 모토치카는 직접 창을 들고 돌격하는 용맹함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나가하마 전투에 이은 시오에 성(현 필산공원) 전투에서도 전과를 올렸다. 그해 6월에 구니치카가 급사하자 가독을 승계하였다.
1562년에는 나카무라 고쇼의 이치조씨와 함께 아사쿠라성을 공격했다. 1563년에는 이시타니 미쓰마사의 딸을 정실로 맞이했고, 이로 인해 사이토 도시미쓰의 매제가 되었다. 같은 해, 자신의 큰 동생 지카사다로 하여금 기라씨의 뒤를 잇게 하여 세력을 넓혔다.
3. 도사 통일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1567년 모리 씨와 연합하여 이치조 가네사다를 공격해 승리한 고노 씨 때문에 세력이 약화된 이치조 씨로부터 독립하려 했다. 1568년에는 모토야마 씨를, 이듬해에는 아키 씨를 멸망시키고 도사 서부를 제외한 전 지역을 장악했다.
1571년에는 이치조 가의 가신인 쓰노 씨를 멸하고 자신의 삼남 지카타다를 쓰노 씨의 후계자로 삼았다. 1574년에는 이치조 가네사다를 추방하고, 그의 후계자인 이치조 다다마사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켰다. 오토모 씨의 도움을 받아 재기를 시도하는 이치조 가네사다 때문에 한때 고전했으나, 와타리카와 강 전투에서 승리하여 도사 내 패권을 확고히 했다.[3]
1573년, 이치조 가네사다는 인망이 없어 많은 가신들이 배반하여 떠난 상태였다. 모토치카는 나카무라에 있는 이치조 가의 본거지를 공격했고, 가네사다는 분고로 도망쳤다. 1575년, 시만토가와 전투(와타리카와 강 전투)에서 이치조 씨를 격파하고[3] 도사 지배권을 확립했다.
모토치카는 1561년, 본산 씨 측의 칸다, 이시다테를 함락시키고, 1562년에는 아사쿠라 성을 공격했다. 본산 씨를 버리고 모토치카에게 투항하는 가신들이 속출했고, 1563년에는 본산 시게타다가 아사쿠라 성을 버리고 본산 성에 틀어박혔다. 1564년, 시게타다는 본산을 버리고 우류노 성에서 항전했으나 병사했다. 이후 시게타다의 아들 본산 지카시게도 항전했으나 결국 1568년에 항복하여 도사 중부를 완전히 평정했다.[8]
1569년, 하치류 전투에서 아키 구니토라를 멸망시켜 도사 동부를 평정했다.
3. 1. 세력 확장
1567년, 고노씨가 모리씨와 연합해 이치조 가네사다(一条兼定)를 공격해 승리하자, 이치조 씨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모토치카는 이를 기회로 삼아 이치조 씨로부터의 독립을 가속화했다.[3] 1568년에는 본산 씨를,[8] 이듬해에는 아키 씨를 멸망시키고 도사 서부를 제외한 전 지역을 장악했다. 1571년에는 이치조 가의 가신인 쓰노씨(津野氏)를 멸하고 자신의 삼남 지카타다(親忠)를 쓰노 씨의 후계자로 삼았다. 1574년에는 이치조 가네사다를 추방하고, 그의 후계자 이치조 다다마사(一条內政)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켰다. 오토모씨의 도움을 받아 재기를 노리던 이치조 가네사다 때문에 한때 고전했지만, 와다리카와 강 전투(渡川の戦)에서 승리하며 도사 내 패권을 확고히 했다.[3]1573년, 이치조 가네사다는 인망이 없어 많은 가신들이 등을 돌린 상태였다. 모토치카는 나카무라의 이치조 가 본거지를 공격했고, 가네사다는 분고로 도망쳤다.
1575년, 시만토가와 전투(와타리가와 전투)에서 이치조 가(一条氏)를 패퇴시키고[3] 도사국(土佐国) 지배권을 확립했다.
도사 정복 후, 모토치카는 이요국(伊予国) 침략을 준비했다. 1579년, 구무 요리노부(久武親信)가 이끄는 7,000명의 조소카베 군이 도이 기요나가(土居清長)가 이끄는 고노 미치나오(河野通直) 군과 미마오모테 전투(三間往還の戦い)에서 맞붙었으나, 요리노부가 전사하고 조소카베 군은 패배했다. 그러나 이듬해 모토치카는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요국으로 진격, 고노 미치나오를 분고국으로 몰아냈다.
모리씨나 오토모씨의 방해 없이 조소카베 군은 1582년 아와국으로 침입, 소고 마사야스(宗像政安)와 미요시 씨(三好氏)를 나카토미가와 전투(中富川の戦い)에서 격파했다. 이후 사누키국(讃岐国)으로 진격해 센고쿠 히데히사(仙石秀久)를 히케타 전투(引田の戦い)에서 패배시켰다.
1583년까지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도사국(土佐国), 이요를 지배하고 아와와 사누키를 평정했다.
3. 2. 도사 통일 과정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1567년, 모리 씨와 연합하여 이치조 가네사다를 공격해 승리한 고노 씨로 인해 세력이 약화된 이치조 씨로부터의 독립을 가속화했다. 1568년에는 모토야마 씨를, 이듬해에는 아키 씨를 멸망시키고 서부를 제외한 도사 전역을 장악했다. 1571년에는 이치조 가의 가신인 쓰노 씨를 멸하고 자신의 삼남인 쓰노 지카타다를 쓰노 씨의 후계자로 삼았다. 1574년에는 이치조 가네사다를 추방하고, 그의 후계자인 이치조 다다마사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켰다. 오토모 씨의 도움을 받아 재기를 시도하는 이치조 가네사다에 의해 한때 고전했으나, 결국 와타리카와 강 전투에서 승리하여 도사 내에서의 패권을 확고히 했다.[3]1573년, 도사 국 하타 지방 영주였던 이치조 가네사다는 인망이 없어 많은 중요한 가신들이 배반하여 떠난 상태였다. 모토치카는 이 기회를 틈타 형제인 고소카베 지카야스와 함께 나카무라에 있는 이치조 가의 본거지를 공격하여 가네사다를 분고 국으로 쫓아냈다.
1575년, 시만토가와 전투(와타리카와 전투)에서 이치조 씨를 패퇴시켜 도사 국의 지배권을 얻게 되었다.[3]
모토치카는 1561년, 본산 씨 측의 칸다, 이시다테를 함락시키고, 1562년에는 아사쿠라 성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본산 씨를 버리고 모토치카에게 투항하는 가신들이 속출했고, 1563년에는 본산 시게타다가 아사쿠라 성을 버리고 본산 성에 틀어박혔다. 1564년, 시게타다는 본산을 버리고 우류노 성에서 항전했으나 병사했다. 이후 시게타다의 아들 본산 지카시게도 항전했으나 결국 1568년에 항복하여 도사 중부를 완전히 평정했다.[8]
1567년, 모리 씨의 이요 출병으로 세력이 크게 줄어든 이치조 가네사다로부터 자립을 꾀하며 독자적인 행보를 보였다.
1569년, 하치류 전투에서 아키 구니토라를 멸망시켜 도사 동부를 평정했다. 1571년, 이치조 씨의 가신인 쓰노 씨를 멸망시키고 셋째 아들 쓰노 지카타다를 양자로 보냈다.
1574년, 이치조 가의 내분에 개입하여 이치조 가네사다를 추방하고 가네사다의 아들인 이치조 나이마사에게 딸을 시집보내 꼭두각시로 삼았다. 이로써 모토치카는 도사 국을 거의 제압했다. 1575년, 가네사다가 이요 남부의 여러 장수를 이끌고 재기를 도모하여 도사 국에 쳐들어왔을 때, 일시적으로 궁지에 몰렸으나 시만토가와 전투에서 이를 격파하고 도사 국을 완전히 통일했다.
4. 시코쿠 통일
1573년, 도사국의 이치조 가네사다(一条兼定)는 인망이 없어 많은 가신들이 떠나고 있었다. 모토치카는 이 기회를 틈타 나카무라에 있는 이치조 가의 본거지를 공격하여 가네사다를 분고로 몰아냈다. 1575년 시만토가와 전투(와타리가와 전투)에서 이치조 씨를 패퇴시키고 도사 국을 통일하였다.[3]
도사 통일 후,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고 시코쿠 통일을 목표로 하였다. 아와와 사누키는 미요시씨가 기반을 두고 있었기에, 노부나가와 협공했지만 십여 년이 걸렸다. 1578년 둘째 아들 지카카즈를 사누키 가가와 가문의 양자로 보내 1580년까지 아와와 사누키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 한편, 이요 공략은 오카모토성을 공격하던 히사타케 지카노부의 전사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
1580년 오다 노부나가는 모토치카에게 도사와 아와의 영유권만 인정하고 신종을 요구했고, 모토치카는 이를 거절하여 적대 관계로 바뀌었다. 노부나가는 소고 나가야스를 지원하고 1582년 간베 노부타카를 총대장으로 시코쿠 정벌군을 일으키려 했으나 혼노지의 변으로 실행되지 않았다.
오다 가가 분열된 틈을 타 모토치카는 소고 나가야스의 세력을 시코쿠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 1583년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시바타 가쓰이에가 패사하자, 오다 노부카쓰·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잡고 히데요시에 대항, 1584년에는 히데요시가 보낸 센고쿠 히데히사를 격파했다. 1585년에는 사이온지 씨와 고노 가문을 굴복시켜 이요를 제압하고 시코쿠 통일을 달성했다.
4. 1. 아와, 사누키, 이요 침공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은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시코쿠 전역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아와, 사누키는 미요시씨가 시코쿠 동부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에, 노부나가와 협공해도 미요시 씨와 그 잔당의 힘이 쇠퇴할 때까지 십여 년이 걸렸다. 1578년에는 둘째 아들 지카카즈를 사누키의 가가와 가문의 양자로 보냈고, 1580년까지 두 지방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 한편 이요 지방 공략은 오카모토성을 공격하던 히사타케 지카노부가 전사하면서 뜻대로 되지 않았다.[3]1580년, 오다 노부나가는 모토치카에게 도사 및 아와의 영유권만 인정하고 신종을 요구했고, 모토치카는 이를 거절하여 적대 관계로 바뀌었다. 노부나가는 소고 나가야스를 지원하고 1582년에는 간베 노부타카를 총대장으로 시코쿠 정벌군을 일으키려 했으나 혼노지의 변으로 실행되지 않았다. 노부나가의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는 모토치카의 측실과 인척 관계였는데, 이 때문에 모토치카와 노부나가의 관계가 악화된 것이 미쓰히데가 반란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오다 가의 세력이 분열된 틈을 타 모토치카는 소고 나가야스의 세력을 시코쿠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 노부나가 사후 모토치카는 시바타 가쓰이에를 지원했지만, 1583년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패하여 가쓰이에는 자결했다. 1584년에는 히데요시가 보낸 센고쿠 히데히사를 격파했고, 1585년에는 사이온지 씨와 고노 씨를 굴복시켜 이요를 제압하고 시코쿠 통일을 이루었다.[14][15]
1579년, 구무 요리노부가 지휘하는 7,000명의 조소카베 군대는 미마오모테 전투에서 도이 기요나가가 이끄는 고노 미치나오의 군대와 맞붙었으나 패배했다. 이듬해 모토치카는 3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이요국으로 진격하여 고노 미치나오를 분고국으로 몰아냈다.
1582년, 모토치카는 아와국 침입을 강화하여 나카토미가와 전투에서 소고 마사야스와 미요시 씨를 패퇴시켰다. 이후 사누키국으로 진격하여 히케타 전투에서 센고쿠 히데히사를 패배시켰다.[16]
1578년, 모토치카는 아와 하쿠지 성을 공격하여 오니시 각요를 토벌하고, 차남 가가와 지카와를 사누키 국 가가와 시게카게의 양자로 보냈다. 1580년까지 아와·사누키 두 국을 거의 평정했다.
이요 지방에서는 구무 지카노부가 1579년 봄 오카모토 성 공격에서 전사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 그러나 카네코 모토타쿠, 츠마토리 토모하루, 이시카와 카츠시게 등을 끌어들여 동예 지방을 평정했다. 모리 씨의 원조를 받은 고노 씨와의 전투로 이요 평정은 장기화되었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모토치카는 시바타 가쓰이에와 손을 잡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대항했다.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도 오다 노부카쓰,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과 손을 잡고 히데요시에 대항했다.
1584년 3월, 모리 씨는 시시도 모토타카를 고노 씨 구원을 위해 파견했고, 4월에는 타카야마, 5월부터 6월에 걸쳐 에라, 키쿠마에서 전투를 벌였다. 12월에는 고노 씨가 모토치카에게 항복했고, 1585년 봄까지 서요의 호족들도 항복했다.
4. 2. 오다 노부나가와의 대립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고 시코쿠 전역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목표가 된 아와과 사누키는 노부나가 이전에 기나이와 긴키에서 세력을 떨치던 미요시씨가 시코쿠 동부에 둔 기반이었다. 노부나가와 손잡고 협공해도 만만치 않아 미요시 씨와 그 잔당의 힘이 시코쿠에서 현저히 쇠퇴할 때까지는 십여 년이 걸렸다. 1578년에는 둘째 아들 지카카즈를 사누키의 유력 호족 가가와 가문의 양자로 보냈고 1580년까지 이 두 지방의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1580년 오다 노부나가는 모토치카에게 도사 및 아와의 영유권만을 인정하며 신종을 요구했다. 모토치카는 이를 거절했고 노부나가와는 적대 관계로 바뀌었다. 노부나가는 미요시 씨의 잔당인 소고 나가야스(十河存保)가 모토치카에게 대항하는 것을 지원하는 한편 1582년에는 간베 노부타카를 총대장으로 하여 시코쿠 정벌군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혼노지의 변으로 인해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10] 원래 노부나가 측에서 조소카베 가와의 외교를 담당하고 있던 자는 아케치 미쓰히데인데 모토치카의 측실이 미쓰히데의 조카이고 처형인 사이토 도시미쓰가 미쓰히데의 일족인 탓도 있었다. 인척인 조소카베 가와 노부나가의 관계가 크게 악화된 것과 이후 시코쿠에 비교적 가까운 기나이와 야마토에서의 퇴거를 명령받은 것이 미쓰히데가 반란을 일으키는 한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4. 3. 시코쿠 통일 과정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고 시코쿠 전역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목표가 된 아와와 사누키는 노부나가 이전에 기나이와 긴키에서 세력을 떨치던 미요시씨가 시코쿠 동부에 둔 기반이었다. 노부나가와 손잡고 협공해도 만만치 않아 미요시씨와 그 잔당의 힘이 시코쿠에서 현저히 쇠퇴할 때까지는 십여 년이 걸렸다. 사누키 제압의 일환으로 1578년에는 둘째 아들 지카카즈를 사누키의 유력 호족 가가와 가문의 양자로 보내었고 1580년까지 이 두 지방의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 한편 시코쿠 서부에서는 오카모토성(岡本城)을 공격하던 히사타케 지카노부가 전사하면서 이요 지방 공략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1580년 오다 노부나가는 모토치카에게 도사 및 아와의 영유권만을 인정하며 신종을 요구했다. 모토치카는 이를 거절했고 노부나가와는 적대 관계로 바뀌었다. 노부나가는 미요시씨의 잔당인 소고 나가야스가 모토치카에게 대항하는 것을 지원하는 한편 1582년에는 간베 노부타카를 총대장으로 하여 시코쿠 정벌군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혼노지의 변으로 인해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원래 노부나가 측에서 조소카베가와의 외교를 담당하고 있던 자는 아케치 미쓰히데인데 모토치카의 측실이 미쓰히데의 조카이고 처형인 사이토 도시미쓰가 미쓰히데의 일족인 탓도 있었다.
뜻하지 않았던 이변으로 오다가의 세력이 분열된 틈을 타 모토치카는 소고 나가야스의 세력을 시코쿠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 노부나가 사후 모토치카는 시바타 가쓰이에를 지원했지만 가쓰이에는 1583년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패하여 자결했다. 그 후에도 그는 오다 노부카쓰·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잡고 히데요시에 대항, 1584년에는 히데요시가 보낸 센고쿠 히데히사를 격파했다. 1585년에는 사이온지 씨(西園寺氏)와 고노 가문을 굴복시켜 이요마저 제압해 시코쿠의 통일을 이루어냈다.
1573년, 이치조 가네사다는 인망이 없었고 이미 많은 중요한 가신들이 배반하여 떠났다. 이 기회를 포착한 모토치카는 나카무라에 있는 이치조 가의 본거지를 공격하기 위해 즉시 행군했고, 가네사다는 패배하여 분고로 도망쳤다.
1575년, 시만토가와 전투(와타리가와 전투)에서 그는 이치조 씨를 패퇴시켰다.[3] 그리하여 그는 도사국의 지배권을 얻게 되었다.
도사 정복 후, 이요국 침략을 준비했다. 고노 미치나오는 모리 가문의 도움으로 복귀한 다이묘였다. 그러나 모리가 오다 노부나가와의 전쟁에 휘말려 있었기 때문에 고노가 그러한 도움을 다시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1579년, 구무 요리노부가 지휘하는 7,000명의 조소카베 군대는 도이 기요나가가 이끄는 고노 미치나오의 군대와 미마오모테 전투에서 맞붙었다. 그 결과, 구무 요리노부가 전사하고 그의 군대는 패배했다. 이듬해, 모토치카는 3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이요국으로 진격하여 고노 미치나오를 분고국으로 몰아냈다.
1582년에는 아와국으로 침입을 강화하여 소고 마사야스와 미요시 씨를 나카토미가와 전투에서 패퇴시켰다. 후에, 모토치카는 사누키국로 진격하여 센고쿠 히데히사를 히케타 전투에서 패배시켰다.
1583년까지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도사국, 이요국을 지배하고 아와국과 사누키국을 평정했다. 그 후 10년 동안 그는 그의 세력을 시코쿠 전체로 확장하여 모토치카의 시코쿠 전체를 통치하려는 꿈을 실현시켰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시바타 가쓰이에와 손을 잡고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대항했다. 이에 대해 히데요시는 가신인 센고쿠 히데히사를 아와지 주본에 주둔시켜 대비했다.[14] 또 모토치카에게 쫓긴 소가와 존보는 히데요시에게 구원병을 요청했고[15], 히데요시는 히데히사에게 야시마 성, 다카마쓰 성 등 사누키의 조소카베 측 성을 공격하게 했으나 패퇴했다. 더욱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수군에게 코사이우라를 공격하게 했으나 이것 또한 패퇴했다. 그러나 4월에 가쓰이에는 히데요시에게 패하여 멸망했다.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도 오다 노부카쓰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과 손을 잡고 히데요시에 대항했고, 히데요시가 보낸 센고쿠 히데히사의 군세를 격파했다. 또 신죠 군의 카네코 모토타카와 동맹을 맺고, 남요의 사이온지 기미히로의 여러 성을 함락시키는 등 이요 국에서도 세력을 확장했다. 6월 11일에는 소가와 성을 함락시켜 사누키를 평정했다. 그러나 코마키 전투는 히데요시와 노부카쓰가 화해하는 형태로 종결되었다.
이요 국의 평정은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1585년 3월, 모리 가문은 시시도 모토타카를 고노 씨 구원을 위해 파견했고, 에라에서 조소카베 군과 충돌했다. 4월에는 타카야마에서, 5월부터 6월에 걸쳐 에라, 키쿠마(기쿠만)에서 합전을 벌였다.[16] 모토치카는 동요의 카네코 모토타카와의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고 9월부터 반격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건너가 원정 중이던 모리 군은 점차 열세가 되었고, 12월에는 마침내 고노 가문이 모토치카에게 항복했다. 그 후, 1585년 봄까지 서요의 호족들도 항복시켰다.
5. 하시바(도요토미) 군의 시코쿠 정벌
오다 노부카쓰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화친하면서,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다른 세력의 지원 없이 하시바 히데나가가 이끄는 시코쿠 정벌군 12만 명에 맞서 싸워야 했다. 히데요시는 이미 모리 데루모토까지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에, 시코쿠를 제패한 모토치카가 대항하기에는 벅찬 상대였다. 히데요시는 이전의 오다 노부나가처럼 모토치카가 도사, 아와를 다스리는 것은 인정했지만, 나머지 영토는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모토치카는 이요를 포기하는 것에만 동의했기 때문에 결국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하시바 히데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쓰구는 아와로 본대를 이끌고 진입했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깃카와 모토나가는 모리 군을 이끌고 이요에, 우키타 히데이에의 군대는 사누키에 각각 상륙했다. 이들은 세 방향에서 동시에 시코쿠의 성들을 차례로 함락시켜 나갔다. 승산이 없음을 깨달은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1585년 7월 25일 결국 항복했고, 도사 한 지역만을 다스리는 것을 인정받았다.[9]
5. 1. 히데요시와의 대립
오다 노부카쓰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화친하면서,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다른 세력의 지원 없이 하시바 히데나가가 이끄는 시코쿠 정벌군 12만 명에 맞서 싸워야 했다. 히데요시는 이미 모리 데루모토까지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에, 시코쿠를 제패한 모토치카가 대항하기에는 벅찬 상대였다. 히데요시는 이전의 오다 노부나가처럼 모토치카가 도사, 아와를 다스리는 것은 인정했지만, 나머지 영토는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모토치카는 이요를 포기하는 것에만 동의했기 때문에 결국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전쟁이 시작되자 하시바 히데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쓰구는 아와로 본대를 이끌고 진입했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깃카와 모토나가는 모리 군을 이끌고 이요에, 우키타 히데이에의 군대는 사누키에 각각 상륙했다. 이들은 세 방향에서 동시에 시코쿠의 성들을 차례로 함락시켜 나갔다. 승산이 없음을 깨달은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1585년 7월 25일 결국 항복했고, 도사 한 지역만을 다스리는 것을 인정받았다.[9]
5. 2. 시코쿠 정벌
오다 노부카쓰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화친하면서,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다른 세력의 지원 없이 하시바 히데나가가 이끄는 시코쿠 정벌군 12만 명에 맞서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이미 모리 데루모토를 아군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에, 시코쿠를 제패한 모토치카가 대항하기에는 벅찬 상대였다.[3]히데요시는 모토치카에게 도사와 아와 영유는 인정하지만, 나머지 영토는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모토치카는 이요를 포기하는 것에만 동의하여 결국 전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하시바 히데나가·히데쓰구는 아와로 본대를 이끌고 진입하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깃카와 모토나가는 모리 군을 이끌고 이요에, 우키타 히데이에의 군세는 사누키에 각각 상륙해 세 방향에서 동시에 시코쿠의 성들을 함락시켜 갔다.[17]
승산이 없음을 깨달은 모토치카는 1585년 7월 25일 항복했고, 도사 1국의 영유를 인정받았다.[18] 시코쿠 정벌 성공 후, 하시바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고 12월에는 태정대신의 직책까지 겸하게 되었다.
6. 도요토미 정권 하
1586년 시마즈씨의 압박을 견디기 힘들게 된 오토모씨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구원을 요청하면서 히데요시는 규슈 정벌을 일으켰다.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장남 노부치카와 함께 종군하였으나, 헤쓰기가와 전투에서 노부치카가 전사하였다.
1588년 거점을 오다카사카성(大高坂城)으로 옮겼다. 노부치카의 죽음으로 후계자 문제가 발생했고, 모토치카는 다른 가문의 양자로 들어간 차남 지카카즈와 삼남 지카타다를 제쳐두고 4남 모리치카를 후계자로 정했다. 이 과정에서 반대하는 친족들을 할복시키기까지 하였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 종군하고 같은 해 말 본거지를 우라도성(浦戸城)으로 이전했다.
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에는 3천 명을, 정유재란에는 1만 3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각 다이묘에게 병력 동원령을 내렸는데, 조소카베 가문은 수군 전력으로 활약할 것을 기대받았다.
1596년 스페인 선박 산 펠리페 호가 태풍으로 파손되어 그의 영지에서 수리를 받게 되었는데, 이 사건을 통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선교사들이 스페인의 식민지 건설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게 되었고, 이는 기독교 금지령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597년 3월에는 조소카베 백조목이라는 법령을 반포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조선에서 철수했고,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의를 얻어 삼남 지카타다를 유폐했다.
1599년 4월 모리치카와 함께 상경하여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알현한 후, 후시미성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고, 5월 19일 향년 61세로 사망했다.
6. 1. 규슈 정벌 참전
1586년, 시마즈씨의 압박을 견디기 힘들게 된 오토모씨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구원을 요청하면서 히데요시는 규슈 정벌군을 일으켰다.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장남 노부치카와 함께 규슈 정벌에 종군하게 되었는데, 주장은 센고쿠 히데히사였고, 얼마 전까지 적대했던 소고 나가야스 등과도 이번에는 같은 편에 서서 싸우게 되었다. 센고쿠 히데히사는 시마즈 군을 얕보아 위장 후퇴를 하는 적군을 곧바로 추격하도록 했고 추격에 나섰던 병력은 큰 피해를 입었다(헤쓰기가와 전투). 이때 소고 나가야스와 조소카베 노부치카 역시 전사했다.6. 2. 후계자 문제
1586년 시마즈씨에게 압박받던 오토모씨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히데요시는 규슈 정벌군을 일으켰다.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장남 노부치카와 함께 종군하였는데, 헤쓰기가와 전투에서 노부치카가 전사하였다.[22]1588년 거점을 오다카사카성(大高坂城)으로 옮겼다. 노부치카의 죽음으로 후계자를 새로 정해야 했는데, 모토치카는 다른 가문의 양자로 들어간 차남 지카카즈와 삼남 지카타다를 제쳐두고 4남 모리치카를 후계자로 정했다. 이 과정에서 모토치카는 자신의 뜻에 반대한 친족들을 할복시키기까지 했다. 크게 낙심한 지카카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22]
6. 3. 임진왜란 참전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다.[29]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각 다이묘에게 병력 동원령을 내렸는데, 조소카베 가문은 수군 전력으로 활약할 것을 기대받았다.[30] 정유재란에는 1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다.1596년에는 스페인 선박 산 펠리페 호가 태풍으로 파손되어 그의 영지에서 수리를 받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통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선교사들이 스페인의 식민지 건설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게 되었고, 이는 기독교 금지령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6. 4. 말년
1586년 시마즈씨에게 압박받던 오토모씨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구원을 요청하면서 히데요시는 규슈 정벌군을 일으켰다.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장남 노부치카와 함께 종군했으나, 헤쓰기가와 전투에서 노부치카가 전사했다.[22]1588년 거점을 오다카사카성(大高坂城)으로 옮겼다. 노부치카의 죽음으로 후계자 문제가 발생했고, 모토치카는 다른 가문의 양자로 들어간 차남 지카카즈와 삼남 지카타다를 제쳐두고 4남 모리치카를 후계자로 정했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 종군하고 같은 해 말 본거지를 우라도성(浦戸城)으로 이전했다.
1592년 임진왜란에는 3천 명을, 정유재란에는 1만 3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다.
1596년 스페인 선박 산 펠리페 호가 태풍으로 파손되어 그의 영지에서 수리를 받게 되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선교사들이 스페인의 식민 제국 건설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고 기독교 금지령을 강화했다.
1597년 3월 조소카베 백조목을 반포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조선에서 철수했고,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의를 얻어 삼남 지카타다를 유폐했다.
1599년 4월 모리치카와 함께 상경하여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알현한 후, 후시미성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고, 5월 19일 향년 61세로 사망했다.[32]
7. 인물 및 일화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뛰어난 지도력과 더불어 '조소카베 100개조 규약'을 제정하고 경제적으로 강력한 성읍을 건설하려 했던 노력으로도 기억된다. 그는 오코(奥)에서 오타자카(大坂)를 거쳐 우라도(浦戸)로 거점을 이동했다.[4]
모토치카는 후계자로 기대했던 장남 노부치카가 헤쓰기가와 전투에서 전사하자 큰 슬픔에 빠졌다.[55] 이후 영웅으로서의 패기를 잃고, 막내아들 모리치카에게 가독 상속을 강행하며, 반대하는 가신들을 일족까지 모두 죽이는 등 냉혹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도사 이야기(土佐物語)』등의 기록에 따르면, 노부치카가 죽기 전의 모토치카는 가신들의 간언이나 의견을 귀 기울여 듣는 도량이 있었고, 정이 많은 인물이었다. 쇼즈이성(勝瑞城) 공략 당시에는 상급 가신뿐만 아니라 하급 이치료구조쿠의 의견까지 두루 받아들였다. 매부인 나미카와 기요무네(波川清宗)가 모반을 일으켰다가 처형되었을 때, 그의 동생들은 살려주기도 했다.[57] 하쿠치성(白地城) 성주 오니시 가쿠요(大西覚養)가 미요시씨에게 돌아섰을 때에도 인질로 삼았던 그의 조카를 죽이지 않고 우대했으며, 미요시 야스나가(三好康長)의 아들 미요시 야스토시(三好康俊)가 아버지의 꾐에 넘어가 모토치카를 등졌을 때도 인질로 있던 야스토시의 아들을 정중하게 돌려보내 야스나가가 이에 감사했다.[58]
그러나 노부치카 사후, 모토치카는 시바 간스케(志和勘助)가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와 회견할 때 이에마사가 간스케를 마음에 들어 했다는 이유로, 해명도 듣지 않고 간스케와 그 일족을 죽이는 등 변모한 모습을 보였다.
『모토치카기(元親記)』에는 모토치카가 "율의제일"(律儀第一), "정중하고 예의바른 사람"(慇懃の人) 등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되며, 다른 군기물에서도 무용이 뛰어나고 인자한 명군으로 묘사되고 있다.[59][60] 다만, 호소카와 씨(細川氏)의 사서인 『호소카와 미요시 군신 아와 군기(細川三好君臣阿波軍記)』에는 불인불의(不仁不義)한 악인으로 평가되고 있다.[61]
모토치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만두를 받았을 때, 가신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챙기는 모습을 보여 히데요시를 기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사천성 전투에서는 간미 일직에게 철포 사격구멍 높이에 대한 지도를 하기도 했다.
모토치카는 도사 영내에 금주령을 내렸지만, 스스로는 술을 때때로 마셨다. 하쿠토메 노리시게(福留儀重)의 간언을 듣고는 스스로도 금주령을 어기지 않게 되었다.
모토치카는 가신들에게 "한 가지 기술에 정통하라. 여러 가지 기술을 탐하는 자는 능숙하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야마자키 전투 후, 사이토 도시미쓰의 딸인 후쿠를 오카요시 성에서 숨겨주었다.
오카요시 성에 거주하던 시절, 가신이었던 쿠마 효고가 현미 5되를 헌상하자, "벼 없이도 이것을 잘 밥으로 지어 서로 축하하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현미를 먹는 풍습이 없었고, 야마우치 가즈토요가 도사에 입국한 이후에 백미를 먹게 되었다.[39]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후시미 저택을 방문했을 때, 모토치카의 명령으로 새로 지은 어성문이 히데요시의 가마가 들어가지 않아 폐기된 적이 있다. 이 문은 도사국 설혜사의 본문으로 전용되었으나, 후에 풍우로 무너졌다.[36]
모토치카는 우라토 해상에서 잡은 고래를 통째로 히데요시에게 헌상한 적이 있다.[37]
7. 1. 가독 상속 이전
덴분 8년(1539년), 조소카베 구니치카의 맏아들로 도사국 오카요시 성에서 태어났다. 도사 슈고 호소카와 하루모토에게 편휘를 받아 '''모토치카'''라 이름 지었다.어린 시절에는 키가 컸지만 피부가 하얗고 조용하며, 사람을 만나도 인사나 대답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었기 때문에, "히메와코(姫若子)"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나약하고 겁이 많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때문에 아버지 조소카베 구니치카는 후계자 문제로 고민했다.
에이로쿠 3년(1560년) 5월, 아버지 구니치카가 도사군 아사쿠라 성주 혼잔씨를 공격한 나가하마 전투에 친동생 모토사다와 함께 참전하여 첫 출전을 치렀다. 스무 살이 넘은 늦은 첫 출전이었지만, 모토치카는 나가하마 전선에서 혼잔군을 공격한 조소카베군에 참여하여 직접 창을 들고 돌격하는 용맹함을 보였다. 이 전투에서 모토치카는 무예로 이름을 떨쳤고, 나가하마 전투에 이은 시오에 성(현 필산공원) 전투에서도 전과를 올렸다.
첫 출전인 나가하마 전투에서 가신 하타이젠지 호고(秦泉寺豊後)에게 창 사용법과 장수의 행동 방식을 물었다는 일화가 있다. 하타이젠지 호고는 “창은 적의 눈과 코를 찌르듯이 겨누고, 장수는 앞장서서 달리지 않고 겁먹지 않는 것”이라고 답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모토치카는 이 가르침대로 행동하여 적병을 훌륭하게 무찔렀고, “오니와코(鬼若子)”라는 칭찬을 받았다(『모토치카키(元親記)』).
6월, 아버지 구니치카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가독을 상속했다.
이치조 씨를 섬기던 시절 사찰봉행(寺社奉行)을 지낸 경험 때문인지, 사찰 중건에 적극적이었다. 시코쿠 통일 전쟁 중에도 사누키국의 사찰을 중건하는 등 승려들을 두텁게 보호했으며, 다니 다다스미나 히유(非有) 등 신관·승려 출신 인물이 가신으로 발탁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히유는 모토치카의 신임을 얻어 출두인(出頭人)으로서 영토 지배에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7. 2. 시코쿠 제압 당시
헤쓰기가와 전투에서 모토치카는 후계자로 기대했던 장남 노부치카를 잃었다.[55] 이로 인해 모토치카는 자결하려 했으나 가신들의 만류로 마음을 다잡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모토치카를 위로하기 위해 오스미국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모토치카는 이를 사양했다.[56]이후 모토치카는 영웅으로서의 패기를 잃고 막내아들 모리치카에게 가독 상속을 강행했다. 이 과정에서 반대하는 가신들과 그 일족을 멸하는 등, 노부치카 사후 모토치카는 구타케 친나오의 참언을 듣고 더욱 고집스러운 성격으로 변해 이전의 도량을 잃었다고 한다.
『도사 이야기(土佐物語)』등의 기록에 따르면, 노부치카 사망 이전의 모토치카는 가신들의 간언과 의견을 경청하는 도량이 있었다. 아와의 쇼즈이성(勝瑞城) 공략 당시에는 상급 가신뿐만 아니라 하급 이치료구족의 의견까지 수용했다. 또한 정이 많아 자신의 매제인 나미카와 기요무네(波川清宗)가 모반을 일으켰다가 처형되었을 때, 그의 동생들은 살려주었다. 이들은 나중에 형의 복수를 위해 도망쳤지만, 모토치카는 가신들의 추격 요청을 허락하지 않았다.[57]
아와 하쿠치성(白地城) 성주 오니시 가쿠요(大西覚養)가 미요시씨에게 돌아섰을 때에도 인질로 잡았던 그의 조카를 죽이지 않고 우대했다. 미요시 야스나가(三好康長)의 아들 미요시 야스토시(康俊)가 아버지의 꾐에 넘어가 모토치카를 등졌을 때도, 인질로 있던 야스토시의 아들을 정중하게 돌려보내 야스나가의 감사를 받았다.[58]
그러나 노부치카 사후, 모토치카의 성격은 변했다. 다카오카군(高岡郡)의 니이다 5인중(仁井田五人衆) 중 한 명이었던 시바 간스케(志和勘助)가 아와의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와 회견했을 때, 이에마사는 간스케의 인물됨에 반해 그를 등용하려 했다. 간스케는 모토치카에 대한 충의를 이유로 거절했지만, 이를 엿들은 모토치카는 해명도 듣지 않고 간스케와 그 일족을 죽였다.
『모토치카기(元親記)』에서는 모토치카를 "율의제일"(律儀第一), "정중하고 예의바른 사람"(慇懃の人) 등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다른 군기물에서도 무용이 뛰어나고 인자한 명군으로 묘사하고 있다.[59][60] 다만, 아와(도쿠시마 현) 호소카와 씨(細川氏)의 사서인 『호소카와 미요시 군신 아와 군기(細川三好君臣阿波軍記)』에서는 모토치카를 불인불의(不仁不義)한 악인으로 평가하고 있다.[61]
7. 3. 도요토미 정권 치하
헤쓰기가와 전투에서 모토치카는 후계자로 기대하던 장남 노부치카를 잃었다.[55] 슬픔에 빠진 모토치카는 자결하려 했으나 하인의 만류로 마음을 다잡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모토치카를 위로하기 위해 오스미국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모토치카는 이를 사양했다.[56] 이후 모토치카는 영웅으로서의 패기를 잃고 막내아들 모리치카에게 가독 상속을 강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반대하는 가신들과 그 일족을 숙청했다. 노부치카 사후 모토치카는 히사타케 지카나오(久武親直)의 참언을 듣고 더욱 고집스러운 성격으로 변해 이전의 도량을 잃었다고 한다.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각지의 다이묘들을 초청해 뱃놀이 연회를 열었을 때, 히데요시는 다이묘들에게 당시 일본에서는 생소하던 만두를 대접했다. 다른 다이묘들과는 달리 모토치카는 만두를 조금만 떼어먹고 나머지는 남겨 두었다. 히데요시가 "조소카베 공은 그 만두를 어쩌실 생각이신가?"하고 묻자, 모토치카는 "태합 전하께 받은 만두이니 돌아가서 아랫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히데요시는 이 말에 감동하여 모토치카에게 준비해 두었던 만두를 전부 주었다.
임진왜란 사천성 전투에서 가키미 가즈나오(垣見一直)에게 조총 사격 시 조총의 높낮이에 대해 지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587년, 모토치카는 고소카베 지카야스와 아들 노부치카와 함께 규슈 침공에 참여했으나, 헤쓰기가와 전투에서 노부치카가 전사했다. 1590년, 모토치카는 시모다 공성전과 오다와라 공성전에서 함대를 이끌었고, 1592년에는 임진왜란(분로쿠·게이초의 역)에도 참전했다.
1596년, 스페인 선박 산 펠리페호가 마닐라에서 아카풀코로 향하던 중 조소카베 영지에서 난파되었다. 모토치카는 선박의 화물을 압류했고, 이 사건은 히데요시에게 보고되어 나가사키에서 26명의 일본 순교자의 순교로 이어졌다. 이는 일본에서 국가 차원의 최초의 기독교 박해였다. 게이초 원년(1596년)에는 산페리페호 사건에 대처하였고, 히데요시에 의한 기독교 박해의 도화선을 만들었다.
7. 4. 기타 일화
헤쓰기가와 전투에서 모토치카가 후계자로 점찍었던 장남 노부치카가 전사하자, 모토치카는 자신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하인의 만류로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55]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런 모토치카를 위로하기 위해 오스미국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모토치카는 이를 사양했다.[56] 이후 모토치카는 영웅으로서의 패기를 잃고 막내아들인 모리치카에게 가독 상속을 강행했으며, 이를 반대하는 가신들과 그 일족을 모두 죽이는 등, 노부치카가 죽은 후의 모토치카는 히사타케 지카나오(久武親直)의 참언을 듣고 더욱 고집스러운 성격으로 변해 이전의 도량을 잃었다고 한다.『도사 이야기(土佐物語)』등의 기록에 따르면, 노부치카가 죽기 전의 모토치카는 가신들의 간언이나 의견을 귀 기울여 듣는 도량이 있었다. 쇼즈이성(勝瑞城) 공략 당시에는 상급 가신뿐만 아니라 하급 이치료구조쿠의 의견까지 두루 받아들였다. 또한 정이 많아서 매부인 나미카와 기요무네(波川清宗)가 모반을 일으켰다가 처형되었을 때, 그의 동생들은 살려주었다. 다만, 이들은 이후 형의 복수를 위해 도망쳤고, 가신들은 이들을 추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모토치카는 허락하지 않았다.[57]
하쿠치성(白地城) 성주 오니시 가쿠요(大西覚養)가 미요시씨에게 돌아섰을 때에도 인질로 삼았던 그의 조카를 죽이지 않고 우대했으며, 미요시 야스나가(三好康長)의 아들 미요시 야스토시(三好康俊)가 아버지의 꾐에 넘어가 모토치카를 등졌을 때도 인질로 있던 야스토시의 아들을 죽이지 않고 정중하게 돌려보내 야스나가가 이에 감사했다.[58] 그러나 노부치카가 죽은 후에는 이러한 성격이 변하여, 시바 간스케(志和勘助)가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와 회견할 때 이에마사가 간스케를 마음에 들어 했다는 이유로, 해명도 듣지 않고 간스케와 그 일족을 죽이는 등 냉혹한 모습을 보였다.
『모토치카기(元親記)』에는 모토치카가 "율의제일"(律儀第一), "정중하고 예의바른 사람"(慇懃の人) 등으로 평가되며, 그 밖의 군기물(軍記物)에서도 무용이 뛰어나고 인자한 명군으로 묘사되고 있다.[59][60] 다만, 호소카와 씨(細川氏)의 사서인 『호소카와 미요시 군신 아와 군기(細川三好君臣阿波軍記)』에는 불인불의(不仁不義)한 악인으로 평가되고 있다.[61]
모토치카는 도사 영내에 금주령을 내렸지만, 스스로는 술을 때때로 들여왔다. 하쿠토메 노리시게(福留儀重)의 간언을 듣고는 스스로도 금주령을 어기지 않게 되었다.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조소카베 100개조 규약'을 제정하고 경제적으로 강력한 성읍을 건설하려 했던 노력으로도 기억되고 있다. 그는 오코(奥)에서 오타자카(大坂)를 거쳐 우라도(浦戸)로 거점을 이동했다.[4]
모토치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만두를 받았을 때, 가신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챙기는 모습을 보여 히데요시를 기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사천성 전투에서는 간미 일직에게 철포 사격구멍 높이에 대한 지도를 하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후시미 저택을 방문했을 때, 모토치카의 명령으로 새로 지은 어성문이 히데요시의 가마가 들어가지 않아 폐기된 적이 있다. 이 문은 도사국 설혜사의 본문으로 전용되었으나, 후에 풍우로 무너졌다.[36]
모토치카는 우라토 해상에서 잡은 고래를 통째로 히데요시에게 헌상한 적이 있다.[37]
모토치카는 가신들에게 "한 가지 기술에 정통하라. 여러 가지 기술을 탐하는 자는 능숙하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야마자키 전투 후, 사이토 도시미쓰의 딸인 후쿠를 오카요시 성에서 숨겨주었다.
오카요시 성에 거주하던 시절, 가신이었던 쿠마 효고가 현미 5되를 헌상하자, "벼 없이도 이것을 잘 밥으로 지어 서로 축하하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현미를 먹는 풍습이 없었고, 야마우치 가즈토요가 도사에 입국한 이후에 백미를 먹게 되었다.[39]
8. 관련 자료
- 土佐物語일본어 - 저자 불명으로 호에이(宝永) 5년(1708년)부터 교호(享保) 3년(1718년)에 걸쳐 요시다 다카요(吉田孝世)가 편찬 저술하였다.
- 四国軍記일본어 - 저자 불명으로 에도 시대 겐로쿠(元禄) 연간에 오바타 구니키(小畑邦器)가 개정하였다.
- 土佐国編年紀事略일본어 - 고카(弘化) 연간에 유학자 다니 가게이(谷景井)에 의해서 출판되었다는 설이 있다.
- 石谷家文書일본어 - 2013년 하야시바라 미술관(林原美術館) 소장품 중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듬해 모토치카 관련 문서가 포함되어 있음이 발표되었다.[49]
- 南海治乱記일본어 - 에도 시대 병법가로 사누키(讃岐) 출신 고자이 시게스케(香西成資)가 기록한 미요시 씨(三好氏) 등 시코쿠 센고쿠 다이묘들의 흥망을 다룬 군기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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