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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다다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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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케다 다다쓰구는 1599년에 태어나 1615년에 사망한 인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외손자이다. 1603년,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단절로 인해 5세의 나이에 비젠 오카야마 28만 석 영지를 받았다. 1614년 아버지 사망 후 영지를 상속받았으며, 오사카 전투에 참전했으나 귀성 후 병을 얻어 1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다다쓰구 사후 동생인 이케다 다다오가 뒤를 이었으며, 묘소는 세이타이인에 있다. 또한 어머니 도쿠히메가 이복 형을 암살하려다 다다쓰구가 대신 독만두를 먹고 죽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실제 역사와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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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다다쓰구
기본 정보
이케다 다다쓰구
청태원 소장
시대에도 시대 전기
출생게이초 4년 2월 18일 (1599년3월 14일)
사망게이초 20년 2월 23일 (1615년3월 22일)
어릴 적 이름후지마쓰
다른 이름사부로, 사부로고로 (통칭)
계명류호지덴 운다이겐쇼 대거사
묘소오카야마현오카야마시미나미구의 청태원
관위종4위하・좌위문독, 시종
주군도쿠가와 이에야스→히데타다
비젠오카야마번 번주
씨족이케다 씨 (종가→인슈 가문)
부모아버지: 이케다 데루마사, 어머니: 도쿠히메
형제도시타카, 마사토라, 데루타카, 도시마사, 차차히메, 다다쓰구, 다다오, 데루즈미, 마사쓰나, 고쇼인, 데루오키
정치
전임자(고바야카와 히데아키)
후임자이케다 다다카쓰
직책오카야마번 번주 (이케다 가문, 다다쓰구 류)
임기1603년 ~ 1615년
대수1

2. 생애

게이초 4년 2월 18일 후시미에서 태어나, 1615년 오카야마성에서 1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외손자였기 때문에, 오카야마번을 다스리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후사 없이 개역되자, 1603년 불과 5세의 나이로 비젠 오카야마 28만 석에 봉해졌다. 그러나 너무 어려 정무를 볼 수 없어, 이복형 도시타카가 섭정을 하였고, 다다쓰구는 아버지의 히메지성에 머물렀다.[1]

1614년 아버지 이케다 데루마사가 사망한 후 영지로 들어가, 오사카 겨울 전투에 도쿠가와 편으로 참전했지만, 귀성 후 발병하여 이듬해 사망했다. 모리 다다마사의 딸과 약혼했으나, 혼인 전에 사망하여 후사가 없었다. 다다쓰구 형제의 계통은, 동복 동생 다다오의 적자 미쓰나카 때 인바 돗토리번으로 전봉되어, 막말까지 이어졌다.

묘소는 세이타이인에 있으며, 1964년1978년 두 차례 이전되었다. 묘소는 오카야마현 지정 중요 문화재이다.[3]

2. 1. 출생과 가계

게이초 4년 2월 18일, 후시미에서 태어났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외손자였다.

2. 2. 번주 취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외손자였던 이케다 다다쓰구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개역되자, 1603년에 불과 5세의 나이로 비젠 오카야마번 28만 석의 번주가 되었다.[1] 그러나 어린 다다쓰구가 정무를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복형인 도시타카가 섭정 대행으로 오카야마성에 들어가고, 다다쓰구는 아버지의 히메지성에 머물렀다.[1]

2. 3. 아버지의 사망과 영지 상속

게이초 19년(1614년) 이케다 데루마사가 사망하자, 16세의 나이로 영지를 상속받았다. 아버지의 유령(遺領) 중 어머니 료쇼인(良正院)의 화장료인 서하리마 10만 석을 분여받아 총 38만 석을 영유하게 되었다. 형 도시타카와 함께 오사카 겨울 전투도쿠가와 편으로 참전했지만, 귀성 후 병에 걸려 이듬해 게이초 20년(1615년)에 오카야마성에서 사망하였다.

2. 4. 오사카 전투 참전과 사망

1614년(게이초 19년), 아버지 이케다 데루마사가 사망하자 16세의 나이로 가독을 상속받아 영지로 들어갔다. 어머니 료쇼인의 화장료인 서하리마 10만 석을 분여받아 총 38만 석을 영유했다. 형 도시타카와 함께 오사카 겨울 전투도쿠가와 측으로 참전했으나, 귀성 후 병을 얻어 이듬해 1615년(게이초 20년) 오카야마성에서 1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모리 다다마사의 딸과 약혼했으나, 혼인 전에 사망하여 후사가 없었으므로 동복 동생인 다다오가 뒤를 이었다.

2. 5. 묘소와 유해 조사

이케다 다다쓰구의 묘소는 세이타이인에 있으며, 목상과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유해는 묘 아래 나무 관 안에 앉은 자세로 매장되었다.[3] 세이타이인은 원래 오카야마현오카야마시나카구 코하시에 있었으나, 1964년 국도교 건설로 인해 오카야마시 미나미구 우라야스 혼초로 이전했다. 이에 따라 묘소도 1978년에 현지로 이전되었으며, 오카야마현 지정 중요 문화재이다.[3]

3. 독만두 전설

이케다 다다쓰구(충계)의 죽음에는 도쿠히메가 친아들 다다쓰구를 히메지성 성주로 만들기 위해 이복형 이케다 토시타카를 독살하려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러나 다다쓰구가 형을 대신해 독이 든 만두를 먹고 죽었다고 한다.[3][4]

하지만 실제로는 다다쓰구는 1615년 2월 23일에 오카야마성에서, 도쿠히메는 같은 해 2월 4일에 니조성에서 사망했다. 1978년 다다쓰구 묘 이장 시 유해 조사에서도 독살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3. 1. 전설의 내용

어머니 도쿠히메가 친아들인 다다쓰구를 히메지성 성주로 만들기 위해, 이복형이자 히메지 성주였던 이케다 도시타카를 암살하려 꾀하였다. 오카야마성에서 도시타카가 다다쓰구와 대면했을 때, 독을 넣은 만두를 도시타카에게 권하려 했다. 여종이 손바닥에 "독"이라고 써서 보여주자, 도시타카는 손을 대지 않았지만, 이를 눈치챈 다다쓰구는 도시타카의 독이 든 만두를 빼앗아 먹고 사망했다. 이처럼 몸을 바쳐 장남이자 적자인 도시타카를 지켰다는 것이다. 또한, 도쿠히메도 이를 부끄러워하며 독이 든 만두를 먹고 사망했다고 전해진다.[3][4]

3. 2. 역사적 사실과 전설의 불일치

충계의 요절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충계의 어머니 도쿠히메는 친아들 충계를 히메지성 성주로 만들기 위해, 의붓아들이자 히메지 성주였던 이케다 토시타카를 암살하려 했다. 오카야마성에서 토시타카가 충계와 만났을 때, 도쿠히메는 만두에 독을 넣어 토시타카에게 권하려 했다. 하지만 여종이 손바닥에 "독"이라고 써서 보여주자 토시타카는 만두를 먹지 않았다. 이를 눈치챈 충계는 토시타카가 먹을 뻔한 독이 든 만두를 대신 먹고 사망했다. 이처럼 충계는 장남이자 적자인 토시타카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것이다. 또한 도쿠히메도 이 일에 책임을 느끼고 독이 든 만두를 먹고 사망했다고 전해진다.[3][4]

그러나 실제 역사 기록에 따르면, 충계는 1615년 2월 23일에 오카야마 성에서 사망했고, 도쿠히메는 같은 해 2월 4일에 니조 성에서 사망하여 교토 지온인에 묻혔다. 따라서 전설과 실제 역사적 사실은 일치하지 않는다. 1978년, 충계의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독살 의혹을 확인하기 위한 유해 조사에서도 독살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참조

[1] 서적 藩史大事典 第6巻 中国・四国編 雄山閣出版 1990-01-01 # 년도만 제공된 경우 1월 1일로 설정
[2] 논문 池田輝政の男子について
[3] 뉴스 【名城と女】姫路城と督姫(2) 「毒饅頭」噂残し失意の死 https://www.zakzak.c[...] 産経デジタル 2015-06-27
[4] 서적 岡山城物語 下 岡山リビング新聞社 1992-01-01 # 년도만 제공된 경우 1월 1일로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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