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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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혼은 고려 시대의 문신으로, 1268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충렬왕과 충선왕 시대를 거치며 여러 요직을 역임했으나, 당쟁과 모함으로 인해 파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충선왕의 개혁 정치에 참여하여 원나라와 교류하며 관제 개편에 기여했지만, 부정부패 혐의로 폄출되기도 했다. 말년에는 도첨의정승을 지냈으며, 사후 문장이란 시호를 받았다. 그는 성품이 관대하고 후덕했으나, 재물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받았다.
이혼은 고려 후기 충렬왕과 충선왕 대에 걸쳐 여러 관직을 역임한 문신이다.
이혼은 손님 맞기를 즐겼고 거문고와 바둑을 좋아했으며, 성 남쪽에 복산장(福山莊)이라는 별장을 마련해 두고 자주 왕래했다.[2]
2. 생애
1295년(충렬왕 21)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오른 후, 충렬왕이 탐라(耽羅)의 민호를 내고(內庫)에 예속시키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왕의 미움을 샀다. 또한 왕의 총신들이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잦아지자, 도당(都堂)에서 왕명을 빙자한 폐단을 막을 것을 건의했다가, 이 일로 인해 왕의 총신들에게 모함을 받아 파직되기도 했다.
1297년(충렬왕 23)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1299년(충렬왕 25)과 1303년(충렬왕 29) 두 차례 파직되었다. 1307년(충렬왕 33)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도첨의시랑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판밀직사사로 임명되어 원나라에서 관리 선발 제도 개혁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기득권 세력의 원망을 샀고, 익명 투서 사건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렀다.
충선왕의 신임을 받아 벽상삼한(壁上三韓)으로 승진했으나, 숙비(淑妃)의 모함으로 지방관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소환되어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312년(충선왕 복위 4) 61세로 사망했으며, 문장(文莊)이라는 시호를 받았다.[2]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1268년(원종 9) 17세로 과거에 급제하여 광주참군(廣州叅軍)으로 임명되었고, 내직으로 들어와 국학학정(國學學正)으로 보임되었다.[2]
1278년(충렬왕 3) 비칙치(必闍赤)가 처음 설치되었을 때 14명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이혼은 천우위녹사(千牛衛錄事)였다.[3]
이듬해 우정언(右正言)을 역임했고,[4] 이후 이혼으로 개명했다.
1287년(충렬왕 13) 첨의사인(僉議舍人)·우부승지(右副承旨)에 임명되었고,[2] 1289년(충렬왕 15) 국자시(國子試)의 시험관으로서 김승인(金承印), 최운(崔雲) 등 70명을 선발하였다.[5]
1291년(충렬왕 17) 좌부승지(左副承旨), 1292년(충렬왕 18)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문한학사승지(文翰學士承旨)로 승진하였으며, 1293년(충렬왕 19) 외직으로 나가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가 되었다가 1295년(충렬왕 21)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올랐다.
2. 2. 충렬왕 대의 관직 생활
1278년(충렬왕 3) 비칙치(必闍赤)가 처음 설치되었을 때 천우위녹사(千牛衛錄事)였던 이혼도 14명의 비칙치 중 한 명이었다.[3] 이듬해 우정언(右正言)을 역임했고[4], 이후 이혼으로 개명했다.
1287년(충렬왕 13) 첨의사인(僉議舍人)·우부승지(右副承旨)에 임명되었고[2], 1289년(충렬왕 15) 국자시(國子試)의 시험관으로서 김승인(金承印), 최운(崔雲) 등 70명을 선발하였다.[5]
1291년(충렬왕 17) 좌부승지(左副承旨), 1292년(충렬왕 18)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문한학사승지(文翰學士承旨)로 승진하였으며, 1293년(충렬왕 19) 외직으로 나가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가 되었다가 1295년(충렬왕 21)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올랐다.
당시 충렬왕(忠烈王)이 탐라(耽羅)[6]의 민호(民戶)를 편성해 내고(內庫)에 예속시키려고 하였다가 이혼이 불가함을 극력 주장하자 왕이 불쾌하게 여겼다. 왕의 총신들이 지방에서 백성들을 들볶는 일이 많아지자 도당(都堂)에서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이에 왕의 총신들이 반감을 품고 충렬왕에게 호소하자, 노한 충렬왕이 순마관(巡馬官)에게 명해 당리(堂吏) 이우(李紆)를 잡아 그 의견을 제일 먼저 내놓은 관리가 누군지 묻게 했다. 이우가 전적으로 자신이 행한 것이라고 하자 충렬왕이 더욱 노해 만호(萬戶) 고종수(高宗秀)를 시켜 반드시 진상을 밝히게 했다. 혹독한 고문을 당한 이우가 거짓으로 자복해 이혼을 지목하자, 충렬왕은 이혼을 수감하고 이듬해에 결국 파직시켜 버렸다.
1297년(충렬왕 23)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세자원빈(世子元賓)으로 기용되고, 1298년(충선왕 즉위년) 검교사공(檢校司空)·서경유수(西京留守)·평양부윤(平壤府尹)을 거쳐 밀직사사(密直司使)·전조판서(銓曹判書)·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수국사(修國史)로 승진했으나 충렬왕이 복위한 후인 1299년(충렬왕 25) 파직되었다. 1303년(충렬왕 29) 다시 지밀직사사로 기용되고 이듬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승진했으나 또 파직되었다.
1307년(충렬왕 33) 왕유소(王惟紹)와 송방영(宋邦英)이 처형되고 충선왕(忠宣王)이 국정을 장악하게 되자 도첨의시랑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판밀직사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원나라에 있는 충선왕에 의해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불려가 관리 선발의 방식에 대해 의논한 후 관제를 개정했다.[7] 이로 인해 밀직(密直)·중방(重房)·내시(內侍) 등 3관(官)과 5군(軍)이 모두 없어지자 실직자들이 그를 크게 원망했다.
이혼이 최균(崔鈞)·김원구(金元具)·권준(權準)과 함께 충선왕이 정한 관제와 그에 대한 원나라 재상들의 의견서를 가지고 원나라에서 돌아오자 마침 재추(宰樞)들이 자운사(慈雲寺)에서 회동했는데, 어떤 사람이 익명의 투서를 넣으니 이혼이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2. 3. 충선왕 대의 개혁 정치 참여와 시련
1297년(충렬왕 23) 이혼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세자원빈(世子元賓)으로 기용되었다.[2] 1298년(충선왕 즉위년)에는 검교사공(檢校司空)·서경유수(西京留守)·평양부윤(平壤府尹)을 거쳐 밀직사사(密直司使)·전조판서(銓曹判書)·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수국사(修國史)로 승진했다.[2]
1307년(충렬왕 33) 왕유소(王惟紹)와 송방영(宋邦英)이 처형되고 충선왕(忠宣王)이 국정을 장악하면서, 이혼은 도첨의시랑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판밀직사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의 요청으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원나라를 방문, 관리 선발 방식에 대해 논의하고 관제를 개정했다.[7] 이 과정에서 밀직(密直)·중방(重房)·내시(內侍) 등 3관(官)과 5군(軍)이 모두 없어지자, 이로 인해 실직한 자들이 이혼을 크게 원망했다.
이혼이 최균(崔鈞)·김원구(金元具)·권준(權準)과 함께 충선왕이 정한 관제와 원나라 재상들의 의견서를 가지고 귀국하던 중, 재추(宰樞)들이 자운사(慈雲寺)에서 회동했을 때 어떤 사람이 익명 투서를 넣었다. 이로 인해 이혼은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충선왕이 귀국한 후 국사를 모두 예문관(藝文館)에서 보고하게 하고, 이혼을 대사백(大詞伯)으로 임명하고 벽상삼한(壁上三韓)으로 승진시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숙비(淑妃)의 모함을 받아 회주(淮州)목사(牧使)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예주(禮州)목사(牧使)로 좌천되었으며, 이후 소환되어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2. 4. 말년
1291년(충렬왕 17)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고, 1292년(충렬왕 18)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문한학사승지(文翰學士承旨)로 승진하였다. 1293년(충렬왕 19) 외직으로 나가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가 되었다가 1295년(충렬왕 21)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올랐다.[2]
당시 충렬왕이 탐라(耽羅)[6]의 민호(民戶)를 편성해 내고(內庫)에 예속시키려 하자 이혼이 불가함을 극력 주장하여 왕이 불쾌하게 여겼다. 마침 왕의 총신들이 지방으로 출장 가 백성들을 들볶는 일이 많아지자 도당(都堂)에서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이에 왕의 총신들이 반감을 품고 충렬왕에게 호소하자, 노한 충렬왕이 순마관(巡馬官)에게 명해 당리(堂吏) 이우(李紆)를 잡아 그 의견을 제일 먼저 내놓은 관리가 누군지 묻게 했다. 이우가 전적으로 자신이 행한 것이라고 하자 충렬왕이 더욱 노해 만호(萬戶) 고종수(高宗秀)를 시켜 반드시 진상을 밝히게 했다. 혹독한 고문을 당한 이우가 거짓으로 자복해 이혼을 지목하자, 충렬왕은 이혼을 수감하고 이듬해에 결국 파직시켜 버렸다.[2]
1297년(충렬왕 23)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세자원빈(世子元賓)으로 기용되고, 1298년(충선왕 즉위년) 검교사공(檢校司空)·서경유수(西京留守)·평양부윤(平壤府尹)을 거쳐 밀직사사(密直司使)·전조판서(銓曹判書)·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수국사(修國史)로 승진했으나 충렬왕이 복위한 후인 1299년(충렬왕 25) 파직되었다. 1303년(충렬왕 29) 다시 지밀직사사로 기용되고 이듬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승진했으나 또 파직되었다.[2]
1307년(충렬왕 33) 왕유소(王惟紹)와 송방영(宋邦英)이 처형되고 충선왕이 국정을 장악하게 되자 도첨의시랑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판밀직사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원나라에 있는 충선왕에 의해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불려가 함께 관리 선발의 방식에 대해 의논한 후 관제를 개정했다.[7] 이에 따라 밀직(密直)·중방(重房)·내시(內侍) 등 3관(官)과 5군(軍)이 모두 없어지자 실직자들이 그를 크게 원망했다.[2]
이혼이 최균(崔鈞)·김원구(金元具)·권준(權準)과 함께 충선왕이 정한 관제와 그에 대한 원나라 재상들의 의견서를 가지고 원나라에서 돌아오자 마침 재추(宰樞)들이 자운사(慈雲寺)에서 회동했는데, 어떤 사람이 익명의 투서를 넣으니 이혼이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충선왕이 귀국하자 국사를 모두 예문관(藝文館)에서 보고하게 한 후 이혼을 대사백(大詞伯)으로 임명하고 벽상삼한(壁上三韓)으로 승진시켰다. 그러나 얼마 못가 숙비(淑妃)의 모함을 받아 회주목사(淮州牧使)로 폄출되었다가 다시 예주목사(禮州牧使)로 폄출되었으며 뒤에 소환되어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2]
1312년(충선왕 복위 4) 61세로 졸하자 문장(文莊)이란 시호를 받았다.[2]
3. 성품 및 평가
3. 1. 부정적 평가
이혼은 성품이 관대하고 후덕했으나, 오랫동안 관리 선발과 임명을 맡으면서 청렴하지 못해 재산이 많았다는 평가를 받는다.[2]
4. 일화
5. 기타
박인량은 시문(詩文)이 맑고도 통창했는데, 장단구(長短句) 몇 편이 전해진다.[9] 영해로 좌천되었을 때 바다에 떠있는 뗏목을 가져다가 무고(舞鼓)를 만들었는데, 오늘날 그 내용이 악부(樂府)에 전한다.[2]
6.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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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조부: 이윤관(李允寬)[1], 형부시랑(刑部侍郎) 역임
- 조부: 이순(李順)[1], 보승별장(保勝別將) 역임
- 아버지: 이천(李仟)[2], 응양군대장군(鷹揚軍大將軍)·지예부사(知禮部事) 역임
- 어머니: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김기손(金起孫, ? ~ 1268년)의 딸[3]
- 동복 형: 이자원(李子源)[2], 직문한서(直文翰署) 및 증(贈) 대사성(大司成) 역임, 이언충(李彦冲, 1273년 ~ 1338년)의 아버지
- 이복 동생: 이자화(李子華)[4],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선부전서(選部典書) 역임, 이구직(李丘直, 1339년 ~ 1394년)의 증조부
- 질서(조카사위): 백문우(白文佑), 전법좌랑(典法佐郞) 역임[5]
- 부인: 미상
- 아들: 이언승(李彦昇), 대장군(大將軍) 역임[6]
- 아들: 이이(李異)[7][8], 성균악정(成均樂正) 역임, 아들 없이 아버지 이혼보다 먼저 사망
- 손자: 이익(李翊),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 역임[9]
참조
[1]
서적
고려열조등과록
[2]
서적
고려사 이혼전
[3]
서적
고려사 김주정전
[4]
서적
고려사 박항전
[5]
서적
고려사 선거지
[6]
문서
지금의 제주도
[7]
문서
[8]
서적
고려사 이혼전
[9]
문서
지금의 경북 영덕군
[10]
서적
청강집
[11]
문서
이언충 묘지명
[12]
서적
씨족원류
[13]
문서
이구직 묘표
[14]
서적
전의이씨족보
[15]
서적
전의이씨족보
[16]
서적
전의이씨족보
[17]
서적
동인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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