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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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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선왕은 고려의 제26대 왕으로, 1277년 세자로 책봉된 후 원나라에서 몽골식 이름을 받았다. 그는 1298년 충렬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지만, 권문세가의 반대와 왕비와의 갈등으로 7개월 만에 물러나 원나라로 돌아갔다. 이후 원나라 황실과의 관계를 통해 심양왕에 봉해졌고, 1308년 고려 왕으로 복귀했으나 개혁 정치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고려와 심양을 동시에 통치하는 독특한 형태의 동군연합을 이루었으며, 말년에는 티베트로 유배되기도 했다. 충선왕은 고려 왕실의 동성혼을 금지하고, 15개의 가문을 선정하여 왕실과의 혼인을 장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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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왕원 (王謜), 후에 왕장 (王璋)
몽골 이름이지르부카 (익지례보화, Ijir Bukhqa, 益知禮普花)
출생일1275년 10월 27일 (양력)
출생지고려 개경 사판궁
사망일1325년 7월 1일 (양력)
사망지원나라 연경 저택
능호덕릉
시호고려: 선효대왕(宣孝大王), 원: 충선왕(忠宣王)
봉호심양왕
재위
1차 재위1298년 3월 9일 ~ 1298년 10월 1일 (양력)
2차 재위1308년 9월 21일 ~ 1313년 4월 28일 (양력)
태상왕1313년 4월 28일 ~ 1325년 7월 1일 (양력)
왕세자1277년 2월 23일 ~ 1298년 3월 9일 (양력)
가족 관계
부친충렬왕
모친제국대장공주
형제자매소군 왕서
강양공
아우
정녕원비
명순원비
왕비계국대장공주
후궁의비 예쉬진
정비 왕씨
조비
순화원비 홍씨
순비 허씨
자녀광릉공
충숙왕
덕흥군
수춘옹주
관직
작위제26대 고려 국왕
심양왕1307년 또는 1308년 6월 17일 ~ 1316년 4월 9일 (양력)
전임 심양왕(신설)
후임 심양왕왕고
기타
로마자 표기Chungseon Wang
한자 표기忠宣王
일본어 표기ちゅうせんおう / チュンソンワン
참고 자료
관련 서적https://books.google.co.jp/books?id=EB4qAwAAQBAJ&printsec=frontcover#v=onepage&q&f=false

2. 생애

1277년 충렬왕의 세자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원나라에 가서 몽골 이름을 받았다. 1296년 원나라 황실의 진왕(晋王) 카말라의 딸 계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정비 왕씨, 조비, 순화원비 등 세 명의 한국인 부인을 두고 있었다.

1297년 어머니 제국대장공주가 갑자기 병으로 죽자, 그는 어머니가 살해당했다는 주장을 믿고 부왕(충렬왕)의 총애를 받던 후궁 무비(백야단)와 그 관련자들을 처벌했다.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충렬왕은 원나라에 퇴위를 청원했고, 1298년 충선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4] 그러나 몽골인 왕비와 한국인 부인 조비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충선왕은 즉위 7개월 만에 아버지에게 왕위를 돌려주었다.

쿠빌라이 칸의 손자였던 충선왕은 14세기 초 새 칸을 선출하기 위한 쿠릴타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템ür 칸 사후 왕위 계승 경쟁에서 충선왕은 카이샨(쿨릭 칸)아유르바르와다(부얀투 칸) 형제를 지지하여 이들이 차례로 칸위에 오르는데 공을 세웠다.[8]

쿨릭 칸은 충선왕의 공을 인정하여 고려 국왕 외에 "심양왕"이라는 칭호를 추가로 수여했다. 1308년 충렬왕 사후, 충선왕은 고려 왕위를 회복하고 정치 개혁을 시도했지만, 주로 중국에 머물렀다. 1310년 그의 중국식 칭호는 "심왕"으로 변경되었다.[9]

1313년 충선왕은 아들 왕도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1320년 부얀투 칸 사후 잠시 티베트로 유배되었으나, 곧 칸발릭으로 돌아와 1325년 사망했다.

2. 1. 탄생과 가계

1275년(충렬왕 1년) 음력 9월 30일, 개경 사판궁에서 충렬왕과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쿠빌라이의 외손자로서, 강력한 왕위계승권자로 등극하여 당시 충렬왕의 맏아들인 강양공을 제치고 세자에 책봉되었다.

쿠빌라이 카안의 차남 태자 친킴의 처이자 외숙모 코코진 카툰으로부터 이지르부카(益智禮普化, ᠢᠵᠢᠷᠪᠦᠺᠠ|이жирбухаmn)라는 이름을 받았다. 이지르부카는 몽골어로 힘센 황소를 뜻한다.

!생몰년부모비고
충렬왕1236년 - 1308년원종
순경태후 김씨
제25대 국왕
제국대장공주
장목왕후
1259년 - 1297년세조
예쉬진 카둔
칭기즈 칸의 증손녀


2. 2. 즉위 이전

1277년 충렬왕의 세자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원나라에 가서 몽골 이름을 받았다. 1296년에는 원나라 황실의 진왕(晋王) 카말라의 딸 계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다.

충선왕은 계국대장공주와의 혼인에 앞서 종친 서원후 왕영, 홍규, 조인규의 딸을 비(妃)로 맞아들였다. 특히 왕영의 딸 정비 왕씨1287년 공녀로 선발되었으나, 세자의 요청으로 공녀 차출을 면하고 1289년 그의 비가 되었다.

1297년 어머니 제국대장공주가 갑자기 병으로 죽자 원나라에서 귀국하였다. 그는 어머니가 병을 얻게 된 것이 내총(內寵)을 질투하는 자들의 소치라 하여, 당시 부왕(충렬왕)의 총애를 믿고 날뛰던 후궁 무비(백야단)를 살해하고, 그와 관련된 여러 사람을 귀양 보내거나 죽이고 가두었다. 이 지나친 처사와 왕비의 죽음에서 크게 충격을 받았는지 충렬왕은 왕위를 넘겨줄 뜻을 원나라에 알렸다.[4]

  • 1291년 세자(특진상주국 고려국왕세자)로 책봉되었다.
  • 1292년 조비가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하였다.
  • 1295년 8월 충렬왕의 대리 후 원(元)으로 돌아갔다.
  • 1296년 11월 원(元)의 진왕 카말라(카말라(元朝))의 딸 보탑실련(宝塔実憐)과 혼인하였다.

2. 3. 즉위

1298년(충렬왕 24년)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고, 부왕(父王)은 태상왕(太上王)이라 했다. 젊은 왕은 구폐를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를 실행하려 하였으나 권문세가의 비방을 많이 받았다. 정국(政局)의 쇄신을 꾀하고 먼저 관제를 개혁하던 무렵에 조비를 질투하던 왕비 계국공주와 왕의 반대파가 음모 사건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충선왕은 즉위 7개월 만에 물러나고 다시 충렬왕이 복위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왕실의 치정 문제도 관계되지만, 충렬·충선 두 왕을 둘러싼 정치적 모략과 중상의 결과로 보인다.[4]

재위 기간 중 권문세족이 인사권을 독점하며 폐단을 일삼던 정방을 폐지하고 사림원(詞林院)을 설치하였다. 왕실 내의 족내혼을 법으로 금지시키고 재상지종(宰相之宗)에 해당하는 가문을 지정하여 귀족의 자녀들을 왕족들과 혼인하게 하였다. 또한 각염법을 제정하고 의염창을 설치하여 소금의 전매제도를 실시하였다.

2. 4. 개혁 정치

1298년(충렬왕 24년)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고, 부왕(父王)은 태상왕(太上王)이라 했다. 젊은 왕은 구폐를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를 실행하려 하였으나 권문세족의 비방을 많이 받았다. 정국(政局)의 쇄신을 꾀하고 먼저 관제를 개혁하던 무렵에 왕비 계국공주와 왕의 반대파가 조비(趙妃)를 질투하여 음모 사건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충선왕은 즉위 7개월 만에 물러나고 다시 충렬왕이 복위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왕실의 치정 문제도 관계되지만, 충렬·충선 두 왕을 둘러싼 정치적 모략과 중상의 결과로 보인다.[23][24]

충선왕이 왕위를 아버지 충렬왕에게 반환한 뒤 원나라로 간 뒤에도 그에게 원한을 품은 왕유소, 송린, 석천보 등이 그를 모함하여 두 부자를 이간시켰으며, 계국공주의 재가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오히려 처형되었다. 충선왕은 다시 즉위할 때까지 10년간 계국공주와 원나라 수도에 머물면서 후에 원 무종이 되는 회령왕(懷寧王) 카이산(海山)과 원 인종이 되는 태자 아유르바르와다(愛育黎拔力達)와 친하게 지냈다.

1307년 성종이 죽자 왕위 계승이 실력 문제로 비화되었을 때 충선왕은 무종을 옹립하여 공을 세웠다. 이로써 원 황실과의 친분이 두텁게 되어 심양왕에 즉위하였으며, 1308년 아버지 충렬왕이 죽자 고려왕에 복위하여 다시 정치의 쇄신에 열의를 보였다.

재위 기간 중 권문세족이 인사권을 독점하며 폐단을 일삼던 정방을 폐지하고 사림원(詞林院)을 설치하였다. 왕실 내의 족내혼을 법으로 금지시키고 재상지종(宰相之宗)에 해당하는 가문을 지정하여 귀족의 자녀들을 왕족들과 혼인하게 하였다. 또한 각염법을 제정하고 의염창을 설치하여 소금의 전매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오래 고려에 머무르지 않고 원나라 생활을 즐기며 전지(傳旨)를 통하여 국정을 행하였다. 왕이 해마다 많은 물품을 원나라로 가져가고 계속 원나라에 머물길 원하자, 왕의 귀국 운동이 있었으나 귀환을 꺼렸다. 이 와중에 세자 감을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그를 살해한다.

아들 강릉대군 도(江陵大君 燾)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조카 왕고를 심양왕의 세자로 삼았으며 나중에 그에게 전위(傳位)하면서 끝내 귀국을 피하였다. 이는 본국에 대한 애착 결여, 원 황실의 우대 등에도 이유도 있고, 충선왕의 본성이 담박하여 불교를 좋아하고 글을 즐기며 그림도 잘 그리는 등 정치와 권력에는 애착이 적었던 까닭도 있다.

그 무렵 원나라 연경에 만권당을 설립하여 내외 서적을 모으고, 고려에서 이제현 등과 원나라의 조맹부 등의 학자를 초빙하여 학문을 연구하며 고려 문화 수입에 힘을 썼다.

2. 4. 1. 1차 개혁

충선왕은 즉위 직후부터 대대적인 개혁 정치를 펼쳤으며, 이는 신하들의 큰 환영을 받았다.[1]

  • 나라에 공을 세운 인물에게 포상하였다.[1]
  • 공신의 자손에게는 공신전을 수여하였다.[1]
  • 내시의 등급을 상승시켰다.[1]
  • 실력 위주로 임명, 파면, 승진을 결정하였다.[1]
  • 신분에 상관없이 인물을 등용하였다.[1]
  • 무신정권 이후 급격히 약화된 무신들의 권세를 상승시켰다.[1]

2. 4. 2. 2차 개혁

충선왕은 복위하여 개혁 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정세 변화로 인해 개혁은 큰 결실을 맺지 못했다. 충선왕의 개혁 정치는 반원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1]

  • 세금 감면
  • 귀족의 횡포 엄단
  •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2. 5. 동성혼 금지

충선왕은 고려 왕실 내에서 성행하던 동성(同姓, 왕씨) 간의 혼인을 금지하였으며,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15개의 가문을 선정하여 왕족 남성은 귀족의 딸과, 왕실 여성은 귀족의 아들과 혼인할 것을 명령하여 왕씨 간의 족내혼을 금지하였다.[25] 이로써 왕족들은 충선왕이 정한 가문 출신의 자녀와 통혼하게 되었는데, 이 가문들은 권문세족으로 성장하였다.

世祖|세조중국어(쿠빌라이) 황제께서 앞서 지원 12년(1275년)과 지원 28년(1291년)에 성지(聖旨)를 전달하였다. 성지에서 말씀하시기를,

:'동성(同姓)끼리 통혼하지 못하는 것은 천하에 통용되는 이치이다.

:하물며 그대 나라는 문자를 해독할 수 있으며, 공자의 도(道)를 행하고 있으니,

:응당 동성과 통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라고 하셨다.

  • ---


지금부터는 만약 종친이 동성과 혼인하는 경우 성지를 위반한 것으로 죄를 논할 것이니 마땅히 대대로 재상을 지낸 가문의 딸과 혼인하여 아내로 맞아들일 것이며, 재상의 아들은 종실의 딸과 혼인하라. 만약 가세(家勢)가 비루하고 한미하다면 이 제한 규정에 포함되지 않는다.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가문



위의 가문들은 모두 누대의 공신과 재상 가문이니 대대로 혼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는 종실의 딸과 혼인하고 여자는 종실의 아내가 될 수 있다. 문무양반(文武兩班) 가문은 동성과 혼인할 수 없으며, 외가 사촌에게 구혼하는 것을 허락하노라.

2. 6. 생애 후반

권문세족이 인사권을 독점하며 폐단을 일삼던 정방을 폐지하고 사림원(詞林院)을 설치하였다. 왕실 내의 족내혼을 법으로 금지시키고 재상지종(宰相之宗)에 해당하는 가문을 지정하여 귀족의 자녀들을 왕족들과 혼인하게 하였다.[23]

또한 각염법을 제정하고 의염창을 설치하여 소금의 전매제도를 실시하였다. 재위 후반에는 아들 충숙왕에게 양위하고 원나라에 머물며 만권당을 세워 독서와 학문 연구, 서화 그리기 등에 전념하기도 했다.[23]

한편 충선왕의 개혁정치로 말미암아 홍복원의 손자인 홍중희, 홍중경 등이 기득권을 잃게 되자, 이들은 고려왕이 심양왕을 겸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입성론을 펼쳤다. 입성론(立省論)은 고려를 원나라의 행성(行省, 행중서성)으로 삼아달라는 주장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고려 출신 원나라 환관인 방망고태(方忙古台)에 의해 좌절된다. 방망고태는 흥성궁에서 원 무종의 모후인 수원황태후를 섬기고 있었는데, 황태후에게 "홍중희가 고려에서 도망 온 백성인 주제에 감히 방자하게 거짓말을 해 본국을 전복하려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한데 어찌 되레 왕과 대질해 시비를 가리게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니 황태후는 진실을 알아차리고 황제에게 말해 중서성에 칙명을 내려서 양자가 대면해 시비를 가리는 일 없이 홍중희만 장형을 가해 장기간 조주(潮州)로 유배보내게 했다. 그래서 충선왕은 무사할 수 있었다.[23]

하지만 충선왕의 개혁정치는 시작하자마자 좌초하게 되며, 또한 충선왕은 강제 폐위되었고, 고려 왕위는 충선왕의 장자 강릉대군에게, 심양 왕위는 당시 충선왕의 조카이며 태자였던 연안군 왕고(延安君王暠)에게 물려주게 된다.[23] 그 뒤 고려왕과 심양왕은 서로에게 정통성을 주장하며 다투게 되며, 특히 고려 말에 한때 고려의 태자였던 심양왕이 고려 왕위를 요구한 횟수가 잦았다. 뒷날 심양왕은 줄곧 고려 왕족에게 이어졌으며, 고려 왕족의 후예였던 마지막 심양왕 탈탈불화(脫脫不花)가 후계자 없이 죽자 요동 정벌론이 고려에서 일어나며, 이를 위해 진군하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고려는 멸망한다.[23]

원나라인종이 죽자 고려 출신 원나라 환관 임백안독고사(任伯顏禿古思)의 참소로 토번(지금의 티베트) 땅에 유배되었다. 임백안독고사는 충선왕에게 무례하게 굴었다가 충선왕이 황태후에게 건의하여 장형을 받았으며, 그가 불법으로 다른 원나라 백성에게 빼앗은 땅을 충선왕의 상소로 되돌려주게 한 일이 있다. 임백안독고사의 무고로 토번에 유배되었지만, 임백안독고사는 계속 충선왕을 공격하다가 1323년에 처형된다. 1323년 영종이 몽골에서 대도로 내려오다 암살되고, 영종의 당숙이자 그의 매부(妹夫)인 태정제 예순테무르가 즉위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원나라 대도에 돌아와 2년 후에 객사하였다.[23] 시신은 고려로 운구되어 덕릉(德陵)에 묻혔다. 원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충선왕인데 충선왕의 시호를 싫어하던 고려인들은 선효왕(宣孝王), 헌효대왕(憲孝大王), 헌효왕, 헌왕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23]

1308년 심양왕(瀋陽王)으로 책봉된 후, 충렬왕 사망으로 고려왕으로 책봉되었다.[13] 1316년 심양왕을 세자 왕고(충렬왕의 아들 강양공 왕자의 차남)에게 양위했다. 왕고는 카말라의 딸 승상(スンシャン)과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다.[13] 1320년 토번(티베트)으로 유배되었다. 3년 후, 태정제(泰定帝)의 사면을 받고 돌아왔다.[13] 1325년 5월 대도(大都)에서 사망했다.[13]

3. 가족 관계

구 분이름 / 본관생몰년부모비고
부모충렬왕1236년 - 1308년원종, 순경태후 김씨고려 제25대 국왕
제국대장공주
(장목왕후)
1259년 - 1297년세조, 예쉬진 카둔칭기즈 칸의 증손녀
왕비계국대장공주? - 1315년카말라, 미상세조의 증손녀
의비? - 1316년미상몽골 출신
정비 왕씨? - 1345년서원후 왕영, 변한국순안비 황보씨충렬왕비 정신부주 왕씨의 조카
조비생몰년 미상조인규, 조씨계국대장공주의 질투로 원나라로 압송됨
순화원비? - 1306년홍규, 삼한국대부인 김씨충숙왕비 명덕태후의 언니
순비 허씨1271년 - 1335년허공, 최씨평양공 왕현 사후 충선왕과 재혼
군호이름생몰년생모비고
광릉군? - 1310년의비충선왕에 의해 처형됨[26]
충숙왕만(아라트나시리)1294년 - 1339년의비고려 제27대 국왕
덕흥군혜(타스테무르)미상[27]미상
수춘옹주? - 1345년미상정안부원군 허종과 혼인


4. 기타

충선왕은 1277년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중국으로 가서 몽골식 이름을 받았다.[3] 1296년,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증손녀인 보르지긴 부다시리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권력 있는 귀족 출신의 세 명의 한국인 부인을 두고 있었다.

충선왕은 쿠빌라이 칸의 손자로, 14세기 초 새 칸을 선출하기 위한 쿠릴타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307년 카이샨(쿨릭 칸)을 왕위에 옹립했고, 1311년 아유르바르와다(부얀투 칸)을 왕위에 옹립했다.[8] 1310년 그의 중국식 칭호는 "심왕"으로 바뀌었다.[9] 그는 동아시아에서 매우 드문 동군연합 사례이다.

4. 1. 관련 작품


  • 忠宣王중국어을 다룬 작품

드라마

4. 2. 관련 도로

참조

[1] 서적 事大與保國 ── 元明之際的中韓關係 https://books.google[...] 香港教育圖書公司
[2] 뉴스 'The King Loves' delves into destructive desire of Goryeo King https://www.koreaher[...] 2024-02-01
[3] 기타
[4] 뉴스 고려 충선왕, 유배 길에 오르다! https://world.kbs.co[...] 2024-02-01
[5] 웹사이트 蒙·元제국 쿠릴타이(Quriltai) 연구 https://s-space.snu.[...]
[6] 서적 Goryeosa
[7] 서적 History of Yuan
[8] 서적 Goryeosa
[9] 서적 History of Yuan
[10] 웹사이트 高麗史/卷八十九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https://zh.wikisourc[...] 2023-04-13
[11] 기타
[12] 기타
[13] 기타
[14] 기타
[15] 웹사이트 《고려사》 권89, 열전2 후비2 https://db.history.g[...]
[16] 웹사이트 《고려사》 권28, 세가28 충렬왕1 https://db.history.g[...]
[17] 기타
[18] 기타
[19] 웹사이트 《고려사》 권28 충렬왕 원년 공주가 아들을 낳다 https://db.history.g[...]
[20] 웹사이트 고려사 권34 http://db.history.go[...]
[21] 서적 事大與保國 ── 元明之際的中韓關係 https://books.google[...] 香港教育圖書公司
[22] 웹사이트 《고려사》 충선왕 총서 https://db.history.g[...]
[23] 백과사전 심양왕 http://www.encyber.c[...] 2008-07-09
[24] 기타
[25] 서적 고려사
[26] 서적 고려사
[2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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