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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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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잡하중은 15세기 오닌의 난 이후 기이국과 가와치국의 수호 다이묘의 요청으로 용병 집단으로 성장한 세력이다. 기노강 하구를 장악하고 해운 및 무역에 종사하며 수군을 보유했고, 조총을 도입하여 강력한 군사 집단으로 발전했다. 오다 노부나가와의 항쟁,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전쟁을 거쳐 멸망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김충선(사야카)이 잡하중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잡하중은 5개 지역 연합으로 구성되었으며, 종교적 다양성을 보였다. 네고로슈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2015년에는 해상 통행증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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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하중
개요
역사적 배경
형성 시기센고쿠 시대
활동 지역기슈 사이카 지역
주요 인물사이카 마고이치 (사이카 슈)
특징자치적인 무장 세력, 뛰어난 조총술
주요 활동이시야마 전투에서의 활약
오다 노부나가에 대항
기슈 정벌로 인해 세력 약화
조직 및 구성
구성원농민, 상인, 지사
주요 세력사이카 슈 (雑賀衆)
스기야마 슈 (杉山衆)
미요시 슈 (三好衆)
무장 및 전투력
주력 무기조총
전투 방식게릴라전, 매복
주요 전투이시야마 전투
기슈 정벌
사이카 잇키의 종말
멸망 시기기슈 정벌 이후
영향오다 정권에 대한 저항
지역 자치 세력의 중요성 부각
기타 정보
관련 인물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관련 사건기슈 정벌, 이시야마 전투

2. 역사

사이카는 15세기오닌의 난 이후 기이국가와치국의 수호 다이묘인 하타케야마 씨의 요청으로 긴키 지방 각지에서 활동하며 용병 집단으로 성장했다. 기노강 하구 부근을 장악하여 해운과 무역에 종사하고 수군도 보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네가시마에 조총 제조법이 전래되자, 네고로슈에 이어 조총을 도입하여 뛰어난 사수를 양성하고 조총을 활용한 전술을 개발하여 강력한 군사 집단으로 성장했다.[3]

"사이카"라는 명칭은 혼간지의 렌뇨의 아들 지쓰주의 "사심기" 1535년 6월 17일 조항에 처음 등장하며, "사이카 300명 계"가 오사카 혼산에 원조하러 왔다고 기록되었다. 이듬해 2월 쇼뇨는 이들의 활약에 감사장을 보냈다.

1570년 노다 성·후쿠시마 성 전투에서 스즈키 손이치 등을 지도자로 하는 사이카는 미요시 산닌슈 군에 용병 부대로 참전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요청에 따라 하타케야마 아키타카는 사이카·네고로슈 등을 원군으로 보내 오다 노부나가 군에 합류시켰다.

1573년 미요시 나가하루가 시노하라 나가후사를 토벌한 가미자쿠라 성 전투에서 사이카는 미요시 군에 참가하여 이시야마 혼간지에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같은 해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추방되고 하타케야마 아키타카가 살해되자 많은 사이카는 이시야마 혼간지에 가담하여 오다 노부나가 군과 싸웠다.

1576년 오다 군은 사이카에 패퇴하고, 오다 측 수군은 모리 씨와 사이카 수군에 괴멸적 피해를 입었다(제1차 키즈가와구치 전투).[3] 1577년 노부나가는 기이에 침공하여 사이카와 교전했지만(기슈 정벌), 큰 피해를 입고 복속시킨 사이카는 곧 자유 활동을 재개하여 혼간지에 협력했다.[3]

1580년 켄뇨가 이시야마 혼간지에서 퇴거하여 이시야마 전쟁이 종결되자, 사이카 문도들은 켄뇨를 사기모리 별원에 맞이했다.[3] 이후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입장 차이로 사이카 내부는 분열되었다.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사이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중앙 집권화에 반발하여 네고로슈와 연합,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오사카 주변까지 출병하여 히데요시의 배후를 위협했다.

1585년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화해하고 기이국을 침공, 센고쿠보리 성 전투를 벌였다.[3] 오타 성 함락으로 사이카는 종언을 맞이했다.[3]

2. 1. 기원과 성장

15세기오닌의 난 이후, 사이카는 기이국가와치국의 수호 다이묘인 하타케야마 씨의 요청으로 긴키 지방 각지에서 활동하며 용병 집단으로 성장했다.[3] 기노강 하구 부근을 장악하여 해운과 무역에 종사하고 수군도 보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네가시마에 조총 제조법이 전래되자, 네고로슈에 이어 조총을 도입하여 뛰어난 사수를 양성하고 조총을 활용한 전술을 개발하여 강력한 군사 집단으로 성장했다.[3]

"사이카"라는 명칭은 혼간지의 렌뇨의 아들 지쓰주의 "사심기" 1535년 6월 17일 조항에 처음 등장하며, "사이카 300명 계"가 오사카 혼산에 원조하러 왔다고 기록되었다. 이듬해 2월 쇼뇨는 이들의 활약에 감사장을 보냈다.

1570년 노다 성·후쿠시마 성 전투에서 스즈키 손이치 등을 지도자로 하는 사이카는 미요시 산닌슈 군에 용병 부대로 참전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요청에 따라 하타케야마 아키타카는 사이카·네고로슈 등을 원군으로 보내 오다 노부나가 군에 합류시켰다. 대규모 총격전과 공성전이 벌어졌으며, 사이카끼리 싸웠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1573년 미요시 나가하루가 시노하라 나가후사를 토벌한 가미자쿠라 성 전투에서 사이카는 미요시 군에 참가하여 시노하라 씨를 멸망시키고 이시야마 혼간지에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같은 해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추방되고 하타케야마 아키타카가 살해되자 많은 사이카는 이시야마 혼간지에 가담하여 오다 노부나가 군과 싸웠다.

1576년 오다 군은 사이카에 패퇴하고, 오다 측 수군은 모리 씨와 사이카 수군에 괴멸적 피해를 입었다(제1차 키즈가와구치 전투).[3] 1577년 노부나가는 10만 대군으로 기이에 침공하여 사이카와 교전했지만(기슈 정벌), 큰 피해를 입고 복속시킨 사이카는 곧 자유 활동을 재개하여 혼간지에 협력했다.[3]

1580년 켄뇨가 이시야마 혼간지에서 퇴거하여 이시야마 전쟁이 종결되자, 사이카 문도들은 켄뇨를 사기모리 별원에 맞이했다.[3] 이후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입장 차이로 사이카 내부는 분열되었다. 1582년 친 오다파 스즈키 손이치가 반대파 도바시 씨를 쓰러뜨렸으나,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손이치는 오다 노부타카에게 도망치고 도바시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깃카와 히로이에 각서에 따르면, 모리 측은 혼노지의 변 정보를 사이카로부터 입수했다.[4]

이후 사이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중앙 집권화에 반발하여 네고로슈와 연합,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오사카 주변까지 출병하여 히데요시의 배후를 위협했다. 1584년 이즈미국에서 히데요시와 사이카·네고로슈의 대립이 격화되어 기슈 세력은 오사카 성에 육박했다.[3]

1585년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화해하고 기이국을 침공, 센고쿠보리 성 전투를 벌였다.[3] 오타 성 함락으로 사이카는 종언을 맞이했다.[3]

켄뇨상


네고로지 대탑/국보


화승총

2. 2. 오다 노부나가와의 항쟁

1570년(겐키 원년), 오다 노부나가와 미요시 산닌슈 사이의 노다 성·후쿠시마 성 전투에서 스즈키 손이치(사이카 손이치) 등을 지도자로 하는 사이카는 용병 부대로서 미요시 산닌슈 군에 가담했다. 한편,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요청으로 하타케야마 아키타카는 사이카·네고로슈 등을 원군으로 보내 오다 노부나가 군에 가담시켰다. 이후 대규모 총격전과 공성전이 벌어졌는데, 사이카끼리 싸웠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3] 이 경향은 이시야마 혼간지가 노다 성·후쿠시마 성 전투에 참전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1573년(겐키 4년·덴쇼 원년), 미요시 나가하루가 중신 시노하라 나가후사를 공격한 가미자쿠라 성 전투에서, 사이카는 미요시 군에 가담하여 시노하라 씨를 멸망시키고 이시야마 혼간지에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같은 해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추방되고, 하타케야마 아키타카가 중신 유사 노부노리에게 살해되자, 많은 사이카는 이시야마 혼간지에 가담하여 오다 노부나가 군과 싸웠다.[3]

오다 노부나가와 이시야마 혼간지의 항쟁은 이시야마 전투로 격화되었고, 1576년(덴쇼 4년) 5월 오다 군은 사이카에 패배했다.[3] 같은 해 7월에는 오다 측 수군이 모리 씨와 사이카의 수군에게 대패했다 (제1차 키즈가와구치 전투).[3]

노부나가는 혼간지를 꺾기 위해 먼저 사이카를 제압하려 했다. 1577년(덴쇼 5년) 2월, 노부나가는 10만 대군으로 이즈미국에 진출, 6만 군세를 둘로 나누어 기이에 침공하여 사이카와 교전했다(제1차 기슈 정벌).[3] 오다 군은 나카노 성을 함락시켰지만, 익숙하지 않은 지형에 고전했다. 결국 스즈키 손이치, 도바시 모리시게 등에게 항복을 받아 복속시켰다. 그러나 오다 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복속된 사이카는 곧 다시 혼간지에 협력하며, 손이치는 노부나가에 협력한 미야고의 사이카나 네고로슈가 지키는 오타 성을 공격했다. 전황이 교착되자 강화가 성립되어 노부나가는 철수했다.[3] 노부나가 철수 후, 사이카는 내분이 발생했지만 스즈키 손이치 등이 장악했다.[3]

1577년 8월경, 노부나가는 다시 사이카와 교전했지만 철수했다.[3]

1580년(덴쇼 8년) 4월, 켄뇨가 이시야마 혼간지에서 퇴거하여 이시야마 전쟁이 종결되자, 사이카 문도들은 사이카의 사기모리(현재의 사기모리 별원)에 켄뇨를 맞이했다.[3] 그러나 이후, 오다 노부나가에게 적극적으로 따르려는 파와 반(反) 오다 파가 대립하여 사이카 내부는 분열되었다. 1582년(덴쇼 10년)에는 친(親) 오다 파인 스즈키 손이치가 반대파인 도바시 씨를 꺾었지만, 같은 해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손이치는 오다 노부타카에게 도망가고 도바시 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2. 3.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전쟁과 멸망

1577년 (덴쇼 5년) 2월, 오다 노부나가는 10만 대군으로 이즈미국에 전개하여, 6만 군세를 웅산 고개와 고시 고개의 두 갈래로 나누어 기이국에 침공하여 사이카와 교전했다.[3] (제1차 기슈 정벌). 오다 군은 나카노 성을 함락시켰지만, 익숙하지 않은 지형에 고전했다. 최종적으로는 스즈키 손이치·도바시 모리시게 등에게 맹세를 제출하게 하고 복속을 맹세하게 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오다 군은 큰 손해를 입었고, 복속시킨 사이카는 곧 자유로운 활동을 재개하여 혼간지에 협력했다. 손이치는 노부나가에 협력한 미야고의 사이카나 네고로슈가 지키는 오타 성을 공격했으나, 전황이 교착되어 강화가 성립되자 노부나가의 군은 철수했다.[3] 노부나가 철수 후, 내분이 발생한 사이카는 스즈키 손이치 등이 장악했다.[3]

1580년 (덴쇼 8년) 4월, 문주 켄뇨가 이시야마 혼간지에서 퇴거하여 이시야마 전투가 종결되자, 사이카의 문도들은 사이카의 사기모리(현재의 사기모리 별원)에 켄뇨를 맞이했다.[3] 그러나 이후, 오다 노부나가에 따르려는 파와 반 오다 파가 대립하여 사이카는 분열되었다. 1582년 (덴쇼 10년)에는 친 오다파인 스즈키 손이치가 반대파인 도바시 씨를 쓰러뜨렸지만, 같은 해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횡사하자, 손이치는 오다 노부타카에게 도망하고 도바시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이후 사이카는 중앙 집권화를 진행하여 토호의 재지 지배를 해체하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움직임에 반발했다. 네고로슈와 손을 잡고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는 오사카 주변까지 출병하여 오와리에 출진한 히데요시의 배후를 위협했다. 1584년 (덴쇼 12년) 1월, 이즈미국에서 히데요시와 사이카·네고로슈의 대립이 격화되어, 기슈 세력은 오사카 성에 육박했다.[3]

1585년 (덴쇼 13년),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화해했다. 같은 해 3월, 히데요시는 이즈미국에서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하여, 패주하는 기슈 세력을 쫓아 6만 군세로 기이국으로 쳐들어갔다.[3] (센고쿠보리 성 전투, 제2차 기슈 정벌). 3월 말에는 거점이었던 오타 성이 함락되어 사이카는 종언을 맞이했다.[3]

사이카는 멸망한 토호 세력으로서 귀농하거나, 각지에 흩어져 조총 기술을 가지고 다이묘에게 봉사했으며, 집단으로서는 역사에서 소멸했다.

2. 4. 임진왜란과 김충선(사야카)



문록·경장의 역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휘하로 조선에 건너갔으나, 조선군에 투항하여 일본군과 싸웠다고 전해지는 사야카, 조선명 김충선(金忠善, 김충선한국어)은 사이카 슈(雑賀衆)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신사카 지로의 소설 『바다의 가야금』[5] 등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설이지만, 그 근거로는 사이카(雑賀)가 와전되어 조선식 발음인 사야카(サヤカ)로 전해졌다는 설, 사이카 슈가 문록·경장 역의 전열에 참가했고 총포 기술에 정통한 집단에 속했으며 히데요시 측에 반감을 가진 왜인이라는 점 등이 꼽힌다. 일본 사료에 스즈키 젠시(鈴木善之)라는 인물이 사이카 슈에 존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젠시가 사야카라고 가정하면 김충선이라는 이름은 젠시에서 따왔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김충선은 자(字)로 "젠시"를 칭했다고 한다.

3. 내부 구성과 특징

사이카슈는 기이국 북서부, 현재의 와카야마시 일대를 거점으로 활동했던 토호 세력이다. 사이카 장의 도바시 씨, 십개향(현 와카야마시 서북부, 기노강 하구 부근 북안)의 사이카당 스즈키 씨 등이 주요 구성원이었다.

15세기오닌의 난 이후 하타케야마 씨의 용병으로 활동하며 성장했다. 기노강 하구를 장악하여 해운과 무역에 종사하고, 수군도 보유했다. 다네가시마에 조총이 전래되자 네고로슈와 함께 조총을 도입, 뛰어난 사수와 전술을 개발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1570년 노다 성·후쿠시마 성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와 대립하는 미요시 산닌슈 측 용병으로 참전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지원하는 하타케야마 아키타카 군에도 가담하여 오다 군과 싸우기도 했다.

1577년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제1차 기슈 정벌)으로 항복했으나, 곧 혼간지와 협력하며 독자적인 활동을 재개했다. 1580년 이시야마 전쟁 종결 후,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입장 차이로 분열되었다. 1582년 혼노지의 변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저항하다 1585년 센고쿠보리 성 전투와 제2차 기슈 정벌로 멸망했다.

잡하중은 정토진종 신도로 알려졌지만, 정토종, 진언종 등 다양한 종교가 혼재했다. 무타케 요시노부에 따르면, "잡하중"은 지연 집단, "잡하 문도"는 진종 신자 집단으로 구분된다.

3. 1. 5개 지역 연합

15세기경 역사에 등장한 사이카는 오닌의 난 이후 기이국가와치국의 수호 다이묘인 하타케야마 씨의 요청으로 긴키 지방 각지를 전전하며 용병 집단으로 성장했다. 기노강 하구 부근을 장악하여 해운과 무역에 종사했으며, 수군도 보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네가시마에 조총 제조법이 전래되자 네고로슈에 이어 사이카도 조총을 도입하여 뛰어난 사수를 양성하고 조총을 활용한 전술을 개발하여 군사 집단으로 성장했다.[3]

사이카는 "사이카 장원", "10개 향", "나카고(나카가와 향)", "미나미고(미카미 향)", "미야고(샤케 향)"의 5개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사이카 장원・10개 향 그룹은 사주(砂洲)나 사구(砂丘) 지대에 위치해 주로 어업, 해운, 상업을 생업으로 하고 일향종이나 정토종을 신봉하였고, 나카고(나카가와 향)・미나미고(미카미 향)・미야고(샤케 향) 그룹은 농경지대에 위치해 주로 농업을 생업으로 하고 신기진언종을 신봉하였다.[3]

잡하중의 운영은 5개 지역이나 각 공동체 조직의 대표자로 구성된 "토시요리(年寄, 원로)" 회의에서 이루어졌다.[3] 각 지역의 대표자는 윤번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3. 2. 종교적 다양성

잡하중은 정토진종(浄土真宗) 신도로 여겨져 왔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종교가 혼재했다. 잡하 지역에는 정토종 서산파의 본산인 소지사가 있었고, 도바시 씨의 보리사인 안라쿠지도 같은 종파였다. 전국 시대 잡하 주변은 정토진종과 정토종의 세력이 대립했고, 진언종도 있었다.

스즈키 씨는 조코지 말단의 한 도장 대표 신도였지만, 혼간지를 지원하여 잡하의 잇코슈 지도자와 동격으로 취급되었다. 정토종 서산파 중에는 이시야마 전쟁에 협력적인 사람도 있었지만, 친제이파 사람들은 비협조적이었다.

무타케 요시노부의 연구에 따르면, "잡하중(雑賀衆)" "잡하이키(雑賀一揆)"는 지연 집단이고, "잡하 문도(雑賀門徒)" "잡하 잇코슈(雑賀一向衆)"는 진종 신자 집단으로, 별개였다. "잡하중"은 "잡하 문도"를 거느렸지만, 다수파는 아니었다. 혼간지 문서에서는 "잡하 문도" "잡하 잇코슈"를 "잡하중"으로 칭하기도 했다.

시노하라 나가후사 멸망에 잡하중이 관여한 것과 이시야마 전쟁 초기 노부나가 휘하에서 싸운 것은 "잡하중"이 소코쿠 잇키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가와치 하타케야마 가 몰락으로, 혼간지 구원파와 아시카가 요시아키 지지파의 의사가 일치하여 잡하중의 혼간지 지원이 본격화되었다. 잡하장·십개향을 중심으로 스즈키 씨 등 진종 문도에게 도바시 씨 등 비 문도를 끌어들인 반 노부나가 연합 형태의 "잡하 잇코 잇키(雑賀一向一揆)"가 형성되었다(잇키 내 잇키 발생). 그러나 반대파도 있어, 소코쿠 잇키로서의 잡하중 단결에 흔들림이 생겼다.

제1차 기슈 정벌은 오다 군과 잡하 잇코 잇키의 싸움이었으며, 잡하중에서도 거리를 둔 나카고(나카가와 향)·난고(미카미 향)·미야고(샤케 향)가 오다 측에 붙었다. 이후 스즈키 손이치·도바시 모리시게 등 잇코 잇키의 반격으로 난고가 함락되고, 잡하중 실권은 잇코 잇키 지도자에게 장악된다. 그러나 잡하중 잇키의 통제 기능 상실, 이시야마 전쟁 종결 후 대 오다 정책에서 혼간지 의향에 따른 화해파(문도 계열 스즈키 씨)와 저항파(비 문도 계열 도바시 씨) 대립 심화로 잇코 잇키 분열, 잡하중은 해체되었다.

무타케는 "잡하 잇키는 노부나가 측으로 출진한 적은 있어도, 조직 전체로서 혼간지를 위해 참전한 사실은 없다"고 결론지었다.

3. 3. 철포 기술과 수군력

1543년 철포 전래 이후, 네고로지의 승려 쓰다 산초 등이 철포를 기나이로 가져왔으며, 네고로슈를 경유하여 사이카슈로 반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네고로슈의 사타케 이가노카미가 1549년에 철포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아마 이 이전에는 네고로슈에 전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네고로슈에는 일정량의 철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철포를 어떻게 준비했는지는 현재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사카이시에서 외국으로부터 수입했다, 현지에서 만들었다, 당시에는 철포 제작 기술이 없어 다른 지역에서 장인을 초빙했다 등 여러 설이 있지만, 어느 것도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만약 철포를 자체적으로 제작했다고 해도, 사이카에는 철포의 재료가 되는 , 황동, 흑색 화약의 재료가 되는 초석이 생산되지 않았으며, 입수 경로 등을 보여주는 자료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초석은 사이카뿐만 아니라 일본 국내에서는 천연적으로 산출되지 않아 외국에서의 수입에 의존했으며, 해운업을 운영했던 사이카는 오히려 입수가 용이한 입장에 있었다.

4. 네고로슈와의 관계

잡하중과 관련하여, 같은 기이국의 네고로슈는 네고로지를 중심으로 한 신기 진언종 승려 집단을 가리킨다. 전국 시대에는 사찰 영지가 50만 곡(또는 70만 곡)이라고도 전해진다. 네고로지의 승려는 학문과 의식을 담당하는 "학려"와 당탑 관리 및 절 방어를 담당하는 "행인"으로 나뉘며, 네고로슈의 대다수는 행인으로 구성되었다. 행인은 승병을 의미하며, 네고로슈는 승병 집단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반면 잡하중에는 행인이나 승병이라 불리는 이들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와카야마시 전역과 하이난시 일부에 걸쳐 많은 토호들이 모인 집단으로, 지역과 밀착된 집단이 잡하중으로 여겨진다.

잡하중과 네고로슈는 뛰어난 조총 집단이자 용병 집단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지역적으로 가깝고 인적 교류도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잡하중의 각 향(사이카장, 십개향, 나카고, 샤케향, 미카미향)의 유력자들은 네고로지에 탑두를 세우고 자제들을 들여보냈다. 특히 십개향의 도바시씨는 센시키보, 나카고의 이와하시씨는 이토쿠인 등이 유명하다.

5. 문화재

2015년(헤이세이 27년) 3월 13일, 무라카미 수군의 무라카미 타케요시가 덴쇼 9년 (1581년)에 사이가 중의 무카이 단에몬에게 발행한 해상 통행증 "과소선기 (가쇼센키) 덴쇼 9년 3월 28일"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될 것이 결정되었으며,[6][7][8] 9월 4일에 지정되었다.[9][10]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https://archive.org/[...] Stanford University Press 1961
[2]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1998
[3] 웹사이트 孫一と雑賀鉄砲衆 http://www.wakayamak[...] 和歌山市観光協会 2020-07-30
[4] 간행물 三道併進策による毛利家の「上洛作戦」
[5] 웹사이트 "「沙也可」日韓国際シンポジウム" http://wbs-ceo.sblo.[...] 일어일회 과거 로그 2010-11-13
[6] 뉴스 根来寺の「絹本著色鳥羽天皇像」などが重文指定へ http://wbs.co.jp/new[...] 和歌山방송 2015-03-13
[7] 뉴스 根来寺の鳥羽天皇肖像画が重文に http://www.agara.co.[...] 2015-03-14
[8] 뉴스 根来寺「鳥羽天皇像」など重要文化財に http://www.wakayamas[...] 2015-03-14
[9] 웹사이트 過所船旗〈天正九年三月廿八日/〉 1幅 https://bunka.nii.ac[...] 2023-08-22
[10] 웹사이트 過所船旗〈天正九年三月廿八日/〉 1幅 https://kunishitei.b[...] 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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