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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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선수는 발해 문왕 시기에 일본에 파견된 발해사였다. 778년 일본에 파견되어 이듬해 천황을 알현하고 외교 활동을 펼쳤다. 778년 일본에 도착하여 정월 신년 축하 의례에 참석하고, 780년 1월 일본 천황에게 조하를 드리고, 2월에 귀국했다. 귀국 시 천황은 발해 국왕에게 새서와 신물을 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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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수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국가 | 발해 |
관직 정보 | |
직책 | 헌가대부사빈시소령 |
군주 | 발해 문왕 |
개인 정보 | |
출생일 | 미상 |
출생지 | 미상 |
사망일 | 미상 |
사망지 | 미상 |
국적 | 발해 |
성별 | 남성 |
2. 생애
발해 문왕 시기에 장선수는 10차 발해사로서 778년 일본에 파견되었다. 고마 도노쓰구와 함께 일본으로 가 에치젠국에 도착하여 정월 신년 축하 의례에 참석했으며, 2월에 일본에서 받은 국서와 선물을 가지고 발해로 귀국했다.[1]
2. 1. 일본 파견
발해 문왕 시기인 778년, 장선수는 10차 발해사로서 일본에 파견되었다.[1]고마 도노쓰구와 함께 일본으로 향해 같은 해 9월 에치젠국에 도착, 일본에서 정월 신년 축하 의례에 참석했다. 이후 2월에 일본에서 받은 국서와 선물을 가지고 발해로 귀국했다.[1]
속일본기에 따르면, 보귀 9년(779년) 9월 송고려사정육위상고려전계 등이 에치젠국사카이군미쿠니항에 도착했다. 천황은 에치젠국에 조칙을 내려 "견고려사와 송사를 형편이 좋은 곳에 안치하고 선례에 따라 의식주를 공급하라. 다만 전계는 (사정 청취를 위해) 빨리 입경하라"고 명했다.[1]
제16차 견당선의 귀국 도중 조난 사건으로 천황 알현은 늦어져 다음 해 보귀 10년(780년) 정초에 천황에게 조하를 드렸다. 5일에 방물을 헌상했고, 전계 등이 항로를 잃고 먼 오랑캐 경계에 표착하여 배가 파손되었기에 배 2척을 건조하여 수행했다는 뜻과 함께 헌상물을 가지고 조정에 배알한다는 뜻을 전했다.[2]
7일, 오위 이상의 관원과 장선수 등을 조정에서 연회를 열어 대접했고, 조칙에 의해 위계를 주고 지위에 따라 녹을 내렸다.[3] 16일에도 오위 이상의 관원과 발해사를 조정에서 답가의 절회의 연회를 열어 녹을 내렸다.[4] 18일에는 내리에서 대사를 거행했고, 발해사도 사열에 참여했다.[5]
장선수 등은 2월에 귀국했다. 천황은 국왕에게 새서를 하사하고, 신물을 수여했다.[6]
이 발해사의 송사로 대망공광도가 임명되었지만,[7] 일반적으로 송고려사는 귀국용 배를 가지지 않은 경우에 파견되는 것이며, 이번에는 무사히 일본에 도착했기 때문에 송사 임명이 있었지만 파견이 중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 2. 일본 측 기록
『속일본기』에 따르면, 보귀 9년(779년) 9월, 송고려사정육위상고려전계 등이 에치젠국사카이군미쿠니항에 도착했다. 천황은 에치젠국에 조칙을 내려 "견고려사와 송사를 형편이 좋은 곳에 안치하고 선례에 따라 의식주를 공급하라. 다만 전계는 (사정 청취를 위해) 빨리 입경하라"고 명했다[1]。제16차 견당선의 귀국 도중 조난 사건도 있어, 천황 알현은 늦어져 다음 해 보귀 10년(780년) 정초가 되어서야 천황에게 조하를 드렸다. "장선수"라는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이 부분이 처음이다. 5일에 방물을 헌상했고, 그 자리에서 전계 등이 항로를 잃고 먼 오랑캐 경계에 표착하여 배가 파손되었기에 배 2척을 건조하여 수행했다는 뜻과 함께 헌상물을 가지고 조정에 배알한다는 뜻을 전했다[2]。7일, 오위 이상의 관원과 장선수 등을 조정에서 연회로 대접했고, 조칙에 의해 위계를 주고 지위에 따라 녹을 내렸다[3]。16일에도 오위 이상의 관원과 발해사를 조정에서 답가의 절회 연회를 열어 녹을 내렸다[4]。18일에는 내리에서 대사를 거행했고, 발해사도 사열에 참여했다[5]。
장선수 등은 2월에 귀국했다. 천황은 국왕에게 새서를 하사하고, 아울러 신물을 수여했다[6]。
이 발해사의 송사로 대망공광도가 임명되었지만[7], 일반적으로 송고려사는 귀국용 배를 가지지 않은 경우에 파견되는 것이며, 이번에는 무사히 일본에 도착했기 때문에, 일단 송사 임명이 있었지만 파견이 중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 3. 외교 활동
발해 문왕 시기인 778년에 10차 발해사로서 일본에 파견되었다.고마 도노쓰구와 함께 일본으로 향해 778년 9월, 에치젠국에 도착해 일본에서의 정월 신년 축하 의례에 참석했으며, 2월에 일본에서 받은 국서와 선물을 가지고 발해로 귀국했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보귀 9년(779년) 9월, 송고려사정육위상고려전계 등이 에치젠국사카이군미쿠니항에 도착했다고 하며, 천황은 에치젠국에 조칙을 내려 "견고려사와 송사를 형편이 좋은 곳에 안치하고 선례에 따라 의식주를 공급하라. 다만 전계는 (사정 청취를 위해) 빨리 입경하라"고 명했다.[1]
제16차 견당선의 귀국 도중 조난 사건도 있어, 천황 알현은 늦어져 다음 해 보귀 10년(780년) 정초가 되어서야 천황에게 조하를 드렸다. 5일에 방물을 헌상했고, 그 자리에서 전계 등이 항로를 잃고 먼 오랑캐 경계에 표착하여 배가 파손되었기에 배 2척을 건조하여 수행했다는 뜻과 함께 헌상물을 가지고 조정에 배알한다는 뜻을 전했다.[2] 7일, 오위 이상의 관원과 장선수 등을 조정에서 연회를 열어 대접했고, 조칙에 의해 위계를 주고 지위에 따라 녹을 내렸다.[3] 16일에도 오위 이상의 관원과 발해사를 조정에서 답가의 절회의 연회를 열어 녹을 내렸다.[4] 18일에는 내리에서 대사를 거행했고, 발해사도 사열에 참여했다.[5]
장선수 등은 2월에 귀국했다. 천황은 국왕에게 새서를 하사하고, 아울러 신물을 수여했다.[6]
이 발해사의 송사로 대망공광도가 임명되었지만,[7] 일반적으로 송고려사는 귀국용 배를 가지지 않은 경우에 파견되는 것이며, 이번에는 무사히 일본에 도착했기 때문에, 일단 송사 임명이 있었지만 파견이 중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 4. 귀국
장선수 등은 778년 9월 일본 사신 고마 도노쓰구(高麗殿嗣)와 함께 일본 에치젠국(越前國)에 도착, 정월 신년 축하 의례에 참석 후 2월에 일본에서 받은 국서와 선물을 가지고 발해로 귀국했다.[1] 천황은 국왕에게 새서를 하사하고, 아울러 신물을 수여했다.[6]2. 5. 송사 임명 관련
보귀 9년(779년) 9월, 속일본기에 따르면, 송고려사정육위상고려전계 등이 에치젠국사카이군미쿠니항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천황은 에치젠국에 조칙을 내려 "견고려사와 송사를 형편이 좋은 곳에 안치하고 선례에 따라 의식주를 공급하라. 다만 전계는 (사정 청취를 위해) 빨리 입경하라"고 명했다[1]。제16차 견당선의 귀국 도중 조난 사건으로 인해 천황 알현은 늦어져 다음 해인 보귀 10년(780년) 정초가 되어서야 천황에게 조하를 드렸다. "장선수"라는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이 부분이 처음이다. 5일에 방물을 헌상했고, 그 자리에서 전계 등은 항로를 잃고 먼 오랑캐 경계에 표착하여 배가 파손되었기에 배 2척을 건조하여 수행했다는 뜻과 함께 헌상물을 가지고 조정에 배알한다는 뜻을 전했다[2]。 7일, 오위 이상의 관원과 장선수 등을 조정에서 연회를 열어 대접했고, 조칙에 의해 위계를 주고 지위에 따라 녹을 내렸다[3]。 16일에도 오위 이상의 관원과 발해사를 조정에서 답가의 절회의 연회를 열어 녹을 내렸다[4]。 18일에는 내리에서 대사를 거행했고, 발해사도 사열에 참여했다[5]。
장선수 등은 2월에 귀국했다. 천황은 국왕에게 새서를 하사하고, 아울러 신물을 수여했다[6]。
이 발해사의 송사로 대망공광도가 임명되었지만[7], 일반적으로 송고려사는 귀국용 배를 가지지 않은 경우에 파견되는 것이며, 이번에는 무사히 일본에 도착했기 때문에, 일단 송사 임명이 있었지만 파견이 중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참조
[1]
서적
続日本紀
0778-09-21
[2]
서적
続日本紀
0779-01-01
[3]
서적
続日本紀
0779-01-07
[4]
서적
続日本紀
0779-01-16
[5]
서적
続日本紀
0779-01-18
[6]
서적
続日本紀
0779-02-02
[7]
서적
続日本紀
077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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