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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일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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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속일본기》는 몬무 천황 원년(697년)부터 간무 천황 엔랴쿠 10년(791년)까지의 일본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이다. 전반부는 30권으로 기획되었으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의 영향으로 불완전하게 초고로 끝났고, 간무 천황의 명으로 수정 및 편찬을 거쳐 20권으로 완성되었다. 후반부는 준닌 천황부터 고닌 천황까지를 다루는 14권으로 시작하여, 간무 천황 치세 기사를 추가하여 20권으로 완성되었다. 최종적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를 합쳐 총 40권으로 편찬이 완료되었다. 율령 국가 체제가 정비된 이후의 정치, 사회, 외교,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기록을 담고 있으며, 정치적 사건, 왕위 계승, 한반도와의 관계, 주요 사건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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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일본기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제목속일본기
원어 제목続日本紀
로마자 표기Shoku Nihongi
언어일본어
유형역사서
국가일본
시대나라 시대
내용일본서기의 후속 역사서
편찬 시작797년
편찬 완료797년
저자후지와라노 쓰구나 외
편찬자후지와라노 쓰구나 외
구성총 40권
특징칙찬 국사
기록 범위697년 ~ 791년
포함된 시대몬무 천황 시대
겐메이 천황 시대
겐쇼 천황 시대
쇼무 천황 시대
고켄 천황 시대
준닌 천황 시대
쇼토쿠 천황 시대
고닌 천황 시대
관련 문서일본서기
속후일본기
내용
기록 내용몬무 천황부터 간무 천황까지의 역사 기록
주요 내용칙명 (센묘)
정치 사건
사회 문화
경제 제도
율령 제도
불교 관련 내용
신토 관련 내용
특징역사적 사실 기록
왕실 중심 관점
당시 사회 문화 반영
다양한 문헌 인용
자료적 가치당시 역사 연구의 기본 자료
고대 일본 연구에 중요한 자료
정치, 사회, 문화, 경제 연구에 활용
일본의 고대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
기타
관련 연구Performative Loci of Shoku Nihongi Edicts, 749–770
관련 용어센묘
참고 자료센묘 (Senmyō)

2. 편찬

《속일본기》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 편찬되었으며, 각 시기별 정치적 상황과 편찬자들의 개인적인 사정이 반영되어 내용 구성에 차이를 보인다. 전반부는 몬무 천황부터 고켄 천황까지, 후반부는 준닌 천황부터 고닌 천황, 간무 천황 초기까지를 다룬다.

전반부는 본래 30권으로 기획되었으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 등의 영향으로 초고가 불완전하게 끝났고, 이후 수정 및 증보를 거쳐 20권으로 완성되었다.[2] 후반부 역시 당초 20권에서 14권으로 축소되었다가, 간무 천황 재위 기간의 내용을 추가하여 최종적으로 20권이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속일본기》 40권이 완성된 것은 엔랴쿠 16년(797년)의 일이었다.[3]

2. 1. 편찬 과정

속일본기는 편찬 전반부와 후반부 당시의 사정에 따라 내용이 달라졌다.

전반부는 처음에 몬무 천황 원년(697년)부터 덴표호지 원년(757년), 고켄 천황의 치세까지 다룬 30권의 초안으로 만들어졌다. 고닌 천황이 이시카와노 나타리, 오오미노 미후네, 当麻永嗣에게 수정을 명했지만, 덴표호지 원년 기록을 분실하여 미수로 끝났다.[1] (이 해를 전후한 시기에는 정쟁 등이 많았기 때문에, 집필자 간에 의견을 맞추는 것이 불가능해서 분실하였다고 공표하였다는 설도 있다.)[2] 간무 천황의 명에 의해 스가노 마미치, 아키시노노 야스히토, 나카시나노 고쓰오가 편찬을 인계하여 전 20권을 편수했다.

후반부는 당초 덴표호지 2년(758년)부터 호키 8년(777년), 준닌 천황부터 고닌 천황까지를 다루는 것으로서, 간무 천황의 명으로 편찬되었다. 이시카와노 나타리, 上毛野大川의 상소로 이미 편찬된 20권을, 후지와라노 쓰구타다, 스가노 마미치, 아키시노노 야스히토가 14권으로 줄여 엔랴쿠 13년(794년)에 일단 완성하였다. 스가노 마미치, 아키시노노 야스히토, 나카시나노 고쓰오는 6권을 더하여, 즉 간무 천황의 치세에 해당하는 엔랴쿠 10년(791년)까지의 기사를 첨가하여 전 20권으로 완성하였다.

이상을 합쳐 40권의 편찬이 완료된 것은 엔랴쿠 16년(797년)이었다.[3]

2. 2. 주요 편찬자

스가노 마미치, 아키시노노 야스히토, 후지와라노 쓰구타다, 나카시나노 고쓰오 등이 속일본기의 주요 편찬자이다. 이들은 간무 천황의 명을 받아 편찬 작업을 수행했다.

3. 내용

일본서기』가 일본이라는 국가의 성립 과정을 신화와 역사를 섞어 서술했다면, 『속일본기』는 율령 국가 체제가 정비된 이후의 초기 행보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율령 반포, 조세 제도, 관료 제도, 토지 제도 등 국가 운영과 관련된 다양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정치적 사건, 왕위 계승, 귀족 간의 권력 다툼, 외교 관계, 자연재해, 민중 생활 등 다양한 분야의 기록을 담고 있다.

전반적으로 기술은 간결하며 사건의 요점만을 적었다. 일부 인물의 사망 기사에는 간단한 평가가 붙여져 있는데, 이는 이후 편찬된 역사서에 영향을 주었다. 기사 중 날짜 표기에 오류가 발견되기도 하며, 천황 즉위 기사가 각 권의 중간에 나타나는 등 구성상의 특징도 보인다.[9]

『속일본기』에는 본문에 게재하지 않은 문서류를 원문 그대로 항목별로 배열한 『관조사류』와, 『관조사류』와 유사한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 『외관사류』가 부속 사서로 함께 편찬되었다.

3. 1. 주요 사건

요로 율령 등 주요 사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누락되었으나, 율령국가 형태를 갖추면서 기록이나 공문서 보존 시스템이 형성되어 구체적인 기록이 체계적으로 나타난다.[9] 덴표 문화를 잘 기술하고 있으며, 본격적인 실록으로서 최초로 정비된 사서이다.[9]

간무 천황 치세에 관한 기술 중 사와라 친왕 폐태자 기사는, 사건의 발단이 된 후지와라노 다네쓰구 암살사건과 함께 기재되었다가 나중에 삭제되었다.[9] 삭제된 내용은 헤이제이 천황 때 부활했으나, 사가 천황에 의해 다시 지워져 현재에 이른다.[9]

후지와라노 후유츠구의 난에서 모반인 후지와라노 후유쓰구에 대한 호의적인 기사, 우사하치만노미야 신탁 사건 및 도쿄에 관한 기술에는 정치적 의도가 포함되었다는 설이 있다.[9]

3. 2. 한반도와의 관계

続日本紀일본어는 신라와 발해 등 한반도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신라와는 사신 왕래, 조공, 무역 등을 통해 교류하였다. 발해와도 사신을 주고받고 조공을 받는 등 외교 관계를 맺었다.

또한, 견당사를 파견하여 당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선진 문물을 수입하고, 한반도 정세를 파악하려 했다.[9]

3. 3. 정치적 수정

간무 천황 치세의 기술은 대표적인데, 사와라 친왕 폐태자 기사는 사건의 발단이 된 후지와라노 타네츠구 암살사건과 함께 기재되었던 것이 나중에 삭제되었다. 삭제된 내용은 헤이제이 천황 대에 부활했으나 사가 천황에 의해 다시 지워져 지금에 이른다. 지워진 부분은 『일본기략』에 채록되어 있다. 이러한 편집은 정치적인 목적 외에도 사와라 친왕이 귀신이 되었다는 설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 주장도 있다.[9]

또한 후지와라노 후유츠구의 난에 있어서 모반인 후지와라노 후유쓰구에 대한 호의적인 기사나, 우사하치만노미야 신탁 사건 및 도쿄(道鏡)에 관한 기술에 정치적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는 설도 있다.[9]

4. 판본


  • 国立歴史民俗博物館|국립역사민속박물관일본어 자료편집회 편, 림천서점(臨川書店)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소장 귀중전적총서〉(전5권, 1999-2000년)에 수록된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소장 귀중전적총서본은 아리스가와(有栖川)가 구장본을 저본으로 한다. 산조니시 사네타카(三条西実隆)·산조니시 기미에다(三条西公条) 부자가 에이세이(永正) 12년(1515년)에 복부(卜部)가 상전본을 필사하여 7책본으로 편성한 산조니시(三条西)가 본에서 나온 필사본 군의 하나에 속하며, 에도 시대 초기의 필사로 추정된다.

  • 사카모토 타로(坂本太郎) 교정, 기카와 고분칸(吉川弘文館)에서 1968년에 출판된 신정증보국사대계본이 있다.

  • 요시오카 마사유키, 이시카미 에이이치(石上英一)가 해제·교감하고 야기쇼텐(八木書店)에서 영인본(전5책)으로 1991-1993년에 출판한 속일본기 봉좌문고본은 권11-40의 30권 분량이 가마쿠라 시대 필사의 가나자와 문고(金沢文庫)본이다. 이들은 복부(卜部)가 본 계통 이외의 극히 희소한 필사본이며, 가치가 높다.

5. 주석 및 현대어 번역

(와이드판: 2008년)전 4권1권: ISBN|ISBN일본어 4-582-80457-8, 2권: ISBN|ISBN일본어 4-582-80489-6, 3권: ISBN|ISBN일본어 4-582-80524-8, 4권: ISBN|ISBN일본어 4-582-80548-5『속일본기 전현대어역』우지야타니 멘(宇治谷孟)고단샤(講談社)〈고단샤학술문고(講談社学術文庫)〉1992년 ~ 1995년상・중・하
(현대어역만)상권: ISBN|ISBN일본어 4061590308, 중권: ISBN|ISBN일본어 4061590316, 하권: ISBN|ISBN일본어 4061590324『속일본기』아오키 카즈오(青木和夫) 외 교주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신일본고전문학대계(新日本古典文学大系)〉1989년 ~ 2000년전 5권・별권(색인・연표)1권: ISBN|ISBN일본어 4-00-240012-3, 2권: ISBN|ISBN일본어 4-00-240013-1, 3권: ISBN|ISBN일본어 4-00-240014-X, 4권: ISBN|ISBN일본어 4-00-240015-8, 5권: ISBN|ISBN일본어 4-00-240016-6, 별권: ISBN|ISBN일본어 4-00-240103-0


6. 속일본기 목차 (주요 사항)

6. 1. 42대 몬무 천황

지통 천황이 퇴위하고 경황자가 문무 천황으로 즉위하였다.[1] 역소각은 이즈섬으로 유배되었다.[1] 후지와라 후히토 등이 율령을 선정하였고, 야마노우에 오쿠라 등은 견당사로 파견되었다.[1] 대보율령이 완성되었으며, 같은 해 쇼무 천황후지와라 코우묘시가 태어났다.[1] 이후 지통 상황이 붕어하였다.[1]

6. 2. 43대 겐메이 천황

겐메이 천황은 문무 천황의 붕어[4] 이후 즉위하였다. 무사시국에서 화동을 헌상하자 연호를 화동으로 고치고 화동개전을 발행하였다.[4] 무쓰, 에치고의 에미시 관련 기록이 있다.[5] 헤이조쿄로 천도하고, 산계사를 헤이조로 옮겨 흥복사로 개칭하였다.[5] 축전서위법을 제정하고,[6] 탄고, 오스미, 미사키 삼국을 설치하였다. 또한 국, , 이름에 좋은 글자를 선택하게 하고, 『풍토기』 편찬을 명령하였다.[6] 이후 수황자(후의 쇼무 천황)를 입태자하였다.[6]

6. 3. 44대 겐쇼 천황

겐메이 천황이 퇴위하고, 빙고내친왕(후의 겐쇼 천황)이 즉위하였다.[7] 이 해에 광명자가 황태자비가 되었다. 스루가 등 7국의 고려인 1799명을 무사시국으로 옮겨 고려군을 설치하였다.[7]

행기 등 승려의 활동을 비난하는 칙령이 내려졌다. 이 해, 후지와라 후히토 등이 요로율령을 편찬하였다.[7]

노토, 아와, 이시키, 이세 4국을 설치하였다.[8]

오오토모노 타비토를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하야토를 토벌할 것을 명령하였다. 『일본서기』가 완성되었다. 후지와라 후히토가 사망하였다.[8]

겐메이 상황이 붕어하였다.[8]

삼세일신법을 시행하였다. 다이안 만료가 사망하였다.[8]

6. 4. 45대 쇼무 천황

겐쇼 천황이 퇴위하고 수황자 쇼무 천황이 즉위하였다. 에미시의 반란이 일어나 후지와라 우합이 토벌하였고, 다가 성을 축성하였다. 미노 국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여 누각과 관청, 창고, 불당과 농가가 모두 무너졌다.

기 왕이 태어났으나, 곧 사망하였다. 나가야왕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광명자가 광명황후가 되었다. 오토모노 타비토가 사망하고, 광명황후의 어머니인 타치바나 미치요가 사망하였다.

기비노 마비 등이 귀국하였다. 토네리 신왕이 사망하고, 가즈라키 왕이 타치바나 모로에로 개명하였다. 후지와라 사형제가 차례로 사망하고, 천연두가 크게 유행하였다. 아베 내친왕이 황태자가 되고, 타치바나 모로에가 우대신이 되었다.

쇼무 천황과 광명황후가 지식사의 여래불을 참배하였다. 다자이쇼니 후지와라 히로쓰구가 거병하였으나 후지와라 히로쓰구는 참살되었다. 교닌쿄 천도의 칙령이 내려졌다. 국분사 건립 칙령이 내려졌다. 다자이후가 폐지되고, 시가라쿠에 이궁이 건설되었다.

곤덴에이넨시재법이 제정되고, 쇼무 천황대불 건조를 발원하였다. 교닌쿄 건설이 중지되었다. 난바 궁을 황도로 정했다. 행기를 대승정으로 임명하고, 도읍을 헤이조쿄로 복귀시켰다. 다자이후가 부활하고, 나라에서 대불 건조가 시작되었다. 난바 궁에서 쇼무 천황의 상태가 위독해졌다. 교닌 궁의 대극전을 야마시로 국 국분사에 시입하였다. 겐쇼 상황이 붕어하였다. 행기가 사망하고, 무쓰 국에서 처음으로 황금이 산출되어 헌상되었다. 연호를 천평감보로 고쳤다.

6. 5. 46대 고켄 천황

宝字称徳孝謙皇帝|호우지쇼오토쿠코켄코테이일본어 (46대) 고켄 천황 시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 쇼무 천황 퇴위. 아베 황태자가 즉위하여 고켄 천황이 됨. 천평쇼호로 연호 변경. 대불 주조 완료.
  • 일본 최초의 한시집 회풍조 완성.
  • 동대사에서 대불개안 공양.
  • 당나라 승려 감진이 오토모노 후마로의 배로 일본에 도착. 후지와라노 미야코 사망.
  • 동대사 계단원 완성.
  • 다치바나노 모로에가 좌대신 사임. 쇼무 상황 붕어. 유조에 따라 도소왕이 황태자에 오름.
  • 다치바나노 모로에 사망. 도소왕 황태자 지위 상실. 다이키왕(준닌 천황)이 황태자가 됨.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전제에 대항하여, 모로에의 아들 나라마로 등이 반란을 일으키나 실패하고 다수가 처형됨.

6. 6. 47대 준닌 천황

淡路廃帝|아와지 폐제일본어(大炊王|오오이 왕일본어)는 758년 고켄 천황의 양위를 받아 일본의 제47대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천황에게 에미 오시카쓰(恵美押勝)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760년 후지와라 나카마로가 대사로 임명되었고, 고묘 황태후가 붕어하였다. 761년에는 오미의 호라궁을 북경으로 정했다.

762년 고켄 상황과 준닌 천황의 불화가 발생하고, 고켄 상황은 출가하였다. 다가성, 아키타성 등이 정비되었고, 전국적으로 기근과 질병이 발생하였다.

763년 후지와라 요시쓰구 등이 후지와라 나카마로를 타도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였다. 간진이 사망하고, 도쿄가 소승도로 임명되었다.

6. 7. 48대 쇼토쿠 천황 (고켄 천황 중조)

称徳天皇|칭덕천황일본어 宝字称徳孝謙皇帝|보자칭덕효겸황제일본어 (고켄 천황 중조)

  • 후지와라 나카마로(오시카쓰)가 도쿄의 배제를 도모했으나 실패하고 처형되었다. 도쿄는 대신 선사가 되었다. 준닌 천황아와지로 유배되었고, 코켄 상황이 다시 즉위하였다(중조).
  • 곤덴에이넨시재법이 정지되었다. 유배되었던 준닌 천황이 유폐소 탈출을 시도하다 사망했다. 도쿄태정대신이 되었다.
  • 도쿄법왕이 되었다.
  • 법왕궁직이 설치되었다.
  • 치쿠젠 다이타이성이 완성되었다.
  • 아가타이누카이네이메 등이 쇼토쿠 여제를 저주한 것이 발각되어 원류(遠流)되었다.

6. 8. 49대 고닌 천황

天宗高紹天皇|아메무네타카쓰기노스메라미코토일본어 (고닌 천황)

  • 쇼토쿠 천황 붕어. 하쿠헤키왕(고닌 천황)이 황태자가 됨. 도쿄시모쓰케국으로 좌천. 이 해 아베 나카마로가 당에서 객사.
  • 이누에 네친왕이 황후가 됨.
  • 타토 신왕이 황태자가 됨. 좌대신 후지와라 나가테 사망. 후지와라 요쓰구가 내신이 됨.
  • 이누에 내친왕이 모반을 꾀한 것으로 인해 황후의 지위에서 쫓겨남. 타토 황태자 폐위.
  • 야마베 신왕이 황태자가 됨. 료벤 사망.
  • 에미시가 모모세성을 공격하여 서곽을 무너뜨림.
  • 사에키 이마게토 등을 견당사로 임명. 기비노 마비 사망.
  • 데와국의 시와무라와 무쓰국의 단자와의 에미시가 일어섬.
  • 후지와라 요쓰구가 내대신이 되었다가 사망.
  • 후지와라 우오나가 내신 다음 충신이 됨.
  • 후지와라 모모카와 사망. 이 무렵, 후지와라 세이가가 당에서 객사.
  • 각번성의 축성 계획. 이지히 마로가 반란을 일으켜, 안찰사를 살해하고, 다가성을 점령하여 방화함.
  • 백만탑을 제사에 배분함.

6. 9. 50대 간무 천황

日本根子皇統弥照尊|야마토네코미스마루이요요테라스노미코토일본어 (간무 천황)

  • 고닌 천황 퇴위. 야마베 황태자가 즉위하고, 사라 친왕은 황태자가 됨. 고닌태상천황 붕어.[1]
  • 히카미가와 쓰구 모반 사건 발생. 궁사 정리로 조궁성, 전주사 등 폐지.[2]
  • 나가오카쿄 예정지 시찰. 나가오카쿄로 천도.[3]
  • 아와지 미후네, 오오토모노 야도니에 사망. 후지와라 타네쓰구 암살. 황태자 사라 친왕 폐위.[4]
  • 에미시와 교역 금지. 이 해, 사이쵸 엔랴쿠지 창건.[5]
  • 삼관 폐지.[6]
  • 산정율령 시행. 기내 반전사 임명.[7]

참조

[1] 논문 Performative Loci of Shoku Nihongi Edicts, 749–770 http://journal.oralt[...] 2009-03-01
[2] 서적 Rikkokushi (六国史) Yoshikawa Kobunkan (吉川弘文館) 1994
[3] 백과사전 Senmyō http://eos.kokugakui[...] 2012-02-27
[4] 웹사이트 続紀 https://kotobank.jp/[...]
[5] 기타
[6] 기타
[7] 서적 “日本書紀”とはなにか 燃焼社 2022
[8] 서적 災害復興の日本史 吉川弘文館 2013
[9] 서적 "日本書紀"とはなにか 燃焼社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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