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발해와 일본의 관계는 8세기 초부터 10세기 초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약 200여 년간 지속되었으며, 초기에는 군사적 목적에서 시작하여 문화 및 경제 교류 중심으로 변화했다. 발해는 일본에 총 34회의 사신을 파견했고, 주로 모피, 인삼, 꿀 등을 수출했으며, 일본에서는 섬유 제품과 기타 물품이 무역 품목으로 거래되었다. 발해 멸망 이후에도 발해 유민들은 일본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했으며, 이 관계는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와 문화 교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헤이안 시대의 외국인 - 도이의 입구
도이의 입구는 1019년 여진족 해적 '도이'가 고려 방면에서 출발하여 일본의 쓰시마, 이키 섬을 공격하고 규슈 지역을 약탈한 사건으로, 일본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만주족에 대한 경계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 나라 시대의 외국인 - 도래인
도래인은 고대 일본에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건너와 벼농사, 철기 기술, 유교, 불교 등 선진 문물을 전파하여 야마토 왕권의 성립과 일본 문화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 나라 시대의 외국인 - 고약광
고약광은 보장왕의 아들로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가 고마군을 개척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사후에는 신으로 숭앙받고 그의 가문은 번성했다. - 발해-일본 관계 - 신라정토계획
신라정토계획은 삼국통일 후 일본이 신라를 침략하기 위해 구상한 계획으로, 신라와 일본의 관계 악화와 당나라의 혼란을 틈타 시도되었으나 발해의 소극적 태도와 내부 문제로 무산되었다. - 발해-일본 관계 - 견발해사
견발해사는 728년부터 811년까지 일본이 발해에 파견한 사절을 지칭하며, 발해와 군사동맹을 맺고 고구려 부흥으로 여겨 우대했으나, 신라 정벌 계획과 조공 무역으로 인해 파견이 제한되기도 했다.
2. 발해와 일본의 관계
발해와 일본의 관계는 8세기 초부터 10세기 초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약 200여 년간 지속되었다.[1] 초기에는 군사적 목적에서 시작되었으나, 점차 문화 및 경제 교류 중심으로 변화하였다.[1]
성왕 시대에 당나라와의 관계가 안정되면서, 발해와 일본의 교류는 군사적인 목적보다는 문화와 경제 중심으로 변화했다.[1] 특히 조공 무역 형태를 취하면서 발해는 일본에 공물을 보내고, 일본은 이에 대한 답례로 몇 배의 물품을 보내 발해에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다.[1] 일본은 이러한 비용 부담 때문에 사절 왕래를 12년에 한 번으로 제한하기도 했지만, 교류는 발해 멸망 때까지 계속되었다.[1]
발해는 일본과 당나라 사이의 교통을 중개하는 역할도 했다.[1] 조난당한 견당사 평군광성이 발해 사신과 함께 귀국하고, 일본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당나라 선명력이 발해 사신을 통해 전래된 것이 그 예이다.[1]
한자 문화권에 속했던 발해와 일본은 한문과 한시를 통해 활발히 교류했다.[1] 말이 통하지 않아도 필담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문서는 번역 없이 통용되었다.[1] 초기에는 무관 중심의 사절단이 파견되었으나, 762년 제6회 발해 사신 왕신복부터는 문관 중심으로 바뀌어 한시문에 뛰어난 문인들이 주로 파견되었다.[1]
758년 제4회 발해 사신 양승경 일행은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사저 "다무라 제"에서 한시를 주고받았으며, 이는 『경국집』에 기록되어 있다.[1] 814년 제17회 발해 사신 왕효렴은 문인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이끌고 왔으며, 일본 측에서는 시게노 사다누시와 사카노우에노 이마쓰구가 이들을 맞이하여 한시를 교환했고, 이는 『문화수려집』에 실려 있다.[1]
발해에서는 왕문구, 주원백, 양성규, 배정, 배규 등이, 일본에서는 스가와라 기요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시마다 다다오미, 도노 요시카, 기노 나가오, 오에노 아사쓰나, 후지와라 마사카즈 등이 교류했으며, 이들이 주고받은 한시는 『경국집』, 『문화수려집』, 『능운집』, 『관가문초』, 『전씨가집』, 『부상집』 등에 남아 있다.[1]
발해는 일본에 총 34회의 사신을 파견하였다. (일본 측 기록 기준)[1] 926년 발해가 거란(요)에 멸망한 후, 929년에는 거란이 세운 동단국에서 온 사자가 발해의 후계를 칭하며 일본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1]
2. 1. 초기 관계 (8세기)
발해는 698년 대조영에 의해 건국되었으나, 무왕 시대에는 당나라와 신라와의 외교적 대립으로 국제적 고립 위기에 처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발해는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군사적 협력을 모색하였다.[1] 사절단은 러시아 연해주 포시예트 만 근처 크라스키노 토성(염주성) 유적에서 출발한 것으로 추정된다.[1]발해는 군사 동맹을 목적으로 사신을 보냈으나, 일본은 이를 일본의 국위를 흠모하여 종속되기를 바라는 조공으로 간주하고 사신을 후대하였다.
다음은 발해 사신의 일본 방문 기록을 정리한 표이다.
2. 2. 관계의 변화 (8세기 후반 ~ 9세기)
당나라와의 관계가 안정되면서, 발해와 일본의 관계는 군사적 목적보다는 문화 및 경제 교류 중심으로 변화하였다.[1] 성왕 시대에 당나라와의 융화가 이루어지면서 군사적인 의미는 퇴색되고, 주로 문화 교류와 경제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사절로 그 성격이 변화해 갔다.[1]특히 문제가 된 것은 조공 무역의 형태를 취했다는 점인데, 이로 인해 발해로부터의 공물에 대해 일본 측에서는 수 배의 회사를 줌으로써 응해야 할 의무가 생겨 발해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1] 일본 측은 조정의 징세 능력이 쇠퇴하고, 사절 접대와 회사 지급을 위한 경비가 부담이 되자 사절 내조를 12년에 1번으로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그 교류는 발해 멸망까지 지속되었다.[1]
당나라와 발해의 관계가 안정되면서, 일본과 당나라 사이의 교통을 중개하는 역할을 했다.[1] 조난당해 귀국하지 못했던 견당사의 평군광성이 발해 사신과 함께 귀국에 성공한 것, 일본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용된 달력인 당나라의 선명력이 발해 사신에 의해 전래된 것이 그 예이다.[1] 또한 《신당서》 발해전은 당나라 대력 연간 (766년 ~ 779년)에 발해국이 일본의 무녀 11명을 당나라에 헌상했다는 것을 전하고 있으며, 그녀들은 그 이전에 일본에서 발해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1]
당나라와 함께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던 발해와 일본의 궁정 사회를 구성하는 상류 계층에게는 한적(漢籍), 한문학 학습이 기초 교양으로 여겨졌다.[1] 서로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필담을 하면 의사가 통했고, 문서류는 번역하지 않아도 그대로 통용되는 상황이었다.[1] 특히 한적·한문학이 발달한 것은 군사적 제휴를 맺으려 했던 초기 외교 시기가 아니라, 무역을 목적으로 한 경제 외교로 변화한 시기 이후이다.[1] 발해 사신도 초기에는 모두 무관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762년 (천평보자 6년)에 내일한 제6회 발해 사신 왕신복부터는 문관 사절이 되어, 대부분 한시문에 뛰어난 문인이 선발되어 내일했다.[1]
758년 (천평보자 2년)에 내일한 제4회 발해 사신 양승경 때는 한시의 응수가 이루어진 처음 (기록상의 시작이라는 의미)이었다.[1] 양승경 등은 조정에서의 정식 연회 외에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사저 "다무라 제"에 초대되어 환대를 받았다.[1] 그 자리에서 당대의 문사들이 모여 한시를 지어 사신을 송별했다.[1] 이에 대해 발해 사신 쪽에서는 문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부사 "양태사"(揚泰師)가 한시 2수를 지어 이에 화답했다.[1] 그 2수, 칠언의 "밤에 다듬이 소리 듣고"와 오언의 "기노 아손 공의 눈 시를 받들어 화답하다"는 『경국집』에 남아 있다.[1]
문화인적인 성격을 가진 사가 천황의 권력이 확립된 후의 제17회 발해 사신은 대사, 부사 이하, 판관, 록사에 이르기까지 문인을 갖춘 사절단을 편성하여 파견했다.[1] 814년 (홍인 5년) 9월, 이즈모에 도착한 이 발해 사신에 대해 일본 측은 굴지의 문인 시게노 사다누시와 사카노우에노 이마쓰구가 존문 겸 령발해객사로 파견되었다.[1] (이것은 헤이안 시대의 한시집 『문화수려집』에 남아 있는 거세식인이나, 발해 대사 왕효렴의 시제를 통해 알 수 있다.)[1] 이윽고 연내에 입경한 사절단은 정초부터의 의식, 연회에 참석했고, 특히 정월 7일의 사절단 향응을 위해 열린 연회에서는 한시 교환이 이루어졌다.[1] 이 연회에서의 작품으로 보이는 발해 측 3수, 일본 측 5수의 한시는 『문화수려집』에 선정되어 있다.[1] 1월 22일에 교토를 떠나 귀국길에 오른 후에도 한시를 교환했고, 왕효렴의 작품 3수가 마찬가지로 『문화수려집』에 선정되어 있다.[1]
이 외에도 발해에서는 왕문구, 주원백, 양성규, 배정, 배규 등 일급 문인이 내일했고, 일본에서는 스가와라 기요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시마다 다다오미, 도노 요시카, 기노 나가오, 오에노 아사쓰나, 후지와라 마사카즈 등 문인이 응대했다.[1] 교환된 한시는 『경국집』, 『문화수려집』 외에, 『능운집』이나 『관가문초』, 『전씨가집』『부상집』 등에 남아 있다.[1] 이러한 한시는 한시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당시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1]
2. 3. 한문, 한시 교류
발해와 일본은 모두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어서, 한문과 한시를 통한 지식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1]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필담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문서는 번역 없이도 통용되었다.[1]758년(천평보자 2년) 발해 사신 양승경 일행이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사저 "다무라 제"에 초대받아 한시를 주고받은 것이 한시 교류의 시작으로 기록되어 있다.[1] 발해 사신단의 부사 "양태사"(揚泰師)는 2수의 한시를 지어 화답했는데, 이는 『경국집』에 남아 있다.[1]
814년 (홍인 5년) 발해 대사 왕효렴이 문인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 이즈모에 도착했다. 일본 측에서는 시게노 사다누시와 사카노우에노 이마쓰구가 이들을 맞이했다. 정월 연회에서 양국은 한시를 교환했으며, 이때의 작품들이 『문화수려집』에 실려 있다.[1]
발해에서는 왕문구, 주원백, 양성규, 배정, 배규 등의 문인이 일본을 방문했고, 일본에서는 스가와라 기요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시마다 다다오미, 도노 요시카, 기노 나가오, 오에노 아사쓰나, 후지와라 마사카즈 등이 이들을 응대했다.[1] 이들이 주고받은 한시는 『경국집』, 『문화수려집』, 『능운집』, 『관가문초』, 『전씨가집』, 『부상집』 등에 남아 당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1]
2. 4. 발해 사절단 목록 (渤海使一覧)
발해는 일본에 총 34회의 사신을 파견하였다. (일본 측 기록 기준)[1]
발해는 무왕 시대에 당나라와 신라와의 외교적 대립으로 인한 국제적 고립을 벗어나기 위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사절단은 러시아 연해주 포시예트 만 근처 크라스키노 토성(염주성) 유적에서 출발한 것으로 추정된다.[1]
주:926년에 발해는 거란 (후의 요)에게 멸망했다. 929년의 사절은 거란이 세운 동단국에서 온 사자가 발해사의 후계를 칭한 것이다. 감로는 동단국의 연호, 야율돌욕은 동단국의 왕.
3. 발해의 대일 교역
발해는 군사 동맹을 맺기 위해 사신을 보냈으나, 일본은 이를 종속국의 조공으로 여겨 사신을 후대했다. 성왕 시대에 당나라와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군사적 목적은 퇴색되고, 문화 교류와 경제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사절로 그 성격이 변화했다.
발해와 일본의 교역은 조공 무역 형태를 띠었는데, 발해는 일본에 공물을 바치고 일본은 그 대가로 회사(답례품)를 제공하였다.[1] 이로 인해 발해는 막대한 이익을 얻었으나, 일본 조정은 징세 능력 쇠퇴와 사절 접대 및 회사 지급에 따른 경비 부담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은 사절 내조를 12년에 한 번으로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교류는 발해 멸망까지 지속되었다. 발해 사절단의 내항은 초기에는 12년에 한 번 정도였지만, 무역이 중심이 되면서 횟수가 크게 증가했다. 그러나 무역을 목적으로 하는 내항자는 입경이 허용되지 않았다.
당나라와 발해의 관계가 안정되면서, 발해는 일본과 당나라 사이의 교통을 중개하는 역할을 했다. 견당사였던 평군광성이 발해 사신과 함께 귀국하고, 일본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선명력이 발해 사신에 의해 전래된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신당서》 발해전에는 발해국이 일본의 무녀 11명을 당나라에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들은 일본에서 발해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3. 1. 교역 물품
발해는 주로 북방산 담비, 호랑이, 반달곰 등의 모피와 인삼, 꿀 등을 일본에 수출하였고, 일본에서는 섬유 제품이 대부분이었다. 그 외에 금, 수은, 금칠, 해석류유(海石榴油), 수정 염주, 빈랑수 부채 등이 무역 품목으로 취급되었다.[1]
3. 2. 교역로
발해 사신은 주로 북서 계절풍과 리만 해류를 이용하여 한반도 동해안을 따라 남하한 뒤, 쓰시마 난류를 타고 일본에 도착하였다.[1] 대부분 늦가을에서 겨울에 일본에 내항했다.
발해사는 동해안 측의 산인 지방에서 호쿠리쿠 지방, 도호쿠 지방에 걸쳐 많은 항구에 상륙했다. 전반기에는 데와 국・사도 국에 총 8차례나 도착했지만, 후반기에는 모두 노토 국 이서가 되었다. 이는 항해술의 발달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발해사의 교류는 49회(내방 34회・방문 15회)로 기록되어 있다.[6] 발해사 내착지의 하나로, '''후쿠라쓰''' (현 이시카와현 시카정 후쿠우라항)일 가능성이 높다.[7] 또한 발해사가 일본에서 귀국할 때 발해선의 수리・조선・출항 기지로 알려져 있다.[8]
직접 일본해를 횡단하는 것이 아니라, 쓰시마 해류를 타고 도호쿠 지방의 연안을 북동쪽으로 진행하여 홋카이도, 사할린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리만 해류를 타고 연해주의 연안을 남하했을 것으로 보인다.
3. 3. 교역의 경제적 의미
발해와 일본의 교역은 조공 무역 형태를 띠었는데, 발해는 일본에 공물을 바치고 일본은 그 대가로 회사(답례품)를 제공하였다.[1] 이로 인해 발해는 막대한 이익을 얻었으나, 일본 조정은 징세 능력 쇠퇴와 사절 접대 및 회사 지급에 따른 경비 부담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은 사절 내조를 12년에 1번으로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교류는 발해 멸망까지 지속되었다. 발해 사절단의 내항은 초기에는 12년에 한 번 정도였지만, 무역이 중심이 되면서 횟수가 크게 증가했다. 그러나 무역을 목적으로 하는 내항자는 입경이 허용되지 않았다.
4. 발해 멸망 이후
926년 발해가 거란에 멸망한 후, 발해 유민들은 동란국(거란)을 통해 일본과의 관계를 이어가고자 하였다. 929년에는 동란국에 복속된 배규중국어가 동란국의 사자로서 일본에 파견되었다. 그는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했음을 알리고, 동란국 왕의 무도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일본 조정은 배규중국어가 주군을 바꾸고 새 주군의 악담을 하는 것을 불충하다고 여겨 입경을 거부하고 쫓아냈다. 이를 통해 동란국이 일본과의 교류를 원했지만, 일본은 이를 원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5. 역사적 의의 및 평가
발해와 일본의 관계는 단순한 외교 관계를 넘어,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와 문화 교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1] 발해는 무왕 시대에 당나라와 신라와의 외교적 대립으로 인한 국제적 고립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다.[1] 초기에는 군사 동맹을 맺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성왕 시대에 당나라와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문화 교류와 경제 활동 중심으로 성격이 변화했다.[1]
발해 사신은 조공 무역 형태를 취했는데, 이는 일본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1] 일본 조정은 징세 능력 쇠퇴와 사절 접대 비용 부담으로 사절 내조를 12년에 한 번으로 제한했지만, 교류는 발해 멸망까지 지속되었다.[1]
발해는 일본과 당나라 사이의 교통을 중개하는 역할을 했다.[1] 견당사 평군광성이 발해 사신과 함께 귀국하고, 일본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용된 선명력이 발해 사신에 의해 전래된 것이 그 예이다.[1] 《신당서》 발해전에는 발해가 일본 무녀 11명을 당나라에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일본에서 발해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1]
발해와 일본은 한자 문화권에 속해 상류층은 한문학 학습이 기초 교양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필담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문서는 번역 없이 통용되었다. 한문학이 발달한 것은 군사적 제휴 목적의 초기 외교 시기가 아니라, 무역 중심의 경제 외교 시기 이후이다. 발해 사신도 초기에는 무관 직함이었지만, 762년 (천평보자 6년) 왕신복부터 문관 사절로 바뀌어 한시문에 뛰어난 문인이 선발되었다.
758년 (덴표호지 2년) 양승경 때부터 한시 교환이 시작되었다. 양승경 등은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사저 "다무라 제"에 초대받아 한시로 송별을 받았고, 부사 양태사는 한시 2수로 화답했다. 이 시들은 『경국집』에 남아 있다.
814년 (홍인 5년) 왕효렴은 문인 중심의 사절단을 이끌고 이즈모에 도착했다. 일본 측은 시게노 사다누시와 사카노우에노 이마쓰구를 파견했고, 정월 연회에서 한시 교환이 이루어졌다. 발해 측 3수, 일본 측 5수의 한시는 『문화수려집』에 선정되었고, 귀국길에도 한시를 교환했다.
발해에서는 왕문구, 주원백, 양성규, 배정, 배규 등, 일본에서는 스가와라 기요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시마다 다다오미, 도노 요시카, 기노 나가오, 오에노 아사쓰나, 후지와라 마사카즈 등이 한시 교류에 참여했다. 교환된 한시는 『경국집』, 『문화수려집』, 『능운집』, 『관가문초』, 『전씨가집』, 『부상집』 등에 남아 당시 상황을 파악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발해와 일본 간 교류 내역은 아래 표와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