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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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마씨는 고구려 멸망 후 일본으로 망명한 고구려인의 후손으로, 특히 고구려 왕족으로 여겨진 약광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씨족이다. 703년 일본 조정은 약광에게 고마노고키시라는 가바네를 하사했고, 약광은 716년 무사시노 평원에 고구려 유민들을 정착시켰다. 약광의 후손들은 고마 신사의 궁사로 대대로 이어졌으며, 고마 신사는 한국과 일본의 고대 유대 관계를 상징하는 곳으로 여겨진다. 고마씨는 약광 계통과 영류왕의 서자 배래복덕을 시조로 하는 고마노아손 계통으로 나뉘며, 센고쿠 시대에는 무장 고마 쓰네즈미가 등장하기도 했다. 고마 신사는 고마씨의 역사를 기리는 장소로, 현재는 일본과 한국의 우호 관계를 상징하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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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나씨 (횡성 고씨) - 다카쿠라노 후쿠신
다카쿠라노 후쿠신은 무사시국 출신으로 스모 실력으로 조정에 등용되어 쇼무 천황부터 간무 천황 시대까지 요직을 역임했으며, 81세에 사망했다. - 고마씨 - 고마군 (사이타마현)
716년 일본 조정이 고구려 유민을 무사시국에 이주시켜 설치한 고마군은 고마노 자코가 초대 군사였으며, 현재의 히다카시와 한노시 일부에서 시작하여 에도 시대에 이르러 영역이 확대되었으나 1896년 이루마군에 편입되며 폐지되었다. - 고마씨 - 고마 신사
고마 신사는 730년 고구려 유민들이 고구려 왕족을 기리기 위해 창건한 신사로,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출세와 관련된 속설로 인해 참배객이 많다.
고마씨 | |
---|---|
개요 | |
씨족 이름 | 고마 씨 |
한자 표기 | 高麗氏 |
가나 표기 | こまうじ |
로마자 표기 | Komauji |
씨성 | 고마 고키시, 고마 아손 |
시조 | 고구려 왕족 고마노 쟛코우 |
종별 | 제번 |
본관 | 무사시국 고마군 |
주요 인물 | 다카쿠라노 후쿠신 |
역사 | |
창시 연도 | 666년 |
창시자 | 쟛코우 |
출신 | 고(高)씨 |
2. 역사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많은 고구려인들이 일본으로 망명했다. 703년(다이호 3년) 일본 조정은 고구려 왕족으로 여겨지는 현무약광(玄武若光)에게 고마노고키시(高麗王)라는 카바네를 주었다. 750년(덴표쇼호 2년)에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5대 손 복신 등의 일족에게 고마노아손(高麗朝臣)이라는 카바네를 내렸다.
약광의 자손은 대대로 고마 신사의 궁사(宮司)를 맡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716년 건립된 고마 신사는 사이타마현히다카시니이보리에 위치하며, 무사시국 내 55개 시라히게 신사의 총본산이었다. 경내에는 옛 고마 가문 저택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있다.
고마 가문은 사무라이 문화의 기원에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지며, 말, 철제 무기, 갑옷 제작 기술 등을 일본에 전파했다.
2. 1. 고구려계 도래인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 약 1,799명의 고구려인이 일본으로 망명했다. 703년(다이호 3년) 일본 조정은 고구려 왕족으로 여겨지는 현무약광(玄武若光)에게 고마노고키시(高麗王)라는 카바네를 주었다. 750년(덴표쇼호 2년)에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5대 손 복신 등 일족에게 고마노아손(高麗朝臣)이라는 카바네를 내렸는데, 아손이라는 카바네를 도래인에게 내리는 것은 당시 일본에서는 이례적인 것이었다.[9] 그 뒤 후쿠노부는 다시 성을 다카쿠라(高倉)로 고쳤다.약광의 자손은 대대로 고마 신사의 궁사(宮司)를 맡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동족으로는 고구려 안장왕의 3대 손을 시조로 하는 고마(狛)씨가 있고, 센고쿠 시대의 무장 고마 쓰네즈미(高麗經澄)가 있다.
고구려인들에게 주어진 고마 지역은 산기슭에서 무사시국의 광대한 평원을 거쳐 현재의 사야마시까지 뻗어 있었다. 수세기 동안 고마 사람들은 자기 씨족끼리만 결혼했고, 나중에 이 나라를 휩쓸었던 대부분의 일본 씨족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은 번성했고 그 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이었다.[7]
고마 가문은 사무라이 문화의 기원에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 그들은 말, 철제 무기, 갑옷 제작 기술 및 기타 기술을 일본으로 가져왔다.
2. 1. 1. 약광 계통
668년 일본으로 망명한 고구려 보장왕의 서자 고마노 얏코(高麗若光)를 시조로 한다.[2][3]- 고마노 얏코(高麗若光): 703년 일본 조정으로부터 고마노고키시(高麗王)라는 카바네를 받았다.[4]
- 고마노 이에시게(高麗家重): 약광의 맏아들
- 고마노 세이운(高麗聖雲): 약광의 셋째 아들로 승려로 출가
716년, 약광은 그와 함께 온 1,799명의 고구려 난민들을 일본 전역에서 불러 모아 무사시노 평원의 황무지(현재의 히다카시)에 정착하도록 지시받았다.[5] 약광이 죽자 그를 기리기 위해 고마 신사가 세워졌고, 고마 신사 옆에는 고구려에서 온 정착민들이 약광의 무덤을 표시하기 위해 쇼덴인 불교 사찰을 세웠다.
오늘날, 약광의 60대 직계 후손인 고마 후미야스(高麗文康)는 그의 가족의 조상 신사에서 신토 신관이다. 한국의 샤머니즘 전통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메이지 정부가 모든 예배자들에게 국가 신도를 채택하도록 강요했을 때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신사는 한국과 일본의 고대 유대 관계를 전파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으며, 오늘날 일본과 한국의 우호의 상징으로 기능한다.[6]
한편 고마 신사에 전해지는 《고마씨계도(高麗氏系圖)》에도 그 후예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지만, 고마노아손 계통의 인물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고 있지 않다.
2. 1. 2. 배내복덕 계통
영류왕의 서자 배래복덕(背奈福徳)을 시조로 한다.[9]이름 | 가계 | 비고 |
---|---|---|
배래복덕(背奈福徳) | 영류왕의 서자 | 세나 우지(背奈氏)의 시조. |
세나노 후쿠미쓰(背奈福光) | 복덕의 아들 | |
세나노 유키후미(背奈行文) | 복덕의 아들 | 관위는 종5위하. 가인으로도 유명했으며 《만요슈》에 와카 한 수, 《회풍조》에 오언한시 2수가 남아 전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세나노교몬노마헤쓰키미(消奈行文大夫)라고도 불렸다. |
다카쿠라노 후쿠노부(高倉福信) | 후쿠미쓰의 아들 | 709년~789년. 다카쿠라 씨의 시조. 쇼무 천황에 의해 발탁되어 고켄 천황의 측근으로서 활약했고, 간무 천황가 즉위한 뒤에도 실각하지 않고 그대로 요직을 맡았다. 관위는 종3위. 무사시노카미로 있던 덴표쇼호 8년(756년) 6월에 《도다이사 헌물장(東大寺獻物帳)》에 종4위하 자미소필 중위소장 야마시로노카미(從四位下紫微少弼中衛少将山背守), 7월에 '종4위하 자미소필 중위소장 무사시노카미(從四位下紫微少弼中衛少将武蔵守)라고 적은 후쿠노부 자신의 서명이 남아있다. |
다카쿠라노 후쿠누시(高倉福主) | 후쿠미쓰의 아들 | |
다카쿠라노 후쿠노베(高倉福延) | 후쿠미쓰의 아들 | |
고마노 오야마(高麗大山) | 유키후미의 아들 | 관위는 종5위하. 덴표쇼호 4년(752년)에 견당판관(遣唐判官)의 자격으로 당에 파견되기도 했으며, 2년 뒤에 귀국하여 정육위상에서 종오위하로 승진. 덴표호지 5년(761년)에 무사시노스케(武蔵介)를 거쳐 견고려대사(遣高麗大使)로서 발해의 사신 왕신복(王新福)을 발해까지 전송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듬해 6년(762년) 돌아오는 배 안에서 병을 얻어 사리요쿠노쓰(佐利翼津)에서 사망. 사후 정오위하로 추증되었다. |
다카쿠라노 이시마로(高倉石麻呂) | 후쿠노부의 아들 | |
다카쿠라노 야마타케(高倉山岳) | 후쿠노부의 아들 | |
다카쿠라노 오토히토(高倉乙人) | 후쿠노베의 아들 | |
다카쿠라노 도노모리(高倉殿守) | 오오야마의 아들 | |
다카쿠라노 도노쓰구(高倉殿継) | 오오야마의 아들 | 관위는 종5위상. 스루가국와 히고국의 가미(守)를 지냈으며, 호키 8년(777년)에 발해의 사신 장선수(張仙壽)를 발해까지 전송하는 송사의 임무를 맡기도 했다. |
750년 (덴표쇼호 2년)에는 광개토대왕의 5대손 복신 등 일족이 아손을 받았다. 당시 도래인계 씨족에게 아손을 주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후에 복신은 씨를 '''고창'''으로 개칭했다.
'''고려 아손계'''
이름 | 가계 | 비고 |
---|---|---|
배내 복덕 | 배내씨 시조 | |
배내 복광 | 복덕의 아들 | |
배내 행문 | 복덕의 아들 | |
고창 복신 | 복광의 아들 | 고창씨 시조 |
고창 복주 | 복광의 아들 | |
고창 복연 | 복광의 아들 | |
고려 대산 | 행문의 아들 | |
고창 석마로 | 복신의 아들 | |
고창 산악 | 복신의 아들 | |
고창 을인 | 복연의 아들 | |
고창 전수 | 대산의 아들 | |
고창 전계 | 대산의 아들 |
한편 고마 신사에 전해지는 《고마씨계도(高麗氏系圖)》에도 그 후예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지만, 고마노아손 계통의 인물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고 있지 않다.
2. 2. 간무 헤이지 계통
간무 덴노의 황자에게서 비롯된 간무헤이지(桓武平氏)의 분파인 지치부(秩父) 집안 계열의 고마씨도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지치부노 다케모토(秩父武基, 다이라노 다케모토)의 맏아들인 다케이(武家, 다이라노 다케이)가 바로 그 인물이다. 그는 도래계 고마 일족들의 땅에서 살았으므로 고마라고 불렸다.[1] 이후 그 일족은 시나노(信濃)의 시라카와(白河), 빗추(備中)의 아카키(赤木), 에치고(越後)의 이로베(色部)ㆍ혼조(本庄) 집안으로 갈라져 나갔다.[1]3. 주요 인물
750년 광개토왕의 5대손 배내복덕의 후예 다카쿠라노 후쿠노부 등에게 고마노아손(高麗朝臣)이라는 카바네가 내려졌는데, 이는 도래인에게는 이례적인 일이었다.[9] 후쿠노부는 이후 성을 다카쿠라(高倉)로 고쳤다.[9] 안장왕의 3대 손을 시조로 하는 고마(狛)씨와 센고쿠 시대 무장 고마 쓰네즈미(高麗經澄)도 같은 계통이다.[9]
고마 신사에 전해지는 《고마씨계도(高麗氏系圖)》에는 그 후예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고마노아손 계통은 언급되지 않는다.[9]
3. 1. 약광 계통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 약 1,799명의 고구려인이 일본으로 망명했다.[9] 703년(다이호 3년) 일본 조정은 고구려의 왕족으로 여겨지는 고구려의 옛 사신 현무약광(玄武若光)에게 고마노고키시(高麗王)라는 카바네를 주었다.[9] 약광의 자손은 대대로 고마 신사의 궁사(宮司)를 맡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9]이름 | 설명 |
---|---|
고마노 얏코(高麗若光) | 고구려 보장왕의 서자로 668년 일본으로 망명[9] |
고마노 이에시게(高麗家重) | 약광의 맏아들[9] |
고마노 세이운(高麗聖雲) | 약광의 셋째 아들로 승려로 출가[9] |
3. 2. 배내복덕 계통
영류왕의 서자 배래복덕(背奈福徳)을 시조로 한다.[9]- 배래복덕(背奈福徳): 세나 우지(背奈氏)의 시조.
- 세나노 후쿠미쓰(背奈福光): 복덕의 아들
- 세나노 유키후미(背奈行文): 복덕의 아들. 관위는 종5위하. 만요슈에 와카 한 수, 회풍조에 오언한시 2수가 남아 전한다. 다른 이름은 세나노교몬노마헤쓰키미(消奈行文大夫)이다.
- 다카쿠라노 후쿠노부(高倉福信): 후쿠미쓰의 아들이자 다카쿠라 씨의 시조(709년~789년). 쇼무 천황에 의해 발탁되어 고켄 천황의 측근으로 활약했고, 간무 천황 즉위 후에도 요직을 맡았다. 관위는 종3위. 무사시노카미로 있던 덴표쇼호 8년(756년) 6월에 《도다이사 헌물장》에 '종4위하 자미소필 중위소장 야마시로노카미', 7월에 '종4위하 자미소필 중위소장 무사시노카미'라고 적은 후쿠노부 자신의 서명이 남아있다.
- 다카쿠라노 후쿠누시(高倉福主): 후쿠미쓰의 아들
- 다카쿠라노 후쿠노베(高倉福延): 후쿠미쓰의 아들
- 고마노 오야마(高麗大山): 유키후미의 아들. 관위는 종5위하. 덴표쇼호 4년(752년)에 견당판관 자격으로 당나라에 파견되었으며, 2년 뒤 귀국하여 정육위상에서 종오위하로 승진했다. 덴표호지 5년(761년)에 무사시노스케를 거쳐 견고려대사로서 발해 사신 왕신복을 발해까지 전송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듬해(762년) 돌아오는 배 안에서 병을 얻어 사리요쿠노쓰에서 사망했고, 사후 정오위하로 추증되었다.
- 다카쿠라노 이시마로(高倉石麻呂): 후쿠노부의 아들
- 다카쿠라노 야마타케(高倉山岳): 후쿠노부의 아들
- 다카쿠라노 오토히토(高倉乙人): 후쿠노베의 아들
- 다카쿠라노 도노모리(高倉殿守): 오오야마의 아들
- 다카쿠라노 도노쓰구(高倉殿継): 오오야마의 아들. 관위는 종5위상. 스루가국와 히고국의 가미를 지냈으며, 호키 8년(777년)에 발해 사신 장선수를 발해까지 전송하는 송사 임무를 맡았다.
4. 고마 신사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 약 1,799명의 고구려인이 일본으로 망명했다. 703년(다이호 3년), 일본 조정은 고구려의 왕족으로 여겨지는 현무약광(玄武若光)에게 고마노고키시(高麗王)라는 카바네를 주었다.[2][3][4] 750년(덴표쇼호 2년)에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5대 손 배내복덕의 후예 다카쿠라노 후쿠노부 등의 일족에게 고마노아손(高麗朝臣)의 카바네를 내렸는데, 아손이라는 카바네를 도래인에게 내리는 것은 당시 일본에서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 뒤 후쿠노부는 다시 성을 다카쿠라(高倉)로 고쳤다. 약광의 자손은 대대로 고마 신사의 궁사(宮司)를 맡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고마 신사는 사이타마현히다카시니이보리에 있으며, 716년 고구려에서 온 사신 약광에 의해 고마 지역(현재의 히다카시)을 수호하는 총본사로 창건되었다. 모시는 신은 고마노 고시키 잣코, 사루타히코노 미코토, 다케노우치노 스쿠네이다. 원래 이름은 '시라히게 묘진'이었으며, 무사시국(현재의 사이타마현)에 있는 55개의 시라히게 신사 및 시라히게 묘진 신사의 총본산으로서, 고마 소자 신사(총본사)라고도 불린다. 경내에는 옛 고마 가문 저택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이 신사를 참배하고 기도를 드린 많은 사람들이 총리를 포함한 강력한 정치인이 되면서, 출세(성공적인 경력) 묘진으로 숭배받고 있다. 고마 신사는 봄의 벚꽃과 가을의 국화로도 유명하다. 2016년에는 고마 신사 창립 1300주년 기념 행사가 열렸다.
오늘날, 약광의 60대 직계 후손인 고마 후미야스(高麗文康)는 그의 가족의 조상 신사에서 신토 신관이다. 한국의 샤머니즘 전통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메이지 정부가 모든 예배자들에게 국가 신도를 채택하도록 강요했을 때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고마 신사는 한국과 일본의 고대 유대 관계를 전파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으며, 오늘날, 이 신사는 일본과 한국의 우호의 상징으로 기능한다.[5][6]
5. 계보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인들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 조정은 이들에게 카바네를 수여하였는데, 대표적인 가문이 고구려 보장왕의 서자로 알려진 약광 계통과 영류왕의 서자 배내복덕 계통이다. 약광은 고마노고키시(高麗王)라는 카바네를 받았고, 배내복덕은 고마노아손(高麗朝臣)이라는 카바네를 받았다. 이들은 각각 고마 씨, 세나우지 씨, 다카쿠라 씨 등으로 분파되었다.[9]
이 두 가문 외에도, 고마 신사에 전해지는 《고마씨계도(高麗氏系圖)》에는 다른 후예들에 대한 기록도 있으나, 고마노아손 계통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안장왕의 3대 손을 시조로 하는 고마(狛)씨가 있고, 센고쿠 시대의 무장 고마 쓰네즈미(高麗經澄)가 이 계통이다.
5. 1. 약광 계통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왕족 현무약광(玄武若光)을 포함한 1,799명의 고구려인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9] 703년(다이호 3년), 일본 조정은 약광에게 고마노고키시(高麗王)라는 카바네를 수여하였다. 약광의 자손들은 대대로 고마 신사의 궁사(宮司)를 맡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약광 계통의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 '''고마노 얏코(高麗若光)'''
- '''고마노 이에시게(高麗家重)''': 약광의 맏아들
- '''고마노 세이운(高麗聖雲)''': 약광의 셋째 아들, 승려로 출가
5. 2. 배내복덕 계통
750년(덴표쇼호 2년), 광개토왕의 5대 손 배내복덕의 후손인 다카쿠라노 후쿠노부(高倉福信) 등 일족에게 고마노아손(高麗朝臣)이라는 카바네가 내려졌다. 당시 도래인에게 아손이라는 카바네를 내리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9] 그 뒤 후쿠노부는 성을 다카쿠라(高倉)로 고쳤다.'''고마노아손 계통'''은 영류왕의 서자 배내복덕(背奈福徳)을 시조로 하며, 고마 씨, 세나우지 씨, 다카쿠라노 씨 등으로 분파되었다.[9]
- 배내복덕(背奈福徳): 세나 우지(背奈氏)의 시조.
- 세나노 후쿠미쓰(背奈福光): 복덕의 아들.
- 세나노 유키후미(背奈行文): 복덕의 아들. 관위는 종5위하였다. 만요슈에 와카 한 수, 회풍조에 오언한시 2수가 남아 전하는 가인이기도 하다.
- 다카쿠라노 후쿠노부(高倉福信): 후쿠미쓰의 아들이자 다카쿠라 씨의 시조 (\[\[709년]]~789년). 쇼무 천황에 의해 발탁되어 고켄 천황의 측근으로 활약했고, 간무 천황 즉위 후에도 요직을 맡았다. 관위는 종3위였다.
- 다카쿠라노 후쿠누시(高倉福主): 후쿠미쓰의 아들.
- 다카쿠라노 후쿠노베(高倉福延): 후쿠미쓰의 아들.
- 고마노 오야마(高麗大山): 유키후미의 아들. 관위는 종5위하였다. 752년 견당판관으로 당나라에 파견되었고, 2년 뒤 귀국하여 승진하였다. 761년 무사시노스케(武蔵介)를 거쳐 견고려대사로서 발해 사신 왕신복(王新福)을 발해까지 전송하는 역할을 맡았다. 762년 돌아오는 배 안에서 병사하였다.
- 다카쿠라노 이시마로(高倉石麻呂): 후쿠노부의 아들.
- 다카쿠라노 야마타케(高倉山岳): 후쿠노부의 아들.
- 다카쿠라노 오토히토(高倉乙人): 후쿠노베의 아들.
- 다카쿠라노 도노모리(高倉殿守): 오오야마의 아들.
- 다카쿠라노 도노쓰구(高倉殿継): 오오야마의 아들. 관위는 종5위상. 스루가국과 히고국의 가미(守)를 지냈으며, 777년 발해 사신 장선수(張仙壽)를 발해까지 전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한편, 고마 신사에 전해지는 《고마씨계도(高麗氏系圖)》에는 그 후예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지만, 고마노아손 계통의 인물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고마노아손 계도 | |||||
---|---|---|---|---|---|
광개토왕 | |||||
(생략) | |||||
연흥왕(延興王) | |||||
(생략) | |||||
배내복덕 | |||||
유키후미 | 후쿠미쓰 | ||||
오야마 | 후쿠누시 | 후쿠노베 | 후쿠노부 | ||
도노모리 | 도노쓰구 | 오토히토 | 야마타케 | 이시마로 |
6. 같이 보기
참조
[1]
문서
Records of Koma Shrine
[2]
문서
Nihon Shoki
[3]
문서
Samguk Sagi
[4]
문서
Nihon Shoki
[5]
뉴스
THE TIES THAT BIND
Newsweek
2002-03-17
[6]
웹사이트
The 1300th Anniversary of Koma - Saitama
https://en.japantrav[...]
[7]
문서
Goguryeo: from its origin to its fall - Page 20
[8]
웹사이트
Koma Shrine & Shoden-in Temple
http://www.japanvisi[...]
[9]
문서
배래복덕은 보장왕과 사촌 형제간으로 약광에게는 5촌 당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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