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박수량 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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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성 박수량 백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 박수량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묘 앞에 세워진 비석으로, 비문에 아무런 글자를 새기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박수량은 40여 년간 관직 생활을 하며 두 번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자녀들에게 검소한 삶을 강조하고 죽어서는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청렴했다. 그의 사후 명종은 특별히 장례를 치르고, 후손들은 그의 유언에 따라 백비를 세웠다. 백비는 박수량의 청렴한 삶을 상징하며, 후대에도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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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박수량 백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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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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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장성 박수량 백비 (長城朴守良白碑) |
종류 | 전라남도의 기념물 |
지정 번호 | 198호 |
지정일 | 2001년 12월 13일 |
소재지 |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산33-1번지 |
시대 | |
시대 | 조선시대 |
2. 생애와 업적
박수량은 1514년(중종 9년) 문과에 급제하여 한성부판윤, 우참찬 등 높은 관직을 역임했다. 1546년(명종 원년)과 1551년(명종 6년) 두 차례 청백리에 선정되었다.[1]
자식들이 서울에 집을 지으려는 것을 꾸짖고, 죽기 전에는 시호를 청하거나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했다.[1]
1554년(명종 9년) 박수량이 세상을 떠나자 명종은 정무를 중단하고 예관을 보내 조문했다. 명종은 박수량의 집이 가난하여 장례를 치르기 어려우니, 관리들로 하여금 호송하게 하고 장례 비용을 지급하라고 명했다.[1]
박수량은 38여 년간 관직 생활을 하면서도 청렴하여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했다.[1]
2. 1. 청백리 정신
박수량은 40여 년 동안 관리 생활을 하면서 두 번이나 청백리에 선정되었다. 죽은 후 그의 청백 정신을 기리기 위해 묘 앞에 비문을 새기지 않고 세운 호패형 비석을 일명 '''백비'''(白碑)라 부른다.[1]박수량은 1514년(중종 9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한성부판윤, 우참찬 등 높은 지위에 올랐으며, 1546년(명종 원년)과 1551년(명종 6년) 두 번에 걸쳐 청백리에 선정되었다.[1]
자식들이 셋집을 마다하고 서울에 집을 지으려 하자 "나는 본래 시골 출신으로 외람되게 성은을 입어 판서의 반열에까지 올랐으니 분수에 넘는 영광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어찌 서울에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라며 크게 꾸짖고 자주 타일렀다. 또 죽음에 이르러서는 "죽은 후에 절대로 시호를 청하거나,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하였다.[1]
1554년(명종 9년) 박수량의 부음을 아뢰자 명종은 이틀 동안 정무를 중단하고 예관을 보내어 유제하였는데, "박수량의 집이 가난하여 장례를 치를 수도 없고 시골로 내려가는 것 역시 어렵다 하니, 일로의 관리들로 하여금 호송하게 하고 장례 비용을 지급하고 증직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국가의 특별한 부의로 장례를 치렀다.[1]
38여 년의 관리 생활을 하면서 높은 지위에까지 이르렀으나,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청렴 결백하게 공직을 수행하다 한 섬도 못 된 곡식만 남기고 떠나갔다. 겉은 깨끗해도 속이 더러운 자들이 식은땀을 흘리고도 남을 청빈이었다. 이후 후손은 그의 뜻을 받들어 비석에 아무것도 새기지 않고 그냥 빗돌만 세웠다.[1]
이 호패형 백비는 청백리 박수량의 청빈한 삶의 정신을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귀감이 되게 하는 상징적인 유물로서 그 의미가 크다.[1]
3. 백비(白碑)
박수량은 40여 년간 관리 생활을 하면서 두 번에 걸쳐 청백리에 선정되었으며, 사후 그의 청백 정신을 기리기 위해 묘 앞에 비문을 새기지 않은 호패형 비석을 세웠다. 이를 백비(白碑)라 부른다.
박수량은 1514년(중종 9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한성부판윤, 우참찬 등을 역임하였고, 1546년(명종 원년)과 1551년(명종 6년) 두 번 청백리에 선정되었다.
그는 자식들이 서울에 집을 짓는 것을 꾸짖으며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 타일렀고, 임종 시에는 시호를 청하거나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1554년(명종 9년) 명종은 박수량의 부음에 정무를 중단하고 예관을 보내 조문했으며, 장례를 돕도록 하였다. 박수량은 38여 년간 관직에 있으면서도 청렴하여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하고 한 섬도 안 되는 곡식만 남겼다. 후손들은 그의 유언에 따라 비석에 아무것도 새기지 않았다.[1]
3. 1. 백비의 상징성
박수량은 40여 년 동안 관리로 재직하면서 두 번이나 청백리에 선정되었다. 그의 청백 정신을 기리기 위해 묘 앞에 비문을 새기지 않은 호패형 비석을 세웠는데, 이를 '''백비'''(白碑)라 부른다.[1]이 백비는 박수량의 청렴한 삶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물로,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귀감이 되고 있다.[1]
4. 사후 평가 및 추모
박수량은 38여 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청렴 결백하게 공직을 수행하여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하고 한 섬도 안 되는 곡식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청빈함은 겉은 깨끗해도 속이 더러운 관리들이 본받아야 할 귀감이었다. 후손들은 그의 뜻을 받들어 비석에 아무것도 새기지 않고 빗돌만 세웠다.[1]
그의 청백리 정신을 기리기 위해 후대에 다양한 추모 사업이 이루어졌다.[1]
이러한 추모 사업들은 박수량의 청렴하고 검소한 삶이 후대에까지 귀감이 되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4. 1. 조선시대의 평가
명종은 1554년(명종 9년) 박수량의 부음을 듣고 이틀 동안 정무를 중단하고 예관을 보내어 유제하였다. 명종은 "박수량의 집이 가난하여 장례를 치를 수도 없고 시골로 내려가는 것 역시 어렵다 하니, 관리들로 하여금 호송케 하고 장례 비용을 지급하고 증직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국가는 특별한 부의로 박수량의 장례를 치렀다.[1]박수량은 38여 년의 관리 생활을 하면서 높은 지위에까지 이르렀으나,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청렴 결백하게 공직을 수행하다 한 섬도 못 된 곡식만 남기고 떠나갔다. 겉은 깨끗해도 속이 더러운 자들이 식은땀을 흘리고도 남을 청빈이었다. 이후 후손은 그의 뜻을 받들어 비석에 아무 것도 새기지 않고 그냥 빗돌만 세웠다.[1]
4. 2. 후대의 추모 사업
박수량이 죽은 후, 그의 청백리 정신을 기리기 위해 후대에 다양한 추모 사업이 이루어졌다.[1]구분 | 내용 |
---|---|
시호 하사 및 묘비 건립 | |
신도비 건립 | 1887년(고종 24년): 묘역 입구에 신도비 건립. 비문은 송병선이 짓고, 글씨는 최익현이 썼으며, 이용원이 전서(篆書)를 씀. |
생가 및 유허비 관련 | |
문헌 발간 | |
제향 | 1979년: 장성군 황룡면 신호리 302에 있는 수산사에서 박수량 제향 |
이러한 추모 사업들은 박수량의 청렴하고 검소한 삶이 후대에까지 귀감이 되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참조
[1]
뉴스
“비석도 남기지 말라”던 박수량 등 청백리의 고장 전남 장성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17-02-22
[2]
뉴스
"[호남] [이종범의 호남인물열전] 백비의 깊은 뜻… \"맑고 텅 빈 마음을 기억하라\""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2-09-10
[3]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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