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크 골드만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장자크 골드만은 프랑스의 싱어송라이터이자 음악가이다. 1975년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타이 퐁의 멤버로 데뷔하여, 솔로 활동을 통해 "Il suffira d'un signe", "Quand la musique est bonne", "Comme toi", "Encore un matin", "Je marche seul" 등 다수의 히트곡을 발표했다.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캐롤 프레데릭스, 마이클 존스와 함께 프레데릭스 골드만 존스라는 트리오로 활동했으며, 셀린 디온을 비롯한 여러 아티스트의 앨범 제작에도 참여했다. 1985년부터 자선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2004년 마지막 콘서트 이후 공연과 녹음을 중단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영국에 거주한 프랑스인 -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
200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경험을 바탕으로 실험적인 문체에서 평이한 문체로 변화하며 사막, 아메리카 원주민 문화, 이주, 생태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독특한 문학 세계를 구축했지만, 사회적 논란을 겪기도 했다. - 영국에 거주한 프랑스인 - 제임스 티소
제임스 티소는 프랑스 출신 화가로, 빅토리아 시대 사회상과 종교적 주제를 묘사했으며, 런던에서 여성 초상화로 명성을 얻고 자포니즘 영향을 받아 일본 미술 요소를 반영한 후 성경 삽화 작업에 몰두했다. - 프랑스의 남자 싱어송라이터 - 질베르 베코
프랑스 가수이자 작곡가, 배우인 질베르 베코는 니스 음악원 출신으로 레지스탕스 활동 후 작곡을 시작, 에디트 피아프의 발탁으로 데뷔하여 "Le Jour où la pluie viendra", "Et maintenant" 등의 히트곡으로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오페라 작곡 및 영화 사운드트랙 참여, 독특한 피아노 연주와 남색 물방울 무늬 넥타이로 유명하다. - 프랑스의 남자 싱어송라이터 - 알랭 바리에르
프랑스의 샹송 가수 알랭 바리에르는 1961년 자작곡으로 우승 후 1963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국제적 인지도를 얻었으며, "Elle était si jolie" 등의 히트곡으로 프랑스 최고 스타가 되었고, 독립 레이블 설립, 미국 생활, 재기 후에도 활동하다 2019년 사망했다. - 프랑스의 팝 가수 - 에디트 피아프
에디트 피아프는 1915년 파리에서 태어나 거리에서 노래하며 생계를 유지하다 '작은 참새'라는 예명으로 활동한 프랑스의 가수 겸 배우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레지스탕스 활동 설, "장미 인생" 등의 히트곡, 이브 몽탕 등의 후배 가수 성공 기여, 마르셀 세르당과의 비극적인 사랑, 약물 중독, 올랭피아 극장 공연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며 프랑스를 대표하는 위대한 가수로 기억된다. - 프랑스의 팝 가수 - 프랑수아즈 아르디
프랑수아즈 아르디는 1962년 데뷔 앨범으로 예예 현상을 이끌며 프랑스와 영미권에서 성공을 거둔 싱어송라이터이자 배우로, 다양한 장르를 탐구하고 점성술과 작가 활동도 펼쳤으나 2024년 투병 끝에 사망했다.
장자크 골드만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장자크 골드만 |
출생일 | 1951년 10월 11일 |
출생지 | 파리, 프랑스 |
직업 | 싱어송라이터 |
장르 | 팝 록 록 프로그레시브 록 뉴 웨이브 |
악기 | 보컬, 기타, 피아노, 바이올린 |
활동 기간 | 1975년–2004년 |
관련 활동 | Taï Phong 셀린 디옹 Les Enfoirés Fredericks Goldman Jones 그레고아르 |
2. 생애
장자크 골드만은 폴란드계 유대인 아버지와 독일계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파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우며 음악 수업을 시작했고, 1968년 비틀즈 등의 영향을 받아 미국 록앤롤과 포크 음악으로 전환했다. 고등상업연구원에서 경영학 학위를 받았으며, 1972년 첫 번째 아내 캐서린을 만났다.
1975년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타이 퐁의 멤버로 프랑스 음악계에 데뷔하여 "Sister Jane"으로 히트를 쳤다. 이후 프랑스어로 노래하기 위해 밴드를 떠났고, 마크 럼브로소와의 계약을 통해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1981년 첫 앨범 ''Démodé''를 발매, "Il suffira d'un signe"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82년 앨범 ''Minoritaire''는 약 90만 장이 판매되며 그의 대표 앨범이 되었다. 1984년 앨범 ''Positif''는 100만 장 이상 판매되었고, 1987년 더블 앨범 ''Entre gris clair et gris foncé''는 200만 장 이상 판매되며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평론가들은 그의 음악 스타일을 비판하기도 했다.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캐롤 프레데릭스, 마이클 존스와 함께 프레데릭스 골드만 존스라는 트리오로 활동하며 여러 히트곡을 발표했다. 1997년부터 2003년까지는 다시 솔로로 활동하며 ''En passant'', ''Chansons pour les pieds'' 등의 앨범을 발매했다. 2004년 마지막 콘서트 이후 공연과 녹음 활동을 중단했지만, 자니 할리데이, 셀린 디온 등 다른 가수들을 위한 작곡 및 프로듀싱 활동과 자선 활동은 계속했다. 1985년부터 레스토랑 뒤 쾨르를 위한 자선 활동을 시작하여 Les Enfoirés를 결성하고, 2016년까지 활동을 이어갔다. 2012년에는 헌정 앨범 ''Génération Goldman''이 발매되기도 했다.
2. 1. 초기 생애 및 음악 활동
폴란드계 유대인 아버지 알테르 모이제 골드만(루블린 출생)과 독일계 유대인 어머니 루스 암브룬(Ruth Ambrunn, 뮌헨 출생) 사이에서 4명의 자녀 중 셋째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바이올린을 배우다가 피아노를 배우며 음악 수업을 시작했다. 1968년, 비틀즈, 지미 헨드릭스, 아레사 프랭클린을 들으며 기타를 강조하며 클래식 음악 공부를 포기하고 미국 록앤롤과 포크 음악으로 전환했다. 한편, 릴에 있는 고등상업연구원(EDHEC)에서 경영학 학위를 받았다. 1972년에는 세 명의 자녀를 둔 첫 번째 아내 캐서린을 만났다.1975년,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타이 퐁("위대한 바람" 또는 베트남어로 "태풍")의 멤버로 프랑스 음악계에 처음 등장했다. 그들의 첫 번째 곡인 "Sister Jane"은 어느 정도 히트를 쳤다. 3개의 영어 앨범(그는 바이올린뿐만 아니라 노래하고 기타를 연주했다) 이후, 프랑스어로 쓰고 노래하기로 결심했고, 이로 인해 밴드를 떠나게 되었다.
마크 럼브로소는 그의 잠재력을 보고 에픽 레코드와 5장의 앨범 계약을 체결했다. 그해 첫 번째 앨범을 발매했는데, 제목을 ''Démodé'' ("구식")로 하고 싶었지만, 레이블에서 거부하여 제목이 없는 상태로 남겨졌다. (그 이후 ''Démodé''는 비공식적인 제목이 되었다.) 이 앨범에서 "Il suffira d'un signe"는 처음으로 큰 성공을 거둔 곡이었다. 1982년, 두 번째 앨범을 발매했지만 제목이 없었다. 이번에는 의도한 제목이 ''Minoritaire''였지만, 상업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마찬가지로 이 앨범의 비공식적인 제목이 되었다.) 이 음반에는 "Quand la musique est bonne", "Comme toi"(강제 수용소에서 죽은 어린 유대인 소녀의 사진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진심 어린 가사는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을 드러내지 않는다) 및 "Au bout de mes rêves" 등 여러 히트 싱글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앨범은 약 90만 장이 팔리면서 획기적인 앨범이 되었다.
2. 2. 솔로 활동과 성공
마크 럼브로소는 골드만의 잠재력을 보고 에픽 레코드와 5장의 앨범 계약을 체결했다. 1981년 그는 첫 번째 앨범을 발매했는데, 제목을 ''Démodé'' ("구식")로 하고 싶었지만, 레이블에서 거부하여 제목이 없는 상태로 남겨졌다. (그 이후 ''Démodé''는 비공식적인 제목이 되었다.) 이 앨범에서 "Il suffira d'un signe"는 골드만이 처음으로 큰 성공을 거둔 곡이었다. 1982년 그는 두 번째 앨범을 발매했지만 제목이 없었다. 이번에는 의도한 제목이 ''Minoritaire''였지만, 상업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마찬가지로 이 앨범의 비공식적인 제목이 되었다.) 이 음반에는 "Quand la musique est bonne", "Comme toi"(강제 수용소에서 죽은 어린 유대인 소녀의 사진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진심 어린 가사는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을 드러내지 않는다) 및 "Au bout de mes rêves" 등 여러 히트 싱글이 포함되어 있다. 이 앨범은 약 90만 장이 팔리면서 골드만의 획기적인 앨범이 되었다. 1984년에 발매된 그의 세 번째 앨범은 공식 제목이 붙은 첫 번째 앨범인 ''Positif''였다. 이 이름은 이전 두 앨범 제목이 거부된 것에 대한 가수의 아이러니한 반응이었으며 "Encore un matin" 및 "Envole-moi"와 같은 새로운 히트곡을 낳았다. 이 앨범은 약 100만 장이 판매되면서 더욱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골드만의 네 번째 앨범인 ''Non homologué''("승인되지 않음", 아이러니하고 자기 비하적인 제목의 트렌드를 이어감)는 "Je marche seul", "Je te donne"(마이클 존스가 영어 구절을 부르고 골드만이 프랑스어 구절을 부르는 2개 국어 록 듀엣) 및 "Pas toi" 등의 히트곡을 낳았다. 그는 1987년에 더블 앨범 ''Entre gris clair et gris foncé'' ("밝은 회색과 어두운 회색 사이")를 녹음했는데, 이 앨범은 "Elle a fait un bébé toute seule", "Puisque tu pars", "Là-bas"(시리마와 듀엣) 및 "Il changeait la vie" 등 일련의 히트곡을 낳았다. 이 앨범은 200만 장 이상이 판매되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10]하지만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골드만의 높은 음성과 그의 스타일과 태도(너무 순하고 무해하다고 묘사됨)를 비웃었는데, 이는 십 대 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보이는 더 부드러운 노래 모음집이었다. 이에 반발하여 1985년 말 골드만은 주요 신문 두 곳(''Libération'' 및 ''France Soir'')에 자신의 가장 혹독한 리뷰 발췌문을 게재한 전면 광고를 구매했다. 그는 또한 팬들을 위한 아이러니한 메시지를 덧붙여, 다시 한 번 소박한 자기 홍보에 대한 그의 취향을 드러냈다: "어쨌든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Merci d'être venus quand même...").[10]
1997년부터 2003년까지 그는 솔로로 활동하며 1997년 ''En passant''와 2001년 ''Chansons pour les pieds''를 포함한 두 개의 앨범, "Tournée 98 En passant" 및 ''Un tour ensemble''를 포함한 두 개의 라이브 앨범을 발매했으며, "On ira", "Quand tu danses", "Sache que je", "Bonne idée", "Tournent les violons", "Ensemble", "Les choses", "Et l'on n'y peut rien"과 같은 새로운 히트곡을 발표했다. 2004년 마지막 콘서트 이후, 그는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이유로 갑자기 공연과 녹음을 중단했다. 골드만은 2001년 당시 수학을 공부하고 나중에 순수 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젊은 팬 나탈리 투 홍-라기에와 재혼했다.[11] 2011년, 그는 음악 복귀 가능성에 대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가까운 시일 내에 새로운 앨범이나 투어 계획이 없다는 짧은 텍스트를 발표했다.[12] 그 이후 골드만은 프랑스 언론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5] 그러나 그는 다른 아티스트를 위해 몇 곡을 계속 작곡하고 프로듀싱했으며, 때로는 다른 사람들과의 음악적 협업에 자신의 목소리를 빌려주기도 했다. 예를 들어, 2007년에는 패트릭 피오리와 크리스틴 리콜과 함께 "4 Mots sur un piano"를 녹음했는데, 이 곡은 상당한 히트를 기록했다.[10]
2. 3. 프레데릭스 골드만 존스
1990년부터 1995년까지 골드만은 캐롤 프레데릭스(1970년대 프랑스로 이주한 미국 가수이자 코러스, 타지 마할의 여동생)와 마이클 존스(어머니의 고향인 프랑스에 정착한 웨일스 기타리스트이자 가수, 골드만이 타이 퐁을 통해 만났다)와 함께 프레데릭스 골드만 존스라는 음악 트리오에서 공연했다.[10] 존스는 골드만이 투어를 중단하기로 결정한 후 밴드에 합류했고, 트리오는 1985년 "Je te donne"로 첫 번째 히트를 기록했다. 그들은 함께 두 개의 스튜디오 앨범, 1990년의 ''Fredericks / Goldman / Jones''와 1993년의 ''Rouge''(베를린 장벽 붕괴 및 소련의 종말에서 영감을 받음, 타이틀 곡에는 붉은 군대 합창단이 참여), 하나의 라이브 앨범, ''Du New Morning au Zénith''을 녹음했으며, "Nuit", "À nos actes manqués", "Né en 17 à Leidenstadt"(전쟁과 전쟁이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노래), "Juste après"(콩고에서 국경 없는 의사회의 활동에 대한 TV 다큐멘터리에서 신생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선교사의 처절한 투쟁을 보여준 것에서 영감을 받음),[10] "Tu manques"를 포함한 여러 성공적인 싱글을 발매했다. 이 노래들 중 일부는 나중에 영어로 다시 녹음되었지만,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2. 4. 솔로 활동 복귀 및 프로듀서 활동
1997년부터 2003년까지 골드만은 솔로 활동을 재개하여 ''En passant''(1997년)와 ''Chansons pour les pieds''(2001년) 두 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또한 "Tournée 98 En passant"와 ''Un tour ensemble'' 두 장의 라이브 앨범을 발매하며 "On ira", "Quand tu danses", "Sache que je", "Bonne idée", "Tournent les violons", "Ensemble", "Les choses", "Et l'on n'y peut rien" 등 새로운 히트곡을 선보였다.[11] 2004년 마지막 콘서트 이후,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공연과 녹음 활동을 중단했다.[11] 2011년에는 음악 복귀 가능성에 대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가까운 시일 내에 새로운 앨범이나 투어 계획이 없다는 짧은 글을 발표했다.[12] 그 이후 골드만은 프랑스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5]하지만 골드만은 다른 가수들을 위해 꾸준히 곡을 쓰고 프로듀싱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때로는 다른 음악가와의 협업에 자신의 목소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패트릭 피오리, 크리스틴 리콜과 함께 "4 Mots sur un piano"를 녹음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13]
골드만은 1980년대 중반부터 프랑스 자선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1985년 프랑스의 유명 코미디언 콜루슈의 요청으로 레스토랑 뒤 쾨르를 홍보하는 노래를 작곡했다. 레스토랑 뒤 쾨르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무료 식사와 식료품을 제공하는 단체였다. 골드만은 3일 만에 노래를 만들고, 콜루슈와 함께 다른 프랑스 유명 인사들을 모아 Les Enfoirés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노래를 불렀다. 이는 미국의 "We Are the World"와 유사한 프로젝트였다.[13] 1986년 콜루슈가 사망한 후, 골드만은 자선 콘서트와 음반의 주요 조직자가 되었고, 2016년까지 이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2016년 자선 앨범 "Toute la vie"를 위해 쓴 노래가 논란이 되자 활동을 중단했다.[13]
골드만은 경력 동안 가명을 사용하기도 하며 다른 가수들을 위해 많은 곡을 작곡했다. 특히 자니 할리데이의 1985년 앨범 ''Gang'' 전체와 셀린 디온을 위해 두 장의 앨범 ''D'eux''(1995년, 전 세계적으로 1,000만 장 이상 판매), ''S'il suffisait d'aimer''(1998년)을 쓰고 제작했다. 그는 길다스 아르젤, 자크 베네루소, 에릭 벤지와 함께 디온의 앨범 ''1 fille & 4 types'' 작업에도 참여했다.[14] 또한 패트리샤 카스, 가루, 마크 라부안, 제랄 드 팔마스, 패트릭 피오리, 칼레드 ("Aïcha"), 로리, 플로랑 파그니 등 여러 가수들의 곡을 작곡했다.
2012년 11월 19일, 골드만의 헌정 앨범 ''Génération Goldman''이 발매되어 여러 아티스트들이 그의 노래를 재해석했다. 2013년에는 두 번째 앨범이 발매되었다.
2023년 12월, 골드만의 노래 "Pense à nous"가 첼리스트 고티에 카푸송의 앨범 ''Destination Paris''에서 초연되었다. 이 곡은 오케스트르 아 라 렐레 에콜 협회와 파리 및 봉디 라디오 프랑스 연주단의 어린이 합창단이 불렀다.[15]
2. 5. 은퇴 및 최근 활동
1997년부터 2003년까지 솔로로 다시 활동하며 두 장의 앨범 ''En passant''(1997년)와 ''Chansons pour les pieds''(2001년)를 발표했고, "Tournée 98 En passant"와 ''Un tour ensemble'' 두 장의 라이브 앨범을 발매했다. 이 시기에 "On ira", "Quand tu danses", "Sache que je", "Bonne idée", "Tournent les violons", "Ensemble", "Les choses", "Et l'on n'y peut rien"과 같은 새로운 히트곡을 발표했다.[10] 2004년 마지막 콘서트 이후,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공연과 녹음을 중단했다. 골드만은 2001년 당시 수학을 공부하고 나중에 순수 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젊은 팬 나탈리 투 홍-라기에와 재혼했다.[11]2011년, 음악 복귀 가능성에 대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가까운 시일 내에 새로운 앨범이나 투어 계획이 없다는 짧은 글을 발표했다.[12] 그 이후 프랑스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5] 그러나 다른 아티스트를 위해 몇 곡을 계속 작곡하고 프로듀싱했으며, 때로는 다른 사람들과의 음악적 협업에 자신의 목소리를 빌려주기도 했다. 2007년에는 패트릭 피오리와 크리스틴 리콜과 함께 "4 Mots sur un piano"를 녹음하여 히트를 기록했다.
골드만은 1980년대 중반부터 프랑스 자선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5년 프랑스 코미디언 콜루슈의 요청으로 레스토랑 뒤 쾨르를 홍보하는 노래를 작곡했다. 이 단체는 겨울 동안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 식사와 식료품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골드만은 3일 만에 동명의 노래를 제작하고,[13] 콜루슈와 함께 이브 몽탕, 카트린 드뇌브, 나탈리 베이, 미셸 플라티니, 미셸 드뤼케르 등 다른 프랑스 유명 인사들을 모아 Les Enfoirés라는 그룹으로 공연했다. 이는 미국의 "We Are the World"와 유사한 프로젝트였다. 1986년 콜루슈 사망 후, 골드만은 자선 콘서트와 음반의 주요 조직자가 되었으며, 2016년까지 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그해 자선 앨범 "Toute la vie"를 위해 쓴 노래가 논란을 일으킨 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이 노래의 가사 중 일부는 "반동적"으로 여겨졌으며, 골드만은 현재의 젊은 세대를 불공정하게 묘사하고 젊은 세대와 늙은 세대 사이에 무의미한 대립을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13]
골드만은 자니 할리데이, 셀린 디온 등 다른 가수들을 위해 많은 곡을 작곡했다. 특히 셀린 디온을 위해 ''D'eux''(미국에서는 ''The French Album''으로 발매)와 ''S'il suffisait d'aimer'' 두 앨범 전체를 쓰고 제작했다. ''D'eux''는 전 세계적으로 1,000만 장이 팔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프랑스 앨범이다. 그는 또한 길다스 아르젤, 자크 베네루소, 에릭 벤지와 함께 디온의 앨범 ''1 fille & 4 types''에서 작업했다.[14]
2012년 11월 19일, 골드만의 헌정 앨범 ''Génération Goldman''이 발매되었고, 2013년에는 두 번째 볼륨이 이어졌다.
2023년 12월, 골드만의 노래 "Pense à nous"가 첼리스트 고티에 카푸송의 앨범 ''Destination Paris''에서 초연되었다. 이 곡은 오케스트르 아 라 렐레 에콜 협회와 파리 및 봉디 라디오 프랑스 연주단의 어린이 합창단이 불렀다.[15]
3. 사회 참여 활동
골드만은 1980년대 중반부터 프랑스 자선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13] 1985년, 유명 코미디언 콜루슈가 골드만에게 레스토랑 뒤 쾨르를 위한 노래를 작곡해 달라고 요청했다. 레스토랑 뒤 쾨르는 어려운 시기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 식사와 식료품을 제공하는 단체였다. 골드만은 3일 만에 노래를 작곡했고,[13] 콜루슈와 함께 다른 유명 인사들을 모아 레장포레라는 그룹을 결성해 공연했다. 이는 미국의 자선 프로젝트 "We Are the World"와 유사했다.[13]
1986년 콜루슈가 사망한 후, 골드만은 레장포레의 자선 콘서트와 음반의 주요 조직자가 되었고, 2016년까지 이 역할을 수행했다.[13],[18] 그는 2016년 자선 앨범 "Toute la vie"의 가사 논란 이후 활동을 중단했다.[13] 이 노래의 가사 중 일부는 "반동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골드만은 젊은 세대를 불공정하게 묘사했다는 비난을 받았다.[13]
4. 사생활
폴란드계 유대인 아버지 알테르 모이제 골드만(루블린 출생)과 독일계 유대인 어머니 루스 암브룬(Ruth Ambrunn, 뮌헨 출생) 사이에서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72년 첫 번째 아내 카트린을 만나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10] 1975년부터 1997년까지 심리학자 카트린 모를레와 결혼했으며, 2001년 수학자 나탈리 투 홍-라지에와 재혼했다.[11] 카트린 모를레와의 사이에서 캐롤라인(1975년생), 미카엘(1979년생), 니나(1985년생)를, 투 홍-라지에와의 사이에서 마야(2004년생), 키미(2005년생), 로즈(2007년생)를 두어 슬하에 총 여섯 명의 자녀가 있다.
그의 아들 미카엘 골드만은 팬 펀딩 음악 레이블 마이 메이저 컴퍼니(My Major Company) 프랑스의 공동 설립자 중 한 명이다.
그의 남동생 로베르 골드만은 작사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종종 J. 카플러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복 형제 피에르 골드만은 좌익 지식인이자 강도였으나, 나중에 프랑스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고 1979년 파리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5. 음반 목록
장자크 골드만은 솔로 활동 외에도 여러 그룹의 일원으로 음반을 발매했다. 1975년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타이 퐁의 멤버로 프랑스 음악계에 처음 등장했으며, "Sister Jane"이 히트했다. 타이 퐁에서 3개의 영어 앨범을 낸 후, 프랑스어로 노래하기 위해 밴드를 떠났다.
1990년부터 1995년까지는 캐롤 프레데릭스, 마이클 존스와 함께 프레데릭스 골드만 존스라는 트리오로 활동했다. 이들은 ''Fredericks / Goldman / Jones''(1990), ''Rouge''(1993) 등 두 개의 스튜디오 앨범과 라이브 앨범 ''Du New Morning au Zénith''을 발표했다.
5. 1. 솔로
마크 럼브로소는 골드만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에픽 레코드와 5장의 앨범 계약을 체결했다. 1981년 첫 앨범을 발매했는데, 제목을 ''Démodé'' ("구식")로 하고 싶었지만, 레이블에서 거부하여 제목이 없는 상태로 남겨졌다. (그 이후 ''Démodé''는 비공식적인 제목이 되었다.) 이 앨범에서 "Il suffira d'un signe"는 골드만이 처음으로 큰 성공을 거둔 곡이었다. 1982년 발매한 두 번째 앨범 역시 제목이 없었다. 의도한 제목은 ''Minoritaire''였지만, 상업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마찬가지로 이 앨범의 비공식적인 제목이 되었다.) 이 음반에는 "Quand la musique est bonne", "Comme toi"(강제 수용소에서 죽은 어린 유대인 소녀의 사진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진심 어린 가사는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을 드러내지 않는다) 및 "Au bout de mes rêves" 등 여러 히트 싱글이 포함되어 있으며, 약 90만 장이 팔리면서 골드만의 획기적인 앨범이 되었다. 1984년에 발매된 그의 세 번째 앨범은 공식 제목이 붙은 첫 번째 앨범인 ''Positif''였다. 이 이름은 이전 두 앨범 제목이 거부된 것에 대한 가수의 아이러니한 반응이었으며, "Encore un matin" 및 "Envole-moi"와 같은 새로운 히트곡을 낳았다. 이 앨범은 약 100만 장이 판매되었다. 골드만의 네 번째 앨범인 ''Non homologué''("승인되지 않음", 아이러니하고 자기 비하적인 제목의 트렌드를 이어감)는 "Je marche seul", "Je te donne"(마이클 존스가 영어 구절을 부르고 골드만이 프랑스어 구절을 부르는 2개 국어 록 듀엣) 및 "Pas toi" 등의 히트곡을 낳았다. 1987년에는 더블 앨범 ''Entre gris clair et gris foncé'' ("밝은 회색과 어두운 회색 사이")를 녹음했는데, 이 앨범은 "Elle a fait un bébé toute seule", "Puisque tu pars", "Là-bas"(시리마와 듀엣) 및 "Il changeait la vie" 등의 히트곡을 낳으며 200만 장 이상 판매되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하지만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골드만의 높은 음성과 그의 스타일과 태도(너무 순하고 무해하다고 묘사됨)를 비웃었는데, 이는 십 대 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보이는 더 부드러운 노래 모음집이었다. 이에 반발하여 1985년 말 골드만은 주요 신문 두 곳(''Libération'' 및 ''France Soir'')에 자신의 가장 혹독한 리뷰 발췌문을 게재한 전면 광고를 구매했다. 그는 또한 팬들을 위한 아이러니한 메시지를 덧붙였다. "어쨌든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Merci d'être venus quand même...")
1997년부터 2003년까지 그는 솔로로 활동하며 1997년 ''En passant''와 2001년 ''Chansons pour les pieds'' 앨범, "Tournée 98 En passant" 및 ''Un tour ensemble'' 라이브 앨범을 발매했으며, "On ira", "Quand tu danses", "Sache que je", "Bonne idée", "Tournent les violons", "Ensemble", "Les choses", "Et l'on n'y peut rien"과 같은 새로운 히트곡을 발표했다. 2004년 마지막 콘서트 이후,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이유로 갑자기 공연과 녹음을 중단했다. 골드만은 2001년 당시 수학을 공부하고 나중에 순수 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젊은 팬 나탈리 투 홍-라기에와 재혼했다.[11] 2011년, 그는 음악 복귀 가능성에 대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가까운 시일 내에 새로운 앨범이나 투어 계획이 없다는 짧은 텍스트를 발표했다.[12] 그 이후 골드만은 프랑스 언론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5] 그러나 그는 다른 아티스트를 위해 몇 곡을 계속 작곡하고 프로듀싱했으며, 때로는 다른 사람들과의 음악적 협업에 자신의 목소리를 빌려주기도 했다.
발매 음반
- ''장 자크 골드만''(a.k.a. ''데모데'') (1981)
- ''장 자크 골드만''(a.k.a. ''미노리테르'') (1982)
- ''포지티프''(1984)
- ''농 오몰로게''(1985)
- ''앙트르 그리 클레르 에 그리 퐁세''(1987)
- ''앙 파상''(1997)
- ''샹송 푸 레 피에''(2001)
5. 2. 타이 퐁 (Taï Phong)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타이 퐁(베트남어로 "태풍")은 1975년 장자크 골드만이 프랑스 음악계에 처음 등장하게 된 계기였다. 그들의 첫 번째 곡은 "Sister Jane"으로 어느 정도 히트를 쳤다.[10] 3개의 영어 앨범에서 그는 바이올린뿐만 아니라 노래하고 기타를 연주했다. 이후 골드만은 프랑스어로 쓰고 노래하기로 결심했고, 이로 인해 그는 밴드를 떠나게 되었다.[10]5. 3. 프레데릭스 골드만 존스 (Fredericks Goldman Jones)
1990년부터 1995년까지 골드만은 캐롤 프레데릭스(1970년대 프랑스로 이주한 미국 가수이자 코러스, 타지 마할의 여동생)와 마이클 존스(어머니의 고향인 프랑스에 정착한 웨일스 기타리스트이자 가수, 골드만이 타이 퐁을 통해 만났다)와 함께 프레데릭스 골드만 존스라는 음악 트리오로 공연했다.[10] 존스는 골드만이 투어를 중단하기로 결정한 후 밴드에 합류했고, 트리오는 1985년 "Je te donne"로 첫 번째 히트를 기록했다.[10]그들은 함께 두 개의 스튜디오 앨범, 1990년의 ''Fredericks / Goldman / Jones''와 1993년의 ''Rouge''(베를린 장벽 붕괴 및 소련의 종말에서 영감을 받음, 타이틀 곡에는 붉은 군대 합창단이 참여), 하나의 라이브 앨범, ''Du New Morning au Zénith''을 녹음했으며,[10] "Nuit", "À nos actes manqués", "Né en 17 à Leidenstadt"(전쟁과 전쟁이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또 다른 노래), "Juste après"(콩고에서 국경 없는 의사회의 활동에 대한 TV 다큐멘터리에서 신생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선교사의 처절한 투쟁을 보여준 것에서 영감을 받음),[10] "Tu manques"를 포함한 여러 성공적인 싱글을 발매했다.[10] 이 노래들 중 일부는 나중에 영어로 다시 녹음되었지만,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10]
참조
[1]
웹사이트
Jean-Jacques Goldman, personnalité préférée des Français
https://www.nouvelob[...]
2019-01-23
[2]
웹사이트
Céline Dion a "envie" de retravailler avec Jean-Jacques Goldman
http://www.chartsinf[...]
2019-01-23
[3]
뉴스
Jean-Jacques Goldman, personnalité préférée des Français
https://www.lemonde.[...]
2019-01-23
[4]
웹사이트
Jean-Jacques Goldman, personnalité préférée des Français pour la 6e fois consécutive
https://www.europe1.[...]
2019-01-23
[5]
뉴스
Il est comme ça… Jean-Jacques Goldman
https://www.lemonde.[...]
2019-12-09
[6]
웹사이트
Mbappé numéro 1 chez les jeunes : découvrez les classements du Top 50 par catégorie
https://www.lejdd.fr[...]
2019-12-09
[7]
서적
Je t'aime, moi non plus. Les amours de la chanson
Don Quichotte
2016
[8]
웹사이트
Jean-Jacques Goldman : l'anti-star de la chanson (?, 1986)
https://www.parler-d[...]
2019-12-09
[9]
웹사이트
Autrepart – Jean-Jacques Goldman – JJG pour les nuls
https://www.autrepar[...]
2019-12-09
[10]
웹사이트
namenlijst van de missionarissen in Congo van de Zusters van Ten Bunderen uit Moorslede
https://www.tenbunde[...]
2019-01-24
[11]
웹사이트
Lagier, Nathalie Goldman
http://www.idref.fr/[...]
[12]
웹사이트
Info 20minutes.fr: Jean-Jacques Goldman dément tout projet d'album
https://www.20minute[...]
2019-01-23
[13]
뉴스
"Toute la vie": Song for French charity strikes discordant note
https://www.nytimes.[...]
2019-01-23
[14]
웹사이트
Céline Dion et Jean-Jacques Goldman: 20 ans d'amitié
http://www.franceble[...]
France Bleu
2014-08-10
[15]
뉴스
'Pense à nous': la dernière chanson inédite de Jean-Jacques Goldman
https://www.nostalgi[...]
2023-12-08
[16]
웹사이트
Jean-Jacques Goldman : qui sont les femmes de sa vie ?
https://www.femmeact[...]
2020-07-17
[17]
서적
Les juifs d'extrême-gauche en mai 68: une génération révolutionnaire marquée par la Shoah
Albin Michel
1998
[18]
웹사이트
Jean-Jacques Goldman
http://www.enfoires.[...]
2017-02-2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