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경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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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주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기 위해 1410년에 건립된 전각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4년에 중건되었다. 경기전은 정전, 조경묘, 내·외삼문, 어진박물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선 태조 어진의 원본을 보관하고 있다. 또한, 고종의 서녀로 알려진 이문용이 만년을 보낸 곳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이문용의 생애는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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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경기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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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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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사적 |
번호 | 339 |
지정 | 1991년 1월 9일 |
주소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102번지 |
시대 | 조선시대 |
면적 | 49,589m² |
문화재청 | 13,03390000,35 |
2. 역사
태종 10년인 1410년에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기 위해 전주, 경주, 평양에 어용전을 건립하였다. 그 후 1412년에 태조 진전으로 개칭하였다가, 1442년에는 전주 경기전, 경주 집경전, 평양 영숭전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중건하였다.
2. 1. 건립과 중건
태종 10년인 1410년에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기 위해 전주, 경주, 평양에 어용전을 건립하였다. 그 후 1412년에 태조 진전으로 개칭하였다가, 1442년에는 전주 경기전, 경주 집경전, 평양 영숭전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4년에 중건하였다.2. 2. 일제강점기 훼손과 복원
2. 3. 이문용과 경기전
경기전은 고종의 서녀로 알려진 이문용(李文鎔)이 만년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4] 이문용은 상궁 염(廉)씨 소생으로 알려져 있으며, 1975년 5월 20일부터 조경묘 수직사에서 거주하였고, 전주시와 전북도에서 매달 총 4만원의 생계비를 지원받았다.[5]이문용은 1917년 17세에 김한규의 아들 김회진과 결혼했으나, 남편과 사별하고 어린 아이도 잃는 아픔을 겪었다.[4] 상하이와 원산을 거쳐 서울 명륜동에 정착했으나, 간첩으로 몰려 2년간 옥살이를 했다.[4] 6.25 전쟁 이후 부산, 강릉을 거쳐 1960년 반공법 위반죄로 10년형을 선고받고 전주교도소에서 복역했다.[4] 1970년 만기 출소 후에는 이리에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했다.[4]
1974년 이문용의 생애를 다룬 MBC 드라마 《황녀》(皇女)가 방영되면서 그의 사연이 알려졌다.[5] 이후 새마을봉사회 이학선의 도움으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고, 전북문화공보실의 요청으로 조경묘 수직사에서 살게 되었다.[5]
그러나 이문용이 고종의 친딸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다. 낙선재에서는 이문용의 방문을 거절했고, 1974년 이문용은 일반 면회객 자격으로 이방자 여사를 만났다.[6] 1983년 이공재와 이면용은 이문용이 고종의 딸이라고 주장했지만,[8] 낙선재 비서실장 이영주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사무총장 이규성은 《승정원일기》 등 왕실 기록에 이문용에 대한 기록이 없다며 반박했다.[8] 상궁 출신 성왕염 역시 이문용이 고종의 딸이라는 것은 헛소문이라고 주장했다.[8] 이문용은 1987년 3월 28일 조경묘 수직사에서 87세로 별세하였다.[8]
3. 건축
일제 시대에 경기전의 서쪽 부지와 부속 건물을 철거해서 일본인 소학교를 세우면서 부지의 절반이 잘려 나가고, 경기전 건물의 모습은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과 내삼문을 연결하는 간결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2]
경내에는 조선 태조 어진을 모신 정전과 전주 이씨의 시조로 전해지는 사공공 이한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조선 왕조의 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복원), 예종의 탯줄을 묻은 태실 등의 유적이 있다. 건물의 구성은 정전, 정전 가운데에서 달아낸 헌(軒), 정전 양 옆 익랑(翼廊)[3]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두르고 있는 내삼문(內三門) · 외삼문(外三門) 등으로 공간을 분할하고 있다.
;정전
정전은 남향한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로, 높게 돋우어 쌓은 석축 위에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세웠다.[3] 건물 안의 세 번째 기둥렬(柱列)에 고주(高柱)를 세우고 그 가운데에 단(壇)을 놓았다. 이 단 양 옆에는 일산(日傘)과 천개(天蓋)를 세웠다. 정전 앞에 내단 헌은 정전보다 한 단 낮게 쌓은 석축 기단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2익공식(二翼工式) 포작(包作)을 짜올린 맞배지붕 건물이다. 정전과 헌이 이루는 구성은 왕릉에 제사를 지내려고 세운 정자각(丁字閣)의 구성과 같다.[3] 또한, 정전 양 옆에는 익랑 2칸, 무(廡, 전각 주위에 세운 행랑) 4칸이 있다.
;조경묘
전주 이씨의 시조로 전하는 신라 시대의 사공공 이한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2] 경기전 경내 북쪽에 있으며, 1771년(영조 47년) 유생 이득리 등 7도 유생들의 상소로 세워졌다.[2]
;내·외삼문
내삼문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된 3문으로 그 양 옆에 익랑 2칸을 두었다.[2] 외삼문은 앞면 3칸, 옆면 1칸인 맞배지붕 건물로 익랑을 두지 않았으며, 옆면 가운데에 사이기둥을 세워 삼문을 달았다.[2]
;어진박물관
어진박물관은 경기전 내에 위치한 박물관으로 조선 태조 어진의 원본을 보관하고 있다.[2]
3. 1. 경기전 정전
정전은 남향한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로, 높게 돋우어 쌓은 석축 위에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세워졌다.[3] 건물 안의 세 번째 기둥렬(柱列)에 고주(高柱)를 세우고 그 가운데에 단(壇)을 놓았다. 이 단 양 옆에는 일산(日傘)과 천개(天蓋)를 세웠다. 정전 앞에 내단 헌은 정전보다 한 단 낮게 쌓은 석축 기단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2익공식(二翼工式) 포작(包作)을 짜올린 맞배지붕 건물이다. 정전과 헌이 이루는 구성은 왕릉에 제사를 지내려고 세운 정자각(丁字閣)의 구성과 같다.[3] 또한, 정전 양 옆에는 익랑 2칸, 무(廡, 전각 주위에 세운 행랑) 4칸이 있다.3. 2. 조경묘
전주 이씨의 시조로 전하는 신라 시대의 사공공 이한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2] 경기전 경내 북쪽에 있으며, 1771년(영조 47년) 유생 이득리 등 7도 유생들의 상소로 세워졌다.[2]3. 3. 내·외삼문
내삼문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된 3문으로 그 양 옆에 익랑 2칸을 두었다.[2] 외삼문은 앞면 3칸, 옆면 1칸인 맞배지붕 건물로 익랑을 두지 않았으며, 옆면 가운데에 사이기둥을 세워 삼문을 달았다.[2] 일제 시대에 경기전의 서쪽 부지와 부속 건물을 철거하고 일본인 소학교를 세우면서 부지의 절반이 잘려 나가, 현재 경기전 건물의 모습은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과 내삼문을 연결하는 간결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2]3. 4. 어진박물관
어진박물관은 경기전 내에 위치한 박물관으로 조선 태조 어진의 원본을 보관하고 있다.[2]
4. 기타
경기전은 고종 황제의 서녀로 알려진 이문용(李文鎔)이 만년을 보냈던 곳이기도 하다.[4] 이문용은 상궁 염(廉)씨 소생으로 알려져 있으며, 1917년 김한규의 아들 김회진과 결혼했으나, 3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아이도 잃었다.[4] 상궁 소생이었기에 황실 호적에 오르지 못하고, 상하이와 원산 등지를 거쳐 서울에 정착했지만, 간첩으로 몰려 옥살이를 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4] 6.25 전쟁 이후 강릉에서 셋방살이를 하다 1960년 반공법 위반죄로 다시 체포되어 전주교도소에서 복역했다.[4]
1974년 류주현 작가의 드라마 《황녀》(皇女)를 통해 이문용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1975년 전라북도와 전주시의 지원으로 경기전 조경묘 수직사에서 살게 되었다.[5] 하지만 이문용이 실제로 고종의 딸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다.[8] 생전에 낙선재를 방문했으나 거절당했고, 이방자 여사를 잠깐 만난 적이 있으며,[6] 1975년에는 드라마 황실 출연진들과 함께 홍릉을 참배하였다.[7] 이공재와 이면용은 이문용이 고종의 딸이라고 주장했지만, 낙선재 비서실장 이영주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사무총장 이규성은 《승정원일기》 등 왕실 기록에 이문용에 대한 기록이 없다며 반박했다.[8] 당시 상궁이었던 성왕염 역시 이문용이 고종의 딸이라는 것은 헛소문이라고 일축했다.[8]
5. 갤러리
참조
[1]
간행물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명칭 변경 및 지정·해제 고시
문화재청장
2011-07-28
[2]
서적
전주한옥마을
대원사
2013
[3]
문서
문의 좌우에 잇대어 지은 행랑
[4]
뉴스
(제목 없음)
동아일보
1987-03-30
[5]
뉴스
(제목 없음)
경향신문
1975-03-21
[6]
뉴스
(제목 없음)
경향신문
1974-09-17
[7]
뉴스
(제목 없음)
경향신문
1975-02-01
[8]
뉴스
(제목 없음)
경향신문
1987-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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