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회흐슈테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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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1701년 3월에 시작되어 처음에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북부 이탈리아에 집중되었다. 1702년에는 독일로 전투가 확대되었고, 바덴-바덴의 루이 빌헬름 휘하의 제국군이 9월에 란다우를 점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이에른이 프랑스 연합에 가담했고,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는 10월에 프리들링겐에서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략적 상황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양측 모두 겨울을 맞이했다.
1703년 9월, 바덴-바덴 변경백루트비히 빌헬름은 아우크스부르크를 탈환하여 서쪽에서 바이에른을 견제했고, 도나우강 유역에서 빌라르를 감시하던 헤르만 오토 2세는 루트비히 빌헬름과의 합류를 시도하여 9월 19일 헤흐슈테트에 도착했다. 빌라르는 바이에른 선제후막시밀리안 2세와 상의하여 제국군의 합류를 막기 위해 헤흐슈테트 인근 딜링겐 안 데어 도나우에 주둔하던 프랑스군 7,000명을 이동시켜 배후 기습을 명령했다.
1703년은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에 의한 도나우강을 따라 펼쳐지는 작전으로 시작되었다. 4월 말까지 그는 울름에서 레겐스부르크까지 이어지는 강을 따라 요새를 점령했는데, 이곳은 제국 의회가 열리는 곳이었다. 프랑스 알자스의 수도인 스트라스부르에서 겨울을 보낸 빌라르는 4월 28일에 켈에서 라인강을 건너 5월 중순에 에힝겐에서 바이에른 군과 합류했다.
빌라르는 막시밀리안에게 도나우강을 따라 진격하여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을 점령하자고 설득하려 했으나, 막시밀리안은 이 계획을 거부했다. 대신 바이에른 군은 남쪽으로 티롤로 진격했으나, 8월 말에 철수해야 했다. 막시밀리안이 티롤로 진격하는 동안, 루이 빌헬름은 바이에른으로 진격하여 딜링겐 안 데어 도나우 바로 북쪽에 있는 하운스하임 주변에 진지를 구축했다. 빌라르는 그의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해 딜링겐 외곽에 요새화된 야영지를 건설했고, 9월 1일에 막시밀리안이 합류했다.
두 지휘관이 다음 움직임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동안, 루이 빌헬름은 헤르만 오토 2세 폰 림부르크 슈티룸과 18,000명의 병력을 남겨두어 그들을 견제하게 했다. 9월 3일, 루이 빌헬름은 에힝겐 남쪽 12km 지점인 문데르킹겐에서 소규모 병력과 함께 도나우강을 건넜다. 거기에서 그는 아우크스부르크로 진격했고, 이로 인해 바이에른의 수도인 뮌헨이 위협받았다. 막시밀리안과 빌라르는 놀라 즉시 그를 저지하려 했고, 마르키 드 위송 휘하의 13,000명의 병력을 딜링겐에 남겨두었다.
그러나 그들은 9월 6일에 항복한 아우크스부르크를 구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딜링겐 동쪽 40km 지점인 도나우강 우안의 노르덴도르프 주변으로 철수했다. 루이 빌헬름은 이제 림부르크 슈티룸에게 도나우뵈르트에서 도나우강을 건너 프랑코-바이에른 야영지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림부르크 슈티룸의 포병이 지연되었고, 그 사이 빌라르와 막시밀리안은 도나우뵈르트에 먼저 도착하여 위송에게 딜링겐에서 이동하라고 명령할 시간을 벌었다. 림부르크 슈티룸이 9월 19일에 회흐슈테트 안 데어 도나우에 멈춰 섰을 때, 그는 자신의 진격을 막고 있는 15,000명의 병력이 있고, 위송과 8,000명의 병력이 뒤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3. 전투의 경과
9월 20일 오전 6시, 도나우뵈르트에서 온 바이에른 기병 정찰병들이 타프하임에서 프로이센 전초 기지와 충돌했고, 제국군 수색대는 셰일레데 장군 휘하의 뒤송의 선봉대와 마주쳤다. 림부르크 슈티룸은 양쪽에서 위협을 받고 있음을 파악하고 요한 마티아스 폰 데어 슐렌부르크 중장, 프로이센 파견대 지휘관 안할트데사우의 레오폴트 1세와 급히 회의를 열었다. 병력 열세를 확인한 그들은 슈베닝겐에서 뇌르틀링겐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후퇴하기로 결정하고, 전 병력 복귀 신호로 포병대에 세 발의 포격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 포격은 빌라르가 뒤송에게 공격 준비 완료를 알리는 신호로 약속했던 것이었다. 뒤송은 이를 공격 신호로 오인하여 빌라르 본대가 도착하기 전인 오전 8시에 공격을 시작했다. 이 기습으로 제국군의 후퇴는 저지되었고, 양측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격전을 벌였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프랑스군은 결국 제국군에게 격퇴되었다. 회흐슈테트와 성 주변 프랑스군은 프로이센군의 공격을 여러 차례 막아냈지만, 오전 11시경 뒤송의 군단은 무너졌다.
승리를 확신했던 림부르크 슈티룸은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 주력이 전장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아르코 백작 휘하의 바이에른 기병대가 즉시 제국군 진영을 공격하여, 이동 속도가 느린 보병이 뇌르틀링겐으로 가는 퇴로를 차단했다.
오후 1시경, 제국 기병대는 거의 5시간 동안 전투를 치르며 큰 피해를 입었다. 림부르크 슈티룸은 기병대에게 철수를 허락했고, 보병은 퇴각을 위해 가방과 탄약 보급품을 버리고 싸워야 했다. 프랑스 보병 4개 대대가 퇴각로를 막아서기도 했지만, 필사적인 돌격으로 간신히 뚫어냈다. 레오폴트 1세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후위를 맡아 완강히 저항하며 나머지 제국 보병에게 탈출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결과적으로 딜링겐의 프랑스군은 병력 부족으로 초기 공격에 실패했지만, 빌라르와 막시밀리안 2세가 이끄는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 주력이 도착하여 제국군을 격파했다. 제국군은 3,000명의 전사자를 내고 많은 대포와 군수 물자를 잃었으며, 레오폴트 1세는 뇌르틀링겐으로 후퇴했다.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의 피해는 1,000명 정도였다.
3. 1. 초기 상황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1701년 3월에 시작되어 처음에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북부 이탈리아에 집중되었다. 1702년에는 독일로 전투가 확대되어, 바덴-바덴의 루이 빌헬름 휘하의 제국군이 9월에 란다우를 점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이에른이 프랑스 연합에 가담했고,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는 10월에 프리들링겐에서 작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략적 상황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양측은 겨울을 맞이했다.
1703년은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이 도나우강을 따라 작전을 펼치면서 시작되었다. 4월 말까지 그는 울름에서 제국 의회가 열리는 레겐스부르크까지 이어지는 강을 따라 요새를 점령했다. 프랑스 알자스의 수도인 스트라스부르에서 겨울을 보낸 빌라르는 4월 28일에 켈에서 라인강을 건너 5월 중순에 에힝겐에서 바이에른 군과 합류했다.
빌라르는 막시밀리안에게 도나우강을 따라 진격하여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을 점령하자고 설득했으나, 막시밀리안은 이를 거부했다. 대신 바이에른 군은 남쪽으로 티롤로 진격했으나, 8월 말에 철수해야 했다. 막시밀리안이 티롤로 진격하는 동안, 루이 빌헬름은 바이에른으로 진격하여 딜링겐 안 데어 도나우 바로 북쪽에 있는 하운스하임 주변에 진지를 구축했다. 빌라르는 그의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해 딜링겐 외곽에 요새화된 야영지를 건설했고, 9월 1일에 막시밀리안이 합류했다.
두 지휘관이 다음 움직임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동안, 루이 빌헬름은 헤르만 오토 2세 폰 림부르크 슈티룸과 18,000명의 병력을 남겨 그들을 견제하게 했다. 9월 3일, 그는 에힝겐 남쪽 12km 지점인 문데르킹겐에서 소규모 병력과 함께 도나우강을 건넜다. 거기에서 그는 아우크스부르크로 진격했고, 이로 인해 바이에른의 수도인 뮌헨이 위협받았다. 막시밀리안과 빌라르는 즉시 그를 저지하려 했고, 마르키 드 위송 휘하의 13,000명의 병력을 딜링겐에 남겨두었다.
9월 6일, 아우크스부르크는 항복했고,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은 딜링겐 동쪽 40km 지점인 도나우강 우안의 노르덴도르프 주변으로 철수했다. 루이 빌헬름은 림부르크 슈티룸에게 도나우뵈르트에서 도나우강을 건너 프랑코-바이에른 야영지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포병이 지연되면서 빌라르와 막시밀리안은 도나우뵈르트에 먼저 도착하여 위송에게 딜링겐에서 이동하라고 명령할 시간을 벌었다. 9월 19일, 림부르크 슈티룸은 회흐슈테트 안 데어 도나우에 멈춰 섰지만, 15,000명의 병력이 자신의 진격을 막고 있고, 위송과 8,000명의 병력이 뒤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3. 2.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의 공격
빌라르와 막시밀리안 2세는 9월 19일 제국군이 합류하기 직전에 헤르만 오토 2세의 군대를 기습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딜링겐 안 데어 도나우에 주둔하던 프랑스군 7,000명에게 헤흐슈테트의 제국군을 배후에서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9월 20일 오전 6시, 도나우뵈르트에서 온 바이에른 기병 정찰병들이 타프하임에서 프로이센 전초 기지와 충돌했고, 제국군 수색대는 셰일레데 장군 휘하의 뒤송의 선봉대와 마주쳤다. 림부르크 슈티룸은 두 방향에서 위협을 받고 있음을 정확하게 추론하고 요한 마티아스 폰 데어 슐렌부르크 중장과 프로이센 파견대의 지도자인 안할트데사우의 레오폴트 1세와 급하게 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현재 위치를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슈베닝겐에서 뇌르틀링겐으로 북쪽으로 뻗은 도로를 따라 후퇴하기로 합의했다. 준비를 위해 그의 포병대는 세 발의 포격을 가했는데, 이는 모든 병력이 주력 부대로 복귀하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이것은 빌라르가 이전에 뒤송과 공격 준비가 되었음을 나타내기로 동의했던 신호이기도 했다. 뒤송은 이를 사실로 추정하고 빌라르가 여전히 어느 정도 거리에 있었음에도 오전 8시에 공격을 시작했다. 이 공격으로 인해 제국군의 후퇴는 저지되었고, 양측 모두 피비린내 나는 일련의 교전에서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하지만 결국 제국군이 수적으로 열세인 프랑스군을 격퇴했다. 회흐슈테트와 그 성 주변의 프랑스군은 여러 차례의 프로이센 공격을 격퇴했지만, 오전 11시까지 뒤송의 군단은 붕괴되었다.
림부르크 슈티룸은 승리했다고 생각했지만,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 주력이 이미 전장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르코 백작 휘하의 바이에른 기병대는 즉시 제국군 진영을 공격하여 이동 속도가 느린 보병이 뇌르틀링겐으로 가는 길을 끊을 시간을 벌었다.
오후 1시까지 제국 기병대는 거의 5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고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림부르크 슈티룸은 그들에게 철수를 허락했고, 보병은 탈출하기 위해 싸워야 했는데, 가방과 탄약 보급품을 버려야 했기 때문에 상황이 더욱 어려워졌다. 한때 프랑스 보병 4개 대대가 그들의 후퇴선을 가로질렀고, 필사적인 돌격으로만 도로를 다시 열 수 있었다. 후위는 안할트데사우의 프로이센군이 형성했는데, 그들의 완강한 저항은 나머지 제국 보병에게 탈출할 시간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딜링겐의 프랑스군은 병력이 적어 초반 공격에 실패했지만, 빌라르와 막시밀리안 2세가 이끄는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 주력이 도착하여 제국군을 공격했다. 격렬한 전투 끝에 제국군은 패배하여 3,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많은 대포와 군수 물자를 빼앗겼다. 레오폴트 1세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뇌르틀링겐으로 퇴각했다.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은 1,000명 정도의 손실을 입었다.
3. 3. 전투의 결과
안할트-데사우 공작 레오폴트 1세(Leopold I, Prince of Anhalt-Dessau) 휘하의 부대가 끈질기게 저항한 덕분에 스티럼은 간신히 군대를 지켜 뇌르틀링겐(Nordlingen)으로 퇴각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군은 5,000명이 전사했고, 37대의 대포와 군용 마차 대부분을 빼앗겼다. 프랑스군과 바이에른군은 1,000명이 전사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프랑스군은 라인강을 건너 바이에른군과 합류하여 오스트리아를 직접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9월 19일, 헤르만 오토 2세가 이끄는 제국군이 헤흐슈테트에 도착했지만,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격파당했다. 제국군은 3,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많은 대포와 군수 물자를 빼앗겼다. 레오폴트 1세는 뇌르틀링겐으로 퇴각했다.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의 손실은 1,000명 정도였다.
전투 후 아우크스부르크는 바이에른군에 함락되었고, 도나우강 유역 대부분이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빌라르와 막시밀리안 2세가 정책을 놓고 대립하여, 빌라르는 프랑스 정부의 뜻에 따라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4. 전투 이후
16시까지 제국군 보병의 마지막 부대가 전장을 벗어나 자정 무렵 뇌르틀링겐에 도착했다. 사상자 추정치는 다양하다. 빌라르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1,000명의 손실을 입고 12,000명 이상을 죽이거나 부상시키거나 포로로 잡았다고 주장했다. 다른 자료에서는 제국군 사상자를 4,500명, 프랑코-바이에른 군의 사상자는 약 1,500명으로 추정한다. 프로이센 기록 보관소는 6,000명의 병력 중 900명의 손실을 입었고, 나머지 군대에서 3,000명의 손실을 입었다고 기록했다.
빌라르는 추격을 원했지만, 막시밀리안 2세는 병사들이 12시간 만에 40km 가까이 행군한 후 전투를 벌여 추격할 상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대신 그는 아우크스부르크를 포위했고, 아우크스부르크는 10월 초에 항복했지만, 이는 프랑스로 소환된 빌라르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시켰다. 바이에른 공세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슈톨호펜 선에 주둔한 제국군은 프랑스가 북부 라인란트로 진출하려는 시도를 막았다. 루트비히 빌헬름은 같은 지역에서 벌어진 블레넘 전투(제2차 회흐슈테트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후 아우크스부르크는 바이에른군에 함락되었고, 도나우강 유역의 대부분이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와 반대로 빌라르와 막시밀리안 2세가 정책을 놓고 대립했기 때문에, 빌라르는 프랑스 정부의 뜻에 따라 본국으로 소환되었고, 대신 카미유 드스탕과 페르디낭 드 마르상이 막시밀리안 2세를 보좌하게 되었다. 심각한 상태에 놓인 제국은 동맹국 잉글랜드에 원군을 요청했고, 1704년에 전황이 크게 변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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