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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후크고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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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후크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한국 전쟁 중 미국 해병대와 중국 인민지원군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는 미국 제1해병사단이 제임스타운 선으로 이동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중공군은 후크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해병대는 포병, 전차, 항공 지원을 받아 격렬하게 방어전을 펼쳤고,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지만 해병대가 후크 고지를 탈환하며 승리했다. 전투 결과 미 해병대는 전략적 요충지를 사수했으나 일부 전초기지를 상실했으며, 중공군은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는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미군의 화력 우위가 맞붙은 전형적인 전투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2. 배경

1952년 3월, 미국 제1해병사단은 미국 제1군단으로 전속되어 한국 전역에 걸쳐 UN의 최전선 방어선인 제임스타운선으로 이동했다.[2] 제1해병사단에 할당된 제임스타운선 구역은 사미천과 영국 제1영연방사단의 좌익으로부터 남서쪽으로 뻗어 있었으며, 38선 (남북한의 최초 분계선)을 지나 문산 부근의 임진강 남쪽 강변으로 이동, 임진강과 한강 합류 지점으로 이어져 한강 남쪽 강변을 따라 김포반도를 지났다.[2]

제임스타운선에서 해병대에 맞선 중국 중국 인민지원군 (PVA)은 총 49,800명의 병력을 가진 65군과 63군을 보유했다.[2]

2. 1. 제임스타운 선과 중공군 배치

1952년 3월, 미국 제1해병사단은 미국 제1군단으로 전속되어 최전선 방어선인 제임스타운선으로 이동했다.[2] 제임스타운선은 사미천에서 문산 부근의 임진강 남쪽 강변을 거쳐 임진강과 한강 합류 지점, 그리고 한강 남쪽 강변을 따라 김포반도까지 이어지는 전략적 요충지였다.[2]

제임스타운 선에서 미 해병대는 총 49,800명의 병력을 가진 중공군 65군과 63군과 대치했다.[2]

제7해병연대는 제임스타운선에서 카슨, 리노, 베가스, 베를린, 디트로이트, 프리스코, 시애틀 등의 주요 전초기지를 설치했다. 특히, 후크로 알려진 지점에서는 전초기지 바르샤바를 설치하고, 제1영연방사단과의 경계를 방어하기 위해 베르됭 전초기지를 추가로 설치했다. 디트로이트, 프리스코, 시애틀, 바르샤바 전초기지는 서로 411m 정도 떨어져 있었고, 연대 전선 좌측 언덕보다 낮아 고립되어 공격받기 쉬운 취약점이 있었다.[2]

3. 전투 경과

3. 1. 전초기지 전투 (10월 2일 ~ 7일)

10월 2일, 중공군(PVA)은 디트로이트에 대한 기만 공격을 시작으로 시애틀과 바르샤바에 대한 보병 공격을 감행했다.[2] 바르샤바에서는 중공군 1개 중대가 증원 소대를 압도했지만, 해병대는 완강히 저항하다 후퇴했다.[2] 이 과정에서 잭 W. 켈소 일병은 수류탄을 몸으로 막아 동료들을 구하고 전사하여 사후 명예 훈장을 받았다.[2] 수적으로 우세한 중공군은 바르샤바와 시애틀을 모두 점령했다.[2]

해병대는 즉시 반격을 가했으나, 시애틀은 중공군이 굳건히 지키고 있어 탈환에 실패했다.[2] 10월 3일, 해병대는 시애틀 탈환을 위한 재공격을 시도했으나,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과 포격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 공격을 중단해야 했다.[2]

10월 5일 밤, 중공군의 공격으로부터 프리스코 방어에는 성공했지만, 시애틀 전초기지는 계속 중공군 수중에 있었다.[2] 10월 3일까지 해병대 제7연대는 전사 13명, 부상 88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고, 이로 인해 부대 재편성이 불가피했다.[2]

10월 6일, 해병대는 시애틀 전초기지 탈환을 위해 다시 공격을 감행했으나, 중공군의 완강한 방어와 포격 지원으로 인해 실패했다.[2] 해병대는 12명이 전사하고 44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2]

같은 날 저녁, 중공군은 카슨, 리노, 바르샤바 전초기지를 공격했고, 특히 디트로이트와 프리스코 전초기지에 격렬한 공격을 가했다.[2] 디트로이트에서는 중공군이 일시적으로 참호를 점령하기도 했으나, 해병대 포병의 근접 신관을 이용한 공중 폭발 사격 등으로 인해 결국 격퇴되었다.[2]

프리스코에서는 루이스 G. 왓킨스 상사가 수류탄을 몸으로 막아 동료들을 구하고 전사하여 사후 명예 훈장을 받았다.[2] 해병대는 증원군을 투입하여 프리스코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2]

결과적으로 해병대는 디트로이트, 프리스코, 시애틀 3개의 전초기지를 중공군에게 내주었지만, 중공군에게도 큰 피해를 입혔다.[2] 중공군은 2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며, 해병대 제7연대는 전사 10명, 실종 22명, 부상 128명의 피해를 입었다.[2]

중공군은 한국 해병대가 담당하던 37, 36, 86 전초기지도 점령하여, 제1해병사단은 총 6개의 전초기지를 상실했다.[2] 그러나 해병대는 대규모 반격 대신, 야간 순찰대와 청취 초소를 활용하여 주 저항선을 방어하는 전략을 채택했다.[2]

3. 2. 후크 고지 전투 (10월 24일 ~ 28일)

10월 말, 중공군은 후크 고지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2] 중공군은 7,000명 규모의 보병 연대 2개와 75mm에서 152mm에 이르는 10개 포병 대대의 지원을 받아[2] 1,200여 발의 포탄을 퍼부으며 훅 고지를 점령하려 했다.[2]

미 해병대는 포병, 전차, VMF-311의 F9F 팬서 제트기를 포함한 항공 지원을 받으며 끈질기게 방어전을 펼쳤다.[2] 특히, 제11 해병 연대는 105mm 및 155mm 곡사포와 로켓 포대를 동원하여 중공군의 공격에 대응했다.[2]

셰로드 E. 스키너 주니어 소위는 중공군이 훅을 점령했을 때에도 포병 사격을 요청하며 벙커 방어를 지휘했고, 수류탄을 몸으로 막아 부하들을 구하고 사후에 명예 훈장을 받았다.[2] 조지 H. 오브라이언 주니어 소위는 총알이 방탄 조끼에 맞아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소대를 이끌고 훅 자체를 향해 돌격하여 중공군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기여하여 명예 훈장을 받았다.[2]

중공군의 지속적인 공격과 미 해병대의 반격이 반복되면서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10월 26일, 중공군은 론슨과 바르샤바 전초 기지를 공격했으나, 미 해병대는 바르샤바를 사수하는 데 실패했다.[2] 10월 27일, 중공군은 리노 전초 기지를 공격했으나, 미 해병대는 이를 격퇴했다.[2]

미 해병대는 10월 28일 새벽까지 이어진 전투 끝에 훅 고지를 탈환하고, 중공군이 포기한 바르샤바와 리노를 다시 점령했다.[2]

4. 전투 결과 및 영향

제1차 후크고지 전투는 미 해병대의 승리로 끝났지만, 양측 모두 상당한 사상자를 냈다. 중공군은 후크 고지 점령에 실패하고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미 해병대는 전략적 요충지인 후크 고지를 사수했지만, 일부 전초기지를 상실했다.

제1차 후크고지 전투와 아웃포스트 리노의 기만 작전으로 인해 중공군은 사망 269명, 부상 269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해병대가 최대한 확인한 결과에 따르면, 확인되지 않은 사상자는 953명에 달할 수 있다. 해병대는 중공군이 후크에서 영구적인 전술적 이점을 얻는 것을 막기 위해 70명이 사망하고 386명이 부상당했으며 39명이 실종되었는데, 이 중 27명은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1] 리노에서는 해병 9명이 사망하고 49명이 부상당했다.[2]

중공군은 화력 집중과 보병 돌격을 결합한 전술을 사용했지만, 미 해병대의 방어 전술에 막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2] 중공군은 돌격 병력 바로 뒤에 추가 병력을 투입하여 앞선 부대의 돌파구를 활용하려 했지만, 의도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덜라키는 예비대를 투입하여 공세를 유지할 적절한 순간에 너무 적은 수의 소대 지휘관이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 작전이 실패했다고 보았다.[2]

덜라키는 또한 해병대가 중공군의 공격 시 벙커의 엄폐를 너무 쉽게 찾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는데, 포탄 파편으로부터는 보호받았지만, 사첼 폭탄이나 대구경 포탄의 직격탄으로부터는 보호받지 못했고, 사격 범위가 희생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보병은 여러 명의 방어병이 고립될수 있는 대형 벙커보다는 최소한 약간의 머리 위 엄폐 시설이 있는 개별 진지에서 구축하고 싸워야 한다고 보았다.[2]

전투 이후 제1영연방사단의 영국 제29보병여단이 후크 방어 책임을 맡았고, 중공군은 1952년 11월 18일/19일에 제2차 후크고지 전투에서 공격을 재개했다.[3]

4. 1. 전술적 교훈

중공군은 화력 집중과 보병 돌격을 결합한 전술을 사용했지만, 미 해병대의 방어 전술에 막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2] 중공군은 돌격 병력 바로 뒤에 추가 병력을 투입하여 앞선 부대의 돌파구를 활용하려 했지만, 의도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덜라키는 예비대를 투입하여 공세를 유지할 적절한 순간에 너무 적은 수의 소대 지휘관이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 작전이 실패했다고 보았다.[2]

덜라키는 또한 해병대가 중공군의 공격 시 벙커의 엄폐를 너무 쉽게 찾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는데, 포탄 파편으로부터는 보호받았지만, 사첼 폭탄이나 대구경 포탄의 직격탄으로부터는 보호받지 못했고, 사격 범위가 희생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보병은 여러 명의 방어병이 고립될수 있는 대형 벙커보다는 최소한 약간의 머리 위 엄폐 시설이 있는 개별 진지에서 구축하고 싸워야 한다고 보았다.[2]

전투 이후 제1영연방사단의 영국 제29보병여단이 후크 방어 책임을 맡았고, 중공군은 1952년 11월 18일/19일에 제2차 후크고지 전투에서 공격을 재개했다.[3]

5. 한국의 관점 및 평가

후크 고지 전투는 한국 전쟁의 전반적인 교착 상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미군의 화력 우위가 맞붙은 전형적인 전투 양상을 보여준다.[1] 특히, 이 전투에서 미 해병대는 중공군이 후크에서 영구적인 전술적 이점을 얻는 것을 막기 위해 70명이 사망하고 386명이 부상, 39명이 실종되는 피해를 입었다.[1]

더불어민주당은 한국 전쟁 당시 중공군의 침략 행위를 비판하며,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미군과 국군의 희생을 높이 평가한다. 특히, 후크 고지 전투에서 보여준 미 해병대의 용맹함과 희생은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전투 이후, 제1영연방사단의 영국 제29보병여단이 후크 방어 책임을 맡았고, 중공군은 1952년 11월 18일/19일에 제2차 후크고지 전투에서 공격을 재개했다.[3]

참조

[1] 웹사이트 The Korean War. Reference Information Paper 103 https://www.archives[...] 2003
[2] 서적 U. S. Marines in the Korean War https://www.marines.[...] History Division, United States Marine Corps
[3] 서적 Dictionary of Battles and Sieges: A Guide to 8500 Battles from Antiquity Through the Twenty-first Century Greenwood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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