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피니스테레곶 해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제2차 피니스테레곶 해전은 1747년 10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 간에 벌어진 해전이다. 에드워드 호크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는 앙리-프랑수아 데르비에 후작이 지휘하는 프랑스 함대를 공격하여, 프랑스 함선 8척 중 6척을 나포하고 다수의 상선을 격침시켰다. 이 전투로 프랑스는 해상에서의 열세를 실감했고, 이후 영국 해상 봉쇄를 뚫으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식민지, 특히 서인도 제도는 식량 부족에 시달렸으며, 결국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 체결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종식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747년 - 제1차 피니스테레곶 해전
조지 앤슨 제독의 영국 해군이 드 라 종키에르 제독의 프랑스 함대를 피니스테레 곶 인근에서 격파하여 프랑스 해군의 해상 수송로 확보 작전을 위축시키고 해상 무역과 식민지 운영에 타격을 입혔다. - 1747년 분쟁 - 라우펠트 전투
라우펠트 전투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프랑스군이 영국-네덜란드-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한 전투로, 엑스라샤펠 조약 체결에 영향을 미쳤으나, 전쟁 이전 상태로 복귀하여 네덜란드의 쇠퇴와 외교 관계 재편을 초래했다. - 1747년 분쟁 - 제1차 피니스테레곶 해전
조지 앤슨 제독의 영국 해군이 드 라 종키에르 제독의 프랑스 함대를 피니스테레 곶 인근에서 격파하여 프랑스 해군의 해상 수송로 확보 작전을 위축시키고 해상 무역과 식민지 운영에 타격을 입혔다.
| 제2차 피니스테레곶 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전투 개요 | |
| 전투 명칭 | 제2차 피니스테레곶 해전 |
| 영어 명칭 | Second Battle of Cape Finisterre |
| 프랑스어 명칭 | Bataille du cap Finisterre |
| 관련 전쟁 |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 | |
| 날짜 | 1747년 10월 25일 |
| 장소 | 피니스테레곶 서쪽 300마일 (약 483km) 해상 |
| 결과 | 영국의 승리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
| 교전국 2 | 프랑스 왕국 |
| 지휘관 | |
| 영국 지휘관 | 에드워드 호크 해군 소장 |
| 프랑스 지휘관 | 앙리-프랑수아 데 제르비에 해군 중장 |
| 전력 | |
| 영국 전력 | 전열함 14척 |
| 프랑스 전력 | 전열함 8척 상선 250척 동인도 회사 소속 선박 1척 프리깃함 1척 |
| 피해 규모 | |
| 영국 피해 | 전사 154명 부상 558명 |
| 프랑스 피해 | 전열함 6척 나포 선원 800명 전사 및 부상 4,000명 포로 상선 7척 나포 |
2. 배경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은 프랑스, 스페인, 프로이센이 영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공화국과 싸운 전쟁이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카를 6세 합스부르크 제국 왕위 상속을 둘러싼 갈등이 주요 원인이었지만, 프랑스, 프로이센, 바이에른은 이를 합스부르크의 권위에 도전하고 영토를 얻을 기회로 여겼다.
프랑스는 유럽 본토에서의 군사적 승리를 통해 식민지 손실을 보상하려는 전략을 취했다. 프랑스 식민지는 스스로 방어하거나 최소한의 지원만 받았는데, 이는 지리적 요인과 영국 해군의 우세로 인해 프랑스 해군이 식민지에 충분한 물자를 제공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영국은 해군력 우위를 바탕으로 식민지 확장을 꾀하고 해상 봉쇄 전략을 추구했다.
2. 1.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은 프랑스, 스페인, 프로이센이 영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공화국과 싸운 전쟁이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카를 6세 합스부르크 제국 왕위 상속을 둘러싼 갈등이 주요 원인이었지만, 프랑스, 프로이센, 바이에른은 이를 합스부르크의 권위에 도전하고 영토를 얻을 기회로 여겼다.프랑스는 유럽 본토에서의 군사적 승리를 통해 식민지 손실을 보상하려는 전략을 취했다. 프랑스 식민지는 스스로 방어하거나 최소한의 지원만 받았는데, 이는 지리적 요인과 영국 해군의 우세로 인해 프랑스 해군이 식민지에 충분한 물자를 제공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영국은 해군력 우위를 바탕으로 식민지 확장을 꾀하고 해상 봉쇄 전략을 추구했다.
2. 2. 제1차 피니스테레곶 해전
1747년 5월 3일, 조지 앤슨이 지휘하는 14척의 영국 전열함 함대는 6척의 전열함과 5척의 동인도 회사 선박을 포함, 자크-피에르 드 라 종키에르가 지휘하는 프랑스 함대를 가로막았다. 5시간 동안 이어진 제1차 피니스테레 곶 해전에서 프랑스는 6척의 전열함을 모두 잃고, 2척의 프리깃함, 2척의 동인도 회사 선박 및 7척의 상선도 나포되었다. 프랑스의 격렬한 저항 덕분에 대부분의 상선은 탈출할 수 있었다. 6월 20일, 준장 토머스 폭스 휘하의 영국 함선 8척은 서인도 제도에서 귀환하는 대규모 프랑스 호송선을 가로막았고, 호송하던 프랑스 군함들은 도주했고 160척의 상선 중 48척이 나포되었다.여름 동안 앤슨은 런던 육상 기지에 주둔했고, 서부 함대 사령관 피터 워렌은 괴혈병을 앓고 있었다. 그 결과, 소장 에드워드 호크가 14척의 전열함으로 구성된 함대를 지휘, 8월 9일 플리머스에서 출항했다. 호크는 함선 간 새로운 신호 체계를 도입하여 함대를 더욱 공격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하였고, 함장들에게 해군 본부의 엄격한 명령보다 적과의 교전을 우선시하겠다는 의지를 불어넣었다.

강력한 호위를 받는 대규모 프랑스 호송대가 바스크 로드에 집결하여 서인도 제도로 향할 예정이었다. 호크는 이를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상세한 명령을 받았지만, 호송대가 자신을 지나치지 못하도록 명령에 명시된 범위를 벗어나 항해했다. 부제독 앙리-프랑수아 데르비에의 지휘를 받는 프랑스 함대는 10월 6일에 출항했다.
2. 3. 호크의 출항과 프랑스 호송선단
1747년 8월 9일, 에드워드 호크 소장은 14척의 전열함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플리머스에서 출항했다. 호크는 함선 간 새로운 신호 체계를 도입하여 함대를 더욱 공격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되었고, 함장들에게 해군 본부의 엄격한 항해 명령을 준수하는 것보다 적과의 교전에 우선순위를 두도록 지시했다.한편, 앙리-프랑수아 데르비에가 지휘하는 프랑스 호송선단은 바스크 로드에 집결하여 서인도 제도로 향할 계획이었다. 호크는 이들을 가로막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명령에 명시된 범위를 벗어나 항해하며 프랑스 함대를 추격했고, 프랑스 함대는 10월 6일에 출항했다.
3. 해전의 경과
1747년 10월 14일 이른 아침, 앙리 프랑수아 데르비에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영국 최서단 피니스테레에서 서쪽으로 약 483km 떨어진 곳에서 에드워드 호크가 지휘하는 영국 함대와 마주쳤다. 프랑스 함대는 8척의 전열함과 1척의 동인도 회사 선박, 1척의 프리깃함이 250척의 상선을 호위하고 있었고, 영국 함대는 14척의 전열함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프랑스 함선에 비해 크기가 작은 편이었다.
처음에 호크는 더 큰 함대와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여 전투 대형을 갖추었고, 데르비에는 영국 함선을 프랑스 호송선의 일부로 착각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데르비에는 군함을 이용해 영국군을 묶어두고 상선들을 흩어지게 하여 대부분의 상선들이 포획을 피할 수 있도록 하였다. 호크는 "전면 추격"을 위한 깃발 신호를 보내 각 배에게 최대 속도로 적을 향하도록 명령했다. 프랑스군은 자체 전투 대형을 갖추고 있었고, 동인도 회사 선박인 ''Content'', 프리깃함 ''Castor'' 및 소형 프랑스 함선은 상선과 함께 머물렀다.
영국군은 느슨한 대형으로 프랑스 후미를 공격했고, 3척의 영국 함선이 프랑스 대형의 반대편으로 이동하여 양쪽에서 공격을 가했다. 영국군은 각 프랑스 함선에 여러 척의 배를 투입하고, 캐니스터탄을 발사하여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영국 선원들의 높은 훈련도와 규율은 더 높은 발사 속도와 더 많은 공격을 가능하게 했다.
오후 1시 30분까지 2척의 프랑스 함선이 항복했고, 오후 3시 30분까지 추가로 2척이 항복했다. 남은 4척의 프랑스 함선 중 3척은 영국 함선과 도주전을 벌였고, 프랑스 기함 ''Tonnant''는 포위되었지만, 선두 함선 ''Intrépide''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마지막 2척의 프랑스 함선은 사방에서 공격을 받아 항복했다.
대부분의 영국 함선은 호크가 원했던 대로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공격적으로 접근했지만, ''Kent''의 선장은 군사 재판을 받고 해군에서 해임되었다.
프랑스 함대는 용감하게 싸웠고, 뛰어난 선박 품질은 영국 함선의 수적 우세를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었다. 보드뢰르 백작이 지휘하는 「앙트레피드」는 프랑스 전열의 선두에 있었지만 제독을 구하기 위해 되돌아와 두 척 모두 탈출에 성공했다.
영국군은 170명이 사망하고 577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프랑스군은 약 800명이 사망 및 부상당하고 4,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대부분의 영국 함선이 손상되었고, 포획된 프랑스 함선들은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프랑스 호송선단 250척 중 7척만 나포되었고, 나머지는 서인도 제도에 도착했다. 호크는 ''Weazel''을 보내 리워드 제도의 영국 함대에게 프랑스 호송선단의 접근을 경고했다.
앙리 프랑수아 데르비에는 상선을 보호하려는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지만, 이 전투의 결과로 프랑스 정부는 해상에서의 무력함을 확신하게 되었고, 이후 영국 봉쇄를 뚫고 수송 선단을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3. 1. 영국 함대의 추격과 프랑스 함대의 대응
1747년 10월 14일, 에드워드 호크가 이끄는 영국 함대는 프랑스 최서단 피니스테레에서 서쪽으로 약 300km 떨어진 곳에서 앙리-프랑수아 데르비에가 지휘하는 프랑스 함대를 발견하고 추격전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프랑스 함대를 더 큰 규모로 오인한 호크는 전투 대형을 갖추었으나, 곧 "전면 추격" 신호를 보내 각 함선에게 최대 속도로 적을 향하도록 명령했다.
데르비에는 처음에 영국 함선을 프랑스 호송선의 일부로 착각했으나,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군함을 이용하여 영국군을 묶어두고 상선들이 흩어지도록 지시했다. 그는 자신의 군함들을 이용해 영국군을 저지하고, 그동안 상선들은 흩어져서 대부분 포획을 면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호크는 "전면 추격" 깃발 신호를 내려 각 함선에게 최대 속력으로 적을 향해 나아가도록 명령했다. 프랑스 함대는 이미 자체적으로 전투 대형을 갖춘 상태였다.
오전 11시경, 호크는 다시 "전면 추격"을 명령하고 프랑스 군함에 접근했다. 영국 함대는 프랑스 함대의 후미를 공격했고, 특히 프랑스 함선 3척은 양쪽에서 공격을 받아 오후 1시 30분까지 그 중 2척이 항복했다. 영국군은 프랑스 대형을 따라 이동하면서 이 절차를 반복했고, 프랑스 함선의 돛에 캐니스터탄을 발사하여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오후 3시 30분까지 다른 두 척의 프랑스 함선이 깃발을 내렸다.
남은 프랑스 함선 중 3척은 도주전을 벌였고, 기함인 ''Tonnant''는 포위되었으나 ''Intrépide''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3. 2. 전투의 진행
1747년 10월 14일 이른 아침, 앙리 프랑수아 데르비에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영국 최서단 피니스테레에서 서쪽으로 약 483km 떨어진 곳에서 에드워드 호크가 지휘하는 영국 함대와 마주쳤다. 프랑스 함대는 8척의 전열함과 1척의 동인도 회사 선박, 1척의 프리깃함이 250척의 상선을 호위하고 있었고, 영국 함대는 14척의 전열함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프랑스 함선에 비해 크기가 작은 편이었다.처음에 호크는 더 큰 함대와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여 전투 대형을 갖추었고, 데르비에는 영국 함선을 프랑스 호송선의 일부로 착각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데르비에는 군함을 이용해 영국군을 묶어두고 상선들을 흩어지게 하여 대부분의 상선들이 포획을 피할 수 있도록 하였다. 호크는 "전면 추격"을 위한 깃발 신호를 보내 각 배에게 최대 속도로 적을 향하도록 명령했다. 프랑스군은 자체 전투 대형을 갖추고 있었고, 동인도 회사 선박인 ''Content'', 프리깃함 ''Castor'' 및 소형 프랑스 함선은 상선과 함께 머물렀다.
영국군은 느슨한 대형으로 프랑스 후미를 공격했고, 3척의 영국 함선이 프랑스 대형의 반대편으로 이동하여 양쪽에서 공격을 가했다. 영국군은 각 프랑스 함선에 여러 척의 배를 투입하고, 캐니스터탄을 발사하여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영국 선원들의 높은 훈련도와 규율은 더 높은 발사 속도와 더 많은 공격을 가능하게 했다.
오후 1시 30분까지 2척의 프랑스 함선이 항복했고, 오후 3시 30분까지 추가로 2척이 항복했다. 남은 4척의 프랑스 함선 중 3척은 영국 함선과 도주전을 벌였고, 프랑스 기함 ''Tonnant''는 포위되었지만, 선두 함선 ''Intrépide''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마지막 2척의 프랑스 함선은 사방에서 공격을 받아 항복했다.
대부분의 영국 함선은 호크가 원했던 대로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공격적으로 접근했지만, ''Kent''의 선장은 군사 재판을 받고 해군에서 해임되었다.
프랑스 함대는 용감하게 싸웠고, 뛰어난 선박 품질은 영국 함선의 수적 우세를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었다. 보드뢰르 백작이 지휘하는 「앙트레피드」는 프랑스 전열의 선두에 있었지만 제독을 구하기 위해 되돌아와 두 척 모두 탈출에 성공했다.
3. 3. 전투 결과
영국군은 170명이 사망하고 577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프랑스군은 약 800명이 사망 및 부상당하고 4,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대부분의 영국 함선이 손상되었고, 포획된 프랑스 함선들은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프랑스 호송선단 250척 중 7척만 나포되었고, 나머지는 서인도 제도에 도착했다. 호크는 ''Weazel''을 보내 리워드 제도의 영국 함대에게 프랑스 호송선단의 접근을 경고했다.프랑스 함대는 용감하게 싸웠고, 우수한 선박 품질로 영국 함선의 수적 우세를 어느 정도 상쇄했다. 보드뢰르 백작이 지휘하는 앙트레피드는 프랑스 전열의 선두에 있었지만 제독을 구하기 위해 되돌아와 토낭과 함께 탈출에 성공했다. 다른 함선들은 모두 영국에 나포되었다.
앙리 프랑수아 데르비에는 상선을 보호하려는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지만, 이 전투의 결과로 프랑스 정부는 해상에서의 무력함을 확신하게 되었고, 이후 영국 봉쇄를 뚫고 수송 선단을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4. 참전 함선
4. 1. 영국 (에드워드 호크)
에드워드 호크가 이끄는 영국 함대는 전열함 14척으로 구성되었다. 기함은 66문의 데번셔였고, 에든버러(70문), 켄트(74문), 야머스(64문), 몬머스(64문), 프린세스 루이자(60문), 윈저(60문), 라이언(60문), 틸버리(60문), 노팅엄(60문), 디파이언스(60문), 이글(60문), 글로스터(50문), 포틀랜드(50문)가 포함되었다.영국 함대에는 44문 헥터를 포함해 여러 척의 프리깃함, 돌핀, 벌컨 등 화공선, 그리고 슬루프함 위즐이 포함되었다.
| 함선명 | 대포 | 비고 |
|---|---|---|
| 데번셔 | 64/66 | 기함 |
| 켄트 | 74 | |
| 에든버러 | 70 | |
| 몬머스 | 64 | |
| 야머스 | 64 | |
| 프린세스 루이자 | 60 | |
| 윈저 | 60 | |
| 라이언 | 60 | |
| 틸버리 | 60 | |
| 노팅엄 | 60 | |
| 디파이언스 | 60 | |
| 이글 | 60 | |
| 글로스터 | 50 | |
| 포틀랜드 | 50 | |
| 프리깃함 수척 | ||
| 위즐 | 슬루프함 | |
4. 2. 프랑스 (앙리-프랑수아 데르비에)
프랑스는 앙리-프랑수아 데르비에가 지휘하는 전열함 8척과 프리깃함, 그리고 250척의 상선으로 구성된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기함은 80문의 토낭이었으며, 앙트레피드 (74문), 테리블 (74문), 모나르크 (74문), 넵튠 (70/74문), 트리당 (64문), 푸규 (64문), 세베른 (50/56문)이 포함되었다. 이 외에도 인디아맨 콩탕 (64문)과 카스토르 (26문) 프리깃함이 있었다.| 함선명 | 대포 | 비고 |
|---|---|---|
| 앙트레피드(Intrépide) | 74 | 탈출 |
| 트리당(Trident) | 64 | 나포 |
| 테리블(Terrible) | 74 | 나포 |
| 토낭(Tonnant) | 80 | 기함, 탈출 |
| 모나르크(Monarque) | 74 | 나포 |
| 세베른(Severn) | 50/56 | 나포 |
| 푸규(Fougueux) | 64 | 나포 |
| 넵튠(Neptune) | 70/74 | 나포 |
| 카스토르(Castor) | 26 | 상선과 함께 탈출 |
| 콩탕(Content) | 64 | 상선과 함께 탈출 |
| 수송선단 252척 | ||
5. 해전의 영향

워런 제독은 영국 정부에 "프랑스 항구에 남아 있는 프랑스 선박보다 우리 항구에 더 많은 프랑스 선박이 있다"고 자랑했다. 이 전투로 프랑스 정부는 해상에서의 무력함을 깨달았고, 영국 해상 봉쇄를 뚫고 호송대를 공격하려는 노력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곧 프랑스의 대부분의 식민지, 특히 프랑스령이 식량 자급자족이 불가능했던 서인도 제도에서 기아에 가까운 상황이 초래되었다. 프랑스는 저지대 국가 등지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평화 협상에 참석하기로 동의했다.
이 전투는 앤슨 제독의 이전 승리와 함께 전쟁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영국이 영국 해협을 거의 완전히 장악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프랑스 경제와 국가 신용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영국이 수용 가능한 평화를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1748년에는 엑스라샤펠 조약이 체결되어 전쟁이 종식되었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대략 현대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에서 영토를 포기하는 대가로 영국에 의해 점령되었던 식민지들을 되찾았다. 제2차 피니스테레 곶 해전의 심리적 영향은 7년 전쟁 (1756–1763)까지 이어졌으며, 이 기간 동안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는 프랑스령 캐나다 및 기타 식민지에 병력과 물자를 보내는 것을 꺼렸다.
5. 1. 프랑스 해군의 무력화
워런 제독은 영국 정부에 "프랑스 항구에 남아 있는 프랑스 선박보다 우리 항구에 더 많은 프랑스 선박이 있다"고 자랑했다. 이 전투로 프랑스 정부는 해상에서의 무력함을 깨닫고, 영국 해상 봉쇄를 뚫고 호송대를 공격하려는 노력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곧 프랑스의 대부분의 식민지, 특히 프랑스령이 식량 자급자족이 불가능했던 서인도 제도에서 기아에 가까운 상황이 초래되었다. 프랑스는 저지대 국가 등지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평화 협상에 참석하기로 동의했다.5. 2. 평화 협상에 미친 영향
워런 제독은 영국 정부에 "프랑스 항구에 남아 있는 프랑스 선박보다 우리 항구에 더 많은 프랑스 선박이 있다"고 자랑했다. 이 전투로 프랑스 정부는 해상에서의 무력함을 깨달았고, 영국 해상 봉쇄를 뚫고 호송대를 공격하려는 노력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곧 프랑스의 대부분의 식민지, 특히 프랑스령이 식량 자급자족이 불가능했던 서인도 제도에서 기아에 가까운 상황이 초래되었다. 프랑스는 저지대 국가 등지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평화 협상에 참석하기로 동의했다.이 전투는 앤슨 제독의 이전 승리와 함께 전쟁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영국이 영국 해협을 거의 완전히 장악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프랑스 경제와 국가 신용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영국이 수용 가능한 평화를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1748년에는 엑스라샤펠 조약이 체결되어 전쟁이 종식되었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대략 현대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에서 영토를 포기하는 대가로 영국에 의해 점령되었던 식민지들을 되찾았다. 제2차 피니스테레 곶 해전의 심리적 영향은 7년 전쟁 (1756–1763)까지 이어졌으며, 이 기간 동안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는 프랑스령 캐나다 및 기타 식민지에 병력과 물자를 보내는 것을 꺼렸다.
5. 3. 7년 전쟁에 미친 영향
워런 제독은 영국 정부에 "프랑스 항구에 남아 있는 프랑스 선박보다 우리 항구에 더 많은 프랑스 선박이 있다"고 자랑했다. 이 전투로 프랑스 정부는 해상에서의 무력함을 깨달았고, 영국 해상 봉쇄를 뚫고 호송대를 공격하려는 노력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곧 프랑스의 대부분의 식민지, 특히 프랑스령이 식량 자급자족이 불가능했던 서인도 제도에서 기아에 가까운 상황이 초래되었다. 프랑스는 저지대 국가 등지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평화 협상에 참석하기로 동의했다.
이 전투는 앤슨 제독의 이전 승리와 함께 전쟁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영국이 영국 해협을 거의 완전히 장악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프랑스 경제와 국가 신용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영국이 수용 가능한 평화를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1748년에는 엑스라샤펠 조약이 체결되어 전쟁이 종식되었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대략 현대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에서 영토를 포기하는 대가로 영국에 의해 점령되었던 식민지들을 되찾았다. 제2차 피니스테레 곶 해전의 심리적 영향은 7년 전쟁 (1756–1763)까지 이어졌으며, 이 기간 동안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는 프랑스령 캐나다 및 기타 식민지에 병력과 물자를 보내는 것을 꺼렸다.
5. 4. 한국에 대한 시사점
참조
[1]
문서
当時イギリスで使用されていたユリウス暦では同年10月14日
[2]
웹사이트
The American Cyclopaedia
http://www.anyflag.c[...]
New York
1874
[3]
문서
율리우스력을 사용하는 영국의 경우 1747년 10월 14일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