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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레녹스 백작 매슈 스튜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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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매슈 스튜어트는 제4대 레녹스 백작으로, 제3대 레녹스 백작 존 스튜어트의 아들이자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헨리 7세의 외손녀인 마거릿 더글러스와 결혼하여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와 찰스 스튜어트를 낳았으며, 단리 경은 스코틀랜드의 메리 1세와 결혼하여 제임스 6세를 낳았다. 1543년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 왕자와 그리니치 조약을 체결했으나 스코틀랜드의 왕위 계승 문제로 인해 조약이 깨졌고, 1567년 메리 여왕의 폐위를 주도했으며, 1570년에는 제임스 6세의 섭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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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레녹스 백작 매슈 스튜어트
기본 정보
매슈 스튜어트
이름매슈 스튜어트
작위제4대 레녹스 백작
가문스튜어트 오브 단리 가문
출생일1516년 9월 21일
출생지덤바턴 성, 스코틀랜드
사망일1571년 9월 4일
사망지스털링 성, 스코틀랜드
가문
아버지제3대 레녹스 백작 존 스튜어트
어머니엘리자베스 스튜어트
배우자마거릿 더글러스
자녀헨리 스튜어트, 단리 경
찰스 스튜어트, 제5대 레녹스 백작

2. 가계 및 혈통

제3대 레녹스 백작 존 스튜어트와 레이디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아들이다. 부계로는 스튜어트 가문의 방계인 Stewart of Darnley|스튜어트 오브 던리 가문영어의 후손이었으나, 부계 할머니 엘리자베스 해밀턴이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2세의 외손녀였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에서 유력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544년에는 마거릿 더글러스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잉글랜드 왕 헨리 7세의 외손녀이자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5세의 이복 누이로서,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이 결혼을 통해 매슈 스튜어트는 잉글랜드 왕위 계승 문제에도 깊이 관여하게 되었으며, 그의 자녀들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양국의 왕위 계승권을 모두 확보하는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 그의 장남 헨리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1세와 결혼하여 훗날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이자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가 되는 제임스를 낳았다.

2. 1. 가계

매슈 스튜어트의 아버지는 제3대 레녹스 백작 존 스튜어트(1526년 사망)이고, 어머니는 존 스튜어트, 초대 애솔 백작의 딸인 레이디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제2대 레녹스 백작 매슈 스튜어트이며, 할머니는 엘리자베스 해밀턴이다. 할머니 엘리자베스 해밀턴은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2세의 딸 메리 스튜어트의 딸이었으므로, 매슈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튜어트 가문의 일원이었으나 왕가의 직계 자손은 아니었다. 로버트 2세의 할아버지인 제5대 왕실 집사 제임스 스튜어트의 동생에서 시작된 분가인 Stewart of Darnley|스튜어트 오브 던리 가문eng의 후손이었다.

1544년, 매슈 스튜어트는 마거릿 더글러스와 결혼했다. 마거릿은 잉글랜드 왕 헨리 7세의 딸이자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4세의 미망인이었던 마거릿 튜더와 아치볼드 더글러스 제6대 앵거스 백작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그녀는 헨리 7세의 외손녀이자 헨리 8세의 조카였으며, 제임스 5세에게는 이복 누이가 되어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매슈와 마거릿 더글러스 사이의 자녀는 다음과 같다.

  • 헨리 스튜어트 (1544년 출생 및 사망):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20]
  • 헨리 스튜어트, 단리 경 (1546년–1567년): 템플 뉴섬에서 태어났다. 제임스 5세의 딸이자 스코틀랜드 여왕인 메리 1세와 결혼했다. 그의 아들 제임스는 훗날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이자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가 되었다.
  • 필립 스튜어트 (1556년 출생): 유아기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21]
  • 찰스 스튜어트 (1557년–1576년): 형 헨리 사후 레녹스 백작위를 계승했다. 1574년 엘리자베스 캐번디시와 결혼했다. 그녀는 엘리자베스 하드윅과 그녀의 두 번째 남편 윌리엄 캐번디시 경의 딸이었다. 찰스 스튜어트의 딸은 레이디 아벨라 스튜어트이다.


그의 장인은 아치볼드 더글러스 제6대 앵거스 백작이며, 장모는 헨리 7세의 딸인 마거릿 튜더이다.

2. 2. 스코틀랜드 및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

제3대 레녹스 백작 존 스튜어트의 아들인 매슈 스튜어트는 스튜어트 가문의 일원이었으나, 왕가의 직계 자손은 아니었다. 그의 가계는 로버트 2세의 할아버지인 제5대 왕실 집사 제임스 스튜어트의 동생에서 시작된 분가인 던리의 스튜어트 가문(Stewart of Darnley)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부계 쪽 할머니인 엘리자베스 해밀턴은 제임스 2세의 딸 메리 스튜어트의 딸이었기 때문에, 매슈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에서 유력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544년, 매슈 스튜어트는 마거릿 더글러스와 결혼하면서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에도 연관을 맺게 되었다. 마거릿 더글러스는 헨리 8세의 누이이자 제임스 4세의 왕비였던 마거릿 튜더의 딸로, 제임스 5세에게는 이복 누이였다. 이러한 혈통으로 인해 마거릿 더글러스는 잉글랜드의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 중 한 명이었다.

매슈 스튜어트와 마거릿 더글러스 사이에서는 두 아들이 태어났다. 첫째 아들은 헨리 스튜어트이며, 둘째 아들은 찰스 스튜어트이다. 장남 헨리 스튜어트는 1565년, 당시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제임스 5세의 딸인 메리 1세와 결혼하였다. 이 결혼을 통해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양국의 왕위 계승권이 더욱 가까워졌다.

헨리 스튜어트와 메리 1세 사이에서는 1566년 아들 제임스가 태어났다. 제임스는 훗날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이자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서 두 왕국의 왕위를 모두 계승하게 된다. 이는 매슈 스튜어트와 그의 부인 마거릿 더글러스가 각각 지니고 있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이 그들의 자손을 통해 하나로 합쳐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 생애

헨리 7세 후손의 가계도, 가운데행 맨 오른쪽이 매슈


튜더 왕가 가계도


매슈 스튜어트는 제3대 레녹스 백작 존 스튜어트의 아들로, 스튜어트 왕가의 일원이었다. 그는 왕가의 직계는 아니었으나, 부계 할머니 엘리자베스 해밀턴이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2세의 딸 메리 스튜어트의 딸이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권을 가진 인물이었다.

1544년 잉글랜드로 건너가 잉글랜드 왕 헨리 8세의 조카이자 마거릿 튜더의 딸인 마거릿 더글러스와 결혼했다. 마거릿 더글러스는 헨리 7세의 외손녀로서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가졌으며,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5세에게는 이복 누이였다. 이 결혼을 통해 매슈와 마거릿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헨리 스튜어트(단리 경)와 찰스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양국의 왕위 계승 자격을 갖게 되었다.

1543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정치 활동을 시작했으며, 초기에는 친프랑스파와 손을 잡았으나 이후 입장을 바꿔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동맹을 맺고 스코틀랜드 내전인 '거친 구애'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스코틀랜드 내에서 군사 활동을 벌였으나 결국 잉글랜드로 망명하게 된다.

1564년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1565년 아들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를 스코틀랜드의 메리 1세 여왕과 결혼시켰다. 이 결혼으로 1566년 손자 제임스(훗날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이자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가 태어났으나, 단리 경과 메리 여왕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1567년 단리 경이 의문의 폭발 사건으로 사망하자, 매슈 스튜어트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강력히 요구했다.

같은 해, 매슈 스튜어트는 다른 귀족들과 함께 메리 여왕의 폐위와 유폐를 주도했다. 메리 여왕이 폐위된 후 어린 손자 제임스가 왕위에 오르자, 1570년 머리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가 암살된 후 매슈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의 섭정이 되어 손자를 대신해 국정을 이끌었다. 그러나 섭정 기간 동안 메리 여왕 지지자들과의 권력 투쟁은 계속되었다.

1571년 9월 4일, 스털링에서 메리 여왕 지지자들의 기습 공격을 받아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의 레녹스 백작 작위는 손자인 제임스 6세에게 통합되었다.

3. 1. 스코틀랜드 귀국과 권력 투쟁 (1543-1547)

1542년 제임스 5세가 사망하자 스코틀랜드는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당시 프랑스에 머물던 매슈 스튜어트는 스튜어트 왕가의 방계 혈족이자 제임스 2세의 외증손자로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추기경 비톤은 제임스 해밀턴, 아란 백작을 견제하기 위해 레녹스에게 귀국을 촉구했다.[3]

1543년 3월, 레녹스는 덤바턴 성에 도착하며 스코틀랜드 정치 무대에 복귀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의회어린 메리 여왕의 섭정이자 추정 상속인으로 아란 백작을 지명한 것에 반발했다. 레녹스 역시 메리 스튜어트, 아란 백작 부인을 통해 왕위 계승권을 가졌으나, 부계 계승자인 아란 백작에 비해 후순위였다. 그러나 레녹스는 아란 백작 부모의 혼인 문제를 거론하며 아란 백작이 사생아라고 주장, 그의 정통성에 도전했다.[3]

초기에 레녹스는 친프랑스파인 비튼 추기경과 손을 잡고, 아란 섭정이 추진하던 잉글랜드와의 그리니치 조약(메리 여왕과 에드워드 6세의 약혼)에 반대했다.[4] 그는 메리 여왕의 어머니인 메리 드 기즈와의 결혼을 기대하기도 했으나[6], 이는 성사되지 않았다.

1543년 말, 스코틀랜드 의회가 그리니치 조약을 최종적으로 거부하자 레녹스는 정치적 입장을 급격히 바꾸었다. 그는 헨리 8세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가 메리 여왕과의 결혼을 강제하기 위해 벌인 거친 구애 전쟁을 지지하게 된다. 이후 레녹스는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아 스코틀랜드 내에서 군사 활동을 벌였으며, 이는 스코틀랜드 내부의 권력 투쟁을 더욱 격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7][9][10][11][12]

3. 1. 1. 스털링 성 대관식

아란 섭정은 1543년 7월 1일 잉글랜드와 그리니치 조약을 맺어 메리 여왕을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의 아들이자 상속자인 에드워드 6세와 약혼시키려 했다. 아란은 메리 여왕과 그녀의 어머니 메리 드 기즈가 머물던 린리수고 궁전을 요새화하며 사실상 모녀를 가두었다. 레녹스는 친프랑스파인 비튼 추기경과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와의 결혼 계획에 반대하는 "비밀 동맹"에 서명했다. 레녹스와 비튼 추기경의 군대는 린리수고 궁전 밖에 진을 쳤으나 공격할 포병은 부족했다. 양측 대표는 에든버러 인근의 커클리스턴에서 회담을 가졌고, 아란이 의회의 조언을 받아 통치하고 메리 여왕을 스털링 성으로 옮기는 데 합의했다. 레녹스는 1543년 7월 26일 메리 여왕을 스털링 성으로 직접 호송했다.[4]

메리 여왕은 1543년 9월 9일 스털링 성에서 대관식을 거행했으며, 레녹스는 이 의식에서 왕홀(sceptre)을 드는 역할을 맡았다.[5] 레녹스는 스코틀랜드에 올 때 과부인 메리 드 기즈와의 결혼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9월이 되자, 그는 마가렛 튜더(제임스 4세의 왕비이자 헨리 8세의 누이)의 딸이자 사망한 제임스 5세의 이복 누이인 레이디 마가렛 더글라스와의 결혼 기회를 제안받았다. 한편, 레녹스가 메리 드 기즈에게 보내진 프랑스 자금과 포병을 압수하자, 메리 드 기즈는 그에게 자신의 딸인 어린 메리 여왕과의 결혼을 제안하기도 했다.[6]

3. 1. 2. 거친 구애 전쟁

제임스 5세가 1542년 사망하자, 추기경 비톤은 레녹스에게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제임스 해밀턴, 아란 백작과 경쟁할 것을 촉구했다. 레녹스는 스코틀랜드 의회가 어린 메리 여왕의 왕위 계승자이자 섭정으로 아란 백작을 선언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1543년 3월, 두 척의 배를 이끌고 자신의 요새인 덤바턴 성에 도착했다. 아란 백작과 레녹스 모두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2세의 딸인 메리 스튜어트, 아란 백작 부인의 후손으로서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란 백작은 메리 스튜어트의 손자였고, 레녹스는 증손자였기에 아란 백작의 주장이 더 강력했다. 그럼에도 레녹스는 아란 백작의 아버지가 아란의 어머니와 결혼하기 전에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지 않았으므로 아란 백작이 사생아라고 주장하며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했다.[3]

스코틀랜드 의회가 그리니치 조약을 거부하자, 레녹스는 입장을 바꿔 헨리 8세가 메리 여왕과 자신의 아들 에드워드 6세를 결혼시키려는 군사적 압박, 즉 거친 구애 전쟁을 지지하게 되었다. 1544년 여름, 레녹스는 헨리 8세가 제공한 18척의 배와 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란 섬을 약탈하고 뷰트 섬과 로테세이 성을 점령했다. 글래스고어 무어 전투에서는 그의 군대가 아란 백작 군대의 선봉대를 격파하고 대포를 빼앗기도 했다.[7] 그러나 전투 자체는 섭정 아란 백작에게 유리하게 끝났으며,[8] 양측에서 약 3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레녹스는 덤바턴 성으로 후퇴해야 했다.[7]

이후 레녹스는 영국 장교들과 상의하여 두눈 성을 공격하고 인근 마을과 교회를 불태웠다. 또한 킨타이어 지역의 상당 부분을 황폐화시켰다. 하지만 덤바턴 성을 되찾는 데는 실패했고, 결국 1544년 5월 28일경 배를 타고 잉글랜드로 망명하여 한동안 레스틀 성에 머물렀다.[9] 그는 1544년 7월 헨리 8세로부터 귀화 증서를 받았다.[10] 1545년 8월 5일, 도널드 두브는 레녹스를 지지하는 하일랜드 제도 영주들과 동맹을 맺고 헨리 8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아란 백작이나 마리 드 기즈 대신 레녹스를 스코틀랜드의 진정한 섭정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영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도널드 두브의 반란은 조직력 부족과 물류 문제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1]

레녹스는 1547년 9월,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 침공군에 합류했다. 핑키 전투 직전, 영국 주력군이 에든버러로 향하는 동안, 토머스 와튼, 초대 와튼 남작과 레녹스가 공동으로 지휘하는 5,000명의 별동대가 서쪽으로 우회하여 침공을 감행했다. 그들은 캐슬밀크를 점령하고, 요새화된 교회를 점령하기 위한 격렬한 전투 끝에 애넌을 불태웠다.[12]

3. 2. 잉글랜드 망명과 마거릿 더글러스와의 결혼

1544년 잉글랜드로 건너가 잉글랜드 왕 헨리 8세의 조카이자 마거릿 튜더와 아치볼드 더글러스의 딸인 마거릿 더글러스와 결혼했다. 마거릿 더글러스는 헨리 7세의 외손녀로서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5세에게는 이복 누이였다. 이 결혼을 통해 매슈 스튜어트는 잉글랜드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게 되었다.

결혼 후 매슈와 그의 가족은 헨리 8세가 하사한 요크셔 노스의 워얼턴 성과 영지에서 한동안 거주했다. 16세기 후반 어느 시점에는 성의 정문 북서쪽 끝에 인접한 집을 지어 살기도 했다.

매슈 스튜어트와 마거릿 더글러스는 다음과 같은 자녀를 두었다.

이름생몰년비고
헨리 스튜어트1544년태어난 직후 사망[20]
헨리 스튜어트, 단리 경1546년–1567년템플 뉴섬 출생. 스코틀랜드의 메리 1세 여왕과 결혼. 아들 제임스 6세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왕이 됨.
필립 스튜어트1556년[21]
찰스 스튜어트1557년–1576년1574년 엘리자베스 캐번디시와 결혼. 딸은 레이디 아벨라 스튜어트.


3. 3. 스코틀랜드 귀환과 단리 경 결혼 (1564-1567)

1564년 10월,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의 결혼 협상이 진행되던 중, 레녹스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권유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그는 홀리루드 궁전에 숙소를 배정받았으며, 여왕의 태피스트리 직공 피에르 마틴은 그를 위해 진홍색 벨벳 침대를 준비해주었다.[14] 레녹스는 메리 여왕에게 "놀랍도록 아름답고 풍성한" 보석, 시계, 보석 거울 등을 선물했고, 여러 궁정 신하들과 여왕의 네 명의 메리에게도 다이아몬드 반지 등을 주었다.[15]

레녹스는 빠르게 글래스고 지역의 유력 영주로 자리 잡았고, 이후 장남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를 메리 여왕과 결혼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이러한 결과를 의도했는지(예컨대 프랑스 등 대륙 국가와의 결혼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는 확실하지 않다. 잉글랜드 여왕은 이 결혼에 불만을 표하며 레녹스의 아내 앵거스 백작 영애 마거릿 더글러스를 런던탑에 가두었다.

단리 경과 메리 여왕은 1565년에 결혼했다. 그러나 레녹스는 평소 메리 여왕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단리와 메리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1565년 8월까지 윌리엄 세실은 단리의 무례함 때문에 레녹스가 스코틀랜드 궁정에서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었다.[16] 1566년에는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 제임스 1세 (잉글랜드)(훗날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이자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가 태어났다.

매슈 스튜어트 (제4대 레녹스 백작), 그의 아내 마가렛 더글러스(레녹스 백작 부인), 막내 아들 찰스 스튜어트 (레녹스), 그리고 손자 제임스 1세 (잉글랜드)가 그의 아들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의 살해를 애도하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하지만 1567년 초, 단리 경은 의문의 폭발 사건으로 사망했다. 레녹스는 아들의 죽음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되는 귀족들을 처벌하기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보스웰 백작 등이 주도한 것으로 여겨지는 살해 사건과 관련하여 메리 여왕에게 불리한 주요 증인이 되었지만, 메리 여왕의 연루 여부는 논란의 대상이다. 같은 해 레녹스는 다른 귀족들과 함께 메리 여왕의 폐위와 유폐를 주도했고, 이에 메리 여왕은 전쟁을 선포했다.

3. 4. 섭정 재임과 죽음 (1570-1571)

1570년 머리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가 암살된 후, 레녹스는 손자인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의 섭정이 되었다. 그러나 메리 여왕 측이 그에게 전쟁을 선포하면서 섭정 기간 동안 권력 투쟁이 이어졌다.

1571년 9월 4일, 메리 여왕의 지지자들이 스털링을 기습 공격했을 때 벌어진 소규모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17] 이 스털링 공격은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 파이슬리 경 클로드 해밀턴, 그리고 버클루(Buccleuch)와 페니허스트(Ferniehurst) 영주 등이 주도했다. 레녹스의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초기 보고에서 그 자신의 편에서 쏜 총에 맞았다는 설도 있었으나, 커콜디 오브 그레인지는 여왕 측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기록에서는 데이비드 보치난트(David Bochannant)라는 인물을 암살자로 지목하기도 했다.[18]

레녹스는 스털링 성 내 왕립 예배당에 안장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매장 위치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고고학자들이 옛 예배당 터인 총독의 주방(Governor's Kitchen)에서 발견한 유해가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해당 시기의 것으로 나타나, 레녹스의 것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19] 그의 레녹스 백작 작위는 장손인 제임스 6세가 계승하였다.

참조

[1] 웹사이트 Oxford DNB login http://www.oxforddnb[...] 2016-10-14
[2] 서적 Some Account of the Stuarts of Aubigny in France London 1891
[3] 간행물 Two Missions of de la Brosse Edinburgh 1942
[4] 서적 Mary of Guise Collins 1977
[5] 서적 Medieval and Early Modern Representations of Authority in Scotland and the British Isles Routledge 2016
[6] 서적 Mary of Guise Collins 1977
[7] 서적 Annals of Glasgow, comprising an account of the public buildings, charities, and the rise and progress of the city https://archive.org/[...] Printed by James Hedderwick 1816
[8] 서적 History of the county of Ayr: with a genealogical account of the families of Ayrshire https://archive.org/[...] J. Dick 1852
[9] 서적 Illustrations of British History London 1791
[10] 웹사이트 England's Immigrants 1330–1550, Matthew (...) (35665) https://www.englands[...] 2022-07-22
[11] 서적 Mary of Guise in Scotland Tuckwell: East Linton 2002
[12] 서적 History of Scotland Edinburgh 1879
[13] 간행물 HMC 9th report part 2, Alfred Morrison London 1884
[14] 서적 Inventaires de la Royne Descosse Edinburgh 1863
[15] 서적 Calendar of State Papers Scotland Edinburgh 1900
[16] 편지 Original Letters London 1827
[17] 서적 History of the Kirk of Scotland https://archive.org/[...] Edinburgh 1842
[18] 서적 Calendar State Papers Scotland Edinburgh 1903
[19] 서적 With Thy Towers High: The Archaeology of Stirling Castle and Palace Historic Scotland 2015
[20] 서적 The Lost Tudor Princess: A Life of Margaret Douglas, Countess of Lennox
[21] 서적 The Lost Tudor Princess: A Life of Margaret Douglas, Countess of Lennox
[22] 서적 The Ancestry of Charles II, King of England American Society of Genealogists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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