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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잠녀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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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주잠녀항쟁은 일제강점기 제주 해녀들이 경제적 착취에 저항하여 일으킨 항쟁이다. 19세기 말부터 일본의 어업 침탈로 제주 어장이 황폐화되면서, 해녀들은 한반도 및 일본, 러시아 등지로 출가하여 조업했다. 하지만, 해녀들은 열악한 노동 환경과 부당한 대우, 경제적 착취에 시달렸고, 특히 해녀조합의 어용화와 지정상인들의 횡포는 항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사회주의와 계몽 운동의 영향으로 민족 의식이 성장하면서, 1930년대 초 하도리 등지에서 잠녀들을 중심으로 항쟁이 발발했다. 항쟁은 제주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많은 해녀들이 체포되었고, 관련자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제주 잠녀들의 억압받는 현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으며, 소설 《바람 타는 섬》을 통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2. 배경

2. 1. 제주도의 경제와 해녀

전통적으로 제주에서 잠녀(潛女)는 해녀를 가리키는 말로, 바다에 들어가 전복 등의 해산물을 채취하는 여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어업은 전통적으로 목축업과 함께 제주 지역 경제의 중요한 축이었다.[5] 1890년대 이후 일본의 대한 어업 침탈로 제주 어장이 황폐화되면서, 제주 해역 및 한반도 육지부 남해안에서 조업하던 잠녀들은 경남뿐 아니라 한반도 북부, 중국 다롄(大連)과 칭다오(靑島), 일본 및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해안까지 조업을 나가게 되었다. 이러한 외부로의 조업 활동을 출가(出稼)라고 부른다.[5] 1910년 당시 2,500명이었던 잠녀 출가자는 1930년대에는 4천 명으로까지 늘어났다. 1929년 잠녀 출가 인원은 3,500명으로, 잠녀의 그 해 어획고는 50만 원가량으로 제주도 전체 작업 인원 7,300여 명의 어획고보다 두 배가량 많았다.[5] 1932년 당시 해녀조합에 등록된 제주 잠녀 총 8,862명 가운데 전체의 57%인 5,078명이 출가잠녀였는데, 이는 일본(1,600명)이나 한반도 육지부(3,478명)보다도 더 많은 수치였다.[5]

1919년 10월, 김태호(제주 조천리) 등 제주 유지들이 발기해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을 조직하였다.[5] 1920년 4월 16일 정식 발족한 이 조합은 조합장으로 일본인 다나카 한지(田中半治), 이사로는 김근저(金根著, 이도리), 감사로는 김홍익(金泓翊, 성내리), 홍순용(이도리), 김태호 등이 맡았다.[5] 제주읍 삼도리에 본부를 두고 면마다 12개의 지부가 창설되었으며, 출가잠녀 보호를 위한 출장소도 부산과 목포, 여수에 세워졌다.[5] 제주 잠녀가 생산한 물건을 공동으로 판매하고 중개 및 자금 지원을 위해 5월 21일에는 조합원 총대회가 이틀간 개최되어, 3만 원의 자금을 식산은행 제주지점에서 대출받았다.[5] 어로품은 조합의 부산출장소와 제주도내의 각 지부에서 공동경매로 붙이기로 하였고, 부산에 있던 조선해조주식회사를 인수해 공동판매를 조합이 직접 관할했다.[5] 제주 일원의 잠녀 8,200명이 이 해녀조합에 가입하였고, 1921년에 9만 원이던 공동판매고는 22년에 19만 원, 23년에 22만 원, 24년에 30만 원으로 늘어나는 등 매출이 크게 증가했다.[5]

2. 2. 해녀들의 수난과 경제적 착취

제주 잠녀들은 경제적 소득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혹독한 노동 환경과 부당한 대우에 시달렸다.[6] 4월부터 9월까지 이어지는 조업 기간 동안, 현지 어민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1912년 울산에서는 어민들과 제주 출가 잠녀 간의 조업 갈등으로 충돌이 발생했고(울산소요사건), 이후 제주 잠녀들은 현지 어업조합에 가입하거나 입어료를 내야만 했다.[6] 1925년 2월, 전남과 경남 당국 간 협정으로 잠녀들은 현지 어업조합 가입 의무는 없어졌지만, 생산물의 절반을 일본인이 경영하는 해조회사에 팔아야 했고, 입어료는 5할 이상 인상되었으며, 출가 지역도 부산, 동래, 울산으로 한정되었다.[7]

잠녀들이 채취한 해조류는 객주(客主)에게 매매되었는데, 이들 객주는 대부분 한반도 육지나 일본 출신이었다. 이들은 출어 전 '준비자금' 명목으로 잠녀들에게 고리대 자금을 빌려주고, 물품 대금 지급을 미루는 방식으로 잠녀들을 경제적으로 예속시켰다.[8] 객주들은 일본인 자본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잠녀들의 해산물을 헐값에 사들여 일본인이 경영하는 해조회사에 팔아넘겼다.[9] 잠녀들은 객주와 잠녀 사이의 중계료 명목으로 거간꾼들에게 거간료까지 지불해야 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 제주도사가 해녀조합장을 겸임하면서 해녀조합은 어용화되었다. 조합이 지정한 지정상인이 상권을 독점하고, 잠녀들이 캐지도 않은 해산물을 '선구전제' 방식으로 헐값에 판매하도록 강요했다. 잠녀들은 시세와 상관없이 지정 가격을 따라야 했고, 이윤마저도 해녀조합과 지정상인에게 넘겨야 했다. 교육 기회가 부족했던 잠녀들은 부당한 수수료와 선주들의 교제비까지 부담하며 배급물자를 빼앗기는 등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었고, 이는 잠녀항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10] 1927년 5월 11일, 추자도 예초리에서는 어업조합 간부들의 비리에 반발한 어민들이 '공동 판매 폐지'와 '조합장 처벌'을 요구하며 어업조합으로 난입하는 사건(추자도 예초리 어민항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2. 3. 사회주의와 계몽 운동 그리고 민족 교육

1920년대 초 제주에서 일제 당국은 1면 1교의 교육 정책으로 면마다 하나의 보통학교를 두었다. 이 보통학교에는 남자만이 입학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교육 내용 또한 황민화와 일본인화에 기본 방침을 둔 것이었다.[11] 민립학교가 민족교육의 온상으로 몰려 탄압받던 상황에서 1920년대와 1930년대 제주의 민족운동은 야학(夜學)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11] 문무현, 부대현, 김태륜 등 1930년대 초 일본의 노동 현장에서 돌아온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농한기나 야간을 이용해 이루어지던 야학의 강사로써 마을 향사에서 한글, 산수를 가르치며 아울러 민족의식을 가르쳤다.[11]

구좌면 하도리와 종말리, 우도리의 경우 지역 경제를 출가잠녀들의 수입에 의지하고 있었을 만큼 잠녀의 수가 많았는데, 야학에서 잠녀들은 농민독본, 노동독본 등의 계몽서를 배우고, 한글과 한문 뿐 아니라 저울 눈금 읽는 법도 배웠다.[11] 잠녀항쟁을 주도한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등은 하도강습소(하도보통학교 야간부)의 제1기 졸업생 이었다.[11] 야학 뿐 아니라 개량서당 또한 민족교육의 산실 역할을 했는데, 잠녀항쟁의 또 다른 주역인 강관순, 신재홍 등도 우도의 개량서당 영명의숙(永明義塾)의 교사였다.[12]

이러한 교육을 통해 식견이 높아지게 되면서, 자신들이 여지껏 당해온 부당한 착취 내용이나 일본 지배의 부당함을 알게 된 잠녀들의 분노는 폭발하였고, 봉기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3. 제주 해녀 항쟁의 전개

3. 1. 항쟁의 발발

3. 2. 항쟁의 확산

3. 3. 일제의 탄압과 검거

4. 항쟁 이후

일본은 제주에서 일어난 잠녀항쟁의 배후를 찾아 제주를 뒤졌고, 봉기 배후로써 지하조직 혁우동맹을 찾아내 지목하고 신재홍(우도리) 등 제주도내의 항일 인사 34명을 잡아 가두었다. 신재홍은 혁우동맹을 통해 잠녀항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는데 절대적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주목받았다.[13] 5월 2일에는 강창보(당시 31세, 용담리) 등이 투옥됐는데, 강창보는 투옥 4일만인 5월 6일에 제주경찰서를 탈출해 서귀포에 있던 이도백(가파리)의 집에 숨었고 강병희(당시 30세, 삼양리)가 그를 가마니에 싸서 화물처럼 꾸미고 일본 선박 후시키마루(伏木幻)에 태워 일본으로 피신시켰다(강병희는 이 일로 검거되어 징역 8월 복역).[13]

이 달에 일본 오사카(大阪)에서는 제주 출신 조선인 한상호(일도리), 김성돈(한림리)이 제주해녀사건희생자구호협의회를 조직하였다.[13]추자도에서도 어민들이 집단으로 봉기했는데, 일본 어부들의 유자망 어업으로 연안 어족들이 고갈된 것에 따른 생존권 저항이었다. 김봉수(당시 35세, 영흥리), 박병석(당시 34세, 영흥리) 외 11명이 유죄 선고를 받아 복역하였다.[13]

6월 5일, '''신재홍 외 23명에게 유죄가 선고되었다.'''[13]

4. 1. 재판과 처벌

일본은 제주에서 일어난 잠녀항쟁의 배후로 지하조직 혁우동맹(革友同盟)을 지목하고 신재홍(우도리) 등 제주도내의 항일 인사 34명을 잡아 가두었다. 신재홍은 혁우동맹을 통해 잠녀항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는데 절대적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주목받았다.[13] 5월 2일에는 강창보(당시 31세, 용담리) 등이 투옥됐는데, 강창보는 투옥 4일만인 5월 6일에 제주경찰서를 탈출해 서귀포에 있던 이도백(가파리)의 집에 숨었고 강병희(당시 30세, 삼양리)가 그를 가마니에 싸서 화물처럼 꾸미고 일본 선박 후시키마루(伏木幻)에 태워 일본으로 피신시켰다(강병희는 이 일로 검거되어 징역 8월 복역).[13]

같은 달 일본 오사카(大阪)에서는 제주 출신 조선인 한상호(일도리), 김성돈(한림리)이 제주해녀사건희생자구호협의회를 조직하였다.[13]추자도에서도 어민들이 집단으로 봉기했는데, 일본 어부들의 유자망 어업으로 연안 어족들이 고갈된 것에 따른 생존권 저항이었다. 김봉수(당시 35세, 영흥리), 박병석(당시 34세, 영흥리) 외 11명이 유죄 선고를 받아 복역하였다.[13]

6월 5일, 신재홍 외 23명에게 유죄가 선고되었다.[13]

4. 2. 국내외 지원

일본 오사카(大阪)에서는 제주 출신 조선인 한상호(일도리), 김성돈(한림리)이 제주해녀사건희생자구호협의회를 조직하였다.[13] 추자도에서도 어민들이 집단으로 봉기했는데, 일본 어부들의 유자망 어업으로 연안 어족들이 고갈된 것에 따른 생존권 저항이었다.[13] 김봉수(당시 35세, 영흥리), 박병석(당시 34세, 영흥리) 외 11명이 유죄 선고를 받아 복역하였다.[13]

5. 역사적 의의와 평가

6. 관련 작품

현기영의 소설 《바람 타는 섬》은 창작과비평사에서 1989년 출간되었으며, 제주잠녀항쟁을 최초로 소설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90년 제5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6. 1. 문학

현기영의 소설 《바람 타는 섬》은 창작과비평사에서 1989년 출간되었으며, 제주잠녀항쟁을 최초로 소설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90년 제5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참조

[1] 뉴스 동아일보 기사 동아일보 1932-01-26
[2] 뉴스 동아일보 기사 동아일보 1932-01-28
[3] 뉴스 동아일보 기사 동아일보 1932-01-29
[4] 뉴스 동아일보 기사 동아일보 1932-05-18
[5] 문서 추자도 어업조합 설립 관련 내용 1919-03-21
[6] 서적 제주도지 제주특별자치도 2006
[7] 서적 제주도지 (같은 책) 제주특별자치도 2006
[8] 서적 제주도지 (같은 책) 제주특별자치도 2006
[9] 서적 제주도지 (같은 책) 제주특별자치도 2006
[10] 서적 제주도지 (같은 책) 제주특별자치도 2006
[11] 서적 제주도지 (같은 책) 제주특별자치도 2006
[12] 서적 제주도지 (같은 책) 제주특별자치도 2006
[13] 뉴스 동아일보 기사 동아일보 1932-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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