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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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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 양자는 적 출신으로 조간자의 노예로 시작하여 능력을 인정받아 조씨 가문의 후계자가 된 인물이다. 그는 지백과의 갈등, 대나라 정복, 진양 전투를 겪으며 조씨 가문의 수장이 되었고, 진나라 삼분과 전국 시대의 시작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양자는 의리와 은혜를 중시하는 인물로 평가받으며, 33년간 통치하다 사망하여 '양자'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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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양자
기본 정보
이름조 양자 (趙襄子)
본명성: 영(嬴)
씨: 조 (趙)
이름: 무휼 (毋卹 또는 無恤)
시호양자 (襄子)
작위조씨 종주
비자 남작 (자)
재위 기간기원전 458년 – 기원전 425년
출생알 수 없음
사망기원전 425년
아버지조 간자(趙簡子)
배우자알 수 없음
자녀조 환자(趙桓子)
가문영 (嬴)
정치
이전조 간자(趙簡子)
이후조 환자(趙桓子)

2. 초기 생애

오욱(毋恤)은 본래 적(翟) 출신의 노예였으나, 뛰어난 능력으로 조간자의 인정을 받아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상산(常山, 현재의 형산)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파하여 대나라 정복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등 비범함을 보였다. 또한, 진나라의 권력자였던 지백과 초기부터 갈등을 겪었으나, 자제력을 발휘하며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1]

2. 1. 출생과 성장

오욱(毋恤)은 적(翟) 출신으로, 조간자(趙簡子)의 노예 신분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역시 적족 출신으로 신분이 낮았고, 무휼은 막내아들이었다. 조간자가 당대 유명한 관상가였던 고포자경에게 아들들의 관상을 보게 했을 때, 고포자경은 무휼만이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예언했으나, 조간자는 낮은 신분과 서열 때문에 처음에는 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무휼의 능력은 조씨 가문의 고문인 고부자청(姑布子卿)에게 인정받았고, 고부자청은 그를 조간자에게 추천했다. 점차 무휼은 조간자가 가장 총애하는 아들이 되었다.

훗날 조간자는 아들들을 시험하기 위해 "내 보물의 부적(부, 符, 군사적 상징물)을 상산(常山, 현재의 형산) 정상에 숨겨두었으니, 먼저 찾아오는 자에게 상을 주겠다"고 말했다. 다른 아들들은 산을 뒤졌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무휼만이 돌아와 "보물을 찾았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조간자가 무엇인지 묻자, 무휼은 "상산 정상에 서면 대나라를 내려다볼 수 있는데, 이는 대나라를 차지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라고 답했다. 무휼은 상산의 전략적 지형이 대나라를 상대로 한 군사 작전의 기반이 될 수 있음을 간파했고, 대나라 영토 자체가 진정한 보상임을 이해했던 것이다.

이 일로 조간자는 무휼의 통찰력과 잠재력을 인정하여, 마침내 본래 후계자였던 맏아들 백로(伯魯)를 폐하고 막내인 무휼을 후계자로 삼았다. 맏형 백로는 이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동생 무휼을 지지하며 도왔으며, 무휼 또한 어릴 적 자신을 아껴준 형을 존경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백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2. 2. 지백과의 갈등

기원전 464년, 지백이 정나라를 공격하자, 조양자(오욱)는 조간자의 명을 받아 그를 돕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러나 정나라 공격 중 술에 취한 지백은 술병으로 조양자를 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조양자의 부하들은 분노하여 지백을 죽이자고 청했지만, 조양자는 "내 아버지가 나를 보낸 이유는 내가 자제력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이를 만류했다.[1] 이후 지백은 조간자에게 조양자를 폐위할 것을 요구했으나, 조간자는 이 요청을 거절했다.

3. 조씨 가문의 수장

기원전 458년, 조 양자는 아버지 조앙(趙鞅)의 뒤를 이어 조씨(趙氏)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곧이어 누이의 남편인 대나라(代) 군주를 연회에서 살해하고 대나라를 병합했으며, 이 땅은 죽은 형 백로(伯魯)의 아들인 조카 조주(趙周)에게 봉토로 주었다.

기원전 454년, 지(智)씨, 조(趙)씨, 한씨, 위씨 네 가문은 과거 범(范)씨와 중항(中行)씨 가문이 소유했던 영토를 공동으로 분할했다. 이 일로 진(晉)나라의 추공과 갈등이 생겼고, 네 가문은 추공을 공격하여 몰아냈다. 이후 지요(智瑤, 지백)가 실권을 잡고 진(晉)나라의 의공을 옹립한 뒤 다른 세 가문에게 영토 할양을 요구했으나 조 양자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지백은 한씨, 위씨와 연합하여 조씨의 본거지인 진양(晉陽)을 공격했다. 그러나 전투 중 조 양자는 재상 장맹(張孟)을 보내 한씨와 위씨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세 가문 연합군의 반격으로 지백은 패사하고 지씨 가문은 멸족했다.

진양 전투의 승리로 조씨는 진(晉)나라 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으며, 이는 춘추 시대가 끝나고 전국 시대가 시작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 양자는 33년간 조씨 가문을 이끌다가 사망했으며, 그의 지위는 조주의 아들인 조 헌후 환(浣)에게 계승되었다.

3. 1. 대나라 정벌

기원전 458년, 조 양자는 조씨(趙氏)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누이와 혼인한 대나라(代)의 군주를 연회에 초청하여 암살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양자는 아버지 조앙(趙鞅)의 상복을 벗기도 전에 거짓으로 연회를 열어 매형인 대나라 왕을 살해했다고도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양자의 누이, 즉 대나라 왕비는 남편의 비참한 죽음에 동생을 강하게 비난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양자는 대나라를 정복하여 조씨 세력하에 두었다. 정복한 대나라 땅은 죽은 형 백로(伯魯)의 아들인 조주(趙周, 또는 자주 子周)에게 봉토로 주어 다스리게 했다. 이는 양자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아껴준 형 백로에 대한 예우이자, 그 아들에게 영예를 돌려 은혜에 보답하려는 의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3. 2. 진양 전투

기원전 454년, 지(智), 조(趙), 한, 위 네 가문은 과거 범(范)씨와 중항(中行)씨 가문이 소유했던 영토를 공동으로 분할했다. 이 결정에 진(晉)나라의 추공은 분노하여 제와 노에 네 가문을 토벌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오히려 네 가문 연합의 반격을 받아 국외로 도망치던 중 사망했다. 이후 지요(智瑤, 지백)는 진(晉)나라의 의공 교(驕)를 새로운 군주로 옹립하고, 진나라 육경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세력이 강성해진 지백은 조씨, 위씨(위구, 위환자), 한씨(한호, 한강자)에게 영토 할양을 요구했다. 위씨와 한씨는 지백의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조양자(무휼)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이에 지백은 한씨, 위씨와 연합하여 조씨의 본거지인 진양(晉陽)을 공격했다.

전투 초기, 지백은 수공(水攻)을 이용하여 진양성을 물에 잠기게 하여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위기 상황에서 조양자는 재상 장맹(張孟)을 비밀리에 보내 한호와 위구를 설득했다. 장맹은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唇亡齒寒)는 논리로 "지요는 탐욕스러우니 조씨가 멸망하면 다음은 당신들 차례가 될 것"이라며 설득했다. 설득이 성공하여 한씨와 위씨는 지백을 배신하고 조씨와 연합하기로 했다.

기원전 453년, 조씨, 한씨, 위씨 연합군은 지백의 군대를 기습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이 과정에서 지백은 죽음을 맞이했다. 이 전투의 결과 지씨 가문은 멸족했다. 진양 전투의 승리로 조씨는 진나라 내 최강 가문으로 부상했고, 진나라는 사실상 조, 위, 한 삼가(三家)로 분열되는 결정적 계기를 맞았다. 이 사건은 춘추 시대의 종결과 전국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분기점으로 여겨진다.

전투가 끝난 후, 지백의 옛 가신이었던 예양은 주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두 차례나 조양자 암살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예양은 조양자 앞에서 자결했으며, 그의 이야기는 《사기》 〈자객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4. 진나라 삼분과 전국시대의 시작

기원전 454년, 지씨, 조씨, 한씨, 위씨 네 가문은 과거 범씨와 중항씨가 소유했던 영토를 나누어 가졌다. 이 결정은 진나라 추공의 분노를 샀고, 추공은 제나라와 노나라에 네 가문을 토벌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오히려 네 가문은 힘을 합쳐 추공을 공격했고, 추공은 제나라로 피신하던 중 사망했다. 이후 지요는 교(驕)를 새로운 군주(진 의공)로 세웠다.

권력을 잡은 지요는 조씨, 한씨, 위씨에게 영토를 요구했으나, 조 양자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이에 지요는 한씨, 위씨와 연합하여 조씨를 공격하고 진양(晉陽)을 포위했다. 전투 중 조 양자는 재상 장맹(張孟)을 보내 한씨와 위씨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두 가문은 조씨 편으로 돌아섰다.

결국 지씨 가문은 멸망하고, 조씨, 위씨, 한씨 세 가문은 지씨의 영토를 나누어 가졌다. 이로써 조씨는 진나라 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이 사건은 진나라가 사실상 조, 위, 한 세 나라로 분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전국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조 양자는 33년간 조씨 가문을 이끌다가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에는 백루의 손자이자 자주의 아들인 조헌후 환(浣)이 뒤를 이었다.

5. 평가 및 유산

조양자는 형 백로(백루)의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하려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죽은 형 백로의 아들 조주(자주)에게 자신이 정복한 대나라 영토를 봉해주었으며,[2] 이후 조주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즉 조양자에게는 종손이 되는 조환을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2] 조양자는 자신의 아들들에게는 조환을 군주로서 잘 보좌하라고 당부했다고 전해진다.[2]

기원전 425년 조양자가 세상을 떠나자 '양(襄)'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후세 사람들은 그를 '''조양자'''라 부르게 되었다.[2]사기』 「'''조세가'''」에 따르면, 조양자 사후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에 불만을 품고 종손인 조환을 내쫓았다. 그리고 장남인 조가를 새로운 당주로 세웠다.[2] 그러나 기원전 424년 조가가 죽자, 나라 사람들(국인)은 조가의 행동이 조양자의 뜻을 거스른 불효라 비난하며 조가의 아들과 동생들을 처형했다. 그리고 다시 조환을 당주로 맞아들여 결국 조양자의 유지를 지켰다.[2]

5. 1. 예양의 복수 시도

지요`(지백)`를 멸망시킨 후, 조양자는 지백의 옛 신하였던 예양에게 암살 위협을 받게 된다. 예양은 주군이었던 지백의 원수를 갚기 위해 조양자를 노렸으나, 두 번의 암살 시도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예양은 조양자 앞에서 자결하였다. 이 이야기는 《사기》 「자객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6. 현대적 재조명

조 양자를 소재로 한 현대 소설 작품들이 창작되었다.


  • 미야기야 마사미츠, 『매의 성』(鷹の城일본어) - 소설집 『맹하의 태양』(猛夏の太陽일본어) 수록, 분게이슌주, 1991년 (ISBN 4167259052).
  • 츠카모토 세이시(塚本靑史일본어), 『열과 조양자전』(烈火・趙襄子伝일본어), 일본방송출판협회(NHK출판), 2004년 (ISBN 4140054468).

참조

[1] 인용구 君所以置毋卹,為能忍
[2] 서적 『世本八種』より。『史記』趙世家では、無恤の弟と記さ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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