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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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국 시대는 춘추 시대를 잇는 중국 역사 시기로, 기원전 476년 또는 기원전 403년을 시작점으로 본다. 주나라의 봉건 제도가 붕괴되고, 여러 제후국들이 경쟁하며 7개의 강대국(전국 칠웅)이 부상했다. 위나라의 패권, 오기의 개혁, 제나라와 진나라의 성장, 합종연횡 전략 등이 전개되었으며, 철기 보급과 경제 발달, 제자백가의 등장 등 사회적 변화가 있었다. 결국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전국 시대는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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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시대 | |
---|---|
지도 | |
기본 정보 | |
시대 이름 | 전국 시대 |
중국어 간체 | 战国时代 |
중국어 정체 | 戰國時代 |
병음 | Zhànguó shídài |
웨이드-자일스 | Chan4-kuo2 Shih2-tai4 |
광둥어 예일 | Jàn'gwó shŕdài |
광둥어 Jyutping | Zin3 gwok3 si4 doi6 |
타이완어 병음 | Jhànguó shíhdài |
민난어 | Tsiàn-kok sî-tāi |
객가어 | Chhan-koet sṳ̀-thoi |
고대 중국어 | 'tar-s [C.q]ʷˤək, 'tar-s [d]ə (~ [d]əʔ) lˤək-s |
일본어 | 戦国時代 |
역사 | |
시기 | 기원전 475년 ~ 기원전 221년 |
이전 시대 | 춘추 시대 |
이후 시대 | 진나라 |
주요 사건 | 합종연횡, 장평 전투, 각 제후국들의 흥망성쇠, 진나라의 통일 |
정치 | |
주요 국가 | 연 조 한 위 제 초 진 |
기타 국가 | 월 노 송 정 중산 주 |
문화 | |
사상 | 유가 묵가 도교 법가 종횡가 음양가 |
군사 | 병법 발전 철기 무기 사용 기병의 도입 대규모 보병 전투 |
기타 | |
관련 문서 | 중국의 역사 |
2. 기준점
전국 시대를 춘추 시대와 구분하는 기준은 역사가마다 조금씩 다르다. 우선 전국시대의 어원이 된 전국책은 전국시대 나라들의 일화를 모은 책이라 특별한 기준점이 없다. 다만 그중 동주책 1권의 첫 이야기가 주나라 천자의 상징물인 구정을 제후국인 진나라와 제나라가 요구하고 주나라 대부 안율이 이를 지켜내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후 사마천은 자신의 역사서 사기의 전국시대 역사표인 육국연표 서문에서 제나라의 전상이 제 간공 강임을 살해하고 진(晉)나라에서는 대부 조(趙), 위(魏), 한(韓)씨가 실권자 지백을 공격해 제거했는데 천자국 주나라가 이를 묵인하고, 후대에는 제나라와 진나라의 제후를 끌어내리고 스스로 제후가 되었는데 이것을 주나라가 공인해준 사건을 주목해 육국연표의 시작을 진나라 내전이 있었던 진나라 여공공의 즉위년(기원전 476년)을 기준으로 한다. 자치통감에서도 사마천처럼 지백사건에 주목해 진나라의 멸망을 전국시대의 기준점으로 삼았다(기원전 422년). 개별 사건마다 간극이 넓기는 하지만 공통적인 부분은 기원전 400년대에 주나라 천자의 권위가 심각하게 실추되고 제후국에 대한 미약한 통제력마저 완전히 상실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원전 771년 서주 궁정의 동쪽으로의 이동은 춘추 시대의 시작을 알린다. 전국 시대를 개막한 단일 사건이나 시발점은 없다. 이 시대의 정치적 상황은 춘추 시대의 특징이기도 했던 정복과 병합의 역사적 추세의 정점을 나타낸다. 결과적으로, 이 시대의 시작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제시된 시작 시점은 다음과 같다.
시점 | 사건 및 설명 |
---|---|
기원전 481년 | 송나라 시대의 역사가 여조전(呂祖謙)이 제시한 시점으로, 이 해는 『춘추좌씨전』의 끝을 의미한다. |
기원전 476~475년 | 『사기』(기원전 91년경 저술)의 저자인 사마천은 이 시기를 주 원왕의 즉위년으로 설정했다. |
기원전 453년 | 진나라의 삼분으로 한, 조, 위 세 나라가 형성되었다. 이 세 나라는 전국칠웅 중 세 나라였다. |
기원전 441년 | 주 애왕을 시작으로 주나라 왕의 즉위년이다. |
기원전 403년 | 주 궁정이 공식적으로 한, 조, 위를 국가로 인정한 해이다. 『자치통감』(1084년)의 저자 사마광은 이 시기를 주나라 권위 쇠퇴의 상징으로 보았다. |
한·위·조가 제후로 칭해진 것은 단순한 하극상이 아니라, 주 왕이 이를 인정하고 종법제를 번복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이는 주 왕조의 권위가 떨어지고 봉건제도에 균열이 생겨 결국 붕괴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얼마 후 제나라에서도 강씨(姜氏) 대신 전씨(田氏)가 지배하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각 제후들은 주나라로부터 정신적 독립을 추구하며 스스로 왕을 칭했다. 춘추 시대 초부터 주나라의 권위에 불복하던 초나라도 마찬가지였다. 140여 개에 달했던 도시국가들은 대부분 7개의 강대국 중 하나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3. 주나라 봉건제도의 붕괴
처음에는 위나라가 강성했다. 문후와 혜왕은 인재를 널리 구하고 대규모 관개사업을 벌였으며, 지배 지역을 군현화하는 데 힘썼다. 이후 제나라가 패권을 잡았지만, 곧 변경의 진나라와 연나라가 강대해져 세력을 확장하면서 중원은 진·초·연·제·한·위·조의 7국이 대립하는 형세가 되었다. 그중 진나라는 효공 때 상앙의 변법으로 부국강병을 이루어 다른 나라를 압도할 힘을 갖게 되었다. 합종연횡과 4군(君)의 활약도 이 시기에 나타났다. 결국 6국은 진나라에 굴복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가 출현하게 되었다.
전국 시대는 봉건제에 따른 읍제국가가 해체되고 중앙집권적인 군현제에 의한 고대 통일국가가 형성되는 과도기였다. 이 시기에는 사 계급 출신의 관료가 실제 정치를 장악하고, 그 최고 지위에는 상(相)이 임명되었다. 상은 군주를 보좌하여 정치 전반을 총괄했으며, 세습되지 않았다. 군제(軍制)에서도 장군이라는 직위가 신설되어 전쟁 시 군주가 임명했다. 이는 서주부터 춘추 시대까지 대부가 세습적으로 정치·군사적 권리를 가졌던 것과 달리, 정치와 군사가 분리되고 필요에 따라 군주가 책임자를 임명하는 방식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군주권이 강화되는 한편, 능력에 따른 관료군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는 다른 나라 출신들이 관료로 적극 채용되었다. 내정개혁을 단행한 상앙, 연횡설(連衡說)을 주장한 장의, 시황제의 승상이 된 여불위 등이 모두 그러했다. 춘추 시대 말기에 등장한 공자는 노나라의 고관이 되어 개혁에 실패한 후, 여러 나라를 다니며 자신의 정치학설을 설파했다. 이는 당시 기존 질서에서 벗어나 중원 전체의 공감대와 유대감을 조성하는 공통된 문화·사상이 형성되었기에 가능했다.
동주 왕조는 기원전 5세기경부터 몰락하기 시작하여,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자체 군사력 대신 동맹국들의 군대에 의존해야 했다. 수많은 작은 정치체들이 초, 한, 진, 위, 연, 제, 조 등 일곱 개의 주요 국가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각 국가 통치자들의 독립 의지로 인해 동맹 관계에 변화가 생겼고, 기원전 535년부터 286년까지 수많은 전쟁이 발생했다. 승리한 국가는 중국 전체를 지배하고 통제하게 되었다.[1]
서주 왕조의 봉건 국가 시스템은 기원전 771년 주 왕실이 낙양으로 천도하고 권력과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큰 변화를 겪었다. 춘추 시대에는 몇몇 국가들이 다른 국가들을 희생하여 권력을 얻었고, 후자는 중앙 정부로부터 정통성이나 보호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전국 시대에는 많은 통치자들이 다른 국가를 정복하고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천명을 주장했다.[2]
패권을 위한 투쟁은 결국 진, 초, 진, 연, 제와 같은 몇몇 큰 국가들이 지배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중원의 작은 국가들은 그들의 위성국이나 조공국이 되었다. 오와 월과 같은 주요 국가들도 남동쪽에 존재했다. 춘추 시대의 마지막 수십 년은 진과 초 사이의 평화 협상으로 각자의 영향권이 확립되면서 안정성이 증가했다. 이러한 상황은 진이 한, 조, 위의 세 집으로 분열됨으로써 끝났고, 이는 일곱 개의 주요 전국 시대 국가로 이어졌다.
진(秦)의 소왕 군대는 기원전 256년에 난왕을 패배시키고 서주를 정복하여 구鼎을 차지함으로써 상징적으로 천자(天子)가 되었다.
소왕의 긴 치세는 기원전 251년에 끝났다. 그의 아들 소문왕은 노령으로 즉위 3일 만에 사망하여, 아들 장향왕이 계승했다. 새로운 진왕은 서주 멸망 7년 후 동주(東周)를 정복했다. 이로써 명목상 중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통치한 주(周)나라는 800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사마천은 동주 궁정의 최후에 대해 서로 다른 기록을 남겼다. 제4장(주본기)은 "이로써 주나라의 제사는 끝났다"라고 끝나지만, 제5장(진본기)에서는 "진나라는 그들의 제사를 금지하지 않았고, 주공에게 양인(陽人)에 땅을 할당하여 조상 제사를 계속할 수 있도록 했다"라고 적고 있다.
춘추 시대에는 나라의 제사를 중단하면 나라의 조상으로부터 저주를 받는다는 생각 때문에 나라를 점령해도 완전히 멸망시키는 경우는 드물었고, 멸망해도 부흥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국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러한 관념은 사라졌고, 전쟁에서 지는 것은 나라의 멸망으로 직결되었다. 이러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점차 7개의 강국으로 수렴되어 갔는데, 이를 전국 칠웅이라 부른다. 춘추 시대에는 명목상 주왕의 권위가 남아 있었지만, 전국 시대가 되면서 칠웅의 군주들이 각각 "왕"을 칭하게 되었고(단, 초나라 군주는 이전부터 왕이었다), 주왕의 권위는 상실되었다.
전국 시대 초기의 제후국은 수십 개가 있었고, 그중 제, 진, 초, 월 4개국의 국력이 강하여 천하는 4분의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춘추 시대의 장기적인 전쟁으로 진나라 군주는 춘추 말기에 괴뢰가 되고, 경이나 대부가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춘추 말기, 육경의 지씨, 범씨, 중항씨, 한씨, 조씨, 위씨가 유력했다. 범씨와 중항씨가 멸망되자[35], 봉토는 다른 네 집안에서 분배되었다.[36] 지씨의 당주 지요가 기원전 455년에 한씨·위씨 두 집안과 조씨를 멸망시키려고, 조무실의 근거지 진양을 수공했으나,[37][38] 한씨·위씨의 배신을 당했다. 기원전 453년, 지씨가 멸망했다.[39] 지씨의 땅은 분배되었다. 세 집안은 진 공실의 땅과 백성도 분배했다.[40] 이것을 삼가분진이라고 한다.
제에서는 경족으로 소국 진의 망명 공자인 진완의 자손인 전항이 보씨와 연합하여 란씨와 고씨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멸망시켰다.[41][42] 마침내 국군을 추방하고 자신이 국군이 되었다.[43][44][45]
연은 국력이 상승했고, 진은 중흥했다. 약소한 제후국은 병합되거나 속국이 되었다. 전국 시대 중기에는 주요한 대제후국은 한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30년), 조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8년), 위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5년), 초 (? - 기원전 223년), 연 (기원전 1100년경 - 기원전 222년), 제 (기원전 386년 - 기원전 221년), 진 (? - 기원전 206년)의 7개국이 되었다. 이것을 전국 칠웅이라고 한다.
소국으로는 동주, 송, 위, 중산, 노, 팽, 주 등이 존재하고 있었고, 송이나 중산과 같은 나라들도 왕호를 주장하고 있었으며,[46] 제국에서의 중요도도 높았다는 지적이 있다. 진의 속국이 된 위를 제외하고는 전국 칠웅에 의해 병합되었다.
전국 시대 초기의 패권을 장악한 것은 진(晉)에서 분리된 여러 나라 중 하나인 위(魏)였다. 주(周) 왕조로부터 제후로 정식 인정받았을 당시 위의 문후는 적극적으로 인재를 등용하여 이극·오기 등을 기용하고 중산국의 도읍을 함락시키는 등 위를 최강국으로 만들었다. 아들 무후 시대에도 패권은 이어졌고, 손자 혜왕 시대에는 제후들 중 최초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등 강세를 자랑했다.
위가 강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위의 지배 영역이 주(周)대부터 문화의 중심지로 여겨졌던 중원의 중앙이었고, 가장 개발이 진행된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변 제후국으로부터 침략을 받기 쉬운 지역이었고, 개발의 여지가 없다는 점도 있었다. 후방에 광대한 미개발 지역을 가진 제(齊)나 진 등이 부상하면서 위는 패권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된다.
기원전 256년, 소양왕은 장당에게 명하여 계속 존속하던 정을 공격하여 수도를 함락시켰다. 같은 해 12월, 조나라의 한단을 공략 중이던 왕걸에게 증원군을 보냈으나, 한단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후퇴하여 분성 교외의 군대에 의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에 있던 장당에게 조나라 공략을 명령하였고, 조나라의 영신중 땅을 함락하는 데 성공하였다. 같은 시기에 양패에게 명하여 한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한나라의 양성과 부서 땅을 차지하였다.
이 해에 주(周)의 난왕과 왕실 분가인 서주(西周)의 문공(당시 주나라는 분가인 주공 가문이 동서로 분열되어 있었다)이 촉나라와 적대하여 제후들과 연합하여 촉나라를 공격하였다. 소양왕은 양패에게 명하여 서주를 공격하게 하였다. 서주 문공은 항복하여 촉나라에 투항하고 머리를 조아려 죄를 사과하며, 영토와 백성을 촉나라에 바쳤고, 그 직후 난왕은 죽었다. 영토와 백성을 잃은 주나라는 실질적으로 멸망하였다. 이듬해 기원전 255년에 서주의 백성은 남아 있던 동주 군주의 영토로 피난하였고, 주나라에 전해 내려오던 구정은 촉나라에 징수되었다. 이로써 800년 동안 존속했던 주나라는 멸망하였다[95]. 남아 있던 동주 군주 역시 기원전 249년에 여불위에 의해 공격받아 멸망하였다.
3. 1. 제자백가의 등장
전국시대에는 끊임없는 전쟁과 혁신적인 사회 및 정치 모델의 필요성으로 인해 여러 사상 학파가 등장했는데, 이를 백가쟁명이라고 한다. 주요 학파로는 묵가(묵자(墨子)가 주창), 유가(맹자와 순자(荀况)가 대표), 법가(상앙(商鞅), 신불해(慎不害), 신도(申到), 한비자(韓非子)가 대표), 도가(장자(莊子)와 노자(老子)가 대표) 등이 있다.[15]
각국은 군사력뿐 아니라 궁정과 국가 철학을 통해서도 힘을 과시하려 했다. 많은 통치자들이 서로 다른 철학을 자신이나 왕국의 이익에 맞게 채택했다.3. 2. 철기의 보급과 경제의 발달
춘추 전국 시대에 중국 사회가 크게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생산력의 발달이었다. 춘추 시대부터 소를 이용한 농사법(우경)이 보급되었고, 전국 시대에는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면서 생산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철제 농기구 이전에는 돌이나 나무로 만든 농기구를 사용했는데, 이는 부드러운 황토 지대에서는 쓸 만했지만, 새로운 땅을 개간할 때는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철제 농기구는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고 개간을 쉽게 했으며, 땅을 깊게 갈아 생산력을 높여 농업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11]
중국에서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춘추 시대 전기(기원전 6, 7세기경)로 추정된다. 제나라 동종(銅鐘)의 명문(銘文)에 ‘제철 노예 4천 명’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관영 제철 사업은 꽤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괭이, 삽, 가래와 같은 농기구는 전국 시대에 들어와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소를 이용한 농사법과 철기가 보급되면서 생산이 중요해졌고, 황무지까지 개척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관개용 수로나 제방을 쌓는 토목 공사가 활발하게 일어났고, 이는 철기를 통해 가능해져 농업 생산을 더욱 발달시켰다.[11]
철기(鐵器)의 보급은 농업 생산력의 발전을 가져왔고, 이는 상공업 발달을 촉진하여 사회 경제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국경을 넘어 활동하는 대상인들은 사치품을 팔아 큰돈을 벌었고, 서민의 필수품인 철기나 소금 등을 제조·판매하는 대규모 상공업자들은 왕이나 제후와 맞먹는 재산을 가지기도 했다. 이들에게 국경은 불필요한 것이었고, 중원의 통일을 이루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는다. 이는 대상인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활동할 수 있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분열된 강국들이 서로 대립하는 와중에도 문화, 경제적으로는 이미 중원이 하나의 세계로 성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춘추 시대 후반부터 청동기 명문(銘文)과 같이 장식성이 강한 문자에는 지역색이 나타나지만, 평소 죽간(竹簡) 등에 쓰인 문자에는 통일성이 엿보이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11]
전국 시대에는 중국에서 철기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여, 전쟁에서 사용되는 주요 금속으로 청동기를 대체하였다. 촉(현재의 쓰촨성)과 월(현재의 저장성)과 같은 지역들도 이 시기에 중국 문화권에 들어왔다. 무역 또한 중요해졌고, 일부 상인들은 정치에서 큰 권력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진나라의 승상이 된 여불위로, 훗날 진시황의 핵심 지지자가 되었다.[11]
통합된 관료 국가의 자원 증가와 대규모 징병 및 전쟁의 물류 수요 증가는 대규모 수리 시설과 같은 경제 프로젝트의 확산을 가져왔다. 대표적인 수리 시설로는 쓰촨성의 민강을 다스려 낙후 지역을 진나라의 주요 물류 기지로 바꾼 두강염 시스템과, 관중 평원의 넓은 지역에 관개 시설을 설치하여 진나라의 농업 생산량을 늘린 정국운하가 있다.[11]
관자는 전국 시대에 발전하는 정치 경제의 가장 기본적인 텍스트 중 하나로 여겨진다.[20] 이 책은 "가벼운"(중요하지 않거나, 필수적이지 않거나, 값싼 상품을 의미) 또는 "무거운"(중요하거나, 필수적이거나, 값비싼 상품을 의미) 상품을 효과적으로 다루는 맥락에서 가격 규제의 원칙을 다루고 있으며, 상품이 "가벼운"지 또는 "무거운"지는 다른 상품과의 관계에서 이해된다.[21]
4. 전국 칠웅
춘추 시대에는 나라의 제사가 끊기면 조상으로부터 저주받는다는 믿음이 있어, 나라를 점령해도 완전히 멸망시키는 일은 드물었고, 멸망해도 부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전국 시대에는 전쟁에서 한 번 지는 것이 나라의 멸망으로 직결되었다. 이러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점차 7개의 강국이 부상했는데, 이들을 전국 칠웅이라고 부른다. 춘추 시대에는 명목상 주왕의 권위가 남아 있었지만, 전국 시대에는 칠웅의 군주들이 각각 "왕"을 칭하면서(단, 초나라 군주는 이전부터 왕이었다) 주왕의 권위는 상실되었다.
전국 칠웅은 다음과 같다.
당시 정치 지리는 칠웅의 지배를 받았는데, 그들은 다음과 같다.
- 진은 서쪽 끝에 위치했고, 중심지는 위수 유역과 관중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는 다른 나라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지만, 초기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 삼진(三晉)은 산서 고원 중앙에 위치했으며, 진의 세 후계 국가였다.
- 한은 남쪽, 황하를 따라 위치했고, 진(秦)으로 가는 길목을 장악했다.
- 위는 중앙, 오늘날 동부 허난성에 위치했다.
- 조는 세 나라 중 가장 북쪽에 위치했고, 오늘날 남부 허베이성과 북부 산서성에 해당한다.
- 제는 동쪽, 산둥 반도를 중심으로 위치했다.
- 초는 남쪽, 한수 유역과 이후 양자강 유역을 중심지로 삼았다.
- 연은 북동쪽, 오늘날 베이징을 중심으로 위치했다. 후기에는 북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요동 반도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7개의 주요 국가 외에도 다른 소규모 국가들이 존속했는데, 다음과 같다.
- 주(周) 왕의 왕실 영토는 낙읍 근처, 황하 유역의 한(韓) 지역에 있었다.
- 월은 상하이 근처 남동부 해안에 위치했으며, 춘추 시대 후기에 매우 활동적이었지만 나중에 초(楚)에 병합되었다.
- 중산은 조(趙)와 연(燕) 사이에 위치했으며, 기원전 296년에 조(趙)에 병합되었다.
- 쓰촨의 국가들: 극서 지역에는 주(周)가 아닌 바(동쪽)와 촉(서쪽) 국가가 있었다. 이 고대 왕국들은 후기에 진(秦)에 정복당했다.
- 기타 소규모 국가들: 더 큰 국가들의 위성 국가였던 많은 소규모 국가들이 있었고, 이들은 흡수될 때까지 존속했다. 그중 많은 수가 삼진(서쪽)과 제(동쪽), 남쪽의 초(楚) 사이의 중원에 위치했다. 그중 중요한 것들은 송, 노, 정, 위, 등, 월, 조 등이었다.
5. 주요 사건
전국 시대의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전국 시대의 시작: 기원전 400년대에 주나라 천자의 권위가 심각하게 실추되고 제후국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전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 육국연표 서문과 자치통감에 기록되어 있다.[10]
- 전차에서 보병으로 전환: 전국 시대 초기에는 전차 중심의 전투에서 대규모 보병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쇠뇌의 발명과 관련이 있으며, 귀족 정부에서 관료 정부로의 전환과 전쟁 규모의 증가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제후들은 농민들을 징집하여 군사력을 강화했고, 이는 귀족 세력의 약화를 초래했다.[10]
- 주요 전투: 전국 시대에는 여러 국가 간의 대규모 전투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마령 전투에서는 10만 명, 이곡 전투에서는 24만 명이 사망했으며, 장군 백기는 그의 경력 동안 89만 명의 적군을 죽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대규모 전쟁은 통일된 왕조에 대한 선호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10]
- 일시적인 평화: 기원전 352년, 위나라는 한나라와 동맹을 맺고 제나라를 공격했으나, 제나라와 화의를 맺고 조나라에 한단을 반환하면서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17]
사건 | 내용 | 결과 |
---|---|---|
전국 시대의 시작 | 기원전 400년대, 주나라 천자의 권위 실추 및 제후국 통제력 상실 | 사마천의 사기 육국연표 서문, 자치통감에 기록 |
전차에서 보병으로 전환 | 쇠뇌 발명, 귀족 정부 → 관료 정부, 전쟁 규모 증가 | 귀족 세력 약화, 농민 징집 증가 |
주요 전투 | 마령 전투, 이곡 전투 등 대규모 전투, 수십만 명 사망 | 백기 등 장군 활약, 통일 왕조 선호에 영향 |
일시적인 평화 | 기원전 352년, 위-한 동맹, 제나라 공격 후 화의 | 조나라에 한단 반환, 일시적 평화 |
5. 1. 위나라의 패권 (기원전 403년 ~ 기원전 354년)
기원전 403년, 주나라의 위열왕은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를 정식 제후국으로 인정했다. 이로써 이 세 나라는 다른 전국 시대 국가들과 동등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17]기원전 405년부터 383년까지 세 나라는 위나라의 지도 아래 힘을 합쳐 사방으로 영토를 넓혔다. 이 시기 가장 중요한 인물은 위 문후(기원전 445년 ~ 396년)였다. 그는 기원전 408년부터 406년까지 조나라 북동쪽에 위치한 중산을 정복했다. 또한, 서쪽으로는 황하를 건너 뤄허까지 진출하여 서하(황하 서쪽) 지역을 차지하는 등 큰 업적을 남겼다.[17]
위나라의 세력이 커지자, 조나라는 동맹에서 떨어져 나갔다. 기원전 383년, 조나라는 수도를 한단으로 옮기고 위나라를 공격했다. 위나라는 위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위나라는 조나라의 서쪽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위기에 몰린 조나라는 초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초나라는 이를 기회 삼아 북쪽 영토를 차지하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오히려 조나라가 위나라의 일부 영토를 점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사건은 진나라의 통합이 끝나고 여러 나라 간의 동맹과 전쟁이 복잡하게 얽히는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17]
기원전 376년,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는 진 경공을 몰아내고 남은 진나라 영토를 나누어 가짐으로써 진나라의 멸망을 확정지었다.[17]
기원전 370년, 위 무후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사망하자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전쟁이 벌어졌다. 3년간의 내전 끝에 북쪽의 조나라와 남쪽의 한나라가 위나라를 침략했다. 위나라를 정복하기 직전, 조나라와 한나라 지도자들은 위나라를 어떻게 처리할지 의견이 엇갈렸고, 결국 양쪽 군대 모두 갑작스럽게 물러났다. 그 결과, 위 혜왕(당시에는 후작)이 위나라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17]
조나라는 산서 고원에서 기나라 국경까지 평야를 가로질러 영토를 뻗었다. 위나라는 동쪽으로 기나라, 노나라, 송나라에 이르렀다. 남쪽에는 약한 한나라가 황하 계곡의 동서 지역을 차지하고 낙양의 주나라 왕실 영역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낙양 북쪽의 상당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17]
위 혜왕(기원전 370년 ~ 319년)은 위나라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기원전 362년부터 359년까지 그는 세 나라의 국경을 보다 합리적으로 만들기 위해 한나라, 조나라와 영토를 교환했다.[17]
기원전 364년, 위나라는 석문 전투에서 진나라에게 패배했지만, 조나라의 개입 덕분에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진나라는 기원전 362년에 또 한 번 승리했다. 기원전 361년, 위나라는 수도를 진나라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동쪽의 대량으로 옮겼다.[17]
기원전 354년, 위 혜왕은 조나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기원전 353년까지 조나라는 큰 패배를 겪었고, 수도인 한단이 포위되었다. 이때 제나라가 개입했다. 유명한 제나라 전략가 손빈은 위나라 군대가 조나라를 포위하는 데 집중하는 틈을 타 위나라 수도를 공격하는 전략을 제안했다. 이 전략은 성공적이었고, 위나라 군대는 수도를 지키기 위해 급히 남쪽으로 이동하다가 계릉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다. 이 전투는 ''36계''의 두 번째 계책인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원한다" (위위구조)는 고사성어로 유명하며, 약점을 공격하여 다른 곳의 압력을 완화하는 전략을 의미한다.[17]
위 혜왕은 국내적으로 철학과 예술을 후원했으며, 특히 궁정에서 유가 철학자 맹자를 후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맹자와 혜왕의 대화는 맹자라는 책의 처음 두 장을 구성하고 있다.[17]
기원전 352년, 위나라는 한나라와 동맹을 맺고 제나라의 상릉성(현재 허난성 상추시 쑤이현)을 포위 공격했고, 제나라 군대는 이 전투에서 대패했다. 제나라 위왕은 초나라에 중재를 요청했다. 진나라는 계릉 전투 당시 위나라를 공격하고 있었기에 제나라와 화의를 맺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기원전 351년, 위나라는 한단을 조나라에 반환했고, 제나라와 위나라의 전쟁은 종식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평화에 불과했다.[17]
5. 1. 1. 오기의 개혁
전국 시대에는 보병 중심의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면서, 각 나라들은 강력한 중앙 관료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진나라의 분열과 천씨(田氏)의 제나라 찬탈 같은 사건들을 낳았지만, 결국 관료제화가 더 큰 흐름이 되었다.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전국 시대의 여러 나라들은 관료 제도를 개혁했다. 위나라는 기원전 445년, 조나라는 기원전 403년, 초나라는 기원전 390년, 한나라는 기원전 355년, 제나라는 기원전 357년, 진나라는 기원전 350년에 개혁을 실시했다.[17] 이들 나라는 토지 귀족과 무위도식하는 관료들의 권력을 억누르고, 국가에 대한 공로를 기준으로 하층민 중에서 새로운 계층을 선발하여 중앙 집권화를 이루었다. 체계적인 감사 및 보고 시스템과 관료들의 고정 급여 제도가 마련되었다.[17]
진나라의 상앙과 초나라의 오기는 모두 중앙 집권화를 강화하고 귀족 세력을 억압하며, 법가 사상을 바탕으로 정부의 권한을 크게 확대하는 개혁을 추진했다. 이는 당시 대규모 군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조치였다.
5. 2. 제나라와 진나라의 성장 (기원전 354년 ~ 기원전 284년)
춘추 시대에는 나라의 제사가 끊기면 조상에게 벌을 받는다는 생각 때문에 나라를 점령해도 완전히 멸망시키는 경우는 드물었고, 멸망해도 부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전국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러한 관습은 사라졌고, 전쟁에서 지는 것은 곧 나라의 멸망을 의미했다. 이러한 약육강식의 환경 속에서 점차 전국 칠웅이라 불리는 7개의 강국으로 세력이 집중되었다. 춘추 시대에는 명목상 주나라 왕의 권위가 남아 있었지만, 전국 시대에는 칠웅의 군주들이 각자 "왕"을 칭하게 되었고(단, 초나라 군주는 이전부터 왕이었다), 주나라 왕의 권위는 완전히 사라졌다.전국 시대 초기에는 수십 개의 제후국이 있었고, 그중 제, 진, 초, 월 4개국의 국력이 강하여 천하를 4분하고 있었다.
춘추 시대의 오랜 전쟁으로 진나라 군주는 춘추 말기에 허수아비가 되었고, 경이나 대부가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춘추 말기에는 육경 중 지씨, 범씨, 중항씨, 한씨, 조씨, 위씨가 유력했다. 범씨와 중항씨가 멸망한 후[35], 봉토는 다른 네 집안에서 분배되었다.[36] 지씨의 당주 지요가 기원전 455년 한씨·위씨 두 집안과 조씨를 멸망시키려고 조무실의 근거지 진양을 물로 공격했으나,[37][38] 한씨·위씨의 배신을 당했다. 기원전 453년, 지씨가 멸망했고[39], 지씨의 땅은 분배되었다. 또한 세 집안은 진나라 공실의 땅과 백성도 분배했다.[40] 이를 삼가분진이라고 한다.
제에서는 경족으로 소국 진에서 망명 온 공자인 진완의 자손인 전항이 보씨와 연합하여 란씨와 고씨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멸망시켰다.[41][42] 마침내 국군을 추방하고 자신이 국군이 되었다.[43][44][45]
연은 국력이 상승했고, 진은 중흥했다. 약소한 제후국은 병합되거나 속국이 되었다. 전국 시대 중기에는 주요한 대제후국으로 전국 칠웅이 있었다.
- 한(기원전 403년 - 기원전 230년)
- 조(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8년)
- 위(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5년)
- 초(? - 기원전 223년)
- 연(기원전 1100년경 - 기원전 222년)
- 제(기원전 386년 - 기원전 221년)
- 진(? - 기원전 206년)
소국으로는 동주, 송, 위, 중산, 노, 팽, 주 등이 존재하고 있었고, 송나라나 중산과 같은 나라들도 왕호를 주장하고 있었으며,[46] 제국에서의 중요도도 높았다는 지적도 있다. 진나라의 속국이 된 위나라를 제외하고는 전국 칠웅에 의해 병합되었다.
기원전 379년, 제 강공이 사망하면서 제나라를 통치해 온 강씨(姜氏) 가문에는 상속자가 없었다. 왕위는 위왕에게 넘어갔는데, 그는 천씨(田氏) 가문 출신이었다. 강씨 통치 말기에 천씨는 궁중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제 공개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다.[3]
새로운 통치자는 다른 나라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 데 착수했다. 조(趙), 위(衛), 위(魏)에 대한 성공적인 원정을 통해 제나라 영토를 다시 만리장성까지 확장했다. 사마천은 다른 나라들이 제나라의 힘에 압도되어 20년 이상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이러한 군사력 과시는 제나라 국민들에게 안정감을 주었고, 위왕 통치 기간 동안 제나라는 평화를 누렸다.[4] 위왕 말기에 제나라는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되었고, 스스로 "왕"이라 선포하며 주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기원전 352년, 위나라는 한나라와 동맹을 맺고 제나라의 상릉성(현재 하남성 상추시 수현)을 포위 공격했고, 제나라 군대는 대패했다. 제나라 위왕은 초나라에 중재를 요청했다. 진나라는 계릉 전투 당시 위나라를 공격하고 있었기에 제나라와 화의를 맺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기원전 351년, 위나라는 한단을 조나라에 반환했고, 제나라와 위나라의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이는 일시적인 평화에 불과했다.
남쪽의 초나라는 위나라에서 권력 다툼에 패하여 망명해 온 오기를 령윤(재상)으로 발탁하고 법가 사상을 기반으로 국정 개혁을 단행했다. 초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종족의 수가 많아 왕권이 강하지 않았고, 영토는 넓었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많았으며, 관직의 수도 많았다. 오기는 법 준수를 철저히 하고 불필요한 관직을 폐지하는 등의 개혁을 실시하여 국고를 확보하고 군대를 양성했다. 또한 영주의 권리를 3대째 왕에게 반환하는 법을 제정하고, 백성, 특히 농민층을 중시하는 정책을 폈다. 이러한 개혁으로 부국강병과 왕권 강화를 달성하여, 남쪽으로는 백월을 평정하고, 북쪽으로는 진나라와 채나라 두 나라를 병합하여 삼진을 격파하며, 서쪽으로는 진나라를 공격할 정도로 강성해졌다. 이러한 업적 때문에 오기는 법가의 시조로 여겨지기도 한다(하지만 관중이나 전설적인 여상도 그 정치 수법이 법가적이라고 여겨지며, 시대적으로는 더 오래되었다). 그러나 권한을 빼앗긴 귀족들의 강한 원한이 오기에게 향했고, 오기 또한 이를 감지하고 있었다. 오기가 무사했던 것은 도왕의 총애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도왕은 이미 고령이었다. 오기를 옹호했던 도왕이 죽은 후 오기는 반대파에 의해 살해되었고, 개혁은 중단되었다.
기원전 318년, 위의 공손연은 위, 조, 한, 연, 초의 합종군을 이끌고, 의거에게도 진나라를 공격하도록 부탁하여 진나라에 침공하였다. 합종군의 총대장은 초나라 회왕이 맡았다. 그러나 합종군 5개국은 각자의 이익 때문에 발을 맞추지 못하여, 실제로 출병한 것은 위, 조, 한 3개국과 의거뿐이었다. 합종군은 함곡관, 의거는 이백(현재 감숙성 천수시 동쪽)을 공격하였으나, 합종군과 의거는 진나라 군대에 의해 격파되었다.[62]
기원전 317년, 진나라는 서장 저리질이 이끄는 군대가 함곡관에서 출격하여 한, 조, 위의 군대에 반격하였다. 조, 한의 군대를 수어에서 대파하고, 한나라 장수 신차를 포로로 잡았다. 합종군 8만 2천 명이 참수되었다.[63]
기원전 316년, 연나라 왕 회는 왕위를 자지에게 양위했다. 기원전 314년, 연나라 장군 시피가 태자 평을 옹립하고 자지를 공격하여 궁궐을 포위했다. 자지의 군대가 시피를 격파하자, 시피는 태도를 바꾸어 태자 평을 공격했고, 시피는 전사했다. 이 내란으로 연나라는 황폐해졌고, 이 틈을 타 맹자의 건의로 제의 선왕이 장군 광장을 파견하여 연나라를 공격했다. 국도가 함락되고, 연나라 왕 회는 살해되었으며, 자지는 도망쳤다가 후에 잡혀 살해되었다. 제나라 군대의 약탈로 인해 연나라 백성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기원전 293년, 위(魏)의 위옹(魏冄)의 천거로 백기는 좌등작(左更)이 되었다. 같은 해, 한(韓)과 위(魏)는 빈번한 진(秦)의 침략에 위기감을 느껴 동맹을 맺었고(동주(東周)를 동맹에 끌어들임), 위(魏) 장수 공손희(公孫喜)가 대장이 되어 이궐(伊闕)에서 진(秦)군과 대치하였다[64]. 전투 중, 진(秦)군의 병력은 한(韓)•위(魏) 연합군의 절반 이하였으며, 연합군에서는 한(韓)군이 가장 약하고 위(魏)군이 주공을 담당하기를 원했으나, 위(魏)군은 한(韓)군의 정예 부대에 의존하여 한(韓)군이 선봉에 서기를 바랐다. 진(秦)군 주장 백기(白起)는 한(韓)•위(魏) 연합군의 협력이 약하고 서로 선봉에 서기를 미루는 약점을 이용하여 위(魏)군에 병력을 집중시켜 맹공을 퍼부었다. 위(魏)군이 패배한 후 한(韓)군도 패배하여 패주하였고, 진(秦)군은 추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궐 전투에서 진(秦)군은 적병 24만 명을 참수하고 이궐(伊闕)과 5개의 토성을 얻었으며, 총대장 공손희(公孫喜)는 포로가 되었다[65]. 백기(白起)는 이 공으로 국위(國尉)가 되었다
같은 해, 백기(白起)는 한(韓)•위(魏)의 이궐 전투 참패를 이용하여 군대를 이끌고 황하(黃河)를 건너 안읍(安邑)(현재 산서성(山西省) 운성(運城市) 하현(夏縣) 북서쪽) 동쪽의 건하(乾河) 등 광대한 영토를 점령하였다[66][67][68].
기원전 292년, 백기와 사마착이 위나라를 공격하여 크고 작은 61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기원전 278년, 초나라를 공격하여 연영 전투에서 초나라의 수도 영을 함락시키고 남군을 설치했다.[69] 이 때문에 초나라는 진나라로부터 수도를 낙양으로 옮겼다.
기원전 286년, 동쪽의 제나라와 서쪽의 진나라가 양강 구도를 이루었다. 이때 진나라 소양왕은 제나라 민왕과 함께 왕보다 상위 칭호인 제(帝)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33]
그때, 소대가 제나라에 들어가 민왕에게 "지금 제위를 칭한다 해도 여러 나라는 강대한 진나라에 따를 뿐입니다. 제위를 칭하지 않고 왕위를 칭한 채, 걸송(송나라 강왕이 폭군이었기에 명성이 낮아, 옛 하의 걸에 비유하여 걸송이라 불렸다)을 토벌하면 명성이 높아질 것입니다."라고 설득했기 때문에, 동제(東帝)를 칭하는 것을 그만두었다.[34]
기원전 286년, 송나라에서 내란이 발생하자, 제나라 민왕은 장군 한민을 파견했다. 송나라 백성들은 오랫동안 "송의 걸"이라 불릴 정도의 폭정을 겪으며 원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34], 나라를 위해 싸우지 않았고, 제나라, 위나라, 초나라 연합군에게 쉽게 패했다. 송왕 언은 위나라의 온읍(현재 하남성 온현)에서 살해되었고, 송나라는 멸망했다.[70][71][72]
이러한 춘추 전국 시대의 양강 시대는 갑자기 막을 내렸다. 제가 송을 멸망시키자, 5개국은 위기감을 느꼈다. 기원전 284년, 락의를 대장으로 하는 연(燕), 조(趙), 한(韓), 위(魏), 초(楚) 5개국 연합군이 침공했다. 제나라 민왕은 전촉(田觸)을 장군으로 삼아 제나라 전군을 이끌었다. 제나라 군 주력은 제수(濟水)를 건넜다. 양군은 제수 서쪽에서 결전을 벌였다. 제나라 군의 사기는 수년간의 전쟁으로 낮았다. 민왕은 병사들에게 필사적인 전투를 하도록 조상의 무덤을 파헤쳐 죽이겠다고 위협했지만, 오히려 병사들의 사기는 더욱 저하되었다. 그 결과, 연합군이 공격해오자 제나라 군은 순식간에 궤멸될 정도의 참패를 당했다. 전촉은 도망쳤고, 부장인 전달(田達)은 잔병을 이끌고 수도 임치(臨淄)로 후퇴했다. 제나라 군 주력이 궤멸된 후, 락의는 진(秦)과 한의 양군을 귀환시켰고, 위나라 군은 송나라 땅을 공격했으며, 조나라 군은 하간(河間)을 점령했고, 연나라 군은 제나라 군을 추격했다.[73][74][75]
민왕은 해외로 도망친 후, 거(莒)로 돌아왔다. 이때, 초나라 경양왕(頃襄王)은 제나라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뇨치(淖齒)를 보냈다. 뇨치는 거(莒)에 있던 민왕을 죽이고, 제나라가 점령하고 있던 회북(淮北)을 차지했다.[76]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연나라와 마찬가지로 왕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락의는 임치를 공략한 후, 선정을 베풀고, 군사 규율을 확립하고, 약탈을 엄격히 금지했으며, 잔혹한 법률과 가혹한 세금을 폐지하여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그 후, 군대를 나누어 제나라 군을 완전히 제거하고, 제나라 점령을 확대했다.[77] 연나라 군은 단 6개월 만에 제나라의 70여 개 성을 점령했고, 거(莒)와 즉묵(即墨) 두 성만 남았다.[78][79] 기원전 283년, 제나라 대신 왕손가 등이 뇨치를 죽이고, 민왕의 아들 전법장(田法章)을 옹립하여 양왕으로 즉위시켰다. 양왕 등은 거(莒)에서 고성(籠城)하며 연나라 군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즉묵에서는 악의의 반격을 받아 대부(大夫)가 전투에서 사망했다. 즉묵의 군대와 민간인들은 전단(田單)의 지휘를 받아 저항했고, 양측은 수년간 전투를 벌였다. 악의는 공격하지 않고 즉묵을 포위전(包囲戦)으로 몰고 갔다. 즉묵의 병사와 민간인들은 대부의 사후, 제(斉)의 공족(公族)이기도 한 전단을 장군으로 추천하여 연(燕)군에 저항했다. 이 즉묵의 공방전은 “'''즉묵의 전투'''”[80][81]라고 불린다.
1년 동안 연나라 군은 거(莒)와 즉묵을 포위했지만 함락되지 않자 악의는 공성전(攻城戦)으로 전환했다. 연나라 군을 성에서 철수시켜 9리 떨어진 곳에 보루를 구축하도록 명령했다. 3년이 지나도 두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82]
5. 2. 1. 상앙의 변법
상앙은 토지 개혁을 실시하고 토지를 사유화했다. 수확량 목표를 초과 달성한 농민에게는 보상하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농민은 노예로 삼았으며, 정부 정책을 준수한 자에게 노예를 상으로 주었다.[5] 당시 진(秦)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상앙은 인구 증가 정책을 시행했다. 진(秦) 농민들이 군대에 모집되자, 그는 다른 나라에서 농민들이 진(秦)으로 이주해오도록 장려하여 인력 부족을 해결하고자 했다. 이 정책은 진(秦)의 인구를 늘리는 동시에 경쟁국들의 인구를 약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5]상앙은 법을 제정하여 시민들이 어린 나이에 결혼하도록 강제하고, 여러 자녀를 낳도록 장려하는 세금 제도를 시행했다. 또한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업에 종사하는 죄수들을 석방하는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다. 상앙은 장자상속제를 폐지하고, 한 집에 두 명 이상의 아들이 사는 가구에는 이중 과세를 부과하여 대가족을 핵가족으로 분리시켰다. 또한 귀족들의 행정부 개입을 줄이기 위해 수도를 이전했다.[5]
진나라 상앙(商鞅)과 초나라 오기(吳起)의 개혁은 모두 중앙 집권화 강화, 귀족 억압, 그리고 법가 사상에 기반한 정부의 범위 대폭 확장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는 당시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는 데 필요한 조치였다.
5. 3. 합종연횡(合從連橫)
전국 시대 말엽, 진(秦)나라는 다른 여섯 나라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력해졌다. 그 결과, 여섯 나라는 진나라의 위협에 대처하는 데 몰두했고, 두 가지 상반되는 사상이 나타났다. 하나는 북남 동맹인 ‘수직적’ 동맹, 즉 hezong|합종(合縱)중국어으로, 여러 나라가 연합하여 진나라를 막자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동서 동맹인 ‘수평적’ 동맹, 즉 lianheng|연횡(連橫)중국어으로, 진나라와 동맹을 맺어 진나라의 흥기를 이용하자는 것이었다.합종(合縱)은 초기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동맹국들 사이의 상호 불신으로 동맹은 붕괴되었다. 진나라는 수평적 동맹 전략을 반복적으로 이용하여 각 나라를 하나씩 정복했다. 이 시기에 많은 철학자와 전략가들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통치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했다. 소진(蘇秦)처럼 수직적 동맹을 주장한 자와 장의처럼 수평적 동맹을 주장한 자 등 이러한 ‘로비스트’들은 기지와 지략으로 유명했으며, 이들은 두 가지 상반된 사상에서 유래한 사련(縱橫家)으로 불렸다.
기원전 334년부터 외교관 소진(蘇秦)은 연, 조, 한, 위, 제, 초나라의 궁궐을 여러 해 동안 방문하여 진나라에 대항하는 연합 전선을 형성하도록 설득했다. 기원전 318년 제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하는 연합 공격을 감행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진혜왕(秦惠王)은 기원전 311년에 사망했고, 1년 후 장의가 사망했다. 새 군주인 진무왕은 4년 만에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기원전 307년 진혜왕의 후궁 소생인 아들(즉, 진무왕의 이복 동생)이 진소왕으로 즉위하기 전까지 혼란이 이어졌다. 진소왕은 그의 전임자와는 대조적으로 전례 없는 53년 동안 통치했다.
제1차 종주연맹(종합적 연합)의 실패 후, 소진은 결국 제나라에 거주하게 되었고, 제선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신하들의 질투를 샀다. 기원전 300년 암살 시도로 소진은 치명상을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죽음이 다가옴을 감지한 그는 새로 즉위한 제민왕에게 암살자들을 유인하기 위해 자신을 공개적으로 처형하라고 조언했다. 제민왕은 소진의 요청을 따랐고 그를 죽였으며, 제1세대 종주연맹 사상가들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8]
제민왕은 전 제위왕의 손자인 맹상군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맹상군은 위와 한과 서쪽 동맹을 맺었다. 서쪽 끝의 진은 307년 계승 투쟁으로 약화되었고, 새로운 연합에 굴복하여 맹상군을 재상으로 임명했다. 진과 제 사이의 동맹은 진 공주가 제민왕과 결혼함으로써 굳어졌다. 이러한 '수평적' 또는 동서 동맹은 조나라를 제외했을 뿐, 평화를 가져왔을 수도 있다.
기원전 299년경, 조나라의 통치자는 일곱 주요 국가 중 마지막으로 자신을 "왕"이라고 선포했다.
기원전 298년, 조는 진과 동맹을 맺을 것을 제안했고, 맹상군은 진에서 쫓겨났다. 남은 세 동맹국인 제, 위, 한은 진을 공격하여 산시성 아래 황하를 따라 함곡관까지 진격했다. 3년간의 전투 끝에 함곡관을 점령하고 진에게 한과 위에게 빼앗긴 영토를 돌려주도록 강요했다. 그 다음 연과 초를 크게 무찔렀다. 맹상군의 5년간의 집권 기간 동안 제는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294년, 맹상군은 쿠데타에 연루되어 위로 도망쳤다. 그의 동맹 체제는 붕괴되었다. 제와 진은 휴전을 맺고 각자의 이익을 추구했다. 제는 남쪽으로 송나라를 공격하는 동안 진 장군 백기는 한/위 연합군을 동쪽으로 밀어붙여 이궐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288년, 진소왕과 제민왕은 각각 서쪽과 동쪽의 '제'(帝|황제중국어)라는 칭호를 취했다. 그들은 서약을 맺고 조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기원전 287년, 소진의 동생이자 아마도 연나라의 사신이었던 수대(蘇代)는 조나라와의 전쟁이 오직 진나라에게만 이득이 될 것이라고 제민왕을 설득했다. 제민왕은 수대의 말에 동의하여 다른 나라들과 연합하여 진에 대항하는 ‘수직 동맹’을 맺었다. 진은 물러서서 “제(帝)”라는 칭호를 버리고 위와 조에게 빼앗았던 영토를 돌려주었다. 기원전 286년에는 제나라가 송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기원전 352년, 위나라는 한나라와 동맹을 맺고 제나라의 상릉성(현재 허난성 상추시 쑤이현)을 포위 공격했고, 제나라 군대는 이 전투에서 대패했다. 제나라 위왕은 초나라에 중재를 요청했다. 진나라는 계릉 전투 당시 위나라를 공격하고 있었기에 제나라와 화의를 맺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기원전 351년, 위나라는 한단을 조나라에 반환했고, 제나라와 위나라의 전쟁은 종식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평화에 불과했다.
5. 4. 진나라의 통일 (기원전 284년 ~ 기원전 221년)
기원전 284년, 제나라의 성공은 다른 나라들을 두렵게 했다. 위나라에 망명 중이던 맹상군의 지휘 아래, 진(秦), 조, 위, 연나라가 동맹을 맺었다. 연나라는 일반적으로 제나라의 비교적 약한 동맹국이었고, 제나라는 연나라로부터는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악의 장군이 이끄는 연나라의 공격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동시에 다른 동맹국들도 서쪽에서 공격해 왔다. 초나라는 제나라의 동맹국이라고 선언했지만, 북쪽 영토를 병합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제나라의 군대는 궤멸되었고, 제나라의 영토는 주와 지모(산둥성) 두 도시로 축소되었다. 민왕 자신은 나중에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했다.[9]기원전 283년, 상왕은 전단 장군 덕분에 제나라의 영토 상당 부분을 회복할 수 있었지만, 민왕 시대의 영향력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기원전 278년, 진나라 장군 백기는 진나라의 새로운 영토인 사천(四川)에서 초나라 서쪽을 공격했다. 영이 함락되었고, 한수 유역의 초나라 서쪽 땅이 빼앗겼다. 그 결과 초나라는 동쪽으로 상당히 이동하게 되었다.
초나라가 기원전 278년에 패한 후, 남은 강대국은 서쪽의 진나라와 북중앙의 조나라였다. 외교적 수완을 펼칠 여지가 거의 없었고, 전쟁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조나라는 조 무령왕(재위 기원전 325-299)에 의해 크게 강해졌다. 기원전 307년 그는 북방 유목민들을 본떠 기병을 증강했다. 기원전 306년에는 산서 고원 북부에서 더 많은 땅을 차지했다. 기원전 305년에는 북동쪽 변방 국가인 중산을 정복했다. 기원전 304년에는 북서쪽으로 멀리 진출하여 오르도스 루프 북쪽의 황하 동서 구간을 점령했다. 조 혜문왕(재위 기원전 298-266)은 유능한 신하들을 등용하여 약화된 제나라와 위나라를 공격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기원전 296년 그의 장군 염파는 진나라 군대 두 개를 격파했다.
기원전 269년, 범수가 진나라의 최고 고문이 되었다. 그는 권위주의적 개혁, 불가피한 확장, 그리고 주변 국가를 공격하기 위한 원거리 국가와의 동맹(삼십육계 중 23계)을 주장했다. 그의 좌우명인 "영토뿐만 아니라 백성까지 공격하라"는 대량 학살 정책을 천명했고, 이는 점점 더 빈번해졌다.
기원전 265년, 진 소양왕은 진나라로 들어오는 황하 관문을 장악하고 있던 약한 한나라를 공격하며 먼저 움직였다. 그는 위나라 영토를 가로질러 북동쪽으로 이동하여 낙양 북쪽, 조나라 남쪽에 있는 한나라의 외딴 지역인 상당을 차단했다. 한나라 왕은 상당을 항복시키기로 동의했지만, 현지 총독은 거부하고 조 효성왕에게 넘겼다. 조나라는 염파를 파견했고, 그는 장평에 군대를 주둔시켰으며, 진나라는 왕흘 장군을 보냈다. 염파는 진나라 군대와 결정적인 전투를 벌일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너무 현명하게 생각하여 요새 안에 머물렀다. 진나라는 돌파할 수 없었고, 양군은 3년 동안 교착 상태에 빠졌다. 조나라 왕은 염파가 충분히 공격적이지 않다고 판단하고 결정적인 전투를 약속한 조괄을 보냈다. 동시에 진나라는 왕흘을 악명 높은 잔혹한 백기로 몰래 교체했다. 조괄이 요새를 떠나자, 백기는 칸나에 전투 전술을 사용하여 중앙에서 후퇴하여 조나라 군대를 양측에서 포위했다. 46일 동안 포위된 후, 굶주린 조나라 군대는 기원전 260년 9월에 항복했다. 백기가 포로들을 모두 죽였다고 하며, 조나라는 40만 명의 병사를 잃었다고 한다.
진나라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공격할 만큼 지쳐 있었다. 얼마 후 조나라 수도를 포위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만, 후방에서 공격받아 군대가 궤멸되었다. 조나라는 살아남았지만, 더 이상 진나라에 맞서 저항할 수 있는 나라는 없었다. 다른 나라들은 진나라에 대항하여 단결만 유지했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기원전 257년, 진나라 군대는 한단을 포위하는 데 실패했고, 한단 전투에서 조, 위, 초의 연합군에게 패했다.
진 장양왕은 겨우 3년 동안 통치했다. 그는 아들 정(政)에게 뒤를 이었는데, 그 이전의 두 노왕과는 달리 즉위 당시 13세에 불과했다. 성인이 된 정은 뛰어난 지휘관이 되어 불과 9년 만에 중국을 통일했다.
기원전 230년, 진(秦)은 한(韓)을 정복했다. 전국 칠웅 중 가장 약했던 한(韓)은 훨씬 강력한 진(秦)과 인접해 있었고, 전국 시대 초기부터 진(秦)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아왔다. 이러한 상황은 진시황제가 왕전 장군을 보내 조(趙)를 공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韓)의 안왕은 한(韓)이 진(秦)의 다음 목표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곧바로 사절을 보내 아무런 저항 없이 나라 전체를 항복시켰다. 이로써 한(韓) 백성은 저항이 실패했을 때 닥칠 수 있었던 끔찍한 결과를 피할 수 있었다.
기원전 225년, 진(秦)은 위(魏)를 정복했다. 진나라 군대는 위나라의 수도 대량을 포위 공격하여 직접적인 침략을 감행했지만, 곧 성벽이 너무 견고하여 함락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황하와 연결된 지역의 강을 이용하는 새로운 전략을 고안했다. 그 강을 이용하여 도시 성벽을 물에 잠기게 함으로써 도시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상황을 파악한 가왕은 서둘러 수도를 나와 더 이상의 백성들의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진나라 군대에 항복했다.
기원전 223년, 진나라가 초를 정복하였다. 그러나 첫 번째 침략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이신 장군이 이끄는 20만 명의 진나라 군대가 익숙하지 않은 회양(오늘날 장쑤 성 북부와 안후이 성) 지역에서 50만 명의 초나라 군대에게 패배한 것이다. 초나라 장군 항연은 초기에 몇 차례 승리를 허용하여 진나라를 유인한 후 역습하여 진나라의 대규모 진영 두 곳을 불태웠다.
기원전 222년, 왕전은 6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에 대한 두 번째 군사 침략을 지휘하기 위해 소환되었다. 전년도 승리로 사기가 높았던 초나라 군대는 초나라에 대한 포위 공격이 예상되었기에 안주하며 방어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왕전은 초나라의 의지를 약화시키기로 결정하고, 비밀리에 초나라 지역에서 전투를 벌일 수 있도록 군대를 훈련시키면서 요새에서 게으른 척하여 초나라 군대를 속였다. 1년 후, 진나라의 무기력한 모습에 초나라 수비군은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왕전은 그때 전력으로 침공하여 회양과 남은 초나라 군대를 제압했다. 초나라는 주도권을 잃고, 수춘이 함락되고 마지막 지도자 창평군이 기원전 223년에 죽을 때까지 지역적인 게릴라식 저항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전성기 초나라와 진나라의 연합군은 수십만 명에서 백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며, 35년 전 진나라와 조나라 사이의 장평 전투에 참여한 병력보다 더 많았다.
기원전 222년, 진(秦)은 조(趙)와 연(燕)을 정복했다. 조를 정복한 후, 진나라 군대는 연으로 주의를 돌렸다. 연의 태자 단은 이 위험한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형가를 보내 진 시황제를 암살하려 했으나, 이는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진 시황제의 분노와 정복 의지를 더욱 부채질하여, 그는 연을 정복하기 위해 군대 수를 늘렸다.
기원전 221년, 진(秦)은 마지막으로 정복되지 않은 나라인 제를 정복했다. 제는 이전에 진이 다른 나라들을 정복할 때 어떠한 지원이나 도움도 제공하지 않았다. 진의 침략 의도가 명확해지자 제는 즉시 모든 도시를 항복시켰고, 이로써 진의 통일 전쟁이 완료되고 진나라가 들어서게 되었다. 마지막 제의 왕은 건으로 공에서 유배 생활을 보내다가 사후 시호를 받지 못했다.
진나라의 왕 영정은 자신을 "진의 첫 번째 황제"라는 뜻의 ''진시황제''라고 선포했다.
6. 전국 시대와 한국사와의 관계
전국 시대는 한국사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그러나 전국 시대에 일어난 여러 사건들은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진나라의 성장과 법가 사상의 발전은 이후 한국 고대 국가들의 중앙집권화와 법치주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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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정보 없음)
[155]
서적
史記 巻七十三 白起王翦列伝第十三
(출판사 정보 없음)
[156]
서적
史記 巻七十三 白起王翦列伝第十三
(출판사 정보 없음)
[157]
서적
史記 巻六 秦始皇本紀第六
(출판사 정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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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史記 巻七十三 白起王翦列伝第十三
(출판사 정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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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a Qian: The First Emperor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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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秦滅楚
http://www.ccn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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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史記 巻七十三 白起王翦列伝第十三
(출판사 정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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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史記 巻七十三 白起王翦列伝第十三
(출판사 정보 없음)
[163]
서적
史記 巻六 秦始皇本紀第六
(출판사 정보 없음)
[164]
서적
史記 巻七十三 白起王翦列伝第十三
(출판사 정보 없음)
[165]
서적
史記 巻六 秦始皇本紀第六
(출판사 정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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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史記 巻六 秦始皇本紀第六
(출판사 정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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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史記 秦始皇本紀、楚世家
(출판사 정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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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諸子百家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史書』白起王翦列傳10-12
http://ctext.org/shi[...]
網站的設計與内容
2011-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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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史記 巻六 秦始皇本紀第六
(출판사 정보 없음)
[170]
서적
史記 巻六 秦始皇本紀第六
(출판사 정보 없음)
[171]
서적
史記 巻六 秦始皇本紀第六
(출판사 정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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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史記 巻三十四 燕召公世家第四
(출판사 정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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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東周列国志
(출판사 정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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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秦滅燕、趙和破斉
http://www.ccn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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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国策 巻十三 斉策六
(출판사 정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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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秦紀巻七
s:資治通鑑/卷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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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戦国策』巻十三 斉策六
s:戰國策/卷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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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史記』巻六 秦始皇本紀第六
s:史記/卷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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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史記』巻四十六 田敬仲完世家第十六
s:史記/卷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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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統一への道‐六国併合‐4
#吉川2002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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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春秋戦国政治外交史
三恵社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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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左伝 哀公十九年
-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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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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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 六国年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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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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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左伝 哀公十九年
[187]
서적
孫子兵法論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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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代 (戦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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