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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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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문국은 신라 벌휴 이사금 2년(185년)에 신라에 복속된 삼한 시대의 부족 국가이다. 의성군 금성면 일대가 도읍지로 추정되며, 374여 기의 고분군이 남아 있어 오랜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조문국 경덕왕릉은 의성군 금성면에 위치하며, 전통적인 고분 형태로, 관련 전설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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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수도조문
민족진한인
정치
역사
인구
언어
공통어진한어
기타

2. 역사

「삼국사기」 권이(卷二) 신라본기(新羅本紀) 제이(第二)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조에 「二年 春正月 親祀始祖廟 大赦 二月 拜波珍飡 仇道 一吉飡 仇須兮 爲左右軍主 伐召文國 軍主之名始於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벌휴이사금 2년, 1월에 왕이 친히 시조사당에 제사 지내고 죄수를 크게 사면했으며 2월에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로서 좌우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정벌했는데 군주라는 이름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벌휴 이사금신라 9대왕으로 동왕 2년은 서기 185년에 해당되므로 조문국이 신라에 복속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830여년 전의 일이다. 의성군 금성면이 조문국 도읍지로 지금까지 규모가 매우 큰 100여기 등 모두 374여기(2015.4 의성 금성산고분군 일원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의 고분군(古墳群)이 남아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최소한 몇 세기에 걸친 족적(足蹟)이라 짐작되므로 삼한의 초기부터 존재하던 부족국가라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1960년 11월 국립박물관(김재원 박사팀)에서 거대한 조문국 고분1기를 발굴 (금동관 등 다수유물 발견) 조사하여 당시 상황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2. 1. 삼국사기의 기록

2. 2. 유물 및 유적

벌휴이사금 2년(185년)에 신라에 복속되기 이전 조문국의 도읍지는 의성군 금성면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2015년 4월 의성 금성산고분군 일원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100여기 등 모두 374기의 고분군이 남아 있다. 이는 조문국이 최소한 몇 세기에 걸쳐 존재했던 부족국가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1960년 11월에는 국립박물관(김재원 박사팀)에서 조문국의 거대한 고분 1기를 발굴하여 금동관 등 다수의 유물을 발견하고 당시 상황 연구에 기여했다.

3. 조문국 경덕왕릉

의성읍에서 남쪽으로 28번 국도를 따라 약 8.5km지점 금성면(金城面) 대리동(大里洞) 산 384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옛 조문국 경덕왕릉은 그 형식이 전통적인 고분(古墳)으로서 봉 아래 화강석 비석(碑石)과 상석(床石)이 있다. 능(陵)의 둘레가 74m이며 능의 전면(前面)에는 가로42cm, 세로 22cm, 높이 1.6m의 비석이 서있다.

그런데 이 왕릉이 발견되기에는 신기한 전설이 있으니 조선 숙종(朝鮮 肅宗)때 허미수 문집에 실려 있다.

먼 옛날에 한 농부가 외밭(瓜田)을 마련하기 위하여 작은 언덕을 갈던 도중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큼직한 구멍이 나타났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들어가 보니 돌로 쌓은 석실(石室)이 나타났다. 석실의 둘레에는 금칠을 하였고 가운데는 금소상(金塑像)이 있는데 그 머리에 쓴 금관(金冠)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농부는 욕심이 나서 금관을 벗기려 하였더니 그만 농부의 손이 금관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 날 밤에 의성군수(義城郡守)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나는 경덕왕(景德王)이다. 아무 곳 아무 데 와서 살펴보고 이 무덤을 개수 봉안토록 하여라” 고 현몽하였으므로 이튿날 곧 이곳을 발견하여 봉을 쌓고 관리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 지방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렇게도 전해 온다.

현재의 능지(陵地)는 약 500년 전에 오극겸(吳克謙)의 외밭(瓜田)이었는데, 외를 지키던 어느 날 밤 꿈에 금관(金冠)을 쓰고 조복(朝服)을 한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서 “내가 신라시대(新羅時代) 조문국(召文國)의 경덕왕(景德王)인데 너의 원두막이 나의 능(陵) 위이니 속히 철거를 하라” 고 이르고는 외직이의 등에다 한 줄의 글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에 놀란 외밭 주인은 일어나 보니 꿈속에 노인이 써준 글이 그대로 자기 등에 씌어 있어 현령(縣令)께 고(告)하고 지방의 유지들과 의논하여 봉분(封墳)을 만들고 매년 춘계 향사를 올렸으며 지금도 제례(祭禮) 행사는 계속되고 있다.

그 외 374여 기(2015.4 의성 금성산고분군 일원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의 고분이 부근에 산재하고 있다.

3. 1. 위치 및 형태

의성읍에서 남쪽으로 28번 국도를 따라 약 8.5km 지점 금성면(金城面) 대리동(大里洞) 산 384번지에 옛 조문국 경덕왕릉이 있다. 이 왕릉은 전통적인 고분(古墳) 형식으로, 봉분 아래에는 화강석 비석(碑石)과 상석(床石)이 있다. 능의 둘레는 74m이며, 능 전면에는 가로 42cm, 세로 22cm, 높이 1.6m의 비석이 서있다.

왕릉 발견에는 신기한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숙종 때 허미수 문집에 따르면, 한 농부가 밭을 갈던 중 석실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 금관을 쓴 금소상이 있었다고 한다. 농부가 금관을 벗기려 하자 손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그날 밤 의성군수의 꿈에 경덕왕이 나타나 무덤을 개수 봉안토록 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현재의 능지는 약 500년 전 오극겸의 밭이었는데, 밭을 지키던 어느 날 밤 꿈에 금관을 쓴 노인이 나타나 자신의 능 위에 있는 원두막을 철거하라고 했다고 한다. 밭 주인은 등에 글이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현령에게 알렸으며, 지방 유지들과 의논하여 봉분을 만들고 매년 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부근에는 374여 기의 고분이 산재하고 있다.(2015.4 의성 금성산고분군 일원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

3. 2. 전설

옛날에 한 농부가 밭을 만들기 위해 작은 언덕을 갈던 중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큰 구멍을 발견했다. 석실 안에는 금으로 만든 소상이 있었고, 금관이 빛나고 있었다. 농부가 금관을 벗기려 하자 손이 금관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 밤 의성군수의 꿈에 경덕왕이 나타나 무덤을 개수 봉안토록 하였고, 다음 날 그곳을 발견하여 봉분을 쌓고 관리하게 되었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현재의 능은 약 500년 전 오극겸의 밭이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금관을 쓴 노인이 나타나 자신의 능 위에 있는 원두막을 철거하라고 했다. 밭 주인은 등에 글이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현령에게 알렸고, 지방 유지들과 의논하여 봉분을 만들고 매년 봄에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지금도 제례 행사가 계속되고 있다.

3. 3. 현황

조문국은 의성읍에서 남쪽으로 28번 국도를 따라 약 8.5km 떨어진 금성면 대리동 산 384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옛 조문국 경덕왕릉은 전통적인 고분 형식으로, 봉분 아래에는 화강석 비석과 상석이 있다. 능의 둘레는 74m이며, 능 전면에는 가로 42cm, 세로 22cm, 높이 1.6m의 비석이 서 있다.

경덕왕릉이 발견된 데에는 신기한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숙종 때 허미수 문집에 따르면, 옛날 한 농부가 밭을 갈던 중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큼직한 구멍을 발견했다. 석실 안에는 금칠이 되어 있었고, 금소상의 금관이 빛나고 있었다. 농부가 금관을 벗기려 하자 손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 밤 의성군수의 꿈에 경덕왕이 나타나 무덤을 개수 봉안토록 하였고, 이에 따라 봉분을 쌓고 관리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현재의 능지는 약 500년 전 오극겸의 밭이었는데, 밭을 지키던 어느 날 밤 꿈에 금관을 쓴 노인이 나타나 자신의 능 위에 있는 원두막을 철거하라고 하였다. 밭 주인은 등에 글이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현령에게 알렸고, 지방 유지들과 의논하여 봉분을 만들고 매년 봄에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지금도 제례 행사가 계속되고 있다.

부근에는 374여 기의 고분이 산재하고 있다 (2015년 4월 의성 금성산고분군 일원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

참조

[1] 논문 '召文國' 지명 검토와 금성면 고분군의 역사·고고학적 의의 신라사학회
[2] 서적 고대사회 의성의 지정학적 위치 블루에드컴
[3] 논문 앞의 글 (상세 정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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