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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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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상(趙商)은 기호 낙론 계열의 학맥을 이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10세에 임재 서찬규에게 학문을 배우고, 간재 전우에게 사사받아 성리학을 연구했다. 그는 기호 낙론을 계승하여 심성론과 수양론을 강조했으며, '경천애인설', '서회설' 등을 통해 유학 이념의 실천을 강조했다. 주요 저서로는 『심성이기설』과 『대학석의』가 있으며, 후학을 양성하고 학문 연구에 힘썼다.

2. 가계

창녕 조씨 태복경공파(太僕卿公派) 후손이다. 18세조는 조선 호조참판 퇴우당 조계형(退憂堂 曺繼衡), 15세조는 대구도호부사 도촌 조응인(陶村 曺應仁), 14세조는 정주목사 오계 조정립(梧溪 曺挺立), 13세조는 양산군수 설주 조시량(雪州 曺時亮)이다. 10세조 조성좌(曺聖佐)는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되었으나, 후손들은 은거하여 가문을 이었다.[4]

조성좌는 1728년 4월 1일 합천군에서 처형되었고, 그의 아들 조명상(曺明相)과 조명협(曺明莢)은 멸문지화를 피하기 위해 합천을 떠나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로 숨어들었다. 이인좌의 난이 평정된 후, 고향을 잊지 못해 낙동강을 건너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에 정착하였다.[4]

이후 대를 이어 장악원정 조계흥(曺啓興)의 7세손이 되었다. 증조할아버지는 조규승(曺奎承), 증조할머니는 오원(吳瑗)의 딸 해주 오씨이다. 해주 오씨는 효부로 정려를 받고 복호의 혜택을 받았다. 또한 『성주지(星州誌)』에 효행이 기록되었으며, 후산 이도복(厚山 李道復)이 「효부전」을 지었다. 이를 기리기 위해 창녕 조씨 문중에서 1930년 송곡마을 인근에 숭효각을 건립했다. 아버지는 조정환(曺珽煥), 어머니는 장무헌(張武憲)의 딸 옥산 장씨이다. 부인은 석능악(石能岳)의 딸 충주 석씨나주 임씨이다.[4]

3. 생애

조상은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51931&docId=2577670&categoryId=54289 고령군 다산면 송곡촌에서 제자를 양성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항일 유학자 시암 이직현(是菴 李直鉉), 미강 박승동(渼江 朴昇東) 등 선현(先賢)을 따르고 당대의 명유(名儒)들과 교유하였다. 문인들은 스승의 학은(學恩)에 보답하고 동문 간 우의를 돈독히 하고자 ‘삼일계(三一契)’를 결성, 1938년 강학소(講學所)인 후송재(後松齋)를 건립하였다.[1]

송시열의 후손 은진 송재성(恩津 宋在晟)이 묘갈명을 썼으며, 가장(家狀)은 조카이자 문인이었던 학산 조을환(學山 曺乙煥)이 작성하였다. 2012년 입춘(立春)에 후학들이 조상의 학덕을 기려 ‘봉강선생창녕조공송덕비(鳳岡先生昌寧曺公頌德碑)’를 후송재에 세웠다. 후송재는 2012년 8월 1일 ‘고령군 향토문화유산 유형자산 제10호’로 지정되었다.

3. 1. 유년기와 수학

조상은 10세에 아버지의 명으로 '''임재 서찬규(臨齋 徐贊奎)'''의 문하에서 학문에 대한 뜻을 굳게 하고 실천에 힘써 수제자가 되었다. 스승은 칠조훈(七條訓)을 써주며 학문적 성취를 격려하였다. 칠조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자
立志之大뜻 세우기를 크게 하라
立心之正마음 세우기를 바르게 하라
眞實心地마음을 진실하게 하라
過失必改과실(過失)을 반드시 고치라
切問近思절실하게 묻고 가까운 데서 생각하라
讀書通透글을 읽어 사리(事理)를 뚫어지게 깨달아 환하게 하라
變化氣質기질(氣質)을 다르게 변화시켜라



서찬규가 별세한 후, 조상은 조선 최후의 거유(巨儒)라 불린 성리학자인 '''간재 전우(艮齋 田愚)'''에게 제자로 받아 줄 것을 청하였다. 1917년 답신을 받고 42세에 간재의 문하생이 되어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간재에게 “의리(義理), 실천(實踐), 극기(克己), 함양(涵養)”에 관한 사조훈(四條訓)을 받고 실천하는데 전력(專力)하였다. 그는 두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의 요지로 삼았다.

3. 2. 학문 활동과 교류

조상은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51931&docId=2577670&categoryId=54289 고령군 다산면 송곡촌에서 제자를 양성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10세 때 아버지의 명으로 '''임재 서찬규(臨齋 徐贊奎)'''의 문하에서 학문에 대한 뜻을 돈독히 하고 실천하여 수제자(首弟子)가 되었다. 스승은 칠조훈(七條訓)을 써주면서 학문적 성취를 격려하였다.

칠조훈(七條訓)



서찬규가 별세한 후에는 간재 전우(艮齋 田愚)에게 제자로 받아 줄 것을 청하는 서신을 올렸다. 1917년 답신을 받고 42세에 간재의 문하생이 되어 성리학을 공부하고 “의리(義理), 실천(實踐), 극기(克己), 함양(涵養)”에 관한 사조훈(四條訓)을 받아 실천하는데 전력하였다. 그는 두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의 요지로 삼아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항일 유학자 시암 이직현(是菴 李直鉉), 미강 박승동(渼江 朴昇東) 등 선현(先賢)을 따르고 당대의 명유(名儒)들과 교유하였다. 조상의 문인들은 스승의 학은(學恩)에 보답하고 동문 간 우의를 돈독히 하고자 ‘삼일계(三一契)’를 만들고, 1938년 강학소(講學所)인 후송재(後松齋)를 건립하였다.[1]

3. 3. 후송재 건립과 교육 활동

송시열의 후손인 은진 송재성(恩津 宋在晟)이 묘갈명을 썼으며, 가장(家狀)은 조카이자 문인이었던 학산 조을환(學山 曺乙煥)이 썼다. 2012년 입춘(立春)에 후학들이 조상의 학덕을 기려 ‘봉강선생창녕조공송덕비(鳳岡先生昌寧曺公頌德碑)’를 강학소였던 후송재에 세웠다. 후송재는 2012년 8월 1일 ‘고령군 향토문화유산 유형자산 제10호’로 지정되었다.

4. 학문과 사상

봉강 조상은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상황에서 세상에 나아가기보다는 은둔하며 의리를 지키고 도(道)를 전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국화지은일자(菊花之隱逸者)'[5]에 비유했는데, 이는 간재 전우가 계화도에 들어가 은둔하며 옛것을 지키려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봉강의 이러한 출처의리는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으로 이어졌다.[5]

그의 예설(禮說)은 예법(禮法)의 기본 원칙을 지키면서 인정(人情)을 따른다는 예(禮)의 기본 정신에 충실하였다.[5]

4. 1. 기호 낙론 계승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서찬규와 전우 문하에서 수학하여, '''기호 낙론계열'''의 학맥을 이었다. 그는 문인들에게 인의예지신의 오상(五常)을 강조하였고, 부모와 임금과 스승은 나를 낳아주고 먹여주고 가르쳐주신 은혜가 똑같이 중요하므로 한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는 ‘생삼사일(生三事一)’의 자세로 가르쳤다.[5]

또한 학문은 자기 수양을 통한 참된 인간의 완성, 즉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목표로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사교론(四敎論)’에서 전통적인 유학의 교육 내용이었던 시서예락(詩書禮樂)의 공부를 강조하고, 사교를 네 계절에 분속시켜 락(樂)은 화창한 소리이니 봄에, 시(詩)는 발양(發揚)하는 것이니 여름에, 예(禮)는 닦아서 이루는 방법이니 가을에, 서(書)는 거두어 간직하는 것이니 겨울에 마땅하다는 공부 방법을 논하였다. 이러한 공부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독서(讀書)와 궁리(窮理), 역행(力行)의 모든 것을 절차탁마(切磋琢磨)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율곡우암의 심성론(心性論)을 수호, 발전시킨 전우의 성리설(性理說)을 대변하여 ‘심즉이심성일물변(心卽理心性一物辨)’이란 글을 통하여 이진상의 ‘심즉리설(心卽理說)’과 ‘심성일물설(心性一物說)’을 비판하였다. ‘성리도설(性理圖說)’을 통하여 천(天), 성인(聖人), 군자(君子), 소인(小人)으로 권역(圈域)을 구분한 것은 기(氣)의 청탁수박(淸濁粹駁)에 의한 것으로, 기질변화(氣質變化)를 통해 소인(小人)은 군자(君子)로, 군자는 성인(聖人)으로 다가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변화기질(變化氣質)의 수양론(修養論)을 주장하였다.

‘경천애인설(敬天愛人說)’을 지어 하늘을 높이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유학의 이념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서회설(鋤茴說)’에서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인욕(人慾)을 제거해야 함을 약초인 방풍(防風)밭의 김매는 것에 비유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물(四勿), 사절(四絶), 구사(九思), 구용(九容)을 제시하였다.

  • 사물(四勿): 인(仁)의 실천을 위한 네 가지 조목
  • 비례물시(非禮勿視):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라.
  • 비례물청(非禮勿聽): 예(禮)가 아니면 듣지 말라.
  • 비례물언(非禮勿言): 예(禮)가 아니면 말하지 말라.
  • 비례물동(非禮勿動): 예(禮)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 사절(四絶): 네 가지 절대적인 금지사항
  • 무의(毋意): 억측을 갖지 말라.
  • 무필(毋必): 기필코 해야 한다는 일이 없다.
  • 무고(毋固): 고집부리지 말라.
  • 무아(毋我): 자신만을 내세우지 말라.
  • 구사(九思): 군자로서 가지고 있어야 할 아홉 가지 생각
  • 시사명(視思明): 항상 눈에 가림이 없이 밝게 볼 것.
  • 청사총(聽思聰): 항상 소리를 똑똑하게 들을 것.
  • 색사온(色思溫): 항상 온화하여 성낸 빛이 없도록 할 것.
  • 모사공(貌思恭): 항상 외모를 단정히 할 것.
  • 언사충(言思忠): 항상 믿음이 있는 말만 할 것.
  • 사사경(事思敬): 항상 일을 공경하고 삼갈 것.
  • 의사문(疑思問): 항상 의심쩍은 일은 선각(先覺)에게 물어 알 것.
  • 분사난(忿思難): 항상 분한 일이 있을 때는 사리(事理)를 따져서 참을 것.
  • 견득사의(見得思義): 항상 재물(財物)을 얻게 될 때 의(義)와 이(利)를 구분하여 취사(取捨)를 가릴 것.
  • 구용(九容): 군자로서 취해야 하는 아홉 가지 자세
  • 족용중(足容重): 걸음걸이는 무겁게 하라.
  • 수용공(手容恭): 손가짐을 공손히 하라.
  • 목용단(目容端): 눈가짐은 단정히 하라.
  • 구용지(口容止): 입은 조용히 가지라.
  • 성용정(聲容靜): 말소리는 조용히 하라.
  • 두용직(頭容直): 머리 가짐을 항상 곧게 하라.
  • 기용숙(氣容肅): 숨쉬기를 정숙히 하라.
  • 입용덕(立容德): 설 때는 덕스럽게 하라.
  • 색용장(色容莊): 얼굴 모습은 장엄하게 하라.


‘혈기잠(血氣箴)’에서 모든 재앙(災殃)의 출발은 혈기(血氣)를 조절하지 못함에서 기인(基因)하였다고 보고, 혈기를 조절하여 중화(中和)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학문과 수양의 목표로 삼았다.

4. 2. 실천 유학

그는 문인들에게 인의예지신의 오상(五常)을 강조하였고, 부모와 임금과 스승은 나를 낳아주고 먹여주고 가르쳐주신 은혜가 똑같이 중요하므로 한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는 ‘생삼사일(生三事一)’의 자세로 가르쳤다.[5] 수도론적(守道論的) 출처의리(出處義理)를 고수하여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상황에서 자신이 세상으로 나가기보다는 숨어 살면서 의리를 지키고 도(道)를 전수하는 것을 당시의 상황에서 필요한 출처의리로 보았다. 간재(艮齋)가 계화도로 들어가 은둔하여 옛 것을 지키면서(去之守舊) 출처의리(出處義理)하였던 것과 맥을 같이 하였다.

학문은 자기 수양을 통한 참된 인간의 완성 즉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목표로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사교론(四敎論)’에서 전통적인 유학의 교육내용이었던 시서예락(詩書禮樂)의 공부에 대하여 강조하고 사교를 네 계절에 분속시켜 락(樂)은 화창한 소리이니 봄에 마땅하고 시(詩)는 발양(發揚)하는 것이니 여름에 마땅하고 예(禮)는 닦아서 이루는 방법이니 가을에 마땅하고 서(書)는 거두어 간직하는 것이니 겨울에 마땅하다는 공부방법을 논하였다. 이러한 공부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독서(讀書)와 궁리(窮理), 역행(力行)의 모든 것을 절차탁마(切磋琢磨)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율곡(栗谷)우암(尤庵)의 심성론(心性論)을 수호, 발전시킨 간재(艮齋)의 성리설(性理說)을 대변하여 ‘심즉이심성일물변(心卽理心性一物辨)’이란 글을 통하여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심즉리설(心卽理說)’과 ‘심성일물설(心性一物說)’을 비판하였다. ‘성리도설(性理圖說)’을 통하여 천(天), 성인(聖人), 군자(君子), 소인(小人)으로 권역(圈域)을 구분한 것은 기(氣)의 청탁수박(淸濁粹駁)에 의한 것으로 기질변화(氣質變化)를 통해 소인(小人)은 군자(君子)로 군자는 성인(聖人)으로 다가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변화기질(變化氣質)의 수양론(修養論)을 주장하였다. 또한 ‘경천애인설(敬天愛人說)’을 지어 하늘을 높이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유학의 이념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서회설(鋤茴說)’에서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인욕(人慾)을 제거해야 함을 약초인 방풍(防風)밭의 김매는 것에 비유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물(四勿). 사절(四絶), 구사(九思), 구용(九容)을 제시하였다.

  • 사물(四勿): 인(仁)의 실천을 위한 네 가지 조목으로,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며(非禮勿視), 듣지 말며(非禮勿聽), 말하지 말며(非禮勿言), 움직이지 말라(非禮勿動)는 유교(儒敎)의 네 가지 금(禁)하는 가르침.
  • 사절(四絶): 네 가지 절대적인 금지사항으로, 억측을 갖는 일이 없고(毋意), 기필코 해야 한다는 일이 없으며(毋必), 고집부리는 일도 없고(毋固), 자신만을 내세우려는 일도 없다(毋我).
  • 구사(九思): 군자로서 가지고 있어야 할 아홉 가지 생각

1. 항상 눈에 가림이 없이 밝게 볼 것(視思明)

2. 항상 소리를 똑똑하게 들을 것(聽思聰)

3. 항상 온화하여 성낸 빛이 없도록 할 것(色思溫)

4. 항상 외모를 단정히 할 것(貌思恭)

5. 항상 믿음이 있는 말만 할 것(言思忠)

6. 항상 일을 공경하고 삼갈 것(事思敬)

7. 항상 의심쩍은 일은 선각(先覺)에게 물어 알 것(疑思問)

8. 항상 분한 일이 있을 때는 사리(事理)를 따져서 참을 것(忿思難)

9. 항상 재물(財物)을 얻게 될 때 의(義)와 이(利)를 구분하여 취사(取捨)를 가릴 것(見得思義)

  • 구용(九容): 군자로서 취해야 하는 아홉 가지 자세

1. 걸음걸이는 무겁게 하라는 뜻이다(足容重)

2. 손가짐을 공손히 하라(手容恭)

3. 눈가짐은 단정히 하라(目容端)

4. 입은 조용히 가지라(口容止)

5. 말소리는 조용히 하라(聲容靜)

6. 머리 가짐을 항상 곧게 하라(頭容直)

7. 숨쉬기를 정숙히 하라(氣容肅)

8. 설 때는 덕스럽게 하라(立容德)

9. 얼굴 모습은 장엄하게 하라(色容莊).

‘혈기잠(血氣箴)’에서 모든 재앙(災殃)의 출발은 혈기(血氣)를 조절하지 못함에서 기인(基因)하였다고 보고 혈기를 조절하여 중화(中和)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학문과 수양의 목표로 삼았다.

4. 3. 심성론과 수양론

그는 학문은 자기 수양을 통한 참된 인간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심즉이심성일물변(心卽理心性一物辨)'이라는 글을 통해 이진상의 ‘심즉리설(心卽理說)’과 ‘심성일물설(心性一物說)’을 비판하였다.[5] '성리도설(性理圖說)'에서는 기질변화(氣質變化)를 통해 소인(小人)은 군자(君子)로, 군자는 성인(聖人)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수양론(修養論)을 제시하였다.[5]

또한 '경천애인설(敬天愛人說)'을 지어 하늘을 높이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유학의 이념을 실천하고자 하였다.[5] '서회설(鋤茴說)'에서는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인욕(人慾)을 제거해야 함을 약초인 방풍(防風)밭의 김매는 것에 비유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물(四勿), 사절(四絶), 구사(九思), 구용(九容)을 제시하였다.[5]

  • 사물(四勿): 인의 실천을 위한 네 가지 조목으로,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고(非禮勿視), 듣지 말고(非禮勿聽), 말하지 말고(非禮勿言), 움직이지 말라(非禮勿動)는 네 가지 금(禁)하는 가르침이다.[5]
  • 사절(四絶): 네 가지 절대적인 금지사항으로, 억측을 갖는 일이 없고(毋意), 기필코 해야 한다는 일이 없으며(毋必), 고집부리는 일도 없고(毋固), 자신만을 내세우려는 일도 없다(毋我)는 것이다.[5]
  • 구사(九思): 군자로서 가지고 있어야 할 아홉 가지 생각이다.[5]

① 항상 눈에 가림이 없이 밝게 볼 것(視思明)
② 항상 소리를 똑똑하게 들을 것(聽思聰)
③ 항상 온화하여 성낸 빛이 없도록 할 것(色思溫)
④ 항상 외모를 단정히 할 것(貌思恭)
⑤ 항상 믿음이 있는 말만 할 것(言思忠)
⑥ 항상 일을 공경하고 삼갈 것(事思敬)
⑦ 항상 의심쩍은 일은 선각(先覺)에게 물어 알 것(疑思問)
⑧ 항상 분한 일이 있을 때는 사리(事理)를 따져서 참을 것(忿思難)
⑨ 항상 재물(財物)을 얻게 될 때 의와 이(利)를 구분하여 취사(取捨)를 가릴 것(見得思義)


  • 구용(九容): 군자로서 취해야 하는 아홉 가지 자세이다.[5]

① 걸음걸이는 무겁게 하라는 뜻이다(足容重)
② 손가짐을 공손히 하라(手容恭)
③ 눈가짐은 단정히 하라(目容端)
④ 입은 조용히 가지라(口容止)
⑤ 말소리는 조용히 하라(聲容靜)
⑥ 머리 가짐을 항상 곧게 하라(頭容直)
⑦ 숨쉬기를 정숙히 하라(氣容肅)
⑧ 설 때는 덕스럽게 하라(立容德)
⑨ 얼굴 모습은 장엄하게 하라(色容莊)



'혈기잠(血氣箴)'에서는 모든 재앙(災殃)의 출발은 혈기(血氣)를 조절하지 못함에서 기인(基因)하였다고 보고, 혈기를 조절하여 중화(中和)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학문과 수양의 목표로 삼았다.[5]

4. 4. 예설(禮說)

봉강의 예설(禮說)은 예법(禮法)의 기본 원칙을 지키면서 인정(人情)을 따른다는 예(禮)의 기본 정신에 충실하였다.[5]

5. 저술 및 작품

『심성이기설(心性理氣設)』과 『대학석의(大學釋義)』가 있다. 2012년 증손 조택상(曺澤相)이 『봉강문집(鳳岡文集)』(2책)을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서문은 1967년 7월 권용현(權龍鉉)이 썼다.

6. 상훈과 추모

묘갈명은 송시열의 후손인 송재성(宋在晟)이 작성하였고, 가장(家狀)은 조카이자 문인이었던 조을환(曺乙煥)이 작성하였다.[4] 2012년 후학들이 후송재에 봉강선생창녕조공송덕비(鳳岡先生昌寧曺公頌德碑)를 건립하였다.[4] 후송재는 2012년 8월 1일 ‘고령군 향토문화유산 유형자산 제10호’로 지정되었다.[4]

참조

[1] 문서 창녕 조씨 집성촌
[2] 문서 4선 국회의원 조일환과 같은 마을
[3] 문서 태복경공파 28세손
[4] 문서 원래 성주군 벌지면에 속했던 지역, 1906년 고령군에 편입
[5] 문서 국화의 특징과 은자 같은 풍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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