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브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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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 브렛은 1973년부터 1993년까지 캔자스시티 로열스에서 활약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이다. 그는 1980년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했으며, 1976년, 1980년, 1990년에 타격왕을 차지했다.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서로 다른 세 시대를 걸쳐 타격왕을 차지한 유일한 선수이다. 통산 3,154개의 안타와 317개의 홈런을 기록했으며, 1999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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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브렛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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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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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3루수 / 지명 타자 / 1루수 |
타석 | 좌 |
송구 | 우 |
출생일 | 1953년 5월 15일 |
출생지 |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글렌데일 |
데뷔 리그 | MLB |
데뷔일 | 1973년 8월 2일 |
데뷔팀 | 캔자스시티 로열스 |
최종 리그 | MLB |
최종일 | 1993년 10월 3일 |
최종팀 | 캔자스시티 로열스 |
타격 성적 | |
타율 | 0.305 |
안타 | 3,154 |
홈런 | 317 |
타점 | 1,596 |
선수 경력 | |
소속팀 | 캔자스시티 로열스 (1973–1993) |
수상 내역 | |
올스타 | 13회 (1976–1988) |
월드 시리즈 | 우승 (1985년) |
AL MVP | 1980년 |
ALCS MVP | 1985년 |
골드 글러브 | 1985년 |
실버 슬러거 | 3회 (1980년, 1985년, 1988년) |
AL 타격왕 | 3회 (1976년, 1980년, 1990년) |
영구 결번 | |
캔자스시티 로열스 | 5번 |
명예의 전당 | |
헌액 | 국립 야구 명예의 전당 및 박물관 |
유형 | 전국 |
날짜 | 1999년 |
득표율 | 98.2% (첫 투표) |
기타 정보 | |
드래프트 | 1971년 2라운드 (전체 29위), 캔자스시티 로열스 지명 |
코치 경력 | 캔자스시티 로열스 (2013년) |
2. 어린 시절
조지 브렛은 1953년 웨스트버지니아주 글렌데일에서 스포츠를 좋아하는 가족의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큰형 켄 브렛은 1967년 월드 시리즈에 19세의 나이로 출전한 메이저 리그 투수였고, 다른 형들인 존과 바비도 마이너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브렛의 가족은 웨스트버지니아주 북부 펜핸들에서 중서부를 거쳐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 바로 남쪽에 있는 캘리포니아주 엘 세군도로 이주했다. 조지 브렛은 1971년 엘 세군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1971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 2라운드(전체 29위)에서 캔자스시티 로열스에 지명되었다.[1] 고등학교 시절 같은 팀 선수로는 투수 스코트 맥그리거 (좌완 투수)가 있었다.[2]
조지 브렛은 1953년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 스포츠를 좋아하는 가족의 4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형 켄 브렛은 1967년 월드 시리즈에 19세의 나이로 출전한 메이저 리그 투수였고, 다른 형들도 마이너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1] 브렛의 가족은 캘리포니아주 엘 세군도로 이주했고, 그는 1971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 2라운드에서 캔자스시티 로열스에 지명되었다.[1]
3. 메이저 리그 경력
프로 입단 후 유격수에서 3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고, 브룩스 로빈슨의 등번호 5번을 따라 달면서 5번은 3루수의[85] 대표 등번호가 되었다.
1994년 4월 7일, 브렛의 등번호 ''''5'''''번은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영구 결번으로 1994년 지정.
1999년에는 자격 첫 해에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13년 5월 30일, 브렛은 부진에 시달리는 로열스의 타선을 구하기 위해 타격 코치로 취임[81], 그의 영구 결번 5번이 부활했다[82]。
2014년 10월 22일, 29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로열스의 홈구장 코프먼 스타디움에서 열린 월드 시리즈 2차전 경기 전 시구자로 나섰다.
3. 1. 마이너 리그 시절
브렛은 유격수로 프로 야구 선수 경력을 시작했지만, 수비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데 어려움을 겪어 곧 3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3루수로서 그의 강한 어깨는 여전히 강점이었고, 15년 이상 그 자리를 지켰다.[3] 그는 1971년 파이오니어 리그(야구)의 루키 레벨 빌링스 머스탱스에서 .291, 1972년 캘리포니아 리그의 클래스 A 샌 호세 비스에서 .274, 1973년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20세기)의 클래스 AAA 오마하 로열스에서 .284의 타율을 기록하며 마이너 리그 생활을 했다.[3]
3. 2. 캔자스시티 로열스 (1973-1993)
George Brett|조지 브렛영어은 1973년 8월 2일 메이저 리그로 승격되어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고, 13경기에서 타율 .125를 기록했다.[5] 1974년에는 주전 3루수 자리를 확보했지만 타석에서 고전하다가 타격 코치 찰리 로의 도움으로 타격 기술을 개선, 113경기에서 타율 .282, 2홈런, 47타점을 기록했다.[5]
1975년, 처음으로 타율 3할을 넘기며(0.308) 리그 최다 안타(195개)와 3루타(13개)를 기록했다.[5][6] 1976년에는 타율 0.333으로 첫 타격왕 타이틀을 획득하며, 팀의 첫 지구 우승을 이끌었다.[5][7] 1976년부터 1978년까지 로열스는 3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서부 디비전 우승을 차지했지만,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에게 번번이 패했다.[8] 특히 1978년 ALCS 3차전에서는 캣피시 헌터를 상대로 3개의 홈런을 치기도 했다.[12]
1979년, 타율 0.329, 23홈런, 107타점, 리그 최다 안타(212개)와 3루타(20개)를 기록하며 20-20-20 클럽에 가입했다.[5] 1980년, 타율 0.390, 24홈런, 118타점으로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했고,[5] 팀은 2년 만에 지구 우승을 차지, ALCS에서 양키스를 꺾고 창단 첫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1980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에게 패했지만, 브렛은 시리즈 도중 치질 수술을 받고도 3차전에 복귀해 홈런을 치는 투혼을 발휘했다.[18]
1981년, 파업으로 단축된 시즌에도 타율 0.314를 기록했다.[5] 1983년에는 타율 0.310, 25홈런, 93타점, 리그 최다 장타율(0.563)을 기록했다.[5] 1985년, 타율 0.335, 30홈런, 112타점, 리그 최다 장타율(0.585)과 OPS(1.022)를 기록하며 팀의 지구 2연패를 이끌었고, 유일한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다.[5][25] ALCS에서는 토론토 블루제이스를 상대로 맹활약하며 시리즈 MVP를 차지했고, 1985년 월드 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꺾고 팀 창단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5][26][27][28]
1988년, 1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하여 타율 0.306, 24홈런, 103타점을 기록하며 세 번째 실버 슬러거 상을 수상했다.[5] 1990년, 타율 0.329, 리그 최다 2루타(45개)를 기록하며 세 번째 타격왕 타이틀을 획득, 3개의 다른 시대(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에 걸쳐 타격왕을 차지한 유일한 메이저 리그 선수가 되었다.[5]
1992년 9월 30일,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와의 경기에서 통산 3000안타를 달성했다.[29] 1993년, 5월 13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경기에서 통산 300홈런을 달성하고,[30] 그 해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4. 파인 타르 사건
1983년 7월 24일,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뉴욕 양키스의 경기가 양키 스타디움에서 벌어졌다. 9회초 2사 상황에서 조지 브렛은 리치 고세지를 상대로 2점 홈런을 쳐서 경기를 5-4로 역전시켰다. 하지만 빌리 마틴 양키스 감독은 브렛의 배트에 파인 타르가 규정보다 많이 묻었다고 항의했다. 야구 규정상 배트 밑에서 18인치까지만 파인 타르를 바를 수 있었지만, 브렛의 배트에는 약 24인치 정도 발라져 있었다. 팀 맥클레랜드 심판은 이를 확인하고 브렛에게 아웃을 선언, 경기는 양키스의 승리로 끝났다.
이에 로열스는 즉시 제소했다. 아메리칸 리그 리 맥페일 회장은 브렛의 홈런을 인정하고, 홈런 직후 상황부터 경기를 재개하도록 결정했다.[23] 1983년 8월 18일, 경기는 재개되었고, 결국 로열스가 승리했다.[24]
브렛은 훗날 "치질 수술을 받은 1980년 월드 시리즈 이후 치질에 관한 야유에 시달렸지만, 이 사건 이후 치질에서 송진의 이미지로 바뀌었으니 지금은 마틴에게 감사하고 있다"라고 말했다.[84]
5. 은퇴 이후
George Brett|조지 브렛영어은 선수 은퇴 후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부사장을 맡았으며, 파트타임 코치, 스프링 트레이닝 특별 강사, 임시 타격 코치, 마이너 리그 유망주 발전을 돕는 순회 강사로 활동했다.[41] 1994년 4월 7일, 그의 등번호 ''5''번은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82] 1999년에는 첫 투표에서 98.2%의 높은 득표율로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31]
2013년 5월 30일, 부진에 빠진 로열스의 타선을 이끌기 위해 잭 말루프를 대신하여 타격 코치로 임명되었고, 잠시 동안 그의 영구 결번(5번)이 부활하기도 했다.[45][46] 형제들과 함께 야구 장비 회사인 Brett Bros.를 운영하고 있다.[40][41]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ALS, 루게릭병) 기금 모금 활동[43]과 PETA 광고 캠페인에 출연하여 더운 날씨에 애완견을 차 안에 두지 말 것을 권장하는 등 사회 공헌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44]
6. 수상 및 기록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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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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