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릉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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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릉은 함경남도 안변군 서곡면 능리에 있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증조부인 익조 이행리의 능이다. 조선 개국 후 태조가 익조를 추존하고 능호를 올렸으며, 1392년 지릉이라는 능호가 정해졌다. 지릉은 여러 차례 화재 사건과 일제강점기 도굴 미수 사건을 겪었으며, 2009년 대한민국에 있는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때 포함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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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이성계가 4대조 정숙왕후 최씨의 무덤에 숙릉이라는 능호를 올렸으나, 선조의 능호 숙릉(肅陵)과 음이 같아 목릉으로 변경되었고, 대한민국 조선왕릉 세계문화유산 등재 대상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 조선의 왕릉 - 태강릉
태릉은 조선 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의 단릉으로, 원래 중종의 정릉 옆에 묻히길 원했으나 침수 문제로 현재 위치에 안장되었으며, 제향은 태릉봉향회에서 주관하고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 인근에 강릉과 태릉선수촌이 있고 2014년부터 일반에 공개되었다. - 조선의 왕릉 - 서오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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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릉 (조선) | |
|---|---|
| 기본 정보 | |
![]() | |
| 국호 | 조선 |
| 다른 이름 | 대조선(大朝鮮) 조선국(朝鮮國) |
| 위치 | 한반도 |
| 수도 | 한성부 |
| 언어 | 한국어 |
| 종교 | 유교 |
| 통치 체제 | 절대 군주제, 왕조 국가 |
| 역사 | |
| 건국 | 1392년 7월 17일 |
| 멸망 | 1897년 10월 12일 |
| 계승 | 대한제국 |
| 인구 | |
| 1405년 | 7,040,000명 |
| 1896년 | 16,950,000명 |
| 통치자 | |
| 초대 국왕 | 태조 |
| 마지막 국왕 | 고종 |
| 화폐 | |
| 통화 | 조선 통보, 상평통보 |
| 현재 국가 | |
| 기타 정보 | |
| ISO 3166-1 alpha-3 | KOR |
2. 역사
함경남도 안변군 서곡면 능리에 있는 익조 이행리의 능으로, 태조 이성계의 증조부의 무덤이다.[1] 조선 개국 직후인 1392년(태조 원년) 음력 8월 8일 태조가 4대조를 추존하고 능호를 올렸으며, 같은 해 음력 10월 28일에는 능지기 권무 2명과 수릉호를 몇 호 두고 재궁을 세웠다. 지릉에는 종7품 직장 1명과 종9품 참봉 1명을 두었다.[3][4][5]
2009년 6월 27일 대한민국에 있는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나, 지릉은 그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6]
2. 1. 능호 추존
태조 이성계의 증조부인 익조 이행리가 사망한 해는 불분명하며, 음력 9월 10일이라는 기록만 남아있다. 익조 사후 안변부 서곡현 봉룡역 북동에 무덤을 마련하였다.[2]조선 개국 직후인 1392년(태조 원년) 음력 8월 8일, 태조는 자신의 4대조를 추존하고, 아들 이방원을 보내 각 무덤에 치제를 하고 능호를 올렸다. 이때 익조의 무덤에 '''지릉'''(智陵)이라는 능호가 올려졌다.[3] 같은 해 음력 10월 28일에는 능지기 권무 2명과 수릉호를 몇 호 두고, 재궁도 세웠다.[4] 지릉에는 종7품 직장 1명과 종9품 참봉 1명을 두었다.[5]
2. 2. 화재 사건
지릉에서는 여러 차례 화재 사건이 발생하였다.- 1474년(성종 5년) 음력 10월, 지릉 재궁의 승려 홍수가 관비와 간통하고 분수승[7]의 급료를 간통한 여인에게 사사로이 준 것이 발각되었다. 참봉 안자의가 관청에 보고하여 홍수를 재궁에서 쫓아내자, 앙심을 품은 홍수가 지릉에 불을 질렀다.[8] 당시 산릉 방화죄는 명시된 것이 없어 죄목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며,[9] 결국 홍수는 능지처참형을 받고 연좌제는 적용되지 않았다.[10]
- 1624년(인조 2년) 음력 11월에도 불이 나 인조와 신하들이 3일간 변복하고 시장을 철폐하는 조치를 취했다.[11]
- 1630년(인조 8년) 음력 4월에도 불이 났다. 신하들은 재실이 떨어져 있고 지키는 이가 승려 2명뿐임을 지적하며, 재실을 서로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옮기고 참봉이나 수호군까지 모두 입직할 수 있도록 건의하여 인조가 윤허하였다.[12]
2. 3. 도굴 미수 사건
1932년 7월 19일 도굴 미수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당시 봉분을 싸고 있는 돌 때문에 도굴에 실패한 것으로 추정하였다.[13][14] 이에 대해 당시 전주이씨대동종약소에서는 이왕직에 각 왕릉의 수호 개선을 건의할 것을 결의하였다.[15]3. 세계유산 등재
2009년 6월 27일 대한민국에 있는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나, 지릉은 그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6]
참조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지릉
https://terms.naver.[...]
[2]
실록
태조실록 1권, 총서 13번째기사
[3]
실록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8일 정사 1번째기사
[4]
실록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0월 28일 병자 1번째기사
[5]
관직명사전
지릉
https://terms.naver.[...]
[6]
뉴스
‘조선왕릉’ 세계문화유산 등재
https://news.naver.c[...]
2009-06-27
[7]
문서
분향하고 수도하는 중을 뜻한다.
[8]
실록
성종실록 48권, 성종 5년 10월 17일 기해 1번째기사
[9]
실록
성종실록 48권, 성종 5년 10월 28일 경술 6번째기사
[10]
실록
성종실록 50권, 성종 5년 12월 2일 계미 3번째기사
[11]
실록
인조실록 7권, 인조 2년 11월 14일 갑자 2번째기사
[12]
실록
인조실록 22권, 인조 8년 4월 15일 갑자 1번째기사
[13]
뉴스
安陵盜堀未遂(안릉도굴미수) 파다가못파고도주
http://newslibrary.n[...]
1932-07-24
[14]
문서
처음에 [[안릉 (조선)|안릉]]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보도되었으나, 후에 지릉으로 정정하였다. 출처 중 "王家各陵寢(왕가각능침) 守護改善建議(수호개선건의)" 기사 참고
[15]
뉴스
王家各陵寢(왕가각능침) 守護改善建議(수호개선건의)
http://newslibrary.n[...]
1932-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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