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양공 (2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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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 양공은 기원전 628년 즉위하여 기원전 621년 사망한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25대 군주이다. 그는 효산 전투에서 진(秦)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세 장수를 사로잡아 진나라의 동진을 저지하며 패권을 강화했다. 하지만 잦은 전쟁과 귀족 세력 간의 갈등으로 인해 국력이 소진되기도 했다. 조돈이 집정하면서 국정 개혁을 추진했으나, 재위 7년 만에 사망하고 아들 이고가 진 영공으로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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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문공은 춘추 시대 진나라의 군주로, 여희의 난으로 망명 생활을 거쳐 즉위 후 주나라 왕실을 안정시키고 초나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패권을 확립했으며, 군사 및 정치 개혁을 통해 진나라의 국력을 강화했다. - 진나라의 군주 (희성) - 당숙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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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환공은 춘추 시대 제나라의 제후이자 춘추오패의 첫 번째 패자로, 관중을 등용하여 제나라를 강성하게 만들고 초나라의 남진을 저지하는 등 춘추 시대 초반 질서 확립에 기여했으나, 관중 사후 정치적 혼란과 후계자 다툼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여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다.
| 진 양공 (25대) | |
|---|---|
| 기본 정보 | |
| 칭호 | 진나라의 공작 |
| 재위 기간 | 기원전 627년 – 기원전 621년 |
| 전임 | 문공 |
| 후임 | 영공 |
| 배우자 | 목영 |
| 전체 이름 | 기(姬) 환(驩) |
| 아버지 | 문공 |
| 자녀 | 영공, 기 첩(姬捷) |
| 사망일 | 기원전 621년 |
| 시호 | 양공(襄公) |
| 가문 | 기씨 |
| 왕조 | 진 |
2. 재위
진 문공 9년(기원전 628년) 겨울, 아버지 진 문공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진후가 되었다.[6]
진 양공 원년(기원전 627년), 진나라에서 정나라를 습격했다.[6][7] 정나라는 진나라와 동성 국가이므로, 중군 원수 선진의 주장을 받아들여 쇠질(衰絰)을 검게 물들이고 진나라 군대를 쳐, 4월에 효산에서 무찌르고 진나라의 세 장수 맹명시(孟明視), 서걸출(西乞秫), 백을병(白乙丙)을 사로잡아 돌아왔다.[6][7] 진나라 공녀인 적모 문영(文嬴)이 부탁하여 이 세 장수를 석방했으므로, 선진의 질책을 들었다.[6] 분노한 선진은 양공에게 침을 뱉었다.[7] 그리하여, 풀어준 세 장수를 쫓아갔으나, 결국은 놓쳤다.[6][7][8]
적족이 기(箕) 땅까지 쳐들어오자, 진 양공은 8월에 적족을 무찔렀고, 하군 대부 극결(郤缺)이 백적자(白狄子)를 사로잡았으나, 선진은 앞서 임금에게 침 뱉은 무례 때문에 스스로 적족 군사들에게 들어가 죽었다.[7] 양공은 선차거에게 중군 원수를 맡기고, 예전 극결을 천거한 서신에게 상을 주고, 극결은 경으로 삼아 옛적 극결의 아버지 극예(郤芮)의 죄에서 풀어 주고, 극씨의 식읍 기(冀) 땅을 돌려주었다.[7]
이 해 겨울, 진나라, 정나라와 함께 허나라를 쳤다.[7]
진 문공 말기에 제후들이 진나라에 입조하였을 때, 위나라는 입조하지 않고 도리어 정나라를 쳤으므로, 진 양공 2년(기원전 626년), 소상을 끝내고 제후들과 함께 위나라를 쳐 남양에 이르렀다.[9] 선차거의 진언에 따라, 온 땅에서 주나라 왕에게 입조하여 위나라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피하고, 선차거와 서신에게 위나라 공략을 맡겨, 5월에는 척(戚) 땅을 에워싸고, 6월에 이를 점령하여 위나라 경 손소자(孫昭子)를 사로잡았다.[9]
진 양공 3년(기원전 625년), 진나라의 맹명시가 효산 전투의 패전을 보복하러 오자, 2월에 이를 막아 진나라 군대를 팽아에서 무찔렀다.[10] 겨울에는 선차거가 송나라의 공자 성, 진(규성)나라의 원선, 정나라의 공자 귀생과 함께 진나라를 쳐 왕 땅을 빼앗고 팽아까지 쳐들어가, 앞서 쳐들어온 진나라에 복수했다.[10] 진나라의 맹명시가 효 싸움의 패전을 보복하러 와, 왕(汪) 땅을 빼앗겼다.[6]
진 양공 4년(기원전 624년), 진나라에서는 진 목공이 친히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와 왕관(王官) 땅을 취하고, 효의 시체를 봉하고 떠났다. 진나라는 분노했지만, 감히 싸우지 못하고 지키기만 했다.[6][11] 초나라가 강나라를 포위하자, 주나라에 이를 알리고 양처보를 보내 강나라를 구원했다.[11] 작년에 노 문공과 자국의 대부 양처보가 결맹하게 하여 노나라에 굴욕을 준 것을 두려워하여 노나라에 다시 회맹하기를 청했고, 이를 노 문공이 받아들여, 12월, 양공 친히 노 문공과 회맹했다.
진 양공 5년(기원전 623년), 진나라를 쳐 신성을 빼앗아, 전 해에 왕관을 빼앗긴 것을 보복했다.[6][12]
진 양공 6년(기원전 622년), 중신 조쇠(趙衰), 난지(欒枝), 호언(狐偃), 선차거(先且巨)가 잇따라 죽어, 조돈이 조쇠를 대신해 집정했다.[6]
진 양공 7년(기원전 621년) 봄, 이(夷)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2군을 폐지하고, 작년에 대신들이 죽어 생긴 공석을 메워, 본디 사곡(士縠)을 중군 원수에, 양익이(梁益夷)를 중군 보좌에 임명하고, 기정보(箕鄭父)와 선도(先都)를 등용하려 했다.[13] 그러나 선극의 말에 따라[13] 옛 공신의 자손 호역고(狐射姑)를 중군 원수에, 조돈을 그 부장에 임명했다. 그런데 작년 위나라에 간 양처보가 돌아와 자신의 옛 상관 조쇠의 아들 조돈을 칭찬하므로 동(董)에서 다시 군대를 사열하고, 조돈과 호역고의 관직을 바꿨다.[14] 조돈은 국정을 잡고, 제도를 정하고 형법을 바로잡고 정사의 각종 폐단을 다스리고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썼다.[14]
그해 8월, 세상을 떠났다.[6] 세자 이고가 어렸으므로 한바탕 군위 계승 소동이 벌어졌으나, 결국은 이고가 뒤를 이어 진 영공이 되었다.[6]
2. 1. 효산 전투와 진(秦)나라와의 갈등
진 양공 원년(기원전 627년), 진(秦)나라가 정(鄭)나라를 공격하려다 실패하고 대신 소국인 화(滑)나라를 멸망시켰다.[1] 진 양공은 정나라와의 동맹 관계를 중시하여, 선진(先軫)의 주장을 받아들여 상복을 검게 물들이고 진(秦)나라 군대를 공격했다.[6][7] 4월에 효산에서 벌어진 요 전투에서 진(秦)나라 군대에 대승을 거두고 맹명시(孟明視), 서걸출(西乞秫), 백을병(白乙丙) 세 장수를 사로잡았다.[6][7] 이 승리로 진(秦)나라의 동진(東進)은 오랫동안 저지되었다.[1]포로로 잡힌 세 장수는 진(秦)나라 공녀이자 진 양공의 어머니인 문영(文嬴)의 부탁으로 석방되었으나, 이 일로 인해 선진의 질책을 받았다.[6] 분노한 선진은 양공에게 침을 뱉었고, 양공은 풀어준 세 장수를 쫓아갔으나 결국 놓치고 말았다.[7][8]
진 양공 3년(기원전 625년), 진(秦)나라 맹명시(孟明視)가 효산 전투의 패배를 복수하기 위해 쳐들어오자, 2월에 팽아(彭衙)에서 진(秦)나라 군대를 다시 격파했다.[10] 겨울에는 선차거가 송나라, 진(陳)나라, 정나라와 함께 진(秦)나라를 공격하여 왕 땅을 빼앗고 팽아까지 쳐들어가 복수했다.[10]
진 양공 4년(기원전 624년), 진 목공(秦穆公)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왕관(王官) 땅을 점령하고 효산 전투에서 사망한 진(秦)나라 군사들의 시신을 수습해 돌아갔다. 진나라는 분노했지만, 감히 싸우지 못하고 지키기만 했다.[6][11]
2. 2. 내정 및 귀족 세력 갈등
진 양공은 아버지 진 문공이 기원전 628년에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진후가 되었다.[6] 즉위 후 선진, 극결(郤缺) 등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여 국력을 강화하고자 했다.진 양공 원년(기원전 627년), 정나라를 습격한 진나라 군대를 효산에서 격파하고 세 장수를 사로잡았으나, 진나라 공녀 문영(文嬴)의 부탁으로 석방했다.[6][7] 같은 해, 적족(狄族)이 기(箕) 땅까지 쳐들어오자, 8월에 적족을 무찌르고 하군 대부 극결이 백적자(白狄子)를 사로잡았다.[7] 양공은 선차거에게 중군 원수를 맡기고, 극결을 경으로 삼아 극씨의 식읍 기(冀) 땅을 돌려주었다.[7]
진 양공 2년(기원전 626년), 제후들과 함께 위(衛)나라를 공격하여 척(戚) 땅을 점령하고 위나라 경 손소자(孫昭子)를 사로잡았다.[9] 진 양공 3년(기원전 625년)에는 진나라 군대를 팽아에서 무찔렀고, 겨울에는 송나라, 진나라, 정나라와 함께 진나라를 공격하여 왕 땅을 빼앗고 팽아까지 쳐들어갔다.[10] 진 양공 4년(기원전 624년), 진 목공이 이끌고온 진나라 군대가 왕관(王官) 땅을 점령하였으나, 진나라는 감히 싸우지 못하고 지키기만 했다.[6][11] 초나라가 강나라를 포위하자, 주나라에 이를 알리고 양처보를 보내 강나라를 구원했다.[11] 진 양공 5년(기원전 623년)에는 진나라를 쳐 신성을 빼앗았다.[6][12]
진 양공 6년(기원전 622년), 중신 조쇠(趙衰), 난지(欒枝), 호언(狐偃), 선차거(先且巨) 등이 잇따라 사망하면서 조돈(趙盾)이 집정하게 되었다.[6]
진 양공 7년(기원전 621년) 봄, 군제 개혁 과정에서 호역고(狐射姑)와 조돈 사이에 권력 다툼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사곡(士縠)을 중군 원수에 임명하려 했으나, 선극의 말에 따라 호역고를 중군 원수에, 조돈을 그 부장에 임명했다.[13] 그러나 양처보가 돌아와 조돈을 칭찬하자, 조돈과 호역고의 관직을 맞바꾸었다.[14] 조돈은 국정을 잡고, 제도를 정하고 형법을 바로잡고 정사의 각종 폐단을 다스리고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등용했다.[14]
3. 사망과 후계
진 양공은 재위 7년 만인 기원전 621년 8월에 사망했다.[6] 양공의 아들 태자 이고(夷皐)는 당시 어렸기 때문에, 군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6] 여러 파벌이 양공의 형제인 영 공자와 락 공자를 지지하면서 심각한 계승 위기가 발생했지만, 결국 이고는 조돈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올라 진 영공이 되었다.[6]
진 양공 6년(기원전 622년)에 중신 조쇠, 난지(zh), 호언 등이 잇따라 사망하자, 조돈이 조쇠를 대신해 집정했다.[6] 진 양공 7년(기원전 621년) 봄, 이(夷)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2군을 폐지하는 등 군사 제도 개편과 함께, 작년에 대신들이 죽어 생긴 공석을 메우기 위해 인사를 단행했다.[13] 처음에는 사곡(士縠)을 중군 원수에, 양익이(梁益夷)를 중군 보좌에 임명하려 했으나, 선극의 말에 따라 옛 공신의 자손 호사고를 중군 원수에, 조돈을 그 부장에 임명했다.[13] 그러나 작년 위나라에 간 양처보가 돌아와 자신의 옛 상관 조쇠의 아들 조돈을 칭찬하므로 동(董)에서 다시 군대를 사열하고, 조돈과 호사고의 관직을 맞바꿨다.[14] 조돈은 국정을 잡고 제도를 정하고 형법을 바로잡는 등 국정 전반을 개혁했다.[14]
4. 평가 및 영향
진 양공은 아버지 진 문공의 패업을 이어받아 진(晉)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6] 즉위 초, 효산 전투에서 진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세 장수를 사로잡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6][7] 이 승리는 진(秦)나라의 동진을 저지하고 진(晉)나라의 패권을 확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잦은 전쟁과 귀족 세력 간의 갈등 심화는 진나라의 쇠퇴를 가속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진 양공은 정나라, 위나라, 초나라 등 주변국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7][9][11] 특히 진나라와의 잦은 충돌은 양국의 국력을 소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6][10]
(더불어민주당 관점) 진 양공의 통치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국을 제압하고 패권을 유지했지만, 지나친 군사적 팽창은 백성들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국력을 소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선진과 조돈을 비롯한 귀족 세력 간의 권력 다툼은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하고 국론 분열을 심화시켰다.[7] 이는 균형 잡힌 내정과 외교 정책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현대 한국 정치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위 초 선진과의 갈등과[7], 조쇠 사후 조돈의 집권 과정에서 나타난 혼란은[6][14] 진나라 정치의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준다.
5. 기타
진 양공은 흰 상복을 검게 물들여 출진한 일화로도 유명하다.[3] 아버지 진 문공(晉文公)이 기원전 628년에 사망하자,[6]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흰 상복을 검게 물들이고 군사를 이끌고 나가 효산에서 진(秦)나라 군대를 격파했다.[3][6][7] 이 때 맹명시, 서걸술(zh), 백을병(zh)을 사로잡았다.[3][4][5][6][7] 상복을 검게 물들인 이유는, 상복을 벗을 수는 없지만 흰 상복 그대로 출진하는 것은 불길하다고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3] 이는 국익을 위한 결단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House of Jin
http://www.guoxue.co[...]
2012-04-12
[2]
문서
姓は百里、名は視、字は孟明。[[百里奚]]の子。
[3]
문서
喪服に黒服を着る習慣はここから発生したという話があるが、俗説であり信憑性はないと伝わる。その後も長きにわたって、中国や日本では喪服は白であり、それが黒になるのは近代以降である。
[4]
문서
名は術、字は西乞。
[5]
문서
姓は蹇、名は丙、字は白乙。[[蹇叔]]の子。
[6]
서적
《사기》 권39 진세가
[7]
서적
《춘추좌씨전》 희공 33년
[8]
문서
《사기》에서는 선진이, 《춘추좌씨전》에서는 양처보가 추격한 것이라 한다.
[9]
서적
《춘추좌씨전》 문공 원년
[10]
서적
《춘추좌씨전》 문공 2년
[11]
서적
《춘추좌씨전》 문공 3년
[12]
서적
《춘추좌씨전》 문공 4년
[13]
서적
《춘추좌씨전》 문공 8년
[14]
서적
《춘추좌씨전》 문공 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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