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완 (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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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완은 춘추 시대 진나라의 공자로, 진 여공의 아들이며, 진 선공의 후계 다툼에 휘말려 제나라로 망명했다. 제나라 환공은 그를 중용하려 했으나, 진완은 사양하고 공정의 관직을 맡았다. 그는 진(陳)에서 따온 전(田)을 씨로 삼았고, 후손들은 제나라에서 권력을 잡은 뒤 제나라의 공위를 찬탈하여 전제를 건국했다. 진완은 전제의 종묘에 모셔졌으며, '진경중' 또는 '전경중'으로 불리며, 태사의 예언을 성취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본디 진나라의 공자로, 진 여공의 아들이다. 진 선공 21년(기원전 672년), 선공이 사랑하는 첩의 아들 관(후의 진 목공)을 세우고자 태자 어구를 죽였다. 완은 진나라 대부 전손과 같이 태자 어구의 당이었으므로 제나라로 달아났다. 이때가 제 환공 14년이었다.[1][2]
진완(陳完)이 태어났을 때, 진후(陳侯)가 주나라 태사(太史)에게 시초점(蓍草占)을 치게 하였다. 태사는 관괘(觀卦)를 뽑고는, 진나라 본국이 쇠망할 때 이 아이의 후손이 강성(姜姓)의 나라[3]에서 흥성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또한 장인(匠人)[4]이 딸을 주려 할 때 점을 쳤는데, 5세가 지나면 정경(正卿)이 되고 8세가 지나면 누구도 맞설 수 없으리라고 했다.[2]
[1]
서적
사기 권46 전경중완세가제16
https://zh.wikisourc[...]
2. 생애
공자 완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인 이공이 진을 지나가던 주나라의 태사에게 공자 완을 점을 쳐보게 한 결과, "진과는 다른 나라에서 제후가 될 것이다"라는 예언을 얻었다.
기원전 700년에 아버지 이공이 사망하고, 숙부인 장공·선공이 잇따라 즉위하면서, 공자 완은 진공의 계승권에서 벗어나게 되지만, 진 공족으로서 별 탈 없이 성장한다.
이후, 선공의 태자 어구와 친분을 맺었지만, 기원전 670년에 선공은 총애하는 공자 관(후의 목공)을 태자 자리에 앉히기 위해 어구를 암살해 버렸고, 그 여당으로 여겨진 공자 완은 신변의 위험을 감지하고 진나라를 탈출하여 제나라로 망명한다. 이후, 모국의 이름을 씨로 삼아 진 완이라 불리게 된다.
당시 제나라 공인 환공은 진 완의 인물됨에 주목하여 경의 자리를 주려 했지만, 진 완은 망명자로서의 입장에서 이를 굳게 사양한다. 환공은 그의 공손함에 감탄하여 진 완을 백공(장인)을 통솔하는 공정의 관직에 임명한다.
완은 본국의 이름인 진(陳)에서 따서 전(田)으로 족명을 삼았다. 완의 후손들은 진씨와 전씨를 혼용했다. 《사기집해》에서는 서광이 인용한 응소의 주장을 재인용해서 주석했다. 이에 따르면, 진완이 전 땅을 식읍으로 받았기 때문에 전씨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사마정은 《사기색은》에서 진(陳)과 전(田)의 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전씨가 된 것이라고 했다. 장수절은 《사기정의》에서 완이 본국의 이름을 꺼려 진 대신 전을 족명으로 썼다고 주석했다.
사후, "'''경'''"을 시호로 받아 '''진경중'''이라 불리지만, 진씨는 후에 전씨라고도 칭하게 되어 '''전경중'''이라고도 불리게 된다.
진완의 후손들은 제나라에서 점차 권세를 잡았고, 8대 종주인 전 성자 대부터는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사실상 제나라 임금 노릇을 했으며, 11세손 제 태공이 정식으로 제후에 등극하기에 이르렀다.[1] 그리고 진 완의 자손이 강제 공실로부터 공위를 찬탈하여 전제를 건국함으로써, 진 완은 가조로서 전제의 종묘에 모셔지게 되었고, 태사의 예언은 성취된다.
2. 1. 망명 전
공자 완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인 이공은 주나라의 태사에게 아들의 점을 쳐보게 했다. 그 결과, "진과는 다른 나라에서 제후가 될 것이다"라는 예언을 얻었다.
기원전 700년에 아버지 이공이 사망하고 숙부인 장공·선공이 잇따라 즉위하면서, 공자 완은 진공의 계승권에서 벗어났지만, 진 공족으로서 별 탈 없이 성장했다.
이후, 선공의 태자 어구와 친분을 맺었다. 그러나 기원전 670년, 선공은 총애하는 아들 공자 관(후의 목공)을 태자로 삼기 위해 어구를 암살했다. 그 여당으로 여겨진 공자 완은 신변의 위험을 느껴 진나라를 탈출, 제나라로 망명하고 이후 모국의 이름을 씨로 삼아 진 완이라 불리게 되었다.
당시 제나라 공인 환공은 진 완을 경으로 삼으려 했으나, 진 완은 망명자라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환공은 그의 공손함에 감탄하여 진 완을 백공(장인)을 통솔하는 공정의 관직에 임명하였다.
2. 2. 제나라에서의 생활
본디 진나라의 공자로, 진 여공의 아들이다. 진 선공 21년(기원전 672년), 선공이 사랑하는 첩의 아들 관(후의 진 목공)을 세우고자 태자 어구를 죽였다. 완은 진나라 대부 전손과 같이 태자 어구의 당이었으므로 제나라로 달아났다. 이때가 제 환공 14년이었다.[1][2]
기원전 700년에 아버지 이공이 사망하고, 숙부인 장공·선공이 잇따라 즉위하면서, 공자 완은 진공의 계승권에서 벗어나게 되지만, 진 공족으로서 별 탈 없이 성장한다. 이후, 선공의 태자 어구와 친분을 맺었지만, 기원전 670년에 선공은 총애하는 공자 관(후의 목공)을 태자 자리에 앉히기 위해 어구를 암살해 버렸고, 그 여당으로 여겨진 공자 완은 신변의 위험을 감지하고 진나라를 탈출하여 제나라로 망명한다.
제 환공은 완을 경으로 삼으려 했으나, 완은 사양하고 공정(백공을 관리하는 관직)을 지냈다.[1][2] 당시 제나라 공인 환공은 진 완의 인물됨에 주목하여 경의 자리를 주려 했지만, 진 완은 망명자로서의 입장에서 이를 굳게 사양한다. 환공은 그의 공손함에 감탄하여 진 완을 백공(장인)을 통솔하는 공정의 관직에 임명한다.
완은 본국의 이름인 진(陳)에서 따서 전(田)으로 족명을 삼았다. 완의 후손들은 진씨와 전씨를 혼용했다. 《사기집해》에서는 서광이 인용한 응소의 주장을 재인용해서 주석했다. 이에 따르면, 진완이 전 땅을 식읍으로 받았기 때문에 전씨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사마정은 《사기색은》에서 진(陳)과 전(田)의 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전씨가 된 것이라고 했다. 장수절은 《사기정의》에서 완이 본국의 이름을 꺼려 진 대신 전을 족명으로 썼다고 주석했다. 모국의 이름을 씨로 삼아 진 완이라 불리게 된다. 사후, "'''경'''"을 시호로 받아 '''진경중'''이라 불리지만, 진씨는 후에 전씨라고도 칭하게 되어 '''전경중'''이라고도 불리게 된다.
진완의 후손들은 제나라에서 점차 권세를 잡았고, 8대 종주인 전 성자 대부터는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사실상 제나라 임금 노릇을 했으며, 11세손 제 태공이 정식으로 제후에 등극하기에 이르렀다.[1] 그리고 진 완의 자손이 강제 공실로부터 공위를 찬탈하여 전제를 건국함으로써, 진 완은 가조로서 전제의 종묘에 모셔지게 되었고, 태사의 예언은 성취된다. 공자 완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인 이공이 진을 지나가던 주나라의 태사에게 공자 완을 점을 쳐보게 한 결과, "진과는 다른 나라에서 제후가 될 것이다"라는 예언을 얻었다.
2. 3. 전씨의 번성
본디 진나라의 공자로, 진 여공의 아들이다. 진 선공 21년(기원전 672년), 선공이 총애하는 첩의 아들 관(후의 진 목공)을 세우고자 태자 어구를 죽였다.[1][2] 완은 진나라 대부 전손과 같이 태자 어구의 당이었으므로 제 환공 14년에 제나라로 달아났다. 제 환공은 완을 경으로 삼으려 했으나, 완은 사양하고 공정(백공을 관리하는 관직)을 지냈다.[1][2]
완은 본국의 이름인 진(陳)에서 따서 전(田)으로 족명을 삼았다. 완의 후손들은 진씨와 전씨를 혼용했다. 《사기집해》에서는 서광이 인용한 응소의 주장을 재인용해서 주석했다. 이에 따르면, 진완이 전 땅을 식읍으로 받았기 때문에 전씨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사마정은 《사기색은》에서 진(陳)과 전(田)의 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전씨가 된 것이라고 했다. 장수절은 《사기정의》에서 완이 본국의 이름을 꺼려 진 대신 전을 족명으로 썼다고 주석했다.
진완의 후손들은 제나라에서 점차 권세를 잡았고, 8대 종주인 전 성자 대부터는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사실상 제나라 임금 노릇을 했으며, 11세손 제 태공이 정식으로 제후에 등극하기에 이르렀다.[1]
기원전 700년에 아버지 이공이 사망하고, 숙부인 장공·선공이 잇따라 즉위하면서, 공자 완은 진공의 계승권에서 벗어나게 되지만, 진 공족으로서 별 탈 없이 성장한다. 기원전 670년 선공은 총애하는 공자 관(후의 목공)을 태자 자리에 앉히기 위해 어구를 암살해 버렸고, 그 여당으로 여겨진 공자 완은 신변의 위험을 느껴 진나라를 탈출, 제나라로 망명한다. 이후, 모국의 이름을 씨로 삼아 진 완이라 불리게 된다. 당시 제나라 공인 환공은 진 완의 인물됨에 주목하여 경의 자리를 주려 했지만, 진 완은 망명자로서의 입장에서 이를 굳게 사양한다. 환공은 그의 공손함에 감탄하여 진 완을 백공(장인)을 통솔하는 공정의 관직에 임명한다. 사후, "'''경'''"을 시호로 받아 '''진경중'''이라 불리지만, 진씨는 후에 전씨라고도 칭하게 되어 '''전경중'''이라고도 불리게 된다.
3. 시조 설화
4. 평가
참조
[2]
서적
역주 춘추좌씨전
전통문화연구회
[3]
문서
[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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