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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환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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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 환공은 춘추 시대 제나라의 군주로, 혼란스러운 정국을 겪은 후 즉위하여 관중을 재상으로 등용하고 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그는 춘추오패의 첫 번째 패자가 되어 주변 제후국들을 이끌었으나, 말년에 간신들을 등용하여 국정을 어지럽히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제 환공의 행적은 조선에서 충의와 북벌론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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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 문공은 춘추 시대 진나라의 군주로, 여희의 난으로 망명 생활을 거쳐 즉위 후 주나라 왕실을 안정시키고 초나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패권을 확립했으며, 군사 및 정치 개혁을 통해 진나라의 국력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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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환공
기본 정보
이름제 환공 (齊桓公)
강소백 (姜小白)
여 (呂)
시호환공 (桓公)
존칭공 (公)
왕조
재위 기간기원전 685년 - 기원전 643년
도읍영구 (營丘, 임치)
아버지희공
어머니위희
배우자왕희
서영
채희
장위희
소위희
정희
갈영
밀희
송화자
자녀공자 무괴
효공
소공
의공
혜공
공자 옹
제강
사망일기원전 643년 9월 12일
통치
즉위나라 제후
이전 통치자여무지
다음 통치자여무괴
가계
가문강씨
왕조강제
이미지
제 환공과 관중
제 환공 (중앙)과 관중 (오른쪽)이 오씨 사당 석조 부조에 묘사됨.

2. 즉위 전 상황

양공(襄公)은 이복 누이 문강(文姜)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고, 문강이 노나라 환공(魯桓公)에게 시집간 후에도 관계를 지속했다. 노 환공이 문강을 꾸짖자 문강은 양공에게 밀고했고, 양공은 공자 팽생(彭生)을 시켜 노 환공을 살해했다. 이후 팽생마저 죽여 사건을 은폐했다.[1] 양공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반대파를 숙청했고, 이로 인해 제나라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희공(僖公)의 아들이자 훗날 환공이 되는 공자 소백(小白)은 거(莒)로, 공자 규(糾)는 노(魯)로 망명했다.[1] 이후 양공이 사촌 공손무지에게 암살당하고, 공손무지마저 살해되자, 소백과 규는 제나라 왕위를 두고 다투게 되었다.

2. 1. 혼란스러운 제나라

희공(僖公)과 양공(襄公) 시대에 제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양공은 이복동생 문강(文姜)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고, 문강이 노나라 환공(魯桓公)에게 시집간 후에도 관계를 지속했다. 노 환공이 문강을 꾸짖자, 문강은 양공에게 밀고했고, 양공은 공자 팽생(彭生)을 시켜 노 환공을 살해했다. 이후 팽생마저 죽여 사건을 은폐했다.[1] 양공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반대파를 숙청했고, 이로 인해 제나라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2. 2. 공자들의 망명과 권력 다툼

희공(僖公)의 아들이자 양공(襄公)의 동생인 공자 소백(小白, 훗날의 환공)은 거(莒)로, 공자 규(糾)는 노(魯)로 망명했다.[1] 양공이 사촌 공손무지에게 암살당하고, 공손무지마저 살해되자, 소백과 규는 제나라 왕위를 두고 다투게 되었다.

이때, 공자 규의 심복 관중(管仲)이 소백을 암살하려 하였다. 관중이 쏜 화살은 소백의 배에 맞는 듯했으나, 실제로는 허리띠의 쇠고리에 맞았다.[1] 소백은 죽은 척하여 위기를 모면하고, 경쟁자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공자 규는 노나라 군사를 이끌고 천천히 제나라로 향했다. 그러나 소백은 고혜(高傒) 등의 도움으로 먼저 제나라에 들어가 임금이 되었고, 공자 규는 소백에게 패하여 노나라로 도망쳤다.

2. 3. 관중의 암살 시도와 소백의 즉위

공자 규의 심복이었던 관중(管仲)은 소백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관중이 쏜 화살은 소백의 허리띠 쇠고리에 맞았다.[1] 소백은 죽은 척하며 위기를 모면했고, 고혜 등의 도움으로 먼저 제나라에 입성하여 군주가 되었다. 소백은 제나라 군대를 이끌고 노나라로 도망친 공자 규를 공격했다.[1]

3. 제 환공의 업적

환공은 관중을 재상으로 등용하여 개혁을 추진, 국력과 군사력, 문화를 향상시켰다. 주(周) 왕실이 쇠퇴하여 제후 간의 대립이 심해지자, 주변 제후들은 환공에게 문제 해결을 의탁했다. 환공은 제후들을 이끌고 장강(長江) 유역의 호북성(湖北省)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초나라를 공격했다. 기원전 651년, 환공은 규구의 회맹(葵丘の会盟)을 통해 춘추오패의 첫 번째 패자가 되었다.[1]

만년에 환공은 자만하여 봉선(封禪) 의식을 행하려 했다. 봉선은 성천자(聖天子)만이 행할 수 있는 의식으로, 이는 주나라를 무시하고 스스로 천자가 되려는 것과 같았다. 관중은 이를 필사적으로 막았다.

3. 1. 관중 등용과 부국강병

포숙아의 간언으로 환공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관중을 재상으로 등용했다.[1] 관중은 정치, 경제, 군사 등 다방면에서 개혁을 추진하여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개혁으로 제나라는 다른 주나라 제후국들보다 인적,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3. 2. 패자(覇者)로서의 활약

환공은 관중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 사실에 화를 내어 관중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환공의 심복이자 관중의 친구인 포숙아의 설득으로 관중을 재상으로 임명했다.[1]

재상이 된 관중은 개혁을 추진해 국력, 군사력, 문화를 향상시켰다. 당시 주 왕실은 쇠퇴하여 제후 사이의 대립을 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관중의 개혁을 받아들인 제 환공의 명성이 주변 국가에 알려지자, 주변 제후들은 제후 사이의 문제를 환공에게 묻게 되었다. 환공은 제후들을 이끌고 남쪽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주 왕실과 제후들을 위협하던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기원전 651년 환공은 회맹을 거행해 춘추오패 중 첫 번째 패자가 되었다.[1]

제환공


제환공은 기원전 667년에 노, 송, 채, 정의 군주들을 회의에 초청하여 그들의 지도자로 선출받았다. 주혜왕은 제환공을 패자로 임명하여 왕실을 대신하여 군사 작전을 수행할 권한을 부여했다. 제환공과 관중은 "패자"의 직책을 단순한 군사력의 지위가 아닌, "천자의 권위를 회복하는" 역할로 여겼다.[1]

제환공은 주나라 여러 나라의 국가 간 관계에 관한 문제에 주혜왕을 대신하여 개입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패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 개입했다. 제환공은 연, 형, 위나라를 외부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구해냈고, 남쪽의 초의 확장을 막으려고 했다. 기원전 656년 그는 8개국의 동맹을 이끌고 초나라의 제후국인 채를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그 후 동맹은 초나라 자체를 침략했고, 결국 조약이 체결되었다. 초나라는 북쪽으로의 확장을 멈추었고, 사릉에서 강제적인 국가 간 회의에 참여하는 데 동의했다.[1]

그 후 몇 년 동안 제환공은 주 왕실의 후원 아래 수많은 국가 간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은 군사 문제부터 경제, 그리고 통치와 법률에 관한 일반적인 명령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제나라 군주는 불안정하고 분열적인 주 왕조의 영토에 어느 정도의 안정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4. 관중 사후와 몰락

기원전 645년, 재상 관중이 죽자 환공은 국정을 멀리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관중이 등용하지 말라고 한 간신들을 등용하여 국정이 혼란스러워졌다.[1] 환공이 병에 걸리자, 공자들 간에 후계자 다툼이 벌어졌고, 이 와중에 환공은 사망하였다. 제나라는 이후에도 후계자 분쟁이 잦았고, 패권은 진나라와 초나라로 넘어갔다.[1]

환공에게는 적자가 없었고, 여러 부인들에게서 얻은 서자들이 있었다.

부인아들
왕기(王姬)없음
서영(徐嬴)없음
채기(蔡姬)없음
위공기(衛共姬)무궤
소위기(少衛姬)원(혜공)
정희(鄭姬)소(효공)
갈영(葛嬴)반(소공)
밀기(密姬)상인(의공)
송화자(宋華子)



환공은 관중과 함께 소를 세자로 세웠으나, 수초 등의 힘으로 무궤를 세자로 세우는 것을 허락하였다. 관중 사후 다섯 공자들이 모두 자신을 세자로 세울 것을 요구했다. 환공 사후, 간신들이 여러 관리들을 살해하고 무궤를 왕위에 앉혔고, 소는 송나라로 도망쳤다. 이후 다섯 공자 간의 왕위 다툼으로 제나라는 패권국의 지위를 잃었다.[1]

4. 1. 간신들의 전횡과 환공의 최후

기원전 645년, 재상 관중이 죽자, 환공은 정치를 멀리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 관중이 등용하지 말라고 경고했던 역아, 수초, 공자 개방 등 이른바 '삼귀(三貴)'라고 불리는 간신들을 중용하여 나라 정치는 혼란에 빠졌다.[1]

환공이 병석에 눕자, 삼귀는 환공을 병실에 가두었고, 결국 환공은 기원전 643년 10월 9일에 굶어 죽었다.[1] 여러 공자들이 후계자 다툼을 벌이는 동안 환공의 시신은 방치되었고, 이듬해 효공 원년(기원전 642년) 8월에 태자 소(昭)가 효공으로 즉위할 때까지 67일 동안 염습되지 못했다.[1] 그 때문에 문틈으로 구더기가 기어 나왔다고 한다.[1] 제나라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후계자 다툼이 일어났고, 패권은 진과 로 넘어갔다.[1]

4. 2. 후계자 분쟁과 제나라의 쇠퇴

기원전 645년, 재상 관중이 사망하자, 환공은 국정을 멀리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관중이 등용하지 말라고 한 역아, 수초, 공자 개방 등 간신들을 등용하여 국정이 혼란스러워졌다. 환공이 병에 걸리자, 공자들 간 후계자 다툼이 벌어졌고, 환공은 이 와중에 사망하였다. 환공의 시신은 67일간 방치되었고, 관에서 구더기가 솟아 나왔다고 한다. 이후에도 제나라는 후계자 분쟁이 잦았고, 패권은 진나라와 초나라로 넘어갔다.[1]

환공에게는 적자가 없었고, 여러 부인들에게서 얻은 서자들만 있었다. 장위희의 아들 무궤, 소위희의 아들 (혜공), 정희의 아들 (효공), 갈영의 아들 (소공), 밀희의 아들 상인(의공), 송화자의 아들 옹이 그들이었다. 환공은 관중과 함께 소를 세자로 세웠으나, 옹무와 수초의 힘으로 무궤를 세자로 세우는 것을 허락했다. 관중 사후 다섯 공자들이 모두 자신을 세자로 세울 것을 요구했다. 환공 사후, 역아와 수초는 여러 관리들을 살해하고 무궤를 군위에 앉혔고, 소는 송나라로 도망쳤다. 이후 다섯 공자 간의 군위 분쟁으로 제나라는 패권국의 지위를 잃었으며, 군위 다툼을 벌인 여섯 공자 중 다섯 공자나 임금이 되었다.[1]

5. 가계

아버지제 희공
제 양공, 공자 규
누나선강, 문강
정비(正妃)왕희(王姬), 서영(徐嬴), 채희(蔡姬)
첩(妾)장위희(長衛姬), 소위희(少衛姬), 정희(鄭姬), 갈영(葛嬴), 밀희(密姬), 송화자(宋華子)
아들무궤, , , , 상인, 공자 옹(公子雍)


6. 역사적 평가


  • 환공은 춘추오패의 첫 번째 패자로, 진나라 문공과 함께 “제환진문(齊桓晉文)”이라고 불렸다.
  • 환공은 신하들에게 질문을 받았을 때 “관중에게 물어보라”고만 대답했고, 신하들이 이에 대해 묻자 관중을 얻기까지의 고생을 언급하며 관중에 대한 깊은 신뢰를 드러냈다.
  • 한비자韓非子|한비자중국어는 환공이 관중 사후 신뢰해서는 안 될 인물을 등용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사람을 보는 눈이 없고, 신하를 통솔하는 방법도 몰랐으며, 관중이 군주인 양 행동했고, 삼귀(三貴)에게 멸망당해 시체에 구더기가 끓었던 것은 그 증거라고 비판했다. 다만, 동곽아(東郭牙)의 간언을 받아들여 관중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것을 그만두었다는 일화도 있다.
  • 조선에서는 환공이 주나라에 충의를 맹세한 사실을 충의의 상징이자 존왕론의 원점으로 취급하였고,[4] 환공이 양이론으로 서벌, 남벌, 북벌을 실시한 사실은 조선북벌론의 근거가 되었다.[4]

6. 1. 긍정적 평가

관중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고, 제나라를 춘추시대 최강국으로 만들었다. 환공은 춘추오패의 첫 번째 패자로서, 국제 질서를 안정시키고 주 왕실을 보호하는 데 기여했다.[4] 회맹을 통해 춘추오패의 첫 번째 패자가 되어 중국 천하를 호령하였다.

포숙아의 설득으로 자신을 죽이려 했던 관중을 재상으로 임명하였고, 재상이 된 관중은 개혁을 추진해 국력, 군사력, 문화 향상에 성공했다. 주변 제후는 제후 사이의 문제를 환공에게 물었고, 환공은 제후를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신하들이 모든 것을 관중에게 맡기는 것에 대해 질문하자, 환공은 관중을 얻기까지의 고생을 이야기하며 관중을 얻었으니 편하게 해도 좋지 않겠냐고 대답하며 관중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조선에서는 환공이 주나라에게 충의를 맹세한 사실을 충의의 상징이자 존왕론의 원점으로 취급하였고,[4] 환공이 양이론으로 서벌, 남벌, 북벌을 실시한 사실은 조선북벌론의 근거가 되었다.[4]

6. 2. 부정적 평가

기원전 645년, 재상 관중이 죽자 국정을 돌보지 않고 방탕해졌다. 관중이 등용하지 말라고 한 간신들을 중용하여 국정이 흐트러졌다.[4] 환공이 병이 들자, 공자들의 후계자 다툼 중에 숨을 거두었고, 67일간 시신이 방치되어 관에서 구더기가 솟았다고 한다. 이후 제나라는 후계자 다툼이 잦아져 패권이 진(晉), 초(楚)로 넘어갔다.

한비자韓非子|한비자중국어는 환공이 사람을 보는 눈이 없고, 군주로서 신하를 통솔하는 방법을 몰랐으며, 관중이 군주인 양 행동했고, 삼귀(三貴)에게 멸망당해 시체에 구더기가 끓었던 것은 그 증거라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6. 3. 한국사와의 관계

조선(朝鮮)에서는 하남성(河南省)상구시(商丘市)민권현(民權縣) 규구(葵丘)에서 환공이 이미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 왕실에 충의(忠義)를 맹세한 사실이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의 근거로 활용되었다.[4] 조선 후기 북벌론은 환공이 양이(攘夷)를 명분으로 서벌(西伐), 남벌(南伐), 북벌(北伐)을 실시한 사실을 근거로 삼았다.[4] 이와 같이 조선에서 청(清)의 흥륭을 인정하지 않고, 철저하게 명(明)을 존숭한 논리적 근거가 환공의 사실이다.[4]

참조

[1] 웹사이트 Book 3. Duke Zhuang http://www2.iath.vir[...] 2017-10-10
[2] 웹사이트 Book 5. Duke Xi http://www2.iath.vir[...] 2017-08-27
[3] 서적 左伝
[4] 서적 政治家宋時烈の研究 東北大学 2014-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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