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종묘는 조선 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으로, 1394년(태조 3년)에 건립되었다. 유교의 종묘 제도를 따른 건축물로, 정전과 영녕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전에는 19칸의 묘실에 역대 왕과 왕비, 공신들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매년 5월에는 종묘제례가 거행되며, 종묘제례악에 맞춰 제사가 진행된다. 종묘는 대한민국의 사적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종묘관리소에서 관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서울특별시의 사당 - 서울 문묘
서울 문묘는 조선 태조 때 건립되어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현들을 기리는 유교 사당으로, 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 등의 시설을 갖추고 동방 18현의 위패가 함께 봉안되어 있으며 석전대제가 거행된다. - 서울특별시의 사당 - 육상궁
육상궁은 조선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이후 여러 후궁들의 사당이 합쳐져 칠궁을 이루었으며, 왕실 여성의 역사와 궁중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공간으로 현재 일부가 공개된다. - 종묘 - 궁능유적본부
궁능유적본부는 문화재청 소속 책임운영기관으로서 궁궐, 능, 원, 묘 등의 문화재와 시설물, 수목을 보존·관리하고 활용하며,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 종묘 등 주요 궁궐과 유적지, 세종대왕유적관리소를 관할하고 궁능서비스기획과와 복원정비과의 2개 과와 9개 관리소로 구성되어 있다. - 종묘 - 종묘 제례
종묘 제례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신 종묘에서 거행되는 제례 의식으로, 유교 왕실 사당 제도에서 비롯되어 현재는 전주 이씨 종친회 주관으로 매년 5월과 11월에 제례악과 일무를 포함한 전통 의식으로 봉행된다.
종묘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명칭 | 종묘 |
한글 | 종묘 |
한자 | 宗廟 |
히라가나 | そうびょう |
가타카나 | チョンミョ |
영어 | Jongmyo |
![]() | |
세계유산 정보 | |
영문명 | Jongmyo Shrine |
불문명 | Sanctuaire de Jongmyo |
국가 | 대한민국 |
기준 | (4) |
등록 년도 | 1995년 |
지정 번호 | 738 |
![]() | |
문화재 정보 | |
유형 | 사적 |
이름 | 종묘 (宗廟)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57(훈정동 1) |
시대 | 조선 |
면적 | 194,331m2 |
소유 | 국유 |
종묘 배향 | 매년 5월 첫째주 일요일 |
지정 | 1963년 1월 18일 |
문화재청 | 13,01250000,11 |
기타 | |
공식 웹사이트 | 종묘관리소 |
2. 역사
1392년 조선 태조는 즉위 12일 만에 자신의 4대조에게 목조, 익조, 도조, 환조로 왕의 칭호를 올리고, 그 비에게도 각각 효비, 정비, 경비, 의비의 존호를 올렸다.[3] 8월에는 신하를 한양에 파견하여 고려 시대 남경의 이궁을 손질케 하고 수리를 끝나는대로 한양으로 천도하고자 하였다.[3] 그러나 신하들의 반발로 천도 계획을 유보하여 할 수 없이 개성에 있던 고려 왕조의 종묘를 허물고 거기에 새 종묘를 짓도록 명하였다.[3] 그 뒤 태조는 재위 3년(1394년) 8월에 한양을 새 도읍지로 최종 결정하고 그해 10월 천도를 단행하였다.[3]
태조는 가장 먼저 종묘와 사직을 건설하였는데, 유교 이념에 따라 궁궐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왼쪽인 동쪽에 종묘를,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을 그 다음 해에 세웠다.[3] 종묘 공사는 천도하던 해 12월에 시작하여 이듬해 9월에 마쳤다.[3]
태조는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12월에 종묘 건설을 시작하여 1395년 9월에 완공하였다.[3][4] 창건 당시 종묘는 대실 7칸, 석실 5칸, 익랑 각 2칸, 공신당 5칸, 신문(神門) 3칸, 동문 3칸, 서문 1칸, 신주 7칸, 향관청 5칸, 좌우 행랑 각각 5칸, 남쪽 행랑 9칸, 재궁(齎宮) 5칸 규모였으며,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4] 종묘가 완성되자 태조는 4대조의 신주를 개성에서 옮겨와 봉안하였다.[4]
조선 시대에 종묘 정전은 태종, 세종대에 이르러 건축 형식이 정착된다.[4] 태종은 종묘 앞에 가산을 조성하고, 건물 형식을 'ㅡ'자형에서 가운데가 긴 ㄷ자형으로 고쳤다.[4]
1592년 임진왜란으로 종묘가 소실되자, 1608년에 중건되었다.[6] 중건된 종묘는 중국 고대의 제도와 다른, 고려 시대에 정착된 종묘 제도를 따랐다.[6]
현재 종묘를 구성하는 중심 건물은 종묘 정전과 영녕전으로, 태조가 종묘를 건설할 당시는 종묘 정전뿐이었다.[4] 건립 당시 종묘 정전의 감실 규모는 5칸이었으나,[4] 1421년 세종은 송나라의 예를 따라 별묘인 영녕전을 건립하고 목조의 신위를 옮겨 모셨다.[5] 영녕전 건립으로 조선 왕조의 종묘 건축 제도는 종묘와 별묘를 두게 되었고, 이후 봉안해야 할 신위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증축을 하게 된다.[5]
명종대에 이르러 종묘 정전의 부족한 감실을 해결하기 위하여 4칸이 증축되어 그 규모가 모두 11칸으로 늘어난다.[6] 그 뒤 종묘는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게 되어, 재건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이 진행되지 못하다가 마침내 선조 41년(1608년) 1월에 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다섯 달 뒤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완공하게 된다.[6] 종묘 정전은 그 뒤 영조 2년(1726년)에 4칸, 헌종 2년(1836년)에 4칸을 증축하여 지금의 모습인 19칸으로 정착하게 된다.[6]
영녕전도 정전과 더불어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뒤 1608년 종묘 중건 공사와 함께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완공되는데, 정전 4칸, 좌우 협실 각 3칸으로 모두 10칸 규모로 중건되었다.[6] 그 뒤 현종 8년(1667년) 좌우 협실 각 1칸을 증축하고, 헌종 2년(1836년) 좌우 협실 각 2칸을 증축하여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다.[6]
현재도 대한제국의 황실인 전주 이씨 종가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한국의 사적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매년 5월에는 전주 이씨 일족이 모이는 종묘제례제가 거행된다.
2. 1. 조선 건국과 종묘 창건
1392년 조선 태조는 즉위 12일 만에 자신의 4대조에게 목조, 익조, 도조, 환조로 왕의 칭호를 올리고, 그 비에게도 각각 효비, 정비, 경비, 의비의 존호를 올렸다.[3] 8월에는 신하를 한양에 파견하여 고려 시대 남경의 이궁을 손질케 하고 수리를 끝나는대로 한양으로 천도하고자 하였다.[3] 그러나 신하들의 반발로 천도 계획을 유보하여 할 수 없이 개성에 있던 고려 왕조의 종묘를 허물고 거기에 새 종묘를 짓도록 명하였다.[3] 그 뒤 태조는 재위 3년(1394년) 8월에 한양을 새 도읍지로 최종 결정하고 그해 10월 천도를 단행하였다.[3]태조는 가장 먼저 종묘와 사직을 건설하였는데, 유교 이념에 따라 궁궐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왼쪽인 동쪽에 종묘를,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을 그 다음 해에 세웠다.[3] 종묘 공사는 천도하던 해 12월에 시작하여 이듬해 9월에 마쳤다.[3]
태조는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12월에 종묘 건설을 시작하여 1395년 9월에 완공하였다.[3][4] 창건 당시 종묘는 대실 7칸, 석실 5칸, 익랑 각 2칸, 공신당 5칸, 신문(神門) 3칸, 동문 3칸, 서문 1칸, 신주 7칸, 향관청 5칸, 좌우 행랑 각각 5칸, 남쪽 행랑 9칸, 재궁(齎宮) 5칸 규모였으며,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4] 종묘가 완성되자 태조는 4대조의 신주를 개성에서 옮겨와 봉안하였다.[4]
조선 시대에 종묘 정전은 태종, 세종대에 이르러 건축 형식이 정착된다.[4] 태종은 종묘 앞에 가산을 조성하고, 건물 형식을 'ㅡ'자형에서 가운데가 긴 ㄷ자형으로 고쳤다.[4]
1592년 임진왜란으로 종묘가 소실되자, 1608년에 중건되었다.[6] 중건된 종묘는 중국 고대의 제도와 다른, 고려 시대에 정착된 종묘 제도를 따랐다.[6]
현재 종묘를 구성하는 중심 건물은 종묘 정전과 영녕전으로, 태조가 종묘를 건설할 당시는 종묘 정전뿐이었다.[4] 건립 당시 종묘 정전의 감실 규모는 5칸이었으나,[4] 1421년 세종은 송나라의 예를 따라 별묘인 영녕전을 건립하고 목조의 신위를 옮겨 모셨다.[5] 영녕전 건립으로 조선 왕조의 종묘 건축 제도는 종묘와 별묘를 두게 되었고, 이후 봉안해야 할 신위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증축을 하게 된다.[5]
명종대에 이르러 종묘 정전의 부족한 감실을 해결하기 위하여 4칸이 증축되어 그 규모가 모두 11칸으로 늘어난다.[6] 그 뒤 종묘는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게 되어, 재건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이 진행되지 못하다가 마침내 선조 41년(1608년) 1월에 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다섯 달 뒤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완공하게 된다.[6] 종묘 정전은 그 뒤 영조 2년(1726년)에 4칸, 헌종 2년(1836년)에 4칸을 증축하여 지금의 모습인 19칸으로 정착하게 된다.[6]
영녕전도 정전과 더불어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뒤 1608년 종묘 중건 공사와 함께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완공되는데, 정전 4칸, 좌우 협실 각 3칸으로 모두 10칸 규모로 중건되었다.[6] 그 뒤 현종 8년(1667년) 좌우 협실 각 1칸을 증축하고, 헌종 2년(1836년) 좌우 협실 각 2칸을 증축하여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다.[6]
현재도 대한제국의 황실인 전주 이씨 종가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한국의 사적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매년 5월에는 전주 이씨 일족이 모이는 종묘제례제가 거행된다.
2. 2. 종묘의 확장과 중건
1392년 조선 태조는 즉위 직후 4대조에게 왕의 칭호를 올리고, 개성에 있던 고려 왕조의 종묘를 허물고 새 종묘를 짓도록 명하였다.[3] 1394년 한양 천도를 결정하고,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 사직을 세웠다.[3] 종묘 공사는 1394년 12월에 시작하여 이듬해 1395년 9월에 마쳤다.[3]창건 당시 종묘는 대실 7칸, 석실 5칸, 익랑 각 2칸, 공신당 5칸, 신문(神門) 3칸, 동문 3칸, 서문 1칸, 신주 7칸, 향관청 5칸 등으로 구성되었다.[4] 1395년 10월, 태조는 4대조의 신주를 개성에서 옮겨와 봉안하였다.[4]
태종, 세종대에 건축 형식이 정착되었으며, 태종은 종묘 앞에 가산을 조성하고 건물 형식을 고쳤다.[4] 현재 종묘의 중심 건물은 종묘 정전과 영녕전이며, 영녕전은 1421년 세종 때 정전에 모시지 않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건립된 별묘이다.[4][5] 건립 당시 영녕전의 규모는 태실 4칸, 양 옆 익실 각 1칸으로 총 6칸이었다.[5]
조선 초기의 왕 가운데 태종, 세종, 세조, 성종 등은 불천위로 결정되어 종묘 정전에 모셔졌다.[6] 명종대에 종묘 정전은 4칸이 증축되어 11칸이 되었고,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8년 재건되었다.[6] 재건된 종묘는 고려 시대의 종묘 제도를 따랐으며, 이후 영조 2년(1726년)과 헌종 2년(1836년)에 각각 4칸씩 증축되어 현재의 19칸 규모가 되었다.[6]
영녕전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8년 중건되었으며, 정전 4칸, 좌우 협실 각 3칸으로 총 10칸 규모였다.[6] 이후 현종 8년(1667년)과 헌종 2년(1836년)에 증축되어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다.[6] 종묘 증축이나 수리 시에는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주로 쓰지 않던 궁궐이나 사당을 이용하였다.[6]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하면서 파괴되었고, 1608년에 재건되었다. 현재도 대한제국의 황실인 전주 이씨 종가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한국의 사적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매년 5월에는 종묘제례제가 거행된다.
2. 3. 일제강점기와 현대
1394년 이성계가 한양(현재의 서울)으로 천도하면서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1395년 9월에 종묘가 완공되었다.[3]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하면서 파괴되었고,[6] 1608년에 재건되었다.[6] 재건에 앞서 종묘 제도를 임진왜란 전의 건축 형식으로 할 것인지, 소목제(昭穆制)를 기본으로 하는 중국 주나라의 옛 제도를 따를 것인지에 관한 논의가 신하들 사이에 이루어졌으나, 결국 종묘 정전을 임진왜란 전의 형식인 11칸의 규모로 재건한다.[6] 재건된 종묘는 중국 고대의 제도와 다른, 고려 시대에 정착된 종묘 제도를 따랐다.[6] 종묘 정전은 그 뒤 영조 2년(1726년)에 4칸, 헌종 2년(1836년)에 4칸을 증축하여 지금의 모습인 19칸으로 정착하게 된다.[6]현재도 대한제국의 황실인 전주 이씨 종가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한국의 사적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매년 5월에는 전주 이씨 일족이 모이는 종묘제례제가 거행된다. 이 의식은 무형문화재 보호협약 발효 이전인 2001년에 "걸작 선언"(제1회)이 되어 "인류의 무형문화유산의 대표적인 목록"에 등재되었고, 무형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이 사실상 확정되었으나, 2009년 9월에 공식적으로 등재되었다.
3. 건축물
종묘는 제례를 위한 공간이므로 건축이 화려하지 않고 지극히 단순하고 절제되어 있다.[12] 묘정 월대와 기단 위의 건물은 신로를 표시하는 선과 몇 개의 판위(版位), 그리고 장식이 배제된 건축 구조 등 과감히 생략된 조형과 단순한 구성으로 종묘에 구현해야 할 건축 의도를 철저하게 나타내었고, 단청 또한 극도로 절제되었다.[12] 신로, 월대, 기단, 담 등 필요한 공간만 담은 구성과 구조, 장식과 색채의 간결함은 종묘 건축의 상징성을 보여준다.[12]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 프랑크 게리가 종묘를 보기 위해 가족들과 한국에 여행을 왔고 "이 같이 장엄한 공간은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고 평가했다.
- '''정전(正殿)''' - 종묘의 중심 건물. 가장 서쪽에 안치된 태조(太祖)를 비롯하여 도덕에 적합한 정치를 행했다고 여겨지는 19명의 왕과 그들의 왕비의 위패 49위가 안치되어 있다.
- : 위패가 안치된 각 방의 문인 ‘판문(板門)’은 제례 의식 때를 제외하고는 굳게 닫혀 있다. 판문의 표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곳곳에 틈이 있는데, 이는 혼이 자유롭게 출입하기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내부의 습도를 조절하기 위한 것이다.
- '''영녕전(永寧殿)''' - 1421년, 제2대 국왕 정종(定宗)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세워진 별묘. 초대 왕인 태조 이성계(太祖李成桂)의 4대까지의 조상으로 국왕으로 추존된 묵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와 그들의 왕비의 위패 등, 사후에 벼슬을 추증 받거나 정전에서 이안된 왕과 왕비의 위패 34위가 안치되어 있다.
- '''공신당(功臣堂)''' - 이씨조선의 공신 83인을 제사 지내는 곳
- '''재실(斎室)''' - 목욕하고 제의 준비를 하는 곳
- '''전사청(典祀廳)''' - 제기(祭器), 제구(祭具)를 보관하는 창고
- '''악공청(樂工廳)''' - 제사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의 대기실
3. 1. 정전

정전 일곽은 네모난 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묘정(廟庭)을 중심으로 남쪽 담 중앙에는 신문이, 동서쪽으로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는 동문과 악공과 종사원이 출입하는 서문이 각각 나 있다.[9] 신문을 들어서면 동서 109m, 남북 69m가 되는 넓은 묘정 월대가 펼쳐진다.[9] 묘정 월대는 단의 일종으로, 지면에서 단을 높여 다른 공간과 성격을 달리하며 천상으로 이어지는 공간임을 암시한다.[9] 하월대는 제관들이 제사를 드릴 때 대기하는 공간으로 헌가가 자리 잡고 일무를 추며, 상월대는 등가가 자리잡는 공간이다.[9] 그리고 묘정 월대의 한가운데로 남북을 잇는 신로(神路)가 길게 나 있다.[9]
상월대 위에 설치된 기단에는 길이가 101m인 정전 건물이 서 있는데, 현재의 정전은 매칸마다 신위를 모신 감실 19칸, 그 좌우의 협실 각 2칸, 그리고 협실 양 끝에서 남으로 직각으로 꺾여나온 동ㆍ서 월랑 5칸이 자리하고 있다.[9] 묘정 월대 남쪽 아래 동서쪽에는 공신당과 칠사당이 각각 서 있고, 서북쪽 뒤에는 제향 후 축과 폐를 불사르는 예감(망료위라고도 함)이 있으며, 동문 북쪽으로 수복방이, 둘레담 밖 서북쪽으로는 전사청과 제정이 있다.[9] 그리고 정전 서남쪽으로 악공청이 있고, 정전 서북쪽으로는 영녕전 일곽이 있다.[9]
정전에는 총 19칸의 묘실이 존재하며 다음과 같다.[9]
묘실 | 왕/황제 | 왕후/황후 | 배향공신 |
---|---|---|---|
제1실 | 태조 고황제 | 신의고황후 | 조준, 의안대군, 남재, 이제, 이지란, 남은, 조인옥 |
신덕고황후 | |||
제2실 | 태종대왕 | 원경왕후 | 하륜, 조영무, 정탁, 이천우, 이래 |
제3실 | 세종대왕 | 소헌왕후 | 황희, 최윤덕, 허조, 신개, 이수, 양녕대군, 효령대군 |
제4실 | 세조대왕 | 정희왕후 | 권람, 한확, 한명회 |
제5실 | 성종대왕 | 공혜왕후 | 신숙주, 정창손, 홍응 |
정현왕후 | |||
제6실 | 중종대왕 | 단경왕후 |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정광필 |
장경왕후 | |||
문정왕후 | |||
제7실 | 선조대왕 | 의인왕후 | 이준경, 이퇴계, 이율곡 |
인목왕후 | |||
제8실 | 인조대왕 | 인렬왕후 | 이원익, 신흠, 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 릉원대군 |
장렬왕후 | |||
제9실 | 효종대왕 | 인선왕후 | 김상헌, 김집, 송시열, 린평대군, 민정중, 민위중 |
제10실 | 현종대왕 | 명성왕후 | 정태화, 김좌명, 김수항, 김만기 |
제11실 | 숙종대왕 | 인경왕후 |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최석정, 김석주, 김만중 |
인현왕후 | |||
인원왕후 | |||
제12실 | 영조대왕 | 정성왕후 | 김창집, 최규서, 민진원, 조문명, 김재로 |
정순왕후 | |||
제13실 | 정조선황제 | 효의선황후 | 김종수, 유언호, 김조순 |
제14실 | 순조숙황제 | 순원숙황후 | 이시수, 김재찬, 김려교, 조득영, 조만영, 남연군 |
제15실 | 문조익황제 | 신정익황후 | 남공철, 김구, 조병규 |
제16실 | 헌종성황제 | 효현성황후 | 이상황, 조인영 |
효정성황후 | |||
제17실 | 철종장황제 | 철인장황후 | 김수근, 이헌구, 익평군 |
제18실 | 고종태황제 | 명성태황후 | 민영환, 박규수, 신응조, 이돈우 |
제19실 | 순종효황제 | 순명효황후 | 서정순, 송근수, 김병시, 이경직 |
순정효황후 |
3. 2. 영녕전
'''종묘 영녕전'''(宗廟 永寧殿)은 종묘 정전에서 옮겨온 신위를 모신 종묘의 별묘다.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21호로 지정되었다.[11] '영녕(永寧)'은 "조종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이다.[11] 별묘인 영녕전은 '조묘'라고도 한다.[11]세종 때 종묘 제도가 완비되면서, 정종의 신위를 종묘에 모시는 과정에서 목조의 신위를 정전에 모실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다.[11] 이에 중국 송나라의 예를 따라 별묘인 사조전을 세워 4조를 모시는 것을 참고하여, 종묘 정전 서쪽에 영녕전을 건립하고 목조의 신위를 옮겨 모시기로 결정하였다.[11]
영녕전은 네모난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 담에는 신문, 동쪽과 서쪽 담에는 각각 동문과 서분을 두어 제례시 통로를 마련했다.[11] 묘정 월대에는 신로가 나 있다.[11] 현재 건물은 중앙 정전 4칸, 좌우 협실 6칸씩 총 16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좌우 협실 양끝에 동월랑과 서월랑 5칸이 직각으로 덧붙여 있다.[11] 내부 공간 구성은 종묘 정전과 같으며, 영녕전 서남쪽에는 영녕전 악공청이 있다.[11]
영녕전 제례는 정전보다 한 단계 낮게 행해졌고, 건축 영역도 정전보다 좁다.[12] 4대조를 모신 부분만 정전과 같은 크기와 높이이고, 옆 익실은 더 작다.[12] 정전과 달리 공신당과 칠사당이 없는데, 이는 추존된 왕은 신하가 없어 함께 모시는 왕도 신하를 데리고 들어갈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12] 영녕전에 모셔진 왕의 배향공신도 종묘 배향공신이다.
영녕전에는 모두 34신위가 16감실에 모셔져 있다.[12] 단종은 복위되어 영녕전에 모셔졌지만, 연산군과 광해군은 제외되었다.[12]

3. 3. 기타 부속 건물
종묘 일곽의 주된 출입구는 외대문(外大門)인 정문(正門)이다.[7] 정문은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한 삼문 형식의 건물로, 창엽문(蒼葉門)이라고도 하였다.[7] 원래 기단이 있고 전면 중앙에 계단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정문 앞 지면이 높아져 땅에 묻히게 되었다.[7]종묘 정문을 들어서면 삼도(三道)가 북으로 길게 나 있다.[7] 널찍하고 거친 돌로 깐 삼도는 가운데가 양 옆보다 약간 높은 凸자형으로 높낮이가 다르게 되어 있다.[7] 가운데의 약간 높은 길은 신향로(神香路)이고, 동측의 낮은 길은 어로(御路) 서측은 세자로(世子路)인데, 어로는 제사 때 임금이 다니는 길이고, 세자로는 세자가 다니는 길이며, 신향로는 제향 때 향로를 받들고 다니는 길이다.[7] 이 길은 어숙실, 정전, 영녕전으로 이어지는데, 어숙실에 닿기 전에 오른쪽으로 난 갈림길에는 망묘루와 향대청이 있다.[8]
망묘루(望廟樓)는 왕이 휴식을 취하는 곳으로, 그 이름은 제향시 왕이 종묘의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언제 어떻게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며, 현재 건물 가운데 1칸이 누마루로 되어있다. 1443년(세종 25년)에 망모루 옆에 사각형의 연못이 조성되었으며 가운데 둥근 섬이 하나 있는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하다는 옛 사상에 의한 것이다. 대부분의 궁궐 연못에는 소나무가 심어져 있으나 여기에는 향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향대청은 종묘에 쓰는 향축폐(香祝幣)와 제사 예불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으로, 남북으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건물이 배치되었다.[8]

어숙실은 재궁 또는 어재실(御齋室)이라고도 하는데, 왕이 목욕재계하고 의복을 정재하여 세자와 함께 제사 올릴 준비를 하던 곳이다.[8] 제향에는 임금이 친히 올리는 친행(親行)과 세자나 대신이 임금을 대행하여 올리는 섭행(攝行)이 있다.[8] 어숙실 일곽은 둘레담과 정문, 동협문, 서협문으로 싸여 뜰을 중심으로 북ㆍ동ㆍ서쪽에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8] 북쪽의 건물은 어재실, 동쪽은 세자재실, 서쪽은 어목욕청이다.[9] 어숙실 서북쪽으로 정전이 위치하는데, 제향 때 제관은 어숙실 서협문을 지나 정전 동문을 통하여 정전에 이르게 된다.[9]
악공청은 종묘제례 때 음악을 연주하는 아악사(雅樂師)들이 대기하고 연습도 하던 건물이다. 현재는 한 채의 건물만 남아 있으며 개조된 것이어서 원형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기둥을 깎은 기법이 특이한데 둥구리 기둥(圓柱)을 15모로 접었으며 8모 기둥도 몇 개 있으나 대부분 16모 기둥을 썼다. 집 가운데에 기둥을 세워 대들보를 받치고 기둥머리가 건물의 제일 위에 설치한 마루보를 떠받치게 목재를 짠 것도 흔히 볼 수 없는 형식이다. 원래 12칸 중 2칸만 기둥을 따로 세우고 마루를 깐 툇간(退間)이었고 나머지 10칸에는 방을 들였었다. 건물 규모가 큰데 비하여 무늬를 넣지 않고 붉은색(朱色)만을 칠하였으며, 짧은 서까래를 달지 않고 처마 서까래만 걸어 꾸민 홑처마로 구성하였다.[10]
제향(祭享, 제사) 때 사용하는 각종 그릇, 기구 등을 보관하는 장소는 제기고이다. 제사 때 사용하는 그릇은 일반 그릇과 달리 정갈하고 성스러운 물건이어서 별도의 건물에 보관하여야 하는 것이다. 대개 제기고와 같은 건물은 바닥을 마루바닥으로 만든다. 마루바닥은 지면과 분리되어 있어 습기가 차지 않아 기물을 보관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고려 공민왕의 신위를 모신 공민왕 신당(恭愍王神堂)은 조선 태조가 종묘를 지을 때 공민왕의 업적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당을 짓도록 하였다. 신당 안에는 공민왕과 그의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영정과 준마도가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다시 지었으며, 봄과 가을마다 제사를 지냈다.
4. 위패 배치도
4. 1. 정전 (正殿)
종묘 정전은 조선 왕조 역대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신 건물로, 총 19개의 묘실(廟室)이 있다. 각 묘실에는 왕과 왕후의 신주가 모셔져 있으며, 일부 묘실에는 왕의 업적을 기리는 배향공신(配享功臣)의 신주도 함께 모셔져 있다.정전의 묘실별 봉안 신위는 다음과 같다.
묘실(廟室) | 제왕 | 왕후 | 배향 공신 |
---|---|---|---|
제1실 | 태조고황제 | 신의고황후 | 조준, 의안대군, 남재, 이제, 이지란, 남은, 조인옥 |
신덕고황후 | |||
제2실 | 태종대왕 | 원경왕후 | 하륜, 조영무, 정탁, 이천우, 이래 |
제3실 | 세종대왕 | 소헌왕후 | 황희, 최윤덕, 허조, 신개, 이수, 양녕대군, 효령대군 |
제4실 | 세조대왕 | 정희왕후 | 권람, 한확, 한명회 |
제5실 | 성종대왕 | 공혜왕후 | 신숙주, 정창손, 홍응 |
정현왕후 | |||
제6실 | 중종대왕 | 단경왕후 | 박원종, 성희안, 류순정, 정광필 |
장경왕후 | |||
문정왕후 | |||
제7실 | 선조대왕 | 의인왕후 | 이준경, 이황, 이이 |
인목왕후 | |||
제8실 | 인조대왕 | 인렬왕후 | 이원익, 신흠, 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 능원대군 |
장렬왕후 | |||
제9실 | 효종대왕 | 인선왕후 | 김상헌, 김집, 송시열, 인평대군, 민정중, 민유중 |
제10실 | 현종대왕 | 명성왕후 | 정태화, 김좌명, 김수항, 김만기 |
제11실 | 숙종대왕 | 인경왕후 |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최석정, 김석주, 김만중 |
인현왕후 | |||
인원왕후 | |||
제12실 | 영조대왕 | 정성왕후 | 김창집, 최규서, 민진원, 조문명, 김재로 |
정순왕후 | |||
제13실 | 정조선황제 | 효의선황후 | 김종수, 유언호, 김조순 |
제14실 | 순조숙황제 | 순원숙황후 | 이시수, 김재찬, 김이교, 조득영, 남연군, 조만영 |
제15실 | 문조익황제 | 신정익황후 | 남공철, 김로, 조병구 |
제16실 | 헌종성황제 | 효현성황후 | 이상황, 조인영 |
효정성황후 | |||
제17실 | 철종장황제 | 철인장황후 | 이헌구, 익평군, 김수근 |
제18실 | 고종태황제 | 명성태황후 | 박규수, 신응조, 이돈우, 민영환 |
제19실 | 순종효황제 | 순명효황후 | 송근수, 서정순 |
순정효황후 |
4. 2. 영녕전 (永寧殿)
종묘 영녕전(永寧殿)은 조선 왕조의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각 실에는 다음과 같이 왕과 왕비, 배향공신이 모셔져 있다.묘실(廟室) | 제왕 | 왕후 | 배향공신 |
---|---|---|---|
제1실 | 목조대왕 | 효공왕후 | |
제2실 | 익조대왕 | 정숙왕후 | |
제3실 | 도조대왕 | 경순왕후 | |
제4실 | 환조대왕 | 의혜왕후 | |
제5실 | 정종대왕 | 정안왕후 | 익안대군 |
제6실 | 문종대왕 | 현덕왕후 | 하연 |
제7실 | 단종대왕 | 정순왕후 | |
제8실 | 덕종대왕 | 소혜왕후 | |
제9실 | 예종대왕 | 장순왕후 | 박원형 |
안순왕후 | |||
제10실 | 인종대왕 | 인성왕후 | 홍언필, 김안국 |
제11실 | 명종대왕 | 인순왕후 | 심연원, 이언적 |
제12실 | 원종대왕 | 인헌왕후 | |
제13실 | 경종대왕 | 단의왕후 | 이유, 민진후 |
선의왕후 | |||
제14실 | 진종소황제 | 효순소황후 | |
제15실 | 장조의황제 | 헌경의황후 | 민백상, 이종성 |
제16실 | 의민황태자 영왕 | 의민황태자비 |
연산군과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종묘에 배향되지 못했다. 단종은 숙종 때 복위되어 종묘에 모셔졌다. 성종의 계비 제헌왕후 윤씨, 연산군의 왕비 중전 신씨, 선조의 추존 왕비 공성왕후 김씨, 광해군의 왕비 중전 류씨, 숙종의 제2 계비 중전 장씨 등은 왕비 자리에서 쫓겨나 종묘에 모셔지지 못했다. 문종의 왕비 현덕왕후 권씨,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 중종의 왕비 단경왕후 신씨는 폐위되었다가 사후 복권되어 종묘에 모셔졌다.
5. 종묘제례
종묘제례는 왕실의 조상을 추모하는 국가의 제례로서, 조선 시대의 모든 제례 가운데 가장 격식이 높은 의식이었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하였다.[12] 조선 시대의 종묘 제례는 해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지내는 대향(大享, 四時大享)과 섣달 그믐에 지내는 납일제(臘日祭), 영녕전에서 거행하는 춘추(春秋) 제사, 그리고 속절(俗節), 삭망에 치르는 향사(享祀) 외에 종묘에 와서 빌거나 고하는 기고(祈告) 의식, 햇과일이나 햇곡식 등 새로운 물건이 나왔을 때 신물을 바치는 천신제(薦新祭), 그리고 왕세자, 왕비, 왕세자빈이 종묘 영녕전에 와서 비는 알묘(謁廟) 의식 등이 있었다.[13] 조선 시대 종묘 제례는 횃불과 초를 밝히고 한밤중에 봉행하였는데, 1969년부터 해마다 한 차례씩 올리다가 1971년 이후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매년 5월 첫 일요일 낮에 정전과 영녕전에서 각각 한차례 올리고 있다.[13]
종묘제례에 임하는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하기 위하여 행사 집사관은 7일 전부터, 기타 제례 참석자는 3일 전부터 제계를 한다.[13] 종묘 제례는 종묘제례악에 맞추어 신을 영접하고 음식과 술을 올려 즐겁게 해드린 다음 신을 보내드리는 순서로 행해진다.[13]
종묘제례악은 악(樂), 가(歌), 무(舞)를 갖추어 연주하는 음악이다.[14] '악'은 악기의 편성과 연주, '가'는 악장의 구성과 가락, '무'는 일무(佾舞)의 의물(儀物)을 뜻한다.[14] 음악은 등가(登歌)와 헌가(軒歌)로 구성된다.[14] 동양의 고전인 『악기(樂記)』에서, '악, 가, 무를 모두 갖춘 것을 악(樂)이라 한다'고 한 것처럼, 종묘제례악은 이 세가지를 모두 갖춘 보기 드문 문화유산이다.[14]
5. 1. 종묘제례악
악공청은 종묘제례 때 음악을 연주하는 아악사(雅樂師)들이 대기하고 연습도 하던 건물이다. 현재는 한 채의 건물만 남아 있으며 개조된 것이어서 원형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기둥을 깎은 기법이 특이한데 둥구리 기둥(圓柱)을 15모로 접었으며 8모 기둥도 몇 개 있으나 대부분 16모 기둥을 썼다. 집 가운데에 기둥을 세워 대들보를 받치고 기둥머리가 건물의 제일 위에 설치한 마루보를 떠받치게 목재를 짠 것도 흔히 볼 수 없는 형식이다. 원래 12칸 중 2칸만 기둥을 따로 세우고 마루를 깐 툇간(退間)이었고 나머지 10칸에는 방을 들였었다. 건물 규모가 큰데 비하여 무늬를 넣지 않고 붉은색(朱色)만을 칠하였으며, 짧은 서까래를 달지 않고 처마 서까래만 걸어 꾸민 홑처마로 구성하였다.[10]종묘제례는 왕실의 조상을 추모하는 국가의 제례로서, 조선 시대의 모든 제례 가운데 가장 격식이 높은 의식이었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하였다.[12] 조선 시대의 종묘 제례는 해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지내는 대향(大享, 四時大享)과 섣달 그믐에 지내는 납일제(臘日祭), 영녕전에서 거행하는 춘추(春秋) 제사, 그리고 속절(俗節), 삭망에 치르는 향사(享祀) 외에 종묘에 와서 빌거나 고하는 기고(祈告) 의식, 햇과일이나 햇곡식 등 새로운 물건이 나왔을 때 신물을 바치는 천신제(薦新祭), 그리고 왕세자, 왕비, 왕세자빈이 종묘 영녕전에 와서 비는 알묘(謁廟) 의식 등이 있었다.[13] 조선 시대 종묘 제례는 횃불과 초를 밝히고 한밤중에 봉행하였는데, 1969년부터 해마다 한 차례씩 올리다가 1971년 이후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매년 5월 첫 일요일 낮에 정전과 영녕전에서 각각 한차례 올리고 있다.[13]
종묘제례에 임하는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하기 위하여 행사 집사관은 7일 전부터, 기타 제례 참석자는 3일 전부터 제계를 한다.[13] 종묘 제례는 종묘제례악에 맞추어 신을 영접하고 음식과 술을 올려 즐겁게 해드린 다음 신을 보내드리는 순서로 행해진다.[13]
종묘제례악은 악(樂), 가(歌), 무(舞)를 갖추어 연주하는 음악이다.[14] '악'은 악기의 편성과 연주, '가'는 악장의 구성과 가락, '무'는 일무(佾舞)의 의물(儀物)을 뜻한다.[14] 음악은 등가(登歌)와 헌가(軒歌)로 구성된다.[14] 동양의 고전인 『악기(樂記)』에서, '악, 가, 무를 모두 갖춘 것을 악(樂)이라 한다'고 한 것처럼, 종묘제례악은 이 세가지를 모두 갖춘 보기 드문 문화유산이다.[14]
6. 종묘와 관련된 논란
6. 1. 이재명 대표의 종묘 방문 논란
7. 현대적 의의
8. 종묘관리소
'''종묘관리소'''는 종묘 내 문화재와 시설 보호 및 관리를 목적으로 설치된 대한민국 문화재청 소속 기관이며, 종묘 내에 위치하고 있다. 문화재와 기타 시설·수목 관리, 관람료 징수 및 기타 종묘관리소의 운영에 관한 업무를 맡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
[2]
서적
국조오례의
[3]
서적
2004
[4]
서적
2004
[5]
서적
2004
[6]
서적
2004
[7]
서적
2004
[8]
서적
2004
[9]
서적
2004
[10]
간행물
악공청
[11]
서적
2004
[12]
서적
2004
[13]
서적
2004
[14]
서적
200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