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나라
1. 개요
제나라는 중국 고대 국가로, 기원전 11세기 주나라가 건국될 때 강태공에게 봉해진 땅에서 시작되어 강제(姜齊)와 전제(田齊) 시대를 거쳐 기원전 221년 진나라에 멸망했다. 강제 시대에는 제 환공이 춘추 오패 중 한 명으로 꼽히며 강성했으나, 환공 사후 내분으로 쇠퇴했다. 이후 전씨가 권력을 장악하여 전제 시대를 열었고, 위왕 시기에 국력이 강성해져 왕을 칭하기도 했으나, 연합군의 공격으로 쇠퇴하여 결국 진나라에 멸망했다. 제나라는 어업과 제염, 철 생산으로 경제적 부를 쌓았고, 특히 수도 임치는 상업이 발달한 대도시였다. 또한 직하학궁을 통해 학문과 사상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으며, 관중, 안영, 손자, 맹자 등 다양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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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호 | 제(齊) |
|---|---|
| 로마자 표기 | Qi |
| 고대 중국어 발음 | *Dzəj |
| 존속 기간 |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21년 |
| 정치 체제 |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323년: 제후국 기원전 323년 – 기원전 221년: 왕국 |
| 수도 | 영구 (기원전 11세기–기원전 866년) 박고(기원전 866년–기원전 859년) 임치(기원전 859년–기원전 221년) |
| 종교 | 조상 숭배 중국 민간 신앙 |
| 통화 | 도자 |
| 건국 | 강태공의 봉건 (기원전 1046년) |
|---|---|
| 멸망 | 진나라에 의해 정복됨 (기원전 221년) |
| 이전 | 박고 |
| 이후 | 진나라 |
| 군주 칭호 | 제후 |
|---|---|
| 주요 인물 | 제 환공 (기원전 685년–기원전 643년) 제 경공 (기원전 547년–기원전 490년) 안영 (기원전 556년–기원전 500년) 관중 (기원전 685년–기원전 6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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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 -
전제 (전국)
전제는 진나라에서 망명한 전완을 시조로, 기원전 386년 제나라를 찬탈하여 건국되었으며, 효율적인 정치와 인재 등용으로 강성했으나 민왕 이후 쇠퇴하여 기원전 221년 진나라에 멸망한 국가이다. -
제나라 -
북제
북제는 고환의 아들 고양이 동위 효정제로부터 선양받아 건국되었으며, 경제력을 바탕으로 돌궐과 연합하여 북주와 대립했으나, 후주 시기의 실정과 내부 갈등으로 쇠퇴하여 577년 북주에 의해 멸망한 남북조 시대의 북조 국가이다. -
허베이성의 역사 -
하북도
하북도는 당나라가 설치한 행정 구역으로, 현재의 허베이성, 산둥성 전역, 허난성 북부를 관할했으며, 안사의 난 이후 절도사 체제로 전환되어 당나라 쇠퇴의 원인이 되었다. -
허베이성의 역사 -
북한 (십국)
북한은 오대 십국 시대에 유숭이 건국한 국가로 후한의 부흥을 표방하며 요나라의 지원을 받아 후주 및 송나라와 대립하다가 979년 송나라에 멸망했다. -
중국사 -
순치
순치는 청나라 세조 순치제의 연호로, 1644년 명나라 멸망 후 베이징 천도와 함께 사용되어 1661년까지 지속되었으며, 당시 다양한 세력의 연호와 병존했다. -
중국사 -
광서제
광서제는 도광제의 손자이자 순친왕 혁현의 아들로, 1875년 청나라의 황제가 되었으며, 서태후의 섭정 아래 무술변법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유폐된 채 사망했다.
2. 역사
제나라의 역사는 크게 강제(姜齊) 시대와 전제(田齊) 시대로 구분된다.
강제(姜齊)는 주나라 무왕이 강태공을 제나라에 봉하면서 시작되었다. 강태공은 현지 풍속을 존중하는 정책으로 나라를 안정시켰고, 주 성왕은 제나라에게 주변 지역을 토벌할 권한을 부여했다. 이후 제나라는 영토를 확장하며 춘추 시대 초기에 강국으로 성장했다. 특히 바다와 접해 소금과 철 생산이 가능하여 자원이 풍족했다. 제 환공은 관중을 등용하여 행정 개혁을 단행하고 패자(覇)로 인정받아 춘추 오패의 첫 번째 패자가 되었다. 그러나 환공 사후,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해 제나라는 크게 약화되었다. 경공은 안영과 사마양저를 등용하여 잠시나마 소패업을 이루기도 했다.
기원전 672년, 진(陳)나라에서 망명 온 전완의 후손들이 제나라에서 강력한 대부 가문이 되었다. 이들은 경공의 실정을 틈타 세력을 키웠고, 기원전 489년 경공 사후에는 전항이 간공을 죽이고 평공을 왕으로 세웠다. 이후 전씨는 3대에 걸쳐 사실상 왕 노릇을 했다.
전제(田齊)는 기원전 386년, 전화가 강공을 몰아내고 제나라 제후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제 위왕 때 행정 개혁으로 국력이 강해져 왕을 칭했고, 제 민왕 때는 진(秦)나라와 함께 동제, 서제로 불릴 정도로 강성해져 송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지나친 팽창 정책으로 연나라를 주축으로 하는 제후 연합군이 일어났고, 악의가 이끄는 연합군에 의해 멸망 직전에 놓이기도 했다. 전단의 활약으로 나라를 회복했지만, 제왕 건은 진 시황제에게 항복하여 제나라는 멸망했다.
2.1. 강제 (姜齊)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킨 무예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강태공은 산둥반도와 그 주변 지역을 영지로 받아 제나라를 건국하였다. 강태공은 주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주나라 무왕의 아버지인 문왕을 섬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무왕을 섬기는 재상이 되었다. 강태공은 현지 풍속을 존중하는 정치를 펼쳐 제나라를 안정시켰다.
무왕 사후, 강태공은 주공의 섭정 시대에 삼감의 난이라는 반란이 실패로 끝나는 동안에도 충성을 지켰다. 이 반란에는 상나라 왕자 무갱이 제나라 영토 내에 있던 동이 세력인 燕国중국어, 서, 포구와 함께 가담하였다. 반란은 기원전 1039년에 진압되었지만, 죽간에는 포구의 원주민들이 약 10년 동안 계속 반란을 일으켰다가 기원전 1026년경 두 번째로 진압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왕은 제나라에게 "동쪽은 바다, 서쪽은 황하, 남쪽은 목릉, 북쪽에 이르는 지역의 5후 9백이 죄를 범했을 경우, 그들을 토벌해도 괜찮다"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후 제나라는 영토를 확장하여 춘추 시대 초기에 동쪽의 강국으로 성장했다. 제나라는 바다와 접하고 있어 소금 생산과 철 생산이 가능해 자원이 풍족했다.
서주 시대의 전해지는 기록은 부족하지만, 주나라 희왕(재위 기원전 865~858년)이 제나라를 공격하여 애공(哀公)을 삶아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선왕(재위 기원전 827~782년) 시대에는 지역적인 계승 다툼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원주민 동이 민족들은 주나라 문화권에 동화되었다.
2.1.1. 태공망의 봉건
주 문왕의 재상 강태공은 주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워 산둥반도 지역에 봉해졌다. 그러나 당시 이 지역은 동이족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지 하사는 사실상 동중국 지역 세력들을 토벌하라는 명에 가까웠다. 강태공은 제나라 제후가 되어 현지 풍속을 존중하는 정치를 펼쳐 제나라를 안정시켰다. 관숙, 채숙의 반란 이후, 성왕은 제나라에게 "동쪽은 바다, 서쪽은 황하, 남쪽은 목릉, 북쪽에 이르는 지역의 5후 9백이 죄를 범했을 경우, 그들을 토벌해도 괜찮다"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후 제나라는 영토를 확장하여 춘추 시대 초기에 동쪽의 강국으로 성장했다. 제나라는 바다와 접하고 있어 소금 생산과 철 생산이 가능해 자원이 풍족했다.
2.1.2. 제 환공의 패업
환공은 관중을 등용하여 주나라를 대신하여 제후들을 통제하였고, 남쪽의 초나라의 위협에 대항했다. 縣중국어 제도를 수립하고 소금과 철에 대한 국가 독점을 포함하는 행정 개혁을 단행하여 법가 사상의 특징을 보였다. 기원전 667년, 환공은 주나라 혜왕에게 패자(覇)로 인정받아 춘추 오패의 첫 번째 패자가 되었다. 다른 국가들로부터 공물을 받았고, 왕실에 다른 누구보다 많은 공물을 바치는 영예를 얻었으며 그의 출병 명령은 왕 자신의 명령만큼이나 구속력이 있었다. 이러한 권위를 바탕으로 환공은 노나라의 권력 투쟁에 개입하고, 침략하는 서융 유목민들로부터 연을 보호하고, 위와 형을 침략한 북적 유목민들을 몰아내고 백성들에게 식량과 보호 병력을 제공했으며, 8개국 동맹을 이끌고 채를 정복하여 초의 북쪽으로의 확장을 막았다.
그러나 환공 사후,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해 제나라는 크게 약화되었고 패권 시대는 막을 내렸다.
2.1.3. 환공 사후의 분쟁
환공 사후, 환공의 아들들 사이에 후계 다툼이 일어나 제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환공이 태자로 지목한 효공 대신 환공의 총신 역아와 수초가 지지한 무궤가 뒤를 이었으나, 무궤는 효공을 앞세운 송 양공 주도의 제후 연합군과 국내의 호응에 쫓겨나 죽었다. 이후 소공, 혜공, 의공 세 형제가 효공의 즉위를 저지하여, 송 양공이 재차 제나라를 침입하고 나서야 효공이 즉위할 수 있었다. 효공의 치세에는 일단 안정되었으나, 이미 패자의 권위는 잃은 상태였다.
효공 사후, 효공의 아들을 또 다른 환공의 총신이자 소공의 당인 공자 개방이 죽이고 소공이 즉위했다. 소공이 죽은 후에는 소공의 아들 사가 즉위했으나, 얼마 못 가 의공이 죽이고 의공이 즉위하는 등 혼란은 계속 이어졌다. 이 혼란은 환공이 죽은 지 35년 후에 혜공이 등극함으로써 겨우 종식되었다.
그동안 소공 시대에 이미 패자는 진나라의 문공이 되었고, 소공은 문공의 패업에 협조했다. 문공이 패자가 되고 제나라도 국력을 유지했지만, 중원의 주도권은 북쪽의 진(晉)나라와 남쪽의 초나라의 패권 다툼으로 옮겨졌다. 그 상황에 제나라와 진(秦)나라가 관련되는 것이 춘추 시대 중기의 흐름이 되었다.
2.1.4. 경공의 소패업
장공 때, 재상 최저는 자신의 아내가 장공과 사통한 것을 알고 장공을 시해하였다. 최저는 장공의 아우 경공을 세웠지만, 후에 경씨에게 죽었다. 기원전 532년, 경공은 안영을 등용하고 군사 분야에는 사마양저를 등용하였다.
2.1.5. 전씨의 전횡
기원전 672년, 진(陳)나라에서 망명 온 전완의 후손들이 제나라에서 강력한 대부 가문이 되었다. 전씨는 경공의 실정을 틈타 민심을 얻고 세력을 강화했으며, 안영은 진나라의 양설힐과 대화하면서 전씨 왕조가 들어설 것을 예언했다.
기원전 489년, 경공이 죽자 전걸은 경공의 유지를 어기고 도공을 왕으로 세웠다. 전걸의 아들 전항은 도공을 죽이고 간공을 왕으로 세웠다. 간공은 총신 감지와 함께 전항에 맞섰으나, 전항은 감지와 간공을 모두 죽이고 평공을 왕으로 세웠다. 이후 전씨는 평공, 선공, 강공 3대에 걸쳐 전항 - 전반 - 전백 - 전도자 - 전화로 이어지며 사실상 왕 노릇을 했다.
2.2. 전제 (田齊)
기원전 386년, 전화가 강공을 몰아내고 제나라 제후가 되면서 전제(田齊) 시대가 시작되었다. 위왕 때 행정 개혁으로 국력이 강해져 왕을 칭했고, 제 민왕 때는 진(秦)나라와 함께 동제, 서제로 불릴 정도로 강성해져 송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민왕의 지나친 팽창 정책과 외교적 충돌로 연나라를 주축으로 하는 제후 연합군이 일어났고, 악의가 이끄는 연합군에 의해 제 민왕이 살해되고, 거와 즉묵을 제외한 모든 성읍이 함락되어 멸망 직전에 놓이기도 했다. 제 양왕이 즉위해 항전을 계속했으며, 전단이 계략으로 연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회복했다.
제 양왕의 뒤를 이은 제왕 건은 진나라와 친하게 지내며 다른 나라들이 멸망하는 것을 방관했다. 결국 위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멸망하고 나서야 위협을 느꼈으나, 기원전 221년 진 시황제가 침공하자 항복하여 제나라는 멸망했다.
2.2.1. 전제의 건국과 발전
기원전 386년에 전화가 강공을 몰아내고 제나라 제후가 되었다. 위왕은 행정 개혁을 통해 국력을 증대시키고 왕을 칭했으며, 기원전 4세기에는 제 민왕이 진(秦)나라와 함께 동제, 서제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다. 또한 송나라를 멸망시켰다.
2.2.2. 쇠퇴와 멸망
제 민왕의 지나친 팽창 정책과 외교적 충돌은 연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제후 연합군의 침략을 불러왔다. 악의가 이끄는 연합군은 제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으며, 제 민왕은 이 과정에서 살해되었다. 거와 즉묵을 제외한 모든 성읍이 함락될 정도로 제나라는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제 민왕의 아들 제 양왕이 즉위하여 항전을 계속했으며, 전단이 악의와 연나라 사이를 이간질하고, 새로 부임한 연나라 장수 기겁을 격파하여 제나라를 부흥시키는 데 성공했다.
제 양왕의 뒤를 이은 제왕 건은 진나라와의 친선 관계를 유지하며 다른 나라들이 진나라에 의해 멸망하는 것을 방관하였다. 결국 위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멸망하고 나서야 진나라의 위협을 인지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려 했으나, 기원전 221년 진 시황제의 침공을 막아낼 힘이 없었다. 제왕 건은 스스로 항복하였고, 이로써 제나라는 멸망하였다.
3. 역대 군주
제나라의 역대 군주는 강성(姜姓)의 강제(姜齊)와 전성(田姓)의 전제(田齊)로 나뉜다.
3.1. 강제 (강성 왕조)
| 칭호 | 이름 | 재위 (기원전) | 관계 | 비고 |
|---|---|---|---|---|
| 태공 齊太公 | 상(尚) | 11세기 | 주 무왕에게 봉해짐, 영취(營丘)에 도읍 | |
| 정공 齊丁公 | 급(伋) | 10세기 | 태공의 아들 | 전통적으로 태공의 아들로 여겨짐 |
| 을공 齊乙公 | 득(得) | 10세기 | 정공의 아들 | |
| 계공 齊癸公 | 자모(慈母) | 약 10세기 | 을공의 아들 | |
| 애공 齊哀公 | 불진(不辰) | 9세기 | 계공의 아들 | 주 의왕에게 삶아 죽임을 당함 |
| 호공 齊胡公 | 정(靜) | 9세기 | 계공의 아들 | 보구(博姑)로 도읍을 옮김, 헌공에게 살해됨 |
| 헌공 齊獻公 | 산(山) | 859?–851 | 계공의 아들 | 도읍을 린치로 옮김 |
| 무공 齊武公 | 수(壽) | 850–825 | 헌공의 아들 | |
| 려공 齊厲公 | 무기(無忌) | 824–816 | 무공의 아들 | 호공의 아들의 지지자들에게 살해됨. |
| 문공 齊文公 | 적(赤) | 815–804 | 려공의 아들 | |
| 성공 齊成公 | 열(說) | 803–795 | 문공의 아들 | |
| 전장공 齊前莊公 | 구(購) | 794–731 | 성공의 아들 | 64년간 재위 |
| 희공 齊僖公 | 록부(祿甫) | 730–698 | 전장공의 아들 | |
| 향공 齊襄公 | 제아(諸兒) | 697–686 | 희공의 아들 | 누이인 문강과 근친상간을 저지르고, 그의 남편인 노환공을 살해하고, 제나라를 정복하고, 사촌 무지에게 살해됨 |
| 없음 | 무지 無知 | 686 | 향공의 사촌, 전장공의 손자 | 용린(雍林)에게 살해됨. |
| 환공 齊桓公 | 소백(小白) | 685–643 | 향공의 동생 | 춘추오패 중 첫 번째, 제나라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함. 신하들에게 굶어 죽음 |
| 없음 | 무규 無虧 | 643 | 환공의 아들 | 소공의 지지자들에게 살해됨 |
| 효공 齊孝公 | 조(昭) | 642–633 | 환공의 아들 | 제나라의 태자 |
| 소공 齊昭公 | 범(潘) | 632–613 | 환공의 아들 | 그의 지지자들이 소공의 아들을 살해함 |
| 없음 | 사 舍 | 613 | 소공의 아들 | 삼촌 상인에게 살해됨 |
| 의공 齊懿公 | 상인(商人) | 612–609 | 사의 삼촌, 환공의 아들 | 두 신하에게 살해됨 |
| 혜공 齊惠公 | 원(元) | 608–599 | 환공의 아들 | 롱디 침략자들을 물리침 |
| 경공 齊頃公 | 무야(無野) | 598–582 | 혜공의 아들 | 진에게 안전(安전)에서 패배함 |
| 령공 齊靈公 | 환(環) | 581–554 | 경공의 아들 | 라이를 병합함; 진에게 평음 전투에서 패배, 도읍인 린치가 불탐 |
| 후장공 齊後莊公 | 광(光) | 553–548 | 령공의 아들 | 최주의 도움으로 야(牙)를 죽이고 즉위, 최주의 아내와 간통하다가 최주에게 살해됨 |
| 제경공 齊景公 | 저구(杵臼) | 547–490 | 후장공의 이복형제 | 최주를 죽임. 유명한 재상 안영을 재상으로 두었음 |
| 안여자 安孺子 | 차(荼) | 489 | 경공의 막내아들 | 천씨에 의해 폐위되고 도공에게 살해됨. 안여자라고도 불림 |
| 도공 齊悼公 | 양생(陽生) | 488–485 | 경공의 아들 | 신하, 아마도 전항에게 살해됨 |
| 간공 齊簡公 | 임(壬) | 484–481 | 도공의 아들 | 전항에게 살해됨 |
| 평공 齊平公 | 오(驁) | 480–456 | 간공의 형제 | |
| 선공 齊宣公 | 적(積) | 455–405 | 평공의 아들 | |
| 강공 齊康公 | 대(貸) | 404–386 | 선공의 아들 | 전씨의 제태공에게 폐위되고 379년에 죽음 |
3.2. 전제 (전씨 왕조)
기원전 386년에 전화가 강공을 몰아내고 제나라 제후가 되었다. 위왕은 행정 개혁을 통해 국력을 증대하며 왕을 일컬었고, 기원전 4세기에는 민왕이 진(秦)나라와 중국을 양분하여 동제, 서제를 일컬을 정도의 세력을 자랑했다. 또한 송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민왕의 지나친 팽창 정책과 외교적 충돌로 인해 연나라를 주축으로 하는 제후 연합군이 일어났고, 악의를 앞세운 연합군에 의해 제 민왕은 살해당했다. 즉묵과 거莒를 제외한 모든 성읍이 함락되며 멸망 위기에 놓였으나, 민왕의 아들 양왕이 즉위하여 항전을 이어갔다. 전단이 악의와 연나라 사이를 이간시키고, 새로 온 대장 기겁을 무찌르며 나라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양왕의 뒤를 이은 제왕 건은 진나라와 친교를 맺고 다른 나라들이 차례로 진나라에 멸망하는 것을 수수방관했다. 마침내 위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망하고 나서야 위협을 느꼈으나, 기원전 221년 진 시황제(진)의 침공을 막아낼 능력이 없었다. 결국 제왕 건이 항복하면서 제나라는 멸망하였다.
4. 문화
제나라는 춘추 전국 시대에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특히 사상과 학문 분야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보였는데, 전국 시대에는 임치(臨淄)의 기자학당(稷下學宮)으로 유명했다. 당시 중국 전역의 저명한 학자들이 이곳을 방문했으며, 현대 학계에서는 기자학당을 물리적인 기관이 아니라 지적 활동에 종사하는 후원받는 학자들의 비공식적인 협력체로 이해하고 있다. 기자학파의 업적 중 하나는 『염철춘추(晏子春秋)』이다.
공자(孔子)는 제나라에서 연주되는 소악의 완벽한 연주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순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소악은 노래와 춤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음악이었다.
서주 시대에는 청동 예술이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제나라에서 제작된 “풍굉(豊觥)”이나 “제후이(斉侯匜)”와 같은 청동기 명품이 알려져 있다. 제후이는 현재 상하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제후가 부인을 위해 만들게 한 수기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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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吳起)는 저서 『무자(吳子)』에서 제나라 백성은 본성이 완고하고 나라가 부유하지만, 통치자와 관리들은 오만하고 백성을 돌보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4.1. 경제와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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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는 현재의 산둥성 북부를 중심으로 춘추 전국 시대 동쪽의 강국이었으며, 어류와 소금 생산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했다. 제철업도 성행했고 견직물 생산도 활발했다.
춘추 전국 시대에는 품질 유지, 보관, 휴대가 용이한 청동 화폐가 일반화되었지만, 제나라에서는 조, 연, 중산국과 마찬가지로 도전(도화)이 사용되었다. 도전은 수렵이나 어로에 사용되는 작은 칼이 원형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관리나 병사 외에 일반 백성들도 노동의 대가로 화폐를 이용한 임금을 지급받기 시작했다. 『晏子春秋』에는 제나라 안영이 공사(公事)로 인해 백성들에게 임금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제나라의 수도 임치(臨淄)는 7만 호를 거느린 대도시였다. 상업이 발달하여 귀족들의 궁전과 종묘가 즐비했고, 시장에는 각지의 산물이 넘쳐났다. 사람들은 우(竽), 금(琴), 서(瑟)와 같은 악기 연주를 즐겼고, 투계(闘鶏), 옥치기(玉けり), 장기(將棋)와 같은 오락을 즐겼다. 거리는 마차가 끊임없이 오갔고, 사람들은 서로 어깨를 스칠 정도로 붐볐다고 전해진다.
4.2. 사상과 학문
제나라는 학문과 사상의 중심지로 유명했다. 특히 수도 린즈(臨淄)의 직문(稷門) 근처(稷下)에 위치한 직하학궁(稷下學宮)은 백가쟁명이라 불리는 다양한 사상과 학문이 교류하고 발전하는 장이 되었다.
기원전 4세기 제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위왕과 선왕은 여러 지역의 학자들을 초빙하여 직하학궁에 머물게 하면서 학문과 사상 연구, 저술 활동을 지원했다. 이들은 “직하의 학사”, “직하 선생” 등으로 불렸으며,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 도교의 시조 장자(莊子)
* 음양가의 주연(鄒衍)
* 순우곤(淳于髠)
* 도가의 전편(田駢)
* 법가적 성향도 가진 신도(慎到)
* 도가의 접여(接予), 환연(環淵)
* 성악설을 주장한 유가의 순자(荀子)
* 백마비마설로 유명한 아설(兒説)
* 묵가 계통이면서 도가이기도 한 송규(宋銒), 윤문(尹文)
* 병법가 손빈(孫臏)
직하학궁의 학사 수는 위왕 때 72명, 선왕 때에는 약 1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성선설로 유명한 맹자(孟子) 역시 제나라에 벼슬을 하러 왔으나, 봉급만 받고 논쟁만 하는 학사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을 거부하고 선왕의 스승으로서 대우받기를 원했다.
직하학궁의 학사들은 매일 토론을 벌였고, 이를 통해 다양한 사상과 학문이 접촉하고 상호 이해를 넓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형성된 학문을 직하의 학이라고 부른다. 직하의 학사들은 토론을 통해 변론술을 연마하고 논리를 발전시켰으며, 이들은 전국 시대에 변자(弁者) 또는 찰자(察者)라고 불렸다. 제나라는 기원전 3세기까지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4.3. 건축
제나라는 잘 정돈된 도시와 도로를 건설한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제나라의 수도 임치(臨淄)는 격자 모양으로 깔끔하게 정비된 도로와 직사각형 모양의 도시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궁궐은 남쪽을 향해 전략적으로 배치되었으며, 궁궐의 동쪽에는 조상 묘(종묘)가, 서쪽에는 신전이 위치하여 균형을 이루었다. 궁궐 앞에는 조정이, 뒤에는 도시가 있는 형태였다. 이러한 도시 설계 방식은 후대 도시 설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성읍'(城邑)으로 알려진 소규모 영지는 제나라 전역에 존재했다. 이들은 대개 남북으로 450m, 동서로 395m 크기였으며,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중앙에는 거의 완벽한 정사각형 모양의 안마당이 있었다.
제나라 만리장성(齊長城)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만리장성 중 하나이다. 기원전 441년에 진과 월의 공격을 막기 위해 건설이 시작되었고, 전국 시대 동안 건설이 완료되어 주, 노, 초 등의 적대 국가로부터 제나라를 방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성벽은 오늘날 제남의 창칭 구 광리 마을에서 시작하여 산둥성 중부의 산맥을 가로질러 칭다오시의 황해까지 이어지며, 총 길이는 약 600km이다. 성벽의 대부분은 현재까지 남아 있다.
5. 천문학
제나라(齊)는 중국 별자리에서 두 가지 형태로 표현된다. 사상 중 하나인 현무(玄武)의 이십팔수 중 하나인 여자수에 속한 "열두 나라(十二國)" 별자리에서는 염소자리 키 별로 표현된다. 또, 천시 구역의 "좌벽(左壁)" 별자리에서는 헤르쿨레스자리 112 별로 표현된다.
6. 주요 인물
제나라는 태공망 강상으로부터 시작된 강제(姜齊)와 전완으로부터 시작된 전제(田齊) 두 시기로 나뉜다.
강제 시기 주요 인물로는 제 환공의 재상 관중, 제 경공의 재상 안영, 『손자병법』의 저자 손자, 『손빈병법』의 저자 손빈 등이 있다.
전제 시기에는 직하학궁에서 활동한 춘우곤, 맹자, 순자 등이 주요 인물로 꼽힌다. 전단은 연나라에 의해 멸망 직전까지 몰렸던 제나라를 구한 장수이다.
6.1. 강제 주요 인물
* 管仲중국어(관중)(기원전 720년~기원전 645년): 제 환공의 재상으로, 제나라를 당대 최강의 패자 중 하나로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 鮑叔중국어(포숙): 환공에게 관중을 추천했다. 사람들은 환공을 패자로 만든 관중보다 관중의 능력을 간파하고 계속 신뢰했던 포숙을 더 칭찬했다.
* 晏嬰중국어(안영)(기원전 578년~기원전 500년): 제 경공의 승상으로, 『연자춘추』의 저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 孫子중국어(손자)(기원전 544년~기원전 496년): 중국의 전략가이자 작가로, 『손자병법』의 저자로 유명하다. 실존 인물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 孫臏중국어(손빈)(?-기원전 316년): 『손빈병법』으로 알려진 군사 전략가이다.
* 陳完중국어(진완): 진에서 망명한 공자. 제 환공은 진완의 인물됨에 주목하여 경의 자리에 앉히려 했으나, 진완은 망명자로서 이를 사양했다. 환공은 그의 겸손함에 감탄하여 진완을 백공(직인, 기능공)을 통솔하는 공정(工正)에 임명했다.
* 田恒중국어(전항): 제의 대부이자 전씨의 종주. 제 도공이 살해되고 간공이 즉위하자, 闞止중국어(감지)와 함께 좌우 재상이 되었다. 간공을 살해하고, 그의 동생 강오(평공)를 옹립하여 제후로 즉위시켰다. 이후 전항은 제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 田襄子중국어(전상자): 전항 사후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선공을 섬겼다. 전반은 형제와 일족을 모두 제나라 도읍의 대부로 삼았다. 조, 위, 한과 사신을 교류하며 제나라의 외교 관계를 안정시켰다.
6.2. 전제 주요 인물
* 관중 (기원전 720~645): 제 환공의 재상으로, 제나라를 강대국으로 이끌었다.
* 연영 (기원전 578~500): 제 경공의 재상으로, 『연자춘추』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 손자 (기원전 544~496): 『손자병법』의 저자로 유명한 군사 전략가이다. 실존 인물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 손빈 (?~기원전 316): 『손빈병법』으로 알려진 군사 전략가이다. 『손빈권』을 창시했다고도 전해진다.
* 춘우곤 (기원전 386~310): 직하학궁의 관리이자 뛰어난 학자였다.
* 맹자 (기원전 372~289): 저명한 유학 철학자 중 한 명이다.
* 순자 (기원전 313~238): 50세에 직하학궁에 합류한 철학자로, 『순자』로 알려져 있다.
* 전단: 연(燕)나라에 의해 멸망 직전까지 몰렸던 제나라를 구한 장수이다.
* 태사첨중국어
* 광장: 위왕, 선왕, 민왕을 섬긴 명장이다.
* 전기중국어: 계릉 전투와 마릉 전투에서 제나라 군대를 이끌었으며, 제나라의 패업을 지탱했다.
* 모초
* 조발
* 왕손가(王孫賈)
* 추기(鄒忌)
* 후승중국어: 제왕 건의 어머니 군왕후의 사촌 동생으로, 승상이었다. 진나라로부터 뇌물을 받고 진나라의 입장에 맞춰 주장했다.
* 전영: 위왕의 막내아들. 맹상군의 아버지이다. 위왕·선왕을 섬기며 재상을 지냈고, 설(薛, 현재의 산둥 성 짜오좡 시 텅저우 시)에 봉해졌다.
* 전문: 전국사군 중 한 명으로, '계명구도' 고사의 주인공이다.
7. 주요 사건
다음은 제나라의 주요 사건들이다.
| 사건명 | 내용 |
|---|---|
| 장공의 전투 | 제나라 장공은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차례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
| 규구의 회맹 | 환공이 주최한 회맹으로, 주나라 왕실로부터 제나라 환공이 패자 지위를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
| 강제 멸망 | 강(姜)씨 제나라가 멸망하고, 전(田)씨가 제나라를 차지하게 된 사건이다. |
| 계릉의 전투 | 위위구조 고사의 유래가 된 전투로, 제나라가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 위나라를 공격했다. |
| 마릉의 전투 | 기원전 341년, 위나라와 제나라가 격돌한 전투이다. 제나라의 압승으로 끝나 위의 쇠퇴를 가져왔고, 제나라는 진나라와 함께 대륙을 양분하는 대세력으로 성장했다. |
| 연나라 공격 | 기원전 314년, 연나라에서 "자지의 난"이 발생하자, 제나라는 관장(匡章)을 보내 연나라를 공격했다. |
| 추사(垂沙) 전투 | 기원전 301년, 제나라, 한나라, 위나라가 연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
| 함곡관 전투 | 기원전 298년부터 기원전 296년까지 제나라, 한나라, 위나라가 합종하여 진나라의 함곡관을 공격했고, 진나라로부터 화의를 얻어냈다. |
| 제진상호제(齊秦互帝) | 기원전 288년, 진나라 소양왕은 서제(西帝), 제나라 민왕은 동제(東帝)를 칭하며 조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소대(蘇代)의 설득으로 민왕은 왕호를 다시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해 진나라도 왕호를 회복했다. |
| 송나라 멸망 | 기원전 286년, 제나라는 송나라의 내란에 개입하여 송나라를 멸망시켰다. |
| 제서의 전투 | 기원전 284년, 연나라, 진나라, 한나라, 조나라, 위나라 5국의 합종군이 제나라 군대를 대파한 전투이다. 제나라는 수도 임치를 포함한 70여 개 성을 빼앗기고 거와 즉묵만 남게 되었다. |
| 전단의 복국 | 전단(田單)이 활약하여 연나라에게 빼앗겼던 70여 성을 되찾은 사건이다. 전단은 반간계를 사용하여 연나라 장군 악의를 해임시키고, 화우계를 이용해 연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
| 제나라 정벌 | 기원전 221년, 진왕 정이 왕번(王賁)에게 제나라 정벌을 명령하여 제나라가 멸망했다. 제나라 군대는 진나라 군대의 기습에 와해되었고, 전건(田建)은 항복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