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검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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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주검무는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된 궁중무용으로, 신라 시대에 기원하여 고려 시기까지 가면을 쓰고 추어졌으며 조선 순조 때 문헌에 다시 등장한다. 대한제국 고종 연간까지 진주감영의 교방청에서 관기를 교육했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최순이가 후배 양성을 시작하며 진주검무의 전승이 이루어졌다. 진주검무는 숙은사위, 앉은사위 등 다양한 춤사위와 8명의 무원이 추는 8검무 형식을 특징으로 하며, 도드리 장단으로 시작하여 다양한 타령 장단을 혼용하는 독특한 반주 음악을 사용한다. 현재는 김순녀, 성계옥, 정금순 등이 전수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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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검무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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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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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 국가무형문화재 |
지정 번호 | 12 |
지정일 | 1989년 3월 20일 |
전승지 | 진주시 판문동 산171-1 |
전승자 | 성계옥, 김순녀, 정금순 |
문화재청 문화재 식별 코드 | 17,00120000,38 |
2. 역사
1967년 1월 16일에 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된 진주검무는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궁중무용 중에서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검무이다.[1]
660년 경 신라시대에 발생된 춤으로, 고려 말까지는 가면을 쓰고 연출되었는데, 당시 문인이었던 이담이나 이유원의 시에도 그 출전이 남아 있다.[1] 그 후 조선 초기까지 문헌에 기록이 없다가 순조 때 궁중 《정재무도홀기(呈才舞蹈笏記)》에 다시 나타난다.[1] 이 책에는 민간에서 시작된 검무가 궁중으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추측되며, 진주검무의 유래가 이것에서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1]
고종 연간까지 진주감영에서 관기를 교육하고 감독하는 부서인 교방청(敎坊廳)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최순이(崔順伊, 일명 完子, 1884~1969)라는 무녀(舞女)가 13세 때 진연도감청에 선상기로 뽑혀 올라가 1904년부터 궁중무희로 활동했다.[1]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그녀는 낙향하여 진주로 돌아왔지만 그때는 진주감영이 폐쇄되고, 교방청도 해산되었다.[1]
그 후 교방청은 일본인 감독 하에 기생조합 형태로 유지되었는데, 최순이는 1918년부터 후배양성을 시작하였다.[1] 당시 그녀가 검무를 비롯해 여러 가무를 전승하며 길러낸 제자들은 진주검무 최초의 선구자가 되었는데, 김자진(金子眞, 1967년~1978년), 서상달(徐上達, 1903년~1967년), 강귀례(姜貴禮, 1906년~1978년), 이윤례(李潤禮, 1903년~1999년), 최예분(崔禮分, 1912년~1993년), 김순녀(金順女, 1926년~ ) 등이 대표적이며, 이들로 인해 진주검무가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 12호로 지정받게 되었다.[1]
1968년 8월부터 후계자 양성을 위해 전수사업을 시작하여, 이윤례, 김자진으로부터 성계옥(成季玉), 정필순, 정금순 등이 제1기생으로 전수를 받았고, 이후 최예분, 강귀례로부터 김연이, 정금순이 전수를 받았으며, 이음전, 김순녀로부터 서정남, 조숙희 등이 전수를 받았다.[1]
이 중 성계옥은 1978년 6월 20일 기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아, 진주검무와 전통문화 예술분야에 헌신적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는데 현재까지도 진주검무보존회 회장을 맡아 전수자를 양성하고 있다.[1] 정필순은 1982년에 보유자 후보로 선정되었으나, 99년 사망으로 해제되었고 정금순은 2001년 보유자로 인정받았다.[1]
2. 1. 기원 및 초기 역사
1967년 1월 16일에 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된 진주검무는 현존하는 궁중무용 중 가장 역사가 오래되었다.[1]660년 경 신라시대에 발생한 춤으로, 고려 말까지 가면을 쓰고 연출되었으며, 당시 문인 이담과 이유원의 시에 그 출전이 남아 있다.[1] 조선 순조 때 궁중 《정재무도홀기(呈才舞蹈笏記)》에 따르면, 민간에서 시작된 검무가 궁중으로 유입되었고, 이것이 진주검무의 유래가 되었다.[1]
대한제국 고종 연간까지 진주감영에 관기를 교육하고 감독하는 부서인 교방청(敎坊廳)이 존재했다.[1] 무녀(舞女) 최순이(崔順伊, 1884~1969)는 13세에 진연도감청 선상기로 뽑혀 1904년부터 궁중무희로 활동했다.[1]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진주감영이 폐쇄되고 교방청이 해산되자, 최순이는 낙향하여 1918년부터 후배 양성을 시작했다.[1] 그녀가 검무를 비롯한 여러 가무를 전승하며 길러낸 제자들은 김자진(金子眞, 1967년~1978년), 서상달(徐上達, 1903년~1967년), 강귀례(姜貴禮, 1906년~1978년), 이윤례(李潤禮, 1903년~1999년), 최예분(崔禮分, 1912년~1993년), 김순녀(金順女, 1926년~ ) 등이며, 이들은 진주검무 최초의 선구자가 되었다.[1]
1968년 8월부터 후계자 양성을 위한 전수사업이 시작되어, 성계옥(成季玉), 정필순, 정금순 등이 제1기생으로 전수를 받았다.[1] 성계옥은 1978년 6월 20일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아 진주검무보존회 회장을 맡아 전수자를 양성하고 있다.[1] 정금순은 2001년 보유자로 인정받았다.[1]
2. 2. 조선 시대
고려 말까지 가면을 쓰고 연출되었던 진주검무는 조선 초기까지 문헌에 기록이 없다가 순조 때 궁중 《정재무도홀기(呈才舞蹈笏記)》에 다시 나타난다.[1] 이 책에는 민간에서 시작된 검무가 궁중으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추측되며, 진주검무의 유래가 이것에서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1]
고종 연간까지 진주감영에서 관기를 교육하고 감독하는 부서인 교방청(敎坊廳)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최순이(崔順伊, 일명 完子, 1884~1969)라는 무녀(舞女)가 1904년부터 궁중무희로 활동했다.[1]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최순이는 낙향하여 진주로 돌아왔지만, 진주감영이 폐쇄되고 교방청도 해산되었다.[1]
이후 교방청은 일본인 감독 하에 기생조합 형태로 유지되었는데, 최순이는 1918년부터 후배양성을 시작하였다.[1] 당시 그녀가 검무를 비롯해 여러 가무를 전승하며 길러낸 제자들은 진주검무 최초의 선구자가 되었는데, 김자진(金子眞, 1967년~1978년), 서상달(徐上達, 1903년~1967년), 강귀례(姜貴禮, 1906년~1978년), 이윤례(李潤禮, 1903년~1999년), 최예분(崔禮分, 1912년~1993년), 김순녀(金順女, 1926년~ ) 등이 대표적이며, 이들로 인해 진주검무가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 12호로 지정받게 되었다.[1]
1968년 8월부터 후계자 양성을 위해 전수사업을 시작하여, 성계옥, 정필순, 정금순 등이 제1기생으로 전수를 받았고, 이후에도 여러 명의 전수자들이 진주검무를 이어받았다.[1] 이 중 성계옥은 1978년 6월 20일 기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아 현재까지도 진주검무보존회 회장을 맡아 전수자를 양성하고 있다.[1] 정필순은 1982년에 보유자 후보로 선정되었으나, 99년 사망으로 해제되었고 정금순은 2001년 보유자로 인정받았다.[1]
2. 3. 일제강점기
대한제국 고종 연간까지 진주감영에는 관기를 교육하고 감독하는 부서인 교방청(敎坊廳)이 존재했다.[1] 1910년 경술국치로 진주감영이 폐쇄되고 교방청이 해산되자, 궁중 무희였던 최순이(崔順伊, 1884~1969)는 1918년부터 후배 양성을 시작하였다.[1]그녀가 검무를 비롯한 여러 가무를 전승하며 길러낸 제자들은 진주검무 최초의 선구자가 되었는데, 김자진(金子眞, 1967년~1978년), 서상달(徐上達, 1903년~1967년), 강귀례(姜貴禮, 1906년~1978년), 이윤례(李潤禮, 1903년~1999년), 최예분(崔禮分, 1912년~1993년), 김순녀(金順女, 1926년~ ) 등이 대표적이며, 이들로 인해 진주검무가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 12호로 지정받게 되었다.[1]
1968년 8월부터 후계자 양성을 위해 전수사업을 시작하여, 성계옥(成季玉), 정필순, 정금순 등이 제1기생으로 전수를 받았다.[1] 이 중 성계옥은 1978년 6월 20일 기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았고, 정금순은 2001년 보유자로 인정받았다.[1]
2. 4. 광복 이후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교방청은 일본인 감독 하에 기생조합 형태로 유지되었는데, 최순이는 1918년부터 후배 양성을 시작하였다.[1] 당시 그녀가 검무를 비롯해 여러 가무를 전승하며 길러낸 제자들은 진주검무 최초의 선구자가 되었는데, 김자진, 서상달, 강귀례, 이윤례, 최예분, 김순녀 등이 대표적이며, 이들로 인해 진주검무가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 12호로 지정받게 되었다.[1]1968년 8월부터 후계자 양성을 위해 전수사업을 시작하여, 이윤례, 김자진으로부터 성계옥, 정필순, 정금순 등이 제1기생으로 전수를 받았고, 이후 최예분, 강귀례로부터 김연이, 정금순이 전수를 받았으며, 이음전, 김순녀로부터 서정남, 조숙희 등이 전수를 받았다.[1]
이 중 성계옥은 1978년 6월 20일 기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아, 진주검무와 전통문화 예술분야에 헌신하였고 현재까지도 진주검무보존회 회장을 맡아 전수자를 양성하고 있다.[1] 정필순은 1982년에 보유자 후보로 선정되었으나, 99년 사망으로 해제되었고 정금순은 2001년 보유자로 인정받았다.[1]
3. 형식
진주검무는 한삼을 끼고 무릎을 굽혀 도는 숙은사위, 앉아서 추는 앉은사위, 허리를 앞으로 엎쳤다가 뒤로 제치며 빙빙 도는 연풍대가락, 맨손으로 팔을 펴는 손 사위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이 다른 검무에 비해 모두 독특하다.
다른 검무에서는 처음에 맨손으로 춤을 시작하여 칼을 어우른 다음 칼을 들어 춤추지만, 진주검무는 한삼을 끼고 춤을 추다가 한삼을 빼고 맨손으로 다양한 무태를 보인다. 다른 검무는 대부분 4인에 의하여 추어지는 4검무(四劍舞)이지만 진주검무는 8인의 무원에 의하여 연희되는 8검무(八劍舞)이다.[2]
또한 다른 검무는 타령장단으로 시작하여 타령장단 일색으로 추어지는데 반하여, 진주검무는 도드리장단으로 시작하여 타령장단·허튼 타령장단·타령장단·자진 타령장단·자진모리·허튼 타령장단 순으로 이어지는 형식으로 타령장단에 느린 타령장단을 혼용하고 몹시 빠른 타령장단까지도 사용한다.
진주검무에 사용되는 악기는 북, 장고, 대금, 해금, 박, 피리 한 쌍으로 구성된다. 반주장단 순서는 긴염불 27장단, 타령 58장단, 도드리(허튼타령) 68장단, 느린타령 5장단, 도드리(허튼타령) 74장단, 자진모리 15장단이다.[3]
3. 1. 춤사위
진주검무는 한삼을 끼고 무릎을 굽혀 도는 숙은사위, 앉아서 추는 앉은사위, 허리를 앞으로 엎쳤다가 뒤로 제치며 빙빙 도는 연풍대가락, 맨손으로 팔을 펴는 손 사위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이 다른 검무에 비해 모두 독특하다. 다른 검무에서는 처음에 맨손으로 춤을 시작하여 칼을 어우른 다음 칼을 들어 춤추지만, 진주검무는 한삼을 끼고 춤을 추다가 한삼을 빼고 맨손으로 다양한 무태를 보인다.[2]다른 검무는 대부분 4인에 의하여 추어지는 4검무(四劍舞)이지만 진주검무는 8인의 무원에 의하여 연희되는 8검무(八劍舞)이다.[2] 또한 다른 검무는 타령장단으로 시작하여 타령장단 일색으로 추어지는데 반하여, 진주검무는 도드리장단으로 시작하여 타령장단·허튼 타령장단·타령장단·자진 타령장단·자진모리·허튼 타령장단 순으로 이어지는 형식으로 타령장단에 느린 타령장단을 혼용하고 몹시 빠른 타령장단까지도 사용한다.
진주검무에 사용되는 악기는 북, 장고, 대금, 해금, 박, 피리 한 쌍으로 구성된다. 반주장단 순서는 긴염불 27장단, 타령 58장단, 도드리(허튼타령) 68장단, 느린타령 5장단, 도드리(허튼타령) 74장단, 자진모리 15장단이다.[3]
3. 2. 인원 구성
진주검무는 한삼을 끼고 무릎을 굽혀 도는 숙은사위, 앉아서 추는 앉은사위, 허리를 앞으로 엎쳤다가 뒤로 제치며 빙빙 도는 연풍대가락, 맨손으로 팔을 펴는 손 사위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이 다른 검무에 비해 모두 독특하다.[2] 다른 검무는 대부분 4인에 의하여 추어지는 4검무(四劍舞)이지만 진주검무는 8인의 무원에 의하여 연희되는 8검무(八劍舞)이다.[2]다른 검무에서는 처음에 맨손으로 춤을 시작하여 칼을 어우른 다음 칼을 들어 춤추지만, 진주검무는 한삼을 끼고 춤을 추다가 한삼을 빼고 맨손으로 다양한 무태를 보인다.[2] 또한 다른 검무는 타령장단으로 시작하여 타령장단 일색으로 추어지는데 반하여, 진주검무는 도드리장단으로 시작하여 타령장단·허튼 타령장단·타령장단·자진 타령장단·자진모리·허튼 타령장단 순으로 이어지는 형식으로 타령장단에 느린 타령장단을 혼용하고 몹시 빠른 타령장단까지도 사용한다.[2]
진주검무에 사용되는 악기는 북, 장고, 대금, 해금, 박, 피리 한 쌍으로 구성된다.[3] 반주장단 순서는 긴염불 27장단, 타령 58장단, 도드리(허튼타령) 68장단, 느린타령 5장단, 도드리(허튼타령) 74장단, 자진모리 15장단이다.[3]
3. 3. 반주 음악
진주검무에 사용되는 악기는 북, 장고, 대금, 해금, 박, 피리 한 쌍으로 구성된다.[3] 반주 장단은 긴염불 27장단, 타령 58장단, 도드리(허튼타령) 68장단, 느린타령 5장단, 도드리(허튼타령) 74장단, 자진모리 15장단 순서로 이어진다.[3] 다른 검무는 타령장단으로 시작하여 타령장단 일색으로 추어지는데 반하여, 진주검무는 도드리장단으로 시작하여 타령장단·허튼 타령장단·타령장단·자진 타령장단·자진모리·허튼 타령장단 순으로 이어지는 형식으로 타령장단에 느린 타령장단을 혼용하고 몹시 빠른 타령장단까지도 사용한다.4. 전수자
김순녀(金順女, 1926년 12월 10일~)는 장고와 검무에 능하며 1967년 1월 16일 전수자로 공인되었다. 성계옥(成季玉, 1927년 4월 19일~)은 장고와 검무 전수자로 1978년 6월 20일에 공인되었다. 정금순(鄭今順, 1930년 1월 20일~)은 장고와 검무를 담당하며 2001년 11월 26일 전수자로 공인되었다.
5. 현대의 진주검무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id=1255403 진주검무 (성계옥, 화산문화) 2002년 12월 26일, ISBN : 898627759X
참조
[1]
웹인용
진주검무의 역사적 기원을 찾아서
http://jinju.grandcu[...]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진주문화대전
2008-12-17
[2]
서적
진주검무
화산문화
2002
[3]
웹인용
진주검무
http://jinju.grandcu[...]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진주문화대전
200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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