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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표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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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표는 삼국 시대 오나라의 장수로, 진무의 서자였지만 어려서부터 명성이 높았다. 제갈각, 장휴, 고담과 함께 손등의 친구로 태자사우로 불렸으며, 장온의 추천으로 태자중서자를 거쳐 익정도위에 임명되었다. 그는 무난독 병사 시명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손권의 신임을 얻었으며, 산월 토벌, 파양 반란 진압 등 군사적 공을 세웠다. 신안도위로 재직하며 만여 명의 병사를 모으고, 여일의 횡포에 맞서 정주를 구제하기도 했다. 34세에 사망했으며, 진수의 평가에서 명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칭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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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표 (삼국지)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진표
원어 이름陳表
문오(文奧)
출생204년
사망237년
부친진무
모친진무의 첩
자녀진오
직업관료, 장군
작위도향후(都鄉侯)
관직 정보
관직편장군(偏將軍)
임기 시작237년
군주손권
관직신안도위(新安都尉)
임기 시작234년
임기 종료237년
군주손권
후임제갈융
관직익정도위(翼正都尉)
임기 시작229년
군주손권
관직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
임기 시작221년
군주손권

2. 생애

진무의 서자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이름이 알려져 제갈각, 장휴, 고담과 더불어 태자 손등의 신임을 받는 친구가 되었다.[18] 상서 기염이 실각했을 때 다른 이들은 그를 비난했지만, 진표는 홀로 의리를 지켜 선비들 사이에서 명망을 얻었다.[18] 장온의 추천으로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가 되었고,[18][19] 229년 손등이 황태자가 되자 익정도위(翼正都尉)에 임명되어 제갈각 등과 함께 사우(四友)로 불렸다.[18][19] 같은 해 형 진수가 죽자 집안을 이끌게 되었는데, 생모와 적모(진수의 어머니) 사이의 갈등을 이치에 맞게 중재하여 화목하게 만들면서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18]

아버지처럼 장수가 되기를 원하여 병사 5백 명을 이끌게 되었고, 병사들을 진심으로 대우하여 그들의 충성심을 얻었다.[18] 관용 물품 도난 사건의 용의자였던 병사 시명(施明)이 고문에도 자백하지 않자, 손권은 진표에게 사건 해결을 맡겼다. 진표는 시명을 인간적으로 대우하여 자백을 받아냈고, 손권은 진표의 명성을 고려해 시명만 사면하는 등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18] 이 일로 진표는 무난우부독(無難右部督)으로 승진하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으며, 아버지의 작위를 잇게 되었으나 조카에게 양보하려 하기도 했다.[18]

234년에는 신안도위(新安都尉)로서 제갈각과 함께 산월 토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18] 손권에게 하사받은 소작인 중 병사로 쓸 만한 인재들을 국가를 위해 반납하겠다고 청하여 손권을 감동시키기도 했다.[18] 신안도위로 3년간 재직하며 1만여 명의 병력을 확보했고, 임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파양(鄱陽)에서 일어난 오거(吳遽)의 반란을 평정했다. 이 공으로 육손의 휘하에서 편장군(偏將軍)으로 승진하고 도향후(都鄕侯)로 봉작이 올랐다.[18] 또한, 권세를 휘두르던 여일의 모함으로 투옥된 건안태수 정주를 반준과 함께 변호하여 구명하는 등 강직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20]

237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평소 사재를 털어 병사들을 후하게 대했기 때문에 사후 집안이 매우 가난했으나, 태자 손등이 그의 유족들을 위해 집을 마련해주었다.[18]

2. 1. 초기 생애 및 경력

진표는 후한 말 군벌 손권 휘하의 장수였던 진무의 아들로,[4] 진무의 첩에게서 태어난 서자였다.[18][4] 어려서부터 이름이 알려졌으며, 제갈각, 장휴, 고담과 함께 태자 손등의 친구가 되었다.[18] 상서(尚書) 기염과 친했는데, 기염이 실각하자 다른 이들은 연루될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비난했지만, 진표는 홀로 그러하지 않아 당시 선비들에게서 중히 여겨졌다.[18] 장온의 추천으로[19]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로 기용되었다.[18][19]

황룡 원년(229년), 오나라가 제국이 되고 손등이 황태자가 되면서 익정도위(翼正都尉)에 임명되었고, 제갈각·장휴·고담과 함께 사우(四友)라 불렸다.[18][19] 이해(229년)에 이복형 진수가 죽어 집안을 거느리게 되었는데, 생모(진무의 첩)가 진수의 어머니(진무의 처)를 받들기를 거부하자, 이치에 따라 생모가 뜻을 굽히도록 충고했다. 그 결과 두 여자는 서로 화목하게 되었고, 자신의 명성도 높아졌다.[18]

아버지가 장수로 전사했으므로, 자신도 장수가 되기를 원하여 병사 5백 명을 받았다. 병사들의 마음을 얻고자 정성을 다해 대우하였고, 병사들 또한 진표를 따르며 그의 명령에 기꺼이 복종했다.[18] 당시 오나라의 친위 군단인 무난독(無難督) 소속 병사 시명(施明)이 관용 물품 절도 혐의를 받았다. 시명은 성정이 강직하여 혹독한 고문에도 자백하지 않아 사건이 정위에게까지 넘어갔다. 손권은 진표가 용사들의 마음을 잘 얻는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재량껏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도록 명했다. 진표는 시명의 형구를 풀어주고 목욕시킨 뒤 좋은 옷과 음식을 제공하며 환대하였다. 이에 감동한 시명은 죄를 자백하고 공범들의 명단까지 밝혔다. 진표가 진상을 보고하자 손권은 기뻐하며, 진표의 명성을 지켜주기 위해 특별히 시명만 사면하고 나머지 공범들은 처형했다. 시명은 이후 개과천선하여 장군의 지위에까지 올랐다.[18]

이후 무난우부독(無難右部督)으로 승진하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으며, 아버지의 작위를 세습하도록 허락받았다. 그는 이를 사양하고 형 진수의 아들 진연(陳延)에게 작위를 물려주기를 청했으나, 손권은 허락하지 않았다.[18]

가화(嘉禾) 3년(234년), 신안도위(新安都尉)가 되어 당시 단양군 태수를 겸임하던 제갈각과 함께 산월을 토벌하였다.[18]

2. 2. 군 복무와 시명 사건

아버지가 장수로 전사했으므로, 진표 자신도 장수가 되기를 원하여 손권에게 요청해 병사 5백 명을 받았다.[18] 그는 병사들의 마음을 얻고자 그들을 매우 잘 대우했으며, 병사들 역시 진표를 위해 기꺼이 싸우려 했다.[18][8]

군 복무 중 관용 물품 도난 사건이 발생했는데, 오의 정예 부대인 무난(無難) 부대의 병사 시명(施明)이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시명은 성격이 굳세고 용맹하여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자백하지 않아, 사건은 정위에게까지 넘어갔으나 해결되지 못했다.[18][8] 손권은 진표가 병사들의 마음을 잘 얻는다는 평판을 듣고, 그에게 재량껏 사건의 실정을 조사하도록 명령했다.[18][8]

진표는 시명의 차꼬를 풀어주고 목욕을 시킨 뒤, 좋은 옷을 입히고 술과 음식을 대접하며 환대했다.[18][8] 시명은 진표의 이러한 대우에 감동하여 결국 범행을 자백하고 공범들의 명단까지 모두 털어놓았다.[18][8] 진표가 사건의 진상을 보고하자 손권은 크게 기뻐했다. 또한, 진표의 명성을 지켜주기 위해 자백을 이끌어낸 시명만은 특별히 사면하고 나머지 공범들은 모두 처형했다.[18][8] 시명은 이후 잘못을 뉘우치고 군에서 공을 세워 나중에는 장군의 지위까지 올랐다.[18][9]

이후 진표는 무난우부독(無難右部督)으로 승진하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으며, 아버지의 옛 작위를 세습하도록 허락받았다. 그러나 진표는 이를 사양하고 형 진수(陳脩)의 아들인 조카 진연(陳延)에게 작위를 물려주기를 청했으나, 손권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18]

가화(嘉禾) 3년(234년), 진표는 신안도위(新安都尉)가 되어 당시 단양태수를 겸임하던 제갈각과 함께 산월을 토벌하는 작전에 참여했다.[18] 이 공으로 손권에게서 부역을 면제받는 소작인 2백 가구를 상으로 받았으나, 진표는 이들을 살펴보고 병사로서 자질이 뛰어난 자들은 관아로 돌려보내 정예 병력으로 충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손권은 처음에는 상을 사양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겼으나, 진표가 나라의 적을 물리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정예병이 필요하며, 그런 인재를 개인의 종복으로 삼을 수 없다고 간곡히 설명하자 그의 뜻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손권은 이를 듣고 기뻐하여, 군현에 명을 내려 정식 호적에 등록된 백성 중 병역에 적합하지 않은 이들을 대신 선발하여 진표가 돌려보낸 병력만큼의 소작인 결원을 채워주었다.[18]

진표는 신안도위로 3년간 재직하면서 여러 지역에서 투항한 자들을 받아들여 1만여 명의 병사를 모았다. 임지에서 수도로 귀환하던 중, 파양(鄱陽)에서 오거(吳遽)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관할 구역을 넘어 진군하여 반란을 평정하고 주모자들을 모두 항복시켰다.[18] 이 공로를 인정받아 육손의 지휘 하에 편장군(偏將軍)으로 임명되었고, 봉작도 도향후(都鄕侯)로 승격되었다.[18]

2. 3. 중간 경력 및 산월 토벌

아버지가 장수로 전사했으므로, 진표 자신도 장수가 되기를 원하여 병사 5백 명을 받았다.[18] 그는 병사들의 마음을 얻고자 정성을 다해 대우하였고, 병사들 역시 진표를 따르며 그의 명령에 기꺼이 복종했다.[18] 당시 관용 물품 도난 사건이 발생하여 무난독(無難督) 소속 병사 시명(施明)이 혐의를 받게 되었다. 시명은 성정이 굳세어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자백하지 않아 사건이 정위에게까지 넘어갔다. 손권은 진표가 용사들의 마음을 잘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 재량껏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도록 명했다. 진표는 시명의 형구를 풀어주고 목욕시킨 뒤 좋은 옷과 음식을 제공하며 환대했다. 이에 감동한 시명은 죄를 자백하고 공범들의 명단까지 털어놓았다. 진표가 조사 결과를 보고하자 손권은 기뻐하며, 진표의 명성을 지켜주기 위해 특별히 시명만 사면하고 나머지 공범들은 처형했다. 시명은 이후 개과천선하여 장군의 지위에까지 올랐다.[18]

진표는 무난우부독(無難右部督)으로 승진하고 도정후에 봉해졌으며, 아버지의 옛 작위를 세습하게 되었다.[18][10] 그러나 그는 이를 사양하고 형 진수(陳脩)의 아들 진연(陳延)에게 작위를 물려주기를 청했으나, 손권은 허락하지 않았다.[18][10]

가화 3년(234년), 신안도위(新安都尉)로 임명되어 당시 단양태수를 겸임하던 제갈각과 함께 산월 토벌에 나섰다.[18][11] 이에 앞서 손권은 진무의 공을 기려 진표의 가문에 소작인 2백 호를 하사했는데, 진표는 이들 중 건장하여 병사로 쓸 만한 이들을 관아로 돌려보내 정예병으로 충원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18][11] 손권이 상을 사양하는 이유를 묻자, 진표는 나라의 적을 물리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하는데 정예병이 될 재목을 개인의 종복으로 삼을 수 없다고 답했다.[18][11] 손권은 그의 뜻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우수한 자들을 선발하여 부대에 편입시키는 것을 허락했으며, 다른 민호 중에서 병역에 적합하지 않은 자들을 선발하여 그 결원을 채워주었다.[18][11]

진표는 신안도위로 3년간 재직하면서 투항자를 받아들여 1만 명이 넘는 병사를 모았다.[18] 임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파양군에서 오거(吳遽)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관할 구역을 넘어 진군하여 반란을 평정하고 모두 항복시켰다.[18] 이 공으로 육손의 추천을 받아 편장군으로 승진하였고, 작위도 도향후로 올랐으며, 이후 장갱으로 이동하여 주둔했다.[18]

그 후, 손권의 총애를 등에 업고 권세를 휘두르던 여일이 신하들의 승진과 처벌을 멋대로 행하고 있었다. 건안태수(建安太守) 정주(鄭冑)가 여일의 중상모략으로 투옥되었을 때, 진표는 반준과 함께 손권을 설득하여 정주를 무죄 방면시키는 데 기여했다.[20]

2. 4. 여일 사건과 죽음

그 뒤, 손권에게 총애를 받아 교사로 임명된 여일이 가신들의 승진이나 처벌을 함부로 하는 등 권세를 제멋대로 휘둘렀다. 이때 건안태수 정주가 여일의 중상 모략에 의해 감옥에 갇히는 일이 발생했는데, 진표는 반준과 함께 손권을 설득하여 정주를 무죄 방면시켰다.[20]

한편, 진표는 파양군(鄱陽)에서 오거(吳遽)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육손의 추천을 받아 편장군으로 승진했고, 향후에서 정후로 봉작이 올랐다.[18][14]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237년, 34세(만 나이 3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4] 평소 병사들을 기르고 대우하는 데 가산을 모두 사용했기 때문에, 그가 죽었을 때는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남은 처자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이를 알게 된 태자 손등이 그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었다.[18][14]

3. 가족 관계

진표의 아버지 진무


진표는 후한 말의 군벌 손권 휘하 장수였던 진무의 아들이다.[4] 진무는 215년 소요진 전투에서 전사했다.[5] 진표는 진무의 첩에게서 태어난 서자였으며, 신의와 인애가 두터웠다고 전해진다. 진무의 정실 부인에게서 태어난 이복형 진수가 있었는데, 그는 229년 손권이 황제로 즉위하고 동오를 건국한 직후 사망했다.[6]

이복형 진수가 죽자, 진표의 생모는 적모(진수의 어머니)에게 복종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진표는 어머니에게 인륜의 도리를 들어 "형님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유감입니다. 이제 제가 가문의 가장이 되었으니, 마땅히 적모님께 예를 다해야 합니다. 부디 어머니께서도 적모님을 받아들이시고 화목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만약 그렇게 하실 수 없다면, 저는 집을 나가 다른 곳에서 살겠습니다."라고 효심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설득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말에 따라 태도를 바꾸어 적모와 원만한 관계를 회복했고, 이 일로 진표의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15]

진표는 무난독우부(無難督右部)로 승진하여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으며, 아버지 진무의 작위를 잇는 것도 허락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사양하고 이복형 진수의 아들인 조카 진연에게 작위를 물려줄 것을 손권에게 청했으나, 손권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진표에게는 진오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16세에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되어 병사 400명을 지휘했다. 그러나 진오 역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진오가 죽자 그의 군직은 사촌이자 진수의 아들인 진연이 물려받았다.

진표는 34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평소 병사들을 잘 보살폈기에 사후 집에 남은 재산이 거의 없어 유족들이 생계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를 알게 된 황태자 손등이 유족들을 위해 집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4. 평가

진수는 "진표는 비록 장군 집안의 지파요, 서자였지만, 명사들과 적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고, 동류 중에서 발탁됐으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라고 높이 평가했다. 배송지 역시 "진표는 아버지 이상의 재능을 지녔다"라고 칭찬했다.

진표는 서자로 태어났음에도 신의와 인애가 두터운 인물로 알려졌다. 젊은 시절부터 이름이 알려져 제갈각, 장휴, 고담과 함께 황태자 손등의 친구가 되었다. 장온의 추천으로 태자중서자에 임명되었고, 손권이 즉위하고 손등이 황태자가 되자 제갈각 등과 함께 태자사우로 불리며 익정도위가 되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기염이 실각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모두 등을 돌리고 그를 비난했지만, 진표만은 끝까지 의리를 지켜 사대부들의 존경을 받았다. 또한 이복 형이 일찍 사망한 후 생모가 적모(진무의 정실)에게 불손하게 대하자, 인륜의 도리를 들어 생모를 설득하여 두 어머니의 관계를 회복시켰는데, 이 일로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아버지 진무가 무장이었던 것처럼 진표 역시 무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500명의 병사를 받아 이끌면서 그들을 매우 아꼈고, 병사들 또한 진심으로 따르며 직무에 힘썼다고 한다. 오의 친위 군단인 무난군의 병사 시명이라는 자가 관물 도난 혐의를 받았는데, 성격이 용맹하여 심문에도 입을 열지 않아 정위가 애를 먹었다. 손권은 병사들의 마음을 잘 얻는 진표에게 이 사건을 맡겼다. 진표는 시명의 수갑과 족쇄를 풀어주고 목욕을 시키며 음식과 술을 대접하는 등 인간적으로 대우했다. 이에 감동한 시명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공범들의 이름까지 모두 밝혔다. 손권은 크게 기뻐하며 진표의 노고를 생각하여 시명만은 특별히 사면해주었다. 시명은 후에 장군까지 올랐다고 한다.

이후 진표는 무난군의 우부독으로 승진하고 도정후를 받았으며, 가문의 작위를 잇는 것도 허락받았으나, 이 모든 것을 사양하고 조카 진연(진수의 아들)에게 주도록 청했으나 손권은 허락하지 않았다.

가화 3년(234년), 신안도위로서 제갈각을 따라 산월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조세 면제 소작인 200호를 받았다. 진표는 이들 중 훌륭한 병사가 될 만한 자들을 군에 편입시키고자 했고, 손권은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으나 국가를 위해 용감한 병사가 필요하다는 진표의 주장을 받아들여 우수한 자들을 선발해 휘하 부대에 채용하도록 했다. 대신 군역을 감당하기 어려운 평민들을 소작인으로 골라 진표에게 다시 주었다. 도위로 재직하는 3년 동안 내란 진압에 많은 공을 세워 1만 명의 산월 병사를 얻었다. 임지에서 귀환하던 중 번양군에서 오거가 반란을 일으키자, 육손과 함께 이를 진압했다. 이 공으로 편장군·도향후의 관위와 작위를 받았다.

이 무렵, 여일이 권력을 남용하며 신하들을 함부로 처벌하는 등 전횡을 일삼자, 반준과 함께 여일의 모함으로 옥에 갇힌 건안태수 정주를 변호하여 무죄로 풀려나게 하는 강직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진표는 얼마 지나지 않아 34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평소 병사들을 위하는 데 힘쓰고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았기에, 사망 당시 집에는 거의 재산이 남아있지 않아 유족들이 길에서 생활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황태자 손등이 유족들을 위해 집을 마련해주었다. 그의 아들이 뒤를 이어 군세를 맡았으나 일찍 사망하여, 조카들이 군세를 이어받았다.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Sanguozhi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서적 Sanguozhi
[6] 서적 Sanguozhi
[7] 서적 Sanguozhi
[8] 서적 Sanguozhi
[9] 서적 Sanguozhi
[10] 서적 Sanguozhi
[11] 서적 Sanguozhi
[12] 서적 Sanguozhi
[13] 서적 Sanguozhi
[14] 서적 Sanguozhi
[15] 서적 Sanguozhi
[16] 서적 Sanguozhi
[17] 웹사이트 乱乱室絮語 http://blog.roodo.co[...]
[18] 서적 삼국지
[19] 서적 삼국지
[20] 서적 문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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