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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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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휴는 오나라의 정치가로, 장소의 아들이다. 손등의 시종으로 발탁되어 한서를 가르쳤으며, 우필도위, 시중, 우림도독, 양무장군을 역임했다. 241년 작피 전투에서 활약했으나, 전씨 일족과의 갈등으로 교주로 유배되었고, 이후 손홍의 참소로 자결했다. 손등은 장휴를 중용할 것을 유언했으며, 진수는 그의 유배를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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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장휴
원어 이름張休
로마자 표기Jang Hyu
숙사 (叔嗣)
출생기원후 205년경
사망기원후 245년경 (향년 40세)
출생지서주팽성국
사망 장소교주
관직
작위루후 (婁侯)
주요 직책양무장군 (揚武將軍)
임관 시작241년
임관 종료245년
주군손권
가족 관계
아버지장소
형제장승

2. 생애

장휴는 손권이 건국한 동오의 정치가 장소의 차남이었다. 아버지 장소가 사망한 후, 형 장승이 이미 작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작위인 "루후(婁侯)"를 상속받았다.[1]

19세에 제갈각, 고담[2], 진표와 함께 손권의 장남이자 황태자인 손등의 시종으로 임명되었다.[3] 이들은 손등에게 ''한서''를 가르쳤다.[4] 장휴는 정확하고 정연하게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격의 없고 친근했기 때문에 손등은 그를 가까운 친구로 여겨 종종 연회에 초대했다.[5] 이후 우필도위(右弼都尉)로 재임명되었다.

손권이 사냥을 나가 늦게 돌아오는 일이 잦자, 장휴는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려 시간 관리를 더 잘하라고 건의했다. 손권은 장휴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그 글을 장소에게 보여주기까지 했다.[6] 241년 손등이 사망한 후, 장휴는 시중(侍中)이 되었고, 우림도독(羽林都督)으로 임명되어 군사 업무를 감독했다. 그는 나중에 양무장군(揚武將軍)으로 승진했다.[6]

240년대 손화와 손패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고, 장휴는 손화를 지지했다. 241년, 오나라 장군 전종과 그의 아들 전기(全寄)는 장휴, 고담, 고승이 조위와의 전투에서 공적을 허위 보고했다고 고발했다. 245년, 장휴와 고씨 일가는 교주로 유배되었다. 장휴는 이전에 손홍과 불화가 있었는데, 손홍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장휴에 대한 불만을 제기했고, 결국 장휴는 손권의 명에 따라 자결했다. 사망 당시 40세였다.[7]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제갈각, 고담, 진표 등과 함께 약관의 나이에 태자 손등의 동료가 되었다.[12][13] 손권의 명령으로 아버지 장소에게서 《한서》를 배우고, 궁궐로 돌아와 손등에게 이를 강의했다.[12][14] 장휴는 수업에서 문의(文義)를 지적하고 사물을 분별하며 조리 있게 설명하였다.[15]

매번 연회에서 술이 무르익으면 음악을 연주했고, 손등은 번번이 자신을 낮추어 함께 즐겼다.[15] 장휴는 해박하고 달통한 사람이었기에, 손등이 사랑하여 항상 곁에 두었다.[15]

20세 무렵, 제갈각, 고담, 진표와 함께 오나라 왕 손권의 태자 손등의 측근으로 발탁되었다. 손권의 명으로 장소에게서 《한서》의 해석을 배우고, 그것을 다시 손등에게 강의했다. 손등은 자신의 속관들에게 무관의 자들끼리 하는 간략한 예로 대했으며, 장휴 등과는 같은 수레를 타고 외출하거나, 하나의 기장 안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황룡 원년(229년)에 손등이 황태자에 책봉되자 장휴는 중서자를 거쳐 우필 도위가 되었고, 장휴 등 4명은 태자사우라고 불렸다.[8]

2. 2. 관직 생활과 손등의 총애

제갈각, 고담, 진표 등과 함께 약관의 나이에 손등의 동료가 되었다.[12][13] 손권의 명령으로 아버지 장소에게서 《한서》를 배우고, 궁궐로 돌아와 손등에게 이를 강의했다.[12][14] 장휴는 학문적 깊이뿐만 아니라 격의 없는 태도로 손등의 총애를 받아 가까운 친구처럼 지냈으며, 종종 연회에도 초대받았다.[5]

이후 우필도위(右弼都尉)로 임명되었다. 손권이 사냥을 즐겨 늦게 돌아오는 일이 잦자, 장휴는 상소문을 올려 시간 관리를 더 잘할 것을 건의했다. 손권은 장휴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그 글을 장소에게 보여주기까지 했다.[6]

황룡 원년(229년), 손등이 황태자에 책봉되자 장휴는 우필 도위가 되었고, 제갈각, 고담, 진표와 함께 태자사우라 불렸다.[8]

가화 5년(236년), 장소가 사망하자 장휴가 작위를 계승했다. 형 장승은 이미 공을 세워 별도로 작위를 받았기 때문이다.

적오 4년(241년) 작피의 역에서 의 왕릉과 대전한 오나라는 열세에 놓였으나, 장휴와 고승이 분전하여 이를 저지했다. 이때 전서전단 등의 장수도 활약했지만, 장휴만큼 공적을 평가받지 못하여 전종 등 전씨 일족의 원한을 샀다.[10]

같은 해 5월, 손등이 사망했다. 손등은 아버지 손권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그 안에서 장휴를 "두뇌가 명석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며, 조정에서는 주군의 복심, 지방에 나가서는 주군의 수족이 될 수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칭찬하며 중용할 것을 권했다.[8] 태자부를 떠난 장휴는 시중, 우림 도위를 거쳐, 양무장군으로 승진했다.[6]

2. 3. 작피 전투와 전씨 일족과의 갈등

241년, 고승과 함께 수춘을 공격할 때, 위위장군 전종(全琮)이 위의 왕릉과 싸워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승기를 잡은 위군은 오영장 진황의 군대를 격파했다.[12] 장휴는 고승과 함께 위군에 맞서 싸워, 결국 위군을 멈추게 했다.[12] 전종의 아들 전서와 전단(全端)은 멈춘 위군을 공격하여 퇴각시켰다.[12] 이후 논공행상에서 장휴와 고승의 공이 전서와 전기(全寄)의 공보다 높게 평가되어, 장휴와 고승은 잡호장군이 되었고, 전서와 전단은 비장군이 되었다.[12]

전씨 일족은 이러한 결과에 원한을 품었다. 이들은 노왕 손패(孫覇)를 지지했기 때문에, 노왕의 무리는 장휴가 고승과 함께 작피 전투의 논공에서 전군 진순과 결탁하여 공적을 속였다고 주장했다. 결국 장휴, 고승, 고담은 함께 교주로 유배되었다.[12] 중서령 손홍은 평소 장휴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를 기회로 참소하여 장휴는 죽음을 당했다.[12] 이때 장휴의 나이는 41세였다.[12]

적오 8년(245년), 장휴는 손홍의 참소로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2]

2. 4. 이궁 사건과 유배

241년, 고승과 함께 수춘을 공격할 때, 위위장군 전종(全琮)이 위의 왕릉과 싸워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12] 승세를 탄 위군은 오영장 진황의 군대를 함몰시켰으나, 장휴는 고승과 함께 위군을 막아냈다.[12] 전종의 아들 전서와 전단(全端)이 멈춘 위군을 공격하여 물러나게 했다.[12] 이후 논공행상에서 장휴와 고승의 공이 전서와 전기(全寄)의 공보다 높게 평가되어, 장휴와 고승은 잡호장군이 되었고 전서와 전단은 비장군이 되었다.[12]

전씨 일족은 이에 원한을 품었다. 이들은 노왕 손패(孫覇)를 지지했으므로, 손패 세력은 장휴가 고승과 함께 작피 싸움에서 전군 진순과 공모하여 공적을 속였다고 모함했다. 결국 장휴, 고승, 고담은 함께 교주로 유배되었다.[12]

적오 5년 정월, 조카(형 장승의 딸)의 남편인 손화가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8월에 그의 동생인 손패가 노왕으로 책봉되면서, 이후 양자의 후계자 다툼(이궁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9]

병석에 있던 손권을 대신하여 손화가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그 근처에 살던 장휴는 손화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손권의 딸 손로반은 손화의 어머니 왕부인과 대립하고 있었기에, 이를 "손화는 제사를 지내지 않고 빈의 친가에서 모의를 꾸미고 있다"고 참소했다. 손권손화에 대한 총애는 식어갔다.[11]

중서령 손홍은 아첨을 잘하고 심지가 비뚤어진 인물이었는데, 장휴는 평소에 이를 분하게 여겼다.[12] 손홍은 이 때문에 참소하여, 조서를 내려 장휴에게 죽음을 내렸다.[12] 245년의 일이었으며, 향년 41세였다.[12]

2. 5. 죽음

241년, 고승과 함께 수춘을 공격했을 때, 위위장군 전종(全琮)이 위의 왕릉과 싸워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이때 장휴는 고승과 함께 위군을 공격하여 저지했고, 전서와 전단(全端)이 위군을 격퇴하는 데 기여했다.[12] 그러나 이후 논공행상 과정에서 장휴와 고승의 공이 전서와 전기(全寄)보다 높게 평가되어 잡호장군으로 승진했고, 전서와 전단은 비장군이 되었다.[12]

이에 불만을 품은 전씨 일족은 손패(孫覇)를 지지하며, 장휴가 고승과 함께 작피 싸움에서 공적을 속였다고 모함했다. 결국 장휴, 고승, 고담은 교주로 유배되었다.[12]

이전에 장휴는 중서령 손홍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손홍은 이를 기회로 참소하여 장휴에게 죽음을 내리도록 했다.[12] 결국 장휴는 245년손권의 명에 따라 자결했으며, 향년 41세였다.[12]

3. 평가

손등은 죽을 때 올린 표에서 장휴, 고담, 사경이 모두 기민하고 식견이 있어 심복을 맡기거나 무위를 날려 삼군을 격려할 만하다고 평가했다.[14]

진수는 장휴와 고승이 뜻을 닦고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했으나, 모함을 받아 유배당한 것을 슬퍼했다.[12]

4. 친족 관계

장소의 아들로, 장승, 장분의 동생이다. 장진의 누이는 손화의 처가 되었다.

장휴의 가계도


관계이름
아버지장소
장승
장분
매형손화
조카장진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52
[2] 서적 Sanguozhi vol. 52
[3] 서적 Sanguozhi vol. 59
[4] 서적 Sanguozhi vol. 52
[5] 서적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2
[6] 서적 Sanguozhi vol. 52
[7] 서적 Sanguozhi vol. 52
[8] 서적 『三国志』呉書 孫登伝
[9] 서적 『三国志』呉書 呉主(孫権)伝
[10] 서적 『三国志』呉書 [[顧雍]]伝
[11] 서적 『三国志』呉書 孫和伝
[12] 서적 삼국지 권52 오서 장고제갈보전
[13] 서적 삼국지 권55 오서 정황한장주진동감릉서반정전
[14] 서적 삼국지 권59 오서 오주5자전
[15] 서적 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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