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최식 (징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최식은 당나라 중기의 문인으로, 재상 최인사의 손자이다. 그는 705년 당 중종 복위 이후 고공원외랑으로 시작해 중서사인, 병부시랑을 거쳐 재상에 올랐으나, 뇌물 수수와 부적절한 인사 임명으로 비판을 받았다. 이후 태평공주와 결탁하여 권력을 얻었으나, 현종 즉위 후 태평공주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고, 자살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당 상제 때의 재상 - 당 예종
    당 예종 이단은 측천무후의 아들로, 두 번 즉위하여 당나라를 다스렸으며, 아들 당 현종에게 황위를 물려주어 당나라 발전에 기여했다.
  • 당 상제 때의 재상 - 당 현종
    당 현종은 685년에 태어나 712년에 즉위하여 개원의 치를 이끌었으나, 후기에는 양귀비에 빠져 안사의 난을 초래하고 762년에 사망한 당나라의 제6대 황제이다.
  • 671년 출생 - 바즈라보디
    바즈라보디는 8세기 중국 밀교, 특히 진언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도 출신 승려로, 산스크리트어 경전 번역과 밀교 의식 전파, 그리고 《사르바타타가타타트바사가라하》 부분 번역을 통해 중국 진언종과 일본 신곤종, 천태종 밀교 분파의 기초를 다졌다.
  • 671년 출생 - 시기베르투스 4세
    시기베르투스 4세는 다고베르트 2세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지만 왕위 계승에서 배제된 후 랑그도크에 은둔하며 수도원을 설립했다는 전설 속 인물로, 실존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후손으로 묘사되었다.
최식 (징란)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최식 (崔湜)
로마자 표기Choe Sik
시대당나라
생몰년도671년 ~ 713년
관력
주요 관직재상
임기 시작709년
임기 종료713년
군주당 중종

2. 생애

최식은 수려한 외모로 알려졌으며, 자신의 처첩과 아름다운 딸을 이융기(李隆基)에게 바쳤다. 태평공주(太平公主)를 사적으로 보좌하고, 안락공주(安樂公主)와 간통했으며, 상관완아(上官婉兒)의 연인이었다. 무삼사(武三思)와 상관완아에게 의탁하여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郞)에서 중서사인(中書舍人),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빠르게 승진했다.[6]

천진교(天津橋)에서 "봄이 상림원에서 노닐고 꽃은 낙양성에 가득하다(春游上林苑, 花滿洛陽城)"라는 시를 읊자, 장열(張說)은 "이 구절은 본받을 만하고, 이 자리는 얻을 만하지만, 그 나이는 미치지 못한다"라며 흠모했다.[7] 최식, 잠희(岑羲), 정암(鄭愔)이 이부시랑(吏部侍郞)을 겸임하자, 사람들은 "잠희와 정암은 남방 오랑캐 후손이고, 최식은 재상의 손자이다. 셋을 비교하면, 돌골혼을 축하하지 말라"고 비꼬았다.[8]

양주자사(襄州刺史)로 좌천되었을 때, 정변으로 황위를 찬탈하려던 중종의 서자 초왕(譙王) 이중복(李重福)에게 서신을 보냈고, 이중복은 금 허리띠를 선물했다. 이중복이 패망하자 최식은 사형 위기에 처했으나, 장열과 유유구(劉幽求) 덕에 처형을 면했다.

선천 2년(713년), 최식과 태평공주가 모반을 공모하자,[9] 위지고(魏知古)가 밀고하여 현종이 먼저 군사를 움직였다. 두회정(竇懷貞) 등은 처형되었고, 최식은 태평공주와 사통한 죄로 유배되었다. 신흥왕(新興王) 이진은 처형 직전 "이 일은 최식에게서 나왔는데, 내가 죽고 최식이 사는 것이 원통하다"고 외쳤다. 궁녀 원씨(元氏)는 최식이 최음제 적전분(赤箭粉)에 독을 타 황제를 시해하려 했다고 진술했다.[10]

결국 최식은 형주(荊州)로 가던 중 역참에서 자결했다. 사람들은 장열이 최식을 죽였다고 생각했다.[11] 『전당시(全唐詩)』에 시 39수, 『전당시외편(全唐詩外編)』에 보시 5수가 전한다.

2. 1. 초기 생애

최식은 박릉최씨(博陵崔氏) 사방(四房) 중 하나인 박릉 안평방(安平房) 출신으로, 재상 최인사(崔仁師)의 손자이며, 호부상서(戶部尙書) 최읍(崔挹)의 아들이다. 동생 최액(崔液), 최징(崔澄), 최척(崔涤)과 함께 문재가 있었으며,[5] 매번 집에서 연회가 있을 때마다 왕사가(王謝家)에 비유했다. 어려서 진사(進士)에 발탁되고 좌보궐(左補闕)로 이직했다. 『삼교주영(三教珠英)』을 중수했다.

671년에 고종 치세에 태어났다. 할아버지 최인사는 태종 치세에 잠시 재상을 지냈으며, 아버지 최읍(崔挹)은 황실 대학의 총장을 지냈다. 젊은 시절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고 야심이 컸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 과거에 합격하여 정부의 시험소(鸞臺, 루안타이)에서 낮은 직급의 관리인 좌보궐(左補闕)이 되었다. 유교, 불교, 도교에 관한 다양한 시를 모은 작품인 《삼교주영》(三教珠英)의 편집에 참여했는데, 이 프로젝트는 무측천의 애인들인 장역지와 장창종, 그리고 황실 학자 이교가 이끌었다. 이 작품이 완성된 후 그는 낮은 직급의 어사(御史)인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다.

2. 2. 당 중종 시기

최식은 박릉최씨(博陵崔氏) 사방(四房) 중 하나인 박릉 안평방(安平房) 출신으로, 재상 최인사(崔仁師)의 손자이며, 호부상서(戶部尙書) 최읍(崔挹)의 아들이다. 705년에 쿠데타로 측천무후가 폐위되고 이현이 다시 즉위했을 때, 최식은 문부성(文部省)의 하급 관리인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郎)이 되었다. 중종 복위 초기에, 측천무후를 폐위하고 중종을 복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간지, 최현위, 환언범, 경휘, 원숙기는 강력한 재상이었으나, 중종의 사촌(측천무후의 조카)인 무삼사 덕정왕은 위황후의 애인이었고, 곧 중종의 신뢰를 받는 강력한 조언자가 되었다.[6] 환언범과 경휘는 무삼사의 계략을 두려워하여 최식을 동료로 삼아 무삼사를 감시하려 했지만, 최식은 중종이 쿠데타 주도자들보다 무삼사를 더 신뢰한다는 것을 깨닫고 쿠데타 주도자들의 계획을 무삼사에게 폭로했다. 이후 그는 무삼사의 책략가가 되었고, 무삼사의 추천으로 입법부(중서성)의 중간 관리인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었다.[6] 706년, 쿠데타 주도자들은 무삼사의 고발로 영남 지역으로 유배되었고, 수도 장안으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최식은 무삼사에게 그들이 나중에 수도로 돌아온다면 문제를 일으킬 것이고, 유배지에서 죽여야 한다고 경고했다. 무삼사는 동의했고, 최식의 추천으로 최시의 사촌인 주이정(周利貞)을 영남 지역 시찰 명목으로 파견했지만, 실제로는 다섯 명의 쿠데타 주도자들을 살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주이정은 장간지와 최현위가 이미 사망한 후에 환언범, 경휘, 원숙기를 잔혹하게 살해했다.

무삼사는 707년 중종의 태자 이중준의 실패한 쿠데타로 사망했고, 최식은 곧 중종의 후궁 상관소의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전통적인 역사가들은 그들이 불륜 관계였다고 일반적으로 믿는다. 708년에 그는 국방부 차관(兵部侍郎, ''병부시랑'')이 되었다.[6] (아버지 최의는 당시 예부 차관이었는데, 부자가 모두 집행부(상서성)의 여섯 부서 중 하나에서 차관을 맡는 것은 당시 전례가 없었다.) 709년에 상관완아의 추천으로 최시는 ''중서시랑''(中書侍郎, 입법부 부부장)이자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재상이 되었다. 그와 동료 재상 정은은 문부성 차관(吏部侍郎, ''이부시랑'')을 겸임하며 관료 선발을 담당했는데, 문부 규정을 위반하고 뇌물을 수수하며 부적절한 사람들을 승진시켰다고 전해진다. 최의도 뇌물을 받고 최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최시가 이를 따르지 않자 부자 관계는 어려워졌다. 709년 후반, 감찰어사 진형(靳恆)과 이상은의 기소, 감찰어사 배최(裴漼)의 조사 이후, 최시와 정은은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최시는 강주(江州, 대략 현대의 구강시, 장시성) 지사 군사 고문으로 강등될 예정이었고, 정은은 길주(吉州, 대략 현대의 길안시, 장시성)로 유배될 예정이었다. 상관소의, 안락공주 이곽아와 남편 무연수(武延秀)의 간청으로 최시는 상주(襄州, 대략 현대의 샹양시, 후베이성) 지사가 되었고, 정은은 강주 지사 군사 고문이 되었다. 그해 말, 중종이 장안 남쪽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낼 때, 최시와 정은을 불러 의식에 참석하게 했고, 최시는 곧 ''상서좌승''(尚書左丞, 행정부 비서감)이 되었다. 이때 최시는 남전(藍田, 장안 근처)과 상주(商州, 대략 현대의 상뤄시, 산시성) 사이에 새로운 운하를 건설할 것을 제안했고, 중종은 동의하여 최시에게 프로젝트를 맡겼다. 운하는 수만 명의 징집된 노동자들로 건설되었으며, 13~15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최시는 결국 새로운 운하가 심각한 여름 폭풍 이후 운행 불가능하게 되면서 이 프로젝트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2. 3. 당 예종 시기

예종이 즉위한 후, 위 황후가 임명한 재상들은 일반적으로 좌천되었고, 최식은 화주(華州, 지금의 산시성 웨이난) 자사로 좌천되었다.[6] 그는 거의 즉시 다시 불려와 민부 부상서 겸 사실상 재상으로 임명되었지만, 그 해 말에 그 자리에서 물러나 다시 상서좌승(尙書左丞)이 되었다.[6] 그는 곧 태자(황태자) 이융기(李隆基)의 가신 우두머리인 태자첨사(太子詹事)가 되었다. 그는 상주(上州)로 가는 새로운 운하 건설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은청광록대부(銀青光祿大夫)의 명예로운 직함을 받았다.[6] 한편, 중종의 다른 아들인 교왕(譙王) 이중복은 예종에게 왕위를 찬탈하려다 실패하고 죽임을 당했다. 최식은 양주자사(襄州刺史)로 재직하면서 이중복과 부적절하게 소통하고 그로부터 금띠를 받았다는 혐의를 받았다.[6] 이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범죄였지만, 장열과 유우구가 그를 변호하여 처벌을 면했다.[6][7]

태평공주(太平公主)와 이융기는 예종의 중요한 결정에 대해 모두 자문을 구하면서 서로 다투었고, 황제는 종종 두 사람 모두에게 대변인 역할을 맡겨 권력을 행사하게 했다. 최식의 형제 최척(崔滌)은 이융기의 측근이었고, 이융기는 최식을 측근으로 만들고자 그의 저택을 여러 번 방문했지만, 최시는 결국 태평공주와 관계를 맺고 그녀의 파벌에 합류하여 장열을 재상에서 몰아내려는 음모에 참여했다고 전해진다.[6] 711년, 태평공주의 추천으로 그는 다시 중서시랑(中書侍郞) 겸 사실상 재상으로 임명되었고,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의 지위를 받았다.[6] 그는 태평공주의 파벌에 속하지 않은 동료 관료 노상현을 존경했다. 태평공주가 그를 재상으로 추천하겠다고 제안하자, 그는 노상현도 추천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그는 노상현이 승진하지 않으면 감히 재상이 되지 않겠다고 말했고, 이후 그녀는 두 사람 모두를 추천했다.

2. 4. 당 현종 시기

최식은 태평공주와 사사로이 내통하고, 안락공주와 간통했으며, 상관완아의 정인이었고, 무삼사와 상관완아에게 의지하여 고공원외랑에서 중서사인, 병부시랑으로 빠르게 승진했다.[6] 장열은 최식을 흠모하며 "이 구절은 본받을 만하고, 이 자리는 얻을 만하지만, 그 나이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평했다.[7] 최식, 잠희, 정암이 동시에 이부시랑을 맡자, 사람들은 "잠희와 정암은 남방 오랑캐 후손이고, 최식은 재상의 손자이다. 세 사람을 비교하면, 돌골혼을 축하하지 말라"라고 하였다.[8]

최식은 양주자사로 좌천되었을 때, 정변을 일으켜 황위를 찬탈하려던 이중복에게 서신을 보냈고, 이중복은 금 허리띠를 선물했다. 이중복이 패망하자 최식은 탄핵되어 사형에 처해질 뻔했으나, 장열과 유유구의 도움으로 처형을 면했다.

712년, 당 예종이 이융기(현종)에게 황위를 물려주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태상황인 예종이 쥐고 있었다. 현종 즉위 직후, 최식은 중서령 대행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곧 현종의 측근인 유유구와 장군 장위가 태평공주와 연관된 최식, 두회정, 잠계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 계획은 누설되었다. 현종은 계획을 부인하고 관련자들을 유배 보냈다. 최식은 유유구를 죽이려 했으나, 왕준의 도움으로 유유구는 목숨을 건졌다.

713년, 위지구는 태평공주, 두회정, 잠계, 소지충, 최식, 설지 등이 현종을 전복하려 한다는 내용을 현종에게 보고했다. 현종은 왕거, 장열, 최일용의 조언을 받아들여 먼저 행동했다. 7월 29일,[4] 현종은 관련자들을 체포하고 처형했으며, 두회정과 태평공주는 자결했다. 예종은 현종에게 권력을 넘기고 물러났다.

현종은 최식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은밀히 불렀으나, 최식은 동료 최제의 경고를 무시했다. 태평공주 사후, 최식은 두주로 유배되었으나, 곧 소환될 것이라 믿고 천천히 이동했다. 한편, 처형된 이진은 최식이 계획의 주모자라고 외쳤고, 궁녀 원씨는 최식이 현종을 독살하려 했다고 진술했다. 결국 현종은 최식에게 자결을 명하는 조서를 내렸고, 최식은 형주로 가던 도중 역참에서 자결했다. 사람들은 장열이 최식을 죽였다고 생각했다.[11]

3. 평가

최식은 박릉최씨(博陵崔氏) 사방(四房) 중 하나인 박릉 안평방(安平房) 출신으로, 재상 최인사(崔仁師)의 손자이자 호부상서(戶部尙書) 최읍(崔挹)의 아들이었다. 동생 최액(崔液), 최징(崔澄), 최척(崔涤)과 함께 문재가 뛰어났으며,[5] 집안에서 연회가 있을 때마다 왕사가(王謝家)에 비유되곤 했다.

최식은 천진교(天津橋)에서 "봄이 상림원에서 노닐고 꽃은 낙양성에 가득하다(春游上林苑, 花滿洛陽城)"라는 시를 읊어 장열(張說)의 "이 구절은 본받을 만하며 이 자리는 얻을 만하지만, 그 나이만큼은 미치지 못한다"라는 평을 받았다.[7] 잠희(岑羲), 정암(鄭愔)과 함께 이부시랑(吏部侍郞)을 맡았을 때에는, 사람들이 "잠희와 정암은 남방 오랑캐 후손이고, 최식은 재상의 손자이다. 세 사람을 비교하면, 돌골혼을 축하하지 말라."라고 하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8]

그러나 최식은 자신의 처첩과 딸을 이융기(李隆基)에게 바치고, 태평공주(太平公主), 안락공주(安樂公主), 상관완아(上官婉兒) 등과 사통하며 권력을 탐했다.[6] 무삼사(武三思)와 상관완아에게 의탁하여 고위 관직에 빠르게 올랐다.[6] 중종의 서자 이중복(李重福)의 반란에 연루되어 탄핵받았으나, 장열과 유유구(劉幽求)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선천 2년(713년), 태평공주(太平公主)와 모반을 꾀했다는 혐의로[9] 위지고(魏知古)의 밀고를 받고 유배형에 처해졌다. 유배 도중 궁녀 원씨(元氏)가 최식이 최음제에 독을 타 황제를 암살하려 했다고 증언하면서,[10] 형주로 가던 도중 역참에서 자살했다.[11]

『全唐詩』에는 그의 시 39수가 전해지며, 『全唐詩外編』에는 보시(補詩) 5수가 전해진다.

3. 1. 부정적 평가

박릉최씨(博陵崔氏) 출신으로 재상 최인사(崔仁師)의 손자이자 호부상서(戶部尙書) 최읍(崔挹)의 아들이다. 최식은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했으며, 자신의 처첩과 딸을 이융기(李隆基)에게 바치고, 태평공주(太平公主), 안락공주(安樂公主), 상관완아(上官婉兒) 등과 사통하며 권력을 탐했다.[6] 무삼사(武三思)와 상관완아에게 의탁하여 고위 관직에 빠르게 올랐다.[6]

중종의 서자 이중복(李重福)의 반란에 연루되어 탄핵받았으나, 장열(張說)과 유유구(劉幽求)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선천 2년(713년), 태평공주(太平公主)와 모반을 꾀했다는 혐의로[9] 위지고(魏知古)의 밀고를 받고 유배형에 처해졌다. 유배 도중, 궁녀 원씨(元氏)가 최식이 최음제에 독을 타 황제를 암살하려 했다고 증언했다.[10] 결국 최식은 형주로 가던 도중 역참에서 자살했다.[11]

3. 2. 긍정적 평가

최식은 아름다운 외모와 문재(文才)를 겸비하였으며, 특히 시에 능했다. 장열은 최식의 시 구절을 칭찬하며 "이 구절은 본받을 만하며 이 자리는 얻을 만하지만, 그 나이만큼은 미치지 못한다"라고 평했다.[7] 최식, 잠희, 정암이 동시에 이부시랑(吏部侍郞)을 맡았을 때, 사람들은 "잠희와 정암은 남방 오랑캐 후손이고, 최식은 재상의 손자이다. 세 사람을 비교하면, 돌골혼을 축하하지 말라."라고 하며 최식을 높이 평가했다.[8]

4. 가족 관계

최식은 박릉최씨(博陵崔氏) 사방(四房) 중 하나인 박릉 안평방(安平房) 출신으로, 재상 최인사(崔仁師)의 손자이며 호부상서(戶部尙書) 최읍(崔挹)의 아들이다. 동생으로는 최액(崔液), 최징(崔澄), 최척(崔涤)이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문재가 뛰어났다.[5]

참조

[1] 서적 Old Book of Tang
[2] 서적 New Book of Tang
[3] 웹사이트 唐書 列傳 第十一至二五 http://ef.cdpa.nsysu[...] 2007-12-18
[4] 웹사이트 http://www.sinica.ed[...]
[5] 서적 재주원시화우편(載酒園詩話又編)
[6] 서적 舊唐書
[7] 서적 新唐書
[8] 서적 朝野僉載
[9] 서적 舊唐書
[10] 서적 太平廣記
[11] 서적 舊唐書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