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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럴 후이바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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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럴 후이바르츠는 음렬 음악 작곡가로, 다름슈타트 하계 현대음악 강좌에서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을 만나는 등 유럽 현대 음악계에 영향을 미쳤다. 안트베르펜에서 파리 음악원을 거쳐 다리우스 미요, 올리비에 메시앙에게 사사했으며, 1951년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통해 총체적 음렬주의의 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전자 음악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1970년대 이후 미니멀리즘 음악에도 접근했다. 주요 작품으로 오페라 '물병자리' 등이 있으며, 슈토크하우젠에게 영향을 주었으나, 후일 절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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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럴 후이바르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본명카럴 후이바르츠
출생지벨기에 안트베르펜
사망지벨기에 안트베르펜
학력
학교안트베르펜 왕립 음악원
경력
직업작곡가
장르클래식 음악
활동 기간1943년 ~ 1992년
관련 활동쾰른 전자 음악 스튜디오

2. 생애 및 경력

후이바르츠는 음렬 음악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으며, 1923년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났다. 안트베르펜과 파리 음악원에서 공부했고, 1951년 다름슈타트 하계 현대음악 강좌에 참가하여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을 만났다.

1970년까지 주로 번역가로 활동하다가 4년간 헨트에 위치한 음향 심리학 및 전자 음악 중점 상설 연구소에서 플랑드르 라디오의 전자음악 부장으로 근무했다. 1974년부터 1987년까지 현대 음악계에서 활동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1984년부터 1992년까지 작곡한 오페라 '물병자리'가 있다.

1950년대에는 전자 음악 작곡도 하였고, 이후 선법성을 도입하여 미니멀리즘에도 접근했다.

슈톡하우젠에게 "나의 유일한 작곡 선생님[6]"이라는 칭찬을 받았지만, 여러 사정으로 둘의 관계는 멀어졌다. 이후 후이바르츠는 벨기에 민간 회사의 항공과에서 번역 업무를 하며 1971년까지 근무했다. 그 후, 겐트의 전자 음악·음악 심리학 연구소 주임, 브뤼셀의 Radio 3의 현대 음악 담당자 등의 직책을 겸임했으며, 루벤 가톨릭 대학교의 교수로 취임한 것은 1992년으로 늦었고, 그 1년 후인 1993년에 안트베르펜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후이베르츠에 관한 문헌은 대부분 "총 음정주의 음악의 길을 개척했다"는 점과 "슈톡하우젠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 점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의 전 생애에 초점을 맞춘 연구는 많지 않다. 또한 "포스트 시리얼 음악" 작품의 공연도 벨기에 외에서는 많지 않은 편이다. 벨기에 출신 클래식 음악가들은 시리얼 음악을 추진했던 앙리 푸쇠르, 장-루이 로베르(Jean-Louis Robert), 후이베르츠의 "벨기에 삼두"가 음악계에서 퇴장한 후, 거의 전위 음악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현재 다름슈타트 하계 강습회에서 주목받은 슈테판 프린스를 포함해도 전위 음악 관련 문헌이 검색되는 것은 4명밖에 없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923-1951)

카럴 후이바르츠는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나 플랑드르 왕립 음악원에서 공부했고, 이후 파리 음악원에서 작곡다리우스 미요에게, 음악 분석을 올리비에 메시앙에게 사사했다. 그는 또한 악기를 발명한 모리스 마르트노에게서 마르트노 악기를 배웠다.[4]

1951년 후이바르츠는 다름슈타트 하계 현대 음악 강좌에 참석하여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을 만났다. 둘 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종교적 수비학을 자신들의 음렬 기법 작곡에 통합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들은 깊은 대화를 나누었고,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진행하는 작곡 강좌에서 후이바르츠의 "Nummer 1" 중 한 악장인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연주했다. 그들은 작곡가가 연주한 음반으로 앙투안 골레아가 강연에서 들려준 메시앙의 "음가와 강도의 모드"(리듬의 네 개의 연구에서)를 처음 듣고 충격을 받았다.

베베른의 『피아노를 위한 변주곡』을 연구하여, 1951년에 완성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5]』에서 불레즈나 슈톡하우젠보다 먼저 음가와 다이내믹과 어택의 시리얼화에 도달하여 총체적 음렬주의의 길을 열었다.

2. 2. 음렬주의와의 만남 (1951-1955)

후이바르츠는 안트베르펜과 파리 음악원(1947-1951)에서 공부했다. 그곳에서 다리우스 미요올리비에 메시앙의 다른 학생들과 함께 있었다. 1951년 다름슈타트 하계 현대음악 강좌에 참가하여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을 만났다.[4]

1951년 고이바르츠는 다름슈타트 하계 현대 음악 강좌에 참석하여 5살 아래인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을 만났다. 둘 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종교적 수비학을 자신들의 음렬 기법 작곡에 통합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들은 깊은 대화를 나누었고,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진행하는 작곡 강좌에서 고이바르츠의 "Nummer 1" 중 한 악장인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연주했다. 그들은 작곡가가 연주한 음반으로 앙투안 골레아가 강연에서 들려준 메시앙의 "음가와 강도의 모드"(리듬의 네 개의 연구에서)를 처음 듣고 충격을 받았다. 이러한 경험들은 슈톡하우젠이 메시앙에게 사사해야겠다고 마음먹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이바르츠는 1952년 슈톡하우젠이 파리에서 정현파 발생 장치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매우 흥분했다. 고이바르츠는 이를 음악에 있어 가장 순수한 소리라는 중요한 발견으로 여겼다. 당시 슈톡하우젠은 이 기기에 의한 정현파 중첩의 어려움 때문에 그의 열정을 공유하지 않았다. 1953년 7월, 슈톡하우젠이 NWDR 쾰른 전자 음악 스튜디오에 새로운 직책을 맡은 후에야 더 적합한 장비를 찾았다. 그곳에서 제작된 첫 작품 중 하나는 고이바르츠의 ''Nr. 5 with Pure Tones''였으며, 슈톡하우젠은 그의 친구를 돕기 위해 노력했다. (슈톡하우젠이 정현파 작업을 포기하고 피아노 독주곡 작곡으로 돌아가자, 고이바르츠는 슈톡하우젠이 중요한 발견을 포기했다고 생각하여 철학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누가 최초의 유럽 "총체" 음렬 기법 작곡을 썼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그의 13개의 악기를 위한 ''Nummer 2''(1951)는 미셸 파노의 ''Nummer 1''(1950)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및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와 함께 "총체 음렬주의"의 정의에 따라 경쟁 후보로 꼽힌다.[5]

2. 3. 전자 음악 실험과 미니멀리즘으로의 전환 (1952-1993)

후이바르츠는 음렬 음악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다. 안트베르펜과 파리 음악원(1947-1951)에서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다리우스 미요올리비에 메시앙의 가르침을 받았다. 1951년 다름슈타트 하계 현대음악 강좌에 참가하여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을 만났고, 이후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1951년 다름슈타트 하계 현대 음악 강좌에 참석한 후이바르츠는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을 만났다. 두 사람은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종교적 수비학을 자신들의 음렬 기법 작곡에 통합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들은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진행하는 작곡 강좌에서 후이바르츠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중 한 악장을 연주했다. 또한 앙투안 골레아의 강연에서 메시앙의 "음가와 강도의 모드"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는 슈톡하우젠이 메시앙에게 배우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2년, 후이바르츠는 슈톡하우젠이 파리에서 정현파 발생 장치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에 흥분했다. 그는 정현파를 음악에서 가장 순수한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당시 슈톡하우젠은 정현파 중첩의 어려움 때문에 그의 열정에 공감하지 못했다. 1953년 7월, 슈톡하우젠이 NWDR 쾰른 전자 음악 스튜디오에서 새로운 직책을 맡은 후에야 더 적합한 장비를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제작된 첫 작품 중 하나는 후이바르츠의 ''Nr. 5 with Pure Tones''였으며, 슈톡하우젠은 그의 친구를 돕기 위해 노력했다.

누가 최초의 유럽 "총체" 음렬 기법 작곡을 썼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후이바르츠의 13개의 악기를 위한 ''Nummer 2''(1951)는 미셸 파노의 ''Nummer 1''(1950)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및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와 함께 "총체 음렬주의"의 정의에 따라 경쟁 후보로 꼽힌다.

1970년, 후이바르츠는 헨트의 [https://www.ugent.be/lw/kunstwetenschappen/ipem/en 심리 음향 및 전자 음악 연구소(IPEM)]에서 일하게 되었고, 이후 벨기에에서 여러 직책을 맡았다. 1975년 이후, 그의 작품들은 미니멀리즘 음악의 특징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다섯 개의 ''연도''(1979–82) 연작과 오페라 ''물병자리''(1983–92)가 있다. 후이바르츠에게 미니멀리즘과 음렬주의는 모두 비역동적인 "정적 음악"의 하위 범주였다. 그의 초기 음렬 기법 작곡(특히 전자 ''Nr. 4, met dode tonen'' [죽은 음]과 ''Nr. 5, met zuivere tonen'' [순수한 음])을 분석하면 두 기법 간의 긴밀한 연결을 확인할 수 있다.

슈톡하우젠은 후이바르츠를 "나의 유일한 작곡 선생님[6]"이라고 칭찬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둘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후이바르츠는 한동안 벨기에 민간 회사의 항공과에서 번역 업무를 하며 1971년까지 근무했다. 이후 겐트의 전자 음악·음악 심리학 연구소 주임, 브뤼셀의 Radio 3의 현대 음악 담당자 등의 직책을 겸임했으며, 루벤 가톨릭 대학교의 교수로 취임한 것은 1992년으로 늦었고, 그 1년 후에 사망했다.

3. 작품 세계

후이바르츠는 음렬 음악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안트베르펜과 파리 음악원(1947~1951)에서 공부했으며, 다리우스 미요올리비에 메시앙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51년 다름슈타트 하계 현대음악 강좌에서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을 만났다. 1970년부터 4년간 헨트의 음향 심리학 및 전자 음악 연구소에서 플랑드르 라디오의 전자음악 부장으로 일했고, 1974년부터 1987년까지 현대 음악계에서 활동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1984년부터 1992년까지 작곡한 오페라 물병자리가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총체적 음렬주의, 전자 음악, 미니멀리즘 음악 등 다양한 음악 사조를 아우른다.

3. 1. 총체적 음렬주의

고이바르츠는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나 플랑드르 왕립 음악원에서 공부했고, 이후 다리우스 미요에게 작곡을, 올리비에 메시앙에게 음악 분석을 사사했다. 그는 악기를 발명한 모리스 마르트노에게서 마르트노 악기를 배웠다.

1951년 고이바르츠는 다름슈타트 하계 현대 음악 강좌에 참석하여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을 만났다. 둘은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진행하는 작곡 강좌에서 고이바르츠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중 한 악장을 연주했다. 또한 앙투안 골레아의 강연에서 메시앙의 음가와 강도의 모드를 처음 듣고 충격을 받았다.

1952년 고이바르츠는 슈톡하우젠이 파리에서 정현파 발생 장치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매우 흥분했다. 고이바르츠는 이를 음악에 있어 가장 순수한 소리라는 중요한 발견으로 여겼다. 1953년 7월, 슈톡하우젠이 NWDR 쾰른 전자 음악 스튜디오에 새로운 직책을 맡은 후, 고이바르츠의 ''Nr. 5 with Pure Tones''가 제작되었고, 슈톡하우젠은 그의 친구를 돕기 위해 노력했다.

누가 최초의 유럽 "총체" 음렬 기법 작곡을 썼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그의 13개의 악기를 위한 ''Nummer 2''(1951)는 미셸 파노의 ''Nummer 1''(1950)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및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와 함께 "총체 음렬주의"의 정의에 따라 경쟁 후보로 꼽힌다.[1][2]

3. 2. 전자 음악

후이바르츠는 전자 음악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1952년, 후이바르츠는 정현파 발생 장치를 사용하여 음악을 만드는 것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정현파를 음악에서 가장 순수한 소리라고 생각했다.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은 처음에는 정현파 중첩의 어려움 때문에 회의적이었지만, 1953년 NWDR 쾰른 전자 음악 스튜디오에서 새로운 장비를 접한 후 후이바르츠의 생각에 동참하게 되었다.[3]

후이바르츠는 쾰른 전자 음악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초기 작품 중 하나인 ''Nr. 5 with Pure Tones''를 작곡했고, 슈토크하우젠은 그의 작업을 도왔다. (슈토크하우젠이 정현파 작업을 포기하고 피아노 독주곡 작곡으로 돌아가자, 후이바르츠는 슈토크하우젠이 중요한 발견을 포기했다고 생각하여 철학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1970년, 후이바르츠는 헨트의 [https://www.ugent.be/lw/kunstwetenschappen/ipem/en 심리 음향 및 전자 음악 연구소(IPEM)]에 자리를 얻었고, 이후 벨기에에서 여러 직책을 맡았다.

3. 3. 미니멀리즘

고이바르츠는 1975년 이후 미니멀리즘 음악의 측면을 띤 작품들을 썼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예로는 다섯 개의 ''연도''(1979–82) 연작과 오페라 ''물병자리''(1983–92)가 있다. 미니멀리즘은 일반적으로 음렬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여겨지지만, 고이바르츠에게는 두 기법 모두 비역동적인 "정적 음악"의 하위 범주에 불과했다. 그의 초기 음렬 기법 작곡(특히 전자음악 ''Nr. 4, met dode tonen'' [죽은 음]과 ''Nr. 5, met zuivere tonen'' [순수한 음])에 대한 분석을 통해 실제 연결이 얼마나 긴밀한지 알 수 있다.[1]

4. 주요 작품 목록

카럴 후이바르츠는 음렬 음악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1984년부터 1992년까지 작곡한 오페라 물병자리가 있다. 그의 작품은 오페라, 관현악, 앙상블, 성악-기악, 합창, 실내악, 피아노, 테이프, 악기 + 테이프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한다.

4. 1. 오페라

물병자리(1983–92)

4. 2. 관현악

4. 3. 앙상블


  • Tre Lieder per sonar a venti-sei영어 (1949)
  • 13개 악기를 위한 2번 작품 (Nr. 2 voor 13 instrumenten) (1951)
  • Nr. 3 met gestreken en geslagen tonennl (1952)
  • Nr. 6 met 180 klankvoorwerpennl (1954)
  • 과일이 이번 여름에 익도록, 르네상스 악기 14대를 위한 작품, 7명의 음악가 연주 (1975 또는 1976)
  • Erst das Gesicht...de (1978)
  • Zum Wassermannde (1984)
  • Avontuurnl (1985)
  • De Heilige Stadnl (1986)
  • Das Haarde (1990)

4. 4. 성악-기악


  • ''Elegische muziek'' (1950)
  • 미사 포 파우스 요하네스 XXIII (Mis voor Paus Johannes XXIII) (1968)
  • ''Bélise dans un jardin'' (1972)
  • ''Litanie IV'', 소프라노, 플루트, 클라리넷,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작품 (1981)
  • ''De Stemmen van de Waterman'' (1985)

4. 5. 합창

Mon doux pilote s'endort aussi프랑스어 (1976)

4. 6. 실내악


  •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1951)[1]
  • ''Ach Golgatha!'', 타악기, 하프, 오르간을 위한 작품 (1975)
  • ''Honneurs funèbres à la tête musicale d'Orphée'', 6대의 온드 마르트노를 위한 작품 (1978)
  • ''Litanie II'', 3명의 타악기 연주자를 위한 작품 (1980)
  • ''Aemstel Kwartet'' (1985)
  • ''De Zeven Zegels'', 현악 4중주를 위한 작품 (1986)
  • ''Voor Strijkkwartet'' (1992)

4. 7. 피아노

고이바르츠는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나 플랑드르 왕립 음악원에서 공부했고, 이후 작곡다리우스 미요에게, 음악 분석을 올리비에 메시앙에게 사사했다. 그는 또한 악기를 발명한 모리스 마르트노에게서 마르트노 악기를 배웠다.[1]

1951년 고이바르츠는 다름슈타트 하계 현대 음악 강좌에 참석하여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을 만났다. 둘은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진행하는 작곡 강좌에서 고이바르츠의 "Nummer 1" 중 한 악장인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연주했다.

누가 최초의 유럽 "총체" 음렬 기법 작곡을 썼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는데, 그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는 "총체 음렬주의"의 정의에 따라 경쟁 후보로 꼽힌다.[2][3]

작품명연도
Litanie I1979
Pas à Pas1985
작품명연도
피아노와 테이프를 위한 Stuk1964
피아노 4중주1972
작품명연도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1951


4. 8. 테이프

고이바르츠는 1953년에 ''5번 작품, 순수한 음으로''(Nr. 5 met zuivere tonen)를 제작했는데, 이는 NWDR 쾰른 전자 음악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첫 작품 중 하나였다.[1]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은 그의 친구를 돕기 위해 노력했다.[1] 1955년에는 ''Nr. 7 met convergerende en divergerende niveaus''를 작곡했다.

1972년에는 ''Nachklänge aus dem Theater I–II''(극장에서의 잔향 I–II)을 작곡했다.

제목연도
Nr. 4 met dode tonen1952
5번 작품, 순수한 음으로 (Nr. 5 met zuivere tonen)1953
Nr. 7 met convergerende en divergerende niveaus1955
Nachklänge aus dem Theater I–II (극장에서의 잔향 I–II)1972


4. 9. 악기 + 테이프

고이바르츠는 전자 음악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특히 테이프 음악과 악기를 결합하는 시도를 통해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제목연도설명
피아노와 테이프를 위한 Stuk1964피아노와 테이프를 결합한 초기 작품
피아노 4중주1972
You'll Never Be Alone Anymore1975
Litanie V1982하프시코드와 테이프를 위한 작품


5. 평가 및 영향

후이바르츠는 음렬 음악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의 음악은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을 비롯한 다른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1951년 다름슈타트 하계 현대음악 강좌에서 슈토크하우젠과 만나 깊은 교류를 나누었으며, 이는 두 작곡가 모두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6] 후이바르츠는 정현파 발생 장치를 사용한 전자 음악에 대한 선구적인 실험으로도 유명하다. 1952년 슈토크하우젠이 파리에서 정현파 발생 장치를 사용할 수 있게 되자, 후이바르츠는 이를 음악에 있어 가장 순수한 소리라는 중요한 발견으로 여겼다.

누가 최초의 유럽 "총체" 음렬 기법 작곡을 썼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후이바르츠의 ''Nummer 2''(1951)는 미셸 파노의 ''Nummer 1''(1950)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및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와 함께 "총체 음렬주의"의 정의에 따라 경쟁 후보로 꼽힌다.

1970년 헨트의 [https://www.ugent.be/lw/kunstwetenschappen/ipem/en 심리 음향 및 전자 음악 연구소(IPEM)]에서 자리를 얻은 후, 후이바르츠의 작품은 미니멀리즘 음악의 측면을 띠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다섯 개의 ''연도''(1979–82) 연작과 오페라 ''물병자리''(1983–92)가 있다. 후이바르츠에게 미니멀리즘과 음렬주의는 모두 비역동적인 "정적 음악"의 하위 범주였다.

슈토크하우젠은 후이바르츠를 "나의 유일한 작곡 선생님[6]"이라고 칭찬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절교하고, 후이바르츠는 한동안 벨기에 민간 회사의 항공과에서 번역 업무를 하며 음악계를 떠나 있었다. 이후 겐트의 전자 음악·음악 심리학 연구소 주임, 브뤼셀 Radio 3의 현대 음악 퍼스낼리티 등의 직책을 맡았고, 루벤 가톨릭 대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다름슈타트에서 일찍 떠났지만, 후이베르츠에 언급된 문헌의 대부분이 "총 음정주의 음악의 길을 개척했다"는 점과 "슈톡하우젠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 점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의 전 생애에 초점을 맞춘 연구는 많지 않다. "포스트 시리얼 음악" 작품의 공연도 벨기에 외에서는 많지 않다.

참조

[1] 문서 「フイヴァールツ」「フイファールツ」「ヘイヴェルツ」「フイヴァルツ」などとも日本語表記されている
[2] Youtube Stadstelevisie Sint-Niklaas - 2020/02/14 - Passages VII https://www.youtube.[...]
[3] Youtube Thea Derks + Filip Rathé bespreken Karel Goeyvaerts MGIJ 26-10-2017 https://www.youtube.[...]
[4] 웹사이트 Karel Goeyvaerts http://donemus.nl/ka[...] DONEMUS 2020-06-10
[5] 웹사이트 '"Absolute Purity Projected into Sound": Goeyvaerts, Heidegger and Early Serialism' https://www.jstor.or[...] JSTOR 2020-06-10
[6] 웹사이트 Karel Goeyvaerts: A Belgian Pioneer of Serial, Electronic and Minimal Music https://www.jstor.or[...] JSTOR 2020-06-10
[7] 서적 ISBN 4-276-12192-2
[8] 서적 ISBN 4-560-036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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