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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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룸은 800년경 불가리아의 최고 권좌에 오른 인물로, 불가리아를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시킨 군주이다. 그는 아바르족을 격파하고 영토를 확장했으며, 비잔티움 제국과 여러 차례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특히 니케포로스 1세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으며, 미카엘 1세 랑가베를 폐위시키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는 등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불가리아 최초의 성문법전을 제정하여 엄격한 통치를 펼쳤다. 크룸은 강력한 군사력과 통치력으로 불가리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전쟁에서의 잔혹함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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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이름 | 크룸 |
| 로마자 표기 | Krum |
| 다른 표기 | Κροῦμος/Kroumos |
| 별칭 | 크룸 스트라슈니 |
| 통치 | |
| 작위 | 불가리아 제1제국의 카나수비기 |
| 재위 기간 | 803년–814년 |
| 선임자 | 카르담 |
| 후임자 | 오무르탁 |
| 개인 정보 | |
| 출생일 | 불명 |
| 사망일 | 814년 4월 13일 |
| 종교 | 텡그리교 |
| 배우자 | 불명 |
| 자녀 | 오무르탁 부딤 |
| 가문 | |
| 왕가 | 크룸 왕조 |
| 가문 | 둘로씨 (추정) |
2. 어린 시절과 성장
크룸의 가계와 출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판노니아 출신이라는 설과 아스파루흐계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불가리아어 이름 크룸은 고대 불가리아어 '크루멘(krumen)'에서 유래했으며, '붉은색'을 의미한다는 설과 '크레메(kreme)'에서 유래했으며, '바위'를 의미한다는 설이 있다.[3][4][5]
800년 이후 아바르족을 완전히 격파하고 세력을 확장한 크룸은 803년 카르담의 뒤를 이어 칸의 자리에 올랐다. 807년에는 도나우강 유역과 트란실바니아 일대의 불가르족을 통합하여 강력한 군대를 편성했다.
2. 1. 불가리아-아바르 전쟁 (805)
805년경, 크룸은 아바르 카간국을 격파하여 남은 아바르족을 섬멸하고, 옹갈에서 다시 불가르의 권위를 회복했다. 옹갈은 도나우 강 북쪽,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트란실바니아를 포함하고 다뉴브 강을 따라 판노니아 동부까지 이르는 지역의 전통적인 불가르 명칭이다. 이로 인해 프랑크 왕국과 불가리아 사이에 공통 국경이 형성되었고, 이는 크룸의 후계자들의 정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1]3.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쟁
크룸은 불가르의 영토 확장 정책을 추진하여 비잔티움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808년 스트룸 강 전투와 809년 세르디카 점령으로 비잔티움에 큰 타격을 주었다.[1] 니키포로스 1세는 반격하여 불가르의 수도 플리스카를 파괴했으나, 플리스카 전투에서 크룸에게 대패하고 전사했다.[2] 크룸은 니키포로스 1세의 해골을 은으로 도금해 술잔으로 사용했다.[2]
812년 크룸은 흑해 연안의 데벨투스를 점령하고, 미하일 1세 랑가베와의 강화 제안이 결렬되자 812년 11월 메셈브리아를 점령했다.[6] 813년 베르시니키아 전투에서 승리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진격했으나, 함락에는 실패했다.
레오 5세는 크룸과 단독 면담을 가장하여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분노한 크룸은 제국 전역을 초토화하고 아드리아노폴리스 주민들을 학살했다.[6] 81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재공격을 준비하던 중, 크룸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6]
3. 1. 니키포로스 1세와의 전쟁 (807-811)
808년 늦가을, 크룸은 스트루마 강 유역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대군을 격파하였다.[1] 809년 봄에는 세르디카를 점령하였다.[1] 이 승리로 비잔티움 황제 니키포로스 1세는 국경을 보호하기 위해 아나톨리아 인구를 국경 지역에 정착시키고 세르디카를 탈환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811년 초, 니키포로스 1세는 불가리아에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여 마르켈라이(카르노바트 근처)까지 진격했다.[2] 7월 11일 크룸은 협상을 시도했지만, 니키포로스는 약탈을 계속하였다.[2] 니키포로스 1세는 7월 20일 소규모 군대만으로 방어되고 있던 플리스카를 점령하고 약탈하였다.[2]

12세기 시리아 야코비파 총대주교 미카엘 시리아인의 연대기에 따르면, 니키포로스 1세는 불가리아인들을 학살하고 어린아이들을 땅에 묶어 곡식을 빻는 돌로 짓밟는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고 한다.[2]

니키포로스 1세가 불가리아 수도를 약탈하는 동안, 크룸은 병사들을 동원하여 여성과 농민들에게까지 무기를 지급하고 산길에 배치하여 비잔티움 군대를 기다렸다.[2] 7월 26일 새벽, 불가리아군은 바르비차 고개에서 후퇴하는 니키포로스 1세를 함정에 빠뜨렸다.[2] 플리스카 전투에서 비잔티움 군대는 궤멸되었고, 니키포로스 1세는 전사하였다.[2] 그의 아들 스타우라키오스는 목에 큰 부상을 입었으나 황실 근위대에 의해 구출되었다.[2] 크룸은 니키포로스 1세의 해골을 은으로 장식하여 술잔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2]
3. 2. 미하일 1세 랑가베와의 전쟁 (812-813)
812년 크룸은 흑해 연안의 비잔티움 제국 도시 데벨투스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불가리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미하일 1세 랑가베는 이에 대응하려 했으나 부하들의 반란으로 실패했고,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주민들은 달아났으며 제국 변경의 주요 요새는 버려졌다. 크룸은 비잔티움 제국이 데리고 있는 불가르족 포로와 탈영병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미하일 1세에게 강화를 제안했다. 그러나 스투디움의 테오도루스의 반대로 전쟁이 재개되었고, 크룸은 812년 11월 메셈브리아(네세바르)를 점령했다.[6]
813년 2월, 불가리아군은 트라키아를 급습했지만 비잔티움 군대에 격퇴되었다. 미하일 1세는 전 제국에서 군대를 소집해 북쪽으로 진군했다. 크룸은 군대를 아드리아노플 남쪽 베르시니키아 근처로 이끌었고, 양측은 2주 동안 대치했다. 813년 6월 22일, 베르시니키아 전투에서 비잔티움 군대가 공격했지만 곧 퇴각했다. 크룸의 기병이 추격하면서 미하일 1세는 패배했고, 크룸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도중에 대부분의 요새들은 불가리아군의 강력함을 듣고 싸움 없이 항복했다. 아드리아노플 만이 저항했다. 크룸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앞에서 인간과 동물을 대상으로 이교도 제사를 지내는 등 힘을 과시하여 비잔티움 통치자들이 불가리아의 정복을 인정하는 평화 조약을 맺도록 강요했다.[6]
결국 미하일 1세는 명성을 잃고 퇴위하여 수도사가 되었다.[6]
3. 3. 레오 5세와의 전쟁과 죽음 (813-814)
미카엘 1세가 물러나고, 전선을 버리고 도망친 장군 레오가 레오 5세로 즉위했다. 크룸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 공격했으나, 난공불락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뚫을 수 없었다. 레오는 크룸에게 단독 면담을 제의했고, 비무장으로 만나기로 했다. 크룸이 회담 장소에 도착하자 비잔티움 군사가 매복했다가 크룸을 공격했다. 크룸은 화살 한 대를 맞고 간신히 달아났지만, 비잔티움의 배신에 분노하여 퇴각하면서 제국 전역을 초토화했다.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는 약 1만 명의 주민이 학살당했다.[6]814년 봄, 크룸은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을 준비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크룸의 공격에 대비하는 한편, 서방 황제 샤를마뉴의 아들 경건왕 루트비히에게 사절을 보내 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4월 13일 예수 승천 대축일, 원정을 떠나려던 크룸은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피를 토하고 죽었다.[6] 그의 뒤를 이어 아들 오무르타그가 불가르족 칸이 되었다.

4. 크룸의 유산
크룸은 불가리아 최초의 성문 법전을 제정한 것으로 기억된다. 이 법전은 거지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고 모든 가난한 불가리아인에게 국가의 보호를 보장하였다. 음주, 중상모략, 강도질은 엄하게 처벌받았다.[7] 그는 이 법들을 통해 엄격하지만 공정한 통치자로 알려졌으며, 슬라브족과 불가르족을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통합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삶을 다룬 소설이 드미트르 만토프(1973)와 이반 보그다노프(1990)에 의해 쓰여졌다.[8]
5. 평가
크룸은 강력한 군사력과 외교적 수완을 바탕으로 불가리아의 영토를 확장하고, 동로마 제국을 위협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플리스카 전투에서 동로마 황제 니케포로스 1세를 죽이고, 베르시니키아 전투에서 승리하여 트라키아 대부분을 정복하는 등 군사적 업적을 남겼다.[1] 그러나 전쟁에서의 잔혹함과 니케포로스 1세의 해골을 술잔으로 사용한 일화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1] 그의 통치는 불가리아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되며, 후대 불가리아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참조
[1]
웹사이트
Krum
http://www.britannic[...]
[2]
서적
История на българската средновековна държава и право
Сиби
2009
[3]
서적
Materialia Turcica
https://books.google[...]
Studienverlag Brockmeyer
[4]
학술지
Personal names among Avars, Bulgars, and Khazars
https://www.academia[...]
2014-01-00
[5]
서적
Philologiae Turcicae fundamenta. T. 3, Philologiae et historiae Turcicae fundamenta / ed. Louis Bazin ; György Hazai. History of the Turkic peoples in the pre-Islamic period
https://books.google[...]
Franciscum Steiner
[6]
서적
The Forgotten Middle Ages
[7]
서적
Хан Крум: Роман
https://books.google[...]
Издателство на отечествения фронт
[8]
서적
Хан Крум: Романизуван живот
https://books.google[...]
Народна Младеж
[9]
간행물
Belleten
https://books.google[...]
Türk Tarih Kurumu Basimevi
[10]
간행물
Essential History of Bulgaria in Seven Pages
Bulgarian Academy of Sci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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