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크리스티안 위르겐센 톰센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크리스티안 위르겐센 톰센은 1788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난 고고학자로, 삼시대 구분법을 제창하여 고고학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코펜하겐 국립박물관의 책임자로서 유물의 재료 변화를 기준으로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로 구분하여 전시했다. 1836년에는 『북방 고대 문화 입문』을 저술하여 삼시대법을 제창했으며, 발견 상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양식 분석을 통해 연대기적 틀을 구축했다. 톰센의 방법은 스칸디나비아 고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저서는 영국과 미국 고고학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또한 코펜하겐의 예술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1862년에는 미국철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덴마크의 고고학자 - 예르겐 조에가
    예르겐 조에가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에 활동한 덴마크 출신의 고고학자, 화폐학자, 이집트학자로, 이탈리아 로마에서 고고학 연구를 하며 고고학의 기초를 다지고 화폐학, 특히 이집트 동전 연구에 기여했으며 로제타석 연구에도 참여했다.
  • 국립박물관 (덴마크) - 벡쇠 투구
    벡쇠 투구는 청동기 시대에 제작된 반구형 투구로, 맹금류 부리, 뿔, S자형 장식 등 다양한 장식이 특징이며, 태양, 전쟁 등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어 봉헌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국립박물관 (덴마크) - 세이킬로스의 비문
    세이킬로스의 비문은 1~2세기에 제작된 고대 그리스 비문으로, 삶의 덧없음과 현재를 즐기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멜로디를 나타내는 성악 기호가 함께 새겨져 당시의 음악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현재 덴마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1788년 사망 - 다누마 오키쓰구
    다누마 오키쓰구는 에도 시대 후기 쇼군의 신임을 얻어 로주에 올라 막부 재정 개혁을 추진했으나 부정부패와 농촌 황폐화로 비판받으며 실각한 인물이다.
  • 1788년 사망 - 피에르 앙드레 드 쉬프렌
    피에르 앙드레 드 쉬프렌은 18세기 프랑스 해군의 명장으로 인도양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에 맞서 네 차례 해전을 승리하며 프랑스 해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지만, 엄격한 성격과 부하 장교들과의 갈등도 있었다.
크리스티안 위르겐센 톰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크리스티안 위르겐센 톰센
요한 빌헬름 게르트너, 《크리스티안 위르겐센 톰센》, 1849년
이름크리스티안 위르겐센 톰센
출생1788년 12월 29일, 코펜하겐, 덴마크
사망1865년 5월 21일, 코펜하겐, 덴마크
국적덴마크
학문 분야
분야고고학
박물관 관리
알려진 업적삼시대 체계 도입
참고
서명Christian Jürgensen Thomsen

2. 생애

크리스티안 위르겐센 톰센은 1788년 코펜하겐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파리를 방문했고, 덴마크로 돌아와 동전 수집에 관심을 가지며 시간 흐름에 따른 양식 변화에 대한 인식을 키웠다.[1]

1816년, 톰센은 덴마크 왕립 고대 유물 수집 및 보존 위원회의 첫 전시 책임자로 선정되었다. 그는 보수 없이 일했으며, 그의 재산과 동전 수집 경험이 자격 요건이 되었다.[2] 그는 방대한 유물 컬렉션을 정리하면서, 유물이 발견된 상황과 함께 출토된 다른 유물들(공존 유물)에 주목했다. 이를 바탕으로 유물을 단순히 재질이나 기술 수준이 아닌, 실제 사용된 연대 순서로 분류하고자 했다. 톰센은 석기, 청동기, 철기로 시대를 나누는 삼시대 구분법을 체계적으로 정립했으며, 이는 유물의 연대를 측정하는 고고학의 중요한 방법론적 기초가 되었다.[3][4][5] 그의 연대기는 1825년에 확립되었고,[6] 1836년에는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는 삽화가 포함된 단행본 《북유럽 고대 유물 안내서》(Ledetraad til Nordisk Oldkyndighed)를 출판했다.[7] 이 책은 1848년 영어로 번역되어 영국과 미국 고고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10]

톰센은 고고학 분야 외에도 닐스 라우리츠 호이엔과 함께 코펜하겐 예술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영향력 있는 예술 협회인 ''쿤스트포레닌겐''(Kunstforeningen)의 이사로 활동했으며, 1839년에는 호이엔과 함께 왕립 회화 컬렉션의 검사관으로 임명되었다. 많은 개인 수집가들도 그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의 연구 방법은 J. J. A. Worsaae, 브로르 에밀 힐데브란트, 오스카 몬텔리우스 등 후대의 스칸디나비아 고고학자들에게 전수되었으며,[9] 동시대 스웨덴 학자인 스벤 닐슨과도 영향을 주고받았다. 1862년에는 미국철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11]

2. 1. 어린 시절

크리스티안 위르겐센 톰센은 1788년 코펜하겐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는 파리를 방문한 경험이 있으며, 덴마크로 돌아온 후에는 동전 수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은 그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양식의 변화를 인식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1]

2. 2. 고고학에 대한 기여

1848년 컬렉션을 방문객들에게 보여주는 톰센. 당시 그림.


1816년 톰센은 덴마크 왕립 고대 유물 수집 및 보존 위원회의 첫 전시회를 기획하는 책임자로 선정되었다. 이 직책은 보수가 없었기에, 톰센이 가진 자산과 동전 수집가로서의 경험이 중요한 자격 요건이 되었다.[2]

톰센은 루크레티우스, 베델 시몬센, 몽포콩, 니콜라 마델 등의 저작을 통해 선사 시대를 세 시대로 나누는 모델을 접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소장 유물을 연대순으로 정리하기로 결정했다.[3] 이전에는 유물을 재질이나 제작 수준에 따라 분류하기도 했지만, 톰센은 많은 유물의 출토 맥락을 알고 있었기에 조잡한 유물과 정교한 유물이 함께, 또는 금속 유물과 석기 유물이 함께 발견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단순히 기술 발달 순서로 유물을 분류하는 것을 넘어, 유물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톰센은 특정 유물들이 어떤 환경에서 함께 발견되는지, 또 어떤 유물들이 함께 발견되지 않는지를 체계적으로 기록하여 시대별 특징을 파악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석기는 호박, 도자기, 유리 구슬과 함께 발견되는 반면, 청동과 함께 발견될 수 있지만, 은 철기 시대 유물과만 함께 나온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청동기 시대 무기는 철기 시대 유물과 함께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하고, 각 시대를 대표하는 주요 절삭 도구 재료에 따라 시대를 구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매장 방식에 따라서도 부장품의 종류가 다르다는 점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석기 시대 유물은 화장되지 않은 시신이나 석실 무덤에서, 청동기 시대의 무기와 루르는 돌널무덤에서, 철기 시대 유물은 고분의 석실 무덤에서 주로 발견되었다. 이러한 연구와 코펜하겐 국립박물관의 전시품 분류 경험을 바탕으로 톰센은 인류가 돌 외에 금속을 알지 못했던 석기 시대, 철이 아직 사용되지 않았던 청동기 시대, 그리고 철기 시대라는 세 시대를 거쳤다는 삼시대 구분법을 제창했다. "왜 유리 시대는 없느냐"는 비판적인 질문에 대해, 그는 유리 구슬은 세 시대 모두에서 발견되지만 유리 그릇은 철기 시대에만 나타난다고 답하며 자신의 분류 체계의 합리성을 설명했다.

톰센에게 유물의 발견 상황(고고학적 맥락)은 연대 측정의 핵심이었다. 그는 1821년 동료 수집가 슈뢰더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이 함께 발견되었는지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썼으며, 이듬해에는 "대부분의 고대 유물에 대해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한다... 미래의 고고학자들만이 결정할 수 있겠지만, 함께 발견되는 것을 관찰하지 않고 우리 컬렉션이 더 높은 수준으로 개선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4]

이처럼 고고학적 맥락과 유물의 공존 관계를 체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톰센은 소장 유물에 대한 연대기적 틀을 구축했다. 이를 통해 출처 정보가 부족한 새로운 발견물이라도 기존의 연대기에 따라 분류할 수 있게 되었다. 즉, 톰센의 시스템은 단순한 기술 발달 모델이나 진화론적 모델이 아닌, 실제 유물의 사용 시기를 반영하는 연대기적 시스템이었다.[5] 그의 연대기는 1825년에 확립되었고,[6] 박물관 방문객들에게도 이러한 분류 방법이 설명되었다. 톰센은 또한 발견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술 논문과 소책자를 발표했다.[7] 1836년에는 삽화가 포함된 단행본 《북유럽 고대 유물 안내서》(Ledetraad til Nordisk Oldkyndighedda)를 출판하여 자신의 연대기와 유물의 공존 관계에 대한 설명을 제시했다. 이 저술에서 그는 재료의 발견, 제작, 이용이라는 원리에 입각한 삼시대법이 스칸디나비아와 그 주변 지역에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빈켈만[8]과 같은 이전의 골동품 연구가들처럼 톰센도 양식 분석에 주의를 기울였지만, 그는 먼저 확립된 연대기적 틀을 바탕으로 양식의 발달을 설명했으며, 양식 분석을 연대기 설정의 주된 근거로 삼지는 않았다. 톰센이 고고학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비교적 동질적인 문화권에서 출토된 방대하고 다양한 유물군을 검토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삼시대 구분법을 단순한 추측성 진화 모델이 아닌, 실증적인 연대기 시스템으로 발전시킨 최초의 인물이었다.[9]

톰센의 연구와 삼시대 구분법은 이후 스칸디나비아 선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제자인 보르소[13]의 거듭된 발굴을 통해 실증적으로 뒷받침되었다. 그는 J. J. A. Worsaae, 브로르 에밀 힐데브란트, 오스카 몬텔리우스와 같은 고고학자들에게 자신의 연구 방법을 전수했다. 또한 동시대 스웨덴의 선사학자인 스벤 닐슨 등과도 영향을 주고받았다.

톰센의 《북유럽 고대 유물 안내서》는 1848년에 영어로 번역되었고, 보르소의 저서 《덴마크의 원시 고대 유물》(The Primeval Antiquities of Denmark)은 1849년에 영어로 출판되었다. 이 두 저서는 영국과 미국 고고학의 이론 및 실제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10]

1862년, 그는 미국철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11]

2. 3. 삼시대법 제창



1816년 톰센은 덴마크 왕립 고대 유물 수집 및 보존 위원회의 첫 전시회 큐레이터로 선정되었다.[2] 그는 방대한 유물 컬렉션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분류 방식에 한계를 느꼈다. 당시에는 유물을 재질이나 제작 수준에 따라 기계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톰센은 많은 유물의 출토 정보가 알려져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조잡한 유물과 정교한 유물, 또는 금속 유물과 돌 유물이 같은 장소에서 함께 발견되는 경우가 있음을 확인하고, 단순히 기술의 발달 과정만을 따르기보다 각 유물이 실제로 어느 시대에 속하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톰센은 루크레티우스, 베델 시몬센, 베르나르 드 몽포콩, 마델 등의 저작을 통해 선사 시대를 세 시대로 나누는 모델을 이미 접했을 가능성이 있으며,[3] 이를 바탕으로 유물을 연대순으로 배열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특정 유물들이 함께 출토되는 경향, 즉 공존 관계를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어떤 종류의 유물들이 같이 발견되고,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은지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면 각 시대의 특징을 밝힐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발견했다.

  • 석기는 주로 호박, 도자기, 유리 구슬과 함께 발견된다.
  • 청동 유물은 철이나 금 유물과 함께 발견될 수 있다.
  • 은 유물은 철 유물과 함께 발견되는 경향이 있다.
  • 청동기 시대의 무기는 철기 시대 유물과 함께 발견되지 않는다.


이를 바탕으로 톰센은 인류가 사용한 주요 도구 재료의 변화에 따라 시대를 구분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는 또한 매장 방식과 부장품 종류 사이에도 연관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석기는 화장하지 않은 시신이 묻힌 석실 무덤에서, 청동 무기와 루르(Lur)는 돌 편암 무덤에서, 철기는 고분의 석실 무덤에서 주로 발견되었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종합하여 톰센은 인류의 선사 시대를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로 나누는 삼시대법을 제창했다. 누군가 "왜 유리 시대는 없느냐"고 비판적으로 물었을 때, 톰센은 유리 구슬은 세 시대 모두에서 발견되지만 유리 그릇은 철기 시대에만 나타난다고 답하며 자신의 분류 기준이 재료의 보편성이 아닌 시대적 특징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톰센에게 유물의 발견 상황, 즉 고고학적 맥락은 연대 측정의 핵심이었다. 그는 1821년 동료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함께 발견된 것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썼으며, 1822년에는 "함께 발견되는 것을 관찰하지 않고 우리 컬렉션이 더 높은 수준으로 개선되지 않으면 미래의 고고학자들도 (유물의 연대를) 결정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4] 이처럼 고고학적 맥락과 유물의 공존 관계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통해 톰센은 방대한 유물 컬렉션에 대한 연대기적 틀을 세울 수 있었다. 그의 연대기는 1825년에 확립되었고,[6] 톰센의 시스템은 단순히 기술의 발달 단계를 나열하는 진화론적 또는 기술적 시스템이 아닌, 실제 유물의 사용 시기를 밝히는 진정한 연대기적 시스템으로 평가받는다.[5]

톰센은 코펜하겐 국립박물관의 책임자로서 박물관 전시품을 도구, 특히 칼날 재료의 변화를 기준으로 분류하여 삼시대법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널리 알리기 위해 박물관 방문객들에게 자신의 방법을 교육하고, 발견 상황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한 학술 논문과 팸플릿을 발표했다.[7] 마침내 1836년에는 삽화와 함께 자신의 연대기 및 유물 공존 관계에 대한 설명을 담은 단행본 『Ledetraad til Nordisk Oldkyndighed|북유럽 고대 유물 안내서da』를 출판하여 삼시대법 이론을 집대성했다.

톰센은 이전 시대의 골동품 수집가들처럼 유물의 양식 분석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양식의 변화를 연대 측정의 근거로 삼기보다는 이미 확립된 자신의 연대기적 틀 안에서 양식의 발달 과정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다.[8][9] 그의 삼시대법은 제자인 J. J. A. Worsaae의 거듭된 발굴 조사를 통해 고고학적으로 실증되었으며,[13] 스칸디나비아와 그 주변 지역에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톰센은 스웨덴의 스벤 닐슨과 같은 동시대 학자들과 교류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고, 브로르 에밀 힐데브란트와 오스카 몬텔리우스 같은 후대의 스칸디나비아 고고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톰센의 『북유럽 고대 유물 안내서』는 1848년에 영어로 번역되었고, 이듬해인 1849년에는 Worsaae의 저서 『덴마크의 원시 고대 유물』(The Primeval Antiquities of Denmark)이 영어로 출판되면서, 그의 삼시대법은 영국과 미국 등 영어권 국가의 고고학 이론과 실제 연구 방법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10] 톰센은 이러한 학문적 공로를 인정받아 1862년 미국철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11]

3. 영향

크리스티안 위르겐센 톰센은 고고학 분야에서 삼시대 구분법을 체계화하여 선사 시대 연구 방법론에 혁신을 가져왔으며, 이는 후대 고고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예술 분야에서도 닐스 라우리츠 호이엔과 함께 활동하며 코펜하겐 예술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3. 1. 고고학 분야



1816년 톰센은 덴마크 왕립 고대 유물 수집 및 보존 위원회의 첫 번째 전시회를 기획하고 관리하는 큐레이터로 선정되었다. 이 직책은 보수가 없었기에, 톰센이 가진 재산과 동전 수집가로서의 경험이 그를 선정한 주요 배경이 되었다.[2]

톰센은 루크레티우스, 베델 시몬센, 몽포콩, 마델 등의 저작을 통해 선사 시대를 세 시대로 나누는 모델(삼시대 구분법)을 이미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수집된 유물들을 연대순으로 배열하기로 결정했다.[3] 톰센 이전에는 유물을 재료나 제작 수준에 따라 기계적으로 분류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지만, 그는 많은 유물의 출토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조잡한 유물과 정교한 유물이 함께 발견되거나, 금속 유물과 돌 유물이 함께 출토되는 경우를 인지했다. 그는 단순히 기술의 발전 과정이나 진화론적 관점으로 유물을 분류하는 것을 넘어, 각 유물이 실제로 어느 시대에 속하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톰센은 특정 유물들이 어떤 종류의 다른 유물들과 함께 발견되는지, 또 어떤 유물들과는 함께 발견되지 않는지를 체계적으로 조사했다. 이를 통해 각 시대만의 특징적인 유물 조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석기호박, 도자기, 유리 구슬과 함께 발견되는 경향이 있었고, 청동 유물은 유물과 함께 발견될 수 있었지만, 은 철기 시대 유물과만 관련이 있었다. 또한 청동기 시대의 무기는 철기 시대 유물과 함께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해, 각 시대를 대표하는 주요 절삭 도구 재료(돌, 청동, 철)를 기준으로 시대를 나눌 수 있음을 확인했다. 그는 매장 방식에 따라서도 부장품의 종류가 다르다는 점을 발견했다. 석기 시대 유물은 화장되지 않은 시신과 석실 무덤에서, 청동기 시대의 무기와 루르(Lur)는 돌로 만든 편암 무덤에서, 철기 시대 유물은 고분의 석실 무덤에서 주로 발견되었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톰센은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일부 비판가들이 "왜 유리 시대는 없느냐"고 질문했을 때, 톰센은 유리 구슬은 세 시대 모두에서 발견되지만 유리 그릇은 철기 시대에만 나타난다고 답하며 자신의 분류 체계의 타당성을 설명했다.

톰센에게 유물의 연대를 측정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발견 상황, 즉 고고학적 맥락이었다. 그는 1821년 동료 골동품 수집가 슈뢰더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이 함께 발견되었는지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지적했으며, 이듬해에는 "우리는 대부분의 고대 유물에 대해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한다... 미래의 고고학자들만이 결정할 수 있겠지만, 함께 발견되는 것을 관찰하지 않고 우리 컬렉션이 더 높은 수준으로 개선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쓰며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4]

이처럼 고고학적 맥락과 유물의 공존 관계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통해 톰센은 수집된 유물들에 대한 연대기적 틀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 틀을 이용하면, 개별 유물의 출처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더라도 기존에 확립된 연대기에 따라 새로운 발견물을 분류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따라서 톰센의 시스템은 단순한 기술 발전이나 진화론적 모델이 아닌, 실제 유물의 사용 시기를 반영하는 진정한 연대기적 시스템이었다.[5] 그의 연대기는 1825년에 확립되었고,[6] 박물관 방문객들에게도 이러한 방법론이 교육되었다. 톰센은 또한 발견 상황 정보가 이후의 해석과 연대 측정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는 학술 논문과 팸플릿을 발표했다.[7] 마침내 1836년에는 삽화가 포함된 단행본인 『북유럽 고대 유물 안내서』(Ledetraad til Nordisk Oldkyndighed|레데트라드 틸 노르디스크 올퀴디헤드dan)를 출판하여, 유물들이 함께 발견되는 양상에 대한 설명과 함께 자신의 연대기 체계를 공식적으로 제시했다. 이것이 바로 삼시대 구분법의 제창이다. 코펜하겐 국립박물관의 책임자로서 톰센은 박물관 전시품을 도구, 특히 칼날 재료의 변화를 기준으로 분류하여 이 세 시대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전시했다. 이 생각은 재료의 발견, 제작, 이용이라는 원리에 입각했으며, 톰센은 이 구분이 스칸디나비아와 그 주변 지역에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빙켈만[8]과 같은 이전의 골동품 수집가들처럼 톰센 역시 유물의 양식 분석에 주목했지만, 그는 양식의 발전을 연대기적 틀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활용했을 뿐, 양식 자체를 시대 구분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지는 않았다. 톰센이 고고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비교적 동질적인 문화권(스칸디나비아)에서 출토된 방대하고 다양한 유물들을 검토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추상적인 진화 모델이 아닌, 실제 유물 증거에 기반한 연대기 시스템을 최초로 발전시켰다.[9]

톰센의 연구와 삼시대 구분법은 스칸디나비아의 후대 선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J. J. A. Worsaae, 브로르 에밀 힐데브란트, 오스카 몬텔리우스와 같은 고고학자들에게 자신의 방법론을 직접 가르쳤으며, 그의 제자인 J. J. A. Worsaae[13]는 거듭된 발굴 조사를 통해 삼시대법을 고고학적으로 실증했다. 톰센은 또한 스벤 닐슨과 같은 동시대 스웨덴 선사학자들과도 교류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톰센의 『북유럽 고대 유물 안내서』는 1848년에 영어로 번역되었고, 보르소의 저서 『덴마크의 원시 고대 유물』(The Primeval Antiquities of Denmark|더 프라이미벌 앤티퀴티스 오브 덴마크eng)은 1849년에 영어로 출판되었다. 이 두 책은 영국미국의 고고학 이론과 실제 연구 방법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10]

1862년에는 미국철학회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11]

3. 2. 예술 분야

닐스 라우리츠 호이엔과 함께 톰센은 코펜하겐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830년대에 회원 수와 지위가 최고조에 달했던 영향력 있는 쿤스트포레닌겐(예술 협회)의 이사로 활동했다. 1839년, 그는 닐스 라우리츠 호이엔과 함께 왕립 회화 컬렉션의 검사관으로 임명되었다. 많은 개인 수집가들 또한 톰센에게 자문을 구했다.

4. 저서


  • (1836) ''북유럽 고고학 안내서''(Ledetraad til Nordisk Oldkundskabda), 1837년 독일어로 출판, 1848년 영어로 출판.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History's Shadow: Native Americans and Historical Consciousness in the Nineteenth Century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1] 웹사이트 APS Member History https://search.amphi[...] 2021-04-20
[12] 웹사이트 Kasper Monrad: Hverdagsbilleder. Dansk guldalder - kunstnerne og deres vilkår. Kbhn. Christian Ejlers' forlag 1989. 344 sider, rigt ill. i s/h og farver, indbundet 398 kr. http://www.tidsskrif[...] Historisk Tidsskrift 2010-10-08
[13] 문서 톰센の後を受けてデンマーク国立博物館の館長を務め、19世紀後半、ヨーロッパ先史考古学の指導的位置にあった人。[[ハインリヒ・フォン・シーボルト]]と1873年(明治6年)に始まる文通をしていた。[[佐原真]]によると「彼こそ、世界の貝塚研究史上、筆頭に掲げるべき研究者」である。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