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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츠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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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츠코코는 12세기에 텍스코코 호수 동쪽 기슭에 세워진 도시로, 아콜후아의 수도이자 아즈텍 제국의 주요 도시였다. 1418년 테소소모크에게 통치권을 빼앗겼지만, 1428년 네사우알코요틀이 멕시카와 동맹을 맺고 테소소모크를 물리친 후 아즈텍 삼자 동맹에 참여하며 제국 내 두 번째로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테츠코코는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로, 유명한 도서관과 왕궁, 정원, 수로 시설을 갖추었다. 스페인 정복 이후에는 식민지 도시가 되었으며, 1827년부터 1830년까지 멕시코 주의 주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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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츠코코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일반 명칭테츠코코
공식 명칭테츠코코
로마자 표기Tetzcohco
나와틀어 발음tetsˈkoʔko
오토미어 명칭ote
테츠코코 주민 명칭 (나와틀어)Tetzcocatl]
Tetzcocah]
테츠코코 상형 문자
상형 문자
스페인 정복 당시의 멕시코 계곡, 테노치티틀란 및 다른 도시와의 관계를 보여줌
스페인 정복 당시의 멕시코 계곡, 테노치티틀란 및 계곡의 다른 도시와의 관계를 보여줌.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수도테츠코코
역사
존속 기간1200년 ~ 1521년
멸망스페인 정복의 아즈텍 제국
언어 및 종교
공용어나와틀어
종교아즈텍 종교
기타
후계 국가누에바에스파냐
데모님테츠코카인

2. 역사

테츠코코는 12세기에 아마도 치치멕족에 의해 텍스코코 호수 동쪽 기슭에 세워졌다. 1337년경 아콜후아족은 테파넥족의 도움을 받아 테츠코코에서 치치멕족을 몰아냈고, 테츠코코는 코아틀린찬으로부터 그 역할을 물려받아 아콜후아의 수도가 되었다.

1418년, 테츠코코의 ''틀라토아니''(통치자)인 익스틀릴소치틀 1세는 아즈카포찰코의 테소소모크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 10년 후인 1428년, 익스틀릴소치틀의 아들인 네사우알코요틀은 멕시카와 동맹을 맺어[2] 테소소모크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마스트라를 물리쳤다. 테츠코코와 테노치티틀란의 아즈텍족은 틀라코판의 테파넥족과 함께 삼자 동맹으로 공식화했다. 하지만 이는 고르지 못한 동맹이었는데, 틀라코판이 아즈카포찰코와의 전투에 늦게 참전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테츠코코는 아즈텍 제국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도시가 되었으며, 합의에 따라 징수된 조공의 5분의 2를 받았고 틀라코판은 5분의 1을 받았다.

테츠코코는 제국 내에서 배움의 중심지로 알려졌으며, 오래된 메소아메리카 문명의 책을 포함한 유명한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

녹석으로 조각된 뱀 조각상, 국립 인류학 박물관 소장.

2. 1. 초기 역사

테츠코코는 12세기에 텍스코코 호수 동쪽 기슭에 세워졌으며, 아마도 치치멕족이 건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 1337년경 아콜후아족은 테파넥족의 도움을 받아 테츠코코에서 치치멕족을 몰아냈고, 테츠코코는 코아틀린찬을 이어 아콜후아의 수도가 되었다.[2]

1418년, 테츠코코의 ''틀라토아니''(통치자)인 익스틀릴소치틀 1세는 아즈카포찰코의 테소소모크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2] 10년 후인 1428년, 익스틀릴소치틀의 아들 네사우알코요틀은 멕시카와 동맹을 맺고[2] 테소소모크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마스트라를 물리쳤다.[2] 이후 테츠코코와 테노치티틀란의 아즈텍족은 틀라코판의 테파넥족과 삼자 동맹을 맺었다.[2] 그러나 틀라코판은 아즈카포찰코와의 전투에 늦게 참전하여 동맹은 불균형하게 이루어졌다.[2] 이로써 테츠코코는 아즈텍 제국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도시가 되었으며, 징수된 조공의 5분의 2를 받았고 틀라코판은 5분의 1을 받았다.[2]

테츠코코는 제국 내에서 배움의 중심지로 알려졌으며, 오래된 메소아메리카 문명의 책을 포함한 유명한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2]

2. 2. 아즈텍 삼각 동맹

12세기에 치치멕족이 텍스코코 호수 동쪽 기슭에 테츠코코를 세웠다.[2] 1337년경 아콜후아족은 테파넥족의 도움을 받아 테츠코코에서 치치멕족을 몰아내고 코아틀린찬으로부터 그 역할을 물려받아 아콜후아의 수도로 삼았다.

1418년, 테츠코코의 ''틀라토아니''(통치자) 익스틀릴소치틀 1세는 아즈카포찰코의 테소소모크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 10년 후인 1428년, 익스틀릴소치틀의 아들 네사우알코요틀은 멕시카와 동맹을 맺어[2] 테소소모크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마스트라를 물리쳤다. 이후 테츠코코와 테노치티틀란의 아즈텍족은 틀라코판의 테파넥족과 함께 삼자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틀라코판이 아즈카포찰코와의 전투에 늦게 참전하여 동맹은 고르지 못했다. 테츠코코는 아즈텍 제국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도시가 되었으며, 징수된 조공의 5분의 2를 받았고 틀라코판은 5분의 1을 받았다.

테츠코코는 제국 내에서 배움의 중심지로 알려졌으며, 오래된 메소아메리카 문명의 책을 포함한 유명한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

2. 3. 문화적 번영

테츠코코는 12세기에 치치멕족에 의해 텍스코코 호수 동쪽 기슭에 세워졌다. 1337년경 아콜후아족은 테파넥족의 도움을 받아 테츠코코에서 치치멕족을 몰아냈고, 테츠코코는 코아틀린찬으로부터 그 역할을 물려받아 아콜후아의 수도가 되었다.[2]

1418년, 테츠코코의 ''틀라토아니''(통치자)인 익스틀릴소치틀 1세는 아즈카포찰코의 테소소모크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 10년 후인 1428년, 익스틀릴소치틀의 아들인 네사우알코요틀은 멕시카와 동맹을 맺어 테소소모크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마스트라를 물리쳤다. 테츠코코와 테노치티틀란의 아즈텍족은 틀라코판의 테파넥족과 함께 삼자 동맹으로 공식화했다. 하지만 이는 고르지 못한 동맹이었는데, 틀라코판이 아즈카포찰코와의 전투에 늦게 참전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테츠코코는 아즈텍 제국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도시가 되었으며, 합의에 따라 징수된 조공의 5분의 2를 받았고 틀라코판은 5분의 1을 받았다.[2]

테츠코코는 제국 내에서 배움의 중심지로 알려졌으며, 오래된 메소아메리카 문명의 책을 포함한 유명한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

2. 4. 스페인 정복과 식민 시대

테츠코코는 12세기에 아마도 치치멕족에 의해 텍스코코 호수 동쪽 기슭에 세워졌다.[2] 1337년경 아콜후아족은 테파넥족의 도움을 받아 테츠코코에서 치치멕족을 몰아냈고, 테츠코코는 코아틀린찬으로부터 그 역할을 물려받아 아콜후아의 수도가 되었다.[2]

1418년, 테츠코코의 ''틀라토아니''(통치자)인 익스틀릴소치틀 1세는 아즈카포찰코의 테소소모크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2] 10년 후인 1428년, 익스틀릴소치틀의 아들인 네사우알코요틀은 멕시카와 동맹을 맺어 테소소모크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마스트라를 물리쳤다.[2] 테츠코코와 테노치티틀란의 아즈텍족은 틀라코판의 테파넥족과 함께 삼자 동맹으로 공식화했다.[2] 하지만 이는 고르지 못한 동맹이었는데, 틀라코판이 아즈카포찰코와의 전투에 늦게 참전했기 때문이다.[2] 이로써 테츠코코는 아즈텍 제국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도시가 되었으며, 합의에 따라 징수된 조공의 5분의 2를 받았고 틀라코판은 5분의 1을 받았다.[2]

테츠코코는 제국 내에서 배움의 중심지로 알려졌으며, 오래된 메소아메리카 문명의 책을 포함한 유명한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2]

3. 통치자

숄로틀은 서기 1115년에 테츠코코를 건국하고 1232년까지 통치했다고 전해진다.[4] 그의 뒤를 이어 노팔친(1232–1263), 톨친(1263–1298), 키나친(1298–1357), 테초틀라라신(1357–1409), 이스릴소치틀(1409–1418), 네자우알코요틀(1420–1472), 네자우알필리(1472–1516), 카카마(1517–1519), 코안초치친(1520–1521), 돈 페르난도 익스틀릴소치틀(1521–1531)이 통치했다.[4]

Ixtlilxochitl 필사본에 묘사된 네자우알코요틀. 네자우알코요틀 사후 약 1세기 후에 그려졌다.


네자우알코요틀(1403–1473)은 저명한 시인이자 철학자였으며 예술 후원자였다.[4] 그는 또한 제국 전역과 제국이 무역을 했던 더 먼 지역의 식물과 동물의 표본을 소장한 대규모 식물원과 동물원을 가지고 있었다.[4] 네자우알필리(1464–1515)는 네자우알코요틀의 아들로, 예술 후원 전통을 이어갔다.[4]

1520년, 에르난 코르테스의 군대가 도시를 점령하고 네자우알필리의 아들이자 마지막 독립적인 ''틀라토아니''인 카카마친을 살해한 후, 꼭두각시 통치자인 익스틀릴소치틀 2세를 세웠다.[4] 코르테스는 테츠코코를 자신의 기지로 삼고 테노치티틀란 포위전에서 테츠코칸 전사들을 고용했다.[4]

테노치티틀란이 함락된 후, 스페인 당국은 테츠코코를 ''시우다드''(Ciudad) "도시"로 지정하고 "테'''x'''코코"로 이름을 변경했다.[4] 테츠코카 왕가는 전통적인 아즈텍 정통성에 따라 왕위 계승을 처리하면서 계속 통치했다.[4] 이 과정에서 형제들이 통치할 권리를 물려받았고, 다음 형제들이 아들을 낳았으며, 상속에 대한 주장은 테노치티틀란의 혈연 관계와 관련되어 있었다.[4]

알바 익스틀릴소치틀는 스페인-아즈텍 전쟁 이후 테츠코카의 직접적인 상속자였으며, 1550년경 사망할 때까지 총독으로서 식민지 테스코코를 통치했다.[4] 익스틀릴소치틀이 사망한 후, 세 명의 형제인 돈 호르헤 요욘친(1533년까지), 돈 페드로 테틀라후에후에치친(1539년까지), 돈 안토니오 피멘텔 틀라후이톨친(1545년까지)이 그 뒤를 이었다.[4] 후자의 조카(이자 코아나코치의 아들)인 돈 에르난도 피멘텔 네자우알코요친은 그 후 20년 동안 ''틀라토아니'' [왕] ''및 고베르나도르'' [총독]로 통치했다.[4]

이러한 정치 상황과 동시에 스페인-아즈텍 전쟁 이후 몇 달 동안 테스코코를 황폐하게 만든 천연두가 대규모로 발병했다.[4] 이 발병으로 인해 테스코코의 마지막 ''틀라토아니''들의 재임 기간이 짧아지고 도시의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다.[4]

4. 도시 유적

4. 1. 왕궁과 정원

테츠코칭고 언덕 위에 세워진 왕궁에는 수도교, 목욕탕, 정원, 계단 및 300개 이상의 방이 있었다.

궁궐 정원에는 아즈텍 제국과 메소아메리카의 먼 지역에서 가져온 다양한 식물들이 있었다. 정원의 잔해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며, 최근 디스커버리 채널 과학자팀이 연구한 결과, 부지 배치가 주요 방향과 일치하는 것뿐만 아니라 금성을 중심으로 천문학적 사건과 일치하도록 계획되었음이 밝혀졌다.

정원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테츠코코 동쪽 산 너머의 샘에서 물을 얻었다. 물은 바위에 새겨진 운하를 통해 흘렀으며, 특정 지역에서는 암석 계단이 폭포로 사용되었다. 산을 지나면 운하는 테츠코칭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까지 이어졌고, 그곳에서 깊은 협곡에 의해 도시로 가는 길이 막혀 있었다. 네사우알코요틀은 이 틈을 바위와 돌로 채우도록 명령하여 신세계의 주요 수도교 중 하나를 만들었다.

4. 2. 수로 시설

테츠코칭고 언덕 위 왕궁에는 수도교와 목욕탕, 정원, 계단 및 300개 이상의 방이 있었다. 궁궐 정원은 광대한 식물 컬렉션으로, 아즈텍 제국뿐만 아니라 메소아메리카의 가장 먼 지역에서 가져온 식물을 포함했다. 정원의 잔해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며, 최근 디스커버리 채널 과학자팀이 모델링과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부지의 배치가 주요 방향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금성에 중점을 두고 천문학적 사건과 일치하도록 계획되었음을 입증했다.

정원에 물을 대는 데 사용된 물은 테츠코코 동쪽 산 너머의 샘에서 얻어 바위에 새겨진 운하를 통해 흘렀다. 특정 지역에서는 암석 계단이 폭포로 사용되었다. 산을 지나면 운하는 테츠코칭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까지 아래로 이어졌는데, 그곳에서 도시로 가는 길은 깊은 협곡에 의해 막혀 있었다. 네사우알코요틀은 수많은 바위와 돌로 그 틈을 채우도록 명령했고, 이로써 신세계의 주요 수도교 중 하나가 만들어졌다.

4. 3. 테츠코칭고

테츠코칭고 언덕 위에는 수도교와 목욕탕, 정원, 계단 및 300개 이상의 방이 있는 왕궁이 세워져 있었다.

궁궐 정원은 광대한 식물 컬렉션을 보유했으며, 아즈텍 제국뿐만 아니라 메소아메리카의 가장 먼 지역에서 가져온 식물도 포함했다. 정원의 잔해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며, 최근 디스커버리 채널 과학자팀이 연구했다. 과학자들은 모델링과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부지의 배치가 단순히 주요 방향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금성에 중점을 두고 천문학적 사건과 일치하도록 신중하게 계획되었음을 입증했다.

정원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테츠코코 동쪽 산 너머의 샘물을 이용했다. 물은 바위에 새겨진 운하를 통해 흘렀으며, 특정 지역에서는 암석 계단이 폭포로 사용되었다. 산을 지나면 운하는 테츠코칭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까지 이어졌다. 그곳에서 도시로 가는 길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어 있는 깊은 협곡에 의해 막혀 있었다. 네사우알코요틀은 수많은 바위와 돌로 그 틈을 채우도록 명령했고, 이로써 신세계의 주요 수도교 중 하나가 만들어졌다.

테츠코칭고 언덕 전체는 이 운하 시스템의 혜택을 받았으며, 설계자들은 비와 관련된 신 틀랄록을 위한 신성한 장소로 바꾸었다. 폭포와 이국적인 동물, 새들이 갖춰졌다.

산 정상에는 신을 위한 신전이 세워졌고, 520개의 대리석 계단으로 이루어진 공중 정원이 조성되었다. 520이라는 숫자는 아즈텍 신화에서 신들이 52년마다 인간을 파멸시킬 기회를 갖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5. 현대의 테스코코

1827년부터 1830년까지 테스코코는 멕시코주의 주도였다.

참조

[1] 서적 Smith (2005), p. 411.
[2] 서적 The Broken Spears: The Aztec Accounts of the Conquest of Mexico Beacon Press 1992
[3] 서적 Ancient Mexico and Central America, p. 450
[4] 서적 When Montezuma Met Cortes: The True Story of the Meeting that Changed History Ecco
[5] 서적 Smith (2005), p.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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