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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라 (메소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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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툴라(Tula)는 멕시코 고원에 위치한 고고학 유적지로, 테오티우아칸이나 테노치티틀란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나와틀어로 '부들 근처'를 의미하며, 톨텍족이 거주했던 도시로, 멕시코시티 북쪽 75km 지점, 이달고 주에 위치한다. 주요 유적지로는 툴라 그란데의 의례 중심지, 툴라 치코, 호르헤 R. 아코스타 유적 박물관 등이 있으며, 아틀라스 상이 있는 피라미드, 메소아메리카 볼 코트 등의 구조물이 있다. 툴라는 900년에서 1150년 사이에 전성기를 맞았지만, 1000년경부터 토양 침출과 기후 변화, 치치메카의 남하로 쇠퇴하여 12세기에 멸망했다. 툴라의 영향은 메소아메리카 전역에서 나타나며, 특히 치첸이트사와의 관계가 주목받고 있다. 1981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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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라 (메소아메리카)
개요
이름툴라
다른 이름툴란-시코코티틀란 (Tollan-Xicocotitlan)
위치멕시코 이달고주 툴라 데 아옌데
역사
시대후기 선고전기 ~ 후기 고전기
문화톨텍
고고학 정보
발굴진행중
고고학자미상
건축
건축 양식미상
건축 세부 정보아틀라스 기둥
기타 정보
중요 사건건설
버려짐

2. 고고학 유적

툴라 치코의 모습


툴라 유적지는 메소아메리카, 특히 멕시코 고원 역사의 중요한 현장이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선행 문명인 테오티우아칸이나 후계 문명 중 하나인 테노치티틀란의 명성에 가려지는 경향이 있다.[1] '툴라'라는 이름은 '부들 근처'를 의미하는 나와틀어 구절 '톨란 시코코티틀란'(Tōllān Xīcocotitlānnah)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아즈텍인들은 '톨란'(Tōllānnah)이라는 용어를 단순히 특정 지명을 넘어 '도시 중심지'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했으며, 테오티우아칸, 촐룰라, 테노치티틀란과 같은 다른 주요 도시들을 지칭할 때도 이 용어를 사용했다. 툴라의 주민들은 '톨텍'(Toltecatl|톨테카틀nah)이라고 불렸는데, 이 용어는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히 툴라 사람들을 넘어 '도시인', '장인', 또는 '숙련된 노동자'를 의미하는 말로 확장되었다. 이는 아즈텍 제국의 스페인 정복 이전 멕시코 계곡의 원주민들이 툴라로 대표되는 고대 문명에 대해 가졌던 존경심을 반영한다.[2][3]

고대 도시의 유적은 현재 멕시코 이달고주 남서부에 위치하며, 멕시코시티에서 북쪽으로 약 75km 떨어져 있다.[1][2] 지리적으로는 툴라 강 계곡에 자리 잡고 있으며, 원주민 기록에서 '테오틀라판'(Teotlalpan|테오틀랄판nah, 신의 땅)이라고 불렸던 메스키테 계곡의 남쪽 끝에 해당한다. 이 지역은 해발 2000m에서 2200m 사이의 고도에 위치하며 반건조 기후를 특징으로 한다. 가장 큰 강인 툴라 강을 포함하여 3개의 영구적인 강과 하천이 흐르며, 우기에는 여러 개의 아로요(마른 협곡)에도 물이 흐른다.[2]

현대의 고고학 유적지는 크게 툴라 그란데(Tula Grande)의 의례 중심지, 툴라 치코(Tula Chico)라고 불리는 초기 정착 지역, 호르헤 R. 아코스타 유적 박물관, 그리고 과달루페 마스타체 오리엔테이션 센터로 구성된다.[4] (주요 구조물과 박물관 및 센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 참조)

2. 1. 주요 구조물

툴라 그란데의 피라미드 B와 C의 모습


건물 C, 불탄 궁전의 모습


툴라의 의례 중심지는 진북에서 동쪽으로 17도 방향으로 정렬되어 있는데, 이는 테오티우아칸의 구조와 유사하다. 다만, 서기 700년에서 900년 사이에 세워진 최초의 마을은 진북을 향해 정렬되었다.[5] 이 중심지는 세 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석회암 노두 위에 자리 잡고 있어 방어에 유리한 입지를 갖추고 있다.[5] 유적지 전반에 걸쳐 전쟁과 희생 의식이 중요한 주제로 나타나는데, 재규어코요테와 같은 전사들의 모습, 사람의 심장을 먹는 독수리를 묘사한 이미지 등이 이를 보여준다. 또한 뼈대 형상을 먹는 뱀이나 여러 형태의 해골 이미지도 발견된다.[3][5]

의례 중심지의 주요 구조물로는 아틀라스 상을 포함한 두 개의 피라미드, 두 개의 주요 메소아메리카 볼 코트, 그리고 여러 개의 대형 건물이 있다. 이 대형 건물들은 넓은 광장을 마주하며 일련의 기둥이 늘어선 형태를 하고 있다.[2]

툴라의 주요 의례 구역은 몇 가지 중요한 건축 혁신을 보여주며, 이는 당시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다. 중앙의 대형 광장은 약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다. 광장의 세 면에는 기둥으로 지지되는 긴 회의실이 있는데, 이 회의실들의 총 길이는 1000m가 넘으며, 내부에는 전사들의 행렬 등을 묘사한 석조 부조가 새겨진 벤치가 있다. 이러한 건축 구조는 소수의 인원만이 참여하던 폐쇄적인 의례에서 벗어나,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사들이 주도하는 대규모 의식으로 변화했음을 시사한다.[3]

유적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축물은 피라미드 B로, 케찰코아틀 피라미드 또는 새벽별 피라미드라고도 불린다. 이 피라미드는 5단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치첸이트사의 전사의 신전과 유사한 형태를 띤다. 피라미드 B의 정상에는 네 개의 거대한 기둥이 서 있는데, 각각 톨텍 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기둥들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4m에 달한다. 각 전사상은 아틀라틀(창 던지개), 향, 나비 모양의 흉갑, 그리고 태양 원반 모양의 뒷판을 착용하고 있으며, 과거에는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던 신전의 지붕을 받치는 역할을 했다.[5]

피라미드 B 앞에는 넓은 현관이 있으며, 이 현관은 인접한 건물 C와 연결되어 있었다. 현재 이 현관과 건물 C는 부러진 기둥들만 남아있는 공간이다.[4][5] 건물 C는 화재의 흔적이 남아 있어 불탄 궁전(Palacio Quemado|팔라시오 케마도es)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4]

또한 피라미드 B는 코아테판틀리(Coatepantli|코아테판틀리nah) 또는 뱀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 구조물은 후에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에 세워진 유사한 벽 구조물에 영감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4]

2. 2. 기타 시설

현대 고고학 유적지는 툴라 그란데의 의례 중심지, 툴라 치코라고 불리는 지역 외에도 방문객을 위한 시설을 포함한다. 유적지 입구에는 호르헤 R. 아코스타 유적 박물관이 위치해 있다. 이 박물관은 유적지 연구에 오랫동안 기여한 고고학자 중 한 명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내부에는 툴라에서 발굴된 다양한 조각 석조 작품과 인골 등이 보존되어 있다. 또한, 과달루페 마스타체 오리엔테이션 센터는 여러 고고학 유물과 포스터를 통해 유적지의 중요성과 메소아메리카 문명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4]

3. 역사

툴라 지역의 역사는 기원전 400년경 초기 정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 정착민들은 다양한 민족적 배경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며,[3] 에피클래식 시대에는 강력한 도시 국가였던 테오티우아칸의 정치적 영향 아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1] 이 초기 단계에서 툴라는 '툴라 치코'(Tula Chico, 작은 툴라)를 중심으로 한 소규모 도시 정착지였으며, 기원후 650년부터 900년 사이에 발전했다.[1][6]

테오티우아칸이 쇠퇴한 후 메소아메리카 지역에 권력 공백이 생기자, 툴라는 점차 중요성을 더해갔다.[3] 기원후 900년경부터 '툴라 그란데'(Tula Grande, 큰 툴라)가 발전하기 시작하여 1150년까지 톨텍 문명의 중심지로서 전성기를 누렸다.[5][1] 이 시기 툴라는 메소아메리카 중부의 중요한 정치·경제적 중심지로 성장했으며,[2] 특히 흑요석 채굴 및 가공, 교역을 통해 번영했다.[3] 툴라의 영향력은 현재의 이달고 주를 넘어 멕시코 계곡, 톨루카 계곡, 바히오 지역까지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2]

그러나 툴라의 번영은 오래가지 못했다.[1] 1000년경부터 시작된 토양 침출과 기후 건조화, 그리고 이로 인한 북방 치치메카 민족과의 갈등은 도시의 쇠퇴를 가져왔다.[3] 결국 12세기 중반경 많은 주거지가 버려졌고, 도시의 핵심이었던 의례 중심지는 화재로 파괴되었다.[3][5] 멸망 이후에도 툴라 지역에는 사람들이 계속 거주했으며,[1][5] 후대의 아즈텍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은 스페인 정복 당시에도 툴라에 여러 장인들이 남아 있었다고 기록했다.[2]

현대에 이르러 1950년대 이후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툴라 유적이 전설 속 톨텍 문명의 수도였음이 밝혀졌지만,[2] 테오티우아칸과의 관계 등 아직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6]

3. 1. 초기 정착 (기원전 400년 ~ 기원후 650년)

툴라 지역에 명확하게 정의된 초기 정착은 기원전 4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은 남쪽의 노노알카와 북쪽의 치치메카 등 다양한 민족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정착했을 가능성이 있다.[3] 이 지역은 에피클래식 시대 동안 테오티우아칸의 정치적 통제 아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툴라 지역 도자기에서 발견된 테오티우아칸 디자인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이 지역의 풍부한 석회 퇴적물은 테오티우아칸 건설에 필요한 석고의 중요한 공급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1]

이 시기의 툴라는 '툴라 치코'(작은 툴라)라고 불리는 지역을 중심으로 한 작은 도시 정착지였으며, 소규모 공공 건축물들이 있었다. 툴라 치코의 점유 기간은 기원후 650년부터 900년까지이다. 650년부터 750년 사이에 툴라 치코는 발전하여 전성기에는 5km2에서 6km2에 달하는 면적을 가졌으며, 그 일부는 현재 툴라 그란데 유적 아래에 묻혀 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 당시 인구는 19,000명에서 27,000명 사이로 추정된다.[2] 툴라 치코의 건축물은 동시대 다른 에피클래식 유적지에 비해 규모가 작았으며, 이는 당시 툴라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부차적인 역할을 했음을 시사한다.[6] 툴라 치코는 기원후 850년에서 900년 사이에 버려졌고, 이후 툴라 그란데가 개발되기 시작했다.[1]

3. 2. 툴라 치코 시대 (기원후 650년 ~ 900년)

툴라 지역에 명확한 정착지가 형성된 것은 기원전 4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에는 남쪽의 노노알카와 북쪽의 치치메카 등 다양한 민족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3] 에피클래식 시대 동안 툴라는 테오티우아칸의 정치적 영향 아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툴라 도자기에서 발견되는 테오티우아칸 디자인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지역의 풍부한 석회 퇴적물은 건축용 석고의 중요한 공급원이었을 것이다.[1]

이 시기 툴라는 툴라 치코(Tula Chico, 작은 툴라)를 중심으로 한 소규모 도시 정착지였으며, 공공 건축물의 규모도 작았다. 툴라 치코의 건축물은 동시대 다른 에피클래식 유적지에 비해 규모가 작아, 당시 정치 및 경제 활동에서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6] 툴라 치코가 번성했던 시기는 기원후 650년부터 900년까지이다. 특히 650년부터 750년 사이에 툴라 치코는 크게 발전하여 전성기에는 면적이 5km2에서 6km2에 달했으며, 그 일부는 후대의 툴라 그란데 유적 아래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있다.[1] 이 시기 인구는 약 19,000명에서 27,000명 사이로 추산된다.[2] 툴라 치코는 기원후 850년에서 900년 사이에 버려졌고, 이후 툴라 그란데(Tula Grande, 큰 툴라)가 개발되기 시작했다.[1]

테오티우아칸의 쇠퇴 이후 메소아메리카 지역에는 권력 공백이 발생했고, 여러 도시 국가들이 작은 지역들을 통치하게 되었다.[3] 이 변화의 시기에 툴라의 도자기는 양식과 기술 면에서 새로운 영향을 받아 변화를 겪었다. 동시에 정착 패턴도 크게 바뀌어, 사람들은 주로 언덕이나 높은 지대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건축 양식과 도자기에서는 서쪽과 북쪽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일부 동쪽의 영향도 확인되어 당시 툴라에 다양한 민족이 함께 거주했음을 시사한다.[1]

3. 3. 툴라 그란데 시대 (기원후 900년 ~ 1150년)

과달루페 마스타체 오리엔테이션 센터의 톨텍 통치자 부조


툴라 데 아옌데 유적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아틀라틀과 다트를 든 톨텍 전사의 부조


기존의 툴라 치코(Tula Chico)가 기원후 850년에서 900년 사이에 버려진 후, 툴라 그란데(Tula Grande)가 발전하기 시작했다.[1] 테오티우아칸의 쇠퇴 이후 메소아메리카 지역에는 권력 공백이 발생했고, 여러 도시 국가들이 작은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3] 이러한 배경 속에서 툴라는 테오티우아칸의 몰락 이후 점차 중요성이 커져 기원후 900년에서 1150년 사이에 전성기를 맞이했다.[5]

툴라 그란데는 당시 메소아메리카의 어떤 도시보다도 규모가 컸지만, 이전 시대의 테오티우아칸만큼 거대하지는 않았다.[2] 전성기 도시의 면적은 약 14km2에 달했으며, 인구는 약 60,000명으로 추산된다. 또한 도시 주변 1000km2 지역에는 20,000명에서 25,000명의 인구가 추가로 거주하며 툴라 그란데의 의례 중심지의 영향 아래 있었다.[1][2] 도시와 농촌 가구의 형태는 확대 가족 집단의 중요성을 보여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규모는 점차 작아진 것으로 보인다.[1] 툴라는 북방의 치치메카에 대비하여 라스 라나스(Las Ranas)와 톨루킬라(Toluquilla)에 방어 요새를 구축했다.[3] 툴라의 정치적 영향력은 현재의 이달고 주 대부분과 멕시코 계곡, 그리고 톨루카 계곡과 바히오 지역까지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주로 도자기 양식 비교를 통해 추론되지만, 이것이 직접적인 정치적 지배인지 경제적 영향력인지는 명확하지 않다.[2]

툴라는 흑요석 광산 근처의 비옥한 지역에 위치했으며 중요한 무역로 상에 있었다. 경제 기반은 농업과 흑요석 채굴 및 가공이었으며, 이는 테오티우아칸의 기술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석회암 채굴, 도자기 제작과 함께 도시 인구의 약 절반이 이러한 생산 활동에 종사했다.[3] 툴라는 거대한 제국을 직접 통치하기보다는 지역 국가들을 다스렸을 가능성이 있다.[6] 유적지에서는 동부 메소아메리카의 도자기, 남부 과테말라에서 온 회녹색 플럼베이트 도자기, 코스타리카의 다색 도자기 등이 발견되어 장거리 교역이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툴라는 이러한 교역품의 대가로 주로 흑요석을 수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3]

툴라 사회는 지배 엘리트, 장인, 상인, 그리고 다수의 농업 노동자 계급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농업 노동자 대부분은 도시 외곽에 거주했고, 다른 계층은 주로 도시에 집중되었다. 발굴을 통해 옥수수, 콩, 칠리 고추, 아마란스, 호박, 용설란 등의 재배 증거가 확인되었다. 또한 메스키트 콩과 선인장 열매 같은 야생 식물도 채집되었으며, 가축화된 칠면조와 개의 흔적도 발견되었다.[2] 관개를 이용한 옥수수 농업이 가장 중요했으며, 경작 면적은 3000ha에서 10000ha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정도 규모로도 도시의 많은 인구를 완전히 부양하기에는 부족했을 수 있다. 도시 주변에는 폭 1km에서 3km에 달하는 비어 있는 지역이 있는데, 이곳이 농경지였을 가능성이 있다.[1] 일부 연구자들은 고전기 당시 이 지역의 강우량이 현재보다 많았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이 경우 관개 없이도 더 대규모 농업 생산이 가능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2]

툴라 사람들은 상형 문자 형태의 문자 체계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건축물에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글리프 외에는 명확한 증거가 부족하다.[2]

툴라의 번영은 다른 메소아메리카 주요 세력들에 비해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1] 기원후 1000년경부터 토양 침출과 기후 건조화로 인한 문제가 심각해졌다. 이는 북쪽 고향 땅이 건조해지면서 남하한 치치메카와의 민족 갈등을 유발했고, 결국 도시의 붕괴로 이어졌다. 많은 주거 지역은 1150년경에 버려진 것으로 보이며, 의례 중심지는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화재로 파괴되었다.[3] 12세기에 의례 중심지가 불에 탄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었다.[5] 민족지학적 자료에는 여러 통치자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왕조 연대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연대기에 따르면 툴라는 세 아카틀 토필친(Ce Acatl Topiltzin) 통치 시기인 1179년경 멸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 이야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2]

툴라 멸망 후 유적지는 약탈당했지만, 메소아메리카 시대 후기와 스페인 식민 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점유되었다.[1][5]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에 따르면, 스페인 정복 당시에도 툴라에는 서기, 석공, 깃털 공예가, 도예가 등 장인들이 남아 있었다.[2]

3. 4. 톨텍 문명



툴라 지역에 명확한 형태의 초기 정착지가 나타난 것은 기원전 40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남쪽의 노노알카와 북쪽의 치치메카 등 다양한 민족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정착했을 가능성이 있다.[3] 에피클래식 시대 동안 툴라는 테오티우아칸의 정치적 영향 아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툴라 도자기에서 발견되는 테오티우아칸 디자인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이 지역의 풍부한 석회 퇴적물은 건축용 석고의 중요한 공급원이었을 것이다.[1] 이 시기 툴라는 '툴라 치코'(작은 툴라)를 중심으로 한 작은 도시 정착지였으며, 공공 건축물의 규모는 다른 동시대 유적지에 비해 작아 당시 정치·경제적으로 부차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6] 툴라 치코는 기원후 650년부터 900년까지 존속했으며, 650년에서 750년 사이에 발전하여 전성기에는 면적이 5km2에서 6km2에 달했고, 인구는 19,000명에서 27,000명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툴라 치코 유적의 일부는 현재의 툴라 그란데 유적 아래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있다.[1][2] 툴라 치코는 기원후 850년에서 900년 사이에 버려졌고, 이후 툴라 그란데가 발전하기 시작했다.[1]

테오티우아칸이 쇠퇴하면서 메소아메리카 지역에는 권력 공백이 발생했고, 여러 도시 국가들이 작은 지역들을 지배하게 되었다.[3] 이 시기 툴라의 도자기는 양식과 기술 면에서 새로운 영향을 받아 변화했으며, 정착 패턴 역시 언덕이나 높은 지대로 이동하는 등 큰 변화를 겪었다. 건축물과 도자기에서는 서쪽과 북쪽, 일부는 동쪽의 영향이 나타나는데, 이는 툴라에 여러 민족이 함께 거주했음을 시사한다.[1]

툴라는 테오티우아칸의 몰락 이후 두각을 나타내며 900년에서 1150년 사이에 전성기를 맞이했다.[5] '툴라 그란데'(큰 툴라)는 당시 메소아메리카의 어떤 도시보다 컸지만, 테오티우아칸의 규모에는 미치지 못했다.[2] 전성기 도시 면적은 약 14km2였고, 인구는 약 60,000명에 달했으며, 주변 1000km2 지역에는 20,000명에서 25,000명이 추가로 거주하며 툴라 그란데의 의례 중심지의 지배를 받았다.[1][2] 도시와 농촌 가구 형태는 확대 가족 집단의 중요성을 보여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규모는 작아진 것으로 보인다.[1] 툴라는 치치메카의 침입에 대비하여 라스 라나스와 톨루킬라에 방어 요새를 구축했다.[3] 툴라의 정치적 영향력은 현재의 이달고 주 대부분과 멕시코 계곡, 그리고 아마도 톨루카 계곡과 바히오 지역까지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주로 도자기 양식 비교에 근거한 것이어서 정치적 지배인지 경제적 영향력인지는 명확하지 않다.[2]

당시 툴라는 흑요석 광산 근처의 비옥한 지역이었고 중요한 무역로에 있었다. 그 경제 기반은 농업과 흑요석의 채굴 및 제작이었다. 이 기술은 테오티우아칸에서 이 기능을 이어받아, 석회암과 도자기 제작과 함께 거주자의 약 절반이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3] 툴라는 아마도 제국을 지배하지 않았지만 지역 국가를 다스렸을 수 있다.[6] 동부 메소아메리카의 도자기, 남부 과테말라에서 온 회녹색 플럼베이트 도자기, 코스타리카의 다색 도자기가 나타나 장거리 교류를 나타낸다. 툴라는 아마도 그 대가로 흑요석을 거래했을 것이다.[3] 툴라 사회의 사회 경제는 지배 엘리트 계급, 장인 계급, 상인 계급, 그리고 많은 수의 농업 노동자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부분의 농업 노동자는 툴라 외곽에 있었고, 다른 계급은 대부분 도시에 있었다. 이 지역의 발굴 결과, 옥수수와 콩과 함께 칠리 고추, 아마란스, 호박, 용설란 재배의 증거가 발견되었다. 메스키트 콩과 선인장 열매를 포함한 여러 야생 식물이 수확되었다. 가축화된 칠면조와 개에 대한 증거가 있다.[2] 관개 옥수수는 가장 중요한 작물이었으며, 3000ha에서 10000ha에 달했다. 이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기에 충분하지 않았을 수 있다. 1km에서 3km 폭의 비어 있는 지역이 있는데, 이는 아마도 농업 지역이었을 것이다.[1] 이 지역은 현재보다 고전 시대에 더 많은 강우량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관개 없이 더 대규모의 농업 생산을 가능하게 했을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2]

그들은 아마도 상형 문자 형태의 문장 체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구조물에 있는 때때로 나타나는 글리프를 제외하고는 증거가 없다.[2]

툴라는 다른 메소아메리카 지배국보다 오래가지 못했다.[1] 1000년경, 토양 침출과 기후 건조로 인한 문제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치치메카가 건조해지는 고향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민족 갈등이 발생했고, 결국 도시가 붕괴되었다. 많은 주거지가 1150년경에 버려진 것으로 보인다. 의례 중심지가 언제 멸망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불에 타 파괴되었다.[3] 12세기에 의례 중심지가 불에 탄 증거가 있다.[5] 민족지적 자료에는 다른 통치자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 왕 목록이 그들로부터 개발되었다. 이 연대기는 세 아카틀 토필리친의 통치하에 툴라의 멸망을 약 1179년으로 기록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2]

툴라가 멸망한 후, 그 유적지는 약탈당했지만 메소아메리카 시대의 나머지 기간과 식민지 시대까지 계속 점유되었다.[1][5]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에 따르면, 정복 당시에도 서기, 석공, 석공, 깃털 노동자, 도예가 등과 같은 장인이 툴라에서 발견되었다.[2]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민족학 연구와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그 유적지가 톨란과 톨텍의 유적지로 확인되었다.[2] 그러나 툴라는, 특히 테오티우아칸과의 관계에서 잘 이해되지 않으며, 출판된 자료가 거의 없다.[6] 도시의 상세한 고고학 지도는 존재하지 않는다.[1] 대부분의 연구는 툴라가 테오티우아칸과 같은 에피클래식 도시가 붕괴된 후 남아 초기 후고전 시대의 주요 세력이 되었음을 보여주지만, 일부 고고학자들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며 다른 도시들과 함께 전성기를 앞당긴다.[6] 이 유적지에 대한 몇 가지 오해로는 가로 체계가 없고, 비교적 가난했으며, 벽으로 둘러싸인 주거 단지가 없고, 작은 구릉 무리만 있었다는 점이 있다. 툴라는 격자 체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여러 주요 방향 전환이 있었다. 의례 중심지 바로 바깥에서 대규모 주거 단지가 발굴되었다. 엘리트들은 또한 메소아메리카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수공예품에 접근할 수 있었다. 도시의 정치적 영향력의 규모와 성격에 대한 논쟁이 있다. 기록된 기록이 없으며 고고학적 증거도 희박하다.[2]

3. 5. 쇠퇴와 멸망

툴라는 다른 메소아메리카 지배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 번성했다.[1] 서기 1000년경부터 토양 침출과 기후 건조화 현상이 나타나면서 쇠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환경 변화는 북쪽 치치메카인들이 건조해진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이동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기존 툴라 주민들과의 민족 갈등으로 이어져 도시의 붕괴를 가속화했다.[3]

1150년경에는 많은 주거 지역이 버려진 것으로 추정된다.[3] 도시의 핵심부였던 의례 중심지가 정확히 언제 파괴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는 증거가 남아있다.[3] 특히 12세기에 의례 중심지가 불에 탔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었다.[5] 민족지학적 자료에서는 툴라의 마지막 통치자로 세 아카틀 토필리친을 언급하며, 그의 통치 아래 툴라가 약 1179년에 멸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2]

툴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그 유적지는 완전히 버려지지 않았다. 약탈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메소아메리카 시대의 나머지 기간과 스페인 식민지 시대까지 사람들이 계속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1][5]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의 기록에 따르면, 스페인 정복 당시에도 툴라에는 서기, 석공, 깃털 공예가, 도예가 등 다양한 장인들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2]

3. 6. 아즈텍 시대 이후

툴라가 멸망한 후, 유적지는 약탈당했지만 메소아메리카 시대의 나머지 기간과 식민지 시대까지 계속해서 사람들이 거주했다.[1][5]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의 기록에 따르면, 스페인 정복 당시에도 툴라에는 서기, 석공, 깃털 세공사, 도예가 등 다양한 장인들이 남아 있었다.[2]

현대에 들어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이루어진 민족학 및 고고학 연구를 통해 이곳이 톨텍 문명의 중심지였던 전설적인 도시 톨란의 유적임이 확인되었다.[2] 그러나 툴라는 여전히 많은 부분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특히 테오티우아칸과의 관계는 불분명하고 출판된 연구 자료도 부족하다.[6] 도시 전체에 대한 상세한 고고학 지도 역시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1]

대부분의 연구는 툴라가 테오티우아칸과 같은 고전기 후기 도시들이 쇠퇴한 후 등장하여 후고전기 초기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고 보지만, 일부 고고학자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고 툴라의 전성기를 다른 도시들과 비슷한 시기로 앞당겨 보기도 한다.[6] 과거에는 툴라에 대해 가로 체계가 없고, 비교적 빈곤했으며, 성벽으로 둘러싸인 주거 단지 없이 작은 언덕 무리만 있었다는 오해가 있었으나, 최근 연구를 통해 격자형 도시 계획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의례 중심지 바로 외곽에서 대규모 주거 단지가 발굴되었다. 또한 지배 엘리트 계층은 당시 메소아메리카 최고 수준의 수공예품을 사용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툴라의 정치적 영향력 범위와 성격에 대해서는 기록된 문헌이 없고 고고학적 증거도 부족하여 여전히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2]

4. 툴라의 영향

툴라의 영향은 툴라와 다른 지역의 도기류에서 주로 나타나며 메소아메리카의 다른 지역에서도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6]

4. 1. 건축

툴라와 남쪽의 유카탄반도에 있는 치첸이트사 사이의 관계는 두 지역의 예술 및 건축 양식에서 나타나는 유사성 때문에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6]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정복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무역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6]

아즈텍 제국이츠코아틀이 역사서를 불태우면서 톨텍 역사의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지만, 툴라의 도시 계획은 일부 아즈텍 도시 국가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도시 중심부를 계획할 때 참고하는 등 후대 아즈텍 건축에 영향을 미쳤다.[6]

4. 2. 종교

스페인 정복 시대까지 깃털 달린 뱀 신인 케찰코아틀은 현재의 멕시코 중부에서 중앙 아메리카까지 널리 숭배되었다.[2][3] 이 신은 종종 케찰코아틀이라고 불린 툴라의 전설적인 통치자 세 아카틀 케찰코아틀(Ce Acatl Quetzalcoatl)과 연관된다.[2][3]

툴라의 멸망에 얽힌 신화적인 이야기에서, 이 통치자는 테스카틀리포카라는 어두운 신의 유혹에 굴복하여 도시를 파멸시킨 것으로 묘사된다. 몰락한 통치자는 걸프 해안으로 방황하여 스스로 불태워지고, 샛별(금성)이 되었다고 전해진다.[2][3]

툴라의 역사는 아즈텍 제국 시대까지 중요하게 여겨졌고, 스페인 정복 이후 작성된 고문서에도 기록되었으나, 이러한 이야기의 대부분은 신화적인 요소가 강하다.[2][3] 이 이야기들은 톨텍과 툴라 도시에서 시작하여 멕시카가 멕시코 계곡으로 이주하는 과정으로 이어지며,[6] 툴라를 과학과 예술을 통달한 주민들이 사는 일종의 낙원으로 묘사하거나, 반대로 멸망을 향해 가는 갈등으로 가득 찬 도시로 그리기도 한다.[3] 마지막 통치자 케찰코아틀 역시 전형적인 자질을 가진 전설적인 존재로 그려진다.[6] 아즈텍 제국을 건설한 이츠코아틀이 역사서를 불태우면서 톨텍 역사의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다.[6]

4. 3. 아즈텍 문명

툴라의 역사는 아즈텍 제국 시대까지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스페인 정복 이후 작성된 고문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신화적인 내용이 많다.[2][3] 이 이야기들은 톨텍과 툴라에서 시작하여 멕시카가 멕시코 계곡으로 이주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6] 또한 툴라를 과학과 예술이 발달한 낙원으로 묘사하거나, 멸망으로 치닫는 갈등의 도시로 그리기도 한다.[3] 이 이야기 속에서 마지막 통치자인 케찰코아틀은 전설적인 인물로 등장한다.[6]

아즈텍 제국의 황제 이츠코아틀이 제국을 건설하면서 기존의 역사서를 불태웠기 때문에 톨텍 역사의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툴라의 도시 계획은 일부 아즈텍 도시 국가의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도시 중심부를 설계할 때 참고하기도 했다.[6]

5. 툴라 국립공원

고고학 유적지는 1981년 멕시코 정부에 의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 공원은 1km2의 면적을 차지한다.[7]

참조

[1] 논문 Ancient Tollan: Tula and the Toltec heartland Antiquity 2004-03
[2] 학위논문 A regional analysis of Toltec ceramics, Tula, Hidalgo, Mexico Tulane University
[3] 서적 Ancient Americas : A Brief History & Guide to Research University of Utah Press
[4] 서적 Hidalgo: Guía para descubrir los encantos del estado Editorial Océano de Mexico
[5] 웹사이트 Featured Sites: Tula http://www.sfu.museu[...] Simon Frazier University Museum 2013-02-09
[6] 웹사이트 Tula and Chichen Itza: Are we asking the right questions? http://www.public.as[...] Arizona State University 2013-02-09
[7] 간행물 Protected Area Profile for Tula from the World Database of Protected Areas https://www.protecte[...] UNEP-WCMC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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