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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당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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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팔당대교는 서울 동부 지역과 경기도 남동부를 연결하는 다리로, 1986년 5월 착공하여 1995년 4월 완공되었다. 건설 중 1991년 3월 강풍으로 교량 일부가 붕괴되어 공사가 중단되었고, 이후 공법 변경과 교각 균열로 인해 여러 차례 공사가 중단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완공 후 서울 청량리와 구리시의 교통 체증 완화에 기여했으나, 개통 직후 주변 도로의 교통 체증을 유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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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당대교
지도 정보
교량 정보
이름팔당대교
공식 명칭팔당대교
교통 시설국도 제45호선 (창우로)
횡단하남시와 남양주시 사이의 한강
위치하남시 창우동 ~ 남양주시 와부읍
관리서울지방국토관리청
구조거더교
주경간52m
길이935m
너비24m
운행 높이12m
착공일1986년 5월 10일
완공일1995년 4월 25일
개통일1995년 4월 25일
일반 정보
팔당대교

2. 역사

1986년 5월 3일 유원건설에서 팔당대교를 착공하여[7] 올림픽대교에 이어 대한민국 두 번째 콘크리트 사장교로 건설할 계획이었다.[8] 그러나 1991년 3월 26일 강풍으로 교량이 붕괴되고, 건설 공법 문제와 교각 균열까지 발견되면서 공사가 중단되었다. 결국 설계를 일반 거더교로 변경하고, 문제가 된 부분을 철거한 뒤 교각을 다시 세워 1995년 4월 25일 완공되었다.[11]

2. 1. 착공 및 초기 계획

1986년 5월 3일에 유원건설에서[7] 착공하였으며, 당시 올림픽대교에 이어 대한민국 두 번째 콘크리트 사장교로 건설하여[8] 1991년 10월에 완공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91년 3월 26일 강풍으로 교량이 붕괴되어 공사가 전면 중단되었다.[9] 조사 결과 건설 공법에 문제가 있어 1991년 10월 12일부터 공법을 바꿔 재공사에 들어갔지만, 1992년 5월 5일 중앙탑을 지탱하는 교각에서 심각한 균열이 발견되어 다시 공사가 중단되었다.[9] 결국 1992년 9월 9일 팔당대교의 설계를 일반 거더교로 변경해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9] 이후 문제가 된 사장교 부분과 주탑을 철거하고 교각 6개를 새로 세워[9] 1995년 4월 25일 오전 10시에 착공 8년 11개월 만에 완공되었다.[11]

2. 2. 1991년 붕괴 사고

1991년 3월 26일 오전에 강풍이 불면서 교량의 196m가 붕괴[12]되어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사 결과 시공 회사인 유원건설이 풍압을 고려하지 않은 공법으로 공기에 쫓겨 무리하게 시공하고 공사에 안전조치를 전혀 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건설현장소장을 구속했다.[14] 또한 조달청 조사 결과 직접공사비에도 못미치는 절반 수준의 가격으로 공사를 수주하는 덤핑 수주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15] 6개월 후인 10월에는 당시 건설공법이었던 사인장교(斜引張橋)로 가설하는 바리공법(FSM 공법)이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10]

이 때문에 공법을 자유돌출공법(FCM)으로 바꿔 10월 12일부터 다시 공사에 들어갔으나,[10] 1992년 5월 5일 중앙탑을 지탱하는 교각에서 심각한 균열이 발견되어 공사가 다시 중단되었다.[10] 조사 결과 규정량 이상의 콘크리트를 타설해 시멘트와 골재의 화학반응에 의한 열이 배출되지 못하고 기포가 발생하는 수화 반응이 생긴 것으로 드러났다.[16] 결국 1992년 9월 9일 팔당대교의 설계를 일반 거더교로 변경해 공사에 다시 들어갔다.[10]

한편 시공사인 유원건설은 이 사고로 30억 정도 손실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으며,[17] 건설부가 부실시공의 책임을 물어 2250만의 과징금을 부과했다.[18]

2. 3. 공법 변경 및 재시공

1986년 5월 3일 유원건설에서 착공하였으며,[7] 당시 올림픽대교에 이어 대한민국 두 번째 콘크리트 사장교로 건설하여[8] 1991년 10월 완공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91년 3월 26일 강풍으로 교량이 붕괴되어 공사가 전면 중단되었다.[9] 조사 결과 건설 공법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 1991년 10월 12일부터 공법을 변경하여 재공사에 들어갔지만,[10] 1992년 5월 5일 중앙탑을 지탱하는 교각에서 심각한 균열이 발견되어 공사가 다시 중단되었다. 결국 1992년 9월 9일 팔당대교 설계를 일반 거더교로 변경하여 공사에 다시 들어갔다. 문제가 된 사장교 부분과 주탑을 철거한 뒤 교각 6개를 다시 세워 1995년 4월 25일 오전 10시에 착공 8년 11개월 만에 완공되었다.[11]

2. 4. 완공

1986년 5월 3일 유원건설에서[7] 착공하였으며, 당시 올림픽대교에 이어 대한민국 두 번째 콘크리트 사장교로 건설하여[8] 1991년 10월에 완공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91년 3월 26일 강풍으로 교량이 붕괴되어 공사가 전면 중단되었다.[9] 조사 결과 건설 공법에 문제가 있어 1991년 10월 12일부터 공법을 바꿔 재공사에 들어갔지만,[10] 1992년 5월 5일 중앙탑을 지탱하는 교각에서 심각한 균열이 발견되어 공사가 다시 중단되었다. 결국 1992년 9월 9일 팔당대교의 설계를 일반 거더교로 변경해 공사에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문제가 된 사장교 부분과 주탑을 철거한 뒤 교각 6개를 다시 세워 1995년 4월 25일 오전 10시에 착공 8년 11개월 만에 완공되었다.[11]

3. 효과

팔당대교 건설은 서울 동부 지역과 수원, 안양, 성남 등 경기도 남동부 지역을 직접 연결하여, 서울 청량리와 구리시의 만성적인 교통 체증 해소에 기여했다. 또한 경부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와의 연계를 통해 수도권 교통난 완화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개통 직후 하루 평균 4만여 대의 차량 통행으로 덕소에서 양평으로 이어지는 국도 제6호선하남시 일대 도로는 극심한 교통 체증을 겪게 되었다.[1]

3. 1. 긍정적 효과

팔당대교 건설로 서울 동부지역과 수원, 안양, 성남 등 경기도 남동부 지역이 직접 연결되는 효과가 발생해 서울 청량리와 구리시에서 발생하던 만성 교통체증이 해소되었으며, 경부고속도로중부고속도로 등과도 연계할 수 있어 수도권 교통난 해결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예상했다. 다리가 개통되자마자 하루 평균 4만여 대가 통행하기 시작했으며 덕소에서 양평 방면으로 이어지는 국도 제6호선하남시 일대 도로가 극심한 교통체증이 발생했다.[1]

3. 2. 부정적 효과

팔당대교 건설로 서울 청량리와 구리시에서 발생하던 만성 교통체증이 해소되었지만, 다리가 개통되자마자 하루 평균 4만여 대가 통행하기 시작하면서 덕소에서 양평 방면으로 이어지는 국도 제6호선하남시 일대 도로에 극심한 교통체증이 발생했다.

4. 팔당대교 붕괴사고 (상세)

1991년 3월 26일 오전 강풍으로 팔당대교 196m 구간이 붕괴[12]되어 1명이 사망했다.[13]

시공사인 유원건설은 풍압을 고려하지 않은 공법으로 공사 기간에 쫓겨 무리하게 시공했고, 안전 조치를 전혀 하지 않아 건설현장소장이 구속되었다.[14] 조달청 조사 결과, 직접 공사비에도 못 미치는 절반 가격으로 공사를 수주하는 덤핑 수주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15] 6개월 후인 10월에는 당시 건설 공법이었던 사인장교(斜引張橋) 가설에 사용된 바리공법(FSM 공법)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때문에 10월 12일 자유돌출공법(FCM)으로 변경하여 공사를 재개했으나, 1992년 5월 5일 중앙탑 지지 교각에서 심각한 균열이 발견되어 다시 중단되었다. 조사 결과, 규정량 이상의 콘크리트 타설로 인한 시멘트와 골재의 화학 반응열이 배출되지 못하고 기포가 발생하는 수화 반응이 원인이었다.[16] 1992년 9월 9일, 설계를 일반 철제상자 방식으로 변경하여 공사를 재개했다.

유원건설은 이 사고로 30억의 손실을 보았고,[17] 건설부는 부실 시공 책임을 물어 2,250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18]

4. 1. 사고 경위

1991년 3월 26일 오전, 강풍으로 인해 팔당대교의 196m 구간이 붕괴되어 1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12][13]

조사 결과, 시공사인 유원건설이 풍압을 고려하지 않은 공법으로 무리하게 시공하고 안전 조치를 전혀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건설현장소장이 구속되었다.[14] 또한, 조달청 조사 결과 직접 공사비에도 못 미치는 절반 수준의 가격으로 공사를 수주하는 덤핑 수주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15] 6개월 후인 10월에는 당시 건설 공법이었던 사인장교(斜引張橋)로 가설하는 바리공법(FSM 공법)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때문에 공법을 자유돌출공법(FCM)으로 바꾸어 10월 12일부터 공사를 재개했다. 그러나 1992년 5월 5일, 중앙탑을 지탱하는 교각에서 심각한 균열이 발견되어 공사가 다시 중단되었다. 조사 결과 규정량 이상의 콘크리트를 타설하여 시멘트와 골재의 화학 반응에 의한 열이 배출되지 못하고 기포가 발생하는 수화 반응이 생긴 것으로 드러났다.[16] 결국 설계를 일반 철제상자방식으로 변경하여 1992년 9월 9일부터 공사를 재개했다.

한편, 시공사인 유원건설은 이 사고로 30억 정도의 손실을 보았으며,[17] 건설부는 부실 시공의 책임을 물어 2,250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18]

4. 2. 원인 규명

1991년 3월 26일 오전, 강풍으로 팔당대교 196m 구간이 붕괴되어 1명이 사망했다.[12][13]

조사 결과 시공사인 유원건설은 풍압을 고려하지 않은 공법으로 공사 기간에 쫓겨 무리하게 시공했고, 안전 조치도 전혀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건설현장소장이 구속되었다.[14] 조달청 조사에서는 직접 공사비에도 못 미치는 절반 수준의 가격으로 공사를 수주한 덤핑 수주 사실도 밝혀졌다.[15] 같은 해 10월에는 당시 건설 공법이었던 사인장교(斜引張橋) 가설에 사용된 바리공법(FSM 공법)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로 인해 10월 12일부터 자유돌출공법(FCM)으로 변경하여 공사를 재개했으나, 1992년 5월 5일 중앙탑 지지 교각에서 심각한 균열이 발견되어 다시 중단되었다. 조사 결과, 규정량 이상의 콘크리트 타설로 인한 시멘트와 골재의 화학 반응열이 배출되지 못하고 기포가 발생하는 수화 반응이 원인으로 밝혀졌다.[16] 결국 1992년 9월 9일, 설계를 일반 철제상자 방식으로 변경하여 공사를 재개했다.

한편, 유원건설은 이 사고로 30억의 손실을 입었으며,[17] 건설부는 부실 시공 책임을 물어 2,250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18]

4. 3. 사고 이후 조치

1991년 3월 26일 오전, 강풍으로 팔당대교의 196m 구간이 붕괴되어 1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12][13]

조사 결과 시공사인 유원건설은 풍압을 고려하지 않은 공법으로 공사 기간에 쫓겨 무리하게 시공했고, 안전 조치를 전혀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건설 현장 소장이 구속되었다.[14] 조달청 조사 결과, 직접 공사비에도 못 미치는 절반 수준의 가격으로 공사를 수주한 덤핑 수주 사실도 밝혀졌다.[15] 6개월 후인 10월에는 당시 건설 공법이었던 사인장교(斜引張橋) 가설 방식인 바리공법(FSM 공법)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 인해 공법을 자유돌출공법(FCM)으로 변경하여 10월 12일부터 공사를 재개했다. 그러나 1992년 5월 5일, 중앙탑을 지탱하는 교각에서 심각한 균열이 발견되어 공사가 다시 중단되었고,[16] 조사 결과 규정량 이상의 콘크리트 타설로 인해 시멘트와 골재의 화학 반응에 의한 열이 배출되지 못하고 기포가 발생하는 수화 반응이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설계를 일반 철제 상자 방식으로 변경하여 1992년 9월 9일부터 공사를 다시 시작했다.

한편, 유원건설은 이 사고로 30억의 손실을 보았고,[17] 건설부는 부실 시공 책임을 물어 2,250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18]

참조

[1] 백과사전 팔당대교 http://100.naver.com[...] Naver 2017-12-02
[2] 뉴스 동부 한강변 일대 땅값 술렁 http://newslibrary.n[...] 2017-12-02
[3] 뉴스 팔당대교 붕괴 부실공사탓 http://newslibrary.n[...] 2017-12-02
[4] 뉴스 팔당대교 재 공사 http://newslibrary.n[...] 2017-12-02
[5] 뉴스 팔당대교 공사 또 전면중단 http://news.joins.co[...] 2017-12-02
[6] 뉴스 착공 8년11개월…팔당대교 내일 개통 http://newslibrary.n[...] 2017-12-02
[7] 뉴스 韓國民(한국민)친절 報恩(보은)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6-09-05
[8] 뉴스 漢江(한강)의 새 名物(명물) 올림픽大橋(대교) 工事(공사)한창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7-10-01
[9] 뉴스 「팔당」시공 有元建設(유원건설) 작업중지 처분 http://newslibrary.n[...] 매일경제 1991-03-27
[10] 뉴스 팔당대교 再(재)공사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1-10-12
[11] 뉴스 팔당대교 개통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5-04-25
[12] 뉴스 무너진'1백96m http://newslibrary.n[...] 한겨레 1991-03-27
[13] 뉴스 신축 八堂(팔당)대교 붕괴 철제빔에 1명 壓死(압사)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1-03-26
[14] 뉴스 八堂(팔당)대교 "不實(부실)공사"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1-03-28
[15] 뉴스 「팔당」사고 덤핑受注(수주)탓 http://newslibrary.n[...] 매일경제 1991-03-29
[16] 뉴스 팔당대교 主塔(주탑)균열 不實(부실)시공 철거마땅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2-08-11
[17] 뉴스 政府(정부)발주 大型(대형)공사 事故(사고) 責任(책임)못가려「國民(국민)부담」태반 http://newslibrary.n[...] 매일경제 1992-08-03
[18] 뉴스 부실시공 8개사 과징금 http://newslibrary.n[...] 한겨레 199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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