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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토베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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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토베키오는 코르시카 섬 동해안에 위치한 도시로, 선사 시대 유적과 로마 시대 항구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세 시대에는 말라리아로 인해 쇠퇴했으나, 1539년 제노바 공화국에 의해 재건되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말라리아가 근절되면서 관광지로 발전하여 인구가 증가했다. 현재 코르시카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며, 지중해성 기후를 보이며, 피가리 공항을 통해 접근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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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토베키오
지도
일반 정보
포르토베키오 만의 모습. 전경에는 마리나, 그 너머에는 페리 부두가 있다.
포르토베키오 만의 모습. 전경에는 마리나, 그 너머에는 페리 부두가 있음
코르시카어 이름Purtivechju (북부 방언)
Portivechju (남부 방언)
이탈리아어 이름Porto Vecchio
Portovecchio
별칭소금의 도시
북부 방언 발음 (코르시카어)IPA: [ˌportiˈbecu]
남부 방언 발음 (코르시카어)IPA: [ˌpɔrtiˈvɛtju]
코르시카어 발음IPA: [ˌpurtiˈvetju]
프랑스어 발음IPA: [pɔʁto vekjo]
이탈리아어 발음IPA: [ˌpɔrtoˈvɛkkjo]
영어 발음IPA: [ˌpɔːrtoʊ ˈvɛkioʊ]
행정
국가프랑스
레지옹코르시카
데파르트망코르스-뒤-쉬드
아롱디스망사르텐
코뮌 지위코뮌
캉통바벨라 및 그랑 쉬드
INSEE 코드2A247
우편 번호20137
시장장-크리스토프 안젤리니
임기2020–2026년
지리
해발 고도40m
최소 해발 고도0m
최대 해발 고도1316m
면적168.65km2
인구
총 인구프랑스 메타데이터 위키데이터 참조
인구 조사 기준 시점프랑스 메타데이터 위키데이터 참조
인구 관련 각주프랑스 메타데이터 위키데이터 참조
인구 통계Porto-Vecchiais (프랑스어)
portivechjacciu (북부 코르시카어)
purtivichjacciu (남부 코르시카어)

2. 역사

코뮌 북쪽에는 토레 문화의 이름을 따온 선사 시대 유적지인 토레가 있다. 코르시카 청동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원형 또는 반원형 석조 요새가 특징이다. 피가리 방향의 체치아 마을에도 선사 시대 유적이 있으며,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토레 문화 유적인 카스텔루 디 타파가 있다. 카스텔루 디 아라주는 아라지오 마을 바로 위에 있으며, 해발 45m에 위치해 있다. 두께 2m, 높이 4m의 환상 성벽을 가지고 있다. 코뮌 서쪽에는 티불라주 선사 시대 유적이 있다.

고대에는 토레(Torre)라고 불리는 정착지가 있었다. 현재 포르토베키오 항구의 기반은 기원전 6세기에 시라쿠사에서 온 그리스인들이 닦은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 시대에는 포르투스 시라쿠사누스(Portus Syracusanus)라고 불렸다.[4] 항구는 "오래된 항구"를 의미하며, 인근에 흔적을 남긴 로마 시대 항구를 지칭하는 것일 수 있다.[4]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이 지역은 로카 영주의 봉건 지배하에 있었으며, 산에서 사는 현지 사람들은 겨울에 가축을 이끌고 살았다.

중세 시대에는 말라리아가 만연하여 황폐해졌으나, 1539년 제노바 공화국의 성 조지 은행에 의해 재건되었다.[3][4] 제노바인들은 바스티아에 이미 진출해 있었으며,[3] 걸프를 내려다보는 70m 언덕에 도시를 재건했다. 제노바인들은 사각형 모양의 주요 광장인 레퓌블리크 광장(place de la République)과 생 장 바티스트 교회(Église St.-Jean Baptiste) 근처를 둘러싼 성벽 안에 로마 항구를 보존했다. 제노바인들은 식민지 건설을 시도했지만, 말라리아로 인해 대부분의 정착민들이 사망했다. 1546년의 또 다른 식민지 역시 같은 운명을 겪었고, 그 후 식민지는 도시 연합체가 되었다.

로카 영주의 지배에서 제노바의 산 조르조 은행의 직접 지배하에 들어가자 제노바 사람들은 이곳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바르바리아 해적의 습격에 대비하여 많은 릉보를 갖춘 요새를 건설했다(1539년). 군청 소재지로 지정되었고 평야에 제노바의 개척이 시작되면서 이 식민지 정책이 실패였음이 드러났다. 말라리아 발생으로 영구적인 위협이 되었던 오스만 제국의 해적 공격이나, 코르시카 측의 공격으로부터 몇 차례 포르토베키오는 지켜졌다. 다양한 정착 시도가 있은 후, 제노바 공화국은 쿠엔자 산 출신의 세대를 성채 내에 정착시키기로 결정했다. 1564년에는 셈피에로 코르소가 몇 달 동안 도시를 점령하기도 했다.

17세기 동안 포르토베키오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산악 주민들이었다. 그러나 원래 주민의 많은 수가 수 세대에 걸쳐 인구를 회복하고 말라리아 발생과 만연을 막기 위해 토지 개발을 계속했다. 19세기 동안 말라리아의 발생원이었던 습지는 간척되었다.

제2 제정 시대에 시행된 배수 프로젝트로 일부 인구가 돌아오기 시작했지만, 성공은 미미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말라리아를 근절하려는 동맹군이 주둔하면서 배수, 매립, 살포를 통해 말라리아 문제가 해결되었고, 이 지역은 해충이 줄어들면서 새롭게 매력적인 곳이 되었다. 현재 인구는 1950년경에 시작된 확장에서 비롯되었다.[4]

제노바 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군은 말라리아 퇴치를 위해 배수, 매립, 살포 작업을 진행했고, 이는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다.[4] 말라리아가 사라진 포르토베키오는 새로운 매력을 얻게 되었고, 1950년대부터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했다.[4] 특히 1950년부터 1997년까지 공화국을 위한 집결(RPR) 소속 장-폴 드 로카 세라 시장 재임 기간 동안 포르토베키오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1980년대에는 피가리 공항이 건설되어 주요 관광지로 발돋움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2. 1. 선사 시대

코뮌 북쪽에는 토레 문화의 이름을 따온 선사 시대 유적지인 토레가 있다. 코르시카 청동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원형 또는 반원형 석조 요새가 특징이다. 피가리 방향의 체치아 마을에도 선사 시대 유적이 있으며,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토레 문화 유적인 카스텔루 디 타파가 있다. 카스텔루 디 아라주는 아라지오 마을 바로 위에 있으며, 해발 45m에 위치해 있다. 두께 2m, 높이 4m의 환상 성벽을 가지고 있다. 코뮌 서쪽에는 티불라주 선사 시대 유적이 있다.

고대에는 토레(Torre)라고 불리는 정착지가 있었다.

2. 2. 고대와 중세

고대에는 토레(Torre)라고 불리는 정착지가 있었으며, 현재 포르토베키오 항구의 기반은 기원전 6세기에 시라쿠사에서 온 그리스인들이 닦은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 시대에는 포르투스 시라쿠사누스(Portus Syracusanus)라고 불렸다.[4] 항구는 "오래된 항구"를 의미하며, 인근에 흔적을 남긴 로마 시대 항구를 지칭하는 것일 수 있다.[4]

중세 시대에는 말라리아가 만연하여 황폐해졌으나, 1539년 제노바 공화국의 성 조지 은행에 의해 재건되었다.[3][4] 제노바인들은 바스티아에 이미 진출해 있었으며,[3] 걸프를 내려다보는 70m 언덕에 도시를 재건했다. 제노바인들은 사각형 모양의 주요 광장인 레퓌블리크 광장(place de la République)과 생 장 바티스트 교회(Église St.-Jean Baptiste) 근처를 둘러싼 성벽 안에 로마 항구를 보존했다. 제노바인들은 식민지 건설을 시도했지만, 말라리아로 인해 대부분의 정착민들이 사망했다. 1546년의 또 다른 식민지 역시 같은 운명을 겪었고, 그 후 식민지는 도시 연합체가 되었다. 1564년에는 셈피에로 코르소가 몇 달 동안 도시를 점령하기도 했다.

제2 제정 시대에 시행된 배수 프로젝트로 일부 인구가 돌아오기 시작했지만, 성공은 미미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말라리아를 근절하려는 동맹군이 주둔하면서 배수, 매립, 살포를 통해 말라리아 문제가 해결되었고, 이 지역은 해충이 줄어들면서 새롭게 매력적인 곳이 되었다. 현재 인구는 1950년경에 시작된 확장에서 비롯되었다.[4]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이 지역은 로카 영주의 봉건 지배하에 있었으며, 산에서 사는 현지 사람들은 겨울에 가축을 이끌고 살았다. 로카 영주의 지배에서 제노바의 산 조르조 은행의 직접 지배하에 들어가자 제노바 사람들은 이곳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바르바리아 해적의 습격에 대비하여 많은 릉보를 갖춘 요새를 건설했다(1539년). 군청 소재지로 지정되었고 평야에 제노바의 개척이 시작되면서 이 식민지 정책이 실패였음이 드러났다. 말라리아 발생으로 영구적인 위협이 되었던 오스만 제국의 해적 공격이나, 코르시카 측의 공격으로부터 몇 차례 포르토베키오는 지켜졌다. 다양한 정착 시도가 있은 후, 제노바 공화국은 쿠엔자 산 출신의 세대를 성채 내에 정착시키기로 결정했다.

17세기 동안 포르토베키오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산악 주민들이었다. 그러나 원래 주민의 많은 수가 수 세대에 걸쳐 인구를 회복하고 말라리아 발생과 만연을 막기 위해 토지 개발을 계속했다. 19세기 동안 말라리아의 발생원이었던 습지는 간척되었다.

2. 3. 근세와 근대

1539년 제노바의 성 조지 은행은 말라리아로 황폐해진 포르토베키오를 재건하고 요새를 건설했다.[4] 제노바인들은 바스티아에 이미 진출해 있었으며,[3] 로마 시대 항구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곳에 식민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말라리아와 바르바리아 해적의 공격으로 인해 초기 정착은 실패로 돌아갔다.[4] 1564년에는 셈피에로 코르소가 잠시 도시를 점령하기도 했다.

제2 제정 시대에 습지 배수 사업이 시행되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군의 노력으로 말라리아가 근절되면서 포르토베키오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2. 4. 현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군은 말라리아 퇴치를 위해 배수, 매립, 살포 작업을 진행했고, 이는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다.[4] 말라리아가 사라진 포르토베키오는 새로운 매력을 얻게 되었고, 1950년대부터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했다.[4] 특히 1950년부터 1997년까지 공화국을 위한 집결(RPR) 소속 장-폴 드 로카 세라 시장 재임 기간 동안 포르토베키오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1980년대에는 피가리 공항이 건설되어 주요 관광지로 발돋움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3. 지리



포르토베키오 코뮌은 사르텐에서 동쪽으로 64km 떨어져 있다. 만의 북쪽 해안에는 레치 코뮌에 속한 베네데투, 마리나 디 피오리 등의 리조트가 있다. 동쪽 해안은 절벽이 있는 해안으로 사람이 거주하기 어려우며, 키아파 곶(누드 비치)을 지나면 해안은 보니파시오 코뮌의 경계까지 남서쪽으로 이어진다. 코뮌의 면적은 168.65km²이며, 이 중 120.70km²는 숲이다.[4]

남동쪽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는 4개의 세르비칼 섬들이 있는데, 36ha의 자연 보호 구역으로 보호받고 있으며, 이는 부슈 드 보니파시오("보니파시오 해협"; 보니파시오 참조)의 더 큰 보호 구역의 일부이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포라나, 마에스트로 마리아(가장 작음), 피아나(가장 크며 36m까지 솟아 있음)와 좀 더 멀리 떨어진 피에트로카기오사가 있다.

북서쪽의 언덕은 국립 공원에 포함되어 있으며, 오스페달 마을은 아마도 로마 시대의 대규모 고대 병원에서 이름을 따왔을 것이다. 이 병원은 그 기능을 잃지 않고 약 150명의 직원을 고용하는 건강 관리 센터로 계속 운영되고 있다. 근처에는 오스페달 숲의 푼타 디 코르부 기슭에 댐을 설치하여 만들어진 오스페달 호수가 있다. 이 언덕은 1314m의 "죽은 암소 봉우리"(punta di a Vacca Morta)에서 최고점에 달한다.

코르시카 섬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포르토베키오는 섬 동해안에 있는 해양 휴양지이다. 국도 198호선(:fr:Route nationale 198)을 통해 북쪽의 솔렌자라, 남쪽의 보니파시오로 이어진다. 서쪽으로는 해발 1381m의 오스페달 산이 있고, 동쪽으로는 티레니아 해가 있다. 칼라 로사, 팔롬바지아라는 유명한 해변이 있다. 코뮌 내에는 약 10 헥타르의 염전이 있으며, 연간 100톤의 소금을 생산하고 있다.

3. 1. 지형

포르토베키오 코뮌은 사르텐에서 동쪽으로 64km 떨어져 있다. 만의 북쪽 해안에는 레치 코뮌에 속한 베네데투, 마리나 디 피오리 등의 리조트가 있다. 동쪽 해안은 절벽이 있는 해안으로 사람이 거주하기 어려우며, 키아파 곶(누드 비치)을 지나면 해안은 보니파시오 코뮌의 경계까지 남서쪽으로 이어진다. 코뮌의 면적은 168.65km²이며, 이 중 120.70km²는 숲이다.[4]

남동쪽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는 4개의 세르비칼 섬들이 있는데, 36ha의 자연 보호 구역으로 보호받고 있으며, 이는 부슈 드 보니파시오("보니파시오 해협"; 보니파시오 참조)의 더 큰 보호 구역의 일부이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포라나, 마에스트로 마리아(가장 작음), 피아나(가장 크며 36m까지 솟아 있음)와 좀 더 멀리 떨어진 피에트로카기오사가 있다.

북서쪽의 언덕은 국립 공원에 포함되어 있으며, 오스페달 마을은 아마도 로마 시대의 대규모 고대 병원에서 이름을 따왔을 것이다. 이 병원은 그 기능을 잃지 않고 약 150명의 직원을 고용하는 건강 관리 센터로 계속 운영되고 있다. 근처에는 오스페달 숲의 푼타 디 코르부 기슭에 댐을 설치하여 만들어진 오스페달 호수가 있다. 이 언덕은 1314m의 "죽은 암소 봉우리"(punta di a Vacca Morta)에서 최고점에 달한다.

코르시카 섬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포르토베키오는 섬 동해안에 있는 해양 휴양지이다. 국도 198호선(:fr:Route nationale 198)을 통해 북쪽의 솔렌자라, 남쪽의 보니파시오로 이어진다. 서쪽으로는 해발 1381m의 오스페달 산이 있고, 동쪽으로는 티레니아 해가 있다. 칼라 로사, 팔롬바지아라는 유명한 해변이 있다. 코뮌 내에는 약 10 헥타르의 염전이 있으며, 연간 100톤의 소금을 생산하고 있다.

3. 2. 기후

포르토베키오는 더운 여름 지중해성 기후(쾨펜 기후 구분 ''Csa'')를 보인다.[10] 연평균 기온은 17.5°C이다. 8월 평균 기온은 26.1°C로 가장 덥고, 2월 평균 기온은 10.8°C로 가장 춥다. 연평균 강수량은 599.4mm이며, 11월에 84.8mm로 가장 많은 비가 내린다.[10] 1968년 7월 11일에 41.0°C로 최고 기온을 기록했고, 1986년 2월 10일 -2.9°C로 최저 기온을 기록했다.[10][5]

4. 인구

포르토베키오코르시카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코뮌이다.[9] 19세기부터 인구가 꾸준히 증가했으며, 특히 20세기 중반 이후 급격한 성장을 보였다. 2017년 기준 인구는 12,042명이다.[9]

연도인구
18001,241
18311,738
18511,971
18721,811
18913,018
19113,929
19314,746
19545,091
19757,510
199910,326
201712,042


5. 생태

오스페달레 고원 지대는 코르시카 소나무 숲으로 유명하다. 이 고원 지대와 해안 사이에는 스타바치우 강이 흐르는 평원이 펼쳐져 있으며, 이 강은 소금 습지를 거쳐 포르토 만의 끝으로 흘러든다. 이 습지에서는 코르크 참나무와 유칼립투스가 자란다. 과거 습지는 매립되어 현대 도시가 되었거나, 상업용 염전이 건설되었다. 코르시카 섬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포르토베키오에는 약 10 헥타르의 염전이 있으며, 연간 100톤의 소금을 생산하고 있다.

팔롬바지아 해변 앞 섬들, 코르시카, 2005


6. 시설

포르토베키오는 피가리-쉬드 코르스 공항에서 24km 거리에 있어 접근성이 좋다.[4] 공립 고등학교와 2개의 커뮤니티 칼리지, 107개의 병상을 갖춘 사립 병원, 의과대학, 코르크 산업 및 광범위한 관광 시설을 갖추고 있다.[4] 항구에는 450척의 소형 선박을 위한 계류 시설, 상업 시설 및 페리 터미널이 있다.[4] 인구는 여름에 50,000명으로 늘어나며, 주로 이탈리아인이다.[4] 해변, 특히 남동쪽으로 3km 떨어진 팔롬바지아 해변에 사람이 많다.[4] 1983년에는 연례 영화제를 조직하는 영화 연구소를 인수했다.[4]

7. 정치

포르토베키오의 시장은 2004년 3월 이후 조르주 멜라가 맡고 있다. 1997년부터 2004년까지는 국민운동연합(UMP) 소속의 카미유 드 로카 세라가 시장직을 수행했으며, 그 이전에는 장-폴 드 로카 세라(RPR)가 시장이었다.

8. 교통

이 도시는 현재 폐쇄된 미터 궤간 코르시카 철도 지선의 종착역이었으며, 카사모자에서 주요 간선과 합류했다.

9. 기타

9. 1. 출신 인물


  • 샤일 벨가즈와니 - 축구 선수

참조

[1] 웹사이트 Répertoire national des élus: les maires https://www.data.gou[...] 2020-12-02
[2] 웹사이트 Décret n° 2014-229 du 24 février 2014 portant délimitation des cantons dans le département de la Corse-du-Sud http://www.legifranc[...]
[3] 서적 The Rough Guide to Corsica Rough Guides
[4] 웹사이트 France, le trésor des régions: Porto-Vecchio http://tresordesregi[...] 2022-07-19
[5] 웹사이트 Fiche climatologique - La Chiappa (20) https://donneespubli[...] Météo-France 2024-04-20
[6] 웹사이트 Porto-Vecchio
[7] 웹사이트 Population en historique depuis 1968 https://www.insee.fr[...] INSEE
[8] 웹사이트 Porto-Vecchio
[9] 웹사이트 Population en historique depuis 1968 https://www.insee.fr[...] INSEE
[10] 웹인용 Normales et records pour La Chiappa (2A) https://www.meteocie[...] Meteociel 2022-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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