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상륙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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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항 상륙 작전은 1950년 7월, 한국 전쟁 중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의 지시로 미군 제1기병사단이 포항에 상륙한 군사 작전이다. 북한군의 남진을 막기 위한 부산 교두보 확보의 일환으로, 인천 상륙 작전의 실패 가능성을 고려하여 동해안으로 상륙 지점을 변경하여 실행되었다. 7월 10일, 포항을 상륙 지점으로 결정한 후, 미군은 사전 정찰과 소해 작업을 통해 상륙 준비를 완료했다. 7월 18일, 미 제1기병사단이 포항에 상륙하여 영동으로 이동하여 방어 임무를 수행했으며, 7월 23일 태풍의 영향으로 상륙이 완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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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상륙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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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상륙 작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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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950년 7월 18일 ~ 7월 19일 |
장소 | 경상북도 포항 |
결과 | 유엔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유엔군 | |
지휘관 | |
유엔군 | 아서 듀이 스트러블 호바트 R. 게이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불명 |
병력 규모 | |
유엔군 | 함대 66척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불명 |
군대 | |
유엔군 | 미국 제1기병사단 미국 태평양 함대 |
사상자 | |
관련 정보 |
2. 배경
6월 25일 주일 미 해군 제90기동부대(Task Force 90) 사령관 J. H. 도일(J. H. Doyle) 소장은 예하 상륙전대 함정에 미 제24사단 35연대 병력을 요코스카 항에서 탑승시켜, 사가미만 지가사키 해안에서 상륙 훈련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7월 10일, 미군은 포항을 상륙지로 결정하고, 제5공군 항공기술자들이 활주로를 확장 보수하기 시작했다. 7월 11일에는 해군 장교 3명과 제1기병사단 정보장교 2명이 포항을 공중 정찰하여 해안 정보를 수집했다.[1]
포항 상륙 작전의 주요 관련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보다 앞서 미 제8군에 대한 상륙 훈련은 5월부터 실시되고 있었으며, 상륙 작전 능력이 크게 향상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륙 훈련은 전쟁 기간 중 실시하였던 포항, 인천, 원산 등의 상륙 작전에서 매우 효과적인 성과를 거두는 밑거름이 되었다.
7월 5일 일본의 기지로부터 공수된 미 제24사단 병력은 단 700명뿐이었고 지상 전황은 아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는 당시의 불리한 상황을 지적하며 "당면한 긴급 문제는 한반도 전 지역에서 남진 중인 북한 지상군의 진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T-34 전차의 지원을 받은 조선인민군 지상군은 도합 9개 사단으로 추정한다. 현재 우리가 어떠한 조치를 취하여도 승리에 도취한 조선인민군들의 기세를 꺾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맥아더 원수는 7월 6일에 도일 소장과 그의 참모 7명을 동경으로 소집하여 상륙 작전 계획을 검토시켰고, 7월 22일 미 제1기병사단과 미 해병대 연대전투단(RCT) 병력을 인천에 상륙시킨다는 블루하츠 작전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대전 지역의 전황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7월 10일 블루하츠 작전은 취소되었고, 부산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동해안에서의 상륙 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도일 제독은 포항을 가능한 목표 지역으로 제시하였다. 이 제안은 7월 10일에 맥아더 원수의 승인을 받았다.
3. 실행
7월 14일부터 7척의 소해정(YMS)이 포항 영일만의 소해작업을 시작했고, LST와 LSU로 구성된 기동전개 90.3(인양전대)은 상륙작전에 필요한 장비를 싣고 한국 해역으로 향했다.[1] 7월 15일의 마지막 정찰 비행으로 포항 상륙은 무저항 행정상륙이 가능하다고 확신했다.[1]
7월 18일 05:00, 상륙함대가 포항 해역에 도착했고, 05:58 상륙이 개시되었다.[1] 제1기병사단의 중장비가 먼저 양륙되었고, 07:15부터 상륙병력이 상륙단정(LCM)으로 해안에 집결했다.[1] 09:30부터는 군수물자 하역이 시작되어 2,000대의 차량이 양륙되었다.[1]
7월 18일 ~ 7월 19일의 상륙 기간 동안, 동해의 경비 함정들은 포항 근해를 호위했고, 제77기동함대의 함재기들은 원산, 흥남, 평강 등을 공습했다.[1]
7월 19일, 제1기병사단장 허버트 R. 게이 소장은 상륙군의 작전 지휘권을 인수했고, 18:00에는 일부 병력을 해안 방어 작전에 투입했다.[1]
제1기병사단 5기병연대와 8기병연대는 월턴 워커 중장의 명령에 따라 영동으로 이동하여, 포항 상륙 4일 만인 7월 22일 영동 지구에서 미 제24사단과 방어 임무를 교대했다.[1]
7월 23일, 태풍 그레이스(Grace)의 영향으로 지연되었던 MSTS 소속 운송선단들이 포항에 도착하면서 제1기병사단의 포항 상륙이 완료되었다.[1]
4. 관련 인물
4. 1. 더글러스 맥아더
7월 5일 맥아더 원수는 당시 불리한 전황을 설명하며, "당면한 긴급 문제는 한반도 전 지역에서 남진 중인 북한 지상군의 진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T-34 전차의 지원을 받은 조선인민군 지상군은 도합 9개 사단으로 추정한다. 현재 우리가 어떠한 조치를 가하여도 승리에 도취한 조선인민군들의 기세를 꺾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라고 말하였다.
7월 6일 맥아더 원수는 돌 소장과 그의 참모 7명을 동경으로 소집하여 상륙작전 계획을 검토시켰다. 7월 22일 미 제1기병사단과 미 해병대 연대전투단(RCT) 병력을 인천에 상륙시킨다는 블루하츠 작전이 세워졌으나, 대전지구의 전황이 급격히 악화되자 7월 10일 취소되었다. 부산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동해안에서의 상륙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돌 제독은 포항을 상륙 목표 지역으로 제안하였고, 이 제안은 같은 날 맥아더 원수의 승인을 받았다.
4. 2. J. H. 도일
6월 25일 주일미해군 제90기동부대(Task Force 90)사령관 J. H. 도일 소장은 예하 상륙전대함정에 미 제24사단 35연대 병력을 요코스카항에서 탑승시켜 사가미만의 지가사키 해안에서 상륙훈련을 실시하도록 지시하였다.[1]
7월 6일, 맥아더 원수는 도일 소장과 그의 참모 7명을 동경으로 소집하여 상륙작전 계획을 검토시켰고,[1] 7월 10일 도일 제독은 포항을 상륙 목표 지역으로 제시, 맥아더 원수의 승인을 받았다.[1]
4. 3. 허버트 R. 게이
7월 19일, 미 제1기병사단 사단장 허버트 R. 게이 소장은 포항에 상륙한 후 상륙군의 작전 지휘권을 인수하였으며, 이날 18:00에는 일부 병력을 해안 방어 작전에 투입하였다.[1]
4. 4. 월턴 워커
월턴 워커 중장은 미 제8군 사령관으로서, 미 제1기병사단을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미 제1기병사단 예하 5기병연대와 8기병연대는 영동으로 이동하여 포항 상륙 4일 만인 22일에 24사단과 방어 임무를 교대하였다.
참조
[1]
서적
한국전쟁사
국방부, 전쟁기념사업회
[2]
웹인용
History of the 1st Cavalry Division
https://1cda.org/his[...]
202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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