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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 엠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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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라이 엠터는 중세 시대에 지방 법원이나 자치 정부를 가진 개인 또는 자유 농민의 조합을 의미하는 용어였다. 특히 알레만니족이 거주하던 남부 독일의 슈바르츠발트와 스위스 고원에서 사용되었으며,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받던 아르가우 지역의 경우 낮은 사법권과 관습법으로 독립적인 지위를 가졌다. 1415년 아르가우 정복 이후 여러 칸톤의 공동 통치를 받았고, 종교 개혁과 전쟁을 거치며 개신교와 가톨릭 세력 간 분열을 겪었다. 헬베티아 공화국 시기에는 바덴 주에 편입되었고, 1803년 아르가우 주에 합병되었다. 1830년에는 프라이엠트 민란이 발생하여 자유주의적 변화를 이끌었으며, 스위스 연방 국가 탄생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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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 엠터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일반 명칭프라이암트
공식 명칭Freiamt
지위구스위스 연방의 신민
존속 기간 시작1415년
존속 기간 끝1798년
이전 국가오스트리아 공국
오스트리아 공국 문장
오스트리아 공국 문장
이후 국가바덴주
바덴주 문장
바덴주 문장
프라이암트 문장
프라이암트 문장
프라이암트 지도
1435–1798년 구스위스 연방의 프라이에 앰터 관할 구역 지도
역사
시작1415년
종료1798년
정치
정치 체제속국
소속 국가구스위스 연방

2. 어원

'프라이 엠터(Freie Ämter)'라는 명칭은 중세 시대 특정 지역이 아닌, 지방 법원이나 제한된 자치 정부를 가진 개인 또는 자유 농민의 조합을 의미했다.[4][1] 이 용어는 알레만니족이 거주하던 지역, 특히 남부 독일의 슈바르츠발트와 스위스 고원에서 발견된다.[4][1] '프라이 엠터'라는 용어는 초기 중세 시대 알레만니 제국의 법적 분열에서 유래했으며, 자치권을 포함하는 자유와 자유가 없는 상태를 구분하는 의미를 지녔다.[4][1]

아르가우의 프라이 엠터는 합스부르크가 치하에 있었지만, 낮은 사법권 및 관습법과 관련하여 독립적인 영토였으며, 따라서 중세 정의에서는 "자유로운" 지역이었다.[4][1]

3. 역사

3. 1. 1415년 이전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 시대에 프라이 엠터 지역은 로이스 강을 경계로 좌측은 아르가우, 우측은 투르가우에 속했다. 9세기 중반부터 이 지역은 취리히가우로 알려지게 되었다. 1170년 렌츠부르크 백작 가문이 단절된 후, 아르가우에 있던 그들의 영토는 합스부르크가에 넘어갔다. 합스부르크 가는 10세기 동안 이 지역에서 광대한 토지를 획득하고, 헤르메치빌과 무리 수도원 등 많은 마을에 하급 사법권을 부여했다.

3. 2. 아르가우 정복 (1415년)

1414년 11월 16일, 지기스문트 황제콘스탄츠 공의회를 소집하여 서방 교회 분열을 해결하고자 했다. 당시 세 명의 교황 (베네딕토 13세, 그레고리오 12세, 요한 23세)이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었다.[2] 합스부르크가의 프리드리히 4세는 요한 23세를 지지했는데, 요한 23세가 대립교황으로 선언되자 그를 도와 도시를 탈출시켰다. 이에 황제는 합스부르크 영토를 몰수하고 주변 국가들에게 정복을 명했다.[2] 베른은 이미 1414년에 황제를 지지하기로 약속했기에 침략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다른 연방 구성원들도 곧 뒤따랐다.[2]

1415년 연방은 이 영토를 빠르게 정복했다. 합스부르크 통치하의 아르가우는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는 연방 하에서도 유지되었다. 베른, 루체른, 취리히는 각각 정복지의 일부를 관리하게 되었고, 나머지 프라이 엠터는 연방의 나머지 국가들에 의해 집단으로 관리되는 피지배 영토, 즉 공동 통치령이 되었다.[3] 무리 ''Amt''는 취리히, 루체른, 슈비츠 주, 운터발덴 주, 추크 주, 글라루스 주에 할당되었고, 마이엔베르크, 리헨제, 빌메르겐의 ''Ämter''는 처음에는 루체른에만 주어졌으나, 1425년 중재 재판소의 결정으로 루체른은 세 개의 ''Ämter''를 집단 통치에 넘겨야 했다.[3] 15세기에는 ''바겐탈'' 지방 법정()으로 알려진 네 개의 ''Ämter''가 단일 연방 지방 장관 하에 통합되었고, 16세기에는 ''프라이 엠터의 Vogtei''로 알려지게 되었다.[3] 프라이 엠터는 종종 독립적인 하급 법원을 가졌지만, 연방의 주권을 받아들여야 했다. 1532년 우리 주는 프라이 엠터의 집단 행정에 참여하게 되었다.[3]

프라이 엠터의 상황을 보여주는 옛 스위스 연방

3. 3. 종교개혁과 분열

종교 개혁 당시, 프라이 엠터의 다수는 새로운 신앙으로 개종했다. 1529년에는 성상 파괴의 물결이 이 지역을 휩쓸어 오래된 종교의 많은 부분을 쓸어버렸다.[1] 1531년 제2차 카펠 전쟁에서 취리히가 패배한 후, 승리한 5개의 가톨릭 주가 프라이 엠터로 군대를 진격시켜 가톨릭으로 재개종시켰다.[1]

1656년 빌머겐 1차 전쟁과 1712년 토겐부르크 전쟁 (또는 빌머겐 2차 전쟁)에서 프라이 엠터는 개혁파와 가톨릭 군대가 싸우는 전장이 되었다. 1656년 전쟁 이후의 평화는 현상 유지를 가져왔지만, 1712년 아라우의 4차 평화는 권력 관계의 재편을 가져왔다. 승리는 취리히에게 바덴 백국과 인접한 프라이 엠터 지역에서 가톨릭 주를 정부에서 몰아낼 기회를 제공했다. 이후 프라이 엠터는 파르방겐의 교수대에서 오버룬코펜 교회 첨탑까지 이어진 선에 의해 둘로 나뉘었다. 북쪽 부분인 소위 운터렌 프라이 엠터(하부 프라이 엠터)는 보스빌 (일부) 및 헤르메치빌과 니더암트를 포함하며 취리히, 베른, 글라루스에 의해 통치되었다. 남쪽 부분인 오베렌 프라이 엠터(상부 프라이 엠터)는 이전의 7개 주가 통치했지만 베른이 추가되어 8개가 되었다.[1]

3. 4. 헬베티아 공화국과 아르가우 주 편입

종교 개혁 당시, 프라이 엠터의 다수는 새로운 신앙으로 개종했다. 1529년에는 성상 파괴의 물결이 이 지역을 휩쓸어 오래된 종교의 많은 부분을 쓸어버렸다.[1] 1531년 제2차 카펠 전쟁에서 취리히가 패배한 후, 승리한 5개의 가톨릭 주가 프라이 엠터로 군대를 진격시켜 가톨릭으로 재개종시켰다.[1]

1656년 빌머겐 1차 전쟁과 1712년 토겐부르크 전쟁 (또는 빌머겐 2차 전쟁)에서 프라이 엠터는 개혁파와 가톨릭 군대가 싸우는 전장이 되었다. 1656년 전쟁 이후의 평화는 현상 유지를 가져왔지만, 1712년 아라우의 4차 평화는 권력 관계의 재편을 가져왔다. 승리는 취리히에게 바덴 백국과 인접한 프라이 엠터 지역에서 가톨릭 주를 정부에서 몰아낼 기회를 제공했다. 이후 프라이 엠터는 파르방겐의 교수대에서 오버룬코펜 교회 첨탑까지 이어진 선에 의해 둘로 나뉘었다. 북쪽 부분인 소위 운터렌 프라이 엠터(하부 프라이 엠터)는 보스빌 (일부) 및 헤르메치빌과 니더암트를 포함하며 취리히, 베른, 글라루스에 의해 통치되었다. 남쪽 부분인 오베렌 프라이 엠터(상부 프라이 엠터)는 이전의 7개 주가 통치했지만 베른이 추가되어 8개가 되었다.[1]

헬베티아 공화국 (1798-1803) 동안 바덴 백국, 프라이 엠터, 켈러암트로 알려진 지역은 새로운 바덴 주로 통합되었다. 1803년 바덴 주와 프릭탈 주는 아르가우 주로 합병되었다.

3. 5. 아르가우 주 이후

1830년 아르가우는 프라이엠트 민란(Freiämtersturm)으로 인해 혼란을 겪었다. 프라이 엠터의 많은 주민들은 아라우의 주도로 행진하여 주 헌법의 변경을 요구했다. 프라이 엠터 민병대가 정부 청사를 포위하자, 정부는 신속하게 협상하여 봉기를 종식시켰다. 정부는 헌법 전면 개정과 민병대의 다른 모든 요구에 동의했다.

프라이엠트 민란을 포함한 1830~31년의 봉기들은 복고 시대를 종식시키고 자유주의적 재생 시대를 열었다. 재생 시대의 변화는 1848년 스위스 연방 국가 탄생에 기여했다.

4. 현대 한국과의 관계

참조

[1] HDS Freie Ämter
[2] HDS Aargau becomes part of the Confederation
[3] 서적 Die territoriale Entwicklung der Schweizerischen Eidgenossenschaft 1291–1797 Sauerländer 1932
[4] HDS Freie Äm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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