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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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공국은 켈트족이 거주하던 지역에 로마 제국이 들어선 후, 게르만족의 침략과 아바르족, 슬라브족의 정착을 거쳐 형성되었다. 976년 바벤베르크 가문이 오스트리아 변경백령을 봉토로 받으면서 오스트리아 공국이 시작되었고, 1156년 하인리히 2세가 공작이 되면서 주요 가문으로 성장했다. 1246년 바벤베르크 가문의 단절 이후 대공위 시대를 거쳐, 1278년 합스부르크 왕가가 오스트리아 공국을 획득하며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영토를 확장하고, 1453년 오스트리아 대공의 칭호를 공식화하며 대공국 시대를 열었다. 오스트리아 공국의 영토는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하부주 지역을 중심으로 다뉴브 강을 따라 위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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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공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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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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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다른 표기 | |
일반 명칭 | 오스트리아 공국 |
시대 | 중세 |
지위 | 신성 로마 제국 내의 공국 |
제국 | 신성 로마 제국 |
정부 형태 | 봉건제 게르만 공국 |
존속 기간 | 1156년–1453년 |
건국일 | 1156년 9월 17일 |
건국 사건 | 소특권장 |
주요 사건 1 | 게오르겐베르크 협정 |
주요 사건 1 날짜 | 1186년 8월 17일 |
주요 사건 2 | 마르히펠트 전투 |
주요 사건 2 날짜 | 1278년 8월 26일 |
주요 사건 3 | 대특권장 |
주요 사건 3 날짜 | 1358/59년 |
주요 사건 4 | 노이베르크 조약 |
주요 사건 4 날짜 | 1379년 9월 25일 |
멸망일 | 1453년 1월 6일 |
멸망 사건 | 대공국으로 인정 |
이전 국가 1 | 오스트리아 변경백국 |
이전 국가 2 | 슈타이어 공국 |
다음 국가 | 오스트리아 대공국 |
수도 | 빈 |
공용어 | 오스트리아-바이에른어 독일어 중세 라틴어 |
종교 | 로마 가톨릭교 |
군주 | |
최초의 공작 | 하인리히 2세 |
최초 공작 재위 기간 | 1156년부터 |
마지막 바벤베르크 공작 | 프리드리히 2세 |
마지막 바벤베르크 공작 재위 기간 | 1230년–1246년 |
프르제미슬 왕조 공작 | 오타카르 |
프르제미슬 왕조 공작 재위 기간 | 1251년–1276년 |
최초의 합스부르크 가문 공작 | 알브레히트 1세 |
최초의 합스부르크 가문 공작 재위 기간 | 1282년–1291년 |
마지막 공작 | 라디슬라우스 1세 |
마지막 공작 재위 기간 | 1440년–1457년 |
공작 | 오스트리아 공작 |
국기 및 국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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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정보 | |
통화 | 해당사항 없음 |
시간대 | 해당사항 없음 |
국호 | 오스트리아 |
데모님 | 오스트리아인 |
2. 역사
원래 켈트족이 거주하던 영토는 기원전 1세기 말 로마 제국에 정복되었다. 5세기 후반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이 지역은 여러 게르만 부족의 침략을 받았고, 6세기부터는 아바르족과 슬라브족 부족들이 정착하여, 약 600년경 남쪽에 카란타니아라는 독립 공국을 세웠다.[2] 567년에 건설된 아바르 카간국은 엔스 강까지의 후대 오스트리아 지역 대부분을 포함했으며, 그곳에서 독일의 종주 공국인 바이에른과 국경을 접했다. 631년부터 658년까지 사모 제국의 일부였던 이 지역은 791년부터 카롤링거의 군대, 샤를마뉴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다.[2]
약 800년경, 샤를마뉴는 아바르족에 대해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둔 후 엔스 강과 라아브 강 사이 지역에 국경 변경을 설립했는데, 이는 ''마르카 오리엔탈리스''의 일부인 아바르 변경이라고 불린다. 동프랑크의 변경백국은 907년 프레스부르크 전투에서 침략하는 마자르족에게 다시 빼앗겼고, 955년 레흐펠트 전투에서 오토 1세의 승리 후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으로 재건되었다. 976년 오토 2세 황제는 바벤베르크 백작 레오폴트 1세에게 오스트리아 변경백령을 봉토로 주었다. 헝가리와의 국경까지 다뉴브 강을 따라 대규모 독일인 정착 (''동방 식민'')이 이어졌고, 결국 서슬라브족 (슬로바키아인)과 남슬라브족 (슬로베니아인) 땅 사이의 슬라브 연속성을 붕괴시켰다.[3]
바벤베르크 가문은 1156년 하인리히 2세가 오스트리아 공작이 되면서 주요 가문으로 성장했다. 1186년, 레오폴트 5세와 슈타이어마르크 공작 오토카르 4세 사이에 게오르겐베르크 협정이 체결되었다. 바벤베르크 가문은 라인마르 폰 하게나우와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와 같은 저명한 중세 독일 가요(Minnesang) 시인들을 비엔나 궁정에 초청하였고, 니벨룽겐의 노래가 오스트리아 지역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1191년, 레오폴트 5세 공작은 제3차 십자군과 아크레 포위 공격에 참여했다. 도시가 함락되고 점령된 후, 그는 리처드 1세와 심한 다툼을 벌였다. 영국 왕이 귀국길에 오스트리아를 통과했을 때, 레오폴트는 그를 납치하여 뒤른슈타인 성에 감금했다. 헨리 6세 황제에게 넘겨진 리처드는 막대한 몸값을 지불한 후에야 석방되었다.
1246년 바벤베르크 가문의 마지막 공작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가 헝가리 왕국과의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오스트리아는 대공위시대를 맞이한다. 이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는 바덴(1248~1251)과 보헤미아(1251~1278)의 통치를 받았다. 1251년, 프리드리히 1세의 사망으로 프셰미슬 왕조의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가 마르가레테 폰 바벤베르크와 결혼하여 오스트리아 공작을 계승한다. 1278년, 루돌프 1세가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오타카르 2세를 패배시켜 오스트리아 공국을 획득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가 오스트리아의 공작이 된다.
이후 1335년 알브레히트 2세와 오토가 케른텐 공국을 상속받았고, 1359년 루돌프 4세가 오스트리아 대공을 자칭했다. 1363년에는 티롤 백작령을 획득했다. 1379년, 알브레히트 3세와 그의 동생 레오폴트 3세 사이에 노이베르크 조약이 체결되어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합스부르크가 영토가 분할되었다. 1386년, 레오폴트 3세가 젬파흐 전투에서 전사하고, 스위스의 합스부르크가 옛 영토를 완전히 상실한다. 1438년, 알브레히트 2세(오스트리아 공작으로서는 알브레히트 5세)가 로마 왕에 즉위하고, 합스부르크가에 의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직의 세습이 시작된다. 145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오스트리아 공작으로서는 프리드리히 5세)가 오스트리아 대공의 칭호를 공식화한다.
2. 1. 초기 역사 (바벤베르크 가문)
원래 켈트족이 거주하던 영토는 기원전 1세기 말 로마 제국에 정복되었다. 5세기 후반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이 지역은 여러 게르만 부족의 침략을 받았고, 6세기부터는 아바르족과 슬라브족 부족들이 정착하여, 약 600년경 남쪽에 카란타니아라는 독립 공국을 세웠다.[2] 567년에 건설된 아바르 카간국은 엔스 강까지의 후대 오스트리아 지역 대부분을 포함했으며, 그곳에서 독일의 종주 공국인 바이에른과 국경을 접했다. 631년부터 658년까지 사모 제국의 일부였던 이 지역은 791년부터 카롤링거의 군대, 샤를마뉴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다.[2]
약 800년경, 샤를마뉴는 아바르족에 대해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둔 후 엔스 강과 라아브 강 사이 지역에 국경 변방을 설립했는데, 이는 ''마르카 오리엔탈리스''의 일부인 아바르 변방이라고 불린다. 동프랑크의 변경백국은 907년 프레스부르크 전투에서 침략하는 마자르족에게 다시 빼앗겼고, 955년 레흐펠트 전투에서 오토 1세의 승리 후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으로 재건되었다. 976년 오토 2세 황제는 바벤베르크 백작 레오폴트 1세에게 오스트리아 변경백령을 봉토로 주었다. 헝가리와의 국경까지 다뉴브 강을 따라 대규모 독일인 정착 (''동방 식민'')이 이어졌고, 결국 서슬라브족 (슬로바키아인)과 남슬라브족 (슬로베니아인) 땅 사이의 슬라브 연속성을 붕괴시켰다.[3]
바벤베르크 가문은 1156년 하인리히 2세가 오스트리아 공작이 되면서 주요 가문으로 성장했다. 1186년, 레오폴트 5세와 슈타이어마르크 공작 오토카르 4세 사이에 게오르겐베르크 협정이 체결되었다. 바벤베르크 가문은 라인마르 폰 하게나우와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와 같은 저명한 중세 독일 가요(Minnesang) 시인들을 비엔나 궁정에 초청하였고, 니벨룽겐의 노래가 오스트리아 지역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1191년, 레오폴트 5세 공작은 제3차 십자군과 아크레 포위 공격에 참여했다. 도시가 함락되고 점령된 후, 그는 리처드 1세와 심한 다툼을 벌였다. 영국 왕이 귀국길에 오스트리아를 통과했을 때, 레오폴트는 그를 납치하여 뒤른슈타인 성에 감금했다. 헨리 6세 황제에게 넘겨진 리처드는 막대한 몸값을 지불한 후에야 석방되었다.
1246년 바벤베르크 가문의 마지막 공작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가 헝가리 왕국과의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오스트리아는 대공위시대를 맞이한다. 이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는 바덴(1248~1251)과 보헤미아(1251~1278)의 통치를 받았다. 1251년, 프리드리히 1세의 사망으로 프셰미슬 왕조의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가 마르가레테 폰 바벤베르크와 결혼하여 오스트리아 공작을 계승한다. 1278년, 루돌프 1세가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오타카르 2세를 패배시켜 오스트리아 공국을 획득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가 오스트리아의 공작이 된다.
이후 1335년 알브레히트 2세와 오토가 케른텐 공국을 상속받았고, 1359년 루돌프 4세가 오스트리아 대공을 자칭했다. 1363년에는 티롤 백작령을 획득했다. 1379년, 알브레히트 3세와 그의 동생 레오폴트 3세 사이에 노이베르크 조약이 체결되어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합스부르크가 영토가 분할되었다. 1386년, 레오폴트 3세가 젬파흐 전투에서 전사하고, 스위스의 합스부르크가 옛 영토를 완전히 상실한다. 1438년, 알브레히트 2세(오스트리아 공작으로서는 알브레히트 5세)가 로마 왕에 즉위하고, 합스부르크가에 의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직의 세습이 시작된다. 145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오스트리아 공작으로서는 프리드리히 5세)가 오스트리아 대공의 칭호를 공식화한다.
2. 2.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성립 (합스부르크 가문)
1192년, 오스트리아 공국은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합병하였다. 그러나 1246년 바벤베르크 가문의 마지막 공작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가 헝가리 왕국과의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오스트리아는 대공위시대를 맞이한다. 이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는 바덴(1248~1251)과 보헤미아(1251~1278)의 통치를 받았다. 오토카르 2세는 ''프리빌레기움 미누스''를 언급하며,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부계 상속이라는 봉건 원칙에 반하여 프리드리히의 누이이자 호엔슈타우펜의 하인리히의 미망인 마가레트와 그의 조카이자 오토카르의 형인 프셰미슬 마르크그라프 모라비아의 블라디슬라프(1247년 사망)의 미망인인 게르트루트의 상속권을 인정했다. 1250년 게르트루트의 두 번째 남편인 마르크그라프 바덴의 헤르만 6세가 죽자, 오토카르는 현지 귀족들의 환호 속에 오스트리아 땅을 침략했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자신보다 약 30살 연상인) 마가레트와 1252년 결혼했다. 1269년 오토카르는 카린티아 공국과 남쪽의 카르니올라 및 빈디시 변경백국을 실질적으로 통제했고, 수데텐의 폴란드 국경에서 남쪽의 아드리아 해 연안까지 뻗어 있는 중앙유럽 영토를 모두 통제했다.
1278년, 루돌프 1세가 영토 반환을 거부한 오타카르 2세를 마르흐펠트 전투에서 죽이면서, 합스부르크 왕가가 오스트리아의 공작이 되었다. 루돌프는 그의 딸 유디트를 오토카르의 아들 벤체슬라스 2세와 결혼시켰고, 그는 보헤미아 왕국을 유지했다. 그는 제후들과 합의에 도달하여 1282년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그의 아들들인 알브레히트와 루돌프 2세에게 오스트리아 영토를 하사하여 그들을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로 격상시켰다. 장자 상속권은 1년 후 라인펠덴 조약에 의해 시행되었다.

14세기와 15세기에 합스부르크가들은 제국의 남동부에 더 많은 영토를 축적했다.[4] 카린티아 공국과 카르니올라 변경백국은 처음에는 고리치아 가문에게 양도되었지만 1335년 합스부르크의 지배하에 들어왔다.[4] 티롤 백작령은 1363년 백작 부인 마르가레테에 의해 공작 루돌프 4세에게 양도되었다.[4] 루돌프는 빈 호프부르크 궁전에 거주지를 마련했고, 1358/59년에는 자신을 제국의 특권을 가진 "대공"으로 격상시키기 위해 ''프리빌레기움 마이우스''를 위조했다.[4]
1379년, 알브레히트 3세와 레오폴트 3세는 노이베르크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 영토를 서로 나누었다.[4] 알브레히트는 오스트리아 본토를 유지했고, 레오폴트는 나머지 영토를 차지했다.[4] 1402년에는 레오폴트 계열에 또 다른 분열이 있었는데, 에른스트 공작이 내부 오스트리아(즉, 슈티리아, 카린티아, 카르니올라 공국)를 차지하고 프리드리히 4세 공작이 티롤과 외부 오스트리아의 통치자가 되었다.[4]
알브레히트 계열은 1438년에 다시 황제 자리에 올랐다.[4] 공작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히트 5세는 그의 룩셈부르크 가문 장인인 황제 지기스문트의 후계자로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다.[4] 알브레히트의 통치는 1년에 불과했지만, 그는 레오폴트 계열 사촌인 에른스트 공작의 아들 프리드리히 5세의 뒤를 이었고, 그는 결국 알브레히트 계열(1457년)과 장자 티롤 계열(1490년)의 멸망 후 합스부르크 영토를 재통합했다.[4] 프리드리히 공작은 1452년 신성 로마 황제(프리드리히 3세로서)로 즉위했고, 1년 후 오스트리아의 대공령 격상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그 후 모든 합스부르크 왕자들은 대공 칭호를 사용했다.[4]
2. 3. 합스부르크 가문의 분열과 재통합
1192년에는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합병하였다.[4] 1246년 바벤베르크 가문의 마지막 공작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가 헝가리 왕국과의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오스트리아는 대공위시대를 맞이한다.[4] 이 기간 동안에 오스트리아는 바덴(1248~1251)과 보헤미아(1251~1278)의 통치를 받았다.[4] 1278년, 루돌프 1세가 영토 반환을 거부한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를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패배 시켜 죽이면서, 합스부르크 왕가가 오스트리아의 공작이 된다.[4] 루돌프는 그의 딸 유디트를 오토카르의 아들 벤체슬라스 2세와 결혼시켰고, 그는 보헤미아 왕국을 유지했다.[4] 그는 선제후들과 합의에 도달하여 1282년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그의 아들들인 알브레히트와 루돌프 2세에게 오스트리아 영토를 하사하여 그들을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로 격상시켰다.[4] 장자 상속권은 1년 후 라인펠덴 조약에 의해 시행되었다.[4] 루돌프의 후손들은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와 슈티리아를 통치했다.[4]14세기와 15세기에 합스부르크가들은 제국의 남동부에 더 많은 영토를 축적했다.[4] 카린티아 공국과 카르니올라 변경백국은 처음에는 고리치아 가문에게 양도되었지만 1335년 합스부르크의 지배하에 들어왔다.[4] 1363년에는 티롤 백작령을 획득하였다.[4]
1359년, 루돌프 4세는 자신을 대공"으로 격상시키기 위해 ''프리빌레기움 마이우스''를 위조했다. 이후, 1379년에 노이베르크 조약에 따라 알브레히트 3세와 레오폴트 3세는 오스트리아 영토를 서로 나누었다.[4] 알브레히트는 오스트리아 본토를 유지했고, 레오폴트는 나머지 영토를 차지했다.[4] 1402년에는 레오폴트 계열에 또 다른 분열이 있었는데, 에른스트 공작이 내부 오스트리아(즉, 슈티리아, 카린티아, 카르니올라 공국)를 차지하고 프리드리히 4세 공작이 티롤과 외부 오스트리아의 통치자가 되었다.[4] 이 분할은 룩셈부르크과 비텔스바흐 가문의 라이벌들에게 유리하게 합스부르크의 입지를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4]
합스부르크 알브레히트 계열은 1438년에 다시 황제 자리에 올랐다.[4] 공작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히트 5세는 그의 룩셈부르크 가문 장인인 황제 지기스문트의 후계자로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다.[4] 알브레히트의 통치는 1년에 불과했지만, 그는 레오폴트 계열 사촌인 에른스트 공작의 아들 프리드리히 5세의 뒤를 이었고, 그는 결국 알브레히트 계열(1457년)과 장자 티롤 계열(1490년)의 멸망 후 합스부르크 영토를 재통합했다.[4] 프리드리히 공작은 1452년 신성 로마 황제(프리드리히 3세로서)로 즉위했고, 1년 후 오스트리아의 대공령 격상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그 후 모든 합스부르크 왕자들은 대공 칭호를 사용했다.[4] 1438년부터 1806년까지 황제 프란츠 2세가 퇴위할 때까지 단 두 명의 비합스부르크인만이 제국을 통치했다.[4]
3. 지리
초기 오스트리아 공국의 영토는 비교적 작아서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하부주에 해당하는 지역을 대략적으로 포함했다. 과거 변방이었던 이 지역은 제국의 동쪽 변방에 위치했으며, 다뉴브 강의 남북쪽 기슭, 엔스 강 지류의 동쪽("아래쪽")에 있었다.
드로젠도르프, 라아브스, 라아 등 타이아 강을 따라 있는 다른 요새들은 역사적인 발트피어텔과 바인피어텔 지역의 북쪽에 위치했고, 만하르츠베르크 산맥으로 구분되어 보헤미아 공국(1198년 왕국으로 승격)과 모라비아 지역과의 경계를 이루었는데, 이들 지역은 모두 체코의 프셰미슬 왕조가 지배했다. 동쪽에서는 헝가리 왕국(오늘날 슬로바키아)과의 제국 국경이 모라바 강 평야와 빈 분지의 동쪽 가장자리로 점차 이동했다. 다뉴브 강의 오른쪽 기슭에서는 하류 라이타 강이 수세기 동안 제국-헝가리 국경을 표시했다. 남쪽으로는 오스트리아는 마찬가지로 공국으로 승격되었고 1192년 오스트리아와 통합된 슈티리아 지역과 접해 있었다.
참조
[1]
웹사이트
Austria – The Holy Roman Empire and the Duchy of Austria
https://countrystudi[...]
2023-02-21
[2]
웹사이트
Austria's History
https://www.austria.[...]
2024-05-23
[3]
웹사이트
Austria Facts, People, and Points of Interest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4-05-23
[4]
서적
A History of the Habsburg Empire, 1526–1918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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