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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기스문트 (신성 로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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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기스문트 (신성 로마 황제)는 1368년 뉘른베르크 또는 프라하에서 태어나 신성 로마 황제 카를 4세의 아들이자 헝가리 왕, 보헤미아 왕을 역임했다. 그는 헝가리와의 결혼을 통해 헝가리 왕위를 계승하고,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패배하는 등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웠다. 또한 콘스탄츠 공의회를 통해 서방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려 노력했으며, 헝가리와 신성 로마 제국 내정 개혁을 시도했으나, 후스 전쟁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1433년 로마 황제로 즉위했으며, 1437년 사망하여 그의 룩셈부르크 가문은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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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기스문트 (신성 로마 황제)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사진
피사넬로의 초상화, 1433년경
피사넬로 작, 지기스문트 폰 룩셈부르크의 초상화, 1433년경
기본 정보
이름지기스문트
원어 이름독일어: Sigismund
체코어: Zikmund
헝가리어: Zsigmond
크로아티아어: Žigmund
프랑스어: Sigismond
칭호신성 로마 황제
헝가리 왕
보헤미아 왕
이탈리아 왕국
로마인의 왕
크로아티아 왕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룩셈부르크 공작
출생일1368년 2월 15일
출생지신성 로마 제국, 뉘른베르크 자유 제국 도시
사망일1437년 12월 9일 (향년 69세)
사망지보헤미아 왕국, 즈노이모
매장지헝가리 왕국, 오라데아
왕가룩셈부르크 가문
아버지카를 4세
어머니엘리자베트 폰 포메른
통치
헝가리 및 크로아티아 왕 즉위1387년 - 1437년
헝가리 및 크로아티아 왕 선임마리아
헝가리 및 크로아티아 왕 계승알브레히트
헝가리 왕 대관식1387년 3월 31일, 세케슈페헤르바르
헝가리 공동 통치마리아 (1387년–1395년)
독일 왕 즉위1410년 - 1437년
독일 왕 선임루프레히트
독일 왕 계승알브레히트 2세
독일 왕 대관식1414년 11월 8일, 아헨
독일 경쟁자요스트 (1410년–1411년)
보헤미아 왕 즉위1419년 - 1437년
보헤미아 왕 선임바츨라프 4세
보헤미아 왕 계승알브레히트
보헤미아 왕 대관식1420년 7월 27일, 프라하
신성 로마 황제 즉위1433년 - 1437년
신성 로마 황제 선임카를 4세
신성 로마 황제 계승프리드리히 3세
신성 로마 황제 대관식1433년 5월 31일, 로마
결혼
배우자마리아 (1385년 결혼, 1395년 사별)
바르바라 첼레스카 (1405년 결혼)
자녀2명, 엘리자베트 폰 룩셈부르크 포함

2. 생애

지기스문트는 두 번 결혼했지만 왕위 계승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첫 번째 부인 헝가리의 마리아 여왕과의 사이에서는 아들로 추정되는 아이가 태어났으나, 마리아 여왕이 임신 후반기에 말을 타다 사고를 당해 조산으로 태어나 1395년 5월 17일 어머니와 함께 사망했다. 이는 지기스문트가 헝가리 왕위를 유지하는 데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 두 번째 부인 첼레의 바르바라와의 사이에서는 1409년 10월 7일 비셰그라드 성에서 룩셈부르크의 엘리자베트가 태어났으며, 엘리자베트는 훗날 헝가리, 독일, 보헤미아의 여왕 배우자가 되었다. 바르바라 여왕은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었기 때문에 엘리자베트는 지기스문트의 유일한 적자가 되었다.

2. 1. 초기 생애

뉘른베르크[46] 또는 프라하에서 지기스문트는 신성 로마 황제 카를 4세와 그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아내인 포메라니아의 엘리자베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녀는 폴란드 국왕 카지미르 3세의 손녀이자 리투아니아 대공 게디미나스의 증손녀였다. 그는 지기스문트의 아버지의 가장 좋아하는 성인인 부르군드의 성 지기스문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지기스문트는 어린 시절부터 머리 색깔 때문에 보헤미아 왕관령에서 "생강 여우" (''liška ryšavá'')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기스문트의 첫 번째 아내, 헝가리의 마리아 여왕 (Chronica Hungarorum, 1488)


헝가리와 폴란드의 루이 1세 대왕은 항상 카를 4세 황제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지기스문트는 그가 6살이었던 1374년에 루이의 장녀인 헝가리의 마리아 여왕과 약혼했다. 이 결혼 계획은 룩셈부르크 가문이 소유한 영토를 늘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4] 1378년 그의 아버지가 죽자, 어린 지기스문트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되었고 헝가리 궁정으로 보내졌는데, 그곳에서 그는 곧 헝가리어를 배우고 생활 방식을 익혔으며, 양아버지의 나라에 완전히 헌신하게 되었다.[26] 루이 국왕은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하고 헝가리 국왕으로 임명했다.

1381년, 당시 13세였던 지기스문트는 그의 맏형이자 후견인인 보헤미아의 벤체슬라우스 4세에 의해 크라쿠프로 보내져 폴란드어를 배우고 그 땅과 그곳의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벤체슬라우스 국왕은 또한 그에게 노이마르크를 주어 브란덴부르크와 폴란드 간의 소통을 용이하게 했다.

마리아가 헝가리의 군주로 받아들여졌지만, 지기스문트는 폴란드 왕국의 왕관을 놓고 경쟁했다. 그러나 폴란드인들은 독일 군주에게 복종하려 하지 않았고, 헝가리에 묶이는 것도 원치 않았다.[5] 폴란드 왕위를 선택하는 문제에 관해 소 폴란드의 폴란드 영주들과 대 폴란드의 영주들 사이의 의견 불일치가 마침내 리투아니아 측을 선택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대 폴란드의 영주들의 지지는 지기스문트 공에게 폴란드 왕관을 안겨주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대신, 소 폴란드의 영주들은 마리아의 여동생인 야드비가 1세에게 왕위를 주었고, 그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요가일라와 결혼했다.

지기스문트는 1368년 2월 15일, 뉘른베르크에서 신성 로마 황제카를 4세와 그의 네 번째 왕비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태어났다.[46] 이복 형 벤첼과 마찬가지로 독일어체코어를 구사하는 이중 언어 사용자로 자랐으며, 이후 프랑스어, 라틴어, 헝가리어, 이탈리아어슬라브어(아마도 폴란드어)를 배웠다.[47] 벤첼이 1378년에 보헤미아 왕위를 계승하자, 차남인 지기스문트는 형으로부터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을 물려받았다.[48] 1379년 9월에는 카를 4세와 헝가리 왕 겸 폴란드 왕러요시 1세 사이에서 러요시 1세의 딸 마리아와 지기스문트의 결혼이 합의되었지만, 마리아의 어머니 엘제베트의 반대로 인해 쉽게 실현되지 못했다.[49]

2. 2. 헝가리 왕위 계승

루이 1세는 신성 로마 황제 카를 4세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지기스문트는 1374년 6살의 나이에 루이 1세의 장녀 헝가리의 마리아 여왕과 약혼했다. 이 결혼은 룩셈부르크 가문의 영토 확장을 목표로 했다.[4] 1378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지기스문트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되었고 헝가리 궁정에서 헝가리어와 생활 방식을 배우며 헝가리에 헌신하게 되었다.[26] 루이 1세는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헝가리 국왕으로 임명했다.

1381년, 13세의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의 벤체슬라우스 4세에 의해 크라쿠프로 보내져 폴란드어를 배우고 폴란드인들과 교류했다. 벤체슬라우스 4세는 노이마르크를 주어 브란덴부르크와 폴란드 간 소통을 원활하게 했다.

1382년 마리아가 헝가리 여왕으로 즉위하자 지기스문트는 1385년 졸욤에서 그녀와 결혼했고, 이듬해 죄르 조약을 통해 마리아의 공동 통치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1387년 마리아와 섭정 보스니아의 엘리자베스는 호르바트 가문 등의 반란으로 사로잡혔다. 지기스문트의 장모는 목 졸려 죽었고, 마리아는 풀려났다.

1387년 반란을 일으킨 호르바트 가문에 맞선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의 원정 (Chronica Hungarorum, 1488)


귀족들의 지지를 얻은 지기스문트는 1387년 3월 31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했다.[6] 그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을 모라비아의 요스트에게 담보로 제공하여 자금을 마련하고, 이후 9년 동안 왕위 유지를 위한 투쟁을 벌였다.[26] 중앙 권력 약화로 지기스문트는 칠레이-가라이 동맹을 통해서만 왕좌를 유지할 수 있었다.[7] 그는 왕실 재산을 양도하여 영주들의 지지를 얻어야 했다. 가라이 가문이 그를 지지했지만, 남부 지방에서는 보스니아의 트브르트코 1세의 지원을 받은 호르바티가 나폴리의 라디슬라우스를 국왕으로 선포했다. 니콜라스 2세 가라이는 1395년이 되어서야 그들을 진압했다.[26] 마리아는 1395년 임신 말기에 사망했다.

헝가리 귀족들의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지기스문트는 외국인 고문을 고용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헝가리 귀족 외에는 토지와 임명을 주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그러나 슈티보르 드 슈티보지치는 예외였다. 지기스문트는 여러 차례 귀족들에게 투옥되었지만, 가라이와 슈티보르의 도움으로 권력을 되찾았다.

앙주 왕가 출신의 러요시 1세는 동유럽에 "대 앙주 제국"을 구축했지만, 아들이 없이 1382년 사망했다. 러요시 1세는 차녀 마리아와 지기스문트를 결혼시켜 양국의 공동 통치자로 삼으려 했으나, 폴란드 귀족들은 동군 연합을 해소하고 야드비가를 여왕으로 추대했다. 룩셈부르크 왕가는 폴란드의 숙적인 독일 기사단의 지원자였기 때문이다. 야드비가가 1386년 리투아니아 대공브와디스와프 2세와 결혼하면서[50] 헝가리와의 동군 연합은 단절되었다.

헝가리에서도 왕위 계승 혼란이 있었다. 마리아가 헝가리 왕위를 계승하고, 어머니 엘리자베타는 마리아와 오를레앙 공작루이 1세와의 결혼을 추진했지만, 반란이 일어났다. 지기스문트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을 담보로 헝가리에 파병하여 반란을 진압하고,[51] 1385년 9월 말 오펜에서 마리아와 결혼했다.[52] 그러나 이 결혼에 찬성한 헝가리 귀족은 라츠키 가문 등 극소수였고, 가라이 가문과 호르바티 가문 등 대부분의 대귀족은 반대했다. 호르바티 가문은 나폴리 왕카를로 3세를 왕으로 추대했고, 카를로는 헝가리 왕 카로이 2세로 즉위했다. 지기스문트 측으로 돌아선 부왕 가라이 미클로시와 엘제베트는 공투하여 1386년 2월 7일에[53] 카로이 2세를 살해했다. 호르바티 가문은 라디슬라오를 새 왕으로 세우려 했고, 마리아 일행을 습격하여 가라이를 살해하고 엘제베트를 옥사시켰으며, 마리아를 유폐했다.

가라이 가문과 호르바티 가문은 화해했고, 마리아는 석방되었지만, 지기스문트는 대귀족과 동맹하여 통치해야 했으며, 이를 어길 시 대귀족의 무력 행사도 인정받았다(공식적 동맹). 할리치도 폴란드에 빼앗겼다. 1387년 3월 31일,[54] 지기스문트는 헝가리 왕으로 즉위했지만,[55][56] 나폴리 왕가와의 항쟁은 계속되었다.

1388년, 브란덴부르크는 요프스트에게 넘어갔다.[57]

2. 3. 니코폴리스 십자군

1396년, 지기스문트는 헝가리의 일시적인 무력 상태를 틈타 다뉴브강 유역까지 세력을 확장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기독교 연합군을 이끌었다. 교황 보니파시오 9세가 선포한 이 십자군은 헝가리에서 매우 인기가 높았다. 수많은 귀족들이 왕실 깃발 아래로 몰려들었고,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의 아들인 무두(무서운)공 요한이 이끄는 프랑스 왕국에서 온 지원군을 포함하여 유럽 거의 모든 지역에서 온 자원병들이 합류했다. 지기스문트는 9만 명의 병력과 70척의 갤리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비딘을 점령한 후, 그는 니코폴리스 요새 앞에서 헝가리 군대와 함께 야영했다. 술탄 바예지드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전을 중단하고 1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1396년 9월 25일부터 28일 사이에 벌어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기독교 군대를 완전히 격파했다.[26] 지기스문트는 바다를 통해 제타 공국을 거쳐 귀환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투르크에 대항하기 위해 지역 몬테네그로인 영주 주라지 2세에게 흐바르섬코르출라섬을 하사했다. 이 섬들은 1403년 4월 주라지의 사망 후 지기스문트에게 반환되었다.

헝가리 왕이 된 지기스문트의 과제는 발칸 반도에서 팽창하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대처였다. 오스만 제국의 헝가리 침입은 라요시 1세 시절부터 시작되었지만(라요시는 1375년에 오스만군을 격파했다), 1389년에 즉위한 바예지드 1세 치하에서 기세를 더했다.[58] 오스만 제국의 침공에 대해 지기스문트는 국내외에 호소했고, 교황보니파시오 9세도 십자군[칙서]]를 발행하여 후원했다. 이 사이에 마리아의 죽음이라는 비운을 맞았지만(1395년[59]),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프랑스 왕국, 신성 로마 제국 제후, 플랑드르, 이베리아 반도, 폴란드, 보헤미아 왕국, 왈라키아 공국 등에서 잇달아 장병들이 모였다.

대 오스만 전을 잘 아는 지기스문트는 부다에 오스만 군을 끌어들여 소모시키는 안을 제시했지만, 혈기에 들뜬 부르고뉴 공국장(무공포공)이 예루살렘 해방의 대의를 내세우는 것에 밀려 적극적인 공격책을 채택하게 되었다. 이렇게 10만 명이 넘는 군세가 출격했지만, 가톨릭 교회를 받드는 서유럽 기사와 동방 정교회를 받드는 발칸 전사 간의 갈등, 구태의연한 기사 돌격 전법이 화가 되어 1396년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바예지드 1세에게 대패했다. 무공포공은 포로가 되었고, 지기스문트는 간신히 도망쳤다. 그 후 바예지드 1세가 1402년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패배하면서, 유럽은 당분간 오스만의 위협에서 해방되었다.

2. 4. 헝가리 내정 개혁

1387년 3월 31일, 귀족들의 지지를 확보한 지기스문트는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했다.[6] 그러나 중앙 권력은 약화되었고, 그는 칠레이-가라이 동맹과의 연대를 통해서만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7] 지기스문트는 왕실 재산을 양도하여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야 했다.[26] 가라이 가문이 그를 지지했지만, 사바 강과 드라바 강 사이의 남부 지방에서는 나폴리의 라디슬라우스가 헝가리 왕으로 선포되었다. 1395년이 되어서야 니콜라스 2세 가라이가 이들을 진압했다.[26]

헝가리 귀족들의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지기스문트는 외국인 고문들을 고용하려 했으나 인기가 없었다. 그는 헝가리 귀족 외에는 누구에게도 토지와 임명을 주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 슈티보르 드 슈티보지치는 예외였다. 지기스문트는 여러 차례 귀족들에게 투옥되었지만, 가라이와 슈티보르 드 슈티보지치의 도움으로 권력을 되찾았다.

1401년 헝가리로 돌아온 지기스문트는 투옥되었다가 폐위되기도 했다. 그해 바츨라프 4세에 대항하는 봉기를 도왔고, 19개월 동안 보헤미아를 통치했다. 1403년에는 헝가리 귀족들이 나폴리의 라디슬라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라디슬라우스는 1403년에 자다르를 점령했지만 곧 군사적 진격을 멈췄다. 이 투쟁은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졌고, 라디슬라우스는 달마티아 도시 국가를 베네치아인들에게 팔았다.[26]

지기스문트는 전임자보다 더 자주 헝가리에서 국회를 소집해야 했고, 자신이 부재하는 동안 수석 행정관인 팔라틴 직책을 제도화해야 했다. 1404년에는 "국왕의 동의"를 도입하여, 교황 칙서는 국왕의 동의 없이 헝가리에서 선포될 수 없도록 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왕실 부다 성은 후기 중세 시대의 가장 큰 고딕 양식 궁전이 되었다.

1406년경, 지기스문트는 첼레의 바르바라와 결혼했다. 1408년 도보르 전투에서 보스니아인을 공격하여 승리한 후, 자신의 기사단인 드라곤 기사단을 창설했다.[9][10] 이 기사단의 주요 목표는 오스만 제국과 싸우는 것이었다. 그는 국내 관세를 폐지하고, 외국 상품에 대한 관세를 규제하며, 전국적으로 무게와 척도를 표준화하여 국제 무역을 장려했다.

1412년, 부다에서 기사 토너먼트가 열렸고,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 폴란드 왕 블라디슬라프 2세, 보스니아 왕 트브르트코 2세 사이의 회담이 있었다.

니코폴리스 전투에서의 대패로 지기스문트의 위신은 떨어졌고, 그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다.[60] 귀국 후 지기스문트는 십자군의 패인을 국내의 구습에 있다고 보고 개혁을 실시했다. 그는 대귀족에 대항하기 위해 국내외의 유능한 인물을 등용하여 신귀족을 육성했다. 1401년에 부다 성에 감금되기도 했지만, 지지자들에 의해 구출되었고, 모반자들에게 관대한 처분을 함으로써 인망을 얻었다. 1402년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브레히트 4세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대귀족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다시 라디슬라우를 추대하려고 했다. 지기스문트는 반란을 진압하고 관용을 보여 대귀족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1405년경 (1408년이라고도 함[60]), 첼레 백작 헤르만 2세의 딸 바르바라 첼리스카와 재혼했다.[61][62] 이 결혼으로 지기스문트의 왕위 정통성이 보강되었고, 첼레 지방에 세력 기반을 구축하여 국내 불만이 누그러졌다.[63] 1408년에는 드래곤 기사단을 창설했다.[65]

지기스문트는 대귀족·고위 성직자를 봉쇄하기 위해, 1404년에 국왕 동의권 칙령으로 교황의 고위 성직자 서임권을 박탈했다. 1417년에는 헝가리 왕이 주교대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권리를 교황으로부터 승인받았다. 또한, 국왕 자문 회의에 "특별 고문관"을 설치하고, 관료를 국정에 참여시켰으며, 도시에 특권을 부여하는 등 강화를 도모했다.

2. 5. 신성 로마 황제 즉위와 서방 교회 분열 해결

1410년 독일의 루페르트 국왕이 사망한 후, 지기스문트는 이복 형제인 벤체슬라우스의 주장을 무시하고, 1410년 9월 20일 3명의 선제후에 의해 후계자로 선출되었다.[66] 그러나 그의 사촌인 모라비아의 요스트가 1410년 10월 1일에 다른 선거에서 4명의 선제후에 의해 선출되면서 반대에 직면했다.[66] 1411년 1월 18일 요스트가 사망하면서 이 갈등이 해소되었고, 지기스문트는 1411년 7월 21일 다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67] 그의 대관식은 1414년 11월 8일까지 연기되었으며, 아헨에서 거행되었다.

지기스문트는 로마 교황을 보호함으로써 황제 권력의 강화를 목표로 했다.[68] 당시 로마 교회는 복잡한 대립으로 분열되어 있었지만(교회 분열), 지기스문트는 1414년콘스탄츠 공의회를 개최하여 로마 교회의 재통일을 이루었다.[68][69] 그는 대립교황 요한 23세의 어려움을 틈타 1414년 콘스탄츠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서방 분열을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그는 이 회의의 심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공의회가 진행되는 동안 세 명의 경쟁 교황의 퇴위를 확보하려는 헛된 시도로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 부르고뉴 왕국을 여행했다. 공의회는 1418년에 끝나 서방 분열을 해결했으며, 체코인 종교 개혁가인 얀 후스를 1415년 7월 이단으로 화형에 처했다. 후스의 죽음에 대한 지기스문트의 연루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는 후스에게 안전 통행증을 부여하고 그의 투옥에 반대했지만,[26] 후스는 지기스문트가 부재한 동안 화형에 처해졌다.

공의회 중에 한 추기경이 지기스문트의 라틴어를 수정하자, 지기스문트는 "Ego sum rex Romanus et super grammaticam"(나는 로마의 왕이며 문법 위에 있다)라고 대답했다.[12] 토마스 칼라일은 지기스문트에게 "Super Grammaticam"이라는 별명을 붙였다.[13][14]

이 기간 동안 그의 주요 행위는 프랑스에 대항한 잉글랜드와의 동맹, 그리고 제후들의 적대감으로 인해 도시들의 동맹을 통해 독일의 평화를 확보하려는 실패한 시도였다.[26] 또한 지기스문트는 1415년 요스트가 죽은 후 회복한 브란덴부르크를 뉘른베르크의 부르크그라프인 호엔촐레른의 프리드리히에게 수여했다. 이 조치는 호엔촐레른 가문을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가문 중 하나로 만들었다.

지기스문트는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후 동맹을 프랑스에서 잉글랜드로 전환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와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1세 왕과 함께 페르피냥에서 유사 공의회를 주최하느라 이 전투에 논란이 많게도 불참했다. 1416년 8월 15일 캔터베리 조약의 서명은 잉글랜드의 헨리 5세와 지기스문트 간의 외교적 노력을 절정에 달하게 했으며, 프랑스에 대한 방어 및 공격 동맹으로 이어졌다. 이는 결국 서방 분열의 해결로 이어졌다.[15] 헨리 5세와 지기스문트 사이에 발전한 긴밀한 관계는 그가 가터 훈장에 서임되는 결과로 이어졌다.[16]

2. 6. 보헤미아 왕위 계승과 후스 전쟁

로마 왕 벤체슬라우스 4세가 1419년에 사망하면서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체코인 신분제 의회는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17년 후에야 인정받았다.[26] 지기스문트는 헝가리 왕으로서 권위를 확립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보헤미아 통치는 바이에른의 소피아에게 맡기고 헝가리로 돌아갔다.[26]

얀 후스를 배신한 것에 대한 불신으로 보헤미아인들은 곧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지기스문트가 이단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후스파에 대한 세 차례의 원정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충실한 동맹인 슈티보르 폰 슈티보르지츠와 그의 아들 베코프의 슈티보르는 후스파가 왕국 국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도록 막았다. 이 혼란을 틈타 터키는 다시 헝가리를 공격했다.

1422년 뉘른베르크 국회에서 지기스문트와 독일 영방 군주들은 후스파 반군에 맞서 두 개의 군대를 조직하기로 합의했다. 첫 번째 군대는 카를슈테인을 구출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두 번째 군대는 후스파 야전군을 격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얀 지슈카는 쿠트나 호라 전투와 네메츠키 브로트 전투에서 제국군을 격파하여, "보헤미아 '이단 반란'을 진압하려는 첫 번째 제국 및 가톨릭의 시도"는 종식되었다.[17]

후스파에 맞선 동맹은 계속 발전하여, 1424년 1월에는 빙겐 동맹('einunge')이 결성되었다. 이 동맹에는 라인란트 군주들, 작센 선제후, 브란덴부르크의 프리드리히 변경백 등이 참여하여 후스파의 위협에 대한 상호 지원, 재판, 협력을 규정했다.[18]

보헤미아 국민들에게 존경받던 기독교 개혁파이자 후스파(프로테스탄트)의 선구자인 얀 후스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70] 지기스문트는 공의회 중 그의 신변 안전을 보장했던 약속을 어기고 후스를 화형에 처했다.[71][72] 이로 인해 보헤미아 국민들은 지기스문트에게 불만을 품게 되었고, 이복형 벤체슬라우스가 1419년에 사망하고 지기스문트가 보헤미아 왕위를 계승하자 불만이 폭발하여 대규모 반란, 즉 후스 전쟁이 일어났다.[73]

지기스문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여러 차례 보헤미아에 군대를 파견하고, 교황과 함께 대 후스파 십자군을 소집했지만, 얀 지슈카가 지휘하는 시민군에게 번번이 패배했다.

지기스문트가 보헤미아 왕위를 획득하면서 헝가리에도 후스 전쟁이 확산되었다. 1432년 보헤미아 국경 지대에서 농민 반란을 시작으로, 나지엔틀뢰, 트란실바니아에서 잇따라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교황은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마르키아의 야코부스를 이단 심문관으로 파견하여 탄압했고, 탄압받은 후스파는 몰다비아로 도망쳐 후스파 성서를 번역했다. 후스 전쟁은 1434년 보헤미아에서 수습되었지만, 급진파(타보르파) 잔당은 헝가리 북부, 특히 슬로바키아로 도망쳐 얀 이스크라의 지휘 아래 흑위군이라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지기스문트는 군사적 해결 대신 정치적 해결을 시도했지만, 정치 개혁과 외교 모두 실패하여 황제로서의 위신을 잃었다.

2. 7. 말년

1428년, 지기스문트는 다시 한 번 투르크에 대항하는 원정을 이끌었지만, 결과는 미미했다. 1431년, 그는 밀라노로 가서 11월 25일 철관을 수여받아 이탈리아 왕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잠시 시에나에 머물면서, 황제 대관식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바젤 공의회를 인정하도록 협상했다. 1433년 5월 31일 로마에서 황제로 즉위했고, 교황으로부터 요구를 얻어낸 후 보헤미아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1436년에 왕으로 인정받았지만 그의 권력은 명목상에 불과했다.[26] 그는 즉위한 직후 교황 에우제니오는 새로운 반 오스만 동맹을 결성하려 했다.[23] 1435년, 지기스문트는 불가리아 귀족 프루진을 알바니아인과의 동맹을 협상하기 위해 보냈다. 그는 또한 1436년 초에 오스만 제국의 왕위 요구자인 다우드를 보냈다.[24] 그러나 1436년 반란군이 패배한 후, 반 오스만 동맹 계획은 종료되었다.[24]

지기스문트는 1437년 12월 9일 즈노이모( Znaimde ), 모라바(현재 체코)에서 사망했으며, 생전에 명령한 대로 헝가리 왕국의 나지바라드(오늘날 오라데아, 루마니아)에 묻혔다.[25] 그는 두 번째 부인인 체예의 바르바라와의 사이에서 외동딸 룩셈부르크의 엘리자베스를 남겼는데, 그녀는 오스트리아 공작 알베르트 5세와 결혼했고(후에 독일 왕 알베르트 2세), 지기스문트는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는 아들이 없어 그의 룩셈부르크 가문의 계보는 그의 죽음으로 끊어졌다.[26] 1433년 5월 31일에 로마 황제로 즉위했으며,[74] 1436년에는 보헤미아 귀족에 의해 정식으로 보헤미아 왕위를 인정받았지만, 이듬해인 1437년 즈노이모에서[35][75]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가들을 뒤로 한 채 노인성 악성 골격 궤양으로 사망했다.[76] 지기스문트의 죽음으로 룩셈부르크 가문의 남계 남자는 끊어졌다. 로마 황제, 헝가리 왕위, 보헤미아 왕위는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5세(로마왕 (독일왕) 알브레히트 2세, 헝가리 이름 알베르트)가 계승했다. 알브레히트 5세는 지기스문트의 외동딸 엘리자베트의 사위였으며, 또한 한때 후계자로 지명했던 알브레히트 4세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알브레히트는 2년 뒤인 1439년에 병사했고, 로마 황제, 헝가리 왕, 보헤미아 왕은 각각 다른 자가 추대되었다.

3. 유산 및 평가

지기스문트는 헝가리어에 능통했고, 헝가리식 왕족 의상을 입고 헝가리식으로 수염을 길렀다고 알려져 있다.[27] 그는 부다와 비셰그라드의 고딕 양식 성을 재건하는 데 막대한 돈을 썼으며,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에서 자재를 운송하라고 명령했다.[29]

그의 여성 관계는 여러 전설을 낳았는데, 그 중 하나는 마차시 코르비누스 치세 수십 년 후에 나온 후녀디 야노시가 지기스문트의 사생아였다는 것이다. 지기스문트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소년의 어머니에게 반지를 주었지만, 어느 날 숲에서 까마귀가 그녀에게서 반지를 훔쳐갔고, 그 반지는 그 새를 사냥한 후에야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사건은 후녀디의 문장, 그리고 나중에는 마차시 "코르비누스"의 문장에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30]

지기스문트는 당시 이상적인 기독교 기사로 여겨졌던 성 러슬로 1세를 존경하여 그의 무덤에 여러 번 순례를 갔다. 그는 죽기 전에 즈나임, 모라바에서 왕의 성인 옆에 묻히라고 명령했다.[31]

지기스문트는 젊은 시절부터 낭비가 심했고, 자신의 성을 귀족에게 주는 등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이었다고 한다.[55] 또한 태연하고 가차 없는 성격이었다고도 한다.[56] 그의 헝가리 통치는 러요시 1세의 유산을 모두 탕진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오스만 제국 대책을 소홀히 한 것은 후세에 비난받았고, 현대에도 헝가리에서의 평가는 낮다. 하지만 러요시 1세의 통치 자체가 이미 불안정한 것이었으며, 그 탓을 지기스문트가 치르게 된 것도 사실이다.

헝가리에서 대귀족에 대항하기 위해 등용한 신귀족 중에서 후녀디 야노시가 나타났다. 후녀디는 왈라키아 출신이지만, 지기스문트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있었다. 후녀디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활약했고, 그의 아들 후녀디 마차시 치하에서 헝가리는 짧은 번영을 맞이했다.

지기스문트는 끈기 있는 외교를 통해 교회의 통일을 실현할 수 있었던 점이 그의 업적이다.[77][76] 부르크하르트는 그를 "6개월 이상 시에나 시에서 마치 빚을 갚지 못해 감옥에 갇힌 사람처럼 앉아 있었고, 겨우 로마에서 대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완전한 사기꾼"이라고 혹평했다.[78]

3. 1. 헝가리

헝가리의 지기스문트 왕 (Nádasdy Mausoleum, 1664)


1412년, 부다에서 기사 토너먼트가 열렸는데, 이는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 폴란드 왕 블라디슬라프 2세, 보스니아 왕 트브르트코 2세 사이의 회담이기도 했다. 유럽 전역, 심지어 잉글랜드에서 온 2,000명의 기사들이 참석했다. 헝가리 부다 궁정에는 많은 공작, 영주, 기사 및 하인들이 있었다. 세 명의 왕과 세 명의 다른 군주, 세르비아의 데스폿, 13명의 헤르조크 및/또는 공작, 21명의 백작, 2,000명의 기사, 1명의 추기경, 1명의 교황 사절, 3명의 대주교, 11명의 다른 주교, 86명의 연주자와 나팔수, 17명의 메신저, 40,000마리의 말이 있었다. 17개 국가와 언어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다. 회담 참석자들의 추정되는 동시대 목록도 남아 있다. 주최자인 지기스문트와 그의 주요 손님인 블라디슬라프 2세 외에도, 이 텍스트는 블라디슬라프의 사촌인 리투아니아 대공 비타우타스, 그리고 일반적으로 트브르트코 2세로 알려진 보스니아 왕을 언급한다. 일부는 당시 부다를 방문한 사람이 트브르트코 2세가 아니라 슈테판 오스토야라고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왕 외에도 흐르보예 브크치치 흐르바티니치, 산달 흐라니치 코사차와 파블레 라디노비치도 보스니아에서 왔으며, 세르비아에서는 데스폿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2,000마리의 말을 이끌고 왔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공작 에른스트 (철인)와 지기스문트의 후계자인 알베르트 2세가 부다 회담에 참여했다. 또한 하인리히 폰 플라우엔, 튜턴 기사단총장, 슈티보르 오브 슈티보르지, 니콜라 2세 고르얀스키, 첼레의 헤르만 2세 백작과 그의 아들 프레데리크 2세, 크르바바 백작-카를로 쿠르야코비치, 마치바의 이반 모로비치-반 등이 있었다. 얀 드우고슈는 톡타미시의 아들이자 골든 호드의 칸인 잘랄 알딘의 사신이 부다에 도착하여 폴란드 블라디슬라프 2세를 만나고 싶어했다고 보고한다. 잘랄 알딘은 튜턴 기사단에 대항하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통치자들의 동맹이었으며, 사건의 일부 재구성에 따르면 지기스문트는 또한 오스만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타타르족에 의존하려 했다. 뤼베크에서 온 한 서술 자료는 또한 1412년 부다에서의 진행 상황을 언급한다. Detmar's Lübeckische Chronik은 1400년부터 1413년까지의 기간을 다루었다. 이 연대기 또한 부다 회담 참석자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제공한다. 왕의 회담에는 축제와 다양한 엔터테인먼트가 동반되었다. 토너먼트에서는 슐레지엔의 기사 네므셰와 오스트리아 출신의 시종이 마상 시합에서 우승했다. 얀 드우고슈는 그의 "Annales seu cronici incliti regni Poloniae"에서 토너먼트에 지기스문트의 봉신이자 회담에 참석했던 프루진 공작의 궁정에서 온 불가리아 기사들도 있었다고 말한다.

후녀디 야노시의 문장


지기스문트는 유창한 헝가리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헝가리식 왕족 의상을 입고 헝가리식으로 수염을 길렀다.[27] 그는 헝가리 왕국에서 부다와 비셰그라드의 고딕 양식 성을 재건하는 데 통치 기간 동안 막대한 돈을 썼으며,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에서 자재를 운송하라고 명령했다.[29]

그의 많은 여성 관계는 여러 전설을 낳았는데, 그 중 하나는 헝가리 왕 마차시 코르비누스 치세 수십 년 후에 존재했다. 이에 따르면 후녀디 야노시는 지기스문트의 사생아였다. 지기스문트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소년의 어머니에게 반지를 주었지만, 어느 날 숲에서 까마귀가 그녀에게서 반지를 훔쳐갔고, 그 반지는 그 새를 사냥한 후에야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사건은 후녀디의 문장을, 그리고 나중에는 마차시 "코르비누스"의 문장에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30]

지기스문트는 당시 이상적인 기독교 기사로 여겨졌던 성 러슬로 1세에 대한 헝가리의 존경을 받아들였다. 그는 나지바라드의 그의 무덤에 여러 번 순례를 갔다. 지기스문트는 죽기 전에 즈나임, 모라바에서 왕의 성인 옆에 묻히라고 명령했다.[31]

지기스문트의 혈통은 세 명의 공주를 통해 헝가리의 왕가인 아르파드 왕조와 연결된다.

지기스문트는 젊은 시절부터 낭비가 심했고, 자신의 성을 귀족에게 주는 등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이었다고 한다.[55] 또한 태연하고 가차 없는 성격이었다고도 한다.[56] 지기스문트의 헝가리 통치는 러요시 1세의 유산을 모두 탕진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오스만 제국 대책을 소홀히 한 것은 후세에 비난받았고, 현대에도 헝가리에서의 평가는 낮다. 하지만 러요시 1세의 통치 자체가 이미 불안정한 것이었으며, 그 탓을 지기스문트가 치르게 된 것도 사실이다.

헝가리에서 대귀족에 대항하기 위해 등용한 신귀족 중에서 후녀디 야노시가 나타났다. 후녀디는 왈라키아 출신이지만, 지기스문트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있었다. 이윽고 후녀디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활약했고, 그의 아들 후녀디 마차시 치하에서 헝가리는 짧은 번영을 맞이했다.

3. 2. 신성 로마 제국

지기스문트의 독일 및 제국 통치는 독일 왕국 내에서 그의 완전한 ''하우스마흐트''(국내 권력) 부재로 인해 방해를 받았다.[19][20]

그의 통치는 핵심 동맹국과 독일의 연관된 정치 메커니즘 문화에 의존했다. 던컨 하디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기스문트 통치 기간 동안 출처에서 나타나는 정치 활동의 지역적 및 초지역적 측면 모두가 제국의 모든 수준에서 권력이 연관된 정치 문화의 관습적인 제도와 메커니즘을 통해 행사되고 중재되었음을 보여준다. 지기스문트가 특정 시점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은 이러한 제도와 메커니즘에도 불구하고 또는 독립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관된 상호 작용을 활용하고 엘리트 네트워크 내의 주요 행위자들과 전략적 관계를 구축하는 데 상당한 에너지를 쏟았기 때문이다. 제국의 핵심 영토에서 장기간 부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기스문트는 이러한 파트너십을 활용할 수 있었고, 제후, 귀족, 도시의 연관 활동이 결과를 낳을 것으로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었다. 실제로 1410년대에는 오스트리아-티롤의 프리드리히 4세 공작에 대항하는 대규모 집단 활동의 형태로, 1420년대에는 후스파에 대항하는 대규모 집단 활동의 형태로 나타났다. 지기스문트의 모든 계획이 결실을 맺은 것은 아니며, 그는 자신의 정책의 장기적인 결과를 항상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왕 없는 제국'의 단계가 있었다는 개념은 그가 지역 고객 및 연합과의 상호 작용에 대한 풍부한 증거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성립되지 않는다. 동시에, 최근 몇 년 동안 지기스문트를 뛰어난 정치인으로 보는 다소 아첨적인 시각은 그의 성공을 가능하게 한 것은 개인적인 기술만큼이나 행운의 동맹이었다는 증거에 의해 완화될 수 있다."

지기스문트와 독일의 두 핵심 동맹국, 즉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와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히트(지기스문트의 유일한 딸 룩셈부르크의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을 통해 사위이자 상속자가 되었다) 간의 동맹은 호엔촐레른 가문의 부상을 시작했고 합스부르크 왕가를 재건했다(합스부르크 왕가는 독일 왕좌로 돌아왔으며, 지기스문트로부터 헝가리, 크로아티아, 보헤미아와의 관계도 상속받았다).[21][22]

지기스문트는 끈기 있는 외교를 통해 교회의 통일을 실현할 수 있었던 점이 그의 업적이다.[77][76] 물론, 부르크하르트는 "6개월 이상 시에나 시에서 마치 빚을 갚지 못해 감옥에 갇힌 사람처럼 앉아 있었고, 겨우 로마에서 대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완전한 사기꾼"이라고 혹평했다.[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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