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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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랭크 쉴즈는 1930년대 세계 랭킹 2위까지 올랐던 미국의 테니스 선수이다. 1930년 US 오픈과 1931년 윔블던에서 준우승을 차지했고, 1933년에는 USLTA 랭킹 1위에 오르기도 했다. 1935년에는 영화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1951년에는 데이비스 컵 미국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쉴즈는 1964년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1975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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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랭크 쉴즈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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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이름 | 프랜시스 사비에르 알렉산더 쉴즈 시니어 |
| 국적 | (미국) |
| 출생일 | 1909년 11월 18일 |
| 출생지 | 미국 뉴욕 시 |
| 사망일 | 1975년 8월 19일 |
| 사망지 | 미국 뉴욕 |
| 키 | (정보 없음) |
| 플레이 스타일 | 오른손 (단한손 백핸드) |
| 프로 전향 | 1926년 (아마추어 투어) |
| 은퇴 | 1955년 |
| 커리어 통계 | |
| 통산 상금 | (정보 없음) |
| 단식 통산 전적 | 214승 114패 |
| 단식 타이틀 | 31회 |
| 복식 통산 전적 | (정보 없음) |
| 복식 타이틀 | (정보 없음) |
| 혼합 복식 타이틀 | (정보 없음) |
| 데이비스 컵 | 결승 (1932년) |
| 그랜드 슬램 단식 성적 | |
| 호주 오픈 | (정보 없음) |
| 프랑스 오픈 | 4라운드 (1933년) |
| 윔블던 | 준우승 (1931년) |
| US 오픈 | 준우승 (1930년) |
| 최고 단식 랭킹 | 2위 (1931년) |
| 그랜드 슬램 복식 성적 | |
| 호주 오픈 복식 | (정보 없음) |
| 프랑스 오픈 복식 | (정보 없음) |
| 윔블던 복식 | 준결승 (1931년) |
| US 오픈 복식 | 준우승 (1933년) |
| 최고 복식 랭킹 | (정보 없음) |
| 그랜드 슬램 혼합 복식 성적 | |
| 호주 오픈 혼합 복식 | (정보 없음) |
| 프랑스 오픈 혼합 복식 | (정보 없음) |
| 윔블던 혼합 복식 | (정보 없음) |
| US 오픈 혼합 복식 | 준우승 (1930년) |
| 기타 정보 | |
| 테니스 명예의 전당 헌액 연도 | 1964년 |
| 테니스 명예의 전당 ID | frank-shields |
2. 테니스 경력
프랭크 쉴즈는 1926년 전미 선수권 대회부터 1951년 US 내셔널 선수권 대회까지 선수 경력 동안 여러 차례 4대 메이저 대회에 출전하여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1930년 전미 선수권 대회에서 그는 첫 4대 메이저 대회 남자 단식 결승에 진출했다. 상대 선수인 존 도그는 왼손잡이의 강력한 서브를 무기로 하는 선수였다. 3세트 종료 시점에서 도에그가 세트 스코어 2-1(게임 스코어: 쉴즈 시점에서 8-10, 6-1, 4-6)로 앞서나간 후, 4세트에서 쉴즈가 게임 스코어 14-13으로 세트 포인트를 잡았다. 여기서 도에그가 서브로 역전하여 쉴즈는 4세트를 14-16으로 내주면서 준우승을 하였다.
이듬해 1931년 윔블던 선수권 대회에서 쉴즈는 장 보로트라와의 준결승 도중 잔디에서 미끄러져 발목을 다쳤다. 보로트라에게 승리하여 윔블던 결승 진출을 확정했지만, 발목 부상으로 인해 시드니 우드와의 결승전에 출전할 수 없게 되었다. 윔블던 남자 결승이 "부전승"으로 끝난 것은, 전후를 통틀어 1931년 단 한 번뿐이다.
1933년 전미 선수권 대회에서 단식 4강에 진입했고, 남자 복식 준우승을 기록했다. 단식 준결승에서 잭 크래포드에게 패했지만, 4회전에서 일본의 후이 료스케를 꺾었다. 쉴즈가 일본인 남자 선수와 대결한 것은 이 경기가 유일하다. 남자 복식에서는 프랭크 파커와 조를 이루어 결승에 진출했지만, 조지 로트 & 레스터 스토펜 조에게 패했다. 결국, 쉴즈는 4대 메이저 대회에서 남자 단식 2번, 남자 복식 1번의 준우승에 머물렀다.
1935년 전미 선수권 대회 8강에서 프레드 페리에게 패한 후, 쉴즈는 잠시 테니스계를 떠나 할리우드 영화 배우로 전향했다. 1938년부터 다시 테니스 선수로 돌아와 전미 선수권 대회에 복귀했다.
1950년 US 오픈 혼합 복식 대회에 진저 로저스와 함께 출전했지만 1라운드에서 탈락했고, 1951년 US 내셔널 선수권 대회 1라운드에서는 시드 레비에게 패했다.
2. 1. 전성기
쉴즈는 1928년과 1945년 사이에 USLTA에 의해 미국 10위 안에 8번이나 랭크되었으며, 1933년에는 1위, 1930년에는 2위에 올랐다.[2] 1931년에는 멜버른 헤럴드의 노엘 딕슨에 의해 세계 랭킹 2위에 올랐고,[3] 1930년에는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A. 윌리스 마이어스에 의해 세계 랭킹 5위에 올랐다.[4]1928년 1월, 쉴즈는 몬트리올 실내 테니스 클럽에서 열린 캐나다 실내 코트 선수권 대회에서 조지 로트에게 준우승했는데, 준결승에서 캐나다 1위인 잭 라이트 박사를 5세트 접전 끝에 꺾었다. 1929년 캐나다 오픈 선수권 대회에서는 결승에서 라이트 박사에게 패하며 준우승했다. 같은 해 US 내셔널 테니스 선수권 대회 3라운드에서 빌 틸든에게 패했지만, 다음 시즌인 1930년 사우스햄튼 인비테이션 8강전에서 틸든을 꺾으며 설욕했다.
1930년 US 챔피언십 결승에서 존 도그에게 패하기 전까지 윌머 앨리슨과 시드니 우드를 꺾었다.[5] 1931년 윔블던 단식 결승에서는 장 보로트라를 상대로 준결승에서 승리하는 과정에서 발목 부상을 입어 시드니 우드에게 기권했는데, 이는 그랜드 슬램 이벤트 역사상 단식 결승이 기권으로 승리한 유일한 경우였다.
1933년은 쉴즈의 최고의 시즌으로, 9개의 토너먼트에서 우승했다. 1월에 캐나다 실내 코트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J. 길버트 홀을 꺾고 우승했다. 같은 해 프랑스 선수권 대회 4라운드에 진출하여 크리스티안 부스에게 패했다. 윔블던 기간 동안 쉴즈는 뉴욕주 퀸스 잭슨 하이츠에서 열린 이스턴 클레이 코트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결승에서 J. 길버트 홀에게 준우승했다. 사우스햄튼 인비테이션(롱 아일랜드)에서는 비치 그랜트를 준결승에서, 프랭크 파커를 결승에서 모두 3세트 스트레이트로 꺾고 우승했다. 뉴포트 카지노 인비테이셔널에서는 엘스워스 바인스를 준결승에서, 윌머 앨리슨을 결승에서 꺾고 우승했다. 그린브리어 리조트에서 열린 메이슨 & 딕슨 선수권 대회에서는 그레고리 망긴을 4세트 만에 꺾고 우승했다.
1933년 US 선수권 대회에서 쉴즈는 바인스 다음으로 2번 시드를 받았다. 바인스는 4라운드에서 그랜트에게 패했고, 쉴즈는 준결승에 진출하여 잭 크로포드에게 패했다. 쉴즈는 USLTA 공식 랭킹에서 1933년 미국 1위,[6] 버나드 브라운에 의해 바인스보다 앞선 세계 5위에 랭크되었다.[7]
1934년 쉴즈는 캐나다 실내 코트 선수권 타이틀을 방어하여 J. 길버트 홀을 준결승에서, 조지 로트를 결승에서 꺾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파인허스트 컨트리 클럽에서 열린 유나이티드 노스 & 사우스 토너먼트에서 앨리슨을 결승에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8] 그린브리어 리조트에서 열린 메이슨 & 딕슨 타이틀을 방어하여 그랜트를 결승에서 꺾었다. 퀸스 클럽 선수권 대회 결승에 진출하여 시드니 우드에게 패했다. 윔블던에서는 준결승에 진출하여 크로포드에게 패했다.
1935년 쉴즈는 오자이 테니스 토너먼트에서 진 마코를 결승에서 꺾고 우승했다. 1937년에는 샌디에고에서 열린 호텔 드 코로나도[9] 토너먼트에서 잭 티드볼을 결승에서 꺾고 우승했다.
1926년 전미 선수권 대회부터 1951년 US 내셔널 선수권 대회까지 꾸준히 대회에 출전한 쉴즈는 1930년 전미 선수권 대회에서 첫 그랜드 슬램 남자 단식 결승에 진출했다. 존 도그와의 결승전에서 접전 끝에 패배했고, 윔블던에서는 결승전에서 부상으로 기권하는 불운을 겪었다. 1933년 전미 선수권 대회에서는 단식 4강, 남자 복식 준우승을 기록했다. 쉴즈는 데이비스 컵 미국 대표 선수로도 1931년, 1932년, 1934년 세 차례 출전했다.
2. 2. 데이비스 컵
그는 1931년, 1932년, 1934년에 데이비스 컵에 출전하여 25경기 중 19경기에서 승리했다. 1933년에는 그해 미국 랭킹 1위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불안정한" "경기력"을 이유로 팀에서 제외되었다.[9][10] 쉴즈는 1951년 팀이 4경기를 승리했을 때 선수 겸 감독을 맡았다. 같은 해, 쉴즈는 1년 동안 데이비스 컵의 미국 대표팀 감독을 맡았는데, 미국 팀은 "아메리카 존"의 1회전에서 일본 팀과 대결했다. 일본은 이 해부터 종전 후 데이비스 컵에 복귀를 인정받았지만, 구마가이 가즈야 감독이 이끄는 일본 대표팀은 쉴즈 감독이 이끄는 미국 팀에게 5전 전패로 끝났다.2. 3. 기타 대회
쉴즈는 여러 테니스 대회에서 주목할 만한 성적을 거두었다. 1928년 1월, 몬트리올 실내 테니스 클럽에서 열린 캐나다 실내 코트 선수권 대회에서 조지 로트에게 준우승을 차지했고, 준결승에서는 캐나다 1위인 잭 라이트 박사를 5세트 접전 끝에 꺾었다.[2] 1929년 캐나다 오픈 선수권 대회에서는 토론토 론 테니스 클럽의 붉은 클레이 코트에서 준우승을 차지했으며, 결승에서 라이트 박사에게 패했다.[3]1930년 사우스햄튼 인비테이션 8강전에서는 빌 틸든을 꺾는 이변을 연출하기도 했다.[4] 1933년은 그의 최고의 시즌으로, 9개의 토너먼트에서 우승했다. 1월에 캐나다 실내 코트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J. 길버트 홀을 꺾고 우승했으며, 뉴욕주 퀸스 잭슨 하이츠에서 열린 이스턴 클레이 코트 선수권 대회에서는 결승에서 J. 길버트 홀에게 준우승을 차지했다. 사우스햄튼 인비테이션(롱 아일랜드)에서는 비치 그랜트와 프랭크 파커를 모두 3세트 스트레이트로 꺾고 우승했다. 뉴포트 카지노 인비테이셔널에서는 엘스워스 바인스와 윌머 앨리슨을 꺾고 우승했으며, 그린브리어 리조트에서 열린 메이슨 & 딕슨 선수권 대회에서는 그레고리 망긴을 4세트 만에 꺾고 우승했다.[5]
1934년에는 캐나다 실내 코트 선수권 타이틀을 방어하며 J. 길버트 홀과 조지 로트를 꺾었고, 노스캐롤라이나의 파인허스트 컨트리 클럽에서 열린 유나이티드 노스 & 사우스 토너먼트에서 윌머 앨리슨을 꺾고 우승했다.[7] 그린브리어 리조트에서 열린 메이슨 & 딕슨 타이틀도 방어하며 비치 그랜트를 5세트 접전 끝에 꺾었다. 퀸스 클럽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는 시드니 우드에게 패했다.
1935년 오자이 테니스 토너먼트에서 진 마코를 꺾고 우승했고,[8] 1937년 샌디에고에서 열린 호텔 드 코로나도 토너먼트에서 잭 티드볼을 꺾고 우승했다.
1950년 US 오픈 혼합 복식 대회에 진저 로저스와 함께 출전했지만 1라운드에서 탈락했고, 1951년 US 내셔널 선수권 대회 1라운드에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시드 레비에게 패했다.
쉴즈는 1926년 전미 선수권 대회부터 1951년까지 선수 경력 동안 여러 차례 4대 메이저 대회에 출전하여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3. 배우 경력
프랭크 쉴즈는 1935년 전미 선수권 대회 8강에서 프레드 페리에게 패한 후, 잠시 테니스계를 떠나 할리우드 영화 배우로 전향했다.[14]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IMDb) 자료에 따르면, 쉴즈는 1935년부터 1938년까지 총 7편의 영화에 출연했다.[14] 그는 3년간 배우로 활동했고, 1938년부터 다시 테니스 선수로 복귀했다.[14]
3. 1. 출연 영화 목록
- 위험한 창공 (1990년)
- 나는 살고 싶다 (1983년)
- 더 골드윈 폴리스 (1938년)
- 컴 앤 겟 잇 (1936년)
- 함대 살인 사건(Murder in the Fleet) (1935년) - 아놀드 중위 역
- 내 인생을 살아간다(I Live My Life) (1935년) - 외부 사무실 비서 역
- 와서 가져가세요 (1936년) - 토니 슈베르케 역
- 캐피 릭스의 사건(Affairs of Cappy Ricks) (1937년) - 왈도 보텀리 주니어 역
- 후지어 스쿨보이(Hoosier Schoolboy) (1937년) - 잭 매튜스 주니어 역
- 데드 엔드 (1937년) - 옷 잘 입은 남자 역
4. 개인사
쉴즈는 선수들과의 관계 및 알코올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11][12][13] 1930년대 후반, 쉴즈는 국제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가장 작은 미국인 테니스 스타 브라이언 그랜트를 조롱하곤 했는데, "저 작은 녀석"이 네트 뒤에 숨어 있다고 말했다. 한번은 술에 취한 쉴즈가 그랜트를 호텔 창밖으로 거꾸로 매달기도 했다.[14]
1932년 쉴즈는 레베카 테니(Rebecca Tenney, 1910–2005)와 결혼했다. 1938년에는 캘리포니아주 팜스프링스에 집을 소유했다.[15] 쉴즈와 테니는 1940년 쉴즈의 "상습적인 주벽과 잔혹함"을 이유로 이혼했으며,[16] 1947년 테니는 변호사 도널드 아그뉴와 결혼했다.
1940년, 그는 두 번째 아내인 마리나 토를로니아 디 시비텔라-체시(Donna Marina Torlonia di Civitella-Cesi, 1916–1960)와 결혼했다.[17] 마리나는 마리노 토를로니아, 시비텔라-체시 4세 공작 (Marino Torlonia, 4th prince of Civitella-Cesi, 1861–1933)과 미국 상속녀 메리 엘시 무어 (Mary Elsie Moore, 1888–1941)의 딸이었다. 마리나의 형제는 알레산드로 토를로니아, 시비텔라-체시 5세 공작 (Alessandro Torlonia, 5th Prince di Civitella-Cesi, 1911–1986)으로, 스페인 공주 베아트리스 (Infanta Beatriz de Borbón, 1909–2002)의 남편이었다. 쉴즈와 마리나 토를로니아 사이에는 두 자녀가 있었다.
- 프랜시스 자비에 알렉산더 주니어 (Francis Xavier Alexander, Jr., 1941–2003), 배우 겸 모델 브룩 쉴즈 (Brooke Shields, 1965년 출생)의 아버지
- 크리스티아나 마리나 쉴즈 (Cristiana Marina Shields, 1943년 출생)
쉴즈와 토를로니아는 이혼했고, 1950년 토를로니아는 에드워드 W. 슬레이터와 결혼했다.[18]
1949년, 쉴즈는 재정가 스탠리 그래프턴 모티머 시니어의 딸인 캐서린 모티머 (Katharine Mortimer, 1923–2003)와 결혼했다.[19] 그녀는 이전에 올리버 카드웰 비들과 결혼했었고, 그와의 사이에 딸 크리스틴 모티머 비들을 두었으며, 크리스틴은 쉴즈의 의붓딸이 되었다. 쉴즈와 모티머 사이에는 세 자녀가 있었다.
쉴즈와 모티머는 이혼했고, 1962년 모티머는 리처드 길레스피 블레인과 결혼했다.[21]
쉴즈는 세 번 결혼했지만 모두 이혼으로 끝났다. 슬하에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 헌액 다음 해인 1965년 5월 31일에 태어난 손녀 브룩 쉴즈는 아역 모델 및 배우로 활동했다. 프랭크 쉴즈는 브룩 쉴즈가 10세가 된 1975년 8월 19일 고향 뉴욕에서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5. 사망
쉴즈는 두 번의 심장마비와 뇌졸중을 겪은 후, 1975년 8월 19일 65세의 나이에 맨해튼의 택시 안에서 세 번째 심장마비로 사망했다.[22] 그는 브룩 쉴즈의 할아버지였다.
6. 명예의 전당
쉴즈는 1964년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에 있는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51년에는 1년 동안 데이비스 컵 미국 대표팀 감독을 맡았는데, 이때 미국 팀은 "아메리카 존" 1회전에서 구마가이 가즈야 감독이 이끄는 일본 팀을 5전 전패로 꺾었다.
7. 주요 대회 성적
프랭크 쉴즈는 1930년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A. 윌리스 마이어스에 의해 세계 랭킹 5위에 올랐고,[3] 1931년에는 멜버른 헤럴드의 노엘 딕슨에 의해 세계 랭킹 2위에 올랐다.[2] 1928년과 1945년 사이에 USLTA에 의해 미국 10위 안에 8번 랭크되었으며, 1933년에는 1위, 1930년에는 2위에 올랐다.
1928년 1월, 쉴즈는 몬트리올 실내 테니스 클럽에서 열린 캐나다 실내 코트 선수권 대회에서 조지 로트에게 준우승했다. 1929년 캐나다 오픈에서는 결승에서 잭 라이트 박사에게 패해 준우승했다.
1930년 US 챔피언십 결승에서 존 도그에게 패하기 전 윌머 앨리슨과 시드니 우드를 꺾었다.[4] 1933년은 9개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그의 최고의 시즌이었다. 1월 캐나다 실내 코트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J. 길버트 홀을 꺾고 우승했고, 같은 해 프랑스 선수권 대회 4라운드에 진출하여 크리스티안 부스에게 패했다. 뉴포트 카지노 인비테이셔널에서는 엘스워스 바인스와 윌머 앨리슨을 꺾고 우승했다. 1933년 US 선수권 대회 준결승에 진출하여 잭 크로포드에게 패했다. 쉴즈는 USLTA 공식 랭킹에서 1933년 미국 1위,[5] 버나드 브라운에 의해 바인스보다 앞선 세계 5위에 랭크되었다.[6]
1934년 쉴즈는 캐나다 실내 코트 선수권 타이틀을 방어했고, 파인허스트 컨트리 클럽에서 열린 유나이티드 노스 & 사우스 토너먼트에서 앨리슨을 꺾고 우승했다.[7] 퀸스 클럽 선수권 대회 결승에 진출하여 시드니 우드에게 패했다. 윔블던 준결승에서 크로포드에게 패했다.
1935년 쉴즈는 오자이 테니스 토너먼트에서 진 마코를 꺾고 우승했다. 1937년 샌디에고에서 열린 호텔 드 코로나도[8] 토너먼트에서 잭 티드볼을 꺾고 우승했다.
1950년 US 오픈 혼합 복식 대회와 1951년 US 내셔널 선수권 대회 1라운드에 출전했지만, 모두 패했다.
- 신시내티 단식 챔피언 (1930)
- 미국 데이비스 컵 팀 멤버 (1931–32, 1934)
7. 1. 그랜드 슬램 결승
프랭크 쉴즈는 윔블던 선수권 대회 남자 단식(1931년)과 전미 선수권 대회 남자 단식(1930년), 혼합 복식(1930년), 남자 복식(1933년)에서 준우승했다.[1]7. 1. 1. 단식: 2회 준우승
| 결과 | 연도 | 선수권 대회 | 코트 | 상대 선수 | 점수 |
|---|---|---|---|---|---|
| 패 | 1930년 | US 선수권 대회 | 잔디 | John Doeg|존 도에그영어 | 8–10, 6–1, 4–6, 14–16 |
| 패 | 1931년 | 윔블던 | 잔디 | Sidney Wood|시드니 우드영어 | 기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