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실라 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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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리실라 보너는 1899년 워싱턴 D.C.에서 태어난 미국의 배우이다. 1916년 영화 《애드리언 양의 로맨스》로 데뷔하여, 《호머는 집으로》(1920), 《그림자》(1922), 《4월의 소나기》(1923), 《강철인간》(1926) 등 여러 영화에 출연했다. 1925년 워너 브라더스를 상대로 소송에서 승리하고, 《붉은 기모노》(1925), 《그것》(1927) 등에도 출연했다. 1920년대 후반 영화계를 은퇴한 후, 1996년 9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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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실라 보너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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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프리실라 B. 울판 |
| 출생 | 1899년 2월 17일 |
| 출생지 | 워싱턴 D.C. |
| 사망 | 1996년 2월 21일 |
| 사망 원인 | 알려지지 않음 |
| 직업 | 배우 |
| 활동 기간 | 1920년–1929년 |
| 결혼 정보 | |
| 배우자 | 앨런 와인스 알렉산더(1921년 결혼, 1926년 이혼) E. 버트런드 울판 박사 (1928년 결혼, 1962년 사별) |
2. 초기 생애
프리실라 보너는 1899년 2월 17일 워싱턴 D.C.에서 태어났다.[1] 그녀의 아버지 존 S. 보너는 페이지 펜스에서 일했으며, 지역 국민 방위군 B 중대에서 장교로 복무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이 부대는 현역으로 소집되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육군 장교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가족은 자주 이사를 다녔고, 그녀는 여러 지역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녀는 종종 혼자서 연극 놀이를 하며, 모든 역할을 소화하고 세트를 바꾸며 즐거움을 느꼈다.[2] 그녀의 아버지가 레너드 우드 장군의 참모로 시카고에 주둔하고 있을 때, 그녀는 포토플레이의 관계자로부터 사진을 찍으러 스튜디오에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그것이 전화 잘못 걸려온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보너는 스튜디오로 향했다. 그녀의 대담한 행동과 사진이 잘 받는 매력에 흥미를 느낀 스튜디오는 그녀의 초상 사진을 찍어 캘리포니아의 영화 스튜디오에 보냈다.[3]
3. 배우 경력
1916년, 미시간 주 에이드리언에 거주하던 보너는 영화 《애드리언 양의 로맨스》(The Romance of Miss Adrian) 오디션 공개 모집에 응모했다. 그녀는 댄스 실력을 발휘하여 이 영화에서 배역을 따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찰스 레이를 만나 MGM과 계약을 맺은 후 1920년 영화 《호머는 집으로》(Homer Comes Home)에 출연했다. 그녀는 이후 잭 픽포드와 함께 《모든 것을 가진 남자》(The Man Who Had Everything, 1920)에, 론 채니 시니어와 함께 《그림자》(Shadows, 1922)에, 콜린 무어와 함께 《4월의 샤워》(April Showers)에, 그리고 코미디언 해리 랭던과 함께 《강철인간》(The Strong Man)에 공동 출연했다.
1925년, 그녀는 워너 브라더스를 상대로 소송에서 승리하여 상당한 현금 합의금을 받았다. 원래 존 배리모어의 《바다의 야수》(The Sea Beast)에서 여주인공으로 선택되었지만 배리모어의 새로운 실제 연인인 돌로레스 코스텔로를 선호하여 배역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그녀는 월리스 리드의 미망인 도로시 데이븐포트가 제작하고 감독한 논란이 많은 독립 영화 《붉은 기모노》(The Red Kimono)에 출연했다. 1927년, 보너는 파라마운트 픽쳐스로 대여되어 클라라 보우가 주연한 흥행작 《그것》(It, 1927)에 공동 출연했다.[4]3. 1. 1920년대 초반: 주요 작품 활동
1920년 MGM과 계약을 맺고 영화 《호머는 집으로》(Homer Comes Home)에 출연했다.[4] 이후 잭 픽포드와 함께 《모든 것을 가진 남자》(The Man Who Had Everything, 1920), 론 채니 시니어와 함께 《그림자》(Shadows, 1922), 콜린 무어와 함께 《4월의 샤워》(April Showers)에 출연했다. 코미디언 해리 랭던과는 《강철인간》(The Strong Man)에 공동 출연하였다.[4]
1925년에는 워너 브라더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면서 상당한 현금 합의금을 받았다. 원래 존 배리모어의 《바다의 야수》(The Sea Beast)에서 여주인공으로 선택되었으나, 배리모어의 새로운 연인인 돌로레스 코스텔로가 선호되면서 배역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4] 같은 해, 월리스 리드의 미망인 도로시 데이븐포트가 제작하고 감독한 논란이 많은 독립 영화 《붉은 기모노》(The Red Kimono)에 출연했다. 1927년에는 파라마운트 픽쳐스로 대여되어 클라라 보우 주연의 흥행작 《그것》(It, 1927)에 공동 출연했다.[4] 그 외의 주요 작품으로는 《긴 바지》(1927년), 《세 악당》(1926년), 《강자》(1926년), 《찰리의 이모》(1925년) 등이 있다.
3. 2. 1920년대 중반: 전성기 및 사회 참여
1916년, 미시간 주 에이드리언에 거주하던 보너는 영화 《애드리언 양의 로맨스》(The Romance of Miss Adrian) 오디션 공개 모집에 응모하여 댄스 실력을 발휘, 배역을 따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찰스 레이를 만나 MGM과 계약을 맺은 후 1920년 영화 《호머는 집으로》(Homer Comes Home)에 출연했다.[4] 그녀는 이후 잭 픽포드와 함께 《모든 것을 가진 남자》(The Man Who Had Everything, 1920)에, 론 채니 시니어와 함께 《그림자》(Shadows, 1922)에, 콜린 무어와 함께 《4월의 샤워》(April Showers)에, 그리고 코미디언 해리 랭던과 함께 《강철인간》(The Strong Man)에 공동 출연했다.[4]
1925년, 워너 브라더스를 상대로 소송에서 승리하여 상당한 현금 합의금을 받았다. 원래 존 배리모어의 《바다의 야수》(The Sea Beast)에서 여주인공으로 선택되었지만 배리모어의 새로운 실제 연인인 돌로레스 코스텔로를 선호하여 배역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월리스 리드의 미망인 도로시 데이븐포트가 제작하고 감독한 논란이 많은 독립 영화 《붉은 기모노》(The Red Kimono)에 출연했다.[4] 1927년, 보너는 파라마운트 픽쳐스로 대여되어 클라라 보우가 주연한 흥행작 《그것》(It, 1927)에 공동 출연했다.[4]
3. 3. 1920년대 후반: 다양한 작품 활동
1916년, 미시간 주 에이드리언에 거주하던 보너는 영화 《애드리언 양의 로맨스》(The Romance of Miss Adrian) 오디션 공개 모집에 응모하여 댄스 실력을 발휘해 배역을 따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찰스 레이를 만나 MGM과 계약을 맺은 후 1920년 영화 《호머는 집으로》(Homer Comes Home)에 출연했다.[4] 그녀는 이후 잭 픽포드와 함께 《모든 것을 가진 남자》(The Man Who Had Everything, 1920)에, 론 채니 시니어와 함께 《그림자》(Shadows, 1922)에, 콜린 무어와 함께 《4월의 샤워》(April Showers)에 출연했다.[4] 1925년, 워너 브라더스를 상대로 소송에서 승리하여 상당한 현금 합의금을 받았다. 원래 존 배리모어의 《바다의 야수》(The Sea Beast)에서 여주인공으로 선택되었지만 배리모어의 새로운 실제 연인인 돌로레스 코스텔로를 선호하여 배역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4] 같은 해, 월리스 리드의 미망인 도로시 데이븐포트가 제작하고 감독한 논란이 많은 독립 영화 《붉은 기모노》(The Red Kimono)에 출연했다. 1927년, 보너는 파라마운트 픽쳐스로 대여되어 클라라 보우가 주연한 흥행작 《그것》(It, 1927)에 공동 출연했다.[4]
4. 개인사
프리실라 보너는 1921년 작가이자 저술가인 앨런 와인스 알렉산더와 결혼했다.[5] 1년 조금 넘어서, 알렉산더는 보너를 떠났고, 보너는 이혼 소송을 제기했지만[6] 나중에 소송을 기각했다.[7]
1928년, 보너는 E. 버트란드 울판 박사와 결혼했다. 보너는 이듬해 영화계를 은퇴했다. 울판 부부는 급성장하는 로스앤젤레스 문학 및 영화계의 인기 있는 호스트였으며, 특히 작가이자 감독인 프레스턴 스터지스와 친분을 맺었다.[8] 보너의 여동생은 배우이자 작가인 마저리 보너였다.[9] 1996년 2월 21일, 보너는 9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8]
5. 사망
프리실라 보너는 1996년 2월 21일, 9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8] 1921년에는 작가이자 저술가인 앨런 와인스 알렉산더와 결혼했으나,[5] 1년 조금 넘어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가[6] 나중에 소송을 기각했다.[7] 1928년에는 E. 버트란드 울판 박사와 재혼했다.[8] 보너는 1929년에 영화계에서 은퇴했다.[8] 부부는 로스앤젤레스 문학 및 영화계에서 인기 있는 인물이었고, 특히 작가이자 감독인 프레스턴 스터지스와 친분이 있었다.[8] 그녀의 여동생은 배우이자 작가인 마저리 보너였다.[9]
6. 기타
7. 출연 영화 목록
단편 영화
유실된 영화
유실된 영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