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배리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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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배리모어는 연극 배우 집안에서 태어나 화가와 만화가로 활동하다가 23세에 배우의 길을 걸었다. 1909년 브로드웨이에서 성공을 거둔 후, 영화계에도 진출하여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며 인기를 얻었다. 특히 1922년 연극 《햄릿》에서 호평을 받으며 최고의 배우로 인정받았다. 1930년대에는 영화에 전념했지만, 과도한 음주로 인해 조연으로 전락했고, 불운한 사생활 속에서 60세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 존 드류 배리모어와 손녀 드류 배리모어 또한 배우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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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배리모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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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명 | 존 시드니 블라이스 |
출생일 | 1882년 2월 14일 또는 15일 |
출생지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
사망일 | 1942년 5월 29일 |
사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안장지 | 마운트 버넌 묘지 (필라델피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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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 |
친척 | 배리모어 가문 |
배우자 | 캐서린 코리 해리스 (1910년-1917년) 블랑쉬 올리히스 (1920년-1928년) 돌로레스 코스텔로 (1928년-1934년) 엘레인 배리 (1936년-1940년) |
자녀 | 존 드루 배리모어 (아들) |
손자녀 | 드루 배리모어 (손녀) |
증손자녀 | 올리브 배리모어 코펠만 (증손녀), 프랭키 배리모어 코펠만 (증손녀) |
직업 | |
직업 | 배우 |
활동 기간 | 1903년 ~ 1941년 |
2. 생애
존 배리모어는 부모와 친척 모두가 배우인 연극 집안에서 태어났다.[1] 하지만 처음에는 화가를 지망하여 파리의 미술 학교에 다니거나, 뉴욕의 신문사에서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23세 때였다. 1909년, 『The Fortune Hunter』의 히트로 브로드웨이의 인기 스타가 되었으며, 1914년에 『An American Citizen』으로 영화계에도 진출했다.
"위대한 옆모습"(The Great Profile)이라고 불린 단정한 외모와, 무대에서 다져진 확실한 연기력으로, 『돈 조반니』(1926년), 『사랑하는 남자』(1927년)와 같은 로맨틱한 멜로 드라마부터, 『광대 악마』(1920년), 『악마 스벤갈리』(1931년) 등에서 광기에 찬 남자까지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다. 또한, 무대 활동도 병행하여, 특히 1922년에 주연을 맡은 『햄릿』은 대호평을 받아, 동 작품에서 당시 최장 상연 기록을 세웠다. 20년대 후반 이후에는 영화에 전념하게 되었다.
30년대에는 형 라이오넬이 소속되어 있던 MGM사로 이적하여, 『그랜드 호텔』(1932년) 등에 출연했지만, 젊은 시절부터 과도한 음주로 인해 출연작이 줄어들었고, 더불어 50세를 넘긴 나이에 미남 배역이 어려워지면서, 점차 조역으로 전향하게 되었다. 만년에는 B급 영화에서 스스로를 캐리커쳐한 듯한 역할을 연기할 정도로 몰락했다. 4번의 결혼에도 모두 실패하고, 실의와 빈곤 속에 60세로 사망했다.
『바다의 괴물』(1926년)에서 함께 출연하여 세 번째 아내가 된 배우 돌로레스 코스텔로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 배우 존 드류 배리모어이다. 그 존의 딸이 배우 드류 배리모어이다.
2. 1. 초기 생애 (1882-1903)
존 배리모어는 필라델피아에서 존 시드니 블라이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으며, "잭"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1] 가족의 성경에는 그의 생일이 1882년 2월 15일로 기록되어 있지만, 출생 증명서에는 2월 14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라이오넬, 에델과 함께 세 자녀 중 막내였다. 그의 아버지 모리스 배리모어는 인도 출신의 영국 배우로, 본명은 허버트 블라이스였지만, 런던 헤이마켓 극장 포스터의 '배리모어'라는 이름을 보고 예명으로 사용했다. 어머니 조지 드류 배리모어는 저명한 연극 가문 출신으로, 외조부모는 19세기 미국의 유명한 여배우이자 아치 스트리트 극장 매니저였던 루이자 레인 드류와 코미디 전문 배우 존 드류였다. 배리모어의 외삼촌은 존 드류 주니어와 시드니 드류였다.[1]배리모어의 어린 시절은 불안정했다. 1882년 10월, 가족은 폴란드 배우 헬레나 모제예스카와 함께 미국에서 한 시즌 투어를 했다. 이듬해 부모는 다시 모제예스카와 투어를 했지만, 아이들은 집에 남겨졌다. 모제예스카는 가족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세 아이 모두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도록 했다. 1884년 가족은 오귀스탱 데일리 극단 일원으로 런던으로 갔다가 2년 후 미국으로 돌아왔다. 어린 시절 배리모어는 버릇이 없었고, 훈육을 위해 여러 학교를 전전했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노트르담 수녀원 부속 남자 학교에서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지옥》을 읽는 벌을 받았는데, 이때 구스타브 도레의 삽화를 보면서 예술가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1891년에는 세이튼 홀 준비 학교로 보내졌지만 곧 자퇴했고, 이후 마운트 플레전트 군사 학교 등 뉴욕의 여러 공립 학교를 다녔다.
1892년, 할머니 루이자 드류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가족은 혼란을 겪었다. 이듬해 배리모어가 11살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했다. 배리모어는 어머니를 거의 알지 못했고, 주로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어머니의 수입을 잃게 되자 에델과 라이오넬은 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배리모어의 아버지는 투어 중일 때는 집에 거의 없었고, 돌아오면 뉴욕 배우 클럽인 더 램스에서 시간을 보냈다.
1895년, 배리모어는 조지타운 대학교 캠퍼스에 있던 조지타운 준비 학교에 입학했지만, 1897년 11월 퇴학당했다. 사창가에서 기다리는 것이 발각되었거나, 술에 취한 모습이 교직원에게 발견되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그의 전기 작가 마틴 노덴에 따르면, 배리모어는 조지타운을 떠날 무렵 이미 만성적인 음주 문제의 초기 단계에 있었다. 1897년은 배리모어에게 정서적으로 힘든 해였다. 그는 계모 마미 플로이드에게 유혹당해 순결을 잃었고, 가장 중요한 여성 역할 모델이었던 할머니가 사망했다.[2]
1898년, 배리모어는 아버지와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윔블던에 있는 킹스 칼리지 학교에 입학했다. 1년 후 슬레이드 미술 학교에 입학하여 문학과 예술을 공부했다. 1년 후 학교를 떠난 그는 런던에서 보헤미안 생활과 야간 모험에 시간을 보냈다. 1900년 여름 뉴욕으로 돌아온 배리모어는 《뉴욕 이브닝 저널》에서 삽화가로 일자리를 찾았다.

배리모어는 연기 직업을 싫어한다고 했지만, 1900년 아버지의 권유로 뉴저지주 포트리에서 아버지의 단편 연극 "A Man of the World"에 몇 차례 출연했다.[3][4][5][6][7] 1901년 10월, 에델이 필라델피아에서 《말 해병대 장교 징크스》에 출연하던 중, 젊은 배우 중 한 명이 출연할 수 없게 되자, 에델의 설득으로 배리모어가 단역을 맡게 되었다. 배리모어는 대사를 잊고 중간에 멈춰서는 실수를 했지만, 출연진은 즉흥적으로 연기를 이어갔다.
1901년 3월, 배리모어의 아버지는 매독으로 인해 정신 붕괴를 겪었고, 배리모어는 에델과 상의한 후 아버지를 벨뷰 병원으로 데려갔다. 모리스는 나중에 아미티빌 롱아일랜드에 있는 사립 시설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광기로의 급격한 추락"을 겪었다. 배리모어는 아버지의 어두운 면에 시달렸고, 자신이 같은 운명을 겪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같은 해, 배리모어는 깁슨 걸이자 배우를 꿈꾸는 에블린 네스빗과 불륜 관계를 시작했다. 네스빗은 건축가 스탠퍼드 화이트의 정부이기도 했다. 배리모어는 네스빗에게 결혼을 제안했지만, 네스빗의 어머니는 배우가 되려고 노력하는 배리모어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1906년, 화이트는 네스빗의 당시 남편인 피츠버그 백만장자 해리 케이. 토에게 공개적으로 총격을 받았다. 배리모어는 토의 살인 재판에서 네스빗의 도덕성에 대해 증언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소환되지 않았다.
1902년 5월, 배리모어는 숙취 상태에서 신문에 형편없는 삽화를 그려 신문사에서 해고되었다. 그는 포스터 디자이너로 잠시 일했지만, 수입이 충분하지 않았다. 배리모어는 형과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연기에 굴복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고, 돈이 필요해서 무대에 올랐다고 인정했다.
2. 2. 연극 경력 (1903-1924)

배리모어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가족의 연극 인맥과 연락하기 시작했고, 10년 전 ''캡틴 징크스''의 프로듀서였고 그의 어머니 조지를 고용했던 찰스 프로먼에게 접근했다. 프로먼은 배리모어가 코미디적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브로드웨이 데뷔를 하기 전에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배리모어는 1903년 10월 W. S. 클리블랜드 극장에서 순회 공연 중이던 매키 랭킨, 시드니 드류의 장인어른의 극단에 합류했다. 그는 처음에는 ''마그다''에서 맥스 폰 벤들로프 중위의 단역을 맡았고, 11월 극단이 ''버려진 레아''를 제작했을 때, 그는 대사가 한 줄인 마을 바보 맥스의 작은 역할을 맡았다.
1년 후, 배리모어는 단기간 상영된 코미디 ''글래드 오브 잇''에서 작은 역할을 맡아 브로드웨이 데뷔를 했다. 그 후 그는 윌리엄 콜리어가 출연한 크라이테리언 극장에서 열린 파르스 ''독재자''에서 찰스 하인 역할을 맡았다. 연극이 상영되는 동안과 미국 전역을 순회하는 동안 콜리어는 젊은 배우의 멘토가 되었지만, 배리모어의 음주로 인해 인내심은 끊임없이 시험을 받았고, 이는 가끔 공연 불참, 술에 취한 무대 등장, 전반적인 비행으로 이어졌다. 콜리어는 배리모어에게 코믹 타이밍을 포함하여 연기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쳤지만, "때때로 그의 제자에 대한 후원을 후회했다". 1905년 3월, ''독재자''가 버팔로에서 공연되는 동안 배리모어의 아버지는 아미티빌에서 사망하여 필라델피아의 글렌우드 묘지에 묻혔다. 미국 순회가 끝날 무렵, ''독재자''는 1905년 4월부터 코미디 극장에서 공연하며 영국을 방문했다. ''옵저버''의 평론가는 배리모어가 콜리어를 "훌륭하게 도왔다"고 썼다.
미국으로 돌아온 배리모어는 J. M. 배리의 작품 두 편을 크라이테리언 극장에서 공연했다. 그는 형과 함께 ''판탈룬''에서 광대 역할을, 누나와 함께 ''불 속의 앨리스''에서 스티븐 롤로 역할을 맡았다. 두 연극 모두 1905년 12월부터 81회 공연되었고, 이후 순회 공연을 했다. 배리모어는 음주를 계속했고 규율이 부족하여 그의 공연에 영향을 미쳤다. 에텔은 오빠에게 화가 나서 제작자들에게 그를 쇼에서 해고하게 했지만, 그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다음 날 다시 고용했다. ''온 더 콰이어트''와 ''독재자''에서 콜리어와 함께 미국과 호주를 순회한 후, 배리모어는 1907년 엠파이어 극장에서 누나와 함께 코미디 ''그의 엑설런시 더 거버너''에 출연했다. 그는 공연에 대한 엇갈린 평가를 받았고, ''위치타 데일리 이글''은 "배리모어는 좋은 배우가 되기에는 존 드류를 너무 많이 모방하는 것 같다. 젊은 배리모어는 누군가를 따라해야 한다면 진짜 배우를 모방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라고 논평했다.

배리모어는 1907년 초 라이시움 극장에서 코미디 ''컴퍼니 B의 소년들''에서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다. 그는 비평가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았지만 – ''워싱턴 포스트''는 "그의 연기는 그가 공연하는 곳마다 비평가들이 놀랍도록 영리하다고 평했다" – 때때로 그는 여전히 전문적이지 못한 무대 행동을 보였고, 공연을 보러 온 존 드류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개릭 극장에서 ''토들스''에서 짧게 공연한 후, 배리모어는 순회 공연과 보스턴의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모두 ''고집스러운 신데렐라''에서 맥 역을 맡았다. 그는 이전에 불규칙한 고용으로 주당 50달러를 벌었지만 이제 175달러로 임금이 인상되었다. 그는 1909년 중반 ''캔디 샵''에 잠시 출연한 후, 같은 해 9월 윈첼 스미스의 연극 ''포춘 헌터''에서 개리티 극장에서 주연을 맡았다. 이는 그의 가장 오랫동안 맡았던 역할로, 뉴욕의 개리티 극장에서 시작하여 순회 공연을 하며 1911년 5월까지 345회 공연을 했다. ''뉴욕 타임스''의 평론가는 그 연극이 "존 배리모어에 의해 훌륭한 코미디 정신으로 연기되었고 ... [그는] 어젯밤 성장하고 성장하는 힘의 명백한 징후를 보였다"고 생각했다.
1910년 중반 배리모어는 사교계 명사 캐서린 코리 해리스를 만났고, 그해 9월에 결혼했다. 해리스의 아버지는 그 관계에 반대했고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결혼식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독재자''가 순회 공연을 갔고, 해리스는 연극에서 작은 역할을 맡았다. 배리모어의 증가하는 알코올 중독 또한 결혼 문제의 원인이었으며, 그는 "불행이 술을 늘리고, 술이 불행을 늘렸다"고 설명했다.
배리모어의 다음 두 연극 – 1911년의 ''삼촌 샘''과 ''짐-짐 공주''는 비평적으로나 상업적으로 모두 약했지만, 두 번째 작품을 통해 그는 극작가 에드워드 셸던을 만났고, 셸던은 "[배리모어의] 전체 경력을 재구성"하게 될 것이다. 1912년 1월, 배리모어는 누나와 함께 브로드웨이의 엠파이어 극장에서 ''A Slice of Life''에 출연하여 48회 공연했다. ''이브닝 월드''의 평론가 찰스 다튼은 "배리모어는 자신의 역할을 한계까지, 아마 그 이상으로 '농담'하는 것을 즐긴다"고 관찰했다. ''워싱턴 타임스''의 리뷰에서는 "배리모어는 삼촌 존 드류를 흉내낼 수 없다"고 말했다.
배리모어는 1912년에 그의 첫 영화에 출연했을 수도 있다. 네 편의 단편 영화에서 출연진으로 "잭 배리모어"가 언급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존 배리모어일 것이지만, "이 영화가 실제로 배리모어 영화인지 확실히 알 수 없을 수도 있다"고 언급한다. 네 편의 영화는 ''영화 감독의 꿈'', ''과부 케이시의 귀환'', ''상금 패키지''(모두 1912년)와 ''로맨스에 대한 한 가지''(1913년)였다. 이 영화들은 필라델피아에 본사를 둔 루빈 매뉴팩처링 컴퍼니에서 제작되었고, 1914년 루빈 금고의 폭발과 화재로 유실되었다.
1912년 7월, 배리모어는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벨라스코 극장에서 세 편의 단기 연극에 출연했다. 그는 10월에 뉴욕으로 돌아와 리틀 극장에서 72회 공연된 코미디 ''아나톨의 사건''에서 주연을 맡았다. 비평적 반응은 미온적이었지만, 배리모어는 연극 출연료로 주당 600달러를 받았다. 그는 이듬해 맥비커 극장에서 ''밤의 도둑''의 단기 상영에 출연한 후, 시카고로 돌아와 뉴욕과 서른아홉 번째 거리 극장에서 ''나를 믿어, 잔티페''에서 두 달 동안 공연을 했다.

1913년 말, 배리모어는 아돌프 주커의 페이머스 플레이어스 영화사와 함께 첫 번째 장편 영화로 확인된 로맨틱 코미디 ''미국 시민''에 출연했다. 1914년 1월 영화가 개봉되자 배리모어는 "관습적인 로맨스를 '즐겁게' 만드는 따라올 수 없는 가벼운 터치로 영화 관객들을 기쁘게 했다"고 썼다. ''오리건 데일리 저널''의 평론가는 배리모어가 "특이한 자질의 묘사"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의 성공은 ''멕시코에서 온 남자''(1914), ''메이슨이세요?'', ''독재자'' 및 ''고집불통 듀케인''(모두 1915년)을 포함한 추가적인 영화 작업으로 이어졌다. ''고집불통 듀케인''을 제외하고, 이 초기 영화들은 모두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 작업과 그로부터 얻은 더 높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배리모어는 계속해서 무대 작업을 추구했고, 1914년 1월에는 뉴욕의 엘팅 극장(Empire Theatre (42nd Street))에서 ''옐로우 티켓''의 주연을 맡았다. 이 역할은 이전 공연의 가벼운 코미디에서 벗어난 것으로, 쉘든이 그에게 더 드라마틱한 역할을 하도록 설득한 결과였다. ''옐로우 티켓''은 배리모어가 원했던 획기적인 작품은 아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몇 달 전, 그는 쉘든과 함께 악화되는 결혼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이탈리아로 휴가를 갔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그는 뉴욕의 롱에이커 극장에서 ''킥 인''에서 전직 죄수 역할과 같은 또 다른 진지한 무대 역할을 수락했다. 이 연극은 성공을 거두었고, 배리모어는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뉴욕 타임스'' 평론가는 "드물게 훌륭하고 진실한 연기"가 펼쳐지는 이 연극에서 배리모어가 "지성과 활력으로" 그의 역할을 연기했고 "그것에 많은 매력을 부여했다"고 말했다.
배리모어는 1915년 하반기를 ''레드 위도우''를 포함한 세 편의 영화를 만드는 데 보냈고, 그는 1926년 자서전에서 "내가 만든 최악의 영화"라고 불렀다. 1916년 4월, 그는 존 골즈워시의 감옥 드라마 ''정의''에 출연했는데, 이 역시 쉘든의 권유였다. 이 연극은 비평적 성공을 거두었고, ''뉴욕 타임스''는 관객들이 "배리모어가 전에 한 번도 연기한 적이 없는 연기를 보았고, 그리하여 ''정의''에서 불쌍한 죄수로서의 그의 작품으로 미국 무대에서 새로운 위치로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생각했다. 비평가는 계속해서 배리모어가 "외모와 태도의 모든 세부 사항, 깊은 감정의 모든 음표에서 놀라운 공연을 보여주었다... 훌륭한 공연"이라고 말했다.

1916년 초부터 배리모어는 캐서린과 별거했으며, 그녀는 1916년 11월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1917년 12월 이혼이 최종 결정되었을 때, 그는 영화 ''래플스, 아마추어 크랙스맨''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 그는 또한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 미국 육군에 입대하려 했지만, 군의관들은 그가 정맥류를 앓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는 군 복무를 거부당했다. 1917년 4월부터 1년 넘게, 그는 조지 뒤 모리에의 1891년 소설 ''피터 이베트슨''의 무대 버전에서 리오넬과 함께 출연했다. 이 연극과 두 배리모어는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이 무렵, 배리모어는 "무정부주의적 자신감"을 가진, 엘리트 로드아일랜드 출신의, 결혼한 두 아이의 어머니인 블랑쉬 오엘리치스와 관계를 시작했다. 오엘리치스는 또한 마이클 스트레인지라는 이름으로 시를 발표했다. 그들의 관계는 비밀리에 시작되었지만, 오엘리치스의 남편이 군대에 위촉되어 프랑스로 파견된 후 더욱 공개되었다.
오엘리치스와 쉘든은 모두 배리모어에게 다음 역할, 즉 레프 톨스토이의 연극 ''구원''에서 플리머스 극장에서 페디야 바실리예비치 프로타소프 역할을 맡도록 권유했다. ''뉴욕 타임스''의 평론가는 배리모어의 공연이 "목소리의 단조로움으로 훼손되었지만", 전반적으로 이 공연은 "배리모어 씨의 예술적 발전에 있어서 뚜렷한 진전... 우리 무대에는 그렇게 훌륭하고 영적인 기질, 그렇게 유연하고 확실한 예술을 가진 배우가 아마 없을 것이다"라고 느꼈다. 1918년, 배리모어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조용히''에 출연했는데, ''아이오와 시티 프레스-시티즌''은 이 영화가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공연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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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배리모어는 브로드웨이 쇼 ''Here Comes the Bride''의 영화 각색에서 고군분투하는 변호사를 연기했고, 이어서 ''명예의 시험''이 이어졌다. 후자의 영화는 코미디 드라마에서 수년간 공연한 후 스크린에서 그의 첫 번째 정극 역할을 기록했다. 그해 말, 배리모어가 리오넬과 함께 셈 베넬리의 역사 드라마 ''The Jest''에 다시 출연했을 때, 관객들은 "미국 무대에서 더 훌륭한 연기를 본 적이 없다"는 데 동의했다. ''뉴욕 타임스''에 글을 쓴 알렉산더 울코트는 "존과 리오넬 배리모어는 숨 막히는 각 관객을 사로잡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배리모어가 "최근 몇 년 동안 예기치 않게 웅변이 된 몸의 모든 걸음, 모든 손, 모든 자세로 그 매력에 기여한다"고 언급했다.

11월, 배리모어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촬영하기 시작했고, 이중 주연 역할을 맡았으며, 이 영화는 이듬해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필름 데일리''는 "처음부터 스타의 그림이며, 그것을 만드는 것은 바로 스타"라고 생각하며, 배리모어의 묘사가 "미묘한 그림자와 격렬한 감정의 일"이라고 말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에 동의했고, 이 공연을 "걸작"이자 "놀라운 작품"으로 간주했다. 이 영화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미국 해군은 배리모어의 스틸 사진을 채용 포스터에 사용했다.
1년 넘게 비밀리에 계획한 후, 배리모어는 그의 첫 번째 셰익스피어 작품인 ''리처드 3세''의 제목 역할을 연기했다. 그의 음성 범위에 대한 비판을 의식하여 그는 목소리와 발음 훈련사인 마가렛 캐링턴과 훈련을 받아 배역에 맞는 소리를 내도록 했고, 두 사람은 6주 동안 매일 최대 6시간씩 함께 일했다. 1920년 3월 데뷔 후, 비평가들은 그에게 칭찬을 쏟았다. ''워싱턴 헤럴드''는 관객들이 "배리모어의 공연의 순수한 힘에 사로잡혔다"고 관찰했는데, 이는 "[배우의] 예상치 못한 풍부한 목소리"로 "놀랍다"고 언급했고, 반면 ''뉴욕 타임스''의 울코트는 이 공연이 "배리모어의 기술적 유창성을 그의 날개 달린 상상력 및 연극에 대한 진정한 천재성과 일치시키는 점진적인 과정에서 측정 가능한 진전을 기록했다"고 생각했다.

상업적, 비평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은 배리모어가 신경 쇠약으로 쓰러지면서 31번의 공연 후에 막을 내렸다. 그는 ''구원''에 출연한 이후 끊임없이 일하며 저녁에는 무대에 출연했고, 낮에는 다음 작품을 계획하거나 리허설을 했으며, 리처드로 출연할 무렵에는 낮에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촬영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레슬러인 윌리엄 멀둔의 보살핌을 받으며 6주 동안 회복을 했다. 그는 요양소를 운영했다. 1920년 여름 동안, 오엘리치스는 배리모어의 아이를 임신했고, 그녀와 배리모어는 그해 8월에 결혼할 수 있도록 그녀의 남편과 빠른 이혼이 성사되었다. 딸 다이애나 배리모어는 1921년 3월에 태어났다. 출산 직후, 그는 아내가 빅토르 위고의 1869년 소설 ''웃는 남자''를 각색한 ''달빛''의 리허설을 시작했다. 배리모어는 에텔에게 여왕 역할을 맡도록 설득했는데, 이는 두 사람이 10년 넘게 함께 무대에 출연한 첫 번째 경우였다. 이 연극은 비평적인 실패였지만, 형제의 출연으로 60번 이상의 공연을 할 수 있었다.
1921년, 배리모어는 영화 ''연꽃을 먹는 사람''에서 뉴욕의 부유한 프랑스인을 연기했고, 콜린 무어가 출연했다. 9월, 배리모어와 오엘리치스는 휴가를 위해 유럽으로 갔는데, 그들의 관계에 금이 가고 있었고, 그녀는 베니스에서 오랜 기간 머무는 동안 시인과 사랑에 빠졌다. 10월, 오엘리치스는 뉴욕으로 돌아왔고 배리모어는 그의 최신 영화 ''셜록 홈즈''의 외부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런던으로 가서 타이틀 역할을 맡았다. 그는 1922년 1월에 영화의 내부 장면을 작업하기 위해 뉴욕으로 돌아왔다. 배리모어는 영화의 사전 제작 작업에 참여하여 모리아티의 은신처 디자인을 제공했다. 이 영화는 그해 후반에 개봉되었고 일반적으로 "너무 많은 인터타이틀로 약간 지루하고 무거웠다"고 생각했지만, 해리스버그의 ''패트리어트-뉴스''의 제임스 W. 딘은 "배리모어의 개성은 영화의 초월적인 품질"이라고 의견을 밝혔다.

배리모어는 다음으로 아서 홉킨스가 연출한 무대에서 ''햄릿''에 출연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6개월을 준비하는 데 보냈고, 1,250줄 이상의 대사를 잘라냈으며, 배리모어는 햄릿을 "남자 중의 남자"로 연기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배리모어는 나중에 그의 햄릿을 "단지 왕자였을 뿐인 천재적인 남자였고, 부드럽고, 남성적이고, 재치 있고, 위험한... 그에게 너무 벅찬 혼란에 빠진 평범하고 건강하고 정력적인 젊은이였고, 그는 훌륭한 펜싱 선수였고, 운동선수였고, 활동적이고 건강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병든 반 바보를 만들 수 있겠는가?"라고 묘사했다. 배리모어는 다시 캐링턴을 보컬 코치로 고용했고, 리허설은 10월에 시작되었고, 이 연극은 1922년 11월 16일에 개봉되었다. 이 작품은 흥행에 성공했고, 비평가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뉴욕 헤럴드''에 글을 쓴 울코트는 "미국 연극사에서 기억될 저녁"이라고 의견을 밝혔고, ''뉴욕 타임스''의 연극 평론가인 존 코빈도 동의하며 "아마도 우리에게 새롭고 지속적인 햄릿이 있을 것"이라고 썼다. ''브루클린 라이프''의 평론가는 배리모어가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위대한 생존 미국 비극 배우로 불릴 권리를 얻었다"고 말했다. 1963년, 오손 웰스는 배리모어가 자신이 본 최고의 햄릿이라고 말하면서, 그 인물을 "왕자보다는... 왕자였던 천재적인 남자였고, 부드럽고, 남성적이고, 재치 있고, 위험했다"고 묘사했다.
배리모어와 홉킨스는 101회 공연으로 런을 종료하기로 결정했고, 에드윈 부스가 기록한 100회 공연 기록을 겨우 깼으며, 그 후 1923년 2월에 연극이 막을 내렸다. 그해 11월과 12월에는 맨해튼 센터에서 3주간의 공연이 열렸고, 1924년 1월 말에 막을 내린 짧은 투어가 이어졌다.
2. 3. 영화 경력 (1913-1942)
1913년 말, 배리모어는 아돌프 주커의 페이머스 플레이어스 영화사와 함께 첫 번째 장편 영화로 확인된 로맨틱 코미디 ''미국 시민''에 출연했다. 1914년 1월 영화가 개봉되자 배리모어는 "관습적인 로맨스를 '즐겁게' 만드는 따라올 수 없는 가벼운 터치로 영화 관객들을 기쁘게 했다"고 피터스는 썼다. ''오리건 데일리 저널''의 평론가는 배리모어가 "특이한 자질의 묘사"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의 성공은 ''멕시코에서 온 남자''(1914), ''메이슨이세요?'', ''독재자'' 및 ''고집불통 듀케인''(모두 1915년)을 포함한 추가적인 영화 작업으로 이어졌다. ''고집불통 듀케인''을 제외하고, 이 초기 영화들은 모두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 작업과 그로부터 얻은 더 높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배리모어는 계속해서 무대 작업을 추구했고, 1914년 1월에는 뉴욕의 엘팅 극장(Empire Theatre (42nd Street))에서 ''옐로우 티켓''의 주연을 맡았다. 이 역할은 이전 공연의 가벼운 코미디에서 벗어난 것으로, 쉘든이 그에게 더 드라마틱한 역할을 하도록 설득한 결과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몇 달 전, 그는 쉘든과 함께 악화되는 결혼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이탈리아로 휴가를 갔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그는 뉴욕의 롱에이커 극장에서 ''킥 인''에서 전직 죄수 역할과 같은 또 다른 진지한 무대 역할을 수락했다. 이 연극은 성공을 거두었고, 배리모어는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뉴욕 타임스'' 평론가는 "드물게 훌륭하고 진실한 연기"가 펼쳐지는 이 연극에서 배리모어가 "지성과 활력으로" 그의 역할을 연기했고 "그것에 많은 매력을 부여했다"고 생각했다.
배리모어는 1915년 하반기를 ''레드 위도우''를 포함한 세 편의 영화를 만드는 데 보냈고, 그는 1926년 자서전에서 "내가 만든 최악의 영화"라고 불렀다.}} 1916년 4월, 그는 존 골즈워시의 감옥 드라마 ''정의''에 출연했는데, 이 역시 쉘든의 권유였다. 이 연극은 비평적 성공을 거두었고, ''뉴욕 타임스''는 관객들이 "배리모어가 전에 한 번도 연기한 적이 없는 연기를 보았고, 그리하여 ''정의''에서 불쌍한 죄수로서의 그의 작품으로 미국 무대에서 새로운 위치로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생각했다. 비평가는 계속해서 배리모어가 "외모와 태도의 모든 세부 사항, 깊은 감정의 모든 음표에서 놀라운 공연을 보여주었다... 훌륭한 공연"이라고 말했다.
1916년 초부터 배리모어는 캐서린과 별거했으며, 그녀는 1916년 11월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1917년 12월 이혼이 최종 결정되었을 때, 그는 영화 ''래플스, 아마추어 크랙스맨''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 그는 또한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 미국 육군에 입대하려 했지만, 군의관들은 그가 정맥류를 앓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는 군 복무를 거부당했다. 1917년 4월부터 1년 넘게, 그는 조지 뒤 모리에의 1891년 소설 ''피터 이베트슨''의 무대 버전에서 리오넬과 함께 출연했다. 이 연극과 두 배리모어는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이 무렵, 배리모어는 엘리트 로드아일랜드 출신의, 결혼한 두 아이의 어머니인 블랑쉬 오엘리치스와 관계를 시작했다. 오엘리치스는 또한 마이클 스트레인지라는 이름으로 시를 발표했다. 그들의 관계는 비밀리에 시작되었지만, 오엘리치스의 남편이 군대에 위촉되어 프랑스로 파견된 후 더욱 공개되었다.
오엘리치스와 쉘든은 모두 배리모어에게 다음 역할, 즉 레프 톨스토이의 연극 ''구원''에서 플리머스 극장에서 페디야 바실리예비치 프로타소프 역할을 맡도록 권유했다. ''뉴욕 타임스''의 평론가는 배리모어의 공연이 "목소리의 단조로움으로 훼손되었지만", 전반적으로 이 공연은 "배리모어 씨의 예술적 발전에 있어서 뚜렷한 진전... 우리 무대에는 그렇게 훌륭하고 영적인 기질, 그렇게 유연하고 확실한 예술을 가진 배우가 아마 없을 것이다"라고 느꼈다. 1918년, 배리모어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조용히''에 출연했는데, ''아이오와 시티 프레스-시티즌''은 이 영화가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공연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했다.
1919년, 배리모어는 브로드웨이 쇼 ''Here Comes the Bride''의 영화 각색에서 고군분투하는 변호사를 연기했고, 이어서 ''명예의 시험''이 이어졌다. 후자의 영화는 코미디 드라마에서 수년간 공연한 후 스크린에서 그의 첫 번째 정극 역할을 기록했다. 그해 말, 배리모어가 리오넬과 함께 셈 베넬리의 역사 드라마 ''The Jest''에 다시 출연했을 때, 관객들은 피터스에 따르면 "미국 무대에서 더 훌륭한 연기를 본 적이 없다"는 데 동의했다. ''뉴욕 타임스''에 글을 쓴 알렉산더 울코트는 "존과 리오넬 배리모어는 숨 막히는 각 관객을 사로잡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배리모어가 "최근 몇 년 동안 예기치 않게 웅변이 된 몸의 모든 걸음, 모든 손, 모든 자세로 그 매력에 기여한다"고 언급했다.
1920년 배리모어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촬영하기 시작했고, 이중 주연 역할을 맡았으며, 이 영화는 이듬해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필름 데일리''는 "처음부터 스타의 그림이며, 그것을 만드는 것은 바로 스타"라고 생각하며, 배리모어의 묘사가 "미묘한 그림자와 격렬한 감정의 일"이라고 말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에 동의했고, 이 공연을 "걸작"이자 "놀라운 작품"으로 간주했다. 이 영화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미국 해군은 배리모어의 스틸 사진을 채용 포스터에 사용했다.
1년 넘게 비밀리에 계획한 후, 배리모어는 그의 첫 번째 셰익스피어 작품인 ''리처드 3세''의 제목 역할을 연기했다. 그의 음성 범위에 대한 비판을 의식하여 그는 목소리와 발음 훈련사인 마가렛 캐링턴과 훈련을 받아 배역에 맞는 소리를 내도록 했고, 두 사람은 6주 동안 매일 최대 6시간씩 함께 일했다. 1920년 3월 데뷔 후, 비평가들은 그에게 칭찬을 쏟았다. ''워싱턴 헤럴드''는 관객들이 "배리모어의 공연의 순수한 힘에 사로잡혔다"고 관찰했는데, 이는 "[배우의] 예상치 못한 풍부한 목소리"로 "놀랍다"고 언급했고, 반면 ''뉴욕 타임스''의 울코트는 이 공연이 "배리모어의 기술적 유창성을 그의 날개 달린 상상력 및 연극에 대한 진정한 천재성과 일치시키는 점진적인 과정에서 측정 가능한 진전을 기록했다"고 생각했다.
|alt=바이올렛 켐블-쿠퍼와 존 배리모어가 소파에 기대어 앉아, 서로 포옹하며, 키스를 하려는 모습|thumb|1921년 연극 ''달빛''에서 배리모어와 바이올렛 켐블-쿠퍼]]
상업적, 비평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은 배리모어가 신경 쇠약으로 쓰러지면서 31번의 공연 후에 막을 내렸다.[10] 그는 ''구원''에 출연한 이후 끊임없이 일하며 저녁에는 무대에 출연했고, 낮에는 다음 작품을 계획하거나 리허설을 했으며, 리처드로 출연할 무렵에는 낮에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촬영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레슬러인 윌리엄 멀둔의 보살핌을 받으며 6주 동안 회복을 했다. 그는 요양소를 운영했다. 1920년 여름 동안, 오엘리치스는 배리모어의 아이를 임신했고, 그녀와 배리모어는 그해 8월에 결혼할 수 있도록 그녀의 남편과 빠른 이혼이 성사되었다. 딸 다이애나 배리모어는 1921년 3월에 태어났다.}} 출산 직후, 그는 아내가 빅토르 위고의 1869년 소설 ''웃는 남자''를 각색한 ''달빛''의 리허설을 시작했다. 배리모어는 에텔에게 여왕 역할을 맡도록 설득했는데, 이는 두 사람이 10년 넘게 함께 무대에 출연한 첫 번째 경우였다. 이 연극은 비평적인 실패였지만, 형제의 출연으로 60번 이상의 공연을 할 수 있었다.
1921년, 배리모어는 영화 ''연꽃을 먹는 사람''에서 뉴욕의 부유한 프랑스인을 연기했고, 콜린 무어가 출연했다. 9월, 배리모어와 오엘리치스는 휴가를 위해 유럽으로 갔는데, 그들의 관계에 금이 가고 있었다. 10월, 오엘리치스는 뉴욕으로 돌아왔고 배리모어는 그의 최신 영화 ''셜록 홈즈''의 외부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런던으로 가서 타이틀 역할을 맡았다. 그는 1922년 1월에 영화의 내부 장면을 작업하기 위해 뉴욕으로 돌아왔다. 배리모어는 영화의 사전 제작 작업에 참여하여 모리아티의 은신처 디자인을 제공했다. 이 영화는 그해 후반에 개봉되었고 일반적으로 "너무 많은 인터타이틀로 약간 지루하고 무거웠다"고 생각했지만, 해리스버그의 ''패트리어트-뉴스''의 제임스 W. 딘은 "배리모어의 개성은 영화의 초월적인 품질"이라고 의견을 밝혔다.
|alt=배리모어, 면도한 채, 우울한 햄릿으로 전신 검은색 의상을 입고, 의자에 앉아, 카메라의 약간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thumb|햄릿 (1922)으로 분한 배리모어]]
배리모어는 다음으로 아서 홉킨스가 연출한 무대에서 ''햄릿''에 출연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6개월을 준비하는 데 보냈고, 1,250줄 이상의 대사를 잘라냈으며, 배리모어는 햄릿을 "남자 중의 남자"로 연기하기로 결정했다고 노르덴은 말했다. 배리모어는 나중에 그의 햄릿을 "단지 왕자였을 뿐인 천재적인 남자였고, 부드럽고, 남성적이고, 재치 있고, 위험한... 그에게 너무 벅찬 혼란에 빠진 평범하고 건강하고 정력적인 젊은이였고, 그는 훌륭한 펜싱 선수였고, 운동선수였고, 활동적이고 건강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병든 반 바보를 만들 수 있겠는가?"라고 묘사했다. 배리모어는 다시 캐링턴을 보컬 코치로 고용했고, 리허설은 10월에 시작되었고, 이 연극은 1922년 11월 16일에 개봉되었다. 이 작품은 흥행에 성공했고, 비평가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뉴욕 헤럴드''에 글을 쓴 울코트는 "미국 연극사에서 기억될 저녁"이라고 의견을 밝혔고, ''뉴욕 타임스''의 연극 평론가인 존 코빈도 동의하며 "아마도 우리에게 새롭고 지속적인 햄릿이 있을 것"이라고 썼다. ''브루클린 라이프''의 평론가는 배리모어가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위대한 생존 미국 비극 배우로 불릴 권리를 얻었다"고 말했다. 1963년, 오손 웰스는 배리모어가 자신이 본 최고의 햄릿이라고 말하면서, 그 인물을 "왕자보다는... 왕자였던 천재적인 남자였고, 부드럽고, 남성적이고, 재치 있고, 위험했다"고 묘사했다.
배리모어와 홉킨스는 101회 공연으로 런을 종료하기로 결정했고, 에드윈 부스가 기록한 100회 공연 기록을 겨우 깼으며, 그 후 1923년 2월에 연극이 막을 내렸다.}} 그해 11월과 12월에는 맨해튼 센터에서 3주간의 공연이 열렸고, 1924년 1월 말에 막을 내린 짧은 투어가 이어졌다.
존 배리모어의 성공적인 '햄릿' 공연 소식은 워너 브라더스의 관심을 끌었고, 워너 브라더스는 1924년 영화 '보 브럼멜'에서 그를 주연으로 계약했다. 결혼 생활에 불행을 느낀 당시 40세의 배리모어는 다른 곳에서 위안을 찾았고, 촬영 중 17세의 상대 배우 메리 아스터와 불륜 관계를 가졌다. 영화가 절대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배리모어를 포함한 출연진은 일반적으로 칭찬을 받았다. 이 무렵 배리모어는 자신의 사진이나 포스터가 왼쪽 측면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위대한 옆모습"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내 얼굴 오른쪽은 계란 프라이처럼 보입니다. 왼쪽에는 거의 모든 정상적인 인류학적 표본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 있으며, 그것이 내가 통에 담아두려고 노력하는 사과입니다."

1925년 2월 배리모어는 런던 헤이마켓 극장에서 '햄릿'을 공연했는데, '맨체스터 가디언'은 나중에 이 공연을 "수년간 가장 기억에 남는 첫날 밤"이라고 말했다. 평가는 긍정적이었고, "런던의 비평가들은 배리모어가 [헨리] 어빙과 [존스턴] 포브스-로버트슨보다 뛰어나다고 보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호의적으로 비교했다." 관람객 중에는 20세의 배우 존 길구드가 있었는데, 그는 프로그램에 이렇게 적었다. "배리모어는 외모가 낭만적이고 타고난 우아함, 외모, 시대 의상을 입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 그의 뛰어난 지적인 연기를 과도하게 엄격하지 않으면서도 고전적으로 만들며, 그는 부드러움, 거리감, 신경증을 모두 섬세하게 배치하고 엄청난 효과와 훌륭한 판단력으로 사용한다." 1970년대에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에드워드 시대 연극의 잘생긴 중년 스타들은 그 역할을 낭만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존 배리모어조차도, 나는 그의 햄릿을 매우 존경했지만,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초점을 맞춰 거트루드의 가슴에 대고 흐느끼는 등 감상적인 장면을 연기할 수 있도록 극을 터무니없이 잘랐습니다. 그러나 배리모어는... 훌륭한 매력과 악마적인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햄릿' 공연이 끝날 무렵 배리모어는 파리로 여행을 떠났고, 그의 파트너인 Oelrichs는 런던에 머무는 동안 그곳에 머물렀지만, 재회는 행복하지 않았고 부부는 자주 다퉜다. 그가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파리에 남아 있었고, 부부는 Oelrichs에게 연간 18,000달러를 제공하고 간통을 이유로 이혼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는 분리 계약을 작성했다. 그가 런던에 있는 동안 워너 브라더스와 배리모어는 한 편당 76,250달러의 출연료로 세 편의 영화를 더 제작하는 계약을 맺었다. 그는 또한 모든 식사와 전용 리무진을 포함하여 로스앤젤레스 앰배서더 호텔의 스위트룸을 제공받았다.}} 그는 나중에 연극에서 영화로 전환한 동기가 "반복의 부족, 즉 배우에게 매우 치명적인 역할의 지속적인 연기"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배리모어가 계약에 따라 출연한 첫 번째 영화는 1851년 소설 '모비 딕'을 느슨하게 각색한 '더 씨 비스트'(1926)였으며, 그는 아합 시리(Captain Ahab Ceeley)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워너 브라더스에게 그 해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린 영화 중 하나였다. 배리모어는 아스터가 여주인공을 맡기를 원했지만, 그녀는 출연할 수 없었고 돌로레스 코스텔로가 대신 캐스팅되었다. 그는 나중에 "나는 즉시 그녀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옳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말했고, 두 사람은 불륜 관계를 시작했다. 코스텔로의 아버지는 이 관계에 분노했지만, 그의 불만은 코스텔로와 그녀의 어머니 모두에게 무시되었다. 코스텔로의 부모는 결국 별거했고 이혼했다. 이 영화는 비평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고, '뉴욕 타임스'의 영화 평론가 모도언트 홀은 시리 역에서 배리모어가 보여준 "에너지, 진지함, 남성다움"을 칭찬했다.
'더 씨 비스트' 촬영이 끝나자, 동기화된 비타폰 음향 효과와 음악 사운드트랙이 사용된 최초의 장편 영화인 '돈 주앙'의 작업이 시작되었다. 배리모어는 다시 코스텔로와 함께 연기하고 싶어했지만, 영화의 프로듀서인 잭 L. 워너는 아스터와 계약을 맺었다. 코스텔로와 함께 한 '사랑하는 남자'로 워너 브라더스 계약을 마친 배리모어는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UA)와 세 편의 영화 계약을 맺었다. 모리슨에 따르면, 그 후 3년 동안 그는 "전례 없는 번영을 누리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비평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스타크 영은 '뉴 리퍼블릭'에 배리모어의 영화가 "썩었고, 저속하고, 비어 있으며, 품격 없고, 부정직하고, 어리석고 건강하지 못한 과시로 역겹고, 낡고 퇴폐적인 스튜디오 청소년의 일종으로 혐오스럽다. 그들의 매력은 싸구려적이고, 냉소적이며, 그럴듯하다."
1927년 배리모어는 할리우드 볼에서 '햄릿'을 부활시킬 계획이었지만, 8월에 아무런 설명 없이 제작을 취소하고 UA 영화 중 세 번째 영화인 '영원한 사랑'을 촬영하기 시작했는데, 이 영화로 그는 15만 달러를 받았다.}} 1928년 2월 배리모어는 Oelrichs와 조용히 이혼했다. 배리모어와 코스텔로는 그해 11월에 결혼했고, 그들의 딸 돌로레스는 1930년 4월에 태어났고, 아들 존 드류 배리모어는 1932년 6월에 태어났다. 배리모어는 할리우드 언덕에 있는 한 저택을 구입하여 16개의 건물, 55개의 방, 정원, 스케이트 사격장, 수영장, 분수, 토템 기둥으로 개조했다.

1920년대 후반, 1927년 센세이션을 일으킨 '재즈 싱어' 이후 유성 영화가 보편화되었다. 훈련된 목소리를 가진 배우는 스튜디오에서 수요가 많았고, 배리모어는 워너 브라더스와 한 편당 15만 달러와 수익 분배를 조건으로 5편의 영화 계약을 제안받았다. 이 계약을 시작하기 전에 그는 영화에서 처음으로 대사 역할을 맡았는데, '쇼 오브 쇼'(1929)에서 헨리 6세 3부의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 역을 맡았다. 계약에 따라 제작된 그의 첫 두 영화는 '제너럴 크랙'과 '블랭클리의 남자'였으며, 둘 다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배리모어는 '더 씨 비스트'를 유성 영화로 만들 수 없었던 것에 좌절하여 1930년 영화 '모비 딕'의 소스로 '모비 딕'으로 돌아갔다. 피터스는 이 영화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 영화를 "멜빌의 패러디이자 어리석은 영화"라고 묘사했다.
그 다음 해 배리모어는 마리안 마쉬와 함께 출연한 '스벵갈리'에서 조작적인 목소리 코치의 주
2. 4. 사생활
배리모어는 MGM과의 첫 영화로 1932년 미스터리 영화인 ''아르센 루팡''에 출연했고, 여기에는 그의 형제 라이오넬도 함께 출연했다. ''뉴욕 타임스''는 배리모어의 연기를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그를 좀 더 가벼운 분위기에서 다시 보게 되어 기쁘다"고 썼다. 같은 해, 배리모어는 그레타 가르보와 함께 1932년 영화 ''그랜드 호텔''에 출연했고, 라이오넬도 출연했다. 배리모어의 연기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지만, ''그랜드 호텔''은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고 그 해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영화 중 하나였다.
1932년 배리모어는 RKO 픽처스에서 캐서린 헵번의 스크린 데뷔작인 ''이혼 명령''에 출연했다. 그해 마지막 영화에서 그는 MGM으로 돌아가 ''라스푸틴과 여제''에 출연했고, 배리모어, 에델, 라이오넬이 함께 출연했다. 육체적으로 배리모어는 ''스벤갈리''를 촬영한 이후 쇠약해졌고, 술 때문에 체중이 늘었다. 그 영화는 비평적, 상업적으로 실패했고, MGM은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뉴요커''는 세 명의 배리모어가 최악의 작품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1933년은 배리모어에게 바쁜 해였고, 마이르나 로이와 함께 ''토파즈'', 라이오넬과 함께 출연한 ''8시에 저녁 식사''를 포함하여 그 해 5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MGM과 함께 여러 편의 영화를 찍은 후, 회사는 대공황으로 인한 재정적 어려움으로 배리모어와의 관계를 종료했다. 그 후 그는 유니버설 픽처스와 계약하여 ''변호사''에 출연했다. 촬영 중 그는 작은 장면에서도 대사를 기억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933년 12월, 배리모어는 RKO와 ''햄릿''을 촬영하기로 합의했지만, 그의 기억력이 다시 나빠졌고, 결국 그 프로젝트는 무산되었다. 배리모어는 1934년에 드라마 ''오래된 아버지''와 스크루볼 코미디 영화 ''20세기''에 출연했다. 2011년에 그 영화는 국립 영화 등록부에 추가되었고, 배리모어의 "마지막 위대한 영화 역할"로 묘사되었다.
1934년 배리모어는 ''모자, 코트, 그리고 장갑''을 촬영하는 동안 대사를 잊어버렸고, 심지어 자신의 캐릭터 이름도 잊어버렸다. 촬영은 다음 날로 연기되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며칠 휴식을 취한 후, 그는 세트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대본을 기억하지 못했고, RKO는 그를 리카르도 코르테스로 교체했다. 그 직후, 그는 정신적, 육체적 쇠약을 겪고 입원했다. 그의 음주가 악화되었음을 확인했고, 그를 "절망적인 알코올 중독자"라고 묘사했다. 배리모어와 그의 아내 코스텔로의 관계는 매우 불안정했고, 그녀가 그를 정신적으로 무능력하다고 선언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집을 떠나 먼저 런던으로, 그 다음 인도으로 여행했다. 그는 1935년 초에 미국으로 돌아와 뉴욕에 정착했고, 그의 아내는 로스앤젤레스에 남겨두었다. 돌아온 직후, 그는 기관지염과 인플루엔자로 한 달 동안 입원했다. 19세 팬 엘레인 제이콥스가 그를 방문했고, 두 사람은 좋은 친구가 되었다. 퇴원 후, 그녀의 어머니는 그를 집에 초대하여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그녀는 이름을 엘레인 배리로 바꾸었고, 그들은 관계를 시작했다. 5월, 그 커플은 루디 발리의 라디오 쇼 ''플레시만 이스트 아워''에 출연했다. 코스텔로는 1935년 5월 25일 배리모어를 상대로 정신적 학대, 습관적인 무절제, 유기를 사유로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11][12]
새로운 관계는 타블로이드 저널리즘에서 널리 보도되었고, 그들은 그 커플을 캘리번과 에이리얼로 칭했다. 배리모어는 배리와의 일련의 논쟁 끝에, 배리와의 관계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로스앤젤레스로 떠났다. 신문 편집자는 비행기를 전세내 배리를 시카고로 데려가 배리모어의 기차를 만나게 했고, 그녀는 그에게 돌아와달라고 간청하는 방송을 했고, 그녀의 추격은 전국적인 뉴스가 되었다. 코스텔로의 배리모어와의 이혼은 1935년 10월에 확정되었다.[12] 배리모어는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나기 위해 요트 ''인판타''로 휴가를 보냈다; 그것을 운영하는 데 연간 35,000달러 이상이 들었고, 그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은 후 1938년에 그것을 팔았다.
3. 몰락과 죽음
배리모어의 알코올 의존증은 심각하여 대부분의 스튜디오가 그를 고용하기를 꺼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GM은 1936년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머큐시오 역에 그를 캐스팅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촬영 일정에 지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스튜디오는 배리모어를 알코올 중독자 요양원인 켈리의 요양원에 입원시켰지만, 그는 계속 은밀하게 술을 마셨고 촬영장에서 방해가 되었다. 타이발트 역을 맡았던 배질 라스본은 "그는 술을 마시고 촬영장에서 믿을 수 없었다... 그가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슬펐다."라고 회상했다. 그의 연기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할리우드 스펙테이터''의 웰포드 비튼과 같은 일부 비평가들은 "배리모어는 연기 보석"이라고 생각했지만 기엘구드는 비판적이었고, 페기 애시크로프트에게 "배리모어는 괴물 같은 늙은 남자 흉내내기와 같아서, 사실 구멍을 통해 뛰어넘어야 했다."라고 썼다.
배리모어의 문제에 대한 소문이 촬영장 안팎으로 업계에 퍼졌고, 그는 1년 넘게 다른 영화에 출연하지 못하다가 뮤지컬 영화 ''메이타임''에서 조연을 맡았다. 그의 코스텔로와의 이혼은 1936년 10월에 마무리되었고, 그는 같은 해 11월에 배리와 결혼했다. 부부는 곧바로 공개적으로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그는 다시 켈리의 요양원과 병원에 입원했는데, 하루 평균 800달러가 들어 재정을 고갈시켰다. 그가 퇴원했을 때 그는 ''메이타임'' 촬영장에서 쓰러졌다. 1937년 1월 15일, 그는 이혼 서류를 받았고, 한 달 후 그는 16만 달러의 부채로 파산 보호를 신청했다. 이혼은 4월에 허가되었지만, 부부는 최종 결정 전에 화해했다.
배리모어는 더 많은 셰익스피어 역할을 하기로 결정했다. 1937년 6월, 그는 배리도 출연하는 ''간결한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으로 6개의 에피소드를 제작하기 위해 NBC 라디오와 계약을 맺었다. 첫 번째 프로그램은 ''햄릿''이었는데, 비평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뉴욕 타임스''는 "존 배리모어의 목소리로 극적으로 읊조리는 셰익스피어의 대사는 '에테르'를 통해 최종적인 소리와 함께 휩쓸려간다. 마치 그들의 말이며 다른 누구도 그처럼 생생한 힘으로 말할 수 없을 것 같다"라고 논평했다. 그러나 피터스는 동의하지 않고, "그가 절박했기 때문에 너무 심하게 밀어붙여 그의 위대한 셰익스피어 연기를 포착하지 못하고 희화화하는 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한다.
NBC 시리즈 내내 배리모어는 믿을 만하고, 술에 취하지 않았으며, 책임감이 있었고, 스튜디오는 일자리에 대한 제안으로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이로 인해 그는 1937년과 1938년에 아홉 편의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고, 세 편의 불독 드럼몬드 영화에서 닐슨 대령으로, 그리고 ''진실 고백'' 및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역할을 맡았다. 그는 주로 조연을 제안받았지만, 영화에 성실하게 참여했고 그 결과 부채를 지불할 수 있었다. 그의 기억력은 여전히 문제가 있었고, 그는 큐 카드를 보조 도구로 사용했다. 그의 동료 배우와 영화 감독들은 그의 상태에 공감했다. 그가 마지막 진지한 역할인 1939년 영화 ''위대한 남자 투표하다''에서 그레고리 반스를 연기했을 때, 감독 가슨 카닌은 출연진과 제작진이 존경의 표시로 그를 "배리모어 씨"라고 부르도록 했다.
배리모어와 그의 아내는 1939년 스크루볼 코미디 ''미드나잇''에서 조연으로 출연했는데, 이는 그녀의 유일한 영화 역할이었다. ''뉴욕 타임스''는 이 영화를 "길고 힘든 시즌에서 가장 활기차고, 유쾌하고, 재치 있고, 짓궂은 코미디 중 하나"라고 생각했으며, 배리모어는 "눈썹을 찡그리는 루 [게릭]으로, 평소처럼 풍부하고 유머러스한 효과로 문구를 굴린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2013년 국립 영화 등록부에 헌액되었다. 배리모어와 그의 아내는 1939년 3월 프린스턴 대학교의 매카터 극장에서 개봉한 무대 풍자극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에 함께 출연했다. 그는 늙고 과장된 셰익스피어 연기자인 앨런 맨빌 역을 맡았다.
그의 기억력 감퇴 때문에 배리모어는 쇼 내내 끊임없이 즉흥 연기를 했다. 어떤 부분에서는 새로운 추가 사항이 개선되었지만, 그는 또한 관객의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욕설을 자유롭게 사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는 성공했다. ''라이프'' 잡지는 "사람들은 세련된 연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극장을 난폭한 연극적 광란의 집으로 바꾸기 때문에 [배리모어]를 보기 위해 몰려든다. 때로는 늦게 도착한다. 때로는 취하기도 한다. 보통은 대사를 잊어버린다. 하지만 그는 항상 훌륭한 쇼를 펼친다"라고 썼다. 쇼가 브로드웨이에 진출했을 때, ''라이프''는 "타임스 스퀘어로의 배리모어의 복귀는 거대한 전문적인 승리였다"라고 썼다. 브룩스 앳킨슨은 ''뉴욕 타임스''에 글을 쓰면서 배리모어는 "이 나라에서 여전히 가장 재능 있는 배우이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무모하게 바보짓을 해왔지만,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에서는 아무도 바보가 아니며, 피곤한 휴가에 있는 훌륭한 재능을 가진 배우일 뿐이다"라고 생각했다. 배리모어와 그의 아내는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다퉜고, 그녀는 투어가 진행되는 동안 연극을 떠났다. 그들은 프로덕션이 뉴욕에 도착했을 때 화해를 시도했지만, 부부는 1940년 말에 이혼했다.
1940년, 배리모어는 ''위대한 프로필''에 출연했는데, 이는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들'' 직전 몇 달 동안 그의 삶을 풍자한 것이다. 배리모어는 자신의 경험을 면밀히 모델링한 에반스 개릭 역을 맡았고, 메리 베스 휴즈는 그의 아내 역을 맡았다. 비평가들은 이 영화와 배리모어의 연관성에 가혹하게 반응했다. ''뉴욕 타임스''는 "극으로서는 그의 연애 사건에 대한 화려한 대중의 설명에 거의 부합하지 않는 미약한 것이다... 배리모어의 난동과 파괴적인 재치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프로필''은 약간 애처롭다. 그의 불만의 겨울에 배리모어는 자신의 재능을 할인해서 팔고 있다"라고 썼다. 그의 마지막 영화인 ''플레이메이트'' (1941)에서 더 나쁜 일이 닥쳤는데, 이 영화는 "그가 얼마나 깊이 추락했는지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는 존 배리모어라는 알코올 중독 셰익스피어 연기자를 연기했다."
1940년 10월, 배리모어는 루디 발리의 쇼로 NBC 라디오 네트워크로 돌아와 이제 ''실테스트 쇼''라고 불렸다. 배리모어는 프로그램의 74개 에피소드를 녹음했으며, 음주, 쇠퇴하는 경력, 결혼 문제에 대한 농담과 함께 자기 패러디의 흐름을 이어갔다. 1942년 5월 19일, 그는 쇼를 위해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를 녹음하다 쓰러졌다. 그는 할리우드 장로교 병원으로 이송되어 5월 29일, 간경변과 신부전, 그리고 폐렴으로 사망했다. 사망 직전, 배리모어는 어린 시절의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갔다. 에롤 플린의 회고록은 영화 감독 라울 월시가 매장을 하기 전에 배리모어의 시신을 "빌려" 그의 시체를 술에 취한 플린이 집에 돌아와 발견할 수 있도록 의자에 기대어 놓았다고 주장하지만, 배리모어의 절친한 친구인 진 파울러는 밤새 시신 곁에 있었고 그 이야기를 부인했다. 그러나 2020년 유튜브 시리즈 ''핫 원스'' 인터뷰에서 존의 손녀 드류 배리모어는 플린의 이야기가 정확하다고 주장했다.[13] 배리모어는 6월 2일 로스앤젤레스의 캘버리 묘지에 묻혔다. 1980년, 배리모어의 아들은 아버지의 시신을 필라델피아 마운트 버논 묘지에 있는 가족 묘지로 이장했다.
4. 주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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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연도 | 한국어 제목 원제 | 배역 | 비고 |
---|---|---|---|
1920 | 광인 악마 Dr.Jekyll and Mr.Hyde | 지킬 박사/하이드 씨 | |
1922 | 셜록 홈즈 Sherlock Holmes | 셜록 홈즈 | |
1924 | 보 브럼멜 Beau Brummel | 보 브럼멜 | |
1926 | 바다의 야수 The Sea Beast | Captain Ahab Ceeley | |
돈 주앙 Don Juan | 돈 주앙 | ||
1927 | 마농 레스코 When a Man Loves/Manon Lescaut | 파비앙 드 그뤼 | |
내가 만약 왕이라면 The Beloved Rogue | 프란시스 비롱 | ||
1928 | 템페스트 Tempest | 세르게이 이반 마르코프 | |
1929 | 산의 왕자 Eternal Love | 마커스 팔토란 | |
1930 | 바다의 거인 Moby Dick | 에이브 | |
1931 | 악마 스벵갈리 Svengali | 스벵갈리 | |
광인 천재 The Mad Genius | 블라디미르 이반 차라코프 | ||
1932 | 아르센 루팡 Arsène Lupin | 샤르마르스 공작 = 아르센 루팡 | |
그랜드 호텔 Grand Hotel | 가이겔른 남작 | ||
지방 검사 'States Attorney'' | 톰 카디건 | ||
이혼 고백 A Bill of Divorcement | 힐러리 | ||
1933 | 햄릿, 제1막: 4장과 5장 | 햄릿 | |
토파즈 Topaze | 오거스트 A. 토파즈 | ||
비엔나에서의 재회 Reunion in Vienna |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대공 | ||
만찬의 여덟 시 Dinner at Eight | 래리 레나토 | ||
야간 비행 Night Flight | 리비에르 | ||
거인의 등장 Counsellor at Law | 조지 사이먼 | ||
1934 | 특급 열차 20세기 Twentieth Century | 오스카 자페 | |
1936 |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 | 머큐시오 | |
1937 | 메이타임 Maytime | 니콜라이 | |
진실의 고백 True Confession | 찰리 재스퍼 | ||
1938 |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 Marie Antoinette | 루이 15세 | |
북해의 자식 Spawn of the North | 윈디 탈론 | ||
1939 | 미드나잇 Midnight | 조지 플라말리온 | |
1941 | 할리우드 스파이 소동 World Premiere | 덩컨 |
- 인사이드 데이시 클로버 (1965)
- 플레이메이트 (1941)
- 미드나이트 (1939)
- 마리 앙투아네트 (1938)
- 북해의 남아 (1938)
- 트루 컨페션 (1937)
- 메이타임 (1937)
- 로미오와 줄리엣 (1936)
- 뉴욕행 열차 20세기 (1934)
- 나이트 플라이트 (1933)
- 카운셀러 엣 로 (1933)
- 8시 석찬 (1933)
- 래스퓨틴 앤 더 엠프리스 (1932)
- 이혼 증서 (1932)
- 그랜드 호텔 (1932)
- 쇼 오브 쇼 (1929)
- 영원한 사랑 (1929)
- 씨 비스트 (1926)
- 벤허 (1925)
-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1920)
4. 1. 연극
존 배리모어는 1920년 광인 악마에서 지킬 박사/하이드 씨 역을 맡았다. 1922년에는 셜록 홈즈에서 셜록 홈즈를 연기했다. 1924년에는 보 브럼멜에서 보 브럼멜 역을 맡았다.1926년에는 바다의 야수에서 Captain Ahab Ceeley 역을, 돈 주앙에서 돈 주앙 역을 맡았다. 1927년에는 마농 레스코에서 파비앙 드 그뤼 역을, 내가 만약 왕이라면에서 프란시스 비롱 역을 맡았다. 1928년에는 템페스트에서 세르게이 이반 마르코프 역을 맡았고, 1929년에는 산의 왕자에서 마커스 팔토란 역을 맡았다.
1930년에는 바다의 거인에서 에이브 역을 맡았다. 1931년에는 악마 스벵갈리에서 스벵갈리 역을, 광인 천재에서 블라디미르 이반 차라코프 역을 맡았다. 1932년에는 아르센 루팡에서 샤르마르스 공작 = 아르센 루팡 역을, 그랜드 호텔에서 가이겔른 남작 역을, 지방 검사에서 톰 카디건 역을, 이혼 고백에서 힐러리 역을 맡았다.
1933년 배리모어는 햄릿, 제1막: 4장과 5장에서 햄릿 역을, 토파즈에서 오거스트 A. 토파즈 역을, 비엔나에서의 재회에서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대공 역을, 만찬의 여덟 시에서 래리 레나토 역을, 야간 비행에서 리비에르 역을, 거인의 등장에서 조지 사이먼 역을 맡았다.
1934년에는 특급 열차 20세기에서 오스카 자페 역을, 1936년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머큐시오 역을 맡았다. 1937년에는 메이타임에서 니콜라이 역을, 진실의 고백에서 찰리 재스퍼 역을 맡았다.
1938년 배리모어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에서 루이 15세 역을, 북해의 자식에서 윈디 탈론 역을 맡았다. 1939년에는 미드나잇에서 조지 플라말리온 역을, 1941년에는 할리우드 스파이 소동에서 덩컨 역을 맡았다.
4. 2. 영화
존 배리모어는 1920년 <광인 악마>에서 지킬 박사/하이드 씨 역을 맡았다. 1922년에는 <셜록 홈즈>에서 셜록 홈즈 역을, 1924년에는 <보 브럼멜>에서 보 브럼멜 역을 연기했다. 1926년에는 <바다의 야수>에서 Captain Ahab Ceeley 역과 <돈 주앙>에서 돈 주앙 역을 맡았다.1932년 <그랜드 호텔>에서 가이겔른 남작 역을 맡았고, 같은 해 <이혼 고백>에서 힐러리 역을 연기했다. 1933년 만찬의 여덟 시에서 래리 레나토 역을, <야간 비행>에서 리비에르 역을 맡았다. 1936년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머큐시오 역을 연기했고, 1938년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에서는 루이 15세 역을 맡았다.
5. 유산
《뉴욕 타임스》의 부고 기사에서 배리모어가 《정의》, 《리처드 3세》와 《햄릿》에서 공연하던 시기에 배우는 "타고난 재능과 기량으로 당시 최고의 영어권 배우로 대부분의 평론가들에게 인정받았다"고 언급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그의 무대에서의 성공과 영화 초창기에 "그는 위대한 옆모습, 무대 '왕족'의 연인이었다"고 동의했다. 많은 부고 기사에서 배리모어가 잠재력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맨체스터 가디언》은 그가 "어느 정도 자제력이 있었다면 진정으로 위대한 배우 목록에 이름을 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에너지를 낭비했다"고 생각했다. 《뉴욕 타임스》는 그가 자신의 능력을 "풍자하고, 자신을 희화화하고, 광대 노릇을 할" 수 있었고, "최근 몇 년 동안 대중이 그를... [그런] 분위기에서 본 것은 유감"이라고 여겼다. 그것은 부주의한 퇴위의 분위기였다". 《워싱턴 포스트》는 "세월이 흐르면서 – 그리고 그의 사생활이 더욱 공개되면서 – 그는 연극에서의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타블로이드 인물이 되었다"고 관찰했다.
모리슨에 따르면, 배리모어의 《리처드 3세》와 《햄릿》의 무대 연기는 이 역할의 현대적 공연의 모델이었다. 그의 심리적 접근 방식은 혁신적이었고, 그의 "역동적인 연기는... 그 이후 부활의 방향을 바꾸었다." 배리모어의 자연스러운 연기 스타일은 당시의 무대 관례를 뒤집었고; 그의 "thinsp영어 '일상적인' 운문 연설은 전후 시대 신사의 목소리 방식을 무대에 도입했다."
배리모어는 살아있는 동안 연예 산업과 그 구성원들로부터 몇 번의 영예를 받았다. 그의 형제와 누이가 모두 아카데미상을 받았지만, 배리모어가 스크린 작품으로 받은 유일한 상은 1925년 《보 브럼멜》로 루돌프 발렌티노로부터 받았다. 발렌티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상을 만들었고 동료 배우들이 스크린 작품에 대한 찬사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배리모어가 1940년 그라우먼스 차이니즈 극장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했을 때, 그는 극장 앞마당에 관례적인 손과 발자국 외에 더 많은 것을 남겼다. 극장 주인 시드 그라우먼의 도움을 받아 배리모어는 자신의 얼굴 프로필을 시멘트로 찍어 남겼다. 1960년 2월, 영화 산업에 기여한 공로로 배리모어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6667 할리우드 대로에 별을 받으며 헌액되었다.; 배리모어는 그의 두 형제와 함께 미국 극장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배우들의 배리모어 "왕족"은 그의 두 자녀, 즉 코스텔로와의 아들 존 드류 배리모어와 오엘리히스와의 딸 다이애나를 통해 이어졌으며, 존 주니어의 딸 드류도 배우가 되었다. 배리모어의 형제 라이오넬은 1954년 11월 15일에 사망했고, 그의 누이 에텔은 1959년 6월 18일에 사망했다.
배리모어의 업적과 그의 다채로운 삶은 그의 1926년 자서전 《배우의 고백》 이후 여러 전기 연구가 이어지도록 했다. 앨마 파워-워터스는 주제가 승인한 1941년 연구인 《존 배리모어: 전설과 인간》을 발표했고, 폴러는 《안녕, 스위트 프린스: 존 배리모어의 삶과 시대》 (1943)를 썼으며, 알퍼트는 《배리모어스》 (1964)를 출판했고, 존 코블러는 《파라다이스에서 저주받은 자: 존 배리모어의 삶》 (1977)을 썼지만, 노든은 2000년에 이러한 이전 작품 중 많은 부분이 신뢰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그가 더 철저하게 연구되었다고 밝힌 것은 피터스의 1990년 역사서인 《배리모어 가문》과 그의 배우 작품에 대한 연구인 《존 배리모어: 전기-서지》 (1995)이다. 노든이 이용 가능한 문헌에 대해 언급한 후, 모리슨은 1997년에 호평을 받은 《존 배리모어, 셰익스피어 배우》를 출판했으며, 이 책은 배리모어의 무대 작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배리모어의 탄생 100주년인 1982년에는 여러 기념 행사가 열렸다.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와 현대 미술관은 공동으로 그의 작품 기념 프로그램을 개최했으며, 여기에는 그의 영화에서 발췌한 내용과 바리와 그의 전 동료 배우인 미르나 로이를 포함한 그를 아는 사람들의 인터뷰가 포함되었다. 같은 해, 미국 배우 기금 100주년을 기념하여 미국 우체국은 배리모어와 그의 형제들을 특징으로 하는 우표를 발행했다. 2010년 2월, 뉴저지주 포트 리의 한 교차로가 배우의 128번째 생일에 존 배리모어 웨이로 개명되었다. 이 교차로는 배리모어가 1900년에 "세상의 남자"에서 무대 데뷔를 한 전 버크하이저 호텔의 부지를 표시했다.
배리모어는 연극과 영화의 등장인물에 영감을 주는데 사용되었다. 그는 여러 작품 (《위대한 프로필》, 《나의 사랑하는 아이들》, 《플레이메이트》)에서 본인 역할로 출연했으며, 1921년 《지그펠드 폴리즈》에서는 그의 친구 W. C. 필즈가 배역을 맡았다. 1927년에는 배리모어 가문을 패러디한 《로열 패밀리》에서 그를 모델로 한 인물을 프레드릭 마치가 연기했으며, 배리모어는 그의 연기를 칭찬했다. 이 연극은 1934년 런던에서 《씨어터 로얄》이라는 제목으로 공연되었으며, 로렌스 올리비에가 배리모어 역을 맡았고, 1930년에는 영화로 각색되어 마치가 다시 연기를 했다.
1991년, 폴 러드닉의 코미디 《아이 헤이트 햄릿》은 월터 커 극장에서 공연되었으며, 배리모어가 예전에 살던 아파트를 배경으로 했다. 그는 강령회 이후 《햄릿》 의상을 입고 돌아온다. 니콜 윌리엄슨이 배리모어 역을 맡았다. 3년 후, 런던 프로덕션인 《잭: 존 배리모어와 함께 하는 밤》이 크라이테리온 극장에서 60회 공연되었고, 윌리엄슨이 다시 주연을 맡았다. 윌리엄 루스의 2인극 《배리모어》는 1996년에 초연되었으며, 1942년 사망 직전 리처드 3세 부활을 연습하는 배리모어를 묘사하고 있다.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타이틀 롤을 맡았다. 영화 버전은 2011년에 개봉했으며, 플러머가 다시 주연을 맡았다.
배리모어는 필즈의 친구이자 술 친구였다. 1976년 영화 《W.C. 필즈 앤 미》에서 배리모어는 잭 캐시디가 연기했다. 배리모어의 친구 에롤 플린은 1958년 영화 《투 머치, 투 순》에서 그를 연기했는데, 이 영화는 다이애나 배리모어의 자서전을 각색한 것으로, 도로시 말론이 여자 주인공을 연기했다. 하워드 톰슨은 《뉴욕 타임스》의 영화 평론가로, "플린은 위대한 배우의 변덕스럽고, 술에 취한 폐허인 故 존 배리모어 역을 맡아 영화를 독차지했다. 끔찍한 소녀가 매달리는 그의 처참한 붕괴 장면에서 영화는 진정한 비극에 다가선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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