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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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면은 1899년 서울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성장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는 동성상업학교 교장, 해방 후에는 제헌 국회의원, 초대 주미 대사, 제2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장면은 미국 유학 후 교육계와 가톨릭계에서 활동했으며, 1948년 유엔에서 대한민국 정부 승인에 기여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당시 미국과 유엔에 긴급 지원을 요청하여 유엔군 파병을 이끌었다. 1956년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1960년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사퇴했다. 5.16 군사 정변 이후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으며, 1966년 사망했다. 그는 외교관, 교육자, 정치인으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긍정적 평가와 함께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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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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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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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장면 |
본명 | 장면; 張勉 |
로마자 표기 | Jang Myeon |
호 | 운석 |
로마자 표기(호) | Unseok |
출생일 | 1899년 8월 28일 |
출생지 | 대한제국 한성부 종로구 적선동 |
사망일 | 1966년 6월 4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
배우자 | 김옥윤 |
자녀 | 9명, 장익 포함 |
서명 | Chang Myon signature.jpg |
정치 경력 | |
직책 | 대한민국 국무총리 |
임기 시작 | 1960년 8월 19일 |
임기 종료 | 1961년 5월 17일 |
대통령 | 윤보선 |
전임자 | 허정 |
후임자 | 장도영 |
직책 | 대한민국 국무총리 |
임기 시작 | 1950년 11월 23일 |
임기 종료 | 1952년 4월 23일 |
대통령 | 이승만 |
전임자 | 신성모(대행) |
후임자 | 이윤영(대행), 장택상 |
직책 | 대한민국 부통령 |
임기 시작 | 1956년 5월 30일 |
임기 종료 | 1960년 4월 24일 |
대통령 | 이승만 |
전임자 | 함태영 |
후임자 | 폐지됨 |
소속 정당 | |
정당 |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 |
학력 | |
출신 학교 | 맨해튼 칼리지 |
기타 정보 | |
종교 | 유교(성리학) → 천주교(세례명: 요한) |
형제자매 | 7남 6녀 중 5남, 장발, 장극, 장정혜, 장정온, 장정량 |
웹사이트 | 운석 장면 박사 기념관 |
2. 생애
1899년 8월 28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적선동 삼군부(三軍部) 건물 뒷골목 근처의 외가에서 아버지 장기빈과 어머니 황루시아 사이의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본가는 인천에 있었으며, 아버지 장기빈은 인천 항의 세관원이었고, 나중에는 부산 항의 세관장을 지냈다.[27] 아버지가 평안남도 출신이기 때문에 평남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27]
장면의 선대 가계는 조광조의 문하생이었던 죽정(竹亭) 장잠(張潛)의 후손으로,[26] 장잠은 기묘사화 이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고, 장잠의 손자인 장사진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공을 세웠다. 아버지 장기빈은 대한제국의 세무 관료로서 탁지부에서 근무하다가 인천세관으로 발령받았다. 이후 천주교 신자인 장수 황씨 황성집(黃聖集)의 둘째 딸 황루시아와 결혼하였는데,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독실한 천주교인이었으므로 장면은 태어나면서부터 천주교 신자였다.
장면이 태어나기 전 어머니 황루시아는 금가락지 5개를 얻는 꿈을 꾸었고, 아버지 장기빈은 특이한 동물을 품에 안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장면은 1899년 9월 12일 종현본당에서 빅토르 신부에게 유아세례를 받았다. 훗날 국무총리가 되어서도 어머니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기도 하는 등 복종적인 인물이었다.[27] 처음 이름은 지태(志兑)였다가 후에 면(勉)이라 하였다. 소년기에는 아버지 장기빈이 지어준 호인 운석(雲石)을 사용했는데, 아버지의 호가 태암(太巖, 큰 바위)이었으므로 자녀들의 호는 돌 석(石) 자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유년기의 장면은 차분하고 온순한 성격이었으며, 어려서부터 말수가 적었고 독서와 사색을 즐겨하였다. 1906년 인천 박문소학교(仁川博文小學校)에 입학하여 1912년 졸업하고, 인천 공립 심상소학교(仁川公立尋常小學校)에 진학하여 1914년 졸업하였다. 1917년 수원농업고등학교(水原農業高等學校)를 졸업하고, 1916년 김옥윤과 결혼하여 6남 3녀를 두었다. 아버지 장기빈의 직업 때문에 인천광역시 인천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가[32] 체포 위기에 몰렸으나, 총독부 헌병이 변장한 그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 덕에 극적으로 체포를 모면하였다. 장면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악한 존재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인간을 올바른 길로 이끌거나, 인간의 본성을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은 교육과 신앙의 힘이라고 확신하였다. 미국 유학 중 그는 '국내에서 우리가 민족에 이바지하는 길은 민간 교육 사업이 더욱 효과적이며 첩경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되고, 민족 도덕을 앙양시키기 위해서는 종교적 신앙에 깊이 뿌리를 박아야겠다'고 깨달았다.[34]
1921년 1월, 장면은 동생 장발과 함께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후원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25년 7월 맨해튼 대학교를 졸업한 후, 79명의 한국 조선 천주교 순교자들의 시복식에 참석하기 위해 7월 30일 이탈리아로 떠나 비오 11세 교황을 알현했다. 그해 8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1931년 3월 18일, 평양대교구의 직무에서 사임하고 서울로 이주하였다. 1931년 4월 1일, 동성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임명되어 영어와 수사학을 가르쳤다. 1936년 11월 19일에는 동성상업고등학교 교장이 되었고, 1939년 4월에는 서울 종로구 계성국민학교 교장직을 겸임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 이사직을 맡았던 경력 때문에, 총리까지 역임한 장면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하였지만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183] 1999년 정운현의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에서 친일파로 지목된 이래, 2004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파 708인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진상규명위)에서는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분류하지 않았다.[185] 추기경 김수환은 학도병으로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하였음에도, “장면은 단순히 신자 대표자로 활동한 것”이라고 적극 옹호하였다.[186][233]
1945년 광복 이후 장면은 경향신문 그룹의 지원을 받아 정계에 입문했다. 1948년 5.10 선거에서 제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1948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단 수석으로 참가하여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승인받는 데 기여했다. 1949년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되어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유엔에서 한국 승인 및 유엔군 파병 등 후속 대응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950년 11월, 이승만의 요청으로 제1공화국의 제2대 국무총리로 임명되었으나 처음에는 거절하였다. 1951년 10월부터 1952년 4월 29일까지 국무총리로 재직하며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6차 유엔총회에 참석하였다.
1955년 민주당에 입당하여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로 출마, 여당인 자유당의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고, 야당인 민주당의 장면이 부통령이 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1956년 9월 28일에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저격수의 총격을 받아 손목에 관통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암살 시도는 자유당의 최고위층에 의해 기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에게 큰 표 차이로 패배했다.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했고, 마산에서 시위에 참여했던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4·19 혁명과 이승만 정권 붕괴의 촉매제가 되었다. 1960년 4월, 장면은 잔여임기를 4개월 남겨놓고 부통령직을 사퇴했다. 민주당 신파 내부에서도 사퇴를 만류했지만 그는 사퇴를 고집했다.
1960년 8월 19일, 국회에서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에 선출되었다.[31] 이는 의원 내각제로 권력 구조가 바뀐 후의 일이었다.[26] 1961년 박정희 등이 일으킨 5·16 군사 정변으로 제2공화국이 붕괴하면서, 장면은 5월 16일 총리관저를 떠나 미국대사관에 신변보호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168] 5월 18일 미국 측의 불개입 의사를 확인한 장면은 5월 21일 공식 기자회견에서 내각 총사퇴를 발표했다.[168] 장면은 윤보선과 민주당 구파, 신민당의 비협조와 구파 계열이 군사정변을 묵인 내지는 동조했다고 비판하였다.[169]
총리 퇴임 후, 장면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 정치정화법 대상자로 지정되어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10] 1962년 6월, 장면은 이주당 사건의 배후라는 의혹을 받았고, 8월에는 구 이주당계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171] 공산주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법정 구속, 사형이 구형되었다가 9월 감형되어 징역 10년이 선고되었으나 10월 15일 보석으로 출감하였다.[33] 1963년 2월, 다시 구 이주당계 사건으로 기소되어 3년 징역, 5년 집행유예 항소심 판결을 받았다.[30]
2. 1. 생애 초기 (1899~1919)
장면은 1899년 한성 적선동에서 인천항의 세관원이자 나중에 부산항의 세관장을 지낸 아버지 장기빈과 어머니 황루치아 사이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27] 그는 1906년 인천 박문소학교(仁川博文小學校)에 입학하여 1912년 졸업하고, 인천 공립 심상소학교(仁川公立尋常小學校)에 진학하여 1914년 졸업하였다. 1917년 수원농업고등학교(水原農業高等學校)를 졸업하였으며, 1916년 김옥윤과 결혼하여 6남 3녀를 두었다.2. 1. 1. 출생과 가계
1899년 8월 28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적선동 삼군부(三軍部) 건물 뒷골목 근처의 외가에서 아버지 장기빈과 어머니 황루시아 사이의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본가는 인천에 있었으며, 아버지가 평안남도 출신이기 때문에 평남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27]장면의 선조는 본래 경상북도 인동(仁同)에 살았으나, 8대조 장익붕(張翼鵬)이 처가가 있는 평안북도 성천군(成川郡)으로 이주했다. 고조부 장인각(張仁珏) 대에 평안남도 중화군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장면의 선대 가계는 조광조의 문하생이었던 죽정(竹亭) 장잠(張潛)의 후손으로,[26] 장잠은 기묘사화 이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고, 장잠의 손자인 장사진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공을 세웠다.
아버지 장기빈은 16세에 평안남도를 떠나 인천으로 이주했고, 대한제국의 세무 관료로서 탁지부에서 근무하다가 인천세관으로 발령받았다. 이후 천주교 신자인 장수 황씨 황성집(黃聖集)의 둘째 딸 황루시아와 결혼하였는데,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독실한 천주교인이었으므로 장면은 태어나면서부터 천주교 신자였다.
장면이 태어나기 전 어머니 황루시아는 금가락지 5개를 얻는 꿈을 꾸었고, 아버지 장기빈은 특이한 동물을 품에 안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장면은 1899년 9월 12일 종현본당에서 빅토르 신부에게 유아세례를 받았다. 훗날 국무총리가 되어서도 어머니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기도 하는 등 복종적인 인물이었다.[27] 처음 이름은 지태(志兑)였다가 후에 면(勉)이라 하였다. 소년기에는 아버지 장기빈이 지어준 호인 운석(雲石)을 사용했는데, 아버지의 호가 태암(太巖, 큰 바위)이었으므로 자녀들의 호는 돌 석(石) 자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유년기의 장면은 차분하고 온순한 성격이었으며, 어려서부터 말수가 적었고 독서와 사색을 즐겨하였다.
장면은 1899년 한성 적선동에서 장기빈(張基彬)과 황루치아(Lucia Hwang) 사이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장기빈은 인천 항의 세관원이었고, 나중에는 부산 항의 세관장(세관장)을 역임했다. 1906년 인천 박문소학교(仁川博文小學校)에 입학하여 1912년 졸업하고, 인천 공립 심상소학교(仁川公立尋常小學校)에 진학하여 1914년 졸업하였다. 1917년 수원농업고등학교(水原農業高等學校)를 졸업하고, 1916년 김옥윤과 결혼하여 6남 3녀를 두었다.
아버지 장기빈의 직업 때문에 인천광역시 인천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동생 장발(チャン・バル)은 서울대학교 초대 미술대학 학장[11]이었고, 장극(チャン・グク)은 항공공학자였으며, 지식인 가문이었다. 여동생 아그네타 장정온은 평양의 수도원 원장 수녀였으나, 한국 전쟁 중 평양 부근에서 순교하였다(2023년 현재 시복 대상자).[12][13][14]
장면의 아들로는 생물학자 장진(チャン・ジン)(1927년)[16], 가톨릭 성직자 장익(チャン・イク)(1933년)[17]이 있다.
2. 1. 2. 유년기 및 학창 시절
장면은 1899년 한성 적선동에서 아버지 장기빈과 어머니 황루치아 사이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장기빈은 인천 항의 세관원이었고, 나중에는 부산 항의 세관장을 지냈다. 이후 아버지의 근무지인 인천부 전동으로 이사했다가 1908년 인천부 인천항 화촌동 8통 6호로 이사했고, 1920년 미국 유학 전까지 인천에서 생활했다.1908년 8월 4일 장면은 인천성당 부설 사립 박문학교(현재 박문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한학과 수학 등을 공부했다. 9세 때 부모님 몰래 상투를 잘랐는데, 당시 단발령에 반대하는 분위기 속에서 인천에 처음 생긴 이발소에서 부모님의 허락 없이 머리를 자른 것이다.[29] 그는 잘린 머리를 들고 집에 돌아왔다가 어머니에게 호되게 혼나기도 했다.[29] 유년 시절의 장면은 유순한 성격으로,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운동하기보다는 독서와 사색을 즐겼다.
1910년 인천성당 부설 박문학교 보통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박문학교 고등과에 진학하였다. 1912년 박문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30] 같은 해 3월 인천 공립 심상소학교 6학년으로 편입하여 심상소학교 6년 과정을 마쳤다. 1913년 4월 인천 공립 심상소학교 고등과로 진학하여 1914년 3월 1년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후 같은 해 4월 농림학교로 진학하였다.[30] 1917년 5월 25일 수원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16년 3월, 김옥윤과 결혼하여 6남 3녀를 두었다.
2. 1. 3. 결혼
1916년 3월, 김옥윤과 결혼하여 슬하에 6남 3녀를 두었다.2. 2. 신앙, 교육 활동 (1917~1945)
1916년 6월, 장면은 농림학교 2학년 1학기 재학 중 집안의 소개로 김옥윤과 만나 중림동 성당에서 결혼하였다. 김옥윤은 중림동 성당 부설 가명학교를 졸업했으며, 처가 역시 독실한 천주교 신앙인 가문이었다.[31] 당시 성당은 남녀 좌석이 구분되어 있어, 장면은 신부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식을 마쳤다고 한다.[32] 장면은 결혼을 부끄러워하여 비밀로 하려 했으나, 학교에 사정을 하여 2일간 휴가를 얻었다.[32] 이후 장면은 임종 전까지 한 번의 외도도 하지 않았으며, 1950년대 인터뷰에서 자신이 아는 유일한 여성은 아내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장면은 경성의 모던 보이들이 즐기던 술과 담배를 일체 입에 대지 않았다. 또한 동급생들이 기방에 출입할 때도 천주교회에 나가 신앙과 기도, 독서, 영어 공부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2. 2. 1. 교육 활동
1917년 3월, 농림학교를 졸업한[26] 장면은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1917년 9월 경성 중앙크리스트교 청년학관(현 서울 YMCA) 영어과에 진학했다. 그해 4월 서울 용산에 있는 용산천주교신학교 강사로도 활동하였다.[33] 1918년 4월 용산의 예수 성심신학교 강사가 되었는데, 이 신학교에서 장면에게 신학과 영어를 배운 세 살 아래 학생이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주교(主敎)인 노기남이었다. 신학교 강사가 되면서 기독교 청년학관은 야간반으로 옮겨, 낮에는 강사로, 밤에는 학생으로 생활하였다.1919년 3월 1일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가[32] 체포 위기에 몰렸으나, 총독부 헌병이 변장한 그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 덕에 극적으로 체포를 모면하였다.
장면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악한 존재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인간을 올바른 길로 이끌거나, 인간의 본성을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은 교육과 신앙의 힘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는 신앙과 교육이 낙후된 조선을 개화시킬 수 있는 길이라 확신하였다. 미국 유학 중 그는 '국내에서 우리가 민족에 이바지하는 길은 민간 교육 사업이 더욱 효과적이며 첩경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되고, 민족 도덕을 앙양시키기 위해서는 종교적 신앙에 깊이 뿌리를 박아야겠다'고 깨달았다.[34] 그는 나라가 낙후된 것은 배우지 못한 탓이라 보고 교육을 통해 깨달음을 주어야 하며, 신앙을 통해 미신을 버리고 경건함과 도덕의 길로 사람을 인도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1918년 9월, YMCA 마을 학교(YMCA Village School)에 등록했고,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용산소신학교(Yongsan Youth Catholic Theology School)에서 가르쳤다.
1921년 1월, 장면은 동생 장발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Maryknoll 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of America)의 후원을 받았다. 1921년 9월, 맨해튼 대학교(Manhattan College)에 입학했고, 1924년에는 급성 충수염으로 1년간 휴학했다. 1921년 8월, 세속 프란체스코 수도회(Secular Franciscan Order)에 입회했다. 1925년 7월 맨해튼 대학교를 졸업한 후, 79명의 한국 조선 천주교 순교자들의 시복식(beatification)에 참석하기 위해 7월 30일 이탈리아로 떠났다. 비오 11세(Pope Pius XI) 교황을 알현했다. 그해 8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1925년 12월 2일, 메리놀 센터 스쿨(Maryknoll Center School)의 한국어 강사 겸 통역가로 임명되었다. 동시에 평양대교구 평신도 지도자직을 역임하였다. 1927년 2월 11일, 평양 천주교회에 봉직하게 되었다. 가톨릭 교리의 종교 용어들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1929년 11월에 『종교 용어 개요』를 출판하였다. 1930년에는 『구도자의 길』을 출판하였고, 9월 15일에는 『조선천주교공교회약사』를 출판하였다.
1931년 3월 18일, 평양대교구의 직무에서 사임하고 서울로 이주하였다. 1931년 4월 1일, 동성상업고등학교(東星商業高等學校) 교사로 임명되어 영어와 수사학을 가르치는 책임을 맡았다. 7월 10일에는 정지용과 함께 『가톨릭 청년 신문』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1935년 동성상업고등학교 관리자가 되었다. 1937년 4월 1일에는 혜화동 성당의 평신도 지도자와 혜화유치원 원장이 되었다. 1936년 11월 19일에는 동성상업고등학교 교장이 되었다. 1939년 4월에는 서울 종로구 계성국민학교 교장직을 겸임하였다. 그해 9월에는 서울 가톨릭 청년 전국 연합회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944년 7월 4일에는 제임스 기번스(James Gibbons)의 『교부들의 신앙』을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2. 2. 2. 미국 유학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여 일본 식민 통치에 항의했지만 체포를 피했다. 1921년 1월, 장면은 동생 장발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들은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후원을 받았다. 1921년 9월, 맨해튼 대학교에 입학했고, 1924년에는 급성 충수염으로 1년간 휴학했다. 1921년 8월, 세속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입회했다. 1925년 7월 맨해튼 대학교를 졸업한 후, 79명의 한국 조선 천주교 순교자들의 시복식에 참석하기 위해 7월 30일 이탈리아로 떠났다. 비오 11세 교황을 알현하기도 했다. 그해 8월 한국으로 돌아왔다.[31]2. 2. 3. 귀국 후 활동
1925년 6월 맨해튼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한[30] 장면은 가톨릭 선교에 뜻을 두고 귀국을 결심한다.같은 해 6월 30일 이탈리아에 도착, 7월 5일 로마 바티칸 시티에서 열린 ‘한국인 79위 순교자’ 시복식에 한국인 신자 대표로 참석하고, 7월 6일 당시 교황이었던 교황 비오 11세를 알현하였다.[34] 이후 지중해와 인도양을 거쳐 40일 간의 항해를 마치고[34] 8월 29일 귀국하였다.
귀국 후 평안남도 소재 메리놀센터 하우스의 어학교수로 부임하였고,[33] 1927년부터 평양성당에 근무하며 천주교 평양교구에서 활동하였다. 1928년 평양 천주교회청년회 회장에 선출되었고, 같은 해 12월 미국 맨해튼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33] 1929년 10월 평양 시내 서포역전 평양천주교구 관리사무소에서 근무하였으며, 11월 영·한 천주교회 용어 사전인 ‘The Summary of Religious Terms’를 출간하였다.
1931년 3월 18일 평양대교구의 직무에서 사임하고 서울로 이주하였다. 같은 해 4월 1일 동성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임명되어 영어와 수사학을 가르쳤다.
2. 2. 4. 일제강점기 활동 및 친일 논란
1930년 8월 21일 소책자 《구도자의 길》을 출간하였고, 이듬해 1931년 3월 18일 천주교 평양대교구 사무직을 사퇴하고 경성부로 내려왔다. 4월 1일 천주교 교인들의 추천으로 동성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초빙되었다. 1931년부터 동성상업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1936년 교장이 되어 해방 때까지 근무하였다.[35] 9월 15일 천주교 한국교구설정 백주년 기념 《조선천주공교회 약사》를 출간하였다. 1931년 동성상업학교 교사로 서무주임(행정실장)을 겸하였다.천주교 서울교구장이던 원 라리보 주교의 측근으로도 활동하였다.[36] 1933년 6월 10일 천주교 서울교구에서 원 라리보 주교와 주간 윤형중(尹亨重) 신부를 중심으로 잡지 ‘가톨릭 청년보’를 발간하자 장발·이동구·정지용 등과 함께 편찬위원으로 활약하였다.[37] 장면은 가톨릭 청년보에 칼럼과 기고문을 투고하였으며, 잡지는 1971년까지 발행되었다. 이 기간 중 그는 철저하게 비정치적인 칼럼과 글, 시를 발표했다.
1933년 3월 29일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B조에 합격[38] 하였으나, 경성제국대학 문과 재학 중 중퇴하였다.
총리까지 역임한 장면이 창씨개명을 했고, 학교 다닐 때 신사참배도 하였지만,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 이사직을 맡았던 경력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이 매월 첫째 주를 애국주일로 정해 ‘무운장구기원미사제’를 지냈으며, 미사 후에는 시국에 대한 강론을 갖고 미사 후 단체로 신궁 또는 신사참배를 갖도록 독려했다는 데에 있었다.[183]
1999년 정운현의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에서 친일파로 지목된 이래, 2004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파 708인에 선정되었다. 1940년 7월 동대문경찰서에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서 국방 헌금을 냈고, 1941년 8월 7일 종교계의 총동원을 논의하는 종교계 시국간담회에 노기남과 함께 천주교 대표로 참석했다.[184] 1943년 6월 16일 동성상업학교 교유와 생도들로부터 모금한 항공기 구입비 130JPY을 동대문경찰서에 냈다. 1944년 9월 국민동원총진회 중앙위원을 맡았다[184]는 것이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로마 가톨릭 부문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진상규명위)에서는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분류하지 않았다.[185]
추기경 김수환은 학도병으로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하였음에도, “장면은 단순히 신자 대표자로 활동한 것”이라고 적극 옹호하였다. 2005년 10월 21일 동아일보와의 기자회견에서 장면, 노기남, 김성수 등이 친일파로 선정되자 김수환은 이를 옹호하며, 일부 민간단체에서 친일파로 선정한 것에 대해 “노기남 대주교는 천주교 대표로 되고, 신자 대표로는 장면 박사가 되어 본인 의지와는 상관없음”을 해명하고, “단순히 친일이라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너무나 가벼운 행동이며 어른들에 대한 모독이다.[186][233] 저(김수환) 또한 학도병을 갔다 왔고, 창씨개명과 학교 다닐 때 신사참배도 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을 것”이라며 객관성이 결여된 위치에서 친일파 선정 기준에 의문을 제기하고 옹호하였다.[186]
한편, 한때 주일대사를 지낸 라종일은 그를 다마오카 쓰토무라고 부르며 조롱했다가 자신의 부친에게 혼났다고 밝혔다. "소년 시절 인근에 사시던 장면 총리님을 일본 이름 다마오까 쓰도무(玉岡勉)씨로 불렀다가 부친에게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그 꾸중의 의미를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101]"라는 것이다. 한편, 그가 제5대 부통령으로 출마할 당시 일부 단체의 이름으로 붙은 구호는 '음흉한 친일도배(徒輩)에 속지 말자', '민족정기가 통곡한다' 등이었다.[101] 그러나 그의 얼굴을 일본군에 합성한 사진은 1960년 정부통령 선거 외에도 그해 8월 총리 선출 기간에도 유포되었다.
1960년 8월 19일 국회에서 장면의 총리 지명 동의안 표결 직전, 김두한이 장면의 친일경력을 문제삼기도 했다. 김두한은 장면에게 역사적인 귀한 표를 던져서는 안 된다는 내용과 장면의 창씨명을 적은 전단을 뿌리고, 만일 장면을 총리로 뽑는다면 여의도 의사당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외쳤다.[187]
김수환은 그가 조선총독부로부터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과장된 행동을 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 추기경이 졸업반인 5학년 때의 일화가 전해진다. 일제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했던 학생 김수환은 ‘수신(修身) 시간’에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시험문제를 받았다. “황국신민이 아니어서 소감이 없다.”라고 답했다.[188]”
김수환에 의하면 장면의 배려로 오히려 무사했다 한다. '결국 교장이던 장 전 총리에게 불려가 뺨을 맞았다. 장 전 총리가 김수환 학생을 호출해 일부러 꾸짖은 것은 ‘이대로 가다가는 큰 재목 하나를 잃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수신 담당 선생에게 선처를 부탁하기 위해서도 절차가 필요하기도 했다.[188]' 김수환은 퇴학을 각오했는데 오히려 도쿄의 가톨릭계 대학인 조치(上智)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게 된다.[189]
장면이 조선총독부에 협력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일제 치하 천주교가 선교활동의 자유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일제의 지배를 인정하는 동시에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반대했던 바, 신앙심이 깊은 장면으로선 그 노선을 따랐을 뿐 장면을 친일파로 보긴 어렵다는 시각이 있다.[190]
2005년 10월 21일 김수환 추기경은 '일제는 태평양전쟁 말기 우리나라를 국민총동원체제로 끌고 가면서 여러 단체를 만들어 각 단체의 기존 책임자를 대표로 내세웠다. 그때 장면 박사는 대표적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자단체의 대표가 됐는데 단순히 이를 두고 친일로 매도하는 것은 너무나 가벼운 일이다.[191]'고 반박했다. 김 추기경은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져야 하지 않느냐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성경 말씀대로 ‘너희들 중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져라’라는 말을 해 주고 싶다”면서 “당신들 아버지가 창씨개명을 안했거나 학교 다니면서 신사참배 안한 사람 있거든 이분들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덧붙였다.[191]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 후보 명단에 장 전 총리를 올렸을 때, 김수환은 “각 종교단체 대표를 내세웠던 일제 말기 정책에 따라 대표적 가톨릭 신자였던 장 전 총리는 어쩔 수 없이 대표가 됐는데 이를 두고 친일로 매도하는 것은 너무 가볍다”라며 강한 유감을 표시했었다.[193] 김 추기경은 “선생님(장 전 총리)이 나를 살리시려고 일본인 선생들 앞에서 ‘오버’를 하신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한 동성상고 동문회 관계자는 “추기경님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선생님은 성인(聖人) 반열에 오르셔야 할 분’이라며 장 전 총리에 대한 진실을 밝히려 애쓰셨는데 뜻을 이루지 못해 눈을 감으며 아쉬우셨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177]
2. 3. 광복 후 정치 활동 (1945~1960)
1945년 광복 이후 장면은 가톨릭 세력과 경향신문 그룹의 지원을 받아 정계에 입문했다. 1948년 5.10 선거에서 제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1948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단 수석으로 참가하여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승인받는 데 기여했다.1949년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되어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유엔에서 한국 승인 및 유엔군 파병 등 후속 대응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국 측도 장면의 국제 감각을 높이 평가했다.
1950년 11월, 이승만의 요청으로 제1공화국의 제2대 국무총리로 임명되었으나 처음에는 거절하였다. 그러나 1951년 10월부터 1952년 4월 29일까지 국무총리로 재직하며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6차 유엔총회에 참석하였다.
1955년 민주당에 입당하여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로 출마, 여당인 자유당의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고, 야당인 민주당의 장면이 부통령이 되는, 여야가 대통령과 부통령 자리를 나눠 갖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러나 장면은 부통령에 취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권력을 가진 이승만에 비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할 기회가 없었고, 거의 유폐된 상태에 가까웠다.
1956년 9월 28일에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저격수의 총격을 받아 손목에 관통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암살 시도는 자유당의 최고위층에 의해 기획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장면은 자유당의 이기붕과 갈등을 빚었다.
1959년 민주당 최고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에게 큰 표 차이로 패배했다.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했고, 마산에서 시위에 참여했던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4·19 혁명과 이승만 정권 붕괴의 촉매제가 되었다.
1960년 4월, 장면은 잔여임기를 4개월 남겨놓고 부통령직을 사퇴했다. 민주당 신파 내부에서도 사퇴를 만류했지만 그는 사퇴를 고집했다. 장면의 부통령직 사임은 이승만의 하야를 유도하려는 목적이었다는 주장과, 부통령으로서의 도의적인 책임, 이승만의 불행을 이용해서 권력을 잡는다는 인식을 심는 것이 싫어서였다는 주장이 있다.
민주당 구파는 장면의 부통령직 사퇴에 대해 정략적 사임설을 주장하며 비판했고, 김도연은 장면이 부통령직을 사퇴하지 않고 대통령직을 유지한다면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2. 3. 1. 광복 직후
1945년 광복을 맞이하자 장면은 가톨릭 세력의 대변자로서 지지를 받아 정계에 입문했다. 가톨릭 신자들과 당시 가톨릭 계열 언론이었던 경향신문 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1948년 5.10 선거에서 제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뛰어난 영어 실력 등을 인정받아 외교관으로 전직했다. 같은 해 12월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단 수석으로 참가하여,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서의 승인을 얻어냈다.[42]1946년 2월 11일, 민주주의원 의원 및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8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 그는 제1공화국 이승만 정부에서 주요 정치 인물로 부상했다.
1948년 5월 10일, 서울 종로 지역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5월 30일 당선되었다. 같은 해 10월 11일, 유엔 총회에 대한민국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하여 1948년 12월 12일 유엔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주권 국가로서의 승인을 받았다. 1949년에는 그의 외교적 노력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를 표한 바티칸을 방문하여 감사를 표했다.

1949년 12월, 주미 대한민국 대사로 임명되었다. 1950년 4월에는 대한민국 특사로서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을 방문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 직후, 미국과 유엔으로부터 긴급 지원을 적극적으로 요청했다.
이후에도 장면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중용되어 한국의 외교 활동에 투입되었다. 1949년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되었고, 한국 전쟁 발발 당시에는 유엔에서 한국 승인 및 유엔군 파병 등 후속 대응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국 측도 장면의 국제 감각을 높이 평가하여, 당시 주한 미국 대사가 차기 대통령으로 장면을 희망하는 내용의 외교문을 보내는 등, 미한 관계에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지병인 간염 발병으로 미군 병원에 입원하여 1955년까지 정치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2. 3. 2. 제헌 국회의원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종로구에서 출마, 5월 30일 당선되었다. 같은 해 10월 11일 유엔 총회에 대한민국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 12월 12일 유엔으로부터 대한민국이 주권 국가로 승인받는 것을 지켜보았다. 1949년에는 바티칸을 방문하여 감사를 표했다.[39]2. 3. 3. 외교 활동
1946년 2월 11일, 민주주의원 의원 및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8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5월 10일 5.10 총선거에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10월 11일, 유엔 총회에 대한민국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하여 1948년 12월 12일 유엔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주권 국가로서의 승인을 얻어냈다.[33] 1949년에는 외교적 노력에 적극적으로 지지해준 교황청을 방문하여 감사를 표했다.1949년 12월, 주미 대한민국 대사로 임명되었다. 1950년 4월에는 대한민국 특사로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을 방문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 직후, 미국과 유엔에 긴급 지원을 적극적으로 요청했다.
1945년 광복 이후, 가톨릭 세력과 경향신문 그룹의 지원을 받아 1948년 5.10 선거에서 제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뛰어난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외교관으로 전직했고, 같은 해 12월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단 수석으로 참가하여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승인받았다.
1949년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되었고, 한국 전쟁 발발 당시에는 유엔에서 한국 승인 및 유엔군 파병 등 후속 대응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국 측도 장면의 국제 감각을 높이 평가하여, 당시 주한 미국 대사가 차기 대통령으로 장면을 희망하는 내용의 외교문을 보내기도 했다.
2. 3. 4. 초대 주미대사 및 제2대 국무총리
1948년 5.10 선거에서 제헌의원으로 당선된 후, 뛰어난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외교관으로 전직했다. 같은 해 12월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 한국 대표단 수석으로 참가하여,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서의 승인을 얻어냈다.[30]1949년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되었다.[30]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당시에는 유엔에서 한국 승인 및 유엔군 파병 등 후속 대응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국 측도 장면의 국제 감각을 높이 평가하여, 당시 주한 미국 대사가 차기 대통령으로 장면을 희망하는 내용의 외교문을 보내는 등, 미한 관계에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1950년 11월, 제1공화국의 제2대 국무총리로 임명되었으나 처음에는 거절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1951년 10월부터 1952년 4월 29일까지 국무총리로 재직하였다.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6차 유엔총회에 참석하였다.
2. 3. 5. 제4대 부통령
1955년 9월 18일,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후보 자리를 신익희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대신 그는 신익희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는데, 신익희는 1956년 5월 5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1956년 5월 30일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41.7%(401만 2654표)로 39.6%(380만 5502표)를 얻은 이승만의 러닝메이트였던 자유당의 이기붕을 20만여 표의 근소한 차로 누르고 제4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94] 이로써 여당인 자유당의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고, 야당인 민주당의 장면이 부통령이 되는, 여야가 대통령과 부통령 자리를 나눠 갖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러나 장면은 부통령에 취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권력을 가진 이승만에 비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할 기회가 없었고, 거의 유폐된 상태에 가까웠다.
1956년 9월 28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시공관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저격수의 총격을 받아 손목에 관통상을 입었다. 암살 미수범은 즉시 체포되었다. 이 암살 시도는 자유당의 최고위층에 의해 기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장면은 자유당의 영향력 있는 인물인 이기붕과 갈등을 빚었는데, 이기붕은 스파이를 보내 그를 감시했다.[18]
1959년, 그는 대한민국 민주당 최고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그는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이자 대통령 후보 조병옥의 러닝메이트가 되었다. 장면은 대통령 후보가 되려고 시도했지만, 다시 한번 조병옥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같은 해 11월, 그는 민주당 최고위원회 위원으로 재선되었다.
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 부통령 선거에서 장면은 이기붕에게 의심스러울 정도로 큰 표 차이로 패배했고, 이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거리로 나섰다. [4] 남부 도시 마산의 야당 민주당 당사 앞에 1,000명의 주민들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경찰이 발포하자 시위대는 돌을 던지며 맞섰다. 시위 진압 후, 시위에 참여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인근 해변에서 발견되었다. [4] 이 비극적인 사건은 4·19 혁명과 1960년 5월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혁명의 촉매제가 되었다.
1960년 4월, 잔여임기를 4개월 남겨놓고 부통령직을 사퇴했다. 민주당 신파 내부에서도 이승만이 퇴진하면 그가 대통령직을 승계할 것이라며 사퇴를 만류했지만 그는 사퇴를 고집했다.
장면은 부통령직 사임 이유로 정권을 내놓더라도 장면이 대통령직을 계승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하여 이승만의 하야를 유도하려는 것이었다[106]는 주장과 두 번째로 부통령으로서의 도의적인 책임, 세 번째로 이승만의 불행을 이용해서 권력을 잡는다는 인식을 심는 것이 싫어서였다고 하였다.[107][108][109]
장면의 부통령직 사임에 대해 이영석은 이승만이 퇴임하고 3.15 선거가 무효로 처리되면 잔여 임기가 4개월도 안되지만 대통령직이 장면에게 넘어오게 되어 있는데 이것을 거부한 것은 무책임한 주장이라고 비판하였다.[106][110]
민주당 구파는 장면의 부통령직 사퇴에 대해 정략적 사임설을 주장, 그가 새 정부의 실권을 잡는데 보다 유리하리라는 정치적 타산에서 부통령직을 사퇴했다고 비판했다. 독재 방지를 위해 내각책임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장면이 대통령이 되면 내각제 개헌을 실현해야 되는데, 현직 대통령에 있으면서 차기 정부 국무총리직 경쟁에 나서는 것은 여론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할 것이고 그것을 내다본 것이라는 것이었다.[107]
민주당 구파 인사였던 김도연은 1968년에 펴낸 자신의 회고록에서 장면의 부통령직 사퇴가 이승만 하야를 촉진했을 가능성은 인정하였으나, 당시 장면이 부통령직을 사퇴하지 않고 대통령직을 유지한다면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111][112]
2. 4. 제2공화국 국무총리 (1960~1961)
1960년 8월 19일, 장면은 국회에서 총유효득표수 225표 중 찬성 117표, 반대 107표, 기권 1표로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에 선출되었다.[31] 이는 의원 내각제로 권력 구조가 바뀐 후의 일이었다.[26] 총리 취임 직후 장면은 "당면한 민족적 과제인 경제적 건설을 수행해야 할 중대한 책임을 통절하게 느껴 마지않는다"고 연설하였다.[121]총리 선출 과정에서 김두한은 장면의 친일 경력을 문제 삼으며, 창씨개명 문건을 배포하고 국회 의사당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했으나 제지당했다.[119][120]
8월 20일부터 조각에 착수했으나, 민주당 내 신·구파 간 갈등과 신파 내 소장파의 요직 요구로 어려움을 겪었다.[122] 1960년 8월 18일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장면은 정치, 경제적 개혁과 경제 성장이 새 정부의 핵심 정책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1960년 11월 11일, 장면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요청을 받아들여 중앙정보위원회를 창설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150] 1961년 3월 2일에는 직속 정보기관인 시국정화단을 조직했다. 이후락이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정보실장 겸 연구실장으로 발탁된 것은 미국 중앙정보국의 추천 때문이었다.[150] 그러나 장면은 이후락을 불신하여 1961년 3월 28일 이기호를 연구실 부실장으로 임명하여 견제하게 했다.
1961년, 장면 정부는 한일 기본 조약 체결을 위한 회담을 재개하려 했으나, 5·16 군사 정변으로 중단되었다.
2. 5. 5.16 군사정변과 이후 (1961~1966)
1961년 박정희 등이 일으킨 5·16 군사 정변으로 제2공화국이 붕괴하면서, 장면은 5월 16일 총리관저를 떠나 미국대사관에 신변보호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168] 5월 17일 새벽, 카르멜 수녀원으로 피신한 장면은 주한 미국대사관에 계속 연락했지만, 미국 국무부는 불개입 의사를 밝혔다.[168] 5월 18일 미국 측의 불개입 의사를 확인한 장면은 5월 21일 공식 기자회견에서 내각 총사퇴를 발표했다.[168]장면은 윤보선과 민주당 구파, 신민당의 비협조와 구파 계열이 군사정변을 묵인 내지는 동조했다고 비판하였다.[169] 그는 자신이 쿠데타로 축출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며 억울함을 토로하였다.[170]
총리 퇴임 후, 장면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 정치정화법 대상자로 지정되어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10] 1961년 9월 7일 군사혁명재판소 군사 재판에 출두하여 증언하였으며, 11월 10일 불기소 연금에서 해제되었다.[33] 1962년 6월, 장면은 이주당 사건의 배후라는 의혹을 받았고, 8월에는 구 이주당계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171] 공산주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법정 구속, 사형이 구형되었다가 9월 감형되어 징역 10년이 선고되었으나 10월 15일 보석으로 출감하였다.[33]
1963년 2월, 다시 구 이주당계 사건으로 기소되어 3년 징역, 5년 집행유예 항소심 판결을 받았다.[30] 그해 박순천, 오위영, 현석호, 조재천, 김도연 등과 함께 민주당 재건에 참여하였다. 12월 14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정치정화법 해당자 일부를 해제하였으나, 장면은 해제되지 않았다.
장면은 총리 재임 기간 동안 10여 차례 쿠데타 정보를 입수했지만, "미군이 있는데 어떻게 쿠데타를 하겠소"라는 말로 대응했다.[200] 1960년 12월 김도연으로부터 정변 음모를 전달받은 윤보선은 장면에게 알렸지만, 장면은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에게 알아보니 별일이 아니라고 대응하였다.[202]
3. 사후
1964년 7월 20일, M.V. 우드게이트(M.V.Woodgate)의 저서 《성 빈센트 바오로(St.Vincent de Paul)》를 한글 번역한 『성 원선시오』를 출판하였다. 1965년 3월 27일 천주교 혜화동 교회 평의회 회장에 피선되었다. 박순천, 현석호, 조재천 등을 전도하여 천주교에 귀의하게 하였다.
1965년 7월에는 김포공항을 방문, 비행기편으로 운구되는 이승만 시신 영접에 참석한 뒤, 7월 27일 ‘이승만 박사 국민장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1966년 1월 27일 간염과 당뇨병 등의 악화로 성모병원에 입원하였다. 5월 14일 박정희 정권은 장면을 정치정화법 대상자에서 해제시켜 주었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자 5월 24일 다시 미아리 성가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가망이 없자 자택으로 옮겨졌다. 6월 4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 자택에서 간염, 당뇨병 등의 합병증으로 향년 68세로 숨졌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선례에 따라 가족장(家族葬)을 할 것을 유언했으나 장례는 국민장(國民葬)으로 정해졌다.
6월 6일 가족장을 결정했다가 다음날 국민장으로 변경되었다. 1966년 6월 10일 동대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되었고, 6월 12일 서울시에서 시가행렬과 노제를 거쳐 경기도 포천군 소흘면 이동교3리 산14-1(현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이동교3리 산 14-1) 윗용산골 천보산의 천주교 혜화동교회 포천묘원에 안장되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복권 노력이 시도되었고, 1999년 7월 5일에는 운석기념회가 공식 출범했다. 1999년 4월 28일 김수환 추기경은 강원도에서 추기경 서임 30주년 축하식을 열어준 군종사제들과의 면담에서 "장면 총리의 역사적인 재평가 작업을 여생동안 이뤄보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172] 6월 4일 장면 총리 서거 33주년 기념일에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은 김수환 추기경에게 “장면 전 총리의 포천묘소를 국립묘지로 이장할 것을 제의하면서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172] 6월 11일과 6월 12일 대한매일에 “5·16 당시 나라가 공산화 직전에 있었다든가, 장 정권이 지나치게 부패했다는 쿠데타 명분에 대해서 상당 부분 공정한 주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밝히는 등 이 땅에 최초의 민주주의 꽃을 피운 제2공화국의 역사가 우리 현대사에 정직하게 기록될 것을 희망했다.[172]
1999년 7월 5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동숭동 흥사단 강당에서 운석기념회가 창립되었다.[173] 9월 20일 동성고등학교 대강당(대학로 혜화로터리 옆)에서 운석장면박사 탄신 100주년 기념음악회가 열렸다.
1999년 8월 27일, 김대중 대통령은 서울 혜화동 성당에서 열린 ‘운석 장면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 미사’에 참석, '장면과 제2공화국이 무능하고 부패했다는 비난은 5·16 쿠데타 세력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였다.[174] 김대중은 직접 미사에 참여해 “장 박사 정권이 무능하고 부패하고 혼란했다는 말은 5·16 쿠데타 세력이 쿠데타 정당화를 위해 국민의 머리를 세뇌시킨 결과”라며 “장 박사님에 대한 부당한 평가가 오늘 건국훈장 추서로 말끔히 씻겨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축하했다. 9월 13일 세종로 정부청사에서 김종필 국무총리 주재로 임시 국무회의를 열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175] 그러나 장면의 건국훈장 중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 추서에 대해 논란이 있다.[176] 같은 날, 김대중 정부는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을 추서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장면을 가톨릭 성인(聖人)으로 추대하는 운동을 주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동성상고 동문회의 한 관계자는 “추기경님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선생님은 성인(聖人) 반열에 오르셔야 할 분’이라며 장 전 총리에 대한 진실을 밝히려 애쓰셨는데 뜻을 이루지 못해 눈을 감으며 아쉬우셨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177]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정치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178]
1999년 6월 4일 장면 총리 서거 33주년 기념일에 박지원은 김수환 추기경에게 취임인사차 예방하고 “장면 전 총리의 포천묘소를 국립묘지로 이장할 것을 제의하면서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172] 그러나 일부 여론의 반발과 무응답으로 장면의 국립묘지 이장건은 무산되고 말았다.
4. 평가와 비판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에 장면을 가톨릭 성인(聖人)으로 추대하는 운동을 주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177] 김수환은 장면이 일제강점기에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재직 당시, 학생이었던 자신의 뺨을 때리며 혼을 냈는데, 이는 학교 밖에서 처벌받을 것을 우려한 장면이 일부러 체벌을 가해 이를 막기 위함이었다고 회고했다. 장면은 일본인 교감이 나간 직후 김수환에게 직접 사과했다.
2006년 장면 서거 40주년 미사에서 김 추기경은 “장 전 총리는 성인의 지위에 오를 만한 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180] 1999년 장면 탄생 100주년 기념 미사에서는 “성인 추대를 교회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181] 김 추기경은 1990년대부터 장면의 성인 추대 운동을 추진했으며, 1999년 8월 강론에서는 "장면 박사는 정치인으로나 신앙인으로 모범적이고 거룩한 분이었다"고 회고했다.[182]
그러나 장면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외에도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 이사직을 맡았던 경력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랐다.[183] 1999년 정운현의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에서 친일파로 지목된 이래, 2004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파 708인에도 선정되었다. 2008년에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중 로마 가톨릭 부문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분류하지 않았다.[185]
김수환 추기경 자신도 학도병으로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했음에도 장면을 적극 옹호했다.[186] 2005년 10월 21일 동아일보와의 기자회견에서 장면, 노기남, 김성수 등이 친일파로 선정되자 이를 옹호하며 “단순히 친일이라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너무나 가벼운 행동이며 어른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판했다.[186][233]
한편, 라종일은 장면을 일본 이름 '다마오카 쓰토무'로 불렀다가 부친에게 꾸지람을 들었다고 회고했다.[101] 1960년 8월 19일 국회에서 장면의 총리 지명 동의안 표결 직전, 김두한은 장면의 친일 경력을 문제 삼아 전단을 뿌리고 의사당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했다.[187]
김수환은 장면이 조선총독부로부터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오버'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수환은 “황국신민이 아니어서 소감이 없다”라고 답했다가 교장인 장면에게 불려가 뺨을 맞았으나, 이는 장면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증언했다.[188] 장면의 배려로 김수환은 퇴학 대신 도쿄의 가톨릭계 대학인 조치(上智)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189]
장면이 조선총독부에 협력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일제 치하 천주교가 선교활동의 자유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일제의 지배를 인정하고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반대했기에, 신앙심이 깊은 장면은 그 노선을 따랐을 뿐이라는 것이다.[190]
2005년 10월 21일 김수환 추기경은 “장면 박사는 대표적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자단체의 대표가 됐는데 단순히 이를 두고 친일로 매도하는 것은 너무나 가벼운 일”이라고 반박했다.[191]
민족일보는 1961년 2월 8일 체결된 한미경제원조협정을 비판했고, 장면은 민족일보가 정권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했다.[194] 1961년 2월 말 국무원 사무처는 민족일보에 대한 인쇄중단을 지시했다. 민족일보는 제2공화국의 언론 탄압이라며 비난했다.
측근이자 사돈인 경향신문의 한창우는 장면에게 인사청탁을 했으나 거절당했다.[195]
4·19 혁명과 3.15 부정선거 당시 학생 시위 진압자에 대한 미온적인 처벌도 논란이 되었다. 장면은 자유당 관련자 처벌에 미온적이었는데, 이는 미국의 요청 때문이기도 했다.[196] 장면은 정치보복을 반대하며 자유당계 인사들에 대한 처벌에 반대했지만, 부정선거 관련자들은 처벌하려 했다.
장택상은 장면이 비밀리에 사람들과 손을 써서 대통령에 취임하려고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197] 허정에 따르면 장면은 간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입후보할 것을 논의하고, 파리 체류 중에도 모의를 계속했다.[197] 장택상은 장면의 태도가 수상했다고 주장했다.
장면은 자신이 무능력했다는 주장에 대해 내각 출범 후 19일째 되는 날부터 쿠데타를 기도했는데 무능할 기회를 주기라도 했느냐고 반박했다.
이승만의 측근들은 장면이 2대 국무총리 재직 시부터 이승만 축출 모의에 적극 개입했다고 비판했다. 윤치영은 장면이 이승만을 세 번이나 제거하려 했다고 주장했다.[205] 장택상은 허정으로부터 장면이 대통령 출마를 시도했다는 증언을 들었다고 했다.[206]
박용만은 장면이 이승만 밑에서 국무총리직에 있을 때부터 야당 의원들과 서로 통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207]
부산정치 파동 당시 병원선 피신 주장에 대해 장면은 미국 육군병원에 입원하여 4개월간 치료를 받았으며 병원선엔 가 본 일이 없다고 항변했다.[81]
장면 본인의 의사와는 관련없이 곽상훈 등 야당 의원들은 장면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했다. 곽상훈에 의하면 내각책임제로 바꾸고 장면을 국무총리로 추대할 계획이었다 한다.[211]
장면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나치즘, 파시즘, 페미니즘 등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는 이러한 사상들이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침해하고 파괴하는 악질적인 사상으로 규정했다.
과거의 죄악에 대한 소급입법 적용을 반대했다. 4.19 혁명 당시 사망자 유가족들은 관련자 처벌을 주장했으나, 장면은 소급입법이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며 정치보복과 연좌제로 흘러갈 수 있다고 반대했다. 김대중은 장면의 소급입법 반대를 높이 평가했다.
장면은 1960년 10월 7일 시작된 3.15 부정선거 관련자 재판과 10월 8일 석방에 대해 형량이 너무 가볍다고 화를 냈다.[215] 그러나 소급입법에는 반대하며 "끝내 보복을 위한 소급입법을 고집한다면 스스로 당을 떠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216] 장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급입법안은 국회를 통과했다.
그는 자유를 강조하며, 범죄행위와 반역행위 이외에는 어떠한 형태의 자유든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조광은 "장면 박사는 (중략) 자유당 독재체제 아래 위축됐던 각 이익집단과 사회단체들이 분출해내는 욕구를 권위주의적인 방법으로 억누르지 않았습니다. 대화라든지 협력을 통해 자율적으로 해결하려는 방법을 취했습니다.[203]"라고 평가했다.
그는 한민족의 민족성을 고쳐야 한다고 보았으며, “우리의 민족성은 신앙으로 고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으로만 이 혼란을 극복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222]
고결한 인격자, 편협, 무능력하고 나약하다는 시각 등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과 수호에 발군의 역할을 한 외교관이며[36] 한국 전쟁 당시 미국과 국제 사회를 설득하여 미군과 UN군의 참전을 이끌어낸 점이 높이 평가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로 의원내각제를 실시하고, 민주적 선거절차에 의한 정권교체를 이루었다는 평가도 있다. 박정희 정권은 5·16 군사정변 이후 장면을 부정, 부패, 무능의 상징이라 주장했으나, 박정희는 장면 내각 출범 19일 뒤부터 군사 정변을 모의했다.
김영수에 의하면 “장면은 경제와 외교 분야에 상당한 의욕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라고 평가했다.[229]
언론인 봉두완은 장면의 업적을 “건국의 주도자로서 국제사회에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자리매김한 외교적 성과에 있다”라고 평가했다.[230]
김수환 추기경은 일제강점기 동성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장면이 자신을 살리려고 일본인 선생들 앞에서 ‘오버’를 했다고 증언했다.[233][232] 김수환은 장면이 친일파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09년 사망했다.[233][232]
15대 대통령 김대중은 1999년 ‘운석 장면 박사 탄신 100주기 추모미사’에서 장면을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민주주의 지도자"라고 칭송했다.
14대 대통령 김영삼은 “박정희는 역사적 죄인으로 쿠데타가 없었으면 그가 나라를 잘 이끌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236][237]
허동현 교수는 장면이 “이승만의 최대의 협력자였다”라고 보았다.[36] 노길명 교수는 “장면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가톨릭신앙이 결합되어 있는 분"이라고 평가했다.[36]
- 5·16 군사 정변을 막지 못한 일로 무능하다, 나약하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이는 장면 내각 출범 직후 18일 만에 5·16 군사 정변이 모의되고 있었으므로 타당하지 않은 평가라는 반론도 제기된다. 전북대학교 강준만 교수는 “그가 검소하고 온화하였지만, 나약하고 의타적이었다”라고 평가하였다.[125] 미국측 문헌에는 지적이고 유능하며 합리적이요, 유순한 인물로 묘사되었다는 의견도 있다.[240]
- 강준만은 “장면은 직업을 잘못 찾은 사람이었다. 그는 종교인이 되었으면 딱 어울렸을 사람이었다”[242] 장면은 지독한 숭미주의자였다.[242]는 평도 내렸다. 김영삼은 장면이 참 무능하다고 혹평하기도 했다.[237]
- 경희대학교 허동현 교수는 “장면이 개인적으로는 교육자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일제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교육활동은 할 수 없었[36]”다고 변론했다.[36]
- 언론인 양호민은 장면이 퇴폐적이고 향락적이며 그가 기용한 인물들 역시 '민족해방투사에 기여한 독립투사는 하나도 없고[244]', 그는 '정치적으로 식견도 없고 경륜도 없다[244]'고 비판했다.
- 재일본 저술가 겸 사회운동가 정경모는 수녀원 피신을 두고 “도망한 지 5일째에 모습을 나타내어 (중략) 한국 사상 유일한 민주주의 정권을 너무도 간단히 박정희 앞에 내밀어 그것을 이양하는 서약서에 서명하였다”며 비판했다.[245]
- 장면 정부는 국민이 데모할 수 있는 자유를 터놓았으며, 정치적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국민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장면 정부의 긍정적인 면모는 한국 국민의 정치의식의 성장에 관계된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선상의 것이지 장면 정부와 장면 개인에 대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246]
이덕일은 5·16후 윤보선과 장면의 행보를 비교하며, 장면은 쿠데타를 막지 못한 역사의 죄인이란 죄의식 속에 참회하다가 죽어갔다고 평가했다.[247]
박정희와 비교하여 적극적이지 못함을 지적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만약 장면 총리가 책임성이 강한 지도자였다면 수도원으로 피신할 것이 아니라,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연락하고, 각료와 자신을 지지하는 장성들에게 연락하여 사태를 저지하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했을 것이라는 비판이다.[249]
고려대학교 조광 교수는 '각종 한국사 개설서를 들춰보았는데 자유당에서 민주당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부정 일변도로 기술했습니다. (중략) 저는 장면정부가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이 아니었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부패, 무능은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이 정당성을 강변하려고 조작한 것입니다.[203]'라고 평하였다.
이승만은 자신이 대통령직을 내놓을 경우, 자신 대신 대통령이 될 인물로 장면과 조병옥을 꼽았다.[250] 그러나 이 두 사람의 도덕성과 능력, 애국심, 미국에 대한 독립적인 자세에 대해 의심했다.
장면은 경기도 천보산(Cheonbosan)에 있는 혜화성당 묘지에 안장되었다. 1999년 10월 27일, 대한민국 김대중(Kim Dae-jung) 대통령으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1등급을 추서받았다.[7]

장면은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가치를 옹호했다. 그는 소련의 공산주의와 독일의 나치즘, 그리고 어떤 형태의 전체주의와 권위주의에도 단호히 반대했다.
장면은 공공선의 맥락에서 개인주의를 믿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만연한 정치적, 경제적/금융적 부패를 혐오했다.
장면은 검소하고 절약하는 삶을 살았다. 현재 개조된 그의 옛 집은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박물관으로 개조되었으며,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다.
1940년대 후반 국회의원으로 재직 당시 장면은 사실혼 관계와 매춘을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하여 통과시켰다. 그는 평생 금주와 금연을 했고 클래식 음악 감상을 즐겼다. 그는 김대중의 가톨릭 개종에 영향을 미쳤고 그의 대부가 되었다. 김대중은 나중에 장면을 "한국 사회의 많은 악을 바로잡기 위해 가톨릭 행동을 믿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회상했다.[9]
장면에 대한 평가는 한국에서는 여전히 낮다. 쿠데타 발생 당시 국가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서울 시내의 여자 수도원에 몸을 숨겼다는 점이나, 국정 책임자로서 반란군을 진압하지 않았다는 점 등이 비판받고 있다. 하지만, 수도원에 몸을 숨겼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도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반란군 진압에 대해서도 미국의 쿠데타군 진압을 기다렸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 하에서 난항을 겪고 있던 한일 국교 정상화 협상을 본격적으로 재개하였거나[22], 한국 독자적인 경제 개발 계획의 설계에 착수한 것에 대해 평가하는 입장도 있다. 박정희 정권 초기의 경제 개발 계획은 장면 정권 하의 계획을 그대로 전용한 것이라고도 한다.[23]
5. 상훈
수여 내용 | 날짜 | 비고 |
---|---|---|
Knight Commander of the Order of St. Sylvester영어 (성 실베스터 훈장 기사단장) | 1951년 5월 22일 | 바티칸 교황청 훈장[7] |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1등) | 1999년 | 김대중 대통령 추서[7] |
6. 저서 및 역서
해박한 신학 지식을 지녔던 그는 각종 가톨릭 서적이나 라틴어로 된 서적을 손수 한글과 한자로 번안, 번역하였다. 한국어를 비롯해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 독일어까지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대 이스라엘 등 히브리 지역의 각종 신화와 전설, 민담에 대해서도 해박하였다.
- 《구도자의 길》 (1930)
- 《영한교회용어집 ''The Summary of Religious Terms''》 (1929)
- 《조선천주공교회 약사》 (1931)
- 회고록 《한알의 밀알이 죽지 않고는》 (1967)
- 편역, 《성녀 젬마: 영혼의 진주 (성인전)》 (가톨릭 출판사, 1999)
- (교부들의 신앙 ''The Faith of Our Fathers'', Cardinal Gibbons, 1944)
- ( ''Why Must I Suffer?''의 번역본 <나는 왜 고통을 받아야 하나?>, F. I. Remler, 1962)
- ( ''St.Vincent de Paul''의 번역본 <성 원선시오>, M.V.Woodgate, 1964)
- 《누이》(妹) (1935)
- 자서전,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7. 가족 관계
장면 가계도 | ||
---|---|---|
증조부 | 진주 강씨(영세명 : 안나) | 장한후(張漢後) |
종조부 | 장치목(張致穆) | |
할아버지 | 진주 강씨 | 장치응(張致應, 영세명 : 도밍고) |
할머니 | 박 구네곤다(구네곤다, 춘천박씨) | |
큰아버지 | 양근 함씨 | 장규빈(張奎彬, 요한) |
큰어머니 | 함 루시아(루시아) | |
사촌 형 | 장지윤(張志允, 스더왕) | |
당조카 | 장명선(張明善) | |
사촌 여동생 | 장려재 (張麗才, 수산나) | |
아버지 | 황 루시아 | 장기빈(張箕彬, 레오, 1878년 9월 9일 ~ 1959년 7월 24일) |
어머니 | 황 루시아(루시아, 1878년 11월 ~ 1954년 2월) | |
첫째 남동생 | 장발(張勃, 루수, 호는 우석(雨石), Thomas Chang영어, 1901년 4월 3일 ~ 2001년 4월 8일, 서양화가) | |
둘째 남동생 | 장극(張剋, 발로, 호는 하석(霞石), Paul Chang영어, 1913년 4월 8일 ~ 2008년 2월 29일, 항공화학공학자·교수) | |
첫째 여동생 | 장정혜(張貞慧, 1904년 2월 19일 ~ 1975년 9월 26일) | |
둘째 여동생 | 장정온(張貞溫, 장 앙네다, 수녀, 1906년 10월 18일 ~ 1950년 10월 4일, 한국 전쟁 때 납북[227]) | |
셋째 여동생 | 장정량(張貞良, 1910년 3월 17일 ~ ? ) | |
넷째 여동생 | 장정순(張貞順, 1916년 4월 10일 ~ ? ) | |
부인 | 김옥윤(金玉允, 1901년 ~ 1990년 1월 27일) | |
첫째 아들 | 장영(張英, 1920년 7월 2일 ~ 1922년 음력 4월 6일) | |
둘째 아들 | 김종숙 | 장진(張震, 요셉, 1927년 2월 10일 ~ 2011년 9월 30일, 서강대학교 생물학과 명예교수) |
며느리 | 김종숙(베로니카, 1934년 ~ ) | |
셋째 아들 | 한광희 | 장건(張建, 1932년 2월 26일 ~ , 미국 거주) |
며느리 | 한광희(1935년 ~ , 언론인 한창우의 딸) | |
손자 | 장윤(1970년 ~ ) | |
넷째 아들 | 장익 (張益, 십자가의 요한, 1933년 11월 20일 ~ 2020년 8월 5일, 로마 가톨릭 주교) | |
다섯째 아들 | 아나리사 페르스트 | 장순(張純, 1935년 10월 17일 ~ , 미국 보스턴 리지스 대학교 정치학 교수·베이징 대학 초빙 교수, 미국 거주) |
며느리 | 아나리사 페르스트(독일인) | |
손자 | 장인(1967년 ~ ) | |
손자 | 장현(1975년 ~ ) | |
여섯째 아들 | 마리 오딜 오베르 | 장흥(張興, 1939년 9월 20일 ~ , 벨기에 루벵 대학 철학박사, 파리은행 은행원, 프랑스 거주) |
며느리 | 마리 오딜 오베르(1948년 ~ ) | |
손자 | 장훈(1971년 ~ ) | |
손자 | 장문(1974년 ~ ) | |
손자 | 장원(1976년 ~ ) | |
손자 | 장은(1982년 ~ ) | |
첫째 딸 | 장명숙(張明淑, 안나, 1918년 8월 10일 ~ 1919년 8월 2일) | |
둘째 딸 | 장의숙(張義淑, 베네딕타, 1930년 2월 21일 ~ 로마 가톨릭 수녀, 미국 거주) | |
셋째 딸 | 공영길 | 장명자(張明子, 데레사, 1941년 10월 3일 ~ 1987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빌라노바 대학교 도서관학 석사) |
사위 | 공영길(1933년 ~ , 안과의사 공병우의 장남)[228] | |
외손녀 | 공은혜(1972년 ~ , 변호사) | |
외손녀 | 공은영(1974년 ~ , 회계사) | |
외손자 | 공요한(1975년 ~ , 변호사) | |
조카 | 장현숙(張賢淑, 루이사, 1933년 3월 30일 ~ ) | |
외할아버지 | 황성집(黃聖集) |
장면의 아내 김옥윤(1901~1990)은 90세에 사망했다. 슬하에는 아들 여섯 명과 딸 세 명을 두었으나, 첫째와 둘째는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첫째 딸 안나 장명숙은 한 살도 되기 전에, 둘째 아들 요셉 장영은 두 살에 사망했다.
장진은 프린스턴 대학교와 서강대학교 생물학과 교수를 지냈다. 베네딕타 장의숙은 예술가이자 교사로, 노틀담 수녀회 회원이다. 앤드류 장건은 건축가였다. 장익은 춘천교구의 로마 가톨릭 주교를 지냈다. 레오 장순은 정치학 교수였다. 마태오 장흥은 파리은행의 관리자였다. 테레사 장명자는 사서로 일했다.
장면에게는 남동생 두 명과 여동생 세 명이 있었다. 형 루이스 장발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장을 역임한 예술가였다. 동생 바오로 장극은 NASA, 가톨릭대학교(워싱턴 D.C.),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물리학 및 항공우주 과학 교수로 재직했다. 세 여동생 중 큰언니 구나군다 장정해는 사망했고, 둘째 아그네타 장정온은 메리놀 수녀로 북한에서 우리들의 영원한 도움의 수녀회를 설립하고 수녀원장을 지냈다. 막내 마르타 장정순은 성심대학교 4학년생이었다.
아버지 장기빈의 직업(인천해관, 현재의 세관) 때문에 인천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동생 장발은 서울대학교 초대 미술대학 학장이었고,[11] 장극은 항공공학자였으며, 지식인 가문이었다. 또한, 여동생 아그네타 장정온은 평양의 수도원 원장 수녀였으나, 한국 전쟁 중 평양 부근에서 순교하였다(2023년 현재 시복 대상자).[12][13][14]
장면은 미국의 맨해튼 가톨릭 대학교에서 유학한 후, 교육계와 가톨릭계에서 활동하였다.[15]
생물학자 장진[16], 가톨릭 성직자 장익[17]은 그의 아들이다.
8. 기타
1955년부터 곽상훈, 조병옥, 정일형 등과 대성빌딩에서 민주당 창당 준비 회의를 하였다. 같은 해 5월 잡지 《새벽》에 ‘정치의 도의성’이라는 논설을 발표, 정치 도의의 책임성과 신앙성을 강조하였다. 1955년 진명여자고등학교 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였다.[76] 2월 18일 오전 11시경 김성수가 수일간 혼수상태에 있다가 깨어났다.[91] 장면은 김성수의 위독 소식을 듣고 찾아갔으나, 의사의 지시로 만나지 못했고 이아주를 통해 천주교에 입신하도록 권고하였다.[91]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김성수는 이아주로부터 장면의 권유를 전해 듣고 수긍하였다. 장면은 부인의 연락을 받고 12시경 가회동 성당의 박병윤 신부와 함께 계동으로 찾아갔다.[91] 김성수는 신부에게서 조상 봉사를 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고 종부성사를 하였다.[91] 그날 장면은 서울 계동의 김성수 사저에서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1955년 9월 18일, 민주당이 창당되자 곽상훈, 박순천, 이철승, 정일형 등과 함께 민주당 신파의 지도급 인사로 활동하였다. 이승만의 3선 개헌에 반대하여 자유당을 탈당한 김영삼 등이 그를 찾아왔으나, 장면은 담배나 술을 일절 입에 대지 않고 성경 말씀 내용을 주로 화제로 삼았다. 이에 지루함을 느낀 김영삼 등 일부는 장면을 떠나 민주당 구파의 조병옥을 찾아갔다.
서북 출신으로 구성된 흥사단 계열의 인물로 지목되었으나, 흥사단의 핵심 인물들과 같은 고향이었음에도 흥사단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국무총리와 원내 자유당 시절, 원내 자유당[204] 외에 흥사단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74] 이후 흥사단 계열로 분류되었고, 민주당 신파에서조차 그를 흥사단계로 보았으나 본인은 이를 부인하였다. “세간에서는 나를 신파에서도 흥사단 계열이라고 보는 이가 있었다. 이는 전혀 낭설이다. 나는 흥사단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흥사단에 가입한 일도 없고 흥사단과 연관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흥사단 계열에서 나를 지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내가 흥사단 계열이라는 지목을 받을 이유는 되지 않는다”[74]고 하였다. 흥사단에서 가입 요청이 왔지만, 그는 가입을 거절했다.
장면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분해서 판단했다. 사회주의 사상은 부분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공산주의에는 부정적이었다. 1961년 4월 6일의 신문 주간 연설에서 그는 합법적인 사회주의는 보장해야 된다고 했다. 그는 "사회주의가 공산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공산주의는 폭력을 정권 탈취의 수단으로 삼는 데 반해, 사회주의는 비폭력 의회주의를 통해 정권을 잡는 것을 기도하는데 있다[212]는 것이다. 그런 한에 있어서 사회주의는 자유 민주주의와 똑같이 우리 나라에서 법률의 보호를 받으며 정당 활동을 할 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의 이익에도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다고 확신[212] 한다"고 하였다.
1961년 3월의 공개 담화에서는 공산주의 진영에게 기왕의 파괴적 태도를 청산하고 UN 결의의 모든 조건을 성실하게 이행할 것을 촉구했다.[213] 그러나 그는 본질적으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평등이라는 이름하에 인간의 자유와 개성을 억압하는 사상이라고 보았다. 특히 인간의 존재를 유물론과 변증법, 무신론으로 해석하는 것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았으며, 기독교 신앙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장면은 기자회견을 주 1회로 정례화했다. 국무총리실 공보비서관 송원영에 따르면, 장면의 주례 기자회견은 20여 평 되는 작은 방에서 열렸기 때문에 기자들이 내뿜는 담배 연기가 장면의 얼굴에 사정없이 밀려오기도 했다.[138] 이를 보다 못한 비서관들이 기자들에게 "아버지도 없느냐"고 따로 불러서 주의를 주기도 했다. 그런데 장면은 흡연은 개인의 취향인데 그것을 왜 그대가 혼내느냐며 오히려 비서관들을 책망하였다.
1961년 2월 4일 장면은 반도호텔에서 열린 관훈클럽 창립 4주년 기념 모임에 초청받아 ‘언론의 자유와 그 책임’을 주제로 강연했다.[214] 장면은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이라고 전제한 뒤 “북조선 괴뢰의 앞잡이들이 ‘조선인민보’나 ‘해방일보’를 발행하겠다고 등록 신청을 해도 막을 도리가 없을 만큼, 완전한 언론 출판의 자유가 허용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무책임하고’,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며’, ‘독선적인’ 언론이 횡행하는 현실을 우려했다.[214] 장면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모든 압제에 반대해야 하는 것과 같이, 자유가 자유 그 자체를 파괴하도록 방임해서도 안 된다”는 말로 연설을 끝맺었다. 무절제한 언론에 대한 이 경고를 관훈클럽은 훗날 발간한 ‘40년사’에서 “언론에 경종을 울리는 진지하고도 의미심장한 내용이었다”고 평가했다.[214]
이승만은 가끔 '대통령 유시'나 발표하고 기자회견은 1년에 한두 차례 하는 데 그쳤지만, 장면은 기자회견을 매주 한 차례 정례화했다. 그럴 때면 전 각료를 동원하다시피 해 갖가지 질문에 답했다.[214] 또, KBS라디오를 통해 ‘주례 국정보고’도 방송했다. 매주 토요일 오후 7시 30분에 시작한 이 방송에서 장면은 민주당 정부의 방침을 국민들에게 설득조로 이야기했다.[214] 장면은 대화와 설득을 통하여 국정을 운영하려 하였고, 언론을 통한 홍보를 적극 이용하려 하였다.
1960년 8월 제2대 국무총리 취임 직후 공개채용 제도를 도입하였다. 각종 인사 채용 때 공개 경쟁 채용의 원칙이 도입된 것이다. 5대 민의원 김영구는 '공개채용에는 사심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입학시험 보듯 한 거니까요. 그때 뽑힌 사람들이 나중에 거의 전부 장·차관을 했습니다. 유능한 사람을 시험 쳐서 뽑았으니까 그대로 키우니 인재가 된 거예요.[203]'라고 진술하였다.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조광은 '그 청렴성은 정권에서 담보됐습니다. 공채 제도 하나만 예를 들어도 그렇습니다. 이는 공정성과 효율성을 전제해야 시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203]'라고 평가했다.
2공화국 당시 정보력 부재에 견디다 못한 측근들이 정권 안정을 위해 군, 검찰, 경찰 세 기관 합동의 특별 기구를 만들자고 건의하였지만, 장면은 "자유당 때의 김창룡 특무대장이나 김종원이를 만들 수 없다."며 한사코 반대했다.[218] 그러나 장면은 일찍부터 경찰이나 검찰에 특별 수사 기관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0년 9월 23일의 시정 연설에서 그는 '경찰 기구의 개편과 함께 대검찰청 안에 중앙 수사국을 발족시켜 각종 정보 기관을 연결, 조정하는 한편, 과학적인 수사 방법으로 공산 괴뢰 무장 간첩의 남침 방지와 색출은 물론 범죄 수사의 완벽을 기하려 한다.[219]'며 특별 수사 기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3월에는 자유주의에서 한발 후퇴, 깡패와 혁신 세력 소탕을 추진한다.[164] 3월 초부터 장면은 강력한 정치를 하기 위해 경찰을 통해 혁신 분자와 깡패 리스트를 작성, 5월 19일 국가비상사태 비슷한 것을 선포하여 혁신계와 깡패들을 일제 검거한다는 계획 아래 그 리스트를 작성해 놓고 D데이를 기다리고 있었다.[164] 그러나 이는 5·16 군사 정변으로 무산되었다. 그는 언제든 사회를 위협할 만한 세력이 등장한다면 엄히 다뤄야 한다는 의사를 드러내기도 했다. '사회 질서가 지나치게 문란해져서 국가 안녕을 유지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이른다면 그때 가서는 단호한 조처를 취할 준비와 계획을 별도로 세워야 된다[220]'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혁신 세력 및 보수 세력은 절대적인 자유를 보장한다면서 권력 기관을 통해 통제하려 든다며 비아냥을 가하기도 했다.
경제 개발 계획을 수립해 나갔다. 경제개발 정책을 수립하여 식량 증산과 장기 불황으로 발생한 실직자, 고등학교 졸업, 대학 졸업 후 미취직자들의 구제를 위한 국토 건설 개발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또한 미취직 대학생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국토개발사업을 추진, 국토 건설을 위해 국토건설본부를 조직하고 스스로 본부장에 취임하여 지도하였으며, 청년 실직자 및 미취직 고졸, 대학 졸업생들을 기간 요원으로 채용하여 일자리를 창출하고 장준하, 김석훈 등의 실무 인사들을 기용해 국토건설본부 기간 요원 관리와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1960년 4월 재무부 장관 김영선을 미국으로 파견하여 경제 안정 지원 기금의 일부인 2천여만 달러를 수령받아 왔고,[221] 장면도 1961년 7월 도미를 계획하고 있었다.[221]
그의 여성 편력은 깨끗하였고, 결혼 생활 50년간 한 차례도 외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천주교 교리에서 금지한 행위는 절대로 범하지 않았던 그는 누구에게도 대개 있을 법한 외도를 하거나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다고 한다.[223] 18세에 부모의 중매로 만난 천주교 신자인 김옥윤과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결혼하여 6남 3녀를 두었으며 일생 동안 외도를 하지 않았다. 결혼식장에서조차 얼굴을 못 본 아내와 그는 50년간 해로하였으며, 결혼 50주년 기념 선물을 준비하였으나 금혼식을 보기 직전에 사망하였다.
학창 시절 동급생들이 기방에 출입할 때에도 그는 기방 출입을 삼갔다. 성인이 된 뒤에도 여색을 멀리한 것은 변함없었다. 그의 측근이었던 현석호에 의하면 그가 동성 상업 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당시 동성 고등학교는 입학하기가 몹시 어려운 때였다. 그때 서울 종로 경찰서 고등 주임이 하루는 장면을 찾아와서 친지 되는 학생 한 사람을 입학하게끔 부탁을 했다. 귀찮도록 매일 졸라 대어 두고 보자고 해놓고 부탁한 학생의 시험 성적을 보니 커트라인에서 달랑달랑했다. 장면은 직원 회의에서 얘기를 하고 입학을 시켜 주었다.[224] 일본인 고등 주임 나카이는 제 딴엔 몹시 고마웠던지 그를 장충단 모 일류 요리집으로 모셔 한턱을 냈다.[224] 현석호는 또 이렇게 회고하였다.
1960년 10월부터 경제 개발 및 국토 건설, 대학 졸업 후 미취직자, 고등학교 졸업 미취직자를 구제하기 위한 국토건설단 수립을 구상하고 실현하였다. 초대 단장으로 취임하여 장준하 등 사상계 동인들을 발탁, 이론 교육과 정신 교육 측면을 담당하게 하였고 그들에게 경영하게 하였으나, 5·16 군사 정변 이후 군정은 국토건설단을 불량배나 범죄자, 예비역 군인들로 대체하였다.
학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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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죄 행위와 반역을 제외한 어떠한 형태의 자유든 존중되어야 한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신약성서 요한 복음 12장 24절
장면은 직접 가톨릭 교회의 교리 관련 서적을 한글로 번역하여 발표, 출간하기도 했다. 현석호에 의하면 “그는 웬만한 성직자보다 많은 교리를 알고 있었으며, 또한 성직자 못지 않게 엄격하고 정결된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 분은 교리에 금지된 행위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전차가 만원이어서, 표를 주지 못한 채 그대로 내릴 때면 전차표 한 장을 반드시 그 자리에서 찢어 없앴다고 한다. 언론인 봉두완이 장면의 혜화동 사저를 방문했을 때 “집이 무척 작았다”고 한다.[231] 내각 책임제 하에서는 총리는 집권자나 다름이 없는데, 그런 그의 집이 연탄 난로를 땔 정도로 초라했다[231] 한다. 그는 총리 재직 중에도 호화로운 식사를 마다하고 직접 도시락을 집에서 싸 들고 다니며 식사하였다.
개인적인 일가 친족의 이해 청탁이나 만남을 거절하였고, 민주당 신파 내에서도 장면의 총리 취임 후, 신파 내부에서 미는 인물에 대한 인사 청탁 압력이 수시로 들어왔으나 장면은 이를 모두 거절하였다. 한편 자녀들 중에도 그가 국회의원이나 국무총리 재직 중에 아버지의 전용 차량을 이용하려 하였으나, 장면은 자녀들을 향해 "너희가 언제부터 정치가였느냐"며 단호하게 물리쳤다고 한다.
주미 대사로 재직할 당시 그는 흑인 운전수를 채용하였다. 흑인 운전수는 장면이 이임한 뒤에도 주미한국대사관의 운전수로 있었고, 그는 한국에서 미국을 방문하는 사절단에게 장면의 소식을 물었다고 한다. 그는 “지금까지 나를 사람으로 취급을 해준 사람은 그분밖에 없었다”고 회고하였다.[251]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이었던 그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둑 같은 취미도 없었다. 그러나 현석호에 의하면 누군가를 만나게 되어 낮이면 점심을 나누고 밤이면 저녁 식사까지 나누면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주로 종교에 대한 토론을 했다고 한다.[252] 현석호는 “그는 종교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피로한 줄도 모르고 정열을 다해 말씀했고, 자기의 뜻이 전달되지 않으면 몹시 안타까워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252] 한편 자유당을 탈당하여 그의 문하에 온 김영삼은 술도 담배도 하지 않고 종교 이야기만 하는 그에게 고리타분함을 느끼고 그의 곁을 떠나 조병옥에게 갔다고 한다.
장면의 영향으로, 당시 민주당 신파에 속해 있던 정치인들은 장면을 따라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장면과의 인연으로 1957년 영세를 받았으며, 장면이 김대중의 대부를 섰다. 이러한 장면과 김대중의 신앙은 후대의 정치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민주당 신파의 직속 후계 정당으로 분류되는 더불어민주당의 정치인들 상당수가 가톨릭 신자이다. 한나라당의 총재를 지냈던 이회창의 경우, 부친이 자유당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뻔한 위기에서 장면이 도움을 준 인연으로 전 가족이 가톨릭 영세를 받았다.
7대 국무총리 재직 당시 장면은 윤치영을 영입하려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장면의 영입 제의에 윤치영은 “당신이 그렇게도 바라던 내각책임제 세상이 되었으니 잘 해 보시오, 국민의 한 사람으로 말한다면 치안부터 안정시키길 바랄 뿐이오”라며[253]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춤도 출 줄 몰랐고, 술을 마실 줄도 몰랐으며, 노래라고는 성가와 팝송 몇 곡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것은 사기 행위라며 쇼맨십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드러냈다.
장면은 개인적으로 사돈 관계였던 경향신문 사장 한창우와 경향신문 관계자들이 추천하는 인사에 관련되어서도 채용을 주저하였고, 이 때문에 경향신문은 장면의 집권 기간 중에도 비판적인 기사를 쓰기도 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민주주의 신봉자이며 온건 합리주의자라는 평가도 있다.[230] 한편 군사 정권은 5·16 군사 정변의 정당화를 위해 장면 내각이 부패했다고 주장해 왔으나 이를 입증할 만한 근거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장면 내각 출범 후 23일 되는 날부터 군사 정변을 준비해 온 박정희 등의 5·16 군사 정변이 준비된 무력 정변일 수 있다.
고지식하였고 원리원칙주의자였으며 그 자신이 약속한 것은 어떻게든 실행하는 성격이었다. 배짱이 부족하다는 인물평도 있다. 정윤재에 의하면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깊은 신앙심과 자신에 대한 엄격한 자제력을 소유했던 인물로 항상 단정한 차림으로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254] 선거 유세 중 여러 사람과 함께 투숙한 여관의 이불이 불결하다 해서 혼자서만 덮지 않고 잤고 시골 주막집에서 때가 묻은 ‘더러운’ 표주박으로 떠 주는 막걸리를 마시지 못하였다는 일화가 있다.[254] 그는 임기응변과 가식을 극도로 싫어하였는데, 고지식한 성격과 원리원칙을 고집하는 스타일은 일부 동료 정객이나 시민들에게 거부감을 주기도 했다.
그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맨해튼 대학교 재학 시절 위궤양과 위장 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해, 대학을 6개월간 휴학하기도 했다. 그는 위장이 몹시 약해 육식을 하지 않고 국수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255] 그는 국수류나 면류를 좋아하였다. 그는 또, 배나 비행기를 타면 멀미를 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한쪽에 누워서 조용히 책을 보거나 명상에 잠기곤 했다.[256] 얼굴이 하얗게 질려 멀미를 앓자 수행원 중 “술을 먹으면 멀미를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뱃속에 있는 벌레들도 죽으니 이런 때 술을 좀 하시오” 하고 술을 권하면 그는 웃으며 “공연히 내게 술 먹이려고 하시는군….” 하고 술은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256]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에는 과로로 혈색병에 걸리기도 했고, 제2대 국무총리 시절에는 간장염으로 미국 체류 중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키는 작고 마른 체구였으나 배가 나왔다.
그의 별명으로는 자장면, 짜장면, 삼다 선생(三多先生) 등이 있었다. 자장면이라는 별명은 그의 어리숙하고 고지식함을, 삼다 선생은 겁이 많고, 권력욕이 있었으며,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에 대한 풍자였다. 1961년 1월 1일 범죄 행위와 반역 이외에는 어떠한 형태의 자유든 존중해야 된다는 신념에 따라 풍자의 자유를 허용하자 그의 별명을 비꼰 각종 풍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해공 신익희의 가까운 벗 송필만은 진천에서 고향 사람들이 자기 가족의 비석에 쓸 비문 부탁을 받고 신익희를 찾아왔을 때 시중에서 들은 삼다 선생 이야기를 꺼냈다. 그에 의하면 '밖에서들 운석을 삼다선생(三多先生)이라 한다우, 하나는 욕다(慾多), 곧 욕심이 많다는 것이고, 둘째는 겁다(怯多), 곧 겁이 많다는 것이며, 셋째는 무지다(無知多), 곧 모르는 것이 많다고 이래서 삼다 선생이라 한다우.[257]'라고 했다.
죽도 밥도 아니라는 뜻에서 장면에게는 자장면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착하지만 어리숙한 모습을 꼬집은 것이었다.[258] 장면은 평소 범죄 행위와 반역 이외에는 어떠한 형태의 자유든 존중해야 된다고 하였다. 그의 소신대로 풍자의 자유를 허용했다. 한편 시인 김수영은 '김일성 만세'라는 시에서 김일성을 찬양할 자유도 주지 않으면서 자유를 말한다며 조롱하였다.
배우 | 작품명 | 방송사/기타 | 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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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수 | 제1공화국 | MBC | 1981년 |
김무생 | 제2공화국 | MBC | 1989년 |
김무생 | 제3공화국 | MBC | 1993년 |
신구 | 무풍지대 | KBS | 1989년 |
신국 | 삼김시대 | SBS | 1998년 |
신국 | 야인시대 | SBS | 2002년 |
최명수 | 영웅시대 | MBC | 2004년 |
심양홍 | 김수환 추기경에 관한 마지막 보고서 | 평화방송 | 2009년 |
박웅 | 광복 20년 | TBS 라디오 다큐멘터리 | 1966년 |
정민 | 경무대 비화 잘돼갑니다 | 영화 | 1967년 |
장면은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가치를 옹호했다. 따라서 그는 소련의 공산주의와 독일의 나치즘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어떤 형태의 전체주의와 권위주의에도 단호히 반대했다.
장면은 공공선의 맥락에서 개인주의를 믿었다. 따라서 그는 대한민국의 만연한 정치적, 경제적, 금융적 부패를 혐오했다. 'republic'이라는 단어는 'res'(사물/일)과 'publica'(공공의)를 의미한다. 간단히 말해, republic은 공공의 일, 공익, 공공의 이익 또는 공공선을 의미한다.
장면은 검소하고 절약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서울 종로구 명륜동 1가 36-1에 있는 소박한 작은 집에서 배우자와 함께 대부분의 삶을 보내고 일곱 자녀를 키웠다. 현재 개조된 그의 옛 집을 방문하는 누구든지 그의 생활 방식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집은 현재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그를 기리는 박물관으로 개조되었으며,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다.
1940년대 후반 국회의원으로 재직 당시 장면은 사실혼 관계와 매춘을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하여 통과시켰다. 그는 평생 금주와 금연을 했고 클래식 음악 감상을 즐겼다. 그는 김대중의 가톨릭 개종에 영향을 미쳤고 그의 대부가 되었다. 김대중은 나중에 장면을 "한국 사회의 많은 악을 바로잡기 위해 가톨릭 행동을 믿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회상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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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191]
뉴스
金추기경 “장면 前총리-노기남 대주교 친일매도 유감”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05-10-22
[192]
뉴스
'정체성 혼란' 한국號 어디로가나 김수환추기경 특별회견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5-10-21
[193]
뉴스
김 추기경 “2003년 친일 악플에 건강 악화”
http://news.heraldco[...]
해럴드경제
2010-04-01
[194]
서적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195]
서적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
동아일보사
[196]
서적
대한민국 50년사 1:건국에서 제3공화국까지
도서출판 들녘
[197]
서적
대한민국 건국과 나
창랑장택상기념사업회
[198]
서적
대한민국 건국과 나
창랑장택상기념사업회
[199]
서적
대한민국 건국과 나
창랑장택상기념사업회
[200]
서적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1]
서적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
동아일보사
[202]
웹사이트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http://www.donga.com[...]
[203]
뉴스
제2공화국과 張勉 (30·끝)시리즈 결산 전문가 좌담
서울신문
1999-06-15
[204]
기타
[205]
서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206]
서적
상록의 자유혼
창랑장택상기념사업회
[207]
서적
경무대 비화
내외신서
1986
[208]
서적
경무대 비화
내외신서
1986
[209]
서적
경무대 비화
내외신서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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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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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8
[212]
서적
한알의 밀알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8
[213]
서적
한알의 밀알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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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제2공화국과 張勉 (15)분출하는 욕구(下)
http://www.seoul.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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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장면, 윤보선,박정희:1960년대초 주요 지도자 연구
백산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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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장면, 윤보선,박정희:1960년대초 주요 지도자 연구
백산서당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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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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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윤보선, 박정희:1950년대초 주요 정치지도자 연구
백산서당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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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 출판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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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 출판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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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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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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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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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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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새세대 홈페이지, 김명웅-한일협정을 다시 본다
http://www.ssdclub.k[...]
2010-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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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227]
일반
[228]
뉴스
주간연재 新名家(신명가) <10> 「세계화」先覺(선각)…일제때 6남매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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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95-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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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국헌법사
학문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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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앵커맨
랜덤하우스코리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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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앵커맨
랜덤하우스코리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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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 추기경 "장면 전 총리, 나 일부러 때린 것 아니다"
http://www.heraldbiz[...]
해럴드
2009-02-19
[233]
뉴스
김 추기경 "2003년 친일 악플에 건강 악화"
http://www.heraldbiz[...]
헤럴드
2009-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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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방대한자료·증언 바탕 제2공화국 긍정적 평가
http://www.munhwa.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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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운석 장면 박사 탄신 100주년 추모미사
http://unsuk.kyung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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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주간한국 : 팔순 맞은 YS는 좌파의 숙주인가
http://weekly.hank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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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대담] 김영삼 전 대통령: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
http://www.sdjs.co.k[...]
시대정신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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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역사의 언덕에서 1:엑소더스
한길사
2006
[239]
서적
한국인의 삶의 양식과 이상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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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문익환 평전(역사인물찾기 15)
실천문학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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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중국인이 바라본 한국
삼성경제연구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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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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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YS 단독인터뷰-"DJ가 1년6개월 동안 내 뒷조사해, 그러나 용서…"
http://www.sisaon.co[...]
시사온
2009-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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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민주주의와 지도세력
사상계사
1961
[245]
서적
찢겨진 산하
기획출판 거름
1986
[246]
서적
김수영 평전
실천문학사
[247]
웹사이트
(제목 정보 없음)
http://www.seoul.co.[...]
[248]
서적
제2공화국과 장면
범우사
[249]
서적
김수영 평전
실천문학사
[250]
서적
청소년을 위한 우리 역사 바로 보기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51]
서적
현대한국정치인평전(2)
[252]
서적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253]
서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254]
서적
장면·윤보선·박정희:1960년대초 주요 정치지도자 연구
백산서당
[255]
서적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256]
서적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257]
서적
내가 모신 해공 신익희 선생
해공신익희선생기념회
[258]
서적
한반도의 외국군 주둔사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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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웁스구라]윤석열 대통령 사진의 운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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