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다 하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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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케다 하야토는 히로시마현 출신으로, 교토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1949년 중의원 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으며, 요시다 시게루 내각에서 대장 대신을 역임했다. 1960년 자유민주당 총재가 된 후, 제58대 총리로 취임하여 제1차 이케다 내각을 출범시켰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소득 배증 계획을 통해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을 이끌었으며,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가졌고,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가입과 도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요시다 시게루의 최측근으로, 전후 일본의 경제 재편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케다 하야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케다 하야토
출생일1899년 12월 3일
출생지히로시마현 다케하라시
사망일1965년 8월 13일
사망지도쿄도 분쿄구 도쿄 대학 의학부 부속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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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직위내각총리대신
재임 시작1960년 7월 19일
재임 종료1964년 11월 9일
국왕쇼와 천황
이전 총리기시 노부스케
다음 총리사토 에이사쿠
소속 정당자유민주당
정당 총재자유민주당
정당 총재 재임 시작1960년 7월 14일
정당 총재 재임 종료1964년 12월 1일
이전 정당 총재기시 노부스케
다음 정당 총재사토 에이사쿠
이전 정당 부총재오노 반보쿠
가와시마 쇼지로
이전 정당 간사장마스다니 슈지
마에오 시게사부로
관료 경력
직위대장대신
재임 시작1949년 2월 16일, 1956년 12월 23일
재임 종료1952년 10월 30일, 1957년 7월 10일
이전 대장대신오야 신조 (대행), 이치마다 히사토
다음 대장대신무카이 다다하루, 이치마다 히사토
직위2통상산업대신
재임 시작21950년 2월 17일, 1952년 10월 30일, 1959년 6월 18일
재임 종료21950년 4월 11일, 1952년 11월 29일, 1960년 7월 19일
직위3무임소대신
재임 시작31958년 6월 12일
재임 종료31958년 12월 31일
직위4경제심의청 장관
재임 시작41952년 10월 30일
재임 종료41952년 11월 29일
국회의원
직위중의원 의원
선거구히로시마현
재임 시작1949년 1월 23일
재임 종료1965년 8월 13일
이전 정당민주자유당 (1948–1950)
자유당 (1950–1955)
학력 및 훈장
출신 학교교토 제국대학
학위법학사
훈장정2위, 대훈위국화대수장
가족 관계
친척 (정치인)전처의 할아버지: 히로사와 사네오미
전처의 아버지: 히로사와 킨지로
사위 (처의 양자): 이케다 유키히코
손녀사위: 테라다 미노루
배우자전처: 이케다 나오코
후처: 이케다 미치에
기타
로마자 표기Hayato Ikeda
일본어 표기가나: いけだ はやと
한자: 池田 勇人
한국어 표기이케다 하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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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와 경력

히로시마현 출신으로 양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교토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25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대장성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1927년 하코다테 세무서장, 1929년 우츠노미야 세무서장을 역임했다. 낙엽성천포창이라는 희귀병으로 5년간 투병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34년 대장성에 복직하여 1941년 주세국 국세과장을 거쳐 1947년 교토대학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사무차관이 되었다.

1949년 중의원 총선거에 사토 에이사쿠의 권유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같은 해 요시다 시게루 내각에서 대장 대신으로 취임하였고, 1950년 2월 17일부터 4월 11일까지 통상산업대신을 겸임하였다. 1954년 자유당 간사장, 1956년 이시바시 단잔 내각에서 대장 대신, 1958년 기시 노부스케 내각(제2차 기시 내각)의 국무 대신, 1959년 통산 대신을 역임하였다.

1960년 7월 14일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 자민당의 4대 총재로 취임했다. 같은 해 7월 19일 제58대 총리로 취임하여 제1차 이케다 내각을 발족, 이후 12월 8일에 제59대 총리로 재선되어 제2차 이케다 내각을 성립시켰다. 1961년 11월 11일 한국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을 가졌으며, 1962년 7월 14일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재선, 1963년 제60대 총리로 재선되었다. 이듬해 1964년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하고, 도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미국을 방문하여 케네디 대통령과 회담하는 이케다 총리 (1961년)
미국을 방문하여 케네디 대통령과 회담하는 이케다 총리 (1961년)


미일안보조약 개정 문제와 헌법 개정 문제 등으로 격화된 정치적 쟁점에서 한 발짝 물러나, 경무장·경제성장노선을 주요 정책으로 삼아, 10년 안에 국민의 평균소득을 2배로 늘린다는 소득 배증 계획을 추진하였다.

1964년 10월 25일, 도쿄 올림픽 폐회식 다음날 사의를 표명하고 사토 에이사쿠를 후임 자민당 총재로 지명했다. 같은 해 건강상의 이유로 입원했다가 12월에 퇴원했으나, 1965년 8월 병세가 악화되어 수술을 받은 후 8월 13일 폐렴으로 사망했다. 향년 65세.

2.1. 초기 생애

히로시마현 도요타 군 요시나 촌(현 타케하라시)에서 아버지 이케다 고이치로와 어머니 우메 사이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큰 누나와는 나이 차이가 20세나 났다. 구제 히로시마 현립 추다이 중학교(현 히로시마현립 추다이 고등학교) 1학년 때 육군소년학교 시험을 보았지만, 근시와 키가 작다는 이유로 불합격되었다. 제일고등학교 시험에 두 번 낙방했고, 1년 재수 끝에 제오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제오고등학교를 거쳐 1924년 3월 교토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2.2. 정치 입문

히로시마현 출신으로 양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교토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25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대장성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1947년에는 교토대학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사무차관이 되었다.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고등학교 동창인 사토 에이사쿠의 권유로 1949년 중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같은 해 요시다 시게루 내각에서 대장 대신으로 취임하였고, 1950년 2월 17일부터 4월 11일까지 통상산업대신을 겸임하였다.

1954년 자유당 간사장, 1956년 이시바시 단잔 내각에서 대장 대신을 지냈고, 1958년 기시 노부스케 내각(제2차 기시 내각)의 국무 대신, 1959년 통산 대신을 역임하였다. 그는 사토 에이사쿠와 함께 요시다파(吉田派)의 대표적 인물로서, 요시다 시게루의 최측근으로 연합국과의 강화, 냉전 하의 · 관계 구축과 동시에 전후 일본 경제의 재편성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49년 1월 23일 총선에서 히로시마현 일부 지역을 대표하는 중의원 의석을 획득했다. 그는 현재의 자유민주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을 설립한 자유주의 그룹의 일원이었다. 초기 경력에서는 사토 에이사쿠와 함께 요시다 시게루의 수제자였으며, 요시다 독트린에서 제시된 사상에 대한 그의 헌신으로 "우등생"이라고 불렸지만, 동시에 강한 개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1949년 2월 16일, 요시다 시게루 총리에 의해 재무대신으로 임명되었고, 3월 7일에는 미국의 점령군 고문 조지프 도지와 함께 도지 라인 통화 정책을 발표했다. 1950년 미국을 방문하여 점령 종식 후 미일 안보 협력 준비를 하였다. 1951년에는 일본개발은행과 일본국제협력은행의 설립을 감독했다.

1950년대 이케다는 일련의 언행 실수 이후 냉담하고 거만한 기술관료라는 평판을 얻었다. 1950년 12월 참의원 예산위원회 회의에서 "가난한 자들은 보리쌀을 먹어라!"는 발언을 하였다. 1952년 내각 개편으로 국제무역산업대신이 되었지만, "소규모 사업가 5명이나 10명이 자살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 후 한 달도 채 안 되어 사임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케다는 여러 당직을 거치며 자민당의 고위 의원으로 남아 1956년 12월 재무대신으로 내각에 복귀했다. 그 후 1958년 6월에는 무임소 장관이 되었고, 1959년 6월에는 국제무역산업대신이 되었다.

2.3. 총리 재임

1960년 7월 19일 제58대 총리로 취임하여 제1차 이케다 내각을 발족, 이후 12월 8일에 제59대 총리로 재선되어 제2차 이케다 내각을 성립시켰다. 1961년 11월 11일 일본을 비공식 방문한 한국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함께 한일 국교 정상화와 관련된 회담을 가졌으며, 1962년 7월 14일 자민당 총재선거에 출마하여 재선에 성공했다. 1963년 제60대 총리로 재선, 이듬해인 1964년에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 도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등 총리 재임 기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미국을 방문하여 케네디 대통령과 회담하는 이케다 총리 (1961년)
미국을 방문하여 케네디 대통령과 회담하는 이케다 총리 (1961년)


이케다 하야토는 미일안보조약 개정 문제와 헌법 개정 문제 등으로 격화된 정치적 쟁점에서 한 발짝 물러나, 경무장·경제성장노선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 10년 안에 국민의 평균소득을 2배로 늘린다는 소득 배증 계획을 통한 고도 경제 성장 정책을 추진하여, 기시 노부스케 내각 시절 격화된 보혁 갈등을 완화시키고 '정치의 계절'에서 '경제의 계절'로 사회 분위기를 전환하였다. 이러한 업적을 바탕으로 이케다는 현재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 진전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정치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1960년 7월, 이케다는 일본 국내 정치와 미일 관계라는 어려운 시기에 자유민주당(LDP) 총재로 선출되어 수상이 되었다. 직전 수상인 기시 노부스케는 미일안보조약 개정 시도를 잘못 처리하여, 현대 일본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1960년 안보 투쟁을 초래하였다. 기시는 개정 조약을 국회에서 강행 처리했지만, 시위의 규모와 폭력성으로 인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방일 계획을 취소하고 사퇴해야 했다. 이케다는 규슈 미이케 탄광에서 발생한 미이케 분쟁도 물려받았는데, 파업 중인 광부들이 기업주들이 보낸 극우 폭력배들과 끊임없이 충돌하였다. 이케다는 기시의 후계자로 타협 후보였으며, 1960년 가을 총선을 실시하겠다는 약속으로 총리직을 확보하였다. 당시 이케다는 대중과 동떨어져 있고 말실수를 잘하는 인기 없는 정치인으로 여겨져, 임시 수상에 불과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그러나 이케다는 극적인 변신을 시도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기시의 "고자세(高姿勢)"와 타협 없는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저자세(低姿勢)"를 취하고 야당에 대해 수용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가을 총선 운동의 슬로건으로 "관용과 인내"를 내세웠다. 또한, 어두운 정장과 와이어테두리 안경 대신 밝은 색상의 정장과 두꺼운 플라스틱 테 안경으로 바꾸는 외모 변신을 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1970년까지 일본 경제 규모를 10년 만에 두 배로 늘리겠다는 소득 배증 계획 발표였다. 일반적인 5개년 경제 계획 대신 극도로 야심찬 10년 계획을 세우고,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표적 세금 감면, 정부 투자 및 확대된 사회 안전망 패키지를 약속했다. 이케다의 새로운 이미지와 소득 배증 계획은 인기를 얻었고, 가을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자유민주당 내 파벌 경쟁자들을 물리쳤다.

취임 후, 이케다는 미이케 탄광의 유혈 충돌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다. 노동 조합에서 신뢰를 받던 이시다 히로히데를 노동상으로 선택하여 광부들과 미쓰이 회사 간의 타협을 협상하도록 했고, 1960년 12월 미이케 분쟁을 종결시켰다.

1961년 6월 워싱턴 D.C.에서 열린 이케다 하야토(왼쪽에서 두 번째)와 존 F. 케네디(왼쪽에서 네 번째)의 정상 회담
1961년 6월 워싱턴 D.C.에서 열린 이케다 하야토(왼쪽에서 두 번째)와 존 F. 케네디(왼쪽에서 네 번째)의 정상 회담


이케다는 반조약 시위와 아이젠하워의 방일 취소로 손상된 미일 관계 개선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미국에 대만 지원과 중국 본토와의 비접촉 등 냉전 정책 지지를 확인했다. 존 F. 케네디와 1961년 여름 워싱턴 D.C.에서 정상 회담을 가졌고, 케네디는 일본을 영국과 같은 긴밀한 동맹국처럼 대우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케다는 케네디를 도쿄에 초청했고, 케네디는 동의했지만 암살로 인해 방문하지 못했고, 딘 러스크 국무장관이 대신 방문했다.

이케다는 소득 배증 계획에 따른 수출 주도 경제 성장을 위해 해외 무역을 추진했다. 전략적 제조업에 대한 정부 투자는 일본이 가치 사슬을 상승시키고 고급 기술 및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으로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 1962년 샤를 드 골 프랑스 대통령은 이케다를 "트랜지스터 판매원"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일본이 값싼 장난감, 자전거, 섬유 대신 전자 제품 수출로 알려지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국내적으로 이케다는 소득 배증 계획을 지원하기 위해 사회 안전망을 확대했다. 1961년에 전국민 연금 제도, 전국민 건강 보험 제도가 마련되었다. 1960년 제정된 장애인 고용 촉진법은 장애인 고용을 촉진하고 직업 지도 및 취업 알선 서비스를 제공했다. 1963년 노인 복지법은 휴식 간호, 가정 간호, 노인 시설 등에 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1963년, 이케다는 큰 인기를 바탕으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안보 조약 위기로 자유민주당을 분열시킬 뻔했던 파벌 간 다툼에 맞설 만큼 강력해졌다. "전파벌 내각"을 구성하고, 숙적 고노 이치로를 1964년 도쿄 올림픽 계획 담당 장관으로 영입하는 등 당내 파벌 간 내분을 누그러뜨렸다. 고노는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의 공로를 얻을 수 있었다.

1963년, 이케다는 당내 보수파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당이 일본 헌법 제9조 개정을 포기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우리 임기 중에는 헌법 개정 없다"를 총선 슬로건 중 하나로 만들었다. 이는 헌법 개정을 추진했던 기시를 격분시켰지만, 일본 사회당(JSP)의 선거 전망을 손상시켰다. 일본 사회당은 자유민주당의 헌법 개정 시도를 막기 위해 국회 의석의 3분의 1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표를 얻었기 때문이다.

2.4. 은퇴와 사망

1964년 후두암 진단을 받고 국립암센터에 입원했는데, 이미 병세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10월 25일, 도쿄 올림픽 폐막 다음 날, 이케다 하야토는 사임을 발표했다. 후계자를 둘러싼 당내 격렬한 권력 투쟁을 피하기 위해 이케다 하야토는 이례적으로 사토 에이사쿠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케다 하야토의 오랜 라이벌이었던 고노 이치로는 그의 유지를 존중하여 당수 선거에 출마하지 않음으로써 사토 에이사쿠의 총리 취임을 가능하게 했다.

1964년 12월 퇴원했지만, 이케다 하야토는 1965년 8월 도쿄대학 병원에서 또 다른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며칠 뒤인 8월 13일, 65세의 나이로 폐렴으로 사망했다.

이케다 하야토의 "고치카이" 파벌은 자유민주당에서 가장 강력한 파벌 중 하나였으며, 당내 좌파를 차지했다. 파벌 수장으로서는 마에오 시게사부로, 오히라 마사요시, 스즈키 젠코, 미야자와 기이치, 가토 고이치, 호리우치 미쓰오, 코가 마코토, 그리고 키시다 후미오가 차례로 계승했다.

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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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로사와 나오코(広沢直子)
사망1929년
| 오누키 미쓰에(大貫満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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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는 1927년 메이지 유신의 주역 중 한 명인 히로사와 사네오미(広沢真臣)의 손녀이자 히로사와 긴지로(広沢金次郎) 백작의 셋째 딸 히로사와 나오코(広沢直子)와 결혼했다. 나오코는 이케다가 투병 중이던 1929년 급사했다. 이후 이케다는 어머니 쪽 친척으로 의사의 딸인 오누키 미쓰에(大貫満枝)와 결혼해 세 딸을 두었다.

4. 주요 정책 및 업적

대장성 관료 출신인 이케다 하야토는 종전 직후 정계에 입문하여 요시다 시게루의 오른팔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요시다 내각외교, 안보, 경제 정책에 깊이 관여했다. 사토 에이사쿠와 함께 "요시다 학파"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보수 합동 이후에는 자민당 고케이카이의 수장으로 당파를 이끌었고, 1960년수상에 취임했다. 19세기에 태어난 마지막 수상이다.

이케다는 소득 배증 계획을 발표하여 전후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 발전에 가장 큰 역할을 수행했다.

이케다는 닷지 라인에 따른 긴축 재정과 재정 투융자 개시, 일본은행에 대한 영향력 확대, 통상산업성 발족, 쇼프 권고와 세제 개혁을 통해 일본 경제 정책의 기틀을 다졌다. 또한, 일본의 국제복구개발은행(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 가입을 성사시키고, 일미 안보 조약의 기초를 닦는 등 외교 정책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케다가 설립한 산업금융 시스템은 정부계 금융기관인 일본수출은행(수은)과 일본개발은행(개은)이다. 당시 일본의 재건을 위해 전력, 석탄, 해운, 철강 등 4대 중점산업에 대한 투자가 필요했지만, 민간은행은 자금이 부족하여 투자가 불가능했다. 이에 정부는 재정 여유 자금을 이들 분야에 중점적으로 배분하여 기간산업을 부활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1951년, 마사리카 마츠타로의 요청으로 일본 최초의 민영 텔레비전인 일본 텔레비전 방송망 설립을 위한 자금을 재계 인사로부터 조달했다. 같은 해, 일본의사회의 타미야 타케오 회장과 타케미 타로 부회장의 요청으로 건보의 진료수가를 대폭 인상하는 "의사 우대 세제"를 1954년에 도입했다.

1952년 8월, 이케다는 요시다와 비밀 회담을 거듭하여 깜짝 해산을 건의했다. 자유당 내에서 이 해산일을 알고 있던 것은 요시다와 이케다 외에 호리 마사시 내각관방장관과 아소 타카요시 두 사람뿐이었으며, 이들 역시 이케다가 나중에 알렸다. 오오노 반무츠 중의원 의장과 하야시 요지 자유당 간사장조차 몰랐다.

1952년 10월 30일 발족한 제4차 요시다 내각에서 이케다는 통상산업대신과 경제심의청 장관을 겸임했다. 이때, 전력 분할 민영화를 목표로 하는 마츠나가 야스자에몬이 미키 타카시, 미즈노 시게오, 쿠도 쇼시로 등 전력 통합파와 정부 위원회에서 대립했으나, 수적으로 불리하여 패배가 확정적이었다. 이에 마츠나가는 통상산업대신인 이케다에게 직접 면담을 요청했고, 이케다는 마츠나가의 열의에 감동하여 협력을 약속하면서 형세가 역전되었다. 이후 전력사업 재편성령 발령으로 분할 민영화(9전력 체제)가 이루어졌다. 이를 계기로 마츠나가는 이케다를 각별히 여기게 되었으며, 이들의 관계는 이후 수주화종에서 화주수종으로의 에너지 전환으로 이어졌다.

4.1. 경제 정책

이케다는 대장성 관료 출신으로, 요시다 시게루 내각의 경제 정책에 깊이 관여했다. 1960년 총리 취임 후, 소득 배증 계획을 발표하여 전후 일본 고도 경제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4.2. 외교 정책

이케다 하야토는 대장성 관료 출신으로, 요시다 시게루 내각에서 외교 정책에 깊이 관여했다. 1960년 총리 취임 후에는 소득 배증 계획을 통해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 닷지 라인과 긴축 재정
1949년, 조셉 닷지가 일본에 왔다. 이케다는 닷지와 여러 차례 협의를 거쳤다. 이케다는 적극적 재정정책을 계획했지만, GHQ의 지시에 따라 닷지의 초균형 재정 정책을 실행했다. 1950년도 예산은 수지 플러스 3억 엔의 초균형 예산이 되었다. 닷지 라인의 반동으로 디플레가 발생하고, 인원 감축으로 실업자가 늘어나 노동쟁의가 빈발했다. 닷지와 이케다는 공무원 대량 해고를 실행하여 인건비를 삭감했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 재정 투융자의 개시
1950년 6월, 이케다는 주택금융공사를 설립하여 정부계 금융기관 설립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1951년 4월, 대장성 예금부를 개편하여 자금 운용부를 설립하고, 재정 투융자를 시작했다.

; 일본은행에 대한 영향력 확대
1950년, 이케다는 이치만다 히사토시 일본은행 총재와의 논쟁에서 승리하여 대장성이 일본은행에 대해 압도적인 힘을 행사하게 되었다. 1956년, 야마기와 마사미치가 일본은행 총재가 된 후, 이케다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 통상산업성 발족
미국 대일 협의회(ACJ)의 드레이퍼 육군 차관은 이케다에게 수출을 통한 외화 획득을 설득했다. 1949년 5월, 상공성을 개편하여 통상산업성(현: 경제산업성)이 발족했다.

; 쇼프 권고와 세제 개혁
이케다는 쇼프 권고의 내용을 유연하게 해석하여 감세를 추진했다. 1949년도 추경예산에 약간의 감세를 닷지에게 인정받았다.

; 이케다에 대한 평가
이케다는 닷지 라인 실행 과정에서 중소기업 도산과 실업자 증가 등으로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닷지 라인 실현으로 대미 신용을 얻고, 정치가로서의 권력 기반을 형성했다. 닷지와 GHQ로부터 이케다에 대한 신뢰는 두터웠다.

4.3. 기타 정책

1950년, 도지 라인 완화 요구가 국민들 사이에서 커지면서 점령 정책 자체에 대한 불만으로 변질될 조짐이 나타났다. 이에 여론 악화를 우려한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이케다 하야토를 미국에 파견하여 재정 정책 전망에 대해 도지에게 타진하게 했다. 그러나 이케다의 방미 주요 임무는 강화 협상 관련 제안으로, 도지와 윌리엄 마커트 소장은 이케다를 강화 협상에 참여시킬 것을 제안했다. 당시 미국은 일본 점령의 경제적 부담으로 인해 군사적 요구가 충족된다면 강화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영어 미국의 재정·금융 상황, 세제, 과세 상태의 실태 연구라는 명목이었지만, 실제로는 강화·안보 문제를 타진하는 것이었다. 요시다 시게루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대한 임무를 띠고, 1950년 4월 25일 요시다의 특사 자격으로 하쿠슈지로, 미야자와 기이치 재무대신 비서관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케다는 전후 일본의 각료로서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이케다는 사이가 좋지 않은 하쿠슈지로와는 별도로 행동하며, 통역인 미야자와 기이치와 함께 관청과 공장을 시찰하고, 워싱턴 D.C.에서 도지 라인 완화를 요청했다. 또한, 가까운 장래의 일본 경제의 비약적 발전과 수출 진흥을 위해 수출금고(일본수출입은행) 설립 구상을 가지고 있었고,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를 방문하여 일본의 IMF 가입, 국제부흥개발은행(세계은행) 가입, 수은 창설 요청 등에 대한 논의를 거듭했다.

1951년 5월 3일, 이케다와 미야자와 기이치국무부에서 도지를 방문하여 요시다의 메시지를 구두로 전달했다. "일본 정부는 조기 강화를 희망한다. 강화 후에도 일본과 아시아 지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미군을 일본에 주둔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군 측이 제안하기 어렵다면, 일본 측에서 제안하는 형태로 해도 좋다…조약 체결의 전제로 미군 기지의 존속이 필요하더라도, 일본은 즉시 조약 체결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일미 안보 조약의 기초를 이루는 내용을 전달했다.

이러한 안보 조약적 구상 제안은 국무부의 입장을 매우 좋게 만들었으며, 버터워스 국무차관은 아치슨 국무장관에게 이를 전달했고, 아치슨은 이를 런던 외무장관 회의에 가져갔다.

귀국 후, GHQ를 제치고 이케다가 관리 급여 인상, 세금 감면 등을 워싱턴에 직접 전달한 것에 대해 GHQ 민정국(GS)의 휘트니 준장과 GHQ 경제과학국(ESS) 국장이었던 마커트 소장이 격분했다. 요시다는 이케다의 방미 성과를 참의원 선거에 이용하려 했으나, GHQ와의 갈등으로 인해 "선물은 없다"는 정부 성명을 발표해야 했다. 그러나 요시다의 노력으로 이케다가 주장한 정책들이 GHQ로부터 승인을 얻어, 이케다의 입장은 구제되었다.

이후 이케다는 요시다에 이은 2인자의 지위를 쌓았다.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조인되었는데, 이케다는 강화 회의에 참석한 전권 대표단의 멤버 중 강화 조약에 실질적으로 관여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5. 평가

이케다 하야토는 대장성 관료 출신으로, 종전 직후 정계에 입문하여 요시다 시게루의 오른팔로 두각을 나타냈다. 요시다 내각에서 외교, 안보, 경제 정책에 깊이 관여했으며, 사토 에이사쿠와 함께 "요시다 학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보수 합동 이후에는 자유민주당(자민당) 고케이카이의 수장으로 당파를 이끌었고, 1960년에 수상이 되었다. 그는 19세기에 태어난 마지막 수상이다.

이케다는 소득 배증 계획을 발표하여 전후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도지 라인에 따른 엄격한 금융긴축정책으로 어려움을 겪던 일본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1950년 6월, 주택금융공사를 설립하여 정부계 금융기관 설립의 계기를 마련했고, 1951년 4월에는 대장성 예금부를 개편하여 자금운용부를 설립했다. 이는 고도성장정책 추진에 있어 재정적 지렛대 역할을 한 재정투융자의 시초가 되었다.

1950년, 산업금융 방향을 놓고 이치만타 나오토 일본은행 총재와 큰 논쟁을 벌였고, 이케다가 승리하면서 대장성이 일본은행에 대해 압도적인 힘을 행사하게 되었다. 1956년, 이케다의 대장성 동기인 야마기와 마사미치가 일본은행 총재가 된 이후, 이케다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미국대일협의회(ACJ)의 드레이퍼 육군차관은 이케다에게 수출을 통해 외화를 벌어들일 것을 설득했다. 이케다는 달러 부족으로 면화 수입이 어렵다고 호소했고, 드레이퍼는 귀국 후 면화업자를 설득하여 일본에 면화를 보내도록 지시했다. 이로 인해 일본의 섬유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1949년 5월, 상공성을 개편하여 통상산업성(현: 경제산업성)을 발족시켜 섬유제품과 일용잡화제품의 미국 등지로의 수출 증대를 꾀했다.

이케다가 설립한 산업금융 시스템은 정부계 금융기관인 일본수출은행(수은)과 일본개발은행(개은)이다. 당시 민간은행은 자금 부족으로 전력, 석탄, 해운, 철강 등 기간산업에 투자하기 어려웠다. 이케다는 재정 여유 자금을 국가 요청에 따라 이러한 분야에 중점적으로 배분하여 기간산업을 부활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케다는 미국 국무성으로부터의 반환금과 정부가 운영하는 우편저금을 중요 프로젝트에 활용하고자 했다. 그는 수은과 개은 설립을 제안했고, 수은은 1951년 2월 1일에 영업을 개시했다. 개은 설립은 난항을 겪었지만, 1951년 4월에 설립되었다. 개은은 조정풀 역할을 수행하여, 실적이 호전된 산업으로부터의 회수금을 자금이 부족한 산업에 재대출했다.

1952년에는 이케다 주도하에 장기신용은행법이 성립되어, 구 특수은행이었던 일본흥업은행과 신설 일본장기신용은행이 장기금융을 담당하는 민간금융기관으로 다시 탄생했다. 이케다는 일본권업은행에서 권력 다툼에 패한 하마구치 간네를 장은의 2대 두취에 임명했다.

이케다는 세무 분야 출신으로, 본래 금융은 전문 분야가 아니었지만, 대미 협상이 결실을 맺고 금융 분야에서 예상치 못한 업적을 거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오테마치 주변은 내가 만든 은행뿐이다. 이케다 은행가가 되었구나"라고 자주 자랑했다고 한다.

1953년 자유당 정책조정회장에 취임하여, 미즈타 미키오, 마에오 시게자부로 등 정책 전문가들을 배치하여 "대정책조정회"라고 불렸다. 당시 부총리는 오가타 타케토라였지만, 이케다는 "또 다른 부총리다"라는 말까지 나왔다.

1953년 5월, 한국전쟁 휴전협정 전후로 MSA 문제가 불거졌다. 10월, 이케다는 요시다 개인 특사로 미국을 방문, 이케다-로버트슨 회담에서 재군비 협상(MSA 협정)을 진행했다. 이 협상으로 방위청 신설, 자위대 발족, 비밀보호법 제정 등 안보 정책이 추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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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는 요시다의 신임을 받았으나, 자신감 과잉으로 문제 발언을 연발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1950년 3월 1일 대장·통산대신 시절 "중소기업의 일부 도산도 어쩔 수 없다"고 발언했고, 12월 7일에는 "가난한 사람은 보리를 먹어라"고 발언하여 문제가 되었다. 점령군의 권위를 빌린 요시다 대변자라는 비판도 받았다.

1952년 11월 27일, 가토 간주(사회당)의 "중소기업 발언" 확인에 "경제 원칙에 위배되어 불법 투기를 한 사람이 도산해도 어쩔 수 없다"고 재차 발언, 다음 날 야당이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는 일본국 헌법하 유일한 각료 불신임이다.

5.1. 긍정적 평가

이케다 하야토는 1960년 안보 투쟁 당시 자유민주당(자민당) 내부의 격렬한 파벌 싸움 속에서 거의 붕괴될 뻔했던 일본 정치의 "1955년 체제"를 안정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케다의 "저자세"와 화해 정치는 당내 파벌을 제어하고 야당과의 당 간 갈등을 줄여 이후 대규모 의회 외 거리 시위를 막는 데 기여했다.

이케다는 자민당을 다양한 이해 집단의 표를 얻어 압도적인 다수 의석을 확보할 수 있는 안정적인 "큰 텐트" 정당으로 만들었고, 동시에 그러한 다수 의석을 이용하여 인기가 없는 정책을 강행하지 않았다. 특히 이케다가 자민당 보수파의 오랜 숙원이었던 헌법 개정을 포기한 것은 미국 패권 아래 일본의 안정적인 보수 정권 수립에 길을 열었고, 야당인 일본 사회당의 쇠퇴를 가져왔다.

이케다의 소득 배증 계획 또한 큰 성공을 거두어 일본의 전후 "일본의 경제 기적"의 수명을 크게 연장하는 데 기여했다. 당초 계획의 목표 성장률은 연 7.2%였지만, 1960년대 중반에는 일본의 GDP 성장률이 11.6%에 달했고, 10년 동안 평균 10%를 웃돌았으며, 7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경제 규모가 두 배로 증가하는 목표를 달성했다.

이케다의 소득 배증 계획은 "경제 성장주의를 일본 국민과 정부의 일종의 세속 종교로 확립하여 정부의 효율성과 국민의 가치를 GDP 연간 변화율로 측정하는 상황을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본 경제학자 나카무라 다카후사는 "이케다 하야토는 일본의 급속한 경제 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경제 성장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그 목표 달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대장성 관료 출신으로 종전 직후 정계에 입문하여 요시다 시게루의 오른팔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요시다 내각의 외교·안보·경제 정책에 깊이 관여했다. 사토 에이사쿠와 함께 "요시다 학교"의 핵심 인물이었다. 보수합동 이후에는 자민당 굉지회의 수장으로 당파를 이끌었고, 1960년에 수상이 되었다. 19세기에 태어난 마지막 수상이다.

소득 배증 계획을 발표하여 전후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 발전에 가장 큰 역할을 수행했다.

5.2. 비판적 평가

역사학자 닉 카푸르는 이케다 하야토가 1960년 안보 투쟁 당시 자유민주당(LDP) 내부의 격렬한 파벌 싸움 속에서 거의 붕괴될 뻔했던 일본 정치의 "1955년 체제"를 안정시킨 인물로 평가한다. 이케다의 "저자세"와 화해 정치는 당내 파벌을 제어하고 야당과의 당 간 갈등을 줄여 향후 대규모의 의회 외 거리 시위를 막는 데 기여했다. 이케다는 자유민주당을 다양한 이해 집단의 표를 얻어 압도적인 다수 의석을 확보할 수 있는 안정적인 "큰 텐트" 정당으로 만들었고, 동시에 그러한 다수 의석을 이용하여 인기 없는 정책을 강행하지 않았다. 특히 이케다가 자유민주당 보수파의 오랜 숙원이었던 헌법 개정을 포기한 것은 미국 패권 아래 일본의 안정적인 보수 정권 수립에 길을 열었고, 야당인 일본 사회당의 쇠퇴를 가져왔다.

이케다의 소득 배증 계획 또한 놀라운 성공을 거두어 일본의 전후 "일본의 경제 기적"의 수명을 크게 연장하는 데 기여했다. 당초 계획의 목표 성장률은 연 7.2%였지만, 1960년대 중반에는 일본의 GDP 성장률이 11.6%에 달했고, 10년 동안 평균 10%를 웃돌았으며, 7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경제 규모가 두 배로 증가하는 목표를 달성했다. 카푸르에 따르면,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이케다의 소득 배증 계획이 "경제 성장주의를 일본 국민과 정부의 일종의 세속 종교로 확립하여 정부의 효율성과 국민의 가치를 GDP 연간 변화율로 측정하는 상황을 초래했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일본 경제학자 나카무라 타카후사(Takafusa Nakamura)는 "이케다 하야토는 일본의 급속한 경제 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경제 성장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그 목표 달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5.3. 실언 문제

이케다는 잦은 실언으로 대중의 반감을 샀던 경험을 바탕으로, 대중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이후 대중을 위한 봉사 정신을 길렀다.

5.4. 조선비리사건 연루 의혹

이케다는 쇼와덴코 사건으로 인해 경제안정본부가 감독하던 부흥금융금고를 대장성 지도로 이관했다.

6. 한국과의 관계

이케다 하야토는 이전 총리들과 달리 경제 정책을 전면에 내세워 "소득 배증 계획"을 추진,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이는 한국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쳐, 경제 협력을 통해 양국 관계 개선을 시도하는 바탕이 되었다.

6.1. 박정희와의 관계

이케다 하야토는 박정희와의 관계에서 경제 협력을 중시했다. 그는 이전 총리들과 달리 경제 정책을 전면에 내세웠고, "소득 배증 계획"을 통해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이러한 경제 중심 정책은 한국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쳐, 경제 협력을 통해 양국 관계를 개선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6.2. 한일 국교 정상화

이케다는 외교 면에서도 일본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도지 라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일미 안보 하의 협상을 거쳐 이케다·로버트슨 회담, 이케다·케네디 회담을 통해 오늘날의 미일 관계를 형성한 핵심 인물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드 골 대통령에게 "트랜지스터 세일즈맨"이라고 조롱받았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이는 이케다가 소니의 최신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정상회담에서 판촉한 것에 대해 드 골이 측근에게 말한 것을 반 드 골파 신문인 『피가로』가 기사화했고, 이것이 일본 신문에 소개되면서 알려졌다. 이케다의 귀국 후 일본에서 큰 논란이 되었고, 많은 일본인들은 불쾌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케다는 "회담 내용도 모르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가"라고 일축했다. 『피가로』는 존 F. 케네디를 "닭고기 세일즈맨"이라고 평가한 적도 있어 일본이나 이케다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하치만 카즈로는 "당시에는 정상이 경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드물었기 때문에 드 골도 놀랐던 것이며, 그 후 프랑스의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은 경제를 주제로 한 서밋(선진국 정상회의)을 시작하여 일본을 회원국으로 만들었고, 미테랑이나 시라크는 "에어버스의 세일즈맨"으로서 몇 대를 팔았는지를 해외 방문의 성과로 자랑했다. 경제 외교 중시는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그 후 큰 흐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케다는 세계 외교사에서 선구자이며, 세계사적 위인이다"라고 평가했다. 이케다의 경제 우선적인 사고방식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일본이 경제 대국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도 "요시다 독트린"이라기보다는 "이케다 독트린"의 산물이라고도 한다. 1965년, 제자 이케다의 사망 소식을 접한 요시다 시게루는 "오늘날의 번영은 이케다 씨에게 많이 빚지고 있다"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시모무라 오사무는 이케다 사망 다음 날 닛케이 신문에 추도문을 보내 "이케다 하야토가 수행한 역사적 역할은 일본인이 내면에 간직하고 있던 창조력, 건설력을 '성장 정책'이라는 수단을 통해 이끌어내어 꽃피게 한 것이다"라고 썼다.

7. 기타

이케다는 도지 라인 이후 염원하던 국내 경제 산업 체제의 재편과 자유화를 "일내각일사업(一内閣一仕事)"으로 완수했다. 이케다 내각 이후 자민당 정권의 정치·외교 운영은 이케다가 구축한 국내 안정과 국제적 지위를 기반으로 전개되었다. 헌법 개정을 사실상 보류하고 경제 성장과 풍요 추구를 최우선으로 했기에, 이케다 이후의 자민당 정권은 전후적 가치관을 공유하며 장기 집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케다는 전후 일본의 원형을 국내 경제 정책과 경제 외교 양면에서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고도 경제 성장은 이케다의 경제 정책을 계승한 사토 에이사쿠 내각 시대에 최전성기를 맞지만, 사토 정권도 이케다 정권이라는 큰 괄호 안에 들어온다고도 평가받는다. 사토 역시 이케다처럼 은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이는 1970년대 다나카 가쿠에이후쿠다 다케오1980년대에도 온화한 영향력을 가진 것과 대조적이다. 고도 경제 성장과 함께 패전과 점령의 잔재를 최종적으로 청산한 것이 이케다와 사토라고 할 수 있다. 이케다와 사토 시대에 자민당 정권은 안정 속에서 성숙을 이루었다.

도쿄 올림픽과 오사카 만국 박람회를 통한 대도시권 개발, 공공 사업을 통한 국토 정비로 자민당은 포괄 정당의 길을 걸어갔다. 「55년 체제」는 1955년에 성립되었지만, 그 확립은 1960년대 전반 이케다 내각에 있었다. 일본 국내 정치의 기본적인 틀을 만들어낸 것이 이케다였다. 이 전략은 다나카 가쿠에이, 오히라 마사요시, 스즈키 젠코, 나카소네 야스히로 등 이후 내각에도 계승된다.

"이케다 시대에 경제 발전을 국가 목표의 중심에 둔 정치가 시작되었다. 다나카 가쿠에이는 그 자식이다", "다나카의 『일본 열도 개조론』은 이케다의 『소득 배증 계획』의 연장선상에 있다", "『일본 열도 개조론』은 『소득 배증 계획』의 지방판"이라는 평가가 있다. "『일본 열도 개조론』이나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뼈대 있는 정책』도 이케다의 정치 수법을 본뜬 것"이라고 평가되며, 이케다 이후 등장한 정권의 대부분은 이념 없이 무분별한 고도 성장을 추구했다는 평가도 있다.

경제 성장에 따른 사회 다양화는 자민당 내에서는 당내 파벌 분산화에 그쳤고, 야당은 다당화함으로써 자민당 지배를 유지하게 되었다. 다나카 히로시는 "이케다 내각 등장 이후, 일본 정치는 거의 '사건 없기를 바라는 주의(事なかれ主義)'를 목표로 하는 안전 운전, 무풍 상태가 계속되어, 보수의 안정화(자본주의 체제 확립화)의 길을 걷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 시기에 파벌 정치가 확립되고, 각료와 국회, 당내 주요 직책을 당선 횟수에 따라 배분하는 제도화도 진행되었으며, 의원 개인 후원회가 보급되고 2세 의원이 증가했다. 고케이카이의 후배인 고가 마코토(제7대 회장)는 이케다를 "정치가로서 현재의 자민당의 기초를 확립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7.1. 저서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이케다 하야토의 저서에 대한 내용이 없으므로, 이 섹션은 비워두는 것이 적절합니다. 따라서 이전 출력 결과는 정확하며 수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7.2. 어록

* 所得倍増일본어이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을 공감하게 하고 자신감을 주었으며, 일본의 경제력을 신장시켰다. 도시의 광공업 부문 소득 증가는 점차 각 계층으로 파급되었고, 농촌의 젊은이들이 도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인력 부족 현상이 나타나면서 일본에서는 완전 고용이 불가능하다는 체념이 사라지고, 사회에는 밝은 힘이 넘쳐났다.
* "국민소득배증론"은 면밀한 통계와 숫자에 기반한 정책 체계였지만, 그 이면에는 전후 복구를 마치고 새로운 일본의 길을 모색하며 사회를 번영시키고 국민 생활을 풍요롭게 하려는 이케다의 의도가 있었다. 쇼와일본어 30년(1955년) 무렵 재정 규모는 약 1조 엔이었으나, 이케다는 대장성 장관으로서 적극적인 예산을 편성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국민에게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스스로 벌어들이는 소득을 늘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득', '배증', 상세하게 계산된 숫자 등은 경제지상주의나 물질만능주의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원점에는 물건으로는 잴 수 없는 '마음'과 정치철학으로서의 목표가 있었다.
* 이케다는 젊은 기자들에게 "그대들이 정년을 맞이할 무렵(1985년 무렵)에는 일본의 자동차는 반드시 유럽과 미국 시장에서 환영받게 될 것이다. 일본인은 근면하고 교육 수준이 높으며, 100년, 200년 전부터 많은 분야에서 경쟁하며 고도의 일을 해 온 국민이다. 이렇게 뛰어난 일본인을 잘 이끌어 목표를 제시하면 반드시 유럽과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다. 이를 증명하면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뒤따를 것이다. 이것이 일본과 아시아 정치가의 사명이다"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 "소득 배증 계획"은 놀라울 정도로 성공하여 국민들이 풍요로운 생활을 추구하며 노력하는 상황이 나타났다. 경제 발전은 국민 사이에 존재하는 유일한 컨센서스였다. 경제 문제는 계량 가능한 것이 많아 이데올로기나 가치 대립에 시달리는 일이 적다. 경제 문제는 가치 중립적인 기술적인 말로 논의할 수 있다. 1960년대부터 수년간은 경제 발전과 경제 발전이 국민 생활을 행복하게 한다는 두 가지 낙관주의로 특징지어지는 특이한 시기로 일본 역사에 남을지도 모른다. 이케다가 경제 중심주의를 국민에게 뿌리내리게 한 성과는, 국민소득과 같은 말이 일본인이 정치를 말할 때 공통의 말이 되게 했다. 요시다 시게루에 의해 국가 정책으로 자리 잡은 경제 중심주의는 이케다에 의해 정착되어 일본의 새로운 국가 이성이 되었다. 이케다는 "소득배증계획"을 예상 이상으로 성공시켜 국제 경제에서 일본의 위치를 확립했고, 급속한 경제 발전은 일본인의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 이케다 내각은 경제 성장, 소득 배증, 월급 두 배라는 내셔널·컨센서스를 확립하여 안보 소동의 혼란을 수습했다. 외교, 방위, 치안과 같은 문제가 아니라 소득 배증이라는 경제 생활 문제로 국민 통합을 실현한 것은 일본 정치의 획기적인 전환이었다. 이후 일본 정치의 중심 문제는 고성장, 저성장, 적자 재정, 재정 재건과 같은 경제 문제에 집중될 것이며, 이는 경제 테크노크라트 주도형 정치의 개막이기도 했다. 전후 의회 정치 드라마의 주제 A는 경제 성장이었고, 수출 주도형 경제 성장에 따라 GNP가 커지면서 재정 규모도 커졌다. 재정을 채널로 활용하여 공공 사업비, 교부금, 보조금을 통해 전국적인 부와 문명의 분배가 정치 드라마의 주제 B로 성립되었다. '현지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은 직업 정치가의 일이다'와 같은 오늘날의 정치 상식이 확립되었다.
* 1959년 12월 3일, 이케다의 환갑 축하회가 도쿄 마루노우치의 도쿄가이칸에서 개최되었다. 교도통신, 산케이 신문, 마이니치 신문, 일본경제신문 등 언론계 인사들이 주최하고, 재계 인사가 아닌 언론계 원로들이 발기인을 맡은 것은 이례적이었다. 이케다는 "다음에 올 일본의 10년간은 일본인이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풍요로운 시대가 될 것이며, 일본 경제는 전례 없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룰 것이다"라고 말했다.

7.3. 가족 및 친인척

이케다는 1927년 메이지 유신의 주역 중 한 명인 히로사와 사네오미(広沢真臣)의 손녀이자 히로사와 킨지로(広沢金次郎) 백작의 셋째 딸 히로사와 나오코(広沢直子)와 결혼했다. 나오코는 이케다가 투병 중이던 1929년 급사했다. 이후 이케다는 어머니 쪽의 친척으로 의사의 딸인 오누키 미츠에(大貫満枝)와 결혼했고 세 딸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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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나오코
키코
쇼코


히로시마현 도요타군 요시나촌(현 타케하라시)에서 아버지 이케다 고이치로, 어머니 우메 사이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